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에 올린 글에서 중세시대 성경을 모국어인 영어로 번역한 위클리프에 대해서 글을 옮긴 것이 있었다. 이번에는 윌리엄 틴데일이라는 사람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위클리프와 틴데일을 역사적으로 이렇게 평가한다.

"위클리프는 성경의 일부를 번역했다는 사실보다는 남들에게 영향을 미친 점이 더 높이 평가되는데 비해, 틴데일은 대부분의 성경을 자기 손으로 직접 번역했던 인물이다. KJV는 여러 면에서 틴데일의 번역판을 개정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틴데일이 태어날 때(1494년)만 해도 일찍이 1408년에 만든 헌법(위클리프의 번역판에 대한 대책으로 비공인된 영어 성경을 일체 읽어서는 안된다는 금지령)이 여전히 실효성을 갖고 있었다.

 

그런 시대에서 틴데일은 새로운 성경 번역에 착수하기 위해 런던에 있는 주교에게 승인을 얻으려고 애썼다. 그러나 헨리 8세가 여전히 가톨릭 신앙을 변호하고 있었던 만큼 그만 퇴짜를 맞고 말았다. 그래서 틴데일은 1524년에 독일에 이주해 다시는 잉글랜드로 돌아오지 않았다. 독일에서 그는 비텐베르크에 살고 있는 루터를 만났고 신양성경 번역을 완수하게 되었다.

 

1526년 초, 많은 신약성경이 '상품을 넣은 상자, 술통, 옷 짐짝, 밀가루와 옥수수 부대 등에 숨겨진 채' 잉글랜드로 밀반입되었다. 헨리는 틴데일의 번역에 반대했고, 교회 공직자들은 성경을 구입해서 공개적으로 불태우기도 했다. 이런 반대가 오히려 판매를 도와주었고 틴데일이 죽을 때까지 잉글랜드에서 5만 부 이상 팔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 재미난 일화가 있다. 한번은 유럽을 방문하던 어느 주교가 한 상인과 접촉해 틴데일 신약성경을 모두 사겠다고 나섰다. 속셈은 그것을 모두 잉글랜드로 가져가서 런던에서 불태울 생각이었다. 한 친구가 틴데일에게 그렇게 하면 빚을 모두 갚고 최근에 수정한 부분을 포함시켜 더 많은 부수를 인쇄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설득했다. '그래서 거래가 성사 되었다. 주교는 그 책들을 모두 확보했고, 패킹햄(상인)은 고맙다는 소리를 들었고, 틴데일은 돈을 벌었다' 이제 틴데일은 구약성경에 관심을 돌려서 1530년에는 모세오경의 영어번역판을 선보였고, 1531년에는 요나서를 출판했다.

 

틴데일은 결국 훗날 배신자에 의해서 잡혀 화형에 처해지는 죽음을 당했지만, 그가 젊은 날 고백했던 말처럼 "하나님이 자기 목숨을 살려주신다면 쟁기를 모든 소년이 성직자보다 성경을 더 많이 알게 할 것"이라는 고백처럼 살다가 갔다. 그는 마지각 옥중에서도 히브리어 성경과 히브리어 문법책과 히브리어 사전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간청했고, 마지막 화형을 받는 현장에서도 '주님, 잉글랜드 왕의 눈을 열어주소서'라는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윌리엄 틴데일은 뛰어난 언어학자이자 탁월한 번역가였다. 그의 번역에 나오는 많은 어구는 오늘날까지도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성경번역의 역사, p154-157 정리)

1. 성경의 번역본들은 그 시대의 언어(일상언어)를 표준화하고 고급화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도, 틴데일의 영어 성경도, 또한 성경의 한글 번역본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생각한다.

2. 영어로 번역된 성경을 위험하다고 본 한 주교(당시의 가톨릭)의 번역된 성경을 제거하고자 한 행동이 오히려 더 많은 영어 번역본을 활자화할 수 있는 자금을 대주고, 영어로 된 구약 성경 번역을 위한 자금줄이 되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일이다. 

3. 윌리엄 틴데일은 성경번역을 통해 일반적인 사람들이 성경을 알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것을 중요한 사명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 일에 목숨을 걸었다... 목회자로서의 나의 사명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자명한 답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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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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