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한 장]


1. 예레미야가 아직 시위대 뜰에 갇혀 있을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두번째로 임하였다. 


  * 시드기야 왕 10년 때의 일이다. 첫번째 말씀은 친척의 밭을 사라는 것이었고, 이번이 두번째 주어진 말씀이다. 


2. 일을 만들어 성취하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에게 크고 은밀한 비밀(회복될 멸망)을 알려주신다. 


  * 곧 멸망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파기되지 않은 것이고 다시 회복할 것이 확실함만큼 크고 은밀한 비밀이 무엇이 있겠는가!


3. 하나님이 예레미야에게 알려주신 비밀


  1)무리가 갈대아 인을 상대로 싸우려하나, 하나님의 노여움과 분함으로 그들을 죽이고 시체로 성을 채울 것이다. 

  2) 이는 그들의 모든 악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자신의 얼굴을 가리시고, 성을 돌보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다. 

  3) 그러나 보라, 내가 이 성읍을 치료하며 고쳐 낫게 할 것이다. 평안과 진실이 풍성함을 그들에게 나타낼 것이다. 

  4) 내가 포로들을 돌아오게 하고, 처음과 같이 그들을 세울 것이다. 

  5) 그들이 내게 범한 죄에서 그들을 정하게 하고, 그들이 내게 범한 죄악을 사할 것이다. 

  6) 이 성읍이 세계 열방 앞에서 나의 기쁜 이름이 될 것이다. 그들은 내가 이 성읍에 베푼 모든 복과 평안으로 말미암아 두려워하며 떨리라. 


  * 임박한 멸망, 돌이킬 수 없는 멸망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내리시는 재앙이기에 그 멸망을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곧 이 성읍을 치유하시고 낫게 하실 것이다. 처음처럼 회복하고 그들을 정케 하며 그들의 죄를 사하실 것이다. 이들의 회복은 주변 민족들을 두렵게 할만큼 큰 회복임을 성경은 강조하고 있다. 


4. 이 땅은 황페하게 되었다가 역동적이고 활기찬, 거룩한 자들의 성읍으로 회복될 것이다. 그들은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다고 찬양할 것이다. 


5.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대하여 일러 준 선한 말을 성취할 날이 이르리라. 그 날에 내가 다윗에게서 한 공의로운 가지가 나게 하리니 그가 이 땅에 정의와 공의를 실행할 것이다.(14,15절)


6. 다윗에게 영원히 왕위에 앉을 사람이 끊어지지 아니할 것이며, 제사를 드릴  레위 사람 제사장들도 끊어지지 않으리라.(17,18절)


7. 낮에 대한 나의 언약과 밤에 대한 나의 언약을 깨뜨려 그것을 잃게 할 수 있다면, 내 종 다윗에게 세운 나의 언약도 깨뜨릴 수 있고, 레위 제사장에게 세운 언약도 파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능하겠는가!


  * 하나님께서 다윗 왕의 왕위가 끊어지지 않을 것과 레위 제사장이 끊어지지 않을 것을 다시한번 강조하신다. 주야의 순환과 같은 하나님의 언약이 깨어질 수 없는 것이듯, 다윗과 맺은 언약도 깨어질 수 없는 것임을 명확하게 하셨다. 


8. 내가 야곱과 내 종 다윗의 자손을 버리고 다시는 다윗의 자손 중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자손을 다스릴 자를 택하지 아니하리라.




[묵상 한 모금]


1. 크고 비밀한 계획은, 멸망을 앞둔 유다에게 주신 말씀이다. 


  1) 곧 멸망할 것이다. 이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내리시는 심판이기에.

  2) 그러나 곧 회복시키실 것이다. 그래서 성읍을 회복하게 하시고 다시 예루살렘은 활기차고 거룩한 성읍이 될 것이다. 

  3) 그 나라를 다스릴 왕도 이어질 것인데, 다윗에게 약속하셨던 것처럼 다윗의 혈통이 될 것이다. 제사장도 마찬가지다. 레위 출신 제사장들이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며 성전에서 제사를 드릴 것이다. 

  4) 이 계획은 확실하게 이루어 진다. 주야의 법칙과 천지의 법칙을 변개할 수 없는 것처럼, 다윗에게 주신 약속과 레위 제사장이 끊어지지 않을 것에 대한 약속은 분명하다. 



