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1:9-11> (정리하기)

1. (권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9절)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10절)

    (이유)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질문) 낮은 형제가 자랑할 '자신의 높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묵상) 낮은 형제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신분적으로 낮은 자를 말할 것입니다. 종과 노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과 노예라 할지라도 예수의 자녀가 되고 교회 안의 성도가 되면 육체적인 신분의 차이를 넘어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된다. 당시의 상황이 교회 안에서 주어진 이 관계가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교회 안에서 높아진 자신의 위치를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야고보는 종과 노예의 신분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형제된 성도의 신분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낮은 형제란 이차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주류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조차 교회 안에서는 한 형제요 자매로서 인정받아야 하고, 이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 나그네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서 교회 안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교만이 아니라 구성원의 한 명으로 인정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교회가 사회 선교로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과는 구별해서 봐야할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의 구성원 중 '낮은 형제'에 대한 권면으로 그 대상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제한해서 봐야 할 것이다. 


2. (질문) 부한 자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보통이라 할 수 있다. 그것과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권면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묵상) 부자를 향해서 겸손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르고 성숙한 '태도'에 대한 권면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것과는 좀 다른 권면을 한다고 봐야 한다. 야고보는 부자가 부자로 지내는 시절을 '풀의 꽃'이라고 봤고, '꽃'은 계절의 변화를 따라 필 때가 있고 질 때가 있다는 측면에서 설명했다. 지금 부자라고 해서 영원히 부자인 것이 아니다. 지금 젋다고 해서 영원히 젊을 수 없듯이 '인생의 영광'이라는 것이 '영원'할수는 없는 것이다. 부의 영광도 지나가는 것이다. 

  부한 자는 현재의 부과 과거의 축적으로서의 영광만을 생각하면 어리석어진다. 미래를 봐야 하고 인생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한 자가 낮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부한 자, 높은 자의 경우 낮은 형제와 함께 형제 자매로 지내야 하기에 그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낮아진다. 그러나 부한 자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더 교만해지지 않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인생에 불과하다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정리] 교회란 어떤 곳인가? 모든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의 관계가 되게 하는 곳이다. 낮은 자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게 만들어 주고, 높은 자들은 자신의 낮음을 자랑하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오늘날의 교회가 가진 문제는 무엇인가? 낮은 자를 더 낮아지게 만들고, 높은 자를 더 높게 만들어 더 깊은 격차와 비교의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낮은 자로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 곳, 부한 자로 자신의 낮아짐을 기뻐할 수 있는 곳 그곳이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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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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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리]


1. 내가 너희들에게 책망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때가 이르면 우리 주님께서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시고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이다.(바울 자신도 많이 참고 다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신령한 자의 태도)


2. 나와 아볼로가 이 일에 본을 보였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하는 교훈을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였다.(교만한 마음으로 대적하는 갈등의 일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다.)

  : 그런데 너희들은 마치 배우지 않은 것처럼, 부족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지혜로웠던 것처럼 행동하는 구나. 스승인 나는 부족하고 무지했었는데 너희들은 처음부터 풍족했던 것처럼 교만하니 참으로 우리가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구나.(7-13절.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며 하는 말씀이다.)


3. 이렇게 너희들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드러냄으로 너희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너희를 정말 사랑하는 자녀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복음으로 낳은 내 자식이지 않느냐? 제발 나를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라.


4. 내가 너희를 바로 지도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 것인데, 어떤 이는 내가 이제는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방자하고 교만하니 하나님이 내게 기회를 주시면 내가 반드시 가리라.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한 자를 책망하리라.  



[생각 정리]


1. 고린도교회는 바울과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정식 사도냐? 하는 바울의 사도성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 사도인 게바와도 비교되었을 것이었을 것이다.(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강조점에서 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방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의 조건과 관련하여)


2.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상당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맡기고 있다. 대응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 4:4-5)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또한 감정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일부를 향해서(교만한 자들) 조롱하듯 그들의 태도를 비꼬아 말하기도 한다. 


(고전 4:7-13)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러나 조롱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들 안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 줌으로서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것인가를 드러내 준다.(그들은 말과 지식을 자랑하지만,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지를 말한다.)


3. 바울은 지금 '부모'의 심정으로 이들을 책망하고 있다. 부모의 심정이란 책망의 목적이 다르다. 고쳐서 새롭게 하기 위한 책망이지, 정죄하고 판단하여 망가뜨리려고 하는 책망이 아닌 것이다. 바울은 철없는 고린도교회를 대하면서 많이 속상했을 것이다.(우리가 철없는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자식을 포기할 수 없듯이, 바울 스스로가 다시 출산하는 과정을 거쳐서라도 고린도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무서운 매를 든 것이다. 


