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그리스도인이 아니면 인정하지 않는, 세상의 도덕과 가장 날카로운 차이를 보이는 것에 대해서 나누려 한다.  이 악은 누구에게나 있으면서도 세상 사람들은 자기에게 그와 같은 악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반면 누구에게라도 그와 같은 악이 나타나면 한치의 용서를 베풀지 않는다. 


그 악이란 바로 교만(Pride)과 자만(Self-Conceit)이다. 이와 반대로 기독교적인 덕목은 <겸손>이다.


1. 겸손은 기독교가 말하는 도덕의 중심이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은 교만이라는 악에 비하면 새발의 피에 불과하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된 것이다. 교만은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하나님과 전적으로 맞서는 마음 상태다. 


  교만은 본성상 경쟁적이다. 교만은 단순히 무언가를 가지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옆사람보다 더 가져야만 만족한다. 우리를 교만하게 만드는 것은 남과의 비교다. 남들보다 우월하다는 데서 오는 즐거움이 사람을 교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2. 교만한 행동들

  1) 두 남자와 한 여자와의 관계: 교만이란 그 여자를 좋아해서가 아니라, 단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임을 입증하기 위해서 남이 좋아하는 여자를 빼앗아 간다. 

  2) 어떤 물건이 충분하지 못할 때: 탐욕이 경쟁으로 몰아갈수도 있다. 그러나 교만한 사람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상을 얻었을 때에도 단지 자기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더 많은 것을 얻고자 한다. 

  3) 돈에 대한 탐욕과 교만은 차이가 난다. 탐욕은 더 좋은 집, 더 좋은 휴가, 더 좋은 먹을 거리를 위해 돈을 갖고 싶어하게 만든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만 그렇다. 어느 정도 이상되면 더 많이 쓰기 위해서 더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때부터는 다른 부자보다 더 부자가 되고 싶다는 바람 때문이다. 이것의 극대화가 권력욕이다. 권력은 교만한 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을 꼭두각시처럼 좌지우지하는 것만큼 우월감을 가지게 하는 것은 없다. 

  4) 예쁜 여자가 가는곳마다 남자들의 마음을 빼앗아 불행하게 만드는 이유는 성적 충동 때문은 아니다. 교만이다. 

  5) 교만은 세상에 나보다 나은 사람이 단 한 명만 있어도 경쟁자로 여기고 적으로 여긴다. 이것이 교만의 특성이다. 


3. 교만은 본질적으로 관계를 깨뜨리고 상호 적대적일 수 밖에 없다. 


4. 교만하면서도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주 신앙적으로 행세하는 사람을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합니까? 

  1) 이들은 상상속의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2) 하나님이 다른 사람보다 자신을 더 인정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3) 우리도 그렇지 않은지 테스트 해 볼 수 있다.

    : 내가 신앙생활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스스로 선한 사람으로 느껴질 때(특히 다른 사람보다 낫게 느껴질 때)는 확실히 하나님이 아니라 악마를 따르고 있다고 보면 된다. 


5. 인간의 다른 죄는 동물적 본성에서 나온다. 그러나 교만은 동물적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옥에서 곧장 나온다. 교만은 순전히 영적인 악입니다. 그래서 다른 악들에 비해 훨씬 더 교묘하고 치명적이다. 그래서 종종 교만이 선한 일에 효과적인것 처럼 보여질 때가 있다. 자신의 체면과 수준 혹은 품격을 위해서 어떤 일을 하지 말라고 요청할 때 효과가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동상을 치료하는 정도일 뿐, 실은 더 큰 병, 암을 유발하는 원재료가 되는 것이다. 


6. 이야기를 마치기 전 있을 법한 오해를 풀어주는게 좋을 듯 하다. 

  1) 칭찬받고 즐거워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나로 인해 칭찬해 주는 그 사람이 즐거워하고 좋아 하니까 기쁜 것은 좋은 것이지만, 그것을 내가 그런 칭찬을 받고 상태를 즐겁게 해주다니 나는 대단해! 로 가면 문제가 된다. 자기 자신으로 빠지면 최악의 상태가 되는 것이다. 


  2) 허영심이 문제이긴 하지만 그래도 교만에 비한 그래도 인간적이다. 왜냐하면 허영심이란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는 것이고 이것은 다른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만은 다른 사람을 얕본 나머지 다른 사람이 무슨 말을 하든지 전혀 신경쓰지 않게 된다. 


  3) 자랑스러워 한다는 것이 교만인가요? 루이스는 만약 그 의미가 '애정어린 마음으로 어떤 것에 경탄을 느낀다'는 의미라면 죄와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그러나 만야 그것이 유명하기 때문에 자랑스러워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잘못이다. 그럼에도 자기 자신을 자랑하는 것보다는 좀 나은 편이다. 완전한 영적 파멸로부터는 좀 벗어나 있다고 볼 수 있다. 


