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5.1.11)


제목: 빛이 어둠에 비추다II

본문: 요 1:1-13


 * 빛을 거부한 세상과 사람 안에 있는 어둠에 부분을 지적함. 어둠의 본질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구체적으로 전하고, 오늘은 그 어둠이 가져올 결과의 심각성을 인식하는 것에서부터 '복음'이 시작됨을 주로 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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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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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시는 하나님


글: 김수억 


작년 10월 4일은 제 생일이었습니다. 양력이 아니라 음력이라는 것이 함정이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제 생일을 기억하지 못합니다. 그나마 가족들이나 기억할 뿐이죠. 결혼 이후에는 장모님과 생일이 같은 관계로 그 마져도 뒤로 밀린지 오래되었습니다. 이제는 그러려니 합니다. 


그런데 작년 10월 4일(음력) 당일 제 생일 처음 축하해 것은 다름아닌 보험사에서 보내준 문자였습니다. 출근길에 그 문자를 받고 어김없이 제 날짜에 문자를 보내는 기업의 고객관리에 놀랐고, 그 문제가 그 날 처음받은 생일 축하라는 것에 마음이 서운해졌습니다. 아침에 딸아이가 일어나서 등교 준비하는 것을 보고 나왔지만, 딸 아이는 제가 출근할 때까지 '아빠 생일 축하해' 한마디 하지 않았습니다. 갑자기 그것이 서운했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 딸아이가 제게 대해서 서운하게 했던 것들이 생각나기 시작하면서 화가났습니다. 그리고 결심했죠. 오늘부터 딸 아이에게 잘해주지 말아야지. 간식은 커녕 꼭 필요한 이야기 아니면 하지도 말아야지. 아빠로서 최소한의 것만을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냉전은 몇 일을 갔죠.


그런데 제일 화가나는 것은 무엇인지 아십니까? 나는 딸아이의 태도에 화가나서 냉전을 하기로 결심했는데 딸 아이는 정작 내가 화가 심하게 났다는 것을 모르는것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내게 먼저 사과를 할 가능성은 거의 없는 셈이 된 것이지요. 나는 너무 힘든데, 딸아이는 별로 힘들어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나는 힘든데 말이죠...


또 하나의 고민은 이것입니다. 이 관계를 해결하고 싶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것입니다. 잘못을 딸 아이가 했기 때문에 딸아이가 먼저 사과만 하면 아빠인 나는 언제든지 용서해 줄 마음이 있습니다. 그런데 딸 아이는 자신의 죄를 잘 모릅니다. 그러니 사과할 필요를 못 느끼겠죠. 오히려 아빠가 왜 저러나 그러고 있겠죠. 내가 먼저 풀고 싶어도 풀수가 없습니다. 자존심 때문에 말이죠. 이 관계에서 가장 큰 고통을 받는 것은 바로 아빠입니다. 



복음이란 바로 이것입니다. 모든 잘못은 우리에게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서운하게 하고, 상처입힌 것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마음이 상하신 하나님이 우리와 냉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하나님 자신입니다. 오히려 우리는 무슨 문제가 생겼는지 조차 모릅니다. 그러니 하나님 편에서는 답답할 모릇입니다. 우리가 우리 죄를 알고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면 기꺼이 용납하고 화해하실 생각이시지만,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모릅니다. 회복이 안되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모든 관계의 틀어짐 때문에 당하는 고통은 하나님이 고스란이 당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견디다 못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먼저 손을 뻣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이신 그 분께서 낮고 천한 피조물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화해하기 위한 결정적인 제스쳐를 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뻣으신 그 손을 우리가 잡기만 한다면 관계는 회복됩니다. 하나님의 찾아오심이 바로 복음의 시작인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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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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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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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복음의 내용은 간단하고 단순하다.(?)


우리가 쉽게 가지는 오해 중에 하나가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매우 간단하고 단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음이 5분 안에 설명이 가능한 ‘소책자’ 전도지 안에 소개된 것이 전부일 것이라는 착각 속에서 나온 것이다. 사실은 복음의 내용이란 대단하다. 그 웅장한 내용을 5분 안에 설명할 수 있을 만큼 단순화 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단한 것이기도하지만, 그 복음의 내용을 설명하기 위해서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66권의 방대한 분량의 글이 필요했고, 수천년간의 역사가 필요하기도 했다는 것에 있어서도 그렇다.


복음이란 짧게는 5분 안으로 그 내용을 듣고 구원받을 수 있을 만큼 구체적이고 실제적이기도 하지만, 평생을 배우고 알아가도 다 이해하고 깨닫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풍요로운 것이기도 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고전 15:1)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전에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알게 하기 위해’ 편지를 쓰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고전 15:1 ...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그것은 이미 전한 복음을 다시 전해야 할 이유가 있었기 때문인데, 고린도교회가 복음을 굳게 지키어서 헛된 믿음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고전 15:2) 이 말은 복음의 내용은 한 두 번 전해서 될만큼 그리 간단한 내용의 것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을 통해서 볼 때, 이미 전도여행을 통해서 복음을 구두로 전하여 세운 교회들이지만 다시 편지를 써서 그 교회 안에 발생한 문제들에 대한 복음적 대답을 반복해서 설명해 주어야 했다. 이것은 복음의 내용이라는 것이 전하는 사람의 불완전함 뿐 아니라 듣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족함으로 인해 충분히 오해될 수 있고 왜곡될 수 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복음은 언제든지 청중이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한 부분에서부터 다시 보충 설명을 해 가면서 복음의 내용을 채워가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복음이란 단순한 내용의 전달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 그 복음의 내용을 토대로 삶이 변화되어야 하는데까지 이르는 것이 복음의 목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성도들은 복음을 세상의 가치로 전환시키기도 하고 관념적인 이야기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사도들은 성도들로 하여금 복음적으로 살도록 촉구하고 자극하고 협박(?)하기도 한다. 이러하듯이 복음은 그 내용의 전달에서 뿐 아니라 그 복음의 효과를 위해서도 다양한 방식으로 전달된다. 즉 청중의 상황에 따라서 생각보다 다양한 옷을 입으면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동적인 복음은 하나의 ‘정형화된 내용’이라기 보다는, 복음의 굵직한 내용에 대해서는 변형될 수 없으나 듣는 대상에 따라 다양한 옷을 입게 되기도 한다.