2. 끊어지지 않을 다윗의 왕권과 제사장의 역할


  예수 그리스도가 다윗의 혈통임을 마태복음 1장은 족보를 통해서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사역과 십자가 죽음이 모든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사장적 역할을 했다는 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기록한다. 하나님께서 포로가 되어 잡혀갈 죄인된 유다와 오늘날 죄인되어 사단의 포로가 된 우리들에게 크고 놀라운 비밀, 복음을 말씀하셨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말미암아 곧 멸망할 것이지만, 다시 회복시키실 것이라고.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롬 1:18)를 일으켰지만, 하나님의 인내와 사랑이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약속하신 언약으로 인해 우리를 구원하실 것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예수는 다윗의 왕권을 이어 받은 자이며, 끊어지지 않는 제사장으로서 이 땅에서 사역하셨다. 


예레미야서는 수천년전 그들에게 준 이야기이면서, 오늘날 우리들에게도 적용되는 살아있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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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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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복음의 또다른 단언적 명제는 <부끄럽지 않은 복음>이다. 이 표현은 보통 <전도>할 때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다. 성도가 복음 전하는 행위가 물론 부끄러워서는 아니되겠으나, 이 구절에서 바울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좀 더 강렬한 확신이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개인적인 기질과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것이란,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이 지리산의 천왕봉 정상을 1시간 만에 오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시작했으나, 정상 근처도 못가보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때, 이것을 부끄럽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는 그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고 자기의 가진 것으로 준공하기까지 족할 것인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계산이 없이 덤벼들었다가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를 보는 자가 다 비웃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온다.(28-30)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시작은 했으나,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일을 시작한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만다. 


또한 우리가 의지한 것이 우리가 목표한 곳까지 온전하게 이르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입시학원에서 월 천 만원씩 내면 실력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보장하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하자. 그 만큼 그 학원의 노하우와 강사가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 하겠다. 학부모는 학원비가 부담스럽지만 자녀를 일류 대학에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무리해서 학원을 등록시키고 그 학원에서 지도하는대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결과는 일류가 아니라 이류대학에 입하게 된 것이다. 학원의 노하우와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나, 그 자녀의 수준이 너무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학원을 믿고 월 천만원씩을 들여 공부시켰으나, 부모의 기대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 그 학원을 믿고 의지해서 자신의 자녀를 맡긴 부모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나를 의지했는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부끄럽게 되고,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했는데 그것이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우리의 기대(믿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것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의지했다. 율법을 따르고 의지하면 반드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고 말았다. 율법을 의지하며 쫓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어서 중간에 결국 낙오하고 만 것이다.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전 인생을 걸고 율법을 쫓아 살아왔던 바리새인들 조차도 우리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고민끝에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 3장) 결국 <율법>을 철저하게 의지한 삶 조차도 우리를 부끄럽게 할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고자하는 그 복음은 어떤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 명의 예외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16절) 그것이 지금 바울이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바울은 로마서 후반부에 이와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함으로 자신의 확신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1-13)



<율법>이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믿음/은혜>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가운데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것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기대를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열심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갈 것인가?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의지할 것인가? 이 땅의 교육과 학원 시스템을 의지할 것인가? 나의 직장을 의지할 것인가? 은행에 맡겨진 돈을 의지할 것인가? 부동산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의지할 것인가? 


나라마져 부도가 나고 파산에 이르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이 땅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단언컨데 없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고 불신 가운데 표류하며 살아갈 것인가? 과연 그것은 가능할 것이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 보장할 수 있는가?



