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해설]


18절. 그 후 3년 만에


다메섹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와 아라비아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바울은 게바를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때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간 때이며, 이 때 처음 유대 사도들을 만난 것이다. 이 때의 배경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 26-30에 나와 있다.


 (행 9:26-30)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18절.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게바와 함께 있었던 15일 동안 복음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보인다. 복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두 사도가 15일을 함께 보내면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들이 이해하고 받은 복음을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게바(베드로)에게서 복음의 내용을 전수받는 차원에서의 만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지속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15일 동안 함께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복음을 전수받은 것은 아니라는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할 것이다.(그 기간 중 바울과 베드로는 이미 자신의 복음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나눔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 기간 중 야고보(예수님의 동생)  정도만 보았지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도 않았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형성하는데 그 기원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있지 않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교회들은 사실 바울을 제대로 본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만 잠시 보았을 뿐 유대인들과의 공개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음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갈라디아 교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에 비해 열등하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묵상]


갈 1:11절 이후로 1장의 마지막까지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논지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온 것임을 회심 후 자신의 활동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과 자신과의 연관성에 섯을 긋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바울이 직면한 문제(오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비해서 열등한 복음(충분하지 못한 복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더 핵심적인 문제는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추가적인 어떤 내용들을 가미하여 갈라디아 교회를 그릇된 길로 인도 했다는 것에 있다. 지금의 상황이 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대등한 위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불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의 게바다 야고보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불충분하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갈라디아서를 단순히 복음과 율법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된다. 또한 바울이 처한 입장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야 바울의 표현이 좀 더 엄밀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게바(베드로)와 야고보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바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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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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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해설] 


11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본격적인 자신의 논지를 펴려고 한다. 우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신적 계시성>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드러났던 방식이다. 


 바울의 사도됨이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갈 1:1)임을 강조한다. 


방식은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좀 다르다. 갈 1:1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강조이지만, 갈 1:11,12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에 대함이다. 바울의 서신서 여러곳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의 주 내용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적 계시성>에 대한 것이다.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에 잘 드러나 있다. 유대인 중 다른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려고 했던 자였다. 


 (행 9:1-2)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6절.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사울은 이미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러가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세멕으로 돌아왔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사도행전은 9장에 언급되는데,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언급이 없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의 기록은 조합해 보면, 사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고 생명이 위험해지자 그것에서 피신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 갔다. 


거기서 사울은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 때 바울은 하나님을 통해서 직접적인 복음의 내용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간 중 셋째 하늘에도 올라갔다 온 신비한 경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 12:2, 개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서의 핵심 논지는 사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을 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사울에 대해서 어떤 모함을 했는지 짐작케 하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교란하기 위해서 들어온 자들은(1:7)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면서 배운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권위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사도들에 비해서 떨어지고, 그가 가르치는 복음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즉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보다 바울의 복음은 불완전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넌즈시 말하자, 갈라디아 교회들은 쉽게 그들의 논리에 넘어갔던 것 같다. 



[묵상]


1.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즉, 신의 직접적 기원에 둔 것이다. 바울 뿐 아니라 유대 사도들의 복음도 실은 다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본질은 다르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바울과 같이 <신의 직접적 계시>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은 정리가 된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것과 다른 <복음>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에 있지 않다. 이미 신적 기원을 통해서 기록되고 정리된 복음을 명확하게 파악하여 아는 것에 있다. 


우리는 누군의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는 없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성경적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신비한 역사와 권세가 나타난다고 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떠난 내용을 권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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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2. 해설

3. 묵상



[1.본문]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해설]


[6절]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만약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이른 시기에 썼다면(주전 49년 이전) 1차 전도여행의 기간을 대략 3년 이내로 보는데, 힘들게 복음을 전하여 세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1,2년이 채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복음(거짓 복음)으로 거의 넘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멘붕의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에 다시 한번 힘쓰고 돌아왔었다.