[묵상 정리]


1. '부모의 심정'으로 책망하겠다는 말은 책망하는 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심정에는 '다시 출산하는 과정'을 하겠다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결단하는 것이 선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심정'으로 누군가를 책망하고 나서겠다고 말할 때는 '자기 죽음'의 태도가 함께 겸비되었을 때 그 진정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자기의 행동은 '따듯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2. 우리는 의도는 알겠지만, 표현자체에 대해서도 '격'이 있어야 성경적인 사람이요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용을 담는 그릇도 그 내용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격'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특수한 상황 그리고 의도적인 목적을 위해서 '격'을 낮추어 표현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바울도 '격'을 떨어뜨렸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자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그 만큼 상대방의 수준이 낮거나 완악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상황에 따라선 종종 격한 표현을 사용하셨으니까.


격이 낮냐 높냐로 성숙하냐 비성숙하냐? 혹은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상황에서 쓴 표현이냐? 누가 한 표현이냐?에 따라서 그것은 성경적일 수도 있고, 비성경적일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나, 바울에게서나 '참 인간적인 냄새'가 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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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해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권면은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권면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권면이다. 6장 1절이 '한 사람의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6장 2절에서는 성도 중 누가 자신의 짐을 지는 것이 힘겨워할 경우 그 짐을 서로 져주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교회는 지상의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여전히 '죄'가 있고, '연약함'이 있다. 죄의 문제를 다룰 때, 그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죄가 드러나게 된 <공동체>의 문제도 개선되어야 한다. 죄는 그냥 발생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토양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란 것이다. 그와 같은 토양이 형성되도록 방치한 공동체도 문제가 없지는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다루는 방식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약한 지체>에 대한 교회 성도들의 태도다. 그들의 연약함에 대해서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 주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각자 개인의 짐을 개인에게만 두어서는 안된다. 기본적인 원칙은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고, 개인의 주변 환경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을 때, 교회 공동체는 그 사람의 연약함을 보고(게으름이 아니다.)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을 이룬 지체다. 지체가 지체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한 몸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한 몸이라 말할 수 있고, 한 몸은 당연히 그렇게 한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을 때에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자랑할 만큼 스스로 높이지를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도 사람들에게 상석에 앉지 말고, 낮은 곳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높여서 자리를 옮겨주면 모르지만, 괜히 높은 곳에 먼저 앉다가 나중에 낮은 자리로 쫓겨나게 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연약한 자의 짐을 많이 져주었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자랑이 되지 못하도록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일수록 자신의 일을 늘 살피어, 겸손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묵상] 


1. 바울의 권면은 개인 경건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2. 죄를 범한 자에게 대해서는 바로잡도록 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3. 연약한 자에 대해서는 서로 짐을 져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남의 일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4. 능력있어서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까지 섬긴 자는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회 공동체는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사람을 공평케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약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고, 강해도 자만할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약한 자도 함께 존중받으며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강한 자의 능력은 섬기기 위한 능력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는 심지어 '죄'가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 죄를 일으킨 사람을 '옳게 세우는 곳'이며 심지어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교회 전체가 새롭게 갱신되는 곳이다. 교회를 이런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지상의 교회 공동체에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를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자 강한 공동체로 만들려고하는 시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죄'와 '연약함'을 부정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여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와 '연약함'으로 불완전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선'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바로 이 땅의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통해 공동체의 자정능력을 키우고, 한 사람의 연약함이 공동체의 한 몸 됨을 드러냄으로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죄와 연약함을 부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연약함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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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하박국 2:11-20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날 때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바빌로니아가 행한 악행으로 인해 나중에 그 대가를 치르고 심판을 받게 될 것을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바빌로니아가 지금 여러 나라를 피로 정복하는 것이 그들은 영광스럽게 생각하겠지만, 그것은 곧 진노로 돌아올 것이다. 이들은 우상을 섬기며 우상을 의존하지만, 그들이 섬기는 우상은 아무 능력도 행하지 못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무력할 뿐이다. 


절별 해설

2:13 <<온 민족이 애써 한 일을 허사로 만들 것이다>> 바빌로니아가 오랜 시간 전쟁하여 얻어낸 것, 공들여 세워놓은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한 수간에 허물어 허사로 만드시겠다는 말씀이다. 따라서 지금 바빌로니아가 행한 모든 악행은 영원할 수 없음을 말씀하신 것이다. 


2:14 <<여호와의 영광을 아는 지식이 땅에 가득찰 것이다>> 바빌로니아를 심판하시고 징계하심으로 그들이 행했던 모든 것을 허물어 버리심으로 바빌로니아보다 더 큰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으로 모든 백성에게 알리시겠다는 말씀이다. 강력한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시는 작업이다. 


2:17 <<그 성 주민들에게 저지른 폭력 때문에 너희는 두려움에 떨게 될 것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빌로니아의 악행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왜 징계하지 않으시는가를 질문했는데, 하나님은 바빌로니아가 그들의 악행으로 심판받게 될 것을 지속적으로 말씀하신다. 다만, 하나님의 심판의 때가 하박국 선지자가 생각한 때와 다를 뿐임을 본 구절은 말한다. 


