[성경. 시편 19편] 하나님의 율법(교훈)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는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는 의의 자리에까지 인도해 주지는 못하지만, 현재의 자리가 잘못된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해준다. 복음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정리1]


1. 우주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영광(1-6절)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절. 언어도 없고 / 말씀도 없으며 /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절.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6절)


: 만물의 섭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 만물에 하나님의 음성은 없지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2.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지혜(7-11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원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말미암아(율법) 내가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내가 얻는 상이 크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며 운행하신다.(만물에게 질서를 부여하시고) 그리고 그 원리를 기초로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어 그것으로 가르치고 훈계하신다. 따라서 그의 법을 지키는 자는 상을 얻는다. 


3. 누가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있는가?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소서.(12-14절)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절.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없는데,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숨은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허물이란, 고의로 죄를 짓거나 죄가 나를 주장하게 하여 큰 죄과를 짓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다. 


  14절. 나의 반석이시요  /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정리2]


1.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2.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과 계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그것은 귀한 것이다.(만물의 질서를 기초로 한 인생들의 지혜) 


3. 가장 직접적인 적용은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고의로 죄를 짓기도 하고 죄가 나를 주장하도록 방치하는 어리석음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율법은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로 인해 우리가 돌이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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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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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3편] 우리가 하나님과 함께 있으면서 많이 하게 될 말 중에 하나가 "할렐루야"보다는 "어찌하여"일 것이다. 그리고 "어느 때까지"일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자연스러움이고 성숙으로 가는 과정이다. 거기에서 자신의 한계와 복음, 그리고 은혜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주님도 마지막 순간,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말씀하셨다. 


[정리1]


1. 시편 기자의 탄식

  1절.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원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어느때까지 숨기시겠나이까?


  2절. 나의 영혼이 번민하고 종일토록 마음에 근심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오며

내 원수가 나를 치며 자랑하기를 어느 때까지 하리이까?

: 시편 기자는 고통의 끝을 보지 못하고, 앞으로도 얼마나 더 참고 기다려야만 하는 것인지 가늠하지 못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어느 때까지입니까? 고통의 원인자(원수)에 대한 신원이 아니라, 자신의 신앙의 대상인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탄식이며 불평이라 볼 수 있겠다. 


2. 시편 기자의 간구

  3절.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나를 생각하사 응답하시고 나의 눈을 밝히소서

두렵건대 내가 사망의 잠을 잘까 하오며

두렵건대 나의 원수가 이르기를 내가 그를 이겼다 할까 하오며(4절)

나의 대적들이 기뻐할까 하나이다.

: 이런 식으로 더 가다가는 자기 자신도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자신이 죽을 지경이라는 말이기도 하면서, 결국 자신이 넘어지게 될 것이라는 너무 뻔히 보이는 상황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믿음을 견고하게 해달라고, 지켜달라고 요청하지 않았다. 자신이 포기할 것 같다고, 질 것 같다고 토로하고 있다. 그래 참된 신앙과 기도란 바로 자신의 연약함에 대한 토설이다. 그 토설이 받아들여지는 것이 기독교다. 


3. 시편 기자의 의지

  5절. 나는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였사오니

나의 마음은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6절. 내가 여호와를 찬송하리니 이는 주께서 내게 은덕을 베푸심이로다. 

: 시편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한다고 했다. 그것이 더 늦기전에 도와주실 하나님을 의지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포기하고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으켜 세워주실 하나님의 사랑을 믿는 다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후자의 개념도 있으리라 본다. 



[정리2]


1. 하나님은 우리의 기대보다 늦게 혹은 훨씬 늦게까지 내버려 두신다.

  우리가 생각한 최선을 다하고, 우리가 기다릴 수 있는 지점까지 힘들게 참고 갔더라도, 하나님은 그곳에서도 아무 말씀이 없으실 수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2. 그래서 우리는 견딜 수 없어, 실패하거나 배신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될 수도 있게 된다.

  우리 힘으로만은 견딜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심지어 사망에 이르게 되는(배신과 실패의 자리에 이르게 되는) 지경까지 갈 수도 있다. 다만,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우리의 무력함을 하나님께 도와 달라고 요청할 뿐이다. 


3. 그래서 우린 오직 주의 사랑을 의지하게 된다. 