(행 14:22-23)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은 외부적인 환난과 박해를 염두하고, 이들의 믿음을 견고히 할 것에 대해서 당부하고 왔으나, 갈라디아 교회들은 외부적인 환난이 아닌 변질된 복음, 거짓 복음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해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바울의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알수는 없으나 다른 복음은,


7절. 갈라디아 성도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것이다.

9절. 바울을 통해 전해 받은 것과 핵심적인 관점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도 다르며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과도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핵심에 있어서도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10절. 바울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님을 언급함으로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다른 복음은 복음의 본질에서는 떠났지만, 사람들의 이성이나 혹은 정서에 잘 들어맞는 형태로 변형된 복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성도들까지 다수가 <이같이 속히 (참 복음으로부터)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사하지만 다른 복음은 성도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독>과 같은 것이었다.



[8절]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저주를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을 변질시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혹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의 유력한 사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역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9절)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에 대해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갈라디아서는 인사말을 마치고 본론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감정이 중간 중간 충분히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따듯하고 온화한 감정은 아니지만, 그릇된 자식의 행실과 가치관을 탓하는 부모의 심정이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바울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나며, 감정적인 경고등도 모두 드러난다. 바울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이 모두 드러난다.


(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언성을 높여 혼을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낳은 자식과 같은 교회 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첫 이방 선교를 통해서 얻은 첫 아이이기 때문이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3. 묵상]


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충분했지만, 듣는 성도의 이해와 확신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이해는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만큼 분명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생생하게 전할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듣는이의 이해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복음은 다양한 상황과 입장 혹은 질문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들려져야 한다. 복음은 입체적이지만, 우리는 한번에 한 면씩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바울이 전해도 이와같다면, 우리는 복음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해야 하겠지만,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을 보는 수고를 해야한다. 구약도 다르지 않다. 구약의 말씀이 예수를 지향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바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전한 복음도 충분한 이해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다양한 측면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단이 발생하는 그 지점은 정통교회가 잘 풀어가르치지 못한 부분임을 알아야한다.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곳에서 [다른복음]이 자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단의 긍정적 역할은 정통교회의 사각지대를 보여줌으로, 우리로 보완할 것을 가르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복음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반복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내용의 무한반복이 아니라 풍성한 내용의 다각적 반복이어야 한다.


2. 사람에게 이성적 정서적 합당함이 진리의 합당함과 다를 수 있고, 심지어 치명적인 위험성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이성에 부합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말은 복음이 사람의 이성과 감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해 그럼 측면에서 더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복음으로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분명한데, 하나님의 진리에 가깝기 보다는 우리의 정서와 이성에 더 가깝게 여겨지기에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즉 복음의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이 구분이 어려우면, 우리 마음에 더 부합한 주제들인 주변에 있는 것들이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들이 들어왔고 오늘날은 성공과 번영과 기적과 능력이 들어온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복음 내용의 중심과 주변이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을 배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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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개역개정]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1. 바울의 서신은 주로 편지를 받는 대상의 교회의 이름을 따거나 받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져있다. 그리고 보통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낼 적에는 본인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에 대한 AS차원에서의 서신이다. 물론 <로마서>의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고린도전후서나 데살로니가 전후서 그리고 빌립보서와 같은 서신들은 바울의 전도 활동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다.


2. 갈라디아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울의 전도여행 내용을 읽어보면 '갈라디아'라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곳은 빌립보와 같은 식의 한 지명이 아니다. 갈라디아라는 지역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고 언급한다. 비시디아 안디옥,루스드라, 이고니온, 데베라는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 갈라디아인 것이다. 

 

3. 그러나 사실 일반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이라고 하면 위에 언급한 지명이 있는 남갈라디아 지역이 아니라, 북갈라디아 지역(위 지도 참고)이다. 남갈라디아 지역은 나중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편입된 곳이기에 <갈라디아 사람들>(갈 3:1)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는 북갈라디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4. 일반적인 북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라면,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가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전도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이기 때문이다. 2차 전도여행때 1차 전도여행한 지역인 남갈라디아 지역을 지나 유럽으로 넘어가기 전에 북갈라디아 지역을 다녀간거 같다.(행 16:6) 그렇게 되면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에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안에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인 '할례'문제를 다루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5장에 공식적으로 다루고 있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서 '할례' 문제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혼선이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가 사도행전 15장 이전, 즉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전(주전 49년)에 기록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그게 맞다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웠던 <남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 좀 더 세부적인 논의가 더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만 정리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분은 남갈라디아 지역과 북갈라디아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신다. 

