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치유>


저자: 데이비드 시맨즈

출판사: 죠이북스

  * 상함 감정과 억압된 기억의 치유(죠이선교회): 개정판


상담과 내적치유라는 내용은 정통신학(하나님과 성경중심) 입장에서 보면 가벼운 주제로 여겨지는 같다. 단순히 주제가 쉽고 편하다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주제가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측면에서 상담과 내적치유를 조명해 봐야 필요가 있다. 상담과 내적치유는 단순히 목회적인 기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의 신학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다른 주제에 비해서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상담내적치유 어떻게 성도를 도울수 있을까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란 과연 존재인가에 대한 이해를 도울 있는 주제가 된다. 


  책은 내적 치유 중에서 특히기억 치유를 주제로 다룬다. 성경을 통해서 , 하나님은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좋은 소식 하자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좋은 소식 좋은 소식으로 듣 못하, 때론나쁜 소식으로 듣곤 한. 무엇이 문제인가? 저자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수신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책에서는 상처입은기억’(무의식적 기억조차) 수신기를 고장나게 했고, 수신기를 달고 사는 인간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서 왜곡할 밖에 없음을 말한다. 


수신기가 고장나게 되었는가? 고장의 원인이 무엇이고 고장의 심각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3 결론부에서는 어떻게 목회자는 고장난 수신기를 고칠수 있도록 도울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 


  1. 자신의 수신기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타인의 선한 의도와 중립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자주 혹은 종종 왜곡된 반응을 보여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
  2. 과거의 상처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상처 저변에 (자신이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람들.
  3. 상처입은 누군가를 도와야 입장에 있는 사람들. 목회자, 소그룹 인도자, 목장과 구역리더들
  4. 상담과 내적치유와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고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를 원하는 사람들.


일부 전통적인 신앙의 입장과 약간 다른 저자의 경험을 담은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신학적 입장이 다른 분들은 점을 고려해서 보면 된다. 


* 책에 대한 추가 정보는 죠이출판사의 소개를 참고하라.

http://joypress.tistory.com/162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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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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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2년 전 죠이에서 나온 <하나님의 도시>란 책을 적극 추천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날 집에가서 책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을 나누는 것이 좋을지(책에 대한 흥미유발) 나쁠지(대략 내용을 알고나면 구매의욕이 오히려 떨어질 수 있음) 판단하기 어려워 '비공개'로 해 놓았다. 


대신 동기 부여가 될 만한 부분을 짧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책이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스카이 제서니, 한국명(?)천재선)도 현시대의 기독교가 가진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문제의식과 공감되는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의식을 다루거나, 너무 두리뭉실한 문제의식으로는 책을 읽고자 하는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저자의 논리 전개는 이렇다. 

1. 현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인식(종말론)에 있다. 

2. 현재 기독교가 가진 문제를 저자는 미래에 대한 그릇된 인식(비성경적 인식) 때문이라고 봤다. 

3. 현재의 청년들은 낙관론적인 미래를 믿지 않는다. 낙관론적 미래는 할아버지 시대에나 먹혔다. 지금의 세대는 낙관론적 미래를 조롱하는 세대다.  

4. 그리고 이 세대는 '지금 이 순간 미래의 증거'를 요구한다. 언젠가 모든 일이 잘될거야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그 말은 이미 많이 들었다.)

5. 이 세대는 냉소주의에 사로잡혀 냉소주의를 완화해 줄 수 있는 희망을 거부한다.(우리는 이런 악순환에 빠져있다.)


저자의 이와같은 인식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교회가 이 세대가 두르고 있는 냉소주의라는 갑옷을 꿰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 미래에만 국한되지 않는 희망을 제시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살아있는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희망을 제시하여 개인적인 상처뿐 아니라, 그런 상처를 주는 가정, 공동체, 단체들같이 이 세상의 망가진 체계도 어루만져야만 한다."(1장, 27쪽)


