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죄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갈래로 발전했다. 


한가지는 죄를 영혼의 오염, 의지의 부패나 연약함으로 보는 존재론적인 관점이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된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하나님을 반역하고 경멸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으로 보는 관계론적 관점으로 개신교회의 주된 관점이다. 


전자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영혼은 잡초가 무성한 정원과 같고, 죄악의 싸움은 정원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며, 성화는 그 정원에 덕이라는 꼿들을 심고 가구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 신학은 죄를 벗고 덕을 쌓아가는 수덕 신앙을 강조한다. 


후자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영혼은 잘 가꾸어야 할 정원이 아니라, 갈아엎어야 할 황무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의 교정이나 덕의 함양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은혜와 회심이며, 이후 이어지는 정원사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점은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두 갈래의 이해를 통합하는 좀더 온전한 죄 이해가 필요하다. 


(중략)


오늘날 개신교회는 교회의 오랜 전통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해 보존되어 온 일곱 대죄론과 같은 죄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구체적인 죄에 대응하는 경험적인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하), 204,205쪽.


[개인생각]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죄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측면과 철저한 갈아엎음에 대한 입장만을 강하게 드러냄으로서 죄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간과하거나 약화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작고 세밀한 것까지 모두 하나의 궁극적 원인으로 환원시킴으로서 치료에 있어서도 예리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반역과 은혜 사이의 그 큰 골짜기를 메울 수 있는 어떤 내용들이 없었기에 그 영역에 있어서 매우 수동적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측면에서 그 영역을 세심하게 살핀 수도사들의 지혜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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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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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욕에 대하여 1]


1. 정욕 

   다른 이름: 타는 갈증에 마시는 바닷물


2. 정욕은 서구 사회에서 특별히 말하지 않아도 가장 치명적인 죄로 인식되어 왔다. ... 정욕은 기독교 문화가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쳐 온 서구 사회에 '부도덕'의 대명사처럼 취급되어 왔고, 따라서 사람들은 이 욕망을 매우 은밀하고 음성적으로 추구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언제 그런 시대가 있었냐는 듯, 성이 거리와 광장에서 당당히 활보하고 있으며 성애가 공공연한 볼거리이자 대중적인 즐길거리가 된 상황이다. ... 피터 크리프트는 "만약 성이 현대 사회에서 제거된다면 우리 사회는 경제 공항에 빠질 것"이라고 말한바 있다. 


오늘의 젊은 세대는 로고스적인 이성보다 에로스적인 감성을 더 중시하여, '너 자신을 알라'는 고대 스토아주의 보다는 '너 자신을 즐기라'는 에피큐리아니즘에 훨씬 큰 영향을 받고 있다. (182쪽)


[개인생각] 현대에 가장 큰 죄악은 '고리타분'이 아닐까 싶다. 고전적인 윤리관이나 가치관 혹은 전통은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말았고, 그것은 혐오스러운 것이며 현대인들에게는 비상식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뭔가 전통적인 입장에서 말하려고 하면, 사람들이 고리타분한 사람이라는 눈길을 보내며 상대를 하지 않으려 한다. '고리타분'은 이 시대의 대죄에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다.  



3. 성욕은 그 자체로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성을 만드시면서 성적 욕망을 인간에게 선물로 주셨기 때문이다. 

  (중략)

   성의 이런 독특한 기능과 성격 때문에 몸은 일종의 성례적 기능을 가진다.(184쪽)


4. 정욕은 성욕과는 다르다.

  일반적으로 '통제할 수 없는 과도한 성적 욕망'으로 정의되는 정욕은 왜곡된 성욕이라 할 수 있다. 자신을 위해 상대의 육체와 감정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하는 성적 욕망을 정욕이라고 한다.(185쪽)


헬리 페어리는 진정한 사랑과 육체적 정욕의 차이를 솜씨 있는 대조하며 그 차이점을 설명한다. 


사랑이 상대에게 관심이 있다면, 정욕은 짜릿한 욕구 충족에 더 관심이 있다. 

사랑은 인격적 교감으로 따듯해지지만, 정욕은 외롭고 고독하다. 

사랑은 미래를 위해 때로 절제하지만, 정욕은 현재 감정과 만족에만 골몰한다. 

...

사랑은 잠자리를 나눈 사람과 또 다른 방식으로 함께 있기 원하지만, 정욕은 아침이 되면 남의 눈을 피해 남남이 된다. 