  *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점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정작 논의를 하는 분들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파악하는데 저작 시가 이르던 좀 늦던 큰 상관은 없다고 보는듯 하다. 



5.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할 때,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본론에 가서도 자주 반복된다. 특히 자신의 사도됨을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시작부터(1:1) 자신의 이야기 하려는 논지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를 읽다보면 논지 파악이 혼란스럽다고 한다. 나도 다르지 않은데... 읽으면서 느낀 것은 갈라디아서는 차분히 앉아서 쓴 글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중간 중간 차분한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감정적 표현들을 한다. 논리적인 글이 아니라는 느낌 보다는 바울의 감정이 많이 뭍어나는 글이라 생각하면 보면 좋을 것 같다. 


 

6. 한 절에 축약한 복음(4절)


간략하게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이다. 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는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짧지만 명확한 복음의 내용이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갈라디아서의 편지의 서문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다른 편지 서문에 비해 상당히 짧은 편이다. 이 짧은 인사말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과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밝힌다. 갈라디아서의 글이 상당히 밀도 있고, 공격적(?)인 글이 될 것임을 예견해 볼 수도 있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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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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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과의 단절이후 인류는 언제나 '결핍'이었다.


그런데, 믿음과 기도로 그 '결핍'을 극복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충분한 '믿음'과 '신앙'에 있어서도 결핍의 존재일 수 밖에 없는 성도들에게
오히려 '내 믿음이 없어서', '내 기도가 부족해서'라는 
율법주의적 절망을 반복하도록 하는게 아닌가 싶다.


'믿음'과 '기도'에 있어서도 결핍일 수 밖에 없는 우리에게
삼위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이 '복음' 이지 않겠는가!


- 얼마전 요한복음 2장의 가나혼인잔치 본문으로 설교를 준비하면서 든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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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2.25
오후4:00-9:30
죠이 휴먼스테이션
강사: 김수억 간사









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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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스바냐 2:1-7 마지막까지 열린 문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본 구절에서 두가지 이야기를 한다. 하나는 여호와의 진노의 날이 이르기전 여호와를 찾고 겸손을 배우면 혹 다가올 진노를 피할 수도 있음을 선지자는 말한다. 심판이 이르기전 마지막 남은 기회를 놓치지 말라는 것이다. 더불어 블레셋은 심판을 받을 것이고, 살아 남은 유다 자손이 그 땅에 거주하게 될 것이고 번성하게 될 것을 약속하신다. 


절별 해설

2:1 <<함께 모여라>>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함께 모이라고 권면하는 것은 단순한 회집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임박하게 다가올 진노와 심판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겸비하며 자신의 삶을 돌이키기 위한 회집을 요청하는 것이다. 


2:2 <<기회가 겨처럼 날아가기 전에>> 함께 모여 하나님 앞에서 겸비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가 자주 오거나, 다시 올 수 있다는 보장이 없다. 스바냐의 이 제안이 최후의 통첩일 수 있는 것이다. 이 기회마져 때를 놓치면 금새 사라져 버리고 만다. 반드시 잡아야 할 기회라는 것을 말한다. 


2:3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블레셋의 대표적인 성읍은 가사, 아스글론, 아스돗, 에그론, 가드 이렇게 5개다. 그 중에 <가드>를 제외한 블레셋의 대표적 성읍 4개를 언급함으로 브레셋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왜 <가드>를 제외시켰는지 알 수 없지만, 미가 뿐 아니라 아모스와 스가랴도 스바냐와 동일하게 블레셋에 대한 신탁을 전하는 과정에서 <가드>를 제외 시키고 있다. 