실패하거나 배신하지 않는 사랑이 아니라, 실패와 배신 속에서도 사랑으로 다시 세워주시는 하나님을 의지한다. 이것이 복음이며, 은혜며 하나님의 구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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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사기 11장] 입다에 대한 이야기 속에서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는 자기 백성들에게 버림 받았다가 구원자로 다시 부름을 받았고, 사사 시대에는 여호수아와 그 시대의 장로들이 죽은 후에 하나님과 하나님이 행하신 일을 아는 자가 없다고 했는데, 입다는 과거 이스라엘 가운데 역사하신 내용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인물로 등장한다. 또한 그는 자신의 생명과도 같은 무남독녀를 자신이 서원한대로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들이게 되는 운명을 가지게 된다. 이런 사사의 독특성을 통해서 성경은 우링게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했을까? 우리는 생각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이스라엘을 암몬의 손에서 건져낸 사사 입다의 배경 설명

  1) 길르앗 사람이 기생에게서 나은 자식으로 큰 용사였다. 그 길르앗 사람의 아내에게도 자식들이 있었는데, 그 자식들이 기생에게서 난 형제 입다에게는 기업을 주지 않으려고 좇아냈고 입다는 돕 땅에 거주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주위로 잡류들이 그들에게 모였다. 

  2) 얼마 후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하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찾아가 자신들의 장관이 되어 달라고 한다. 

  3) 입다는 전에는 너희들이 나를 미워하며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더니 이제 환란을 당한다고 나를 부르니 말이되느냐? 라며 거절했으나 장로들은 입다에게 당신이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면 길르앗 모든 주님의 머리가 될 것이라고 제안했다. 입다는 그 제안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확인하고 그들에게로 갔다. 


2.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입다의 행적

  1) 입다는 먼저 전쟁을 치르기 전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무슨 이유를 이 땅을 치러왔는지 묻는다. 

  2) 암몬 자손의 왕은 이 땅은 너희들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빼앗은 것이니 돌려달라는 것이었다.(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의 땅) 

  3) 입다는 이스라엘이 모압 땅과 암몬 자손의 땅을 점령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1)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올라올 때에 에돔 땅을 통과하려 했으나 못하게 하였고, 그래서 모압 땅을 통과하려고 사람을 보냈으나 모압 왕도 허락하지 않아 이스라엘이 가데스에 머물러 있었다. 그 후에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 에돔 땅과 모압 땅을 돌아 모압 쪽으로 들어가는 아르논 저쪽에 진을 쳤으나, 아르논은 모압의 경계이므로 모압 안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2) 그 후에 이스라엘은 헤스본 왕 곧 아모리 족속의 왕 시혼에게 사자들을 보내어 그들의 땅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했으나 오히려 이스라엘을 치려함으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시므로 이스라엘이 그들을 쳐서 아르논에서부터 얍복까지와 광야에서부터 요단까지 아모리 족속의 온 지역을 점령한 것이다. 여호와께서 이와같이 아모리 족속을 쫓아내셨는데, 네가 그 땅을 얻고자 하는 것이 말이 되는가? 

   (3) 네가 모압의 왕 발락보다 더 나은 것이 무엇이 있느냐? 그가 이스라엘과 싸운 일이 있느냐? 없다. 이스라엘이 이 곳에 거주한 것이 300년이 지났거늘 너희가 찾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우리가 너희들에게 잘못한 것도 없는데 도로 찾겠다고 하니 우리에게 왜 악을 행하는가? 하나님께서 너희와 우리 사이에 판결해 주실 것이다. 


  4) 설득에도 넘어가지 않자 입다는 전쟁을 시작하는데 여호와의 영이 입다에게 임했다. 

   (1) 입다는 여호와께 서원하여 암몬 자손을 넘겨 주시면, 자신이 평안이 돌아올 때 나늘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한다. 

   (2) 입다가 암몬 자손과 싸우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입다의 손에 넘겨 주었다. 암몬이 항복함.


3. 입다가 승리하고 돌아오면서 생긴 일

  1) 입다가 승리하여 미스바에 있는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의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였는데, 그는 무남독녀였다. 

  2) 입다는 이로 인하여 고통스러워하고, 그 딸은 아버지가 서원하였으니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라고 말한다. 

  3) 그 딸은 두 달간의 시간만 자신에게 달라고 하고, 두 달동안 자신이 처녀로 죽게 된 것에 대한 애곡을 친구들과 하고 돌아왔다. 

  4) 입다는 자기가 서원한대로 딸에게 행했다. 

  5) 그 이후로 이스라엘의 관습이 되어 이스라엘의 딸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였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풀어서 쓰기]


11장에서는 사사 입다에 대한 본격적인 이야기가 나온다. 입다는 길르앗이 기생을 통해 낳은 아들이다. 그는 큰 용사였으나 원래 부인을 통해서 나은 아들들이 입다에게 기업이 없다고 하고 그를 길르앗에서 쫓아냈고 그는 하는 수 없이 돕 땅에 거주하며 살게 된다. 그런데 입다 주변으로 여러 잡류들의 사람들이 모이게 된다. 


그러던 중 암몬 자손들이 이스라엘을 치려고 하자 위기 의식을 느낀 길르앗의 장로들은 쫓아 버렸던 입다를 다시 불러올 것을 결정하여 입다를 찾아간다. 입다는 처음에는 거절하였지만, 그들이 길르앗을 머리로 삼겠다는 제안까지 하자 그것을 받아들이고 그들에게로 간다. 