구원의 조건으로서의 ‘회개’


신학교에서 배우는 ‘구원론’ 책을 보면, 구원의 여정에 대해서 나오고 그 과정 중에 ‘회개’라는 과정이 있다. 자신의 죄를 깨닫고 알아서 그 자리에서 돌이키게 되는 경험을 말하는 것인데 구원에 있어서 필수적인 과정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어떤 사람이 회개라는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 아직 구원받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것이다. 


사도 요한 뿐 아니라 예수님도 천국으로의 초대 전에 ‘회개’를 요청하셨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회개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필수 과정인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대상을 향해서 ‘회개’를 공개적으로 요구하셨을까?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예수님은 오히려 병든 자, 가난한 자, 세리와 죄인들과 같은 사람들을 만나셨을 때 ‘회개’에 대한 요청없이 그들에게 구원을 선포하셨다. 그들이 회개했다는 언급과 표현이 없음에도 주님은 그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보셨고 만져주셨다. 그리고 구원을 선포해 주셨다. 그와 같은 자들에게 ‘회개’라는 과정에 대해서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으로 소개하거나 요청하지 않으셨던 것이다. 


물론, ‘회개’가 없는 구원이 있다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다. ‘회개’란 내가 공개적으로 말로 고백해야 하는 형식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회개’란 그 사람의 상태를 반영하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된다. 즉, 세리와 죄인들, 가난한 자와 병든자들은 자신들에게 구원을 얻을 만한 아무런 능력이 없는 사람들, 이미 ‘회개’의 상태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추가적으로 ‘회개’를 요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이미 그들은 자신의 삶의 형편을 통해 자신에게는 아무런 소망이 없다는 것을 체험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에게 ‘회개’라는 공개적인 요청없이 ‘구원’을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구원론에서 말하는 공개적인 ‘회개’란 절차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원’에 이르는데는 전혀 문제가 없는 것이다. 주님은 이들의 심령의 가난함을 보시고 이들을 구원하셨을 뿐, ‘회개’를 하나의 필수적인 ‘과정’으로 고집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혹은 자기 의와 자랑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은 다르다. 주님은 이들을 향해서는 언제든지 ‘회개’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회개없이 하나님의 나라에 절대로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 


이처럼 복음의 내용이란 개인의 상황에 따라서 전해야 할 내용까지도 변경이 가능한 것이 되고 만다. 처음에도 언급했지만 복음의 내용이란, 간단하고 단순하지만은 않다. 큰 맥락에 있어서는 같겠지만, 듣는 사람의 상태에 따라서 시작과 마무리 그리고 중간의 어떤 한 두 부분들은 그 때 그 때 달라지게 된다. 이것은 곧 복음이 매우 개별적이고 복잡성을 띤다는 것을 의미한다. 


부자를 통해서 본 복음(막 10:17-22)


재물이 많은 한 사람이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는 예수님께 ‘무엇을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가?’라고 진지하게 물었다.(달려와 꿇어 앉아 예수님께 물었던 것을 보면 사뭇 진지한 고민 속에서 예수를 찾아온 것이 분명하다.) 그러자 예수님은 네가 계명을 알테니 가서 계명을 지키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주셨다. 그러나 그 부자는 그와 같은 계명은 어려서부터 다 지켜왔던 것이라고 말한다. 즉 부자는 그것 외에 혹은 그것 이상으로 ‘영생’을 더욱 확고하게 할만한 것이 무엇이 더 있는지 알고싶은 열심에 예수님을 찾아 온 것이다. 


예수님은 그 부자의 진정성을 보셨는지, 사랑하는 마음으로 영생을 위한 교훈을 하나 주신다. 그것은 ‘그 부자가 가지고 있던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라고 요청하셨다. 그러자 이 부자의 진 면목이 드러났다. 그는 재산이 많은 고로 재물을 다 팔고 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큰 고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선뜻 그 말씀에 아멘으로 화답하지 못한채 고민하며 돌아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많은 사람을 불러모으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지 않으신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도록 열어 놓으시고 간절히 들어오기를 원하시나(벧후 3:9), 그렇다고 아무나 들어오도록 허락하시지는 않으셨다는 것이다. 재산이 많은 부자라도 마찬가지다. 부자는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재물에 대한 욕심이 컸던 사람이다. 율법을 지키는 것에 온 힘을 다 기울일수는 있어도, 가지고 있는 재물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나님은 불편하겠지만, 그 사람의 진짜 주인이 누구인지를 들춰내신다. 이 부자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지만 진짜 주인은 하나님이 아니라 재물이었다. 하나님 나라에 합당한 백성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나님을 왕으로 섬길 수 없는 사람을 어찌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인정할 수 있겠는가!


예수님은 이 부자를 향해서 도덕적 죄에 대한 회개를 요청하지 않으셨다. 재물을 버리고 나를 쫓으라고 하신 것이다. 이 부자가 돌이켜야 할 회심은 도덕적 부분에서의 깨끗함이 아니다. 이런 사람에게 ‘도덕적으로 회개하라’고 요청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설사 이 부자가 회개를 한다고 고백한다고 한들 그 회개는 표면적 회개에 불과할 것이다. 자신은 도덕적으로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부자가 정말 회개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물질)이 자신의 주인이 되어 있다는 것에 대한 회개여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도덕적 죄에 대한 회개가 아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지점을 지목하고 있는 것이다. 


부자는 매우 종교적이고 경건한 사람이다. 그는 유대교인으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말씀인 율법에도 충실하게 순종하는 사람이다. 그는 더 경건해지길 원했고, 더 영생에 이르기를 원하는 종교적인 열심도 있는 사람이었다. 만약 율법과 종교성이 예수님이 말씀하신 구원의 조건이었다면, 이 사람은 구원에 충분히 이르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아마 다수의 바리새인들은 이와 같은 착각에 빠져 지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아니었다는 것이, 예수님의 요구에 대한 이 부자의 선택을 통해서 드러나게 되었다. 