2:18,19 <<나무 우상을 가리켜 깨어나라고 말하며>> 나무 우상이란 사람이 만든 것에 불과하다.그러나 그 나무로 우상을 만들고 나면, 사람들은 그 우상에게 신의 자리를 부여하고 자신을 위해 뭔가를 하도록 요청하고 기대한다. 그와 같은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을 말한다. 


2:20 <<그러나 나 여호와는 나의 거룩한 성전에 있으니>> 바빌로니아는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 의존하여 자신의 운명을 결정한다. 그러나 우상 숭배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를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호와는 거룩한 성전에 계신 분이시다. 사람이 만든 우상과는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될 수 없다. 하나님 앞에서 바빌로니아도 잠잠해야 하는 것이다.  


기도

하나님, 악인이 교만하여 함부로 그 힘을 휘두르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이 땅에 속히 이루어지게 하소서. 악인을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드러내소서. 


맺는 이야기

악인의 악이 심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강력하게 드러나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던 이집트의 <바로>는 10번의 재앙을 경험하고서야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그러나 그는 곧 마음을 바꿔 홍해 앞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쫓자왔다. 이스라엘을 잡기 위해 갈라진 홍해를 건너 왔다. 하나님은 그 상황 속에서 이집트의 군대를 수장시키심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만방에 알리셨다. 노아의 시대에도 그러했다. 악이 세상에 만연되어 있을 때,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고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크심과 영광을 드러냈다. 바빌로니아도 마찬가지다. 강력한 바빌로니아를 심판하심으로 하나님은 하나님의 크심과 악에 대한 심판을 만방에 알리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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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나훔 2:1-7 높아진 자는 낮아지게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본문은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데에 의해서 멸망당하는 모습을 그 자리에서 지켜보는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바벨론과 메데의 전차들이 니느웨 성 광장을 마음껏 달리는 모습이나 니느웨 백성들이 사로잡혀가면서 슬퍼하는 모습을 과거 일처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데 이는 확실한 미래에 대한 서술 방식으로 봐야 할 것이다. 


절별 해설

2:1 <<힘을 다해 지켜라>> 하나님께서 나훔을 통해 니느웨가 당할 공격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파괴자가 오는 것을 알고 최선의 준비를 할지라도 니느웨가 막을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조롱하는 조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만큼 침략자들이 강하며, 이것은 하나님이 작정하신 심판임으로 견딜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2:2 <<여호와께서 야곱 백성을 이스라엘 백성처럼 회복시켜 주실 것이다>> 본 구절은 야곱 백성의 회복을 약속해 주시는 말씀인데, 오히려 나훔 1:15과 연관지어 이해하는 것이 적절하겠다. 


2:3 <<방패, 갑옷, 공격용 전차, 소나무 창>> 니느웨를 공격하는 바벨론과 메데의 군대의 강인함을 보여주는 소재들이다. 또한 이들을 묘사함에 있어서 붉은색, 주홍색, 번쩍임, 흔들림의 시각적인 표현들을 사용하여 그 장면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2:4 <<달리는 모습이 번개 같다>> 바벨론과 메데 군대들이 잘 훈련된 군인으로서 신속하게 움직이며 일사분란하게 니느웨를 공격해 들어오는 모습을 역동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파괴자들의 강인함을 말한다. 


2:5 <<그들은 쓰러질 듯 급히 성벽으로 달려가>> 니느웨의 왕이 장교들을 불러 성벽을 방어하도록 지시해 보지만, 이들의 방어는 바벨론과 메데의 공격에 비해 상대적으로 무력함을 말한다.  


2:7 <<여종들은 비둘기처럼 신음하고>> 백성들이 잡혀가고, 왕과 왕후, 왕자들과 신하들이 포로로 잡혀 감으로 그를 섬기는 여종들이 나라의 멸망 앞에 애통해 하고, 자신의 처지로 말미암아 가슴을 친다. 니느웨의 완전한 패배를 보여주고 있는 장면이다. 


기도

주여, 하나님께서 만물과 만사를 다스리시고 운행하시는 줄 믿습니다. 악인을 잠시 징계의 막대기로 사용하시기도 하시지만, 반드시 심판하시고 멸하시는 분이신 줄을 믿습니다. 아멘.


맺는 이야기

니느웨는 난공불락의 성으로 알려져있었다. 그래서 니느웨의 침략을 받은 나라들은 그 나라로부터 해방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하지 못했고, 니느웨의 위협을 받고 있는 나라들은 곧 그들에 의해서 멸망 당할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확신을 가지 니느웨 백성들은 교만했음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니느웨가 바벨론과 메데에 의해서 무너지고 말게 될 것을 나훔은 예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실제로 그와 같은 결과를 이루었다. 하나님을 대적하여 높아진 모든 것은 결국 낮아지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리다. 그리고 낮아졌던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시 높아지게 될 것이다. 나훔은 높아진 자에게는 경고를 낮아진 자에게는 위로를 선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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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장, 묵상 한모금] 사무엘상 13장. 사울,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치명적 한계 드러냄.