입다는 먼저 암몬 자손의 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왜 이 땅을 치고자 하는지 묻는다. 암몬 자손은 이 땅(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의 땅)이 원래 자기네 땅이었는데 너희 이스라엘이 빼앗은 것이기에 도로 찾으려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입다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역사적 이야기를 통해서 말한다. 

이스라엘 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아르논 지역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곳은 모압의 경계였지 모압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니었다. 너희들이 말하는 아르논에서 얍복과 요단까지의 땅이라는 것도 아모리 족속의 땅을 점령해서 얻은 것이지 너희들의 땅이 아니었다. 지난 300년 동안 이곳을 점령하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 땅을 도로 찾겠다고 한 적이 없지 않은가? 라는 말로 암몬 족속의 왕을 설득하려고 했으나 암몬 족속은 설득되지 않았고 전쟁은 발발하게 되었다. 

입다는 이 전쟁에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해주시면 평안이 돌아올 때 자신을 처음으로 맞는 이를 번제물로 드리겠다고 서원했다. 입다는 암몬 족속과의 전쟁에서 승리했고 돌아오는 과정에서 자신의 무남독녀인 딸이 자신을 처음으로 맞는 일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입다는 고통스러워 한다. 입다의 딸은 자신의 운명이 안따까우면서도 자신의 아버지가 한 서원대로 하나님께 행하도록 말하고, 두 달의 말미를 얻여 여자들과 함께 자신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의 몸으로 죽게 된 것을 슬퍼하고 돌아온다. 그리고 서원대로 행해진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관습이 되어 해마다 입다의 딸을 위해 나흘씩 애곡하는 일이 생기게 되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입다는 출생이 미천했고, 사람들에게 버려진바 되었던 사람이었다. 그가 구원자다.




2. 입다는 이스라엘의 역사(하나님이 하신 일)를 구체적으로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다. 

   사사 시대에는 그와 같은 사람들이 없었다고 했는데.... 입다는 과거 조상의 일들을 잘 알고 있었다. 



3. 입다는 자신의 서원대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무남독녀인 딸을 번제물로 바치는 일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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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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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말씀은 종이 책의 형태로 2500년 이상 전달되어 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그 말씀이다.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한 필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스타워즈>도 <타이타닉>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영화였다. 이 영화의 영어 번역문은 GNB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대학생 선교단체인 CCC의 창립자 빌 브라이트가 프로듀서이자 연예계 기업가인 존 헤이맨을 만나서 서로 손을 잡고 누가복음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었다.(본래는 성경 전체를 활동사진으로 만드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500명의 학자들이 역사적인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참여했고,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촬영도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1979년에 상영된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1980년에 CCC의 한 부서인 <예수> 영화 프로젝트가 그것을 다른 언어들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천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는 카라칼팍어(우즈베키스탄), 파르시어(이란), 쇼나어(짐바브웨), 다니어(인도네시아), 쉬피보-코니보어(페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인 수십 억의 사람들이 시청한 바 있고, "남녀노소를 다 합하여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이 모두 2억 2,500만도 넘는다"고 한다.

....(일화중에 하나)

한 선교사 부부가 페루의 어떤 마을에서 그 영화를 보여주려고 가던 도중에 테러리스트들에게 가로막혀 영사기와 필름을 빼앗겼다. 나중에 이들 중 한 명이 그 부부를 찾아서 말해주기를, 테러리스트들이 무척 지루해 그 필름을 일곱 차례나 본 뒤에 그 자신을 비롯한 몇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영화야 말로 역사상 가장 널리 유통된 성경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p215,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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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교회와는 달리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성경공부를 장려했기 때문에 1900년에 이르기까지 성경의 일부를 이미 500개에 가까운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했던 터였다.(p209)

1900년에 이미 500개에 가까운 언어와 방언으로 번역이 이루어졌다니... 교통과 통신 그리고 장비의 부족함에도 이런 성과가 나올 수 있다는 것은 성경을 그들의 말로 읽게 해야 한다는 열정(복음과 성경에 대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성경을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 주고 싶은 복음의 열정... 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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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성경의 65번째 책인 유다서에 도달했네요. 암튼, 더디가도 꾸준히 하면 가긴 가는것 같습니다. 바로 이어서 계시록으로 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여기까지는 해 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의 정리]

1. 야고보의 형제인 유다가 부르심을 받은 자(하나님 안에서 사랑을 얻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지키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한다.

2. 유다가 편지를 쓴 목적
  1)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도록 격려하기 위해서 편지를 쓴 것이다.
  2) 이는 공동체 안에 가만히 들어온 몇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1) 그들은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2)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다.

3. 유다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를 다시 생각나게 하고자 편지를 썼다.
  1) 하나님은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여 내신 후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을 멸하셨다.
  2) 천사들 중에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들을 큰 심판의 날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둠
  3) 소돔과 고모라도 그 이웃 도시들도 그들과 같은 행동으로 음란하며 다른 육체를 따라가다가 형벌 받음.
   :  그것이 거울이 되었다. 
 