그렇다. 복음은 단순하지도 간단하지도 않다. 종교적 열심이 확보하고 확인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이다. 더불어 복음은 우리를 시민으로 부르는 것이지, 천국행 티켓를 남발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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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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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2. 복음을 듣고 영접하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을 얻는 것이다.


입장권(티켓)을 가졌다는 것이란, 제한된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 정당한 자격을 갖추었음을 의미한다. 즉 복음을 듣고 영접한 자는 구원을 얻게 되는데 그것은 마치 천국으로부터 발부된 ‘입장권’이나 ‘초대장’을 받은 것과 같아서 언제든지 천국의 출입문을 자유롭게 입장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은 그 티켓을 받은 사람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게 되느냐에 따라서 옳은 확신이 될 수도 있고, 그릇된 판단이 될 수도 있다. 만약, 자격 없는 자가 영광스러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얻었다고 생각해서 하나님의 백성에 격에 맞는 삶을 살기에 힘쓴다면 천국 행 티켓을 얻었다는 개념은 그런대로 괜찮다. 그러나 만약, 이제 내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티켓(자격)은 확보했으니, 이후로 나의 삶의 태도와 상관없이 천국에는 자동적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을 하게 된다면 그것은 절대적으로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우리가 믿음을 고백하고 천국행 티켓을 얻었다고 생각할 때, 전자의 개념으로라기 보다는 후자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전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랫동안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한 사람에게 ‘구원의 확신’을 주기 위해 이와 같은 표현을 써왔다. 그러나 이와 같은 행위는 티켓을 남발함으로서 그 공연의 가치를 하락시킨 것과 같이 하나님의 나라를 아무나 들어가는 우스운 곳으로 만들어 버리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성경에서 성경에서 가르치는 개념은 무엇인가 살펴보자.



다시, 마 22:1-13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의 비유


본문의 내용은 앞에서 살펴보았으시 생략하자.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임금은 길거리에서 모두(악한 자나 선한 자)를 혼인잔치에 초대해서 불러모았다. 이들은 새롭게 초대장을 가지고 임금의 아들 혼인잔치에 들어와서 그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임금은 그 자리에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찾아내고 <예복>을 입지 아니함으로 그 잔치에서 쫓아냈다. 이 말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예복>을 입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그 잔치에서 쫓겨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 <예복>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말씀을 인용해서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롬 13:14, 갈 3:27) 그렇게 볼 수도 있겠으나, 가장 1차적이고 자연스러운 의미는 <예식에 맞는 옷>일 것이다. 즉 다른 사람은 갑작스러운 임금의 초대를 받아 왔지만, 그래도 각자 나름대로 예식에 맞는 옷을 차려입고 온 것이다. 즉 그 공간과 상황에 맞는 질서를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혼인잔치에서 쫓겨난 사람은 잔치에 초대되어 들어왔고, 왕이 준비한 풍요를 누리기는 했지만 그 공간의 질서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잔치를 원했지만, 질서에는 관심이 없던 사람이 바로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다. 임금은 그와 같은 자는 초대되어 안으로 들어오더라도 마침내 선별하여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다. 입장권만으로는 마지막까지 천국의 잔치를 즐기고 누릴 수 없음을 말할 수 있겠다. 



또 다른 성경 이야기들


마 13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네 가지 땅에 떨어진 씨 비유’를 말씀하신다.(3-9절) 예수님은 이 비유를 시작하면서 ‘천국’ 비유라고 말씀하시지는 않았으나, 이 비유를 설명하시면서 ‘씨’를 ‘천국 말씀’(마 13:19)이라고 하심으로 이 비유가 천국 비유임을 알 수 있다. 


이 비유에는 씨가 떨어진 4가지 땅의 상태를 말하는데, 사실 크게 나누면 둘이라고 봐야 한다. 하나는 천국 말씀인 씨가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하는 땅(길 가)과 천국 말씀이 뭔가 효과를 내고 있는 땅으로 구분된다. 전혀 효과를 내고 있지 못한 땅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복음을 들었으나 완악함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다. 반면 효과를 내고 있는 곳은 어딘가? 그것은 바로 교회 안이다. 그러나 교회 안의 성도라고 해서 그 효과가 다 똑같은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기쁨으로 받았으나 뿌리가 깊지 못해, 말씀으로 말미암은 환난이나 박해가 일어나면 넘어져 버렸다.(돌 밭) 또 어떤 성도는 잘 자라 올라오기는 했지만 실제적인 열매를 맺지 못한 한계에 부딪힌다. 왜냐하면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극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가시떨기) 어떤 사람은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하여 풍성한 열매를 거둔다.(좋은 땅)


마태가 예수님의 이 비유를 통해서 교회에 던지고 싶은 메시지는 교회 밖의 완악한 자도 아니고, 교회 안의 좋은 땅에 속한 자도 아닐 것이다. 마태는 ‘돌 밭’과 ‘가시덤불’과 같은 환경 속에 놓여있는 성도들을 향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환경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숙명을 가르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환경을 극복함으로 ‘천국 말씀’이 네 안에서 열매를 맺도록 하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환난과 박해를 견디어 내고, 세상의 염려와 재물의 유혹을 이겨냄으로서 네가 좋은 밭임을 증명해 낼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내가 왕의 잔치에 들어왔느냐가 결정적인 것이 아니다. 교회 안에 들어와있느냐가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그 안에 계속해서 머무르며 그 자리에 합당한 자라는 것을 그 안에서 증명해 낼 때, 그 자리에 머물수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개념의 확장, 점(點)에서 선(線)으로.