1.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다. 왕된 2년 때의 일이다.

2.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3천명을 뽑아, 2천명은 자신이 데리고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1천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나머지는 장막으로 돌려보냈다.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침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과 전쟁을 준비하게 됨

4.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모여 사울을 따랐다.

5. 그런데 전쟁을 하기 위해 온 블레셋의 그 수가 엄청났다. 병거가 3만이고, 마병이 6천이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굴과 수풀과 바위 틈에 숨었다. 어떤 사람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 사울은 왕으로서 상비군을 두어 운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상비군을 통해 눈에 가시 같은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도 할 수 있었고, 그로인한 성공도 거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블레셋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졌고, 블레셋의 병력을 전면적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없었다. 그래서 블레셋의 엄청난 병력을 보자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두려움 속에 숨거나 도망쳐 버리고 만다.

 * 이스라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강해졌다. 그러나 세상은 더 강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비하면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강함이란 현실 속에서 매우 부끄러운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 간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병력의 우위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신이었다.



6. 사울은 기갈에 머물면서 사무엘을 기다렸다. 그가 제사를 드린 후에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무엘이 늦어지고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흩어지자 조급해진 사울은 본인이 직접 제사장의 역할까지 해서 제사를 드려버린다.


 * 왕은 사무엘이 제 때에 오지 않자, 본인이 직접 제사를 드린다. 제사만 드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겠지만, 그 마음 속에는 왕인 자신이 제사까지 드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왕이 되자 자신이 모두 할 수 있고, 해도 된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7. 제사가 마칠 때 즈음 사무엘이 등장하고, 사무엘은 이 일로 인해 사울을 책망한다.

 1)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다.

 2)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다.

 3) 왕이 하나님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아니하셨으니,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로 삼을 것이다.

8. 사무엘은 일어나 길갈로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갔다.


*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울의 왕 위는 길지 못하게 된다. 왕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임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의 왕은 절대군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왕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이 마치 절대군주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사울의 한계와 세상 왕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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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울과 함께 전쟁하기 위해 남아 있는 자는 600명에 불과했다.

10.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백성들과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진을 쳤다.

11. 블레셋은 세 대로 나누어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12 이 당시 이스라엘은 철재 무기가 없었다. 이스라엘 중에는 사울과 요나단만 철로 된 칼이나 창이 있었을 뿐이다. 이스라엘에는 철공도 없어서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는 블레셋에 내려갔다 와야 할 정도였다.


 * 현재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형편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 수에서도 그렇고, 군사들의 사기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또한 무기 또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철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전쟁과 같은 형편이다.


[정리] 사울은 자신을 백성들의 왕이라고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울은 왕이 된 이후, 아래에 있는 백성만 봤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모든 권력자들이 무너지는 이유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자리에서 이것을 인식하여 자신을 겸비하는 사람 또한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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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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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장 성경 한모금] 삼상 2장. 한나의 기도 내용 / 엘리 아들들의 패역함.


[한나의 기도]

1.한나가 기도하며 하나님을 찬양함

 1)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다.

 2) 교만하고 오만한 말을 내지 말라.하나님은 그 행동을 달아보시는 분이시다.

 3) 하나님은 용사의 활은 꺾으시고, 넘어진 자는 힘으로 띠를 띠도다.

 4)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스올에 내리기도 하시고, 거기서 올리기도 하신다.

 5)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신다.

 6) 여호와를 대적하는 자는 산산이 깨어질 것이다.

 * 신상에 뜨인 돌에 의해서 깨어짐같이, 세상의 높아진 것들은(하나님을 대적하여) 산산조각 날 것이다.

 7) 하나님은 자기 왕에게 힘을 주시고,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뿔을 높이시리로다.

2. 엘가나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고, 아이는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기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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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 제사장 아들들의 악한 행실]

3. 엘리의 아들들은 행실이 나빠 여호와를 알지 못하였다.

4.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고 고기를 삶을 때, 갈고리로 아무 것이나 걸리는대로 가져갔다.

5. 때로는 제물을 기름에 태우기도 전에 제사드리는 사람에게 고기를 삶기 전에 날 고기를 원한다고 달라고 한다.

6. 제사 드리는 사람이 이를 거절하여, 먼저 기름에 태운  후에 네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억지로 그것을 빼앗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7. 엘리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제사를 멸시함으로 여호와 앞에 큰 죄를 지었다.

 * 엘리 아들들의 가장 큰 죄는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경건이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제사를 멸시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와 불경건에 나타난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롬 1:18)

 * 엘리의 두 아들이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이었는가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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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사무엘은 어떻게 자라갔는가?]