2:6 <<지중해 해안은 목초지가 되어>> 지중해 해안이 목초지가 된다는 것은 더 이상 농사짓고 밭을 일구는 땅이 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모여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곳에서는 결코 양떼를 키울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말은 블레셋 땅에 심판을 받아 황폐하게 되어 더 이상 사람이 거할 수 없는 곳이 됨을 뜻하는 것이다. 


2:7 <<밤이 되면 아스글론에 있는 집에서 잠잘 것이다>> 아스글론은 블레셋 사람들의 성읍인데, 살아 남은 유다 백성들이 블레셋 땅에서 양을 치고는 마치 자기 집처럼 아스글론에 와서 잠잔다는 것을 말한다. 이 말은 블레셋의 완전한 멸망을 말하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모두 <기회>가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기회>는 겨처럼 바람에 금세 날아갈텐데, 이 기회를 놓치지 않는 성도가 되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스바냐가 여호와의 진노의 날을 선언하고 그 날에 임할 재앙을 예언하나 그 목적이 심판에만 있는 것이 아님이 오늘 본문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스바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진노가 예견되어 있으므로, 그 중에 주의 율법을 지키고 겸손한 자들은 지금이라도 하나님 앞에 모여서 올바른 일을 하고 겸손을 배워 여호와의 진노로부터 피할 수 있도록 권면하고 있다.(3절) 요한계시록은 주님의 재림으로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과 재앙이 임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편에 선자들은 구원을 얻지만, 하나님을 대적하여 사단의 편에 섰던 사람들은 모두 심판과 사망에 이르게 됨을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요한계시록의 마지막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초청>으로 마친다. "누구든지 목마른 자는 와서 생명수를 마음껏 마시십시오"(계 22:17) 성경의 복음은 심판을 확실하게 예언하고 있으면서도 누구에게나 마지막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놓았다는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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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


글: 김수억 간사


마태복음에는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많은 비유의 많은 비중을 '천국'이라는 주제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마태복음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쉽게 '천국은 ... 와 같으니'라는 문구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하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매우 조심하고 삼가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은 상식일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아닌 마가 복음서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언급된다는 것을 다른 복음서와 조금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비교, 마 4:17 / 막 1:15)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봐도 된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글자의 차이 말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각하시겠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차이는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국'이라고 할 때, 성도들의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나라가 '이 곳'이 아닌 '저기 어딘가'로 규정되기 쉽다. 문자대로만 본다면 '천국'의 반대말은 '이 땅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면 그 의미는 약간 달라진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은 하늘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다. 이곳일수도 있고, 저곳일 수도 있다. 우리 안 일수도 있고, 우리 밖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누구의 다스리심을 받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따라서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읽을 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공간이냐?라는 정적인 개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와 다스림으로 운영되는 곳인가로 읽어야 한다. 서두가 길었지만, 이런 이해가 어떤 분들에게는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천국은 품꾼을 얻어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집 주인(포도원 주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하고 특별히 그 중에서 이상한 행동(왜냐하면 이 땅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땅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좀 이상한 것이고, 그것이 천국 비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행동은 오후 5시(십일시)까지 아무 일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이 포도원 주인의 부름을 받아 1시간이라도 일했다는 것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할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포도원 주인의 호출이 없이는 하루를 공친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하루 해가 지는 그 순간에 사람을 불러다 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포두원 주인은 그 사람을 불러 들였다. 


왜 이 사람은 오후 5시까지 놀고만 있었는가?(마 20:6) 이 사람들은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20:7)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노동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약한 사람일 수 있다. 어떤 이유든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변명에 귀기울이지는 않다. 인력은 언제나 넘치니까. 어쩌면 이른 아침부터 나와있었지만 고용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체격이 외소해서 노동 효율이 적은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고용주의 입장에서 인상이 별로 였을 수도 있다. 암튼, 오후 5시가 되도록 이들은 부름을 받지 못함으로 소외 되었다. 이는 이 사람이 이 사회에 무능하며 무가치한 존재 즉 잉여에 불과하다는 무언의 싸인이였다.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 말처럼 이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고 정말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써주지 않아 놀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가장이 어찌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반전은 여기에 있다. 포도원 주인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이 사람을 포도원 주인인 천국은 불러들인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20:7) 