  [경계해야 할 이 사람들에 대해서]
   (1) 그런데 꿈꾸는 이 사람들도 그와 같이 육체를 더럽히며 권위를 업신여기며 영광을 비방한다.
     : 천사장 미가엘도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감히 비방하는 판결을 내리지 못하였는데... (아래 내용으로 수정합니다. 13.05.15)

     [김백합님의 수정요구로 수정됨]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해서 비방을 하지 않은게 아니라

   누가 모세의 시체를 가져갈 것인지 마귀랑 변론할 때에 감히 마귀에게조차도 비방하는 말을 하지않았고 다만 "주님께서 네게 벌을 내리실 것이다(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했다는 말 같은데요


   (2) 이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한다.
     : 따라서 이들은 이성없는 짐승 같이 본능으로 아는 그것으로 멸망하느니라. 
   (3)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로 행하며, 삵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가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4) 이 사람들은
     너희의 애찬에 암초요, 자기 몸만 기르는 목자요, 바람에 불려가는 물 없는 구름이요, 죽고 또 죽어 뿌리까지 뽑힌 열매 없는 가을 나무요, 자기 수치의 거품을 뿜는 바다의 거친 물결이요 영원히 예비된 캄캄한 흑암으로 돌아갈 유리하는 별들이라.
   (5) 아담의 7대손 에녹은 이 사람들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예언했다.
    : 주께서 경건한 자들과 함께 임하셔서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불경건한 행동과 불경건한 말을 정죄하리라.
   (6) 이 사람들은
    원망하는 자며, 불만을 토하는 자며 그 정욕대로 행하는 자라.
    그 입으로 자랑하는 말을 하며 이익을 위하여 아첨하느니라.

4. 사도들의 권면을 잊지 말라
  1) 마지막 때에 자기의 경건하지 않은 정욕대로 행하며 조롱하는 자들이 있으리라.
  2) 이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자며, 육에 속한 자며 성령이 없는 자니라.
  3) 너희는 지극히 거룩한 믿음 위에 자신을 세우며
     성령으로 기도하며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자신을 지키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리라.(영생에 이르도록)
  4) 어떤 의심하는 자들을 긍휼히 여기라.
  5) 어떤 자를 불에서 끌어내어 구원하라.
  6) 어떤 자를 그 육체로 더럽힌 옷까지도 미워하되 두려움으로 긍휼히 여기라. 
 
5. 인사: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주.

[정리2. 본문 내용의 재정리]

유다서의 목적은 성도들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도록 하기 위함이다. 왜냐하면 공동체 안에 악한 마음으로 가만히 들어오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어 버린 경건하지 않은 자들이다. 예수의 육체로 오심을 부인하는 자들이다.


이와 같은 자들은 자고로 공동체 가운데 분리되어 심판을 받았다.(출애굽 백성들 중에도 있었고, 천사들 중에도 있었고, 소돔과 고모라의 백성들 중에도 있었다.)
이들은 육체를 더럽히는 자들(방탕한 삶)이고, 교회의 치리를 받지 아니함으로 권위를 업신 여기는 자들인듯 하다. 그리고 함부로 비방하여 가인의 길로 혹은 발람의 길로 가는 자니 결국은 멸망에 이를 것이다. 이들은 공동체의 암초요 삯꾼이요 열매없이 껍데기에 불과한 사람이라 뿌리까지 뽑힌 나무에 불과하다.
성도들은 마지막 때에 사도들이 일찌감치 일러준대로 이런 사람들을 경계하고, 거룩한 믿음과 사랑, 그리스도의 긍휼을 기다림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힘쓰라.

주님은 너희를 능히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그 영광 앞에서 흠이 없이 기쁨으로 서게 하실 분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4절)

바울은 주로 율법주의자와 논쟁하면서 사역을 했고, 또 그들을 대항하며 편지들을 작성했다는 것을 그의 서신서들을 통해서 보게 된다. 반면 재미있게도 히브리서 이후로 나오는 야고보서부터는 율법적인(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을 강조하는 내용들이 이어진다. 베드로의 서신도 그렇고 요한의 서신은 교회를 힘들게 했던 이단에 대한 경계를 다루는데, 이 이단이라는 것은 <육체를 방종하게 했던> 이단으로 보여진다. 유다서도 마찬가지 이단에 대한 이야기인데 여기서는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는 자>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들을 이단으로 보고 이들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는 것이 히브리서 이후 서신들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바울은 율법주의자(행위 구원)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서의 구원>을 강조했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던 무리중 독버섯이 자랐다. 바로 <은혜를 빙자하여 방탕한 삶을 합리화하는 사람들>이 생겨난 것이다. 성경은 이들에게 대해서 <이단>이라고 규정하고, 이들은 사망에 이르는 죄인이라고 규정한다.(요일 5장) 이들과는 상종하는 것이 아니라 명백하게 구분되어야 함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은 언제나 특정 정황 속에서 확인되어야 한다. 우리는 너무 바울의 서신의 입장에서만 복음을 배워온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본다. 야고보나 베드로나 요한, 유다의 서신들도 열심히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선포하고, 그 은혜의 복음을 왜곡시킨 이단들을 경계함으로 복음의 본질을 잊지 않게 하고 있는데 말이다. 바울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바울의 신학 만이 신학의 전부인것처럼 가르치고 배웠던 것도 불완전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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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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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가 역시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단락별로 정리는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가면서 하는 것은 쉽지 않네요. 그래서 다른 성경에 비해서 제 개인적인 해설(주관적일수 있는)이 많이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해설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처음부터 정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일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약 60점 이상만 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해야 나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큰 테두리(정통교리)에서 어긋나지 않는 정도 선에서 해설을 해보려고 합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단락별로 정리하는 것]