[개인정리] 죠이 스피릿이 빠진 성욕은 정욕이 되고 만다. 

  * 죠이 스피릿이란: 예수님을 첫째로 이웃을 둘째로 자기 자신을 마지막에 둘때 참된 기쁨이 있다는 스피릿.


[정욕에 대하여 2] 


1. 육체적 죄이자 영적인 죄


  마귀는 금욕 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이 육체의 쾌락을 추구하도록 유혹하는데, 정욕과 탐식은 가장 대표적인 것이었다. 이들은 마귀가 사람을 탁식에 빠지게 함으로써 정욕으로 유인한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탐식으로 인해 마음과 몸이 느슨해지고 게을러지면 쉽게 인간의 마음으로 들어가 이성과 정신을 장악하여 혼미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욕은 육체에 속한 죄인 것 같지만 근원적으로는 마음과 정신에서 말미암는 죄다. 


2. 정욕의 원인들: 최상 정욕과 바닥 정욕


세이어즈는 인생이 최상의 상태에 오를 때와 바닥으로 내려갈 때 모두 정욕에 취약하다고 분석했지만 최상의 상태에 오를 때는 쉽게 정욕에 빠지듯이 극복하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기 때문에 덜어렵다고 보았다. 반면 바닥에 내려간 상태에서 정욕에 빠지만 다시 해어나오지 못하게 되기 쉽다. 이 경우 정욕을 벗어날 수 있는 기운이 왕성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C.S. 루이스도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서 이와 같은 관점에서 글을 쓴 것이 있다.) 


3. 정욕을 이기는 길


  1) 자리를 피하라: 부딪혀 이기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피해야 한다. 요셉처럼.


  수도사 에바그리우스는 정욕이 보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한다. 그는 사실 정욕으로 인생의 치명적인 위기를 맞은 수도사였다. 4세기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단과의 신학 논쟁으로 명성을 얻어 신망과 입지를 굳히고 있을 즈음, 에바그리우스는 한 교회 중직자의 아내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걷잡을 수 없이 끌리는 마음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위치 사이에서 갈등하던 그는, 어느날 밤 여자의 남편이 군인들과 함께 집에 들이닥쳐 그를 끌어내고 감옥으로 집어넣는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깬 에바그리우스는 마침내 결단을 내렸다. 정욕의 수렁에 빠져 죽기보다는 지위와 명성을 잃더라도 수렁에서 벗어나는 길을 택한 것이다. 그녀를 보는 한 그 수렁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은 그는 콘스탄티노플을 박차고 나와 예루살렘으로 피했다. 더 이상 머물렀다가는 인생이 파멸에 이르고 말리라는 정직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2) 이 시대의 거짓말을 간파하라.

    [이 시대의 거짓 가치관]

   (1) 나는 내가 원하는 사람과 함께 무엇이든 즐길 권리가 있다. 

   (2) 성적 즐거움은 그 어느 것보다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 


  3) 배우자와의 친밀함을 높이라. 


  토마스 아퀴나스는 정욕의 반대 극단에 있는 '성에 대한 무감각'과 '성 혐오증'을 정욕 못지않은 해악이라고 지적했다. 즉 부부들은 하나님이 상대를 섬기고 누리도록 허락하신 성적 즐거움을 최대한 누릴 수 있도록 상호적으로 의식하고 노력해야 한다. 남편과 아내가 각자 자기 몸을 배우자가 주관하도록 하라는 바울의 권고를 따라(고전 7:4) 서로의 욕구를 존중한다면, 마귀도 틈을 탈 기회를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이다. 


  4) 우정을 극대화하라. 


   천국에는 성이 없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정이 그 자리를 대치할 수 있다고 보는 것 같다. 


  5) 궁극적 대안: 근원적 쾌락

   물질적 쾌락보다 더 근원적인 쾌락인 하나님과의 관계가 깊어진다면 인간이 누리를 성적 욕구에 대한 것보다 더 풍성한 풍요를 누리를 수 있게 되며, 결핍으로부터 극복될 수 있음을 지적한다. 성 어거스틴도 방탕한 생활 이후 회심하고 나서는 홀로 살았는데 이전보다 더욱 큰 기쁨을 가졌다고 한다. 