  4) 하나님이 교만을 싫어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교만하셔서 그렇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교만의 상대가 아니다. 다만 하나님은 우리가 뒤집어 쓴 가면을 벗겨주길 원하시는 것이다. 


  5) 정말로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입에 달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의 겸손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자신을 잊는 것에서 부터 겸손이 시작된다. 


[결론] 겸손의 첫 걸음은 자신이 교만하다는 사실을 먼저 깨닫는 것이다. 자신은 우쭐대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야말로 사실 아주 우쭐대고 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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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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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사기 7장] 기드온이 모은 힘(병력)을 빼시는 하나님을 본다. 이유는 그 스스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할까봐다. 그런걸 보면, 우리에게 맡겨진 어떤 사역을 감당하도록 힘을 주셔야 할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의 힘을 빼실 때 우리 안에 자라 오를지 모르는 교만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충만한 도우심을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눈치채야 할 것이다.(그 순간에는 왜 이 눈치가 그리 없는지...)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기드온의 이스라엘의 병사들을 줄이시는 하나님.

  1) 기드온을 따르는 이스라엘과 미디안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많아서 미디안을 넘겨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을 거슬러 자랑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이다. 

  3) 백성 중에서 두려워하는 자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22000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았다. 

  4) 여호와께서는 이 숫자도 너무 많다고 하셨고, 그들을 물가로 인도하여 그들을 시험하시고자 했다. 

  5) 그 중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마신 자의 수는 300명이고 그 외의 숫자는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다. 

  6) 여호와께서 손으로 물을 움켜 먹은 자 300명만 남기고 남은 백성은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셔서 다 돌아가고 300명만 남게 되었다. 


2. 기드온으로 하여금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

  1) 그 날 밤에 기드온으로 하여금 진영으로 내려가라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심

  2) 만일 네가 내려가기 두렵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 보라. 그러면 네가 그들의 하는 말을 듣고 강하여 지리라.

  3) 기드온은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갔는데, 그들의 진영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 떼와 같고 낙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4) 그러나 병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기드온의 이스라엘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들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된다. 


3. 기드온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1) 용기를 얻은 기드온은 그 밤에 3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미디안의 진영으로 향한다. 

  2)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기드온 무리의 행하는대로 행하도록 지신한다. 기드온과 백 명은 이경 초에 파수꾼이 교대하는 시간 때에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나팔을 불며,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라>라고 외치자 세 부대가 모두 함께 그렇게 외쳤다. 

  3) 당황한 적들은 자신의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고 혼란스럽게 된다. 도망치던 그들을 이스라엘의 납달리,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추격한다. 

  4)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였다.그들의 머리를 기드온에게 가져왔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기]


이제 기드온이 모집한 이스라엘 군대와 미디안,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들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 병사들의 너무 많음을 지적하셨다. 절대적인 숫자가 많다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겼다고 생각할 만큼, 많다고 보셨다. 그래서 일부를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그렇게 22000명이 갔고, 만 명만 남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숫자도 많다고 하셨다. 물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는 모습을 통해서 한 번 더 선별하셨다. 손으로 움켜 물을 마신 자, 300명만 남기고는 모두 돌려보내게 하신다. 


300명.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숫자가 되질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충분한 숫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 날 밤에 진격하라고 했지만, 혹 두렵다면 부하 부라를 데리고 먼저 그 진영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신다. 가보고 나면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말이다. 미디안과 아말렉의 병사들은 너무 많았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보았고, 그것으로 인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기드온은 3백 명을 백 명씩 셋으로 구분하고 밤 이경 시간에 기습적으로 나팔을 불고, 항아리 속에 감추었던 횃불을 드러내게 했다. 아마 그들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함이었을 텐데, 실재로 그들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서로 자기편끼리 죽이게 된다. 이들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기드온은 특별히 에브라임의 도움을 요청하고, 에브라임은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정리3. 정리하면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와 묵상들]


1. 하나님은 병력을 줄이신다. 

3만 2천명이던 병력이 많다고 줄이라고 하신다.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이겼다는 생각을 조금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 명이 남았는데 이도 많다고 하셨다. 결국 2차 선정을 통해 300명으로 줄이신다. 

300명은 되고 200명이나 100명은 안되는가? 그러나 더 줄이실 필요는 없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부족하고 불가능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이길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을 빼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시는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의도적으로 우리 힘을 빼신다.

우리가 늙어 힘이 빠진다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갈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구원에 대한 소망과 더불어 그 소망 가운데 의지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래서 우리의 힘을 빼시는 과정 속에서 오나보다.

약함을 자랑하라는 바울의 역설이 이해되는 아침이다.

2.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용기를 얻을 확신의 기회를 주신다.

300명을 만드시고 그 날밤에 전쟁을 하라고 요구하신다. 무리한 요구라고 느끼셨는지, 아니면 기드온이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아셨던 것인지... 하나님은 요구하지도 아니한 증거를 추가로 제공하신다. 기드온에게 미디안의 진영으로 가보라는 것이다. 