8. 반면, 사무엘은 어려서부터 세마포 에봇을 입고 여호와 앞에서 섬겼다.

9. 한나는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남편과 올때마다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사무엘에게 주었다.

10. 엘리 제사장은 이들을 축복하여 그 가정에 다른 자녀들이 있도록 간구하였고, 여호와께서 한나를 돌보사 그로 하여금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다.

11. 아이 사무엘은 여호와 앞에서 자라갔다.

 * 엘리는 경건한 부모의 섬김 속에서 경건하게 자라갔고, 하나님은 그 가정에 복을 주셨다. 악한 시대 속에서도 경건한 가정은 있고, 그들의 씨가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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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엘리의 두 아들의 타락은 갈때까지 갔다. 엘리는 사람들에게 그 아들의 행실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들을 책망하지만 변화의 가능성은 없다. 결국 그들을 하나님은 죽이기로 작정하셨다.

13. 반면, 사무엘은 점점 자랐다. 여호와와 사람들에게 은총을 더욱 받았다.

 * 엘리의 두 아들의 운명과 사무엘의 운명이 대조되면서 교차하고 있다. 패역한 사람을 폐하시지만, 그 일을 대신할 새로운 사람을 예비하고 준비하셨다. 하나님도 사람을 세우시고 준비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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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엘리의 집안을 폐하고, 새로운 사람을 세움]

14. 하나님의 사람이 엘리에게 와서 말씀하심.

15. 애굽에 있을 때 너희 조상을 세워 내 제사장으로 삼지 아니하였느냐? 이스라엘의 모든 화제를 네게 주지 아니하였는냐?

16. 그런데 너희가 어찌하여 나의 예물을 밟고, 네 아들을 나보다 중히 여겨 이스라엘이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너희를 살지게 하느냐?

17. 그래서 내가 너희를 멸시하여 너희 집에 늙은 자가 없도록 하겠다. 젊어서 죽으리라. 네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가 한 날에 죽을 것인데, 이것이 표징이니라.

18. 내가 충실한 제사장을 일으킬 것이다. 그를 위하여 견고한 집을 세울 것이다 그가 나의 기름부음 받은 자 앞에서 영구히 행할 것이다.

 * 엘리 집안의 대제사장 아비아달이 솔로몬에 의해서 제자장직에서 파면되면서 이 말씀은 성취되게 된다.


* 한나의 기도 내용처럼 자녀를 낳지 못해 고통당했던 한나는 사무엘을 얻고 그 이후  세 아들과 두 딸을 얻어 큰 복을 받았다. 반면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오만하게 행하여 그들의 운명이 비참해 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비참하게 하심으로써(대적하심) 그의 오만을 꺾으신다. 반면 가난하여 절망 속에 주를 의지하는 자에게는 높이시는 은혜를 주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그런 분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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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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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6편]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은 하늘과 공중에 가득하다. 또한 주의 의와 심판도 산과 바다에 가득하다.(5,6절)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가운데 인자/진실 그리고 의/심판이 충만하다. 잊지 말자. 그래서 피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충만한 인자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는(악인의 길에 서는 자는) 충만한 하나님의 의로 심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라(9절)> 고백하게 된다. 요즘 이 시대는 국가의 중앙으로부터 이 빛이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많이 흐려졌다. 



[정리]


1. 악인들의 악함에 대해서: 교만과 두려워함이 없음.


1절. 악인의 죄가 그의 마음속으로 이르기를

그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하니

  : 악인의 특징_하나님을 두려워함이 없음(불경건)


그가 스스로 자랑하기를 

자기의 죄악은 드러나지 아니하고

미워함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함이로다.(2절)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죄악과 속임이라.

그는 지혜와 선행을 그쳤도다.(3절)

  : 입과 행동으로 죄악과 속임을 행하면서도 자신의 죄는 드러나지 아니하리라. 미워함을 받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교만함_아무도 자신을 어떻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함)


그는 그의 침상에서 죄악을 꾀하며

스스로 악한 길에 서고 

악을 거절하지 아니하는도다.

  : 그는 악을 묵상하며 악인의 길에 서며 악을 수용한다.


2.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공의로우심을 나타내소서. 그래서 악인이 교만하지 못하게 하소서.


5절. 여호와여 주의 인자하심이 하늘에 있고

주의 진실하심이 공중에 사무쳤으며


주의 의는 하나님의 산들과 같고

주의 심판은 큰 바다와 같으니이다. 