1. 요한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1)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가 아니라, 죄를 행하고도 죄로 알지 못하는 상황(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행하는 상황. 1:6)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왜냐하면 1,2절에서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과 대언자이신 예수님이 있음을 강조함.
  3) 그와 같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무감각하게) 율법을 어길 수 있는가? 그 분이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하려고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죄를 짓지 않는 경향성으로 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2.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 새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이다.
  2) 새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3)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너희에게 이런 빛이 있으니 깨달으라)
  4) 너희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12절)/ 하나님을 알고, 악한 자를 이기었다.
  5) 세상의 가치관(어두움에 빠뜨리는)을 사랑하지 말고, 따르지 말라.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3.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니 그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 
  1) 그들은 우리 안에서 나간 자이나,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그들은 처음부터 한 몸이 아니었기에 결국은 나간 것이다.)
  2) 이들은...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다.
   (2)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부인하기에 하나님의 아버지 됨도 부인하는 자들이다.
  3) 너희는...
   (1) 처음부터 들은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
   (2) 처음에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니, 또 다른 (영지주의적?)가르침이 필요 없다.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의 중심 흐름과 관전 포이트 중심으로 재정리하는 것]

우선 요한의 글이 적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중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18-29절) 이들은 공동체 안에 있었던 자들이고, 그 안에 있다가 나간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배운(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또 다른 지식을 가지고 공동체를 떠났다. 이것은 요한의 공동체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요한의 공동체는 공동체를 떠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추가된)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열등한 공동체로 비춰지는 것이다.(떠난 자들은 그렇게 주변에 소문을 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매이고, 도덕에 매이는 것은 무지한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영지주의자 중에는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기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영혼만 잘 간직하면 된다고 보는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도덕적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를 행하고 저지른다.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별 구속력을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조차 부인했다.(하나님이 악한 육체 속에 올 수 없다고 보기에) 이런 세속적인 가르침이 이들 가운데 들어가 결국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그와 같은 논리로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이들과 이들의 거짓된 미혹에 현혹된 자들을 경계하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성도란, 죄인된 자신의 죄를 위해서 대속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새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다.(비록 온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런 의식조차 없는 자는 참된 성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지적 교만은 복음에서부터 이탈하게 만든다.

  교회 안에 있던 영지주의자들은 처음에 복음을 새로운 지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인과응보적 가치관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아들 예수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가르칠 때, 그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지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추구를 버리지 못했고 도를 넘었다. 예수의 복음에서 세속적인 영지주의 가치관으로 결합한 또 다른 가르침으로 발전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했다.

  만행이란 책을 썼던 현각 스님은 미국의 하버드를 졸업했고, 카톨릭 집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런 그가 불교에 접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런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불교가 기독교적인 진리를 넘어서 더 본질적이고, 더 근원적이며 더 진리에 가깝다는 인식을 준다. 서양에서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에 심취하고 있는 흐름을 볼 때 또한 그와 같은 인식을 준다.

 

2.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문제다.

  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진리를 전해주는 중심의 문제다. 그 진리가 근거하고 있는 중심의 문제다.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 근거할 것인지 아니면 인격적 절대자(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에 근거할 것인지의 문제다.

  적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내용을 세상의 것으로 대치하거나, 그것에 세상적인 어떤 것을 첨가해서 더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복음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에 복음은 부끄럽지 않다.(복음으로 충분하다). 롬 1:16-17.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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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를 지나 이제 요한일서로 들어와봅니다. 요한일서를 하지 말고 다른 본문으로 넘어가 볼까 하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가 좀 정리하기가 난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흠없이 잘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흠이 많고 거칠겠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시작한 일이니... 좀 부족하더라도 용기내어 해보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큰 흐름 속에서 건지는 것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ㅋ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문단을 나누어 잘 정돈하며 정리해 봅니다. ]

1.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해서, 그리고 너희에게 전하는 이유(1-4절)
  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다.
  3) 우리가 이렇게 전하는 것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 사귐이 있게 함이다.(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2.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5-10절)
  1) 하나님은 곧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는 행하지 않은 것이다.
    : 그런데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1)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2)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이것은 어둠에 행하는 것이다)
   (1)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빛이 없는 것을 말한다.)
  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1)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4)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을 정리한 것을 토대로 하나의 매끄러운 흐름으로 연결해 가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내용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요한은 지금 자신이 받은 것과 전하는 것이 매우 확실한 것임을 확신하며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받는 자와의 사귐(연합)을 확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생명의 말씀인 예수를 전한다고 한다.