저자는 현재를 형성하는 미래의 힘은 두 가지 방식을 가지는데 하나는 '희망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라 한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은 지금하고 있는 것이 '영원'과 이어져있음을 알때 절망 속에서 지금의 일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는 지금 하고 있는 일(성도들의 일상)이 교회에 속한 일의 적극적 도구가 되거나 전환되어야 의미있다고 가르침(이원론적, 현실 도피적)을 줌으로 성도가 처한 현장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더 나아가 이원론적인 종말의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조차 왜곡 시켰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가 위드<WITH>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법뿐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법도 다시 상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리고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미래>(종말)에 대한 인식을 성경적으로 해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후로 저자는 성경이 말하는 미래(종말)을 말하고(2장 결말) 그 이후 그간 기독교에서 잘못 가르친 개념(3장 진화, 4장 대피)을 설명한다. 그리고 5장 부활에서 정말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개념이 무엇인지(세상에 대한 건강한 인식)를 밝히고 결국 성도는 이원론적 가치가 아닌 자신의 소명(6장)에 따라 살아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다시 한번 소명을 구체화해서 설명한다. 왜냐하면 소명에 대한 편향된 관점, 간과한 관점이 또 한번 왜곡을 가져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질서(7장), 아름다움(8장), 풍요로움(9장)을 확장하는 일이란 오늘과 미래도시를 연결하는 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지막 10장은 저자의 주장을 함축한 개인적인 경험과 적용이며 핵심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책의 방향성과 흐름과 지향적을 고려해 본다면 몇 번을 봐도 좋을 책이다. 현대적이며 희망적이다. 


교보문고: https://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42103591&orderClick=JAj

알라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5242397

예스24: http://www.yes24.com/24/goods/17293036?scode=032&OzSran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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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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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하나님의 도시>란 책을 다시 읽었다. 2년 전쯤 책이 발간되고나서 바로 읽었을 때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한 현재적 종말론적 삶에 대한 설명이 깊이 와 닿았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잡았다.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보통 그렇듯이 첫 인상이 좋았다고 실제로 두 번 읽게 되는 책은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었고 지금 그 내용을 정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쓴다. 책을 다 읽고 주변에 그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저자의 이전 책(하나님을 팝니다, 위드)이 강렬해서 기대하고 봤는데 좀 실망했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이 책이 이 전 책과 성향이 좀 다르며 책의 전체적인 논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좀 산만하게 읽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읽으면서 파악한 논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래야 혹 이 책을 읽게 되는 분들이 덜 혼란스럽게 이 책이 주고 있는 유익을 최대한 누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큰 틀에서 저자의 논지 흐름을 따져본다면, 첫장(비전)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것이다. 미래는 현재의 삶을 결정하는데 미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냉소적인 세대가 되었다. 낙관적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는 세대다. 교회가 말하는 낙관적 종말(점진적 성장을 통한 완성) 역시 성도들의 헌신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히려 낙관적 미래를 말하는 것을 조롱하는 냉소적인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현 시대는 미래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역사적인 사건. 1939년 뉴욕 박람회, 디즈니월드의 투모로우랜드 방문, 개인적으로 동생의 죽음의 사건 등을 그 감정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이와같은 상황인식을 못하고 헛다리를 짚는 방식으로 <당위>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지적한다. 저자는 교회가 건강한 종말론을 가르치지 못한 것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미래 완성될 <하나님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한 부분이 잘 나와있고, 문제의식이 잘 나와있다. 첫 장을 정성스럽게 읽는다면 그 힘으로 끝장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만큼 흥미롭다. 

둘째장(결말)은 간략하게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과거의 회귀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을 분명히 한것이다. 창세기는 <동산>에서 시작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도시>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동산에서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서 <광야>를 거쳐야 하는 시기가 있지만 그 광야에는 여전히 질서가 있었고, 아름다움이 함께 했으며 풍요로움이 동반되었음을 저자는 출애굽한 백성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설명하면서 간략하게 언급한다. 

저자는 사도요한이 미래도시를 환상가운데 보고 다시 현실로 내려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의 현실을 살면서 어떻게 사도 요한이 보여준 <미래도시>가 도래할 것인가 기대하게 되었을까 질문하면 다음 장으로 인도한다. 


셋째장과 넷째장은 지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미래 도시>가 어떻게 성취될 것으로 인식하고 가르쳐왔는가를 제시한다. 저자는 두 개의 가르침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진화(셋째장)고 다른 하나는 대피(넷째장)다. 진화는 낙관적인 성장을 통한 미래도시 완성의 종말론인데 이와 같은 개념은 교회의 역사속에서 희망을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냉소주의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성경적 질서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자는 비전은 빛바랜지 오래되었다. 더 이상 이런 구호는 사람들을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지 못한다. 또 한 부류는 <대피>신학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니 <영혼구원>에만 주력하자는 방식이다. 이런 종말의식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은 부차적인 것이며 결국 헛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를 섬처럼 세상속에서 고립된 존재가 되거 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의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영역을 점령하자는 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자신의 것을 확장하려는 이기적인 기독교로 인식되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미래도시>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인식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임을 저자는 지적한다. 