[개인생각] 어떤 감정이나 욕구가 처음부터 악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로 직진하듯이 아무 의식없이 달려간다면 우리는 큰 죄악에 빠지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죄로 인해 스스로 통제할 능력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우측 도로로 늦지 않는 순간에 나와야 합니다. 초행길을 가는 사람처럼 고속도로 어느 중간에 나와야 할 지를 늘 신경쓰지 않으면(이정표를 경고삼지 않으면) 우리는 돌아오기 힘든 길을 가게 되는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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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에 대해서 1]


탐식: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


탐식을 죄로 규정하고 경계해 온 중세 교회의 전통은 4-5세기 수도원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수도사들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만 먹어야 했고, 그만큼 음식에 대한 유혹이 키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마른 빵을 물에 적셔 부풀려 먹고 채식을 해야 했던 수도사들은 풍족한 음식과 이전에 먹던 고기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괴로워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여덟 가지 악한 생각'으로 수도사들을 유혹하는데 그 첫 번째가 식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죄들 중에서 탐식이 가장 낮은 수준의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극복하기는 가장 힘든 죄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60쪽)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다섯 유형으로 좀더 세분화했다. 


1. 급하게 먹는 속식: 마치 음식이 곧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재빨리 먹는 것. 이것의 문제는 단지 빠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고 음미할 겨를도 없이 먹으면서 감사를 잃어 버린다. 탐식자는 먹는 일 자체에 골몰할 뿐 감사가 없다. 


2.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 음식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맹렬하게 먹는 것을 뜻한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얼굴을 음식에 바짝 붙여서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려는 욕심으로 맹렬히 먹는 것이다. 이런 식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것이다. 


3. 지나치게 많이 먹는 과식: 배가 부르지만 수저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한계 그 이상으로 음식을 집어 넣는 것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음식에 더 미련을 두지 않지만, 인간은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더 먹고 싶어한다. 


4. 까다롭게 먹는 미식: 이는 조금을 먹더라도 까다롭게 먹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곤혼스럽게 한다. 이들은 자신이 많이 먹지도, 비싼 음식을 원하지도 않고 그저 소박하게 먹는다고 생각하며 '이 간단한 것 좀 제대로 해주면 안 되나?'하고 생각한다.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등장하는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식사량이 줄어든 사람에게는 전략을 바꾸어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 주라고 조언한다. '제가 원하는 건 잘 우려낸 홍차 한 잔이에요. 엷게 타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연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바삭바삭한 토스트 한 조각만 곁들여 주시구요..'


5.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을 뿐 아니라 세련된 분위기 우아한 식탁과 같은 여러 조건을 갖추 식사를 바라고 고집하는 것.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한), 162-164쪽.


[개인생각]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중간적인 균형을 잃어버린 채 과도한 욕심으로 달려가는 것이 탐식인듯 하다. 죄라고 보기 보다는 미련하게 행동했다는 것으로 무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급하고 게걸스럽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식사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까다롭게 먹고, 사치스럽게 먹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난친 가난은 탐식으로 몰고간다. 지나친 부 역식 탐식으로 몰고간다. 


[탐식에 대하여 2]


에바그리우스 역시 탐식은 '정욕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탐식에 빠지면 지성이 흐려지고 욕적이 고조되어 행동이 난잡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제자 카시아누스는 그 누구보다도 이 점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일곱 대죄를 육적인 죄와 영적인 죄로 나누었고, 죄는 육적인 죄에서 점차 영적인 죄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육체에 속한 죄 중에 탐식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은 정욕이 오는데, 이들은 사슬에 연결된 것처럼 앞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그 다음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대인들은 먹을 것은 포기하지 않은 채(맛은 포기하지 않은 채) 좀 더 까다롭게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열량, 저지방, 무가당 식품을 찾기 시작했으며 설탕이 없으면서도 톡 쏘는 사이다, 카페인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자극적인 콜라, 지방이 적은 음식, 유기농 과일 등을 찾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까다로운 식습관을 탐식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도 탐식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168쪽)


<탐식을 이기는 길>(170-177쪽)


1. 신령한 양식에 길들라: 몸은 담백하고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도록 길들이고 영의 양식을 채우기에 힘써야 한다. 


2. 금식: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을 끊어 몸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근원을 차단하는 일종의 자기부인 행위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에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과 '노동', '독거'라는 특별 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이중 배고픔은 금식을 가리킨다. 