그 첫 번째 내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빛이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행위이니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됨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오랫동안 묵었던 하나의 오해를 풀며.

 

위의 논리라면 우리가 요한일서에서 가지는 오해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이 내용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자연스럽게 <구원을 받았는데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으로 해석했고 그것은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5절)으로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을 하고도 삶에 있어서 여전히 죄된 행실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불안케 하는 구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부터 성도들은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죄를 고백하면 오히려 죄사함을 받는다는 명백한 복음적 메시지가 나오고), 오히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지니(10절) 이로 볼 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이라는 구절은 <예수를 믿고도 죄를 범한다면>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어둠에 행한다면>을 <죄를 범한다면>이 아니라, <죄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다면>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런 상호관계(이것인 하나님과의 사귐의 근거이면서 핵심이다)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죄가 없다>(8절)고 말하는 <어둠에 행하는 행위_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어둠>(6절)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성도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귐이란, 성도가 죄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예수의 피로 말미암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죄사함을 믿고, 성도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은 그 죄인을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을 통해 다시 품으시는 긴밀한 사귐이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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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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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가 읽은 모세의 말씀을 읽고는 백성들은 울고 말았지요. 그러나 충분히 회개하고 울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성일 이었고, 즐거운 날이어야 했으니까요.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막절의 7일을 보냈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것이 일곱째 날 22일(15일부터 일주일을 초막절로 지키니)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곱째 날 24일이 되었습니다. 절기는 마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일곱째달 24일에 사람들은 다시 모여 온 민족적인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이후에 새로운 언약 체결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다시 구하게 되지요.

 

[1차 정리. 내용정리]

1. 귀환한 유다 백성들의 이스라엘 역사관

  1) 일곱째 달 24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씀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함.

   (1) 낮의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함

   (2) 낮의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3)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같은 사람들은 단 위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2.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함.(5- 37)

  1)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원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합니다.

  2)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심(7,8절)

  3) 애굽의 고난받는 것을 감찰하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로 애굽을 치셨다.

   :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

  4) 시내산에서 강림하셔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셨다. 안식일 알리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 (11-15) 그 땅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여 주셨다.

  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않고 거역했으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17절)

  6)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들의 것을 차지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이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거역하여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다.(18-26)

  7) 그래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환란때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다시 구원하였으나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러기를 계속 반복하는 역사를 보냈다. 그래서 결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긍휼로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았다.(27-31)

  8) 앗수르 이후부터 지금까지 당한 고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소서. 우리는 악을 행하였으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고, 그들이 우리의 소산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32-37)

3. 재 언약을 약속하는 귀환한 백성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였나이다.

 

[2차 정리. 성경 내용을 내 것으로 재정리]

에스라가 읽어 준 말씀에 순종하여 귀환한 백성들은 회개했고, 일곱째 날 15일에 7일간 초막절의 절기를 온 마음을 다해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나고 이틀 후 그 달 24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였다. 아마 에스라가 처음 말씀을 읽었을 때, 사람들이 회개의 마음으로 울려고 했던 것(8:8-10)을 성회이기에 즐거워하라고 했었던 것에 대해서 절기를 지나 따로 회개의 날을 잡아 진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백성들은 우선 이방인과의 절교를 하고, 죄를 회개했다. 한 낮의 사분의 일은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여 듣고, 또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경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때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레위인들은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분인데, 그 분의 언약 속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 그리고 그 분은 성실하게 우리의 필요들을 채우며 인도해주셨는데, 우리 조상 이스라엘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큰 긍휼로 다시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은 돌아오도록 보낸 선지자마저 듣지 않았다. 이런 악순환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결국은 하나님은 앗수르에 손에 이스라엘을 붙였다. 그러나 아주 멸하게 하시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가 충분히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견고한 언약을 다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오니 하나님이여 돌이키시사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3차 정리. 묵상과 적용]