롬 5장에 보면 구원에 대한 흥미로운 표현이 있다.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5: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으니,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신 것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표현은 약간 다르지만, 구원에 대해서 ‘이미 이루어진 일’로 표현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미래적인 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인지 아니면 아직 못받았다고 말하는 것인지 헷갈리게 할 수 있는 표현이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구원을 그렇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구원의 특징이란 ‘과거적이면서도 미래적’이기 때문이다. 이미 이루어진 것이면서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보통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을 통해서 구원 전과 후로 나누어진다고 생각한다. 예수를 우리의 마음으로 믿고 고백하기 전과 그 이후만이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중간의 한 시점에 구원이 왔고 모든 사람은 구원 전과 구원 후라는 두 사이에 놓여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중간 과정에 대한 개념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구원의 개념에 있어서 ‘티켓’의 개념이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관람하려는 사람에게는 티켓이 있어야 한다. 티켓이 있으면 관람할 수 있으나 티켓이 없으면 관람할 수 없다. 티켓은 그 유무에 따라서 이 두 가지 상황밖에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구원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구원 개념과 유사해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구원을 티켓 개념으로 이해하면서 생기게 된 오해도 있다. 영화든 뮤지컬이든 티켓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묻지 않는다. 그가 범법자인지 탈세자인지 따지지 않는다. 그 사람이 티켓만 있으면 아무 질문없이 그를 통과시켜 입장시킨다. 이것은 마치 믿음의 고백을 통해 구원을 티켓으로 얻은 사람이라면(과거의 고백을 통해) 지금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서 아무런 조건과 제약을 달지 않는다는 오해를 가져오게 될 수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의 개념은 과거에서 미래까지의 ‘시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서 구원의 완성을 향해 가는 사람도 있지만, 입장했다가도 끝까지 남아있지 못하는 경우 즉 ‘필터링’하는 시간의 과정이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처음 얻은 구원이 중간에 잃어질 수 있다는 말을 하기 위함은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입장’만으로 ‘구원’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앞에서 몇 몇 본문을 통해서 말했듯이 잔치에 입장한 모든 사람이 구원받은 대상이 아니고,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이 모두 구원의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구원은 확인하는 과정을 거치므로 단순히 단회적인 의미를 가진 ‘티켓’으로는 구원을 설명하는 것이 부적절 하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구원은 시간을 통과하는 검증 과정을 통해서 알곡임이 더욱 분명해지든지 아니면 가라지로 판명되든지 확인해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 22장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런 메시지를 준다. 천국은 ‘누구에게나’ 열려졌다. 그래서 길거리에 악한 자나 선한 자 누구나 들어갈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곳이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님을 <예복>을 입지 않은 자를 선별해 냄으로서 강조하고 있다. 


우리는 성경에서 ‘누구든지’라는 표현을 ‘아무나’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누구든지’는 조건에 있어서 제한이 없이 기회가 주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전에는 하나님의 나라가 ‘유대인에게만’ 허락된 줄 알았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방인에게도’ 허락되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누구든지’가 된 것이다. 유대인을 포함한 모든 민족에게 열려진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그것을 ‘아무나’라고 의미하진 않았다. 오히려 성경은 하나님의 나라는 ‘아무나’ 들어올 수는 없는 곳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입장권에서 시민권으로


입장권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시간이 되면 다시 나가야 한다. 놀이공원이 폐장하게 되면 자유이용권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퇴장해야 한다. 여권과 비자를 가지고 다른 나라에 관광을 간 사람도 마찬가지다. 일시적인 기간 동안 그 나라의 좋은 것들을 누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권의 기간이 끝나고, 비자기간이 끝나면 나와야 한다. 왜? 그 나라의 시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입장권의 한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입장을 할 수는 있지만 그것만으로는 그 나라에 영원히 살 수 없다. 오직 시민권을 가진 시민만이 그 나라에 백성으로 인정받으며 그 안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자격을 가진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은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빌 3:20)


그렇다면 누구에게 시민권이 주어지는 것인가? 

입장권에는 어떤 책임이 부여되지 않는다. 입장권으로는 보고싶은 것, 놀곳 싶은 것을 즐기다 갈 수 있다. 관광객들은 자신들이 보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사다가 돌아가면 그만이다. 그러나 시민권에는 책임이 부여된다. 그것은 그 나라의 시민답게 살아야 함에 대한 책임이 따라온다. 이것은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는 진지한 서약 속에서 주어지는 것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민이 되기 위해 귀화하는 외국인들이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귀화하고 싶다고 모든 외국인들에게 함부로 귀화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귀화하려는 사람들의 목적과 조건에 따라서 기준이 좀 다를 수는 있어도, 최소한 귀화하려고 하는 사람에게 반드시 묻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 나라의 법과 질서를 준수 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맹세를 받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 서약하는 사람들에 한해서 이 나라의 백성으로 맞아들이게 될 것이다. 


마찬가지다. 우리가 구원 받는 다는 것은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됨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백성이 되기 위해서는 그 나라의 유익을 얻고자 하는 목적으로만은 부족하다. 그 나라의 시민으로서의 그 나라의 법과 질서를 따르겠다고 하는 책임있는 서약이 수반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책임있는 서약이 없다면, 그 사람은 입장권을 가지고 잠시 즐기가 가는 사람, 여권과 비자를 받아 잠시 다녀가는 사람은 될 수 있어도 하나님의 나라의 시민으로서는 부적합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이다. 


다시 처음 이야기로 돌아가자. 임금의 아들의 혼인잔치에 들어왔다가 <예복>을 입지 않음으로 인해 쫓겨난 사람의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예복>은 그 상황과 그 공간에 맞는 질서다. 그렇다면 그 쫓겨난 사람은 혼인 잔치가 주고 있는 여러 가지 유익과 풍요에 관심을 가지고 그 잔치로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 상황과 공간 속에서 마땅히 따라야 할 질서인 <예복>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시민권이 아니라 입장권으로만 들어온 그 사람은 결국 그 잔치의 공간에서 퇴장당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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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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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기 전] 작년 가을부터 작업했던 <복음 수양회>에 대한 내용을 이제 청년 대학생들을 위한 성경공부 교재(책자)로 만들기 위해 오늘부터 한 주제씩 글을 써보려고 합니다. 주제는 물론 복음에 대한 것이구요. 혹 관심과 여유가 있는 분들은 읽어주시고 피드백을 댓글로 남겨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피드백을 통해서 혹 오해스러운 부분들이나 미흡한 부분들을 보완하여 다듬어 완성하도록 하겠습니다.


0과. 우리가 구원과 복음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세 가지


1.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이 말은 틀린 말은 아니다. 구원을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맞는 말이다. 그러나 이 표현에는 한 가지 함정이 있다. 구원은 한 순간에 결정되지만, 그 구원이 그 사람에게 확인되기 위해서는 시간을 거치는 여정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구원을 한 순간의 사건(중생)으로 묘사하기도 하지만, 더불어 시간을 거쳐서 확인되어지는(그래서 끝까지 구원에 이르는 자와 그렇지 못한 자가 있음을 수 있음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된다. 