바울은 복음을 접하고 깨닫고 나서,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는대로 <복음>을 전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복음> 말고는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도 <복음>을 전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신가운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을 담고 있길래, 율법을 의지해서 살아가던 바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다음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조금씩 다루어 보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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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의 선교사의 짧은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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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망망대해에서 난파되어 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있었다.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국은 수 일을 견디다 의식을 잃고 죽어가던 중 지나가던 배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 구해준다. 정신을 차려보니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자신을 구해준 선장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신을 구원해준 선장은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루 종이 고기 잡는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음식도 풍요롭지 않았다. 육지에 데려다 달라고 몇 차례 요청을 해보았지만, 알았다고만 할 뿐 육지로 갈 의지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선장이 죽어가던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기에 적극적인 항변을 하지 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두 해는 그렇게 참고 견디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그 때 차라리 그대로 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생명보다는 그 때의 죽음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것은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가난한 구원을 살고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묘사해 본 것이다. 지금 우리의 구원은 이와 같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 감격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또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곳 저곳에서 봉사하고 헌신한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결국 조금씩 감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섬기고 있는 일들이 감사에 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쉽게 그 짐을 벗지 도 못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 <생명의 빚>을 졌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죽을 자를 살려주셨는데... 게다가 위의 비유에서와는 달리 그 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대체해서 살려주셨는데... 그것을 경험한 내가 어찌... 그러나 이전과 같은 감격이 점점 소멸되어져 가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간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께 빚졌다는 충격적이고 결정적인 사랑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힘들고 메마르지만 이 길을 멈출 수 없다. 절대 다수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상태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마디로 가난한 신앙 생활 말이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아니,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고,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일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내가 볼때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재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결혼 10년차, 20년차된 부부가 부부간의 사랑을 더욱 곤고히 하기 위한 방법이 그 옛날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 동영상을 다시 보는 것 말고 없다면, 이 부부의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그 동안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결혼 생활의 지극히 짧은 이벤트와 사건인데, 그것만을 결혼 생활의 내용으로 채우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실로 가나한 부부관계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도 마찬가지라 본다. 만약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속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만이 전부라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매우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주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경험하고, 또 경험되도록 요청하는 신앙의 주제는 <회심>과 <중생>과 같은 결정적 이벤트들이다. 이와 같은 것이 복음의 한 요소이기는 하나,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은 좀 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면, 화해, 회복, 양자됨, 성화, 연합 등과 같이 단회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이 아닌 지속적인 관계와 과정을 다루고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구원의 풍요로운 내용들이 드러나고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즉, 여기에 구원의 풍요와 구원의 충만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중요하게 다루어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일부, 특히 단회적 사건(물론 임팩트가 큰 경험들이지만)을 구원 내용의 전부인양 인식하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가난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 동영상을 들춰보는 것으로 옛 사랑을 회상하고, 그 회상의 힘으로 현재의 결혼 생활을 이끌어 가려고 할 때 가난한 결혼 생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큰 경험> 하나를 반복적으로 우려내는 것으로 신앙의 긴 여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참으로 가난한 복음으로 사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왜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복음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절박하게 전하려고 한, 편지의 첫 줄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수식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이란 단어를 선택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_왜냐하면 그 십자가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성도였기 때문에_대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에 나는 위에 설명한 긴 논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을 때 연상되는 단어와 개념은 십자가와 피, 죽음 그리고 대속과 같은 자극적인 사건들과 개념들이다. 이 모든 사건과 개념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너무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모두 삼켜 버리고 말 우려가 있는 것이다.(이것은 우리 인식의 연약함에서 오는 문제다. 마치 최근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이슈가 국정원 개혁과 같은 다른 중요한 이슈를 모두 덮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것만이 복음에서 너무 부각될 때, 복음은 자칫 단순화되어 성도의 신앙을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는 로마서 첫 구절에 <하나님의 복음>이란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포괄적인 개념들을 다룬다. <예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조차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시려고 하신, 그 분의 방법(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시면서)였음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다.(롬 5:8) 성경의 많은 부분은 복음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시어 그것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분을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전과 후에 이루셨고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큰 계획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사용할 때 말하고자 한 복음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길 원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 복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 평생 살면서 옛날의 경험을 우려먹으면서 사는 신앙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롭게 알아가고 그 순간에만 예비된 복음을 경험하며 날마다 더 풍성해지는 은혜를 누리도록 예비하신 그 복음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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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되면서,특히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되면서 나의 청소년 시절을 생각한다. 동시에 나의 부모님은 그 시절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막상 생각을 더듬어 가보면 일관된 양육방식이나 교육철학이랄 것을 건져 올리지 못한다. 선명한 방식보다는 흐릿한 느낌만이 한 두가지 남을 뿐이다. 