다섯번째 장(부활)에서 저자는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르친다.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죽음에서 부활이라는 불연속성(하나님의 전적 개입)과 여전히 연속적인 '몸'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미래도시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설명한다. 한 가지 비유를 드는데, 넬슨 만델라가 케이프타운에서 바다로 7킬로미터 떨어진 섬에서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 갔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만약 육지와 그 섬 사이의 바다가 사라진다면 넬슨 만델라의 정원이 육지와 연결될 것임을 제시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미래도시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질서가 잡히고, 아름다움이 일어나며 풍요가 넘쳤다. 이제 그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저자는 말한다. 내게 주어진 동산에 질서를 만들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풍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섯번째 장(소명)에서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미래도시의 그림 앞에서 우리가 오늘, 붙잡아야 할 것은 다시 <소명>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소명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최고소명> 둘째는 <공통소명> 셋째는 <특별소명>이다. 최고소명은 그리스도 그 분을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의 두번째 책 <위드>는 이 최고소명이 변질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다룬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심된 신앙이 아닌 하나님을 일로서, 도구로서 관계하려고 하는 신앙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룬 책이다. 둘째소명은 <일반소명>이다. 일반 소명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느시대 누구든지 순응해야 하는 말씀들로 서로 사랑하고, 윤리적으로 살고, 용서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는 등등의 소명이다. 셋째 소명은 <특별소명>으로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독특한 부르심에 대한 것인데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개별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일반소명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특별소명>에 대한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적어진다. 대개이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 속에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의 특별소명의 가치에 대한 말씀보다 일반소명(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역과 모임, 헌신 등)에 대한 강조만 듣고 그로 인해 교회에서 위축되거나 죄의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저자도 설교하지 않고 오랫동안 청중이 되어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의 가르침이 어떤 방향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의 설명대로 본다면 세가지 소명중 우리는 첫번째 소명을 관계보다는 사역과 일로 만들어버리고, 일반소명만 강조함으로 특별소명을 근거로 살아가야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작아지고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우를 범해왔다고 볼 수 있다. (진화하라고 도전하거나 도피하라고 겁주면서)

저자는 일곱장(질서), 여덟장(아름다움), 아홉장(풍요로움)을 다루면서 미래도시가 보이지 않는 광야와 같은 이 땅에서 어떻게 미래도시의 동산지기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시한다. 첫째는 <질서를 부여하는 일>의 가치를 강조한다. 바른 규정을 따라 질서를 만들면 그곳에서 화평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올바른 질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강조한다. (경찰은 사회를, 부모는 가정을) 사회 정의를 위하는 것이 우선인가? 전도가 우선인가? 이 두가지 질문에 저자는 둘 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사회정의를 통해 선교를 해야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 목적이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관계의 질서(식탁과 성찬을 통한)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평화와 화해의 관계를 부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따로 언급한다. 

둘째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은 <실용성>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아름다운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다. 예배는 실용성을 넘는 것이고 미래도시는 실용성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곳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절망적 현실에 두려움을 넘어 희망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장에서 실용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는듯 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기독교적인 예술이나 선교적인 도구로서의 예술만이 인정될만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풍요로움>이다. 미래도시는 빈곤을 풍요로 바꾸는 도시다. 광야의 빈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풍요롭게 하시고, 광야의 허기짐을 오병이어로 배불리신 주님의 나라는 주변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세상의 풍요를 제공하는 사람들(기업가와 금융 등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듯 하다. 그들은 세상의 풍요를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들이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하면 소수의 사람들을 배불리는데 급급하게 됨을 지적한다. 교회는 이들의 가치를 인정해주어야 함을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진정한 풍요는 생명의 풍요임을 말하면서, 생명의 풍요는 십자가의 예수가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제시하면서 아홉번째 장을 마무리 한다. 


마지막 열번째 장(희망)은 이 책의 결론이다. 나는 이 장을 빨리 마무리해서 한 권을 읽었다는 성취를 얻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의 집중력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저자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는데 그 내용이 나의 상황과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이 죽음의 위태로움 속에 있었을 때 그가 고민했던 내용, 그가 그 현장(현재) 속에서 이미 미래도시를 건설하고 그 질서 속에 있게 되었던 그의 고백이 나의 고민이었고 고백이었기에 나는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종말론>에 대한 책이지만 교리적인 정리가 아니라 실제로 종말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미래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지금 나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적실한 문제인식을 통해 오늘날 이 시대와 한국 교회가 가진 한계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종말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상적인 개념으로 잘 설명해 준 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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