마 22:1-13 천국 비유


마 22장 1-13절의 비유를 살펴보자. 이 비유를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1) 예수님은 천국(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을 비유로 설명하신 것이다.

 2) 천국(하나님의 나라)은 자기 아들을 위하여 혼인 잔치를 베푼 어떤 임금과 같다고 했다. 따라서 이 임금의 말과 행동을 잘 살핌으로서 천국(하나님의 나라)이 가지는 특징을 파악해야 한다. 

 3) 임금은 자기 아들의 혼인잔치에 초대한 대상들이 종들을 모욕하고 왕을 능멸한 것에 대해서 진노하시고 심판하신다. 그래서 원래 청함을 받은 자는 혼인잔치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

 4) 그러자 임금은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혼인 잔치에 초대하고, 혼인잔치는 금세 손님들로 가득하게 되었다.  

  * 우리가 아는 복음은 보통 여기까지다. 유대인들이 거절했기에 원래 초대받지 못한 우리들에게까지 기회가 열렸다. 이방인인 우리 뿐 아니라 심지어 악인에게까지 기회가 열린 것, 이 상태가 우리가 알고있는 복음과 일치한다. 

 5) 그러나 예수님의 천국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임금은 혼인잔치가 진행되는 동안 참석한 사람들을 살피고 그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을 선별해서 잔치 밖으로 내보낸다. 


임금의 마지막 행동이 성도인 우리를 당황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이 마지막 장면은 혼인잔치(천국)에 들어갔다가도 다시 밖으로 쫓겨나오게 되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천국 비유가 10절에서 끝나지 않고 11-13절의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성도들이 이 내용에까지 주의를 기울여 봐야 함을 말해주고 있는 것인데, 이 내용은 우리가 알고 있는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을 흔들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야기들


이와 같이 성도들을 당황하게 하는 내용의 이야기는 의외로 적지 않다. 특히 마태복음에 많은데, 마 7장이 대표적일 것이다. 


마 7:21에는 예수님께서 ‘나더로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입으로만 주여주여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 사람은 누가 보기에도 구원받은 성도일 것이라는 확신을 줄 만한 사람이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귀신도 쫓아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했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누가 보더라도 성도며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을만한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은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고 말씀하시고 심지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말씀하심으로서 이들을 죄인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보더라도 대단한 신앙 생활을 한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구원 받은 성도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다. 


마 7:26에서도 같은 맥락의 말씀을 하신다. 신앙이라는 번듯한 집을 지었지만,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반석 위에 지은 집과 전혀 다를 것이 없다. 그러나 그 집도 제대로 된 집인지 그렇지 않은지는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시련의 과정을 통해서만이 확인될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한 사람의 구원이 하나님의 편에서는 한 순간에 결정되는 것이지만, 그 구원이 우리 안에서 실재한 사건이 되는 것을 확인하는데는 ‘시간’을 통한 과정이 필요함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말 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였가에 대한 확인이 필요했고, 그것은 비와 창수와 바람이라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는 시련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확인될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천국, 하나님 나라의 개념


우리가 잘 알 듯 마 13장에는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개념을 설명해주기 위한 여러 비유가 나온다. 그 중에 마 13:24-30에 나오는 ‘알곡과 가라지 비유’와 그것과 쌍둥이 비유로 알려진 ‘그물 비유’(마 13:47-50)에 대해서 살펴보자.


알곡과 가라지 비유에서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다고 했으니 이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가 살펴봄으로서 천국의 특성을 알 수 있다.

 

 1) 그 주인은 제 밭에 좋은 씨를 뿌렸다. 

 2) 그런데 이 주인의 원수가 주인과 종들 몰래 그 밭에 가라지의 씨를 뿌렸다.

 3) 그런데 그것을 시간이 한 참 지난 다음에 알게 되었다.(결실할 때가 되어서)

 4) 종들은 주인에게 지금 당장 가라지를 뽑을까요?하고 주인의 뜻을 물었다. 

 5) 그러나 주인은 종들을 만류하고 오히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라고 명한다. 그 때가서 가라지를 먼저 거두어 불사르기 위해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곳간에 넣으라고 지시한다. 


즉, 천국은 지금 당장 알곡과 가라지를 구분해서 심판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이 말은 심판 날까지 천국은 알곡과 가라지가 함께 공존하도록 두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 천국의 밭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곡이라고 볼 수 없다. 그 중에는 가라지도 함께 공존한다. 그런데 그들은 마지막 추수 때까지 마치 알곡인양 천국의 밭에서 함께 자란다.  


우리가 종교적인 행위를 한다고 해서 구원받은 자라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가 교회와 신앙 공동체 안에 있다고 해서 ‘알곡’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마 13:47-50에 언급되고 있는 ‘그물 비유’도 마찬가지다. 


 1) 천국은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든 그물과 같다.

 2) 우선 그 그물 가득히 물고기를 잡고, 물가로 끌어 낸다.

 3) 그물을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과 못된 것을 구분한다. 처음부터 좋은 것만 잡아 올리지 않는다.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그물로 잡아 올린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잡아 올린다. 즉, 그물(천국) 안에 있다고 다 좋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못된 것도 그물에 잡힌다. 그러나 그 못된 것까지 그릇에 담겨져 분류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반드시 분류되어 버려진다. 즉, 하나님의 나라인 천국은 처음에는 좋은 것과 못된 것을 함께 이 세상에서 끌어올린다. 마치 가라지까지도 천국의 밭에 함께 자라도록 허락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특정 시간을 거쳐 분별하는 프로세스를 진행하고 그 프로세스를 통해서 마지막에 선별된 자만이 최종합격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말은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틀린 말이기도 하다. 그것은 ‘그 사람이 얻은 구원이 확실한가’에 따라서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만약 ‘구원을 얻은 것이 확실하다’면 그 구원은 소망으로 얻은 구원(롬 8:24)이기에 미래적인 구원의 완성에 이를 것이다. 