여호와여 주는 사람과 짐승을 구하여 주시나이다. (6절)

  : 하나님의 인자와 진실은 하늘과 공중에 가득하다. 또한 주의 의와 심판도 산과 바다에 가득하다. 따라서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세계 가운데 인자/진실 그리고 의/심판이 충만하다. 잊지 말자. 그래서 피하는 자는 구원을 얻으며(충만한 인자로 인해), 자기 마음대로 사는 자는(악인의 길에 서는 자는) 충만한 하나님의 의로 심판에 이르게 된다. 이것을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라(9절)> 고백하게 된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하심이 어찌 그리 보배로우신지요

사람들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7절)


....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이다.(9절)


주를 아는 자들에게 주의 인자하심을 계속 베푸시며

마음이 정직한 자에게 주의 공의를 베푸소서(10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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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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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0편] 제일 참기 힘든 상황은 <악한 일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악을 행하는 자가 왜 징계를 받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악을 행하는 자가 왜 힘과 권력까지 갖게 되고, 무력한 의인들이 억울한 고통을 받도록 하나님이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에게 가장 힘든 상황이다. 요즘 참 힘든 상황을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래서 기도가 더욱 많아져야 할 때인듯 합니다. 



[정리1]


1. 시편 기자의 억울함: 악한 자가 교만하기까지 하다.(1-11절)

 

  4절. 악인은 그의 교만한 얼굴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이를 감찰하지 아니하신다.'

  5절. 악인의 길은 언제든지 견고하고

주의 심판은 높아서 그에게 미치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그의 모든 대적들을 멸시하며 마음에 이르기를

나는 흔들리지 아니하며 나는 대대로 환난을 당하지 아니하리라.(6절)

  7절. 그의 입에는 저주와 거짓과 포악이 충만하며

그의 혀 밑에는 잔해와 죄악이 있나이다. 

  8절. 숨어서 무죄한 자를 죽이고, 

  9절. 포악으로 가련한 자들이 넘어진다. 

  10절. 그의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잊으셨고 그의 얼굴을 가리셨으니 영원히 보지 아니하시리라.

 

2. 시편 기자의 호소: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12절. 악인들로 인해 고통받는 가난한 자들을 잊지 마소서

  14절. 주님은 벌써 그들을 보셨다. 주를 의지하는 자를 도우시는 분입니다.

  15절. 악인의 팔을 꺾으소서. 

악한 자의 악을 더 이상 찾아낼 수 없을 때까지 찾으소서.

  18절. 여호와여, 고아와 압제당하는 자를 위하여 심판하사 

세상에 속한 자가 다시는 위협하지 못하게 하시리이다. 


[정리2] 


1. 교만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성경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요 하나님을 우습게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용납하실 수 없는 것이 바로 교만의 이런 특성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는 교만은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교만>이란 단어의 개념과 좀 다르다. 우리는 자신을 스스로 높다고 여기는 것을 교만이라고 부르지만, 실은 그 교만의 확장은 하나님과의 비교까지 이르게 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경시하거나 하나님을 우습게 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된다. 이것은 인간적인 교만의 가장 극단적 모습이다. 그러나 작은 교만이라 할지라도 그 씨는 같다고 봐야 한다. 


2. 참을 수 없는 것, 악인의 교만.


범죄자를 다루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관중을 가장 분노하게 만드는 악인은, 단순히 잔혹한 죄를 지은 자가 아니다. 그 죄를 지으면서도 죄책감을 가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죄를 처벌하려는 정당한 권력을 우습게 아는 자요, 더 큰 권력과 결탁하여 악한 행동을 하면서도 당당히 뻔뻔하게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에게 대해서 우리는 참기 어려운 분노를 느낀다. 

악한 자가 권력과 힘을 가지게 되어 오히려 의인을 박해하고 우습게 알며 의로운 자들을 농락하는 사회를 우리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악인이 힘과 권력을 가짐으로 교만하여 진 것이다. 자신을 판단하고 제어할 수 있는 더 큰 권력이 없음으로 그들은 약한자들을 괴롭힌다. 공권력을 우습게 안다. 

시편 기자는 지금, 이와 같은 사회에 대해서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된 일인가?


3.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입니까?


시편 기자의 분노는 교만한 악인에게 분노하고, 그와 같은 모순된 사회 상황에 절망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왜 이런 상황 속에서 악인의 교만을 꺾지 않으시고 가만히 두고 보시는가! 하는 탄식이다. 심지어 악인들은 하나님까지 경시하며 무시하고 있는데(불경건한 행동을 일삼는데) 왜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움꾸리고 있는 사자가 일어나듯, 일어나셔서 표호하실 것이고 악인들을 터시는데, 더 이상 털게 없을 때까지 털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의로운 가난한고 연약한 자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그들의 손을 들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다시는 이들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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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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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사기 20장]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 지파 자손과의 전쟁이야기다. 이스라엘 연합군의 교만과 베냐민의 교만 모두를 지적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본다. 교만은 힘으로 다스려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교만은 전략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교만(스스로 왕 됨)은 멸망을 가져올 뿐이라고 지적하신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기브아 사건으로 인해 미스바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

  1)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단에서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미스바에서 여호와 앞에 모였다.

  2) 온 백성들의 어른 곧 이스라엘 모든 지파의 어른들이 이스라엘 총회에 섰고, 칼을 빼는 보병은 40만 명이었다. 이와 같은 일을 베냐민 사람들도 들었다. 