 1. 반드시 죄의 문제는 퉁치고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에스라를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이들은 이들이 직면한 이 모든 고난의 역사가 하나님의 징계며,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인 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성일이요 기쁨의 날이었다. 이들은 이들의 감정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맞춰 순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감정이 상하거나, 감정이 흥분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요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감정적으로 아팠고 슬펐지만, 이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을 초막절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났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던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갈 수는 없었다. 지도자들도 그것을 알았다.  초막절을 마치고 이틀만에 다시 모였다. 본격적인 회개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종종 회개의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그 감정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무뎌진다. 잠시 회개의 내용들을 말한 후, 아니면 그 감정의 때를 놓치고 나면 회개에 대한 의식조차 잊어 버린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는 회개의 무게가 가볍기 때문이다. 통회, 통증있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의 파장이며, 느낌이었지 우리의 심비에 새겨질만한 아픔이 없는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귀환한 이들은 그런 회개는 아니었다. 이들이 말씀을 들었을 때 깨달았던 본인들의 죄는 거대한 파도같아서 자신을 덮쳐왔고, 그 충격과 감정은 우리의 이성에 새겨지는 아픔이었다.

절기를 마친후 이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쉽게 죄를 잊는 것이 아니라, 쉽게 죄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아픔과 파장과 파멸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으로 우리 안에 계속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의 아픔과 크기를 잊게 하는 복음이 우리를 방종으로, 무례함으로 교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긍휼이란 단어 만으로도 호의가 느껴진다. 그런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에 <크신>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긍휼>이란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신 긍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긍휼을 베푸셨는지... 얼마나 많은 거절과 완고함과 교만에 대해서 다시 긍휼을 베푸셨는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너무나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긍휼하시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은 참으로 크다라고 놀라고 감탄하고 경배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은 긍휼하시다는 말씀에 그나마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큰 죄를 덮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는 큰 긍휼을 성경은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겠다.

우리의 큰 죄 <<<<< 하나님의 크신 긍휼

믿는 자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아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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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주를 지나고 새롭게 월요일이 되었습니다. 이번주부터 새벽기도를 시작해야겠다고 마음 먹었는데...공간적으로 교회는 아니었지만, 이른 아침 일어나 기도할 수 있어서 감사한 하루였습니다.

오늘은 느헤미야 7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성벽을 재건하고 성문까지 달고 그 이후의 일들을 보여주고 있는 장면입니다. 느헤미야의 리더십이 돋보이는 부분이 바로 여기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일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뿐 아니라 일을 이루고 나서 그 성취한 일을 잘 유지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까지...느헤미야는 긴장을 늦추지 않습니다. 암튼, 느헤미야를 배울 수 있는 것이 참 많습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소 주제로 문단나누고 내용을 정리하는 것]

1. 성벽을 재건하고 느헤미야가 한 후속 작업

  1) 성벽을 건축하고 문짝을 달고,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들과 레위 사람을 세웠다.

  2) 동생 하나니와 영문의 관원이 하나냐로 함께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하였다.

   : 하나냐는 충성스러운 사람이요 하나님을 경외함이 무리 중에서 뛰어난 자라.

  3) 예루살렘을 다스리게 한 자들에게 예루살렘을 지키는 지침을 줌

   : 높이 해가 뜨기 전에는 성문을 열지 말고, 아직 파수꾼이 있을 때 문을 닫고 빗장을 지름.

   : 주민들이 자기 집 맞은 편을 지키게 하라.

   : 왜? 성읍은 광대하고 주민들은 적으며 가옥은 미처 건축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2. 다시 한 번 옛 귀환자의 명부를 확인하다.

  1) 하나님께서 느헤미야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사, 귀족들과 민장들과 백성들을 모아 그 계보대로 등록하게 했다.

  2) 그 때 느헤미야는 첫 귀환자(스룹바벨과 함께 귀환한 자)들의 계보를 살펴본다.

  3) 6-69절까지 이전 기록에 적힌 명부를 다시 기록한다.(에스라2장에 언급된 것과 거의일치)

   : 그 중에 그들의 종족이나 계보가 이스라엘에 속하였는지는 증거할 수 없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계보 중에서 자기의 이름을 찾을 수 없었기에 부정하게 여겨 제사장의 직분을 행하지 못하도록 했다.(61-65절)

3. 성벽 재건을 위한 헌금과 헌물

  1) 어떤 족장은 성벽 재건을 위해 보조하였다.

  2) 총독은 금 1000 드라크마와 대접 50개와 제사장의 의복 530벌을 보물 곳간에 드렸다.

  3) 어떤 족장들은 금 2만 드라크마와 은 2200 마네를 역사 곳간에 드렸다.

  4) 나머지 백성은 금 2만 드라크마와 은 2000마네와 제사장의 의복 67벌을 드렸다.

4. 예루살렘 성 안에 거주한 사람들

제사장들, 레위 사람들, 문지기들, 노래하는 자들, 백성 몇 명과 느디님 사람들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다 자기의 성읍에 거주하였다.

  * 느디님 사람들은 이들은 원래 이방인이었다가 이스라엘에 포로로 끌려온 후 성전의 막일을 부여받은 자들의 명부다. 이스라엘에서 비천한 신분으로 여겨졌다.