그러나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구원을 얻었을 것이라는 착각에 근거한 확신이라면 그 사람은 구원은 얻은 것이 아니기에 빼앗기지 않는다는 것도 실체가 없는 헛된 확신에 불과하다. 위에서도 살펴 봤듯이 기독교 신앙과 교회 공동체 안에 있으면서도 아직 ‘구원을 얻지 못한 사람’이 있음을 성경은 지적하고 있다. 성경은 이들의 확신 여부와 상관없이 이들에게 구원이 없음을 선언한다.(마 7:23)


따라서 ‘한 번 얻은 구원은 빼앗기지 않는다’라는 확신은 지금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 먼저 전제 될때 의미있는 것이 된다. 


이제 새로운 질문을 나 자신에게 던지자. 

‘내가 얻은 구원은 확실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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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정리]


[성도 간의 세상 법정에서의 송사 문제]

1. 성도 간에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훗날) 세상이 교회로부터 심판 받을 텐데, 너희들이 지극히 작은 일을 판단하지 못하고 세상 법정의 판단을 의존해야 한다니 부끄럽다.


2. 교회 지도자를 어떻게 세운 것이냐? 너희 형제간의 문제를 판단할 만한 지혜로운 사람이 교회에 아무도 없단 말이냐? 어떻게 교회 성도 간에 서로 고발하게 만들며, 그 일을 믿지 않는 사람들 앞으로 가져가게 만드는가? 


3. 이미 피차 고발했다는 것이 너희 가운데 뚜렷한 허물이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차라리 불의를 당하고,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않겠느냐? 그들은 너희의 형제가 아니냐?

  : 너희 자신들도 불의하고, 음행하였으며 우상숭배와 간음을 행하고 도적이나 탐심을 가졌던 자가 아니냐? 너희가 그와 같은 처지에 있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로움을 받은 것이 아니냐? (그렇다면 너희 형제가 그와 같은 문제로 인해서 교회 안에서 일이 발생했을 때, 세상 법정까지 가도록 하는 것은 삼가야 하지 않겠느냐? 그냥 불의를 당하고, 속임을 당하는 편이 나은 것이 아니냐?) 


4. 모든 것이 가하지만,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가능하다고 무엇이든 하려고 해서는 안된다.(절제) 왜?

  1)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으나 하나님은 이것저것을 다 폐하시리라.

  2) 몸은 음란을 위하여 있지 않고, 오직 주를 위하여 있으며 주는 몸을 위하여 계시느니라.

  3) 너희 몸을 창녀와 합할 것인가? 아니면 주와 합할 것인가?

   (1) 사람의 범하는 죄마다 몸 밖에 있거니와 음행하는 자는 자기 몸에 죄를 범하는 것이다. 

   (2)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 자신의 것이 아니라. 너희 몸을 하나님께서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생각 정리]


1. 바울은 교회 공동체가 올바른 판단을 못내리고, 세상 공동체(가치관)에게 판단을 맡기는 자리로 나아간 것에 대해서 마음 아파했다. 


이 말은 교회 성도들간의 문제는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면 안된다는 것이라기 보다는, 마땅히 교회 안에서 다루고, 다룰 수 있는 문제조차 세상 법정을 의존해야 하는 것에 대한 문제의식을 표현한 말일 것이다. 이것은 고린도교회 공동체가 그만한 것도 제대로 판단할 수 없는 수준의 상태라는 것에 대한 바울의 안타까운 마음의 표현이다. 이런 분명한 문제조차 교회가 판단하지 못한다면, 훗날 종말의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할 교회가 어떻게 그와 같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란 말인가!


교회는 세상의 수준보다 높은 혹은 더욱 고상한 판단을 내리는 공동체여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교회에 대해서 놀라게 되는 것이다. 무조건 용서하고 관용적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그러면 세상은 교회를 우습게 알것이다.) 갈라디아서의 말씀처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잡아야 한다.' 더불어 자신을 돌아보아 더욱 거록한 공동체로 성숙해져가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받는 평가는, 교회가 세상만 못하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현실인가! 그것이 교회가 세상에서 조롱받게 된 이유이다. 


2. 복음은 '자유'를 말하지만, 그릇된 사람들은 '방종'을 따른다.


복음은 확실하게 '자유'를 강조한다. 갈라디아서는 그것을 선명하게 한다. 그러나 바울이 복음 안에서 말하는 '자유'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즉,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를 법으로 말미암아 <구속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의롭게 되기 위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법에서 자유롭게 된 것이다. 사람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율법>에만 묶여있었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십자가의 은혜를 통해서 <율법>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로 의를 얻게 되었다는 측면에서의 '자유'인 것이다. 


율법과 무관하게 살아도 된다는 '방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은 이 그릇된 이해를 풀기위해 늘 복음을 설명하면서 추가적인 설명을 해야 했다. 자유지만 방종이 아니다. 


탐식에 사로잡힌 자들... 아무거나 자신이 먹고 싶고 먹을 수 있는 것은 다 먹어도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자유라는 이름으로 과거 전통이 부여했던 '가치관'을 무시했다. 심지어 윤리적인 가치관에서도 그와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자신의 몸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다. 그것도 복음 안에서의 '자유'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바울이 복음을 전할 때, 그것을 자신의 욕구(육체적 소욕)의 근거로 생각한 사람들이 고린도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성경이 가르쳐준 복음을 받은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욕구를 지지하는 근거를 '복음으로부터 뽑아, 복음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한 것이다. 


[적용 생각]


1. 교회가 성장한다는 것은 교회의 가치적 판단이 성장한다는 것이다. 


어떤 문제가 발생했을 때, 교회가 그 일을 어떻게 판단하고 진행하는가가 그 교회의 성숙도를 드러내 준다고 할 수 있다. 예루살렘 교회에 '헬라파 과부와 히브리파 과부'간의 갈등이 생겼을 때, 사도들은 그 문제를 통해서 자신의 한계를 발견하고 오히려 자신의 본연의 일이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고 그 일에 집중하게 되었다. 