  3) 레위 사람은 모인 사람들에게 사건의 전말을 이야기 한다. 자신이 베냐민에 속한 기브아에 있을 때, 기브아 사람들이자신을 죽이려고 했고 자신의 첩을 욕보여 그를 죽게 했다고 말하고, 그래서 내 첩의 시체를 거두어 이스라엘 온 땅으로 보냄으로서 이스라엘 중에서 음행과 망령된 일을 행하였음을 고발했다. 그리고 이스라엘 총회에게 의견과 방책을 달라고 요청했다. 

  4) 모든 백성은 일제히, 모든 지파 중에서 십분의 일을 파견해서 기브아 사람들에게 그들이 행한대로 징계해야 한달 것을 결정했다. 


2.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과의 격돌

  1) 이스라엘 지파들이 베냐민에게 사람을 보내 그 불량자들을 넘기라고 요청한다. 

  2) 그러나 베냐민 자손들은 그들의 형제 이스라엘 자손의 말을 듣지 아니했다. 오히려 이스라엘 자손들과 싸우고자 했다. 

  3) 베냐민 자손의 병력은 칼을 빼는 자가 26,000명이고 그 중 택한 자가 700명인데 이 택한 자들은 왼손잡이로 물매로 돌을 던지면 조금도 틀림이 없는 자들이었다.


3. 이스라엘 연합군과 베냐민과의 전투에서 일어난 일

  1) 이스라엘 연합군도 40만 명의 전사들이 동원되었다. 전쟁을 하기 전 벧엘에 올라가 여호와께 묻자, 여호와께서 먼저 유다가 올라가라고 지시해 주셨다. 

  2) 이스라엘은 아침에 일어나 기브아에 진을 쳐 베냐민과 싸웠는데, 이스라엘 연합군 22,000명이 땅에 엎드려지는 패배를 경험하게 된다. 

  3) 이스라엘 연합군은 다시 용기를 내어 전열을 갖추고 여호와께 저물도록 울며 여쭈었다.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여호와께서는 올라가서 치라고 말씀해 주셨다. 

  4) 그 이튿날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올라가 전쟁하매 이스라엘 자손이 18000명이 엎드러지는 패배를 다시 당하게 된다. 

  5) 이스라엘 자손들이 벧엘에 올라가 다시 울며 그 날에 저물도록 금식하고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렸다. 그 때 그 곳에 언약궤와 제사장 비느하스가 있었다. 다시 묻는다. 내 형제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내일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겠다고 말씀하신다. 


4. 이스라엘 연합군의 승리

  1) 이스라엘이 기브아 주변에 군사를 매복하였다. 

  2) 이스라엘이 전처럼 베냐민을 공격하였고, 베냐민은 이전처럼 자신들의 승리하는 줄 알고 이스라엘 쫓았다. 

  3) 그러나 매복했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나와서 기브아 성읍을 공격하고 불살랐다. 베냐민은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고 광야 길로 도망쳤다. 이스라엘은 그들을 쫓아가서 그들 중 18000명을 죽였다. 도망치는 베냐민을 림몬 바위에서 5000명을 죽이고, 또 그 뒤를 쫓아가 기돔에서 2000명을 죽였다. 당일 베냐민 사람 25,000명을 죽였다. 이들은 모두 용사였다. 

  4) 베냐민 사람 600명이 돌이켜 광야로 도망하여 림몬 바위에 이르러 거기에서 넉 달 동안 지냈다. 이스라엘은 베냐민 자손에게로 돌아와 성읍을 모두 다 불살랐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기]


기브아 불량자들이 레위인의 첩을 욕보이고 죽인 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전역이 흥분하여 미스바에 모였다. 레위인은 기브아 사람들의 행음행과 망령된 일에 대해서 성토했고, 이스라엘 총회의 어른들은 모두 베냐민의 이와 같은 행도에 대해서 징계를 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이스라엘의 연합군 대표는 베냐민을 찾아가 그 불량자들을 내 놓으라고 했으나, 오히려 베냐민은 이스라엘 연합군과 전쟁을 결정하게 된다. 이 전쟁은 당연히 이스라엘 연합군의 승리로 이어 갈 것이로 보였다.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이스라엘은 벧엘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물었다. 하나님은 유다로부터 올라 것을 지시하셨다. 그러나 베냐민과의 첫 전쟁에서 이스라엘 연합군을 무참히 패배한다. 다시 하나님께 나아가 울며 하나님의 뜻을 물은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다시 올라가서 싸우라는 말씀을 듣는다. 다시 용기를 내어 올라갔던 이스라엘의 연합군은 다시 한번 패배하고 만다. 