기독 교회 역사를 통해 매년 교회 안에서 시해되어 온 두 행사는 바로 금식과 만찬이었다. 둘은 모두 음식과 관련된 것으로 금식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며,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한 떡을 떼어 먹음으로써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3.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금식을 윤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개인생각] 금식은 소극적인 경건이라면, 감사는 적극적인 경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구제: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훈련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음식을 금하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는 연습을 하는 것이 몸의 욕망을 다스리는 훨씬 효과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몸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양만 먹고 남은 음식은 먹지 못하는 빈곤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다.


5.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기:  나눔을 일상에서 더욱 풍성히 살아내는 실제적인 방법은 바로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는 일이다. 그런 삶이 몸에 익으며, 음식은 더 이상 자기 만족의 도구가 아니라 이웃과 연결되고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매개체가 된다. 


  [개인생각] 탐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으로 채우고, 필요한 양을 먹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육체적인 훈련을 한 후 점점 이웃과 나누어 먹는 훈련으로 나아갈 때 가장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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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는 분뇨와 같아서 축적되면 악취를 내고, 뿌려지면 땅을 비옥하게 한다>.(레오 톨스토이)


<수도사 에바르리우스>

"강물이 모여 바다로 흘러 들어가지만 결코 바다를 채우지는 못하듯이(전 1:7), 탐욕도 어떤 것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바다와 같다"


<탐욕을 이기는 길>


1. 근원적 안전감과 만족


  1) 탐욕의 근원은 여러가지겠지만 사막의 수도사들이 제시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을 지키고 삶을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마음이다. 이런 안정감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 확보하려는 마음이 탐욕을 부른다. 따라서 물질적인 안정감, 임시적인 안정감을 주는 것에서 자신을 자유하게 하고 영원한 안정감을 주시는 하나님을 반석으로 삼아야 한다. 


[생각] 탐욕의 시작은 무리한 욕심, 과도한 욕심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욕구, 부족하지 않고, 불안하지 않으려는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욕구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욕구는 <조금만 더>는 있지만, <이제 그만>이라는 말은 없다고 한다. 과도한 안정감은 탐욕을 정당화한다.


   2) 사막 수도사들은 두번째 이유로 내적 결핍을 제시한다. 

   영혼과 정신의 가난을 우리 인간은 물질로서라도 채우려고 한다. 채울 수 없는 내적 결핍은 채워지지 않는 물질적 탐욕으로 나타난다. 


  [생각] 청소년기 학생들이 고가의 등골블랜드에 집착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내적 결핍이 아닐까? 불안정한 자존감과 과시욕 혹은 소외에 대한 두려움 등이 그들로 하여금 고가의 브랜드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겠는가? 내적 결핍과 정신적 결핍이 과도한 물질적 탐욕으로 표면화됨을 보게 된다. 


2. 자족과 단순한 삶


  1) 단순한 삶을 위한 구체적인 방법은 삶의 규모를 줄이고 단순화하는 것이다. 


  로날드 사이더(Ronald Sider)는 의식주와 관련된 것을 '필수품', '있으면 유용한 것', '없어도 되는 것', '사치품' 등 크게 네 가지로 분류했다. 그리고 필수품 이외의 것들은 '잉여 소유물'로 취급하고, 단지 생활을 좀더 편하게 만들어 주는 이와 같은 물건들은 계속 줄여 가야 한다고 했다. 


3. 나누기


  삶을 단순하게 살아가는 것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더 나누기 위함이다. 

  로날드 사이더는 현대인들도 일상에서 '누진 십일조'를 실천함으로써 좀더 많은 소유를 나눌 수 있다고 제안한다. 누진 십일조란, 생활에 꼭 필요한 필수 소득의 액수를 정하고, 그 액수를 넘어서는 잉영 소득에 관해서는 소득이 증가하는 범위마다 헌금의 비율을 높여 누진율ㅇ르 적용한 더 많은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다. 


  존 웨슬리

  "할 수 있는 한 많이 벌고,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저축하라. 그리고 가능한 한 모든 것을 나누어 주라."