  *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57절)들도 이스라엘 포로로 잡혀 왕궁의 경비 등에 종사하도록 된 자들의 명부이다. 이들도 느디님 사람들처럼 이스라엘 사회에서 천민 계급으로 분류되었다. (호크마 주석 참고)

 

[정리2. 정리 1에서 한 내용을 기초로 해서 나 만의 표현으로 다시 바꾸고, 재구성하는 것입니다. 본문의 특징과 독특함(주로 이런 곳에서 메시지가 나오는데)을 잡아내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느헤미야는 성벽을 재건하고 문짝을 달고 난 후 휴가를 가지 않았다. 그는 그 다음 일을 생각했고, 그 다음 일을 진행했다.

먼저는 성을 다스릴 사람을 세운다. 충성스럽고 신앙적으로도 뛰어난 사람을 세워, 그들로 성을 지키도록 하고 구체적으로 성문을 언제 열고 언제 닫아야 하는 지침까지 주었다. 그리고 아직 성읍에 사람들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일은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집 앞을 책임지고 지키도록 했다. 성전을 위해서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 그리고 레위 사람들을 세우는 것도 잊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다시 한번 귀환한 백성들의 명부를 확인했다. 스룹바벨 때에 돌아온 명부를 기초로 해서 예루살렘 성에 있는 사람들의 혈통을 확인했을 것이다. 이는 온전한 혈통에 속해 있지 않는 사람들이 유다의 귀환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막고, 더 나아가 제사장과 같은 중요한 직책을 맡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계보가 명확하지 않은 사람은 제사장의 일에서 제외시켰다.(64절)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다시 성전을 활성화 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보조하고 헌물해준 지도자들이 있었다. 총독과 족장들이 앞장섰다. 그리고 백성들도 힘을 모아 헌금하는 일에 힘썼다. 그런데 백성들이 모은 것과 비슷한 것을 족장들 중에서 낼 정도의 재력이 있는 자도 있었던 것 같다.

귀환한 사람들 중에 옛 이방인들의 명부도 있다는 것이 특이하다. 이들은 이스라엘의 포로로잡혀와 성전과 궁궐에서 막일을 했던 사람들인데 이들고 귀환한 백성가운데 있으며 그들도 귀환 공동체의 계보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 흥미롭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느헤미야의 리더십을 다시 생각해 본다.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까지의 리더십만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리더십은 성벽 재건 후에 더욱 빛을 발한다. 성을 다시 세우는 것 뿐 아니라, 성을 유지하고 확장할 수 있는 준비를 하는 것까지 챙겼던 사람이 느헤미야다.

  많은 리더가 자신이 이룬 업적에 도취되기 쉽고, 그 영광에 스스로 만족하며 그 일을 끝을 맺으려 한다. 그러나 참된 리더는 세운 역사가 유지되고 확대되기 위한 초안까지 마련해 놓는다. 그런 측면에서 조직이 필요하고 계보의 정리가 필요하다.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을 잘 지킬 총독을 믿을만한 사람으로 세웠다.(아마 성벽을 재건하는 과정 속에서 그 사람을 평가해 왔을지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도 살펴봤던 것 같다.) 또한 귀환한 백성들의 혈통을 다시 확인하는 과정을 거쳤다. 이것은 장기적인 오염을 막는 기초가 되는 작업이었다. 지금은 느헤미야의 지도력 안에서 다 통제가 되지만, 느헤미야가 없으면 언제든지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것들이었기에 느헤미야는 그 작업을 해 놓은 것이다.

2. 귀환자의 명단에 옛 이방인들까지 함께 포함되어 있었다.

솔로몬의 신하의 자손(57절)과 느디님 사람들(46절)은 모두 이방인으로 옛날 이스라엘의 전쟁 포로로 잡혀와 성전과 궁궐에서 막일을 하던 사람들이었다. 이들도 바벨론에 의해서 포로로 잡혀갔고, 어쩌면 그곳에서 예루살렘에서의 삶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들조차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는 소식에 합류했던 것이다.

이들은 처음부터 유대인들은 아니었다. 이들은 강제로 유대 사회로 유입된 자들이며 억지로 유대인화된 사람들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유대인이 아닌 채로 살아갈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의 공동체에 함께 하기를 원했고, 예루살렘에 돌아오기를 원했으며 함께 목숨을 걸고 피땀을 흘리며 성벽 재건에 힘썼다.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이들을 그들의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정하고 있다.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들, 귀환한 백성들 속에는 순수혈통 유대인들만 존재했던 것이 아니다. 후천적인 백성들이 있었으며, 그 기업을 얻기 위해 찾아온 이방인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함께 유업의 자리에 이른 것이다.

성경은 그들을 깨알같이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을 유입되었다는 것, 또한 그것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음이 아닌가? 왜 기록하셨겠는가? 너희도 이 자리로 들어올 수 있다는 메시지를 주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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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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