그 중 하나는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거의 하신적이 없는 것 같다. 거의 없다고 했으나 사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으니, 거의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못하고 컸음을 의미한다. 내가 공부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내 동생에게도 <공부해라>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 삼형제들의 공부를 봐주신적도 거의 없다. 그도 그럴것이 두 분 모두 장사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고 또한 두 분다 초등학교만 졸업하셨기에 사춘기 자녀들의 공부를 봐 주실 능력도 없으셨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서 우리 형제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거의 없으셨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가 저녁늦게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점심과 저녁은 챙겨 먹어야 했고, 청소와 설겆이를 해야 한다는 것 정도다. 종종 가게 일이 바쁘면 도와 드리러 가야했고, 방학이면 가게 일을 봐야 한다는 것이 좀 그렇긴 했지만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생각은, 그렇게 바쁘고 여유없게 사시면서도 우리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충분히 못해주는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시는 모습이었다. 못배우신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못배우심 때문에 자식의 공부를 좀 더 살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셨고, 풍족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입히거나 먹이지 못하신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셨다. 그래서 그러셨겠지만,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당신의 욕구를 챙기시기보다는 언제나 자식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자 하셨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더 충분히 채워주지 못해 주시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하시는 눈치였다. 이것이 지금 내가 나의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며 머리 속에 남는 인상이다. 다른 것들은 세월의 풍화 속에서 기억 너머로 사라졌지만, 이 기억만큼은 머리에 각인된듯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그 이후로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종종 부모님댁을 찾아 갔다가 돌아올 때가 되면, 언제 준비해 놓으셨는지 이것 저것 한 아름 챙겨주신다. 그러고도 더 못 주셔서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지금도 본다. 자식에 대해서 늘 충분히 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짠하다. 


지금 나의 가정은 어떤가? 나와 나의 아내는 나쁘지 않은 4년제 대학을 나왔다. 부족하지 않게 공부했다는 말이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집에서 두 자녀와 화목하게 살고 있다. 아내가 맞벌이를 해야 해서 가정을 잘 챙겨보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일주일에 세번 오후에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교실로 영어를 가르친다. 당연히 집에서 두 아이에게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좀 어려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작은 아이의 수학 정도는 봐줄 수 있는 상황도 되고 실력도 된다. 아내는 교육학을 전공했고, 나는 캠퍼스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사역했고, 교회에서는 목회자로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적지 않은 편이다. 나의 부모님에 비하면 나와 나의 아내는 매우 충분한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내에게 부모로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미안해 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에게는 너무나 많았던 그 마음이 지금 우리 가정에는 얼마나 빈약한지 모른다.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은 <못해준 것이 무엇인가>라는 마음이다. 

 

나와 아내는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공부해라>고 하는지 모른다. 너무 많이 공부한다고 항변하는 자녀에게,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너무 공부량이 적다고 일축한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고(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가정은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평온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자녀들의 지적인 부족을 채워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부모로서 부족하지 않는데, 너는 왜 이리 부족한가?라고 우리는 늘 몰아붙인다.  


"내가 너희에게 못해 준게 뭐니? 너희들은 공부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니?"


생각해 보면, 부모들의 미안해 하는 마음(필요를 충분히 채워줄 수 없었기에)을 먹고 자란 우리가, 부모들의 당당함을 먹고 자라는 우리의 자녀들보다 행복했다. 적어도 스트레스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서로에게 <미안해 하는 삶>을 복음적인 삶이라고 규정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마음이 복음적인 삶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할 것을 다 했다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화평은 깨지기 시작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자식이 해야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속에서의 인내와 용납은 사라지고 만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나와 결혼해준 배우자를 생각할 때, 가정은 화평하다. 지금도 여전히 기대하는 만큼의 충분한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곳에 지속적인 평화가 임하게 된다. 가정 안에서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회사 안에서 노사간의 관계도 같은 원리요, 국가와 국민간의 원리도 같다고 본다. 




요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나의 해야할 책임을 충분히 다했으니, 내가 누려야 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취해야 마땅하게 된 것이다. 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만 남았고 세상은 온통 당당한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은 사라지고 치열한 권리주장만 남았다. 여기에 무슨 화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족함과 결핍을 찬양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서로에게 대한 <미안해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찬양하고 싶다. 5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못가준 것에 대한 미안함,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 옷까지 주지 못하는 미안함,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미안함, 더 충성스럽게 섬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이런 미안함이 이 사회를 따듯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 화평을 이루어 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였다."(창 2:25)