또한 교회에 사도들이 아닌 '일꾼'일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제도적인 장치가 따라와야 했던 것이다. 교회는 이렇게 조금씩 조금씩, 뭔가를 결정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그 결정과 과정을 중요시하면, 성장을 위한 계기로 삼아야 한다. 늘 최상의 선택만 할 수는 없다. 그런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전체적인 성숙이 함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2. 복음은 언제나 오해스럽기에 늘 보완되어 설명되어져야 한다.


갈라디아서도 그렇지만, 고린도전서도 마찬가지다. 바울의 전한 복음은 늘 어떤 대상들로 인해 오해를 받는다. 커뮤니케이션이라는 것이 완전할 수 없다. 바울의 입장에서도 그렇고 받아들이는 고린도 교회의 사람들의 입장에서도 그렇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는 듣는 자가 제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그와 같은 행동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릇되게 이해하는 부분이 반드시 나타나게 될 것이고 그것을 수정하고 교정하는 것이 또한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몫이어야 한다. 


복음은 완전하지만, 복음에 대한 설명은 늘 보완되어져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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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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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해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바울의 권면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의미를 살펴보자.


1. 바울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서 서로 종노릇 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서로 별개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권면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삶>과 연관된 삶이다. 


2.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한다. 이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과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삶>이 대조됨을 말한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육체의 욕심을 쫓지 않는 삶과 관련되어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바울은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단순한 대조라기 보다 적극적으로 서로를 대적하는 관계로까지 대조시킴으로서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택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3.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한다.(18절)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순수 복음>이 주고 있는 삶이다. 자가의 의를 근거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근거로 살아가는 삶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임을 알수 있다. 


 정리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구원을 위해 율법적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삶(의무 혹은 정죄)에서 자유로운 삶이지만,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랑의 종노릇 하는 자리로 자신을 드리도록 하는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인 것이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인 항목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언급된 내용만이 전부는 아니다. 육체의 일이란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일>(16절)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이, 육체와 관련된 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영육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한, 육체의 일이란 육체의 욕심(즉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행동을 하는 삶)을 따라 사는 삶인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다.(17절)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육체의 욕심, 소욕>대로 살지 않는 삶을 말한다. 본능적, 동물적 욕구와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으로 다스리며 사는 삶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인 것이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육체의 소욕을 쫓는 것에 혈안이 되어 사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순수 복음'을 자신의 육체적 소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한 사람이지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이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의 열매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를 말한다. 그 내용들이 모두 동물적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없는 것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다운 삶(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열매인 것이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순수 복음>을 올바로 믿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순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육체의 소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그의 인간적인 욕망도 함께 못 박혔듯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와 같은 존재여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헛된 영광을 구하거나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는 식의 절제되지 않은 육체적 소욕으로 말미암은 행위들을 삼가해야 한다. 


[묵상]


1.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의 의미


2.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


3.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의 의미


4. 순수 복음 안에서 '거룩한 삶'의 위치(율법적 의의 근거는 아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의 삶)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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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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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내용이해를 위해 몇 구절씩 잘라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5-16절.

2. 17-18절.

3. 19-21절.


[본문]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해설]


본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언급된다. 우리에게 '이신칭의'의 교리로 잘 알려진 내용이 나온다.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1. 바울은 '유대인'의 의롭게 됨에 대해서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같은 죄인이 아니지만

 2. 유대인들도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잘 언급되어 있다. 


(롬 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3. 그것을 알고 유대인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다.)

 4.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유대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리하면, 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게바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유력한 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고 이 복음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도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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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해설]


본문의 표현 그 자체로 해석하려고 하면 이해하는데 좀 난해함이 있다. 그럴경우는 전후의 굵직한 맥락에 비추어서 난해해 보이는 표현을 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리라 생각한다.큰 맥락에서 17,18절을 풀어서 설명해 보려한다. 이 작업은 엄밀한 주석작업은 아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 설명한 작업이니, 읽고 큰 흐름을 이해하면 족하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위의 방법'이 아닌 '믿음(행위가 아닌)의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다시 '행위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할례'와 같은 것을 '의'의 조건으로 제시하게 된다면, 처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 인도했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된 것이 되고 만다.(이것을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듯하다.) - 따라서 이런 논리(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 이후 거기에 덧붙여서 율법으로 그 의로움을 완성해야 한다는 추가적인 가르침)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될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믿음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이 거기에 추가해서 '율법의 방법'으로 의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17절 해설)



바울이 전한 복음도 다르지 않다. 바울은 이전까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믿는 유대주의자였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의 내용을 받으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율법의 방법>으로는 의에 이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 것(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법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들고나와 '할례'와 같은 율법을 해야 '의'에 이른다고 가르친다면 바울은 자신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움으로 스스로 잘못함을 말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이 말이 되겠는가!(18절 해설)


  -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식의 가르침을 주라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아마 이와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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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해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신앙 고백적으로 말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죽었다.(그 방법론으로 의롭게 될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이라는 공식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보면 결국 <죽음_의에 이르지 못함>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19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은 자신의 의를 근거로 살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방법론을 버림으로서, 다른 방법론(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을 택하게 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이 두 개가 있었다. A라는 공식이 있고, B라는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인식하지 못했다. A라는 공식은 심플했고, 이해하기도 용이했다. 그리고 왠만한 문제들은 A라는 공식으로 거의 다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A라는 공식을 대입해 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공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A라는 공식으로 풀기 위해서 하나의 <변수>값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값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이 값과 저 값을 넣고 이런 저런 말로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합리화하지만 확신을 줄수는 없었다. 

그런데 누가 B라는 공식(이미 전부터 알려져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않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그것은 <변수>의 값이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정답을 줄수 있는 공식이었다.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이르기까지, 단순한 문제에서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명확하게 풀어줄 수 있는 공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B라는 공식이 알려지고, 그 공식이 인정된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선택한다. 이 말은 이제 사람들이 A라는 공식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런 비유가 이해를 돕기를 원한다.^^;;) 



20절. 


이 구절은 유명하고 얼마든지 은혜롭게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지만, 지금까지 전체적인 논지의 흐름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바울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듯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을 다시 가져오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제 자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라는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위의 예대로 말한다면 A라는 공식은 버리고, B라는 공식을 가지고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의 말로 표현하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인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감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1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추가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이후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성도의 삶에 가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인 정리]


1. 유대인 성도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믿음으로 나왔다.