[정리] 탐욕이 벗어나기 힘든 것은 그 근원이 정당한 안정감에 대한 욕구에 있기 때문에 죄라고 인식하기 어렵다. 안정감의 욕구로부터 시작해서 자라나는 탐욕은 언제나 충분한 만족을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늘 충분하지 못한 결핍의 상태에 있다고 느낀다. 따라서 자신이 무엇을 나눌 수 있는 충분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생...영원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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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태에 대해서 1]


세상에서는 나태를 관용이라 부르고, 지옥에서는 절망이라고 부른다.(도로시 세이어즈)


사람들은 나태라고 하면, '몸이 굼뜨고 행동이 느리 모습'을 연상하고 그 정의를 '좀처럼 움직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회가 죄로 규정해 온 나태는 이와는 성격이 무척 다르다. 이 전통은 나태를 단순히 몸이 느슨하고 느린 상태가 아니라, 영혼이 병든 것처럼 의욕과 활력을 잃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빠진 것으로 이해했다.(111쪽)


이처럼 나태는 의욕이 없어서 무기력해지고 어떤 일에도 감정이 동하지 않아 마침내 손을 놓고 아무것도 행하려 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세이어즈는 나태를 이렇게 정의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알려고 추구하지 않고, 간섭하지도 않고, 즐기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위해서 살아야 할 그 무엇도 없고, 또 죽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저 살아 있는 죄다."(112쪽)


나태가 다른 죄들에 비해 독특한 점은, 행하는 죄가 아니라 행하지 않는 죄라는 점이다. 어떤 흉악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생각] 나태란 자기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아니라는 것이 충격적이다. 우리는 죄를 지어도 술먹고 한 잘못은 실수로 봐주며 관대하듯이, 나태를 단순히 자기 관리를 잘못하는 정도로 관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태란 영적 무기력이며 생명력을 잃어 버린 것으로 마땅히 해야할 선을 하지 않는 죄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것과 나태를 혼돈하는가? 자기 관리의 부족은 지혜의 문제지만, 나태는 죄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나태에 대해서 2] 


<나태의 별명: 정오의 마귀> (수도사 에바그리우스) 


정오에 이르는 재앙처럼(시편 91:6) 밝을 때 넘어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수도사들이 오전 10시 경만 되면 찾아와 슬그머니 말한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족히 50시간은 지지 않을 거라고' '이 따금식 창밖을 내다 보라고' '골방에서 나와 태양이 중천에서 얼마나 움직였는지 바라보라고' '다른 수도사들도 밖으로 나와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유혹한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를 미루게 하고 결국 그 수도사를 수도원 밖으로 밀어내고 만다.


<단테>

나태한 자는 일생 동안 미루는 습관을 갖고 있다가 더러는 회개하는 일까지도 미루고 만다.


[나의 생각] 미룸, 미룸, 미룸... 그것은 의욕을 잃은 것이지요. 우리 안에서 의욕이 있고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늦은 밤에도 하기 마련이고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혹은 덜 중요한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니까요. 미룬다는 것은 그것을 향한 내 안에 생명력, 열정, 사모함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결국 그것은 미룸, 미룸, 미룸이 되고 말지요.



[나태에 대해서 3] 나태를 이기는 길


1. 목적의식과 소명

   : 에바그리우스는 수련에 소홀하고  태만한 수도사들에게 기도나 성경 암송, 노동 시간을 늘리라고 주문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앞서 왜 수도를 해야 하는지, 왜 하나님을 섬기고 욕망을 절제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며 목적을 재확인해 보라고 독려했습니다. 


확고한 목적의식과 소명이야말로 일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 됩니다.


2. 구체적 목표 설정

   : 목표가 명확하고 적절하면 확실히 나태할 수 없게지요.

   : 인생을 여러 단계로 나눌 때, 특히 중년기에 가장 위협적으로 작용하는 죄가 바로 나태다. 중년기는 자녀들을 다 키우고 생활도 안정되어 있으며 특별히 더 추구해야 할 목표가 없기에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지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다. 


3. 수도사들의 덕목을 따름

   : 여러가지가 있지만, 특히 몸과 마음이 느슨해져 있는 수도사에게는 무엇보다 육체적인 노동이 좋은 치유책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노동은 나태를 극복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에 수도사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중시한답니다. 


4. 소망의 끈

   : 절망은 낙심을, 낙심은 우울을, 우울은 나태를 만들어 냅니다.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라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가막힌 상황에서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없는 상태(helplessness)보다 소망이 없는 상태(hopelessness)가 훨씬 무서운 것임을 알고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구체적인 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나의 생각] 청소년이나 청년 사역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치우치듯이 강조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태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아이들을 봐도 제일 답답한 것은 이녀석들이 시간을 죽이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 살며,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동기부여와 그림이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체성과 비전을 강조한다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처방인듯 합니다. 중년들은 안주하지 않는 것, 끝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기 위해 배우기를 힘쓰는 것이 나태함에 빠지지 않는 길인듯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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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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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노에 대해서1]


고대 그리스 철할자 플라톤은 용기 있는 자만이 분노할 수 있다고 말하며 분노를 현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화를 낼 만한 일이나 대상에 대해 적절한 때에 화를 내는 일은 칭찬받을 만하며, 이것은 악이 아니라 도리어 미덕이라고 주장했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하), 87쪽.