에덴은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곳이라기 보다는 부끄러울 만한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던 곳이다. 서로가 벌거벗었기에, 서로가 부족했기에 상대의 수치를 수치로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고백하는 것에서,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복음적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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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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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40편] 복음에는 두 가지 요소를 반드시 함께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는 수 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있다는 것이지요.(12절)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진노(롬 1:19)가 자신 위에 임한다는 인식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구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도움을 요청할 유일한 분에게 우리가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12절)이것이 바로 다른 한가지입니다.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데,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에게 우리는 그 동안 너무 많은 죄를 지었다는 것을 발견했을 때 우리는 절망하게 됩니다. 그에게 손을 뻣어야 하지만, 손을 뻣을 수 없게 되는 것이지요. 다만, 그를 응시하여 죄송하다고 잘못했다고 긍휼을 베풀어 달라고... 바라볼 뿐입니다. 복음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복음에는 당당함이나 자기 공로나 자기 의가 털끝만큼도 들어설 자리가 없는 것입니다. 




[정리/발췌]


2절. 나를 기가 막힐 웅덩이와 수렁에서 끌어올리시고

내 발을 반석 위에 두사 내 걸음을 견고하게 하셨도다. 


: 수렁에 빠져 허우적 거리는 사람을 끌어올려서 안전한 발판 위에 놓아준 모습이 연상된다. 하나님은 허우적 거리며 절망한 사람을 끌어올리신다. 그리고 반석과 같은 안전한 곳에 두사 우리로 평온케 하신다. 이와 같은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이 험한 이 세상을 살면서(많은 원수의 함정이 도사리고 있는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와 용기가 되겠는가!


5절.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행하신 기적이 많고

우리를 향하신 주의 생각이 많아 누구도 주와 견줄 수가 없나이다. 

내가 널리 알려 말하고자 하나

너무 많아 그 수를 셀 수도 없나이다. 


: 주께서 나를 위해서 행하신 일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그 이야기를 해야할지 모를 지경이다. 나를 생각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지극정성은 누구와도 견줄 수 없을 만큼 크다. 그 일을 다 말하고 싶지만, 셀 수 없는 이야기에 오히려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이런 은혜와 도우심으로 누군가 나를 살펴주신다면, 우리의 인생은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그 행복을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누리라!


12절.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나는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 수많은 재앙이 덮쳐서 하나님을 불러야 할 상황이지만, 하나님을 찾기에는 나의 죄가 너무 많아 면목이 없다. 오직 도움을 주실 분은 한 분, 하나님 밖에는 없는데 그 분에게 행한 나의 죄가 크기에 감히 그 앞에 도움을 요청할 수는 없다.(도움은 커녕 심한 책망 밖에는 받을게 없는 형편이다.)


그런데, 그 분에게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격이 되지 않고, 송구함이 크지만 그 분의 신실하신 의를 의존해서 구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의지했던 사람들은 실패함이 없이(부끄러움이 없이) 응답을 받게 된다. 이것이 복음이다. 당당하다는 말도 아니고, 뻔뻔 하다는 말도 아니다. 송구하지만, 다른 구할 곳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 자비를 구하러 나온다는 것이고, 그것을 하나님은 의로 여겨주신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복음에서 교만과 방종이 존재할 수 있는 틈이 없다. 


여호와여 은총을 베푸사

나를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13절)


17절.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나

      주께서는 나를 생각하시오니

주는 나의 도움이시요

나를 건지시는이시니라.

나의 하나님이여, 지체하지 마소서. 


: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자기 편임을 기정 사실화 하고, 빨리 개입해서 해결해 달라고 요청한다. 이것은 자기 자신에게서 나오는 당당함이 아니라, 관계적인 경험 속에서와 신학적인 확신 속에서 나오는 당당함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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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7:27-29] 하나님은 성도를 버리지 않고 영원히 보호하시지만(28절), 그 의미는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는 그분의 성품(28절)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에 이야기 한 것만을 붙잡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위에 복음을 세우며, 구약의 토대 위에 신약을 세우는 것이 마땅한듯 합니다. 



[본문] 


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28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절.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정리]


1. 하나님의 요청과 그 결과


   악에서 떠나라

   선을 행하라

    ->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2. 하나님의 성품과 그 결과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의 성도는 영원히 보호를 받는다.(그의 성도와 정의를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진다. 