2.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은 것이다. 

3.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버린 것이다. 

4. 그런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버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더하여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_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주장이 문제있음을 주장.

5. 나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버렸고,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만 살려고 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6.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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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해설]


11절. 바울이 모든 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게바를 책망하다.(14절)


위 본문에서 가장 눈의 띄는 것은 바울이 게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서 열등하지 않았는 것을 강조해 왔고, 그들로부터 복음의 내용을 전수 받은 것도 아님과 바울의 부르심도 그들에게서 요청된 것이 아님을 강조해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반 더 나간다.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언급함으로 오히려 바울이 게바(예루살렘에 유력한 자 중 하나) 이상의 사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물로 게바보다 바울이 더 높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서로에게 동등한 권위가 있어서 누구라도 잘못을 행하면 서로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12,13절. 게바다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식사를 자연스럽게 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한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게바가 그와 같은 <외식>을 행함(13절)으로 다른 유대인들도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것에 미혹되었다는 것이다. 게바의 행동이 적절치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에서 거짓 메시지까지 주변에 주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1)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들과 한 몸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올라온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이방인과 유대인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도 하나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셈이다. 


  2) 베드로는 자신이 확신한 것에 대해서조차 '유대인들의 눈치'를 봄으로 자신의 확신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함께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행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1:17-18)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한 것에 예루살렘에 소문이 나서 문제가 되자 그 모든 과정을 일일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설명함으로 <이방인에게도 구원얻는 믿음을 주셨다>는 결론을 내게 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즉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까지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고 증언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안디옥에서 유대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리를 피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복음 안에서 가지는 확신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고 유대인의 관습과 율법에 매인 행동을 함으로서,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불완전한 것처럼 들려지게 하는 큰 잘못을 한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3) 베드로의 이와 같은 외식은 다른 유대인들과 심지어 바나바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행동 하나가 교회 안에 상당히 큰 메시지를 전한 꼴이 되었고, 그릇된 베드로의 행동으로 안디옥 교회의 중심적인 사람들을 함께  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상징적 사건이 되고, 하나니의 복음을 훼손 시키는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간파하고 개인적인 책망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함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할 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 전체에 <교육>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묵상]


1.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임을 강조했다.(갈 1:10) 헬라인 '디도'에 대해서 '할례'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바울은 굴복하지 않고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갈 2:3-5)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유대인들을 거스르기 싫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지 못했다.(갈 2:12, 14) 그럼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음의 내용은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2. 바울은 베드로 개인의 잘못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 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력이 교회 안에 미쳤다. 그랬기 때문에 전체를 향한 공개적인 책망을 하였다. 

물론 바울이 베드로를 치리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그릇된 일에 대해서 개인적인 권면을 통한 훈계도 필요하지만, 공개적인 책망을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치리라고 하는데, 가능한 치리 해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만, 만약 그 잘못이 상징성이 있고,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크다는 공적 치리를 통해 교회를 순결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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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해설] 


1절. 14년 후에


여기서 말하는 14년 후라는 시점이 언제인가가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갈라디아서 2장에 언급된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한 이슈를 다루었다는 것은 같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는 사도행전 15장 이후(주후 49년 이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참고]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를 주후 49년으로 보고 14년 전이면 주후 35년이 된다. 여기서 다시 3년(아라비아에서의 3년) 전으로가면 주후 32년이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후 29년으로 보니,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사역 이후 3년 뒤에 회심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반면 사도행전 15장의 내용과 다른 것도 있다. 일단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다는 것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논의 결과에 대해서도 차이가 난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는 말자고 결정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외의 요청에서는 차이가 난다.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행 15:19-21)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또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공적인 회의인데 비해, 갈 2장에서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사사로이 한 것>이다. 


이와같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를 이른 시기로 혹은 좀 늦은 시기로 잡을만한 증거들이 둘다 있을 경우에는 좀 열린 태도를 가지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봐도 좋을 듯 하다.  



3절.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


디도가 헬라인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거짓 형제들)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오고 혹 성전에라도 들어갈거라면 <할례>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원칙주의자는 아니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제자로 불러 함께 사역하고자 할 때 그의 아버지가 헬라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했다고 나온다. 


 (행 16:1-3)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이것은 매우 의미하는 바가 큰데, 그 앞에 사도행전 15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의 할례>문제로 심각하게 논쟁해서 이방인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해놓고, 16장에서 와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지도 않았음에도 바울은 먼저 사역을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갈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의도적으로 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멋대로 기준을 바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할례>는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고려하면서 결정하면 될 문제인 것이다. 



 디모데는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지만, 디도의 경우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전체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요구에도 <할례를 받지 않도록>한 것이다. 



8절.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게바, 야고보, 요한)들에게도 동등한 인정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과 친교의 악수를 했고, 서로 사역의 대상(유대인, 이방인)이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가난한 자를 돌봐 달라고 요청한 예루살렘의 교회 요청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긍하지만, 그것조차도 전혀 새로운 요구라기 보다는 이미 바울이 신경써서 하고 있던 사역임을 밝힌다. 즉, 복음 이외의 것에 있어서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빚진 것이 전혀 없음을 말한다.



[묵상/정리]


1. 갈라디아서는 앞부분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서 책망한 것 이후로 하나의 일관된 내용은 바울 복음이 사람에게서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받았던 오해가 그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도성에도 열등하다고 보았고(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에 비해),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추가적인 손질이 필요했다고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사람들의 마음에 합리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사실 바울은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바울의 말씀을 듣고 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몰랐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쉽게 넘어간듯 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지 바울은 꽤 많은 분량을 이야기를 하는데 집중한다. 아직까지 다 끝난게 아니다. 갈 2:11-14까지 이어진다.


2. 바울을 <이방인의 할례> 이슈로 초대 교회의 본고장인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하긴 하지만, 그 문제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할례나 무할례나 복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바울이 싸웠던 논지는 이것이다. <할례를 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할례를 필수는 아니다>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글 속에서는 마치 <할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들려질 수 있겠다.(마치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율법은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바울은 상당히 균형잡혀 있는 성도다. 그러나 그 균형이 늘 중간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치우친 자들에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반대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바울은 지금 논쟁 중이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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