예수님께서 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는지 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버려진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는지 오히려 그들만을 위해 오신것처럼 행동하셨는지 이제는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예수가 복음(자기와 같이 버려진 존재를 담아주셨기에)인 것처럼, 오후 5시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된다. 왜? 다른 포도원 주인들은 오후 5시까지 놀고 있는 잉여들에게 자기의 포도원에는 들어 올 수 없다는 신호를 주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인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처지를 알자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포도원에서 그들은 무엇인가를 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일했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자신을 부른 포도원 주인에게 어떤 유익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주인은 다른 일꾼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하루치의 품삯을 주었다. 일을 한 사람에게는 그 삯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 삯은 은혜다.(롬 4:4,5) 오후 5시에 들어간 사람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 더 있다고 본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의 모순되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공감되는 항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일꾼으로 생각하는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도 하나님에게 불합리의 죄를 뒤집어 씌우며 불평하는 성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후 5시에 들어온, 이 세상에서는 '잉여'로 판명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신앙 생활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성도의 또 다른 이름은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 간이역 2.0 / 2014. 2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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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년 6월, 테일러는 매년 열리는 마일드메이 집회에서 D.L.무디와 함께 단상에 서게 되었다. 회중은 서서 힘차게 찬양을 불렀다. ‘불어라, 바람아! 그분의 이야기가 바람에 날려 전해지도록.’ 


그러고는 중국 내지 선교회의 창시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허드슨 테일러는 장난기 어린 눈을 빛내면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람은 결코 복음을 전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복된 사랑 이야기가 세상의 어두운 곳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위대한 선교 명령에 순종하려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것을 들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 OMF, 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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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해주는 삶, 용서 받는 삶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겸손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이 <겸손>하게 행동해서 <성숙>함을 보이라는 권면으로 들려질 수도 있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할 때도 사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겸손은 하나의 덕목이 된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겸손해야 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성숙함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겸손한 척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을 겸손과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겸손한 척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말이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용서>라는 덕목으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횟수를 용서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잘 못을 용서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숙함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잘못에 대해서 화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쿨하게 웃어 줌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과시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런 의도로 질문을 한 듯하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냐고? 일곱 번이면 되냐고 말이다. 그 말은 자신이 일곱 번 비슷하게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 아니냐고 예수님께 확인 받고 싶어서 인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쉽게 칭찬해 주시지 않는다. 아니 칭찬해주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이 전면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어떻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주님의 논지는 간단하다. 일곱 번의 용서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백 구십 번을 용서해야 만족스럽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내가 얼마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가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고 기다려주지 않음으로서 그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그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성숙함을 드러내 주는 성적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숙함에 대한 진짜 성적표는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얼마나 많은 횟수에 걸쳐서 받았는가!를 깨닫는 것으로 확인된다. ‘주는 것으로가 아니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 일게다. 다른 종교에서의 성숙함이란, 몇 번을 참되게 용서해 줄 수 있고 얼마나 겸손한가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인 종교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 의>를 이루는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내가 얼마나 큰 은혜와 용서를 받은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깨달음으로서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람들을 향해, 겸손과 용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것이 전혀 자기 자랑이 되지 못함을 강조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다고 칭찬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바울의 이와 같은 권면은 모두 위에서 설명한 것들에 기초한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참, 건강하다.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데, 불편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랑받음에 대한 경험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훈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충분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따듯함으로 수용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과 용서의 의무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용서하기도 하고 겸손한 듯한데,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건강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벼는 익었기 때문에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내적 충실함이 겸손으로 나타는 것이다.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좀 더디더라도 건강한 사랑을 한다. 충분한 용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용납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성급한 행동을 요청하기 보다는 사랑과 용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더디더라도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을 건강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많은 인생이다. 부모로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이다. 이걸 좀 알아야 복음적인 삶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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