[묵상]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게 악을 떠나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정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않으신다. 영원히 보호를 하신다. 그것은 사랑하신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듯 그의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의와 그의 성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상 옳지 않고 오히려 그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정의에 합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성도를 <은혜를 입은 자>라고만 생각하지, <거룩을 추구해야 하는 자>로서의 개념에는 미흡하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존재,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에만 치중하지 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성경은 그 다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쏟아 놓는데 비해 우리는 그 길에 들어서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을 읽고 신약을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해본다. 물론 혼자 읽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율법이 있고 그 토대위에 복음이 복음될 수 있으며, 구약의 토대 위에 신약의 참된 메시지가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에도 한 번 쓴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니라, 정의의 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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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복음 캠프 준비사항


1. 박태서 간사와 서울대 복음 캠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다.(5월13일 오후 3:30-5:00)


1. 하나님의 이벤트라기 보다는 캠퍼스 사역의 핵심이다. 


2. 복음 캠프에서 다루는 것은 모든 것을 균형있게 다루는게 목표가 아니다. 한 부분을 예리하고 임팩트있게 다룬다.


3. 복음 캠프에서의 중요하게 강조하는 요소는 자기 직면, 자기 부인,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다. 


4. 정기모임은 복음 캠프의 메시지에 대한 보완(은혜에 대한 강조)이면서 그 철학의 연장선으로서의 적용(죠이 스피릿)이다.


5. 따라서 복음 캠프와 정기예배에서의 메시지는 양 날개와 같이 서로 보완하는 사역이 된다. 


6. 복음 캠프는 일반적인 복음 안에 있는 내용을 다루면서도, 청년들에게 초점 맞춰진 복음이 가지는 주인의 변화 요구(맞바꿈)와 복음이 얼마나 가치있는 것인가?(복음이 주는 유익, 가치)에 대해서 다루며, 우리가 죄와 직면한 자라는 사실에 직면시키도록 하여 자신의 실체를 보도록 하는데 집중한다. 


6. 복음 캠프는 각 캠퍼스 사역자 모두가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와 같은 사역을 할 때 사역자는 복음 전하는 자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후원자들에게 자신이 지금 캠퍼스에서 복음 전하는 사역을 하고 있다고 어필할 수 있다. 


7. 신입생들에게 필수 코스로 참여하도록 한다. (리더 중 몇 번씩 듣는 친구들도 있다./들을 때마다 새롭게 발견하는 내용들이 있다.)


8. 소감문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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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1편] 주의 공의가 그를 의지하는 자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구원하게 하신다.(1절) 왜냐하면, 하나님의 공의는 나의 삶을 판단하고 심판하는 공의가 아니라, 우리의 견고한 바위와 산성이 되어 주시는 공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하나님의 의> 속에 <복음>이 나타났다고 고백한 것이리라.(롬 1:17) 그래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넘치는 은혜>(19절)이 되지만,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공의가 <공의로운 판단>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입장에 따라, 공의가 다른 의미를 가지고 다르게 적용된다. 


[정리/발췌]


1. 시편 기자의 신학적인 내용의 믿음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영원히 부끄럽게 하지 마시고

주의 공의로 나를 건지소서


2. 시편 기자의 신학적인 확신을 통해 얻은 여호와 하나님의 든든함


2절. ... 내게 견고한 바위와 구원하는 산성이 되소서

3절. 주는 나의 반석과 산성이시니...

4절. ... 주는 나의 산성이시니이다.


3. 시편 기자가 당면한 고난과 그 상황


11절. 내가 모든 대적들 때문에 욕을 당하고

내 이웃에게서는 심히 당하니

친구가 놀라고 길에서 보는 자가 나를 피하였나이다. 

13절. 내가 무리의 비방을 들었으므로 사방이 두려움으로 감싸였나이다.

그들이 나를 치려고 함께 의논할 때에 내 생명을 빼앗기로 꾀하였나이다. 


4. 하나님께서 그에게 피하는 자들을 위해 준비하신 은혜의 풍성함


19절.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23절. 너희 모든 성도들아 여호와를 사랑하라

여호와께서 진실한 자를 보호하시고

교만하게 행하는 자에게 엄중히 갚으시느니라.


5. 결론적인 적용: 강하고 담대하라.


24절. 여호와를 바라는 너희들아 강하고 담대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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