분노가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분노를 용서와 사랑이라는 덕목으로 <억압>만 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할듯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분노가, 뒷담화로 나타나기 쉬운데 분노에 대해서는 격하게 정죄하면서도, 뒷담화에 대해서는 서로 관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분노에 대해서2]

인간이 화를 낼 때 그것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화가 의로운 것이든 아니든 좀처럼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분노해야 마땅한 대상에게 마땅한 몫으로 갚아 주는 정의의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89쪽)

흔히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성을 잃는다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정신이 한 곳으로 몰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성은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할 계획과 전략을 짜는 쪽으로 몰린다.(91쪽)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분노에서 태동하는 복수는 그래서 강력하고 집요하며 사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악이 집중되는 것은 분노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다스리지 않고 방치하거나 방임한다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어놓고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분노는 위험하다.


‎[분노에 대해서3]

분노를 이기는 길(98-106쪽)

1. 원수 갚는 일은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
: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고 내가 심판하지 않기

2. 용서하기
: 분노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용서해 버리기

3. 분석하고 소통하기
: 객관화하여 분노의 대상을 분산시키기라고 보면 될 듯

4. 입 안에 침이 고이기까지
: 일단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참기

5. 생산적 에너지로 전화하라.
: 루터는 화가 나면 화를 솟구치게 하는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글쓰기와 연구에 몰두했다는...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올 해는 우선 실천하기 쉬운 것부터 해 봅시다. 입 안에 침이 고일때까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분노를 다스려 보는 것부터 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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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친구가 길을 가다 왕을 만났다. 둘 중 한 명은 욕심이 많았고, 다른 친구는 시기심이 많았다. 왕은 두 사람에게 "만약 너희 중에 한 명이 요청하면 무엇이든지 그대로 주겠다. 단, 옆 사람에게는 요청한 것의 두 배를 주겠다."고 말했다. 


왕의 말을 들은 시기심 많은 친구는 먼저 나서서 요구하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친구가 두 배로 받는 것이 달갑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욕심 많은 친구도 마찬가지였는데, 자신이 친구보다 더 많이 차지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고 도무지 요청하려 들지 않았다. 


기다리던 왕이 부탁이 없으면 그냥 가겠다고 말하자, 시기심 많은 친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임금님, 저의 왼쪽 눈을 빼 주십시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신원하 / IVP / p. 71,72


시기심이란 자신이 친구보다 더 가질 수 없다고 판단이 되면, 상대에게 더 많은 피해를 주기 위해 자신의 피해를 기꺼이 감수하게끔 하기도 한다. 내 눈을 한쪽을 빼는 한이 있더라도... 기필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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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단테는 이 7가지 대죄를 사랑과 관계되어 3가지로 구분합니다. 

왜곡된 사랑, 불충분한 사랑, 과도한 사랑.

사랑이란 이름만 붙인다고 다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어쩌면 모든 죄는 사랑의 돌연변이 입니다. 





4세기 사막 수도사로 부터 규정된 죄의 규정은 조금 변화되고 정리되어 로마 가톨릭 안에서 7대죄(죽음에 이르게 하는)로 자리를 잡았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이 일곱가지 죄는 모든 죄의 머리가 되는 죄로 다루어졌다.




단테는 대죄를 그릇된 세 유형의 사랑으로 분류했다.


첫째,  교만, 시기, 분노와 같은 죄를 <왜곡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둘째, 나태와 같은 죄를 <불충분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셋째, 탐욕과 탐식과 정욕은 <과도한 사랑>이라고 했다. 



20세기 소설가이자 단테 연구가인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크게 두가지로 7대죄를 구분했는데


첫째, 정욕, 분노, 탐식을 <뜨거운 마음의 죄>

둘째, 탐욕, 시기, 나태, 교만을 <차가운 마음의 죄>


구분했다. 


추가적인 설명으로 뜨거운 마음의 죄는 최소한 공동체 생활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차가운 마음의 죄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균열시키는 더욱 파괴적인 죄로 여겼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신원하 / IVP /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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