이스라엘 연합군은 망연자실해진다. 이들은 다시 울며 저물도록 금식하면서 하나님 앞에 번제와 화목제물을 드렸다. 그리고 여호와의 뜻을 물었다. 그 때 언약궤가 같이 있었고, 아론의 자손인 비느하스가 제사장으로 그 앞에 있었다. 이스라엘은 다시 묻는다.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 여호와께서 올라가라고 말씀하시고 내일은 그들을 넘겨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 베냐민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번에는 복병을 두어 베냐민을 속이고자 했다. 처음에 이스라엘은 베냐민에게 또 패배하는 것같이 보였다. 안심하고 이스라엘을 쫓던 베냐민을 속이고 복병으로 있던 이스라엘은 기브아 성읍을 공격하여 그 성읍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자신이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된 베냐민은 광야로 도망쳤지만, 이스라엘 연합군에 의해서 26000명의 베냐민 병사중 25000명이 죽고 만다. 그 중의 소수만 남아서 림몬 바위에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정도가 되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이스라엘 연합군의 베냐민 징계가 생각대로 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11개 지파다. 그리고 군사는 40만명에 이른다. 이들이 판단했고 이들이 베냐민을 심판하기로 결정했다. 베냐민은 26000명에 불과했다. 당연히 이스라엘 연합군이 위협하면 베냐민을 쫄줄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냐민은 당돌했다. 그들은 뒤로 물러서지 않았고 오히려 전쟁을 자극했다. 결국 전쟁은 일어났다. 이스라엘 연합군이 이기는 것은 당연하고 얼마나 빨리 결정날 것인가만 궁금할 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달랐다. 이스라엘 연합군의 무참한 패배를 보게 된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그 과정 속에 하나님에게 묻는 질문도 있었고, 울며 금식하는 애통함도 있었다. 하나님께 올라가라고 하시는 말씀도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연합군은 패배했다. 왜 이런 일이 생겼는가?


이스라엘은 연합군은 자신들이 재판장이 되고자 했다. 그들이 심판하면 베냐민은 수긍하고 인정할 줄 알았다. 힘으로 당연히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다. 힘으로 다스려지지 않았고, 힘이 있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었다. 왕의 역할이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었다. 힘으로만은 통치할 수 없고, 명분만으로도 다스려지지 않는 것이다. 


2. 두번의 실패 후에 얻게 된 승리의 이유


왜 종국적으로는 이스라엘 연합군이 이길 것이고, 베냐민은 심판받아야 마땅하다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연합군이 두 번이나 패배하는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 본다. 

  

  1) 이스라엘 연합군의 교만을 깨뜨려야 했다. 이스라엘은 형식상으로는 모든 것을 했다. 하나님께 물었고, 실패했을 때는 하나님께 금식하고 기도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이 있을 때 나아가서 싸웠다. 그러나 그들은 교만했다. 이 전쟁은 당연한 것이고 누가 먼저 올라갈 것인가의 문제였다.(18절) 그러나 두 번의 패배이후 이들은 비로소 묻는다. 하나님이 베냐민 자손과 싸우리이까 말리이까?(28절) 전쟁의 여부를 묻는 질문까지 내려왔던 것이다. 그제서야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을 주신다. 그 이전에는 올라가서 싸우라고만 하셨지, 승리에 대한 약속은 없었다. 

두 번의 패배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연합군의 교만을 치셨다. 네가 힘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착각이다. 힘으로 안된다. 힘만으로 싸울 때, 너는 베냐민에게 진다.


  2) 베냐민의 교만을 깨뜨려야 했다. 베냐민은 교만했다. 이스라엘 연합군이 불량자를 달라고 했을 때, 그들을 넘겨주었다면 이렇게까지 일이 커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베냐민은 자신들이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들에게는 잘 훈련된 용사들이 있고, 전략을 잘 세우면 이길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거대한 이스라엘 연합군에게 두 번의 승리를 얻었다. 그들은 교만해졌다. 

그러나 이들의 이 교만이 결국은 이스라엘 연합군에게 패배하게 된 이유가 된다. 이스라엘의 작은 속임수를 보지 못했던 것이다. 결국 교만했던 베냐민은 이스라엘 연합군에 의해서 섬멸되고 만다. 거의 멸절되다 싶이 한다. 


베냐민도 이스라엘 연합군도 교만했다. 자신들이 마치 왕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명목상의 하나님을 믿지만 하나님을 진정으로 왕으로 섬기지는 않았다. 자신들의 결정대로 할 뿐 이었다. 힘이 있으면 싸웠고, 이길 줄 알았다. 이들의 교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이들이 이 교만이 얼마나 큰 피해를 일으켰는지를 본문은 알려 준다. 


왕이 없다는 것은 우리 자신이 왕이 되는 것이고, 그것은 결국 상호간의 전쟁으로 이어지며 전쟁의 최후는 멸망이라는 것을 사사기는 우리 가운데 말하고 있다. 하나님이 아닌 나를 왕으로 세울 때, 인류는 이와 같은 불행을 맞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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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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