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던 여로보암에 대한 기록이 왕상 12장부터 있다.
르호보암이 민심을 잡지 못했기 때문에 여로보암은 북이스라엘의 10개지파의 지지를 받아 왕이 된다. 그러나 그는 백성의 민심을 너무 의식한 탓일까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오가는 것을 위협요소로 보고 북쪽에 제사드릴 장소를 따로 만들고 레위인 아닌 자를 제사를 돕는 일로 세우고, 절기조차 날짜를 임의로 변경하였다. 하나님은 당연히 그 일에 노하셨다.
그 일로 말미암은 것일까?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가 중병에 들었다. 결국은 죽게 되었다. 어떻게 보면 아비야는 아버지 여로보암의 죄로 인한 죽음을 맞았다고 볼 수도 있다. 성경 이야기의 진행을 보면 그런 메시지가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구절이 있다.
왕상 14:13 이스라엘이 그를 위하여 슬퍼하며 장사하려니와 여로보암에게 속한 자는 오직 이 아이만 묘실에 들어가리니...
아비야의 죽음의 현장 속에서 여로보암 집에 제대로 장례를 치른 사람은 아비야 밖에는 없다는 것이다. 그 집안에서는 가장 복된 아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어서 이렇게 기록한다.
... 그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향하여 선한 뜻을 품었음이니라.(왕상 14:13)
오히려 아비야는 여로보암의 집에서 유일하게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품었다는 것이고 그래서 하나님은 아비야를 일찌감치 여로보암의 집에서 데려가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비야의 입장에서 어린 나이에 죽은 것은 하나의 구원 사건이다. 여로보암 집에 임할 진노(왕상 13:33-34,15:28-30)로부터 하나님은 유일하게 하나님을 향해 선한 뜻을 품은 아비야를 진노의 심판이 있기전 죽음으로 구원하신 것이다.
1. 우리는 죽음에 대한 일방적인 해석을 조심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직접적인 진노로부터 사람을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말세의 때에 당하는 순교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환란의 시대에 성도들이 직면하게 되는 죽음은 하나의 구원사건이다.
2. 모두 악한 왕으로 여로보암의 뒤를 따랐던 북이스라엘에 유일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좇았던 사람이 있었다. 그 사람은 여로보암의 아들 아비야였다. 그는 왕의 자리에 오르지 못했다.(죽지 않았다면 나답을 대신해서 왕이 되었으리라 생각하는데) 그러나 북이스라엘의 왕조에 유일하게 하나님을 온전히 섬겼던 사람이 있었고, 하나님은 그를 기억하셨고, 패역한 세대에서 그를 구원하셨다.
아비야의 죽음과 그에 대한 성경의 해석은 악한 시대를 사는 성도의 죽음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대한 새로운 안목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