기드온은 진영에서 들었던 꿈 이야기를 통해서 최종적인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는 순발력있게 전쟁을 치른다. 

하나님은 스스로 증거를 제공하시고 확신시켜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상처가 있는 사람(기드온)에게는 많은 위로와 확신의 기회를 주신다. 요구하지 않는 증거까지도 직접 챙겨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불안과 불신에 대해서는 관용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많은 상처를 가진 자들에게 대해서는 그 상처를 치유하여 믿음으로 나올만한 많은 기회들을 주신다. 

3. 전쟁 승리의 마지막에 에브라임이 등장한다.

이전에 전쟁을 위한 모집때는 보이지 않던 여로버암 지파가 등장한다. 드보라때도 기드온 때도 유명지파, 즉 유다나 에브라임이나 므낫세 자파에 대해서는 별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역할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다.(삿 5장)

여기서 에브라임의 등장도 뒷장에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이는 에브라임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강화시켜 주는 장치가 아닌가 싶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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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단테는 이 7가지 대죄를 사랑과 관계되어 3가지로 구분합니다. 

왜곡된 사랑, 불충분한 사랑, 과도한 사랑.

사랑이란 이름만 붙인다고 다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어쩌면 모든 죄는 사랑의 돌연변이 입니다. 





4세기 사막 수도사로 부터 규정된 죄의 규정은 조금 변화되고 정리되어 로마 가톨릭 안에서 7대죄(죽음에 이르게 하는)로 자리를 잡았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이 일곱가지 죄는 모든 죄의 머리가 되는 죄로 다루어졌다.




단테는 대죄를 그릇된 세 유형의 사랑으로 분류했다.


첫째,  교만, 시기, 분노와 같은 죄를 <왜곡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둘째, 나태와 같은 죄를 <불충분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셋째, 탐욕과 탐식과 정욕은 <과도한 사랑>이라고 했다. 



20세기 소설가이자 단테 연구가인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크게 두가지로 7대죄를 구분했는데


첫째, 정욕, 분노, 탐식을 <뜨거운 마음의 죄>

둘째, 탐욕, 시기, 나태, 교만을 <차가운 마음의 죄>


구분했다. 


추가적인 설명으로 뜨거운 마음의 죄는 최소한 공동체 생활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차가운 마음의 죄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균열시키는 더욱 파괴적인 죄로 여겼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신원하 / IVP /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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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합에 대한 본격적인 잘못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7장부터 아합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아합의 본격적인 죄의 대목은 구체적으로 잘 나오지 않습니다. 그런데 20장부터 본격적으로 나오는데 아마 대표적인 죄만 언급하고 있는 것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아랍의 벤하닷이 이스라엘을 침략하려고 한다.
  1) 벤하닷이 32명의 왕과 함께 사마리아를 에워싸고 아합 왕의 은금과 아내와 자녀들이 자신의 것이라고 하자, 아합은 내 것은 다 벤하닷의 것이라고 했다.
  2) 벤하닷이 다시 사신을 보내 내일 당장 내가 왕과 신하들의 집을 수색해서 마음에 드는대로 가져가겠노라고 말함.
  3) 아합은 이 문제를 장로와 백성들에게 알리자, 모두 반대함으로 벤하닷의 사자들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다고 함.
  4) 벤하닷은 이스라엘을 향해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하자, 이스라엘의 왕은 길고 짧은 것은 대봐야 하지 않겠느냐고 대응함. 이 말에 벤하닷이 전쟁을 준비함.

2.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뜻 가운데 1차 전쟁에서 승리함.
  1) 한 선지자가 이스라엘 왕 아합에게 나타나 이 아람의 큰 무리를 이기게 하시겠다고 함.
    그래서 하나님이 여호와인 줄을 알게 하겠다고 하심.
  2) 아합은 누구를 통해서 그리 하겠는가의 질문에 선지자는 <각 지방 고관의 청년들>로 하겠다고 하시고는, 왕이 직접 싸움을 시작하라고 한다.
  3) 청년의 숫자는 230명이고, 그 외에 백성들의 수는 7000명 이었다.
  4) 이 청년들이 아람에게 나아가자, 아람은 이들을 우습게 알고 있다가 아람이 전쟁에서 패함. 아람은 이스라엘에게 쫓겼고 벤하닷은 말을 타고 간신히 도망침.

3. 이스라엘과 아람의 2차 전쟁
  1) 그 선지자가 아합 왕에게 나아가 아람이 내년에 다시 전쟁을 일으킬텐니 전쟁을 준비하라고 함.
  2) 아람의 신하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산의 신이지 평지의 신은 아니므로 평지에서 싸우면 자신들이 이길 것이라고 말하면서 다시 전쟁할 것을 제안함. 왕은 그 제안대로 준비함.
  3) 해가 바뀌어 전쟁을 하려고 마주 대하고 있는데 이스라엘의 자손과 아람의 병력은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로 차이가 났다.
  4) 선지자는 이 평지 전쟁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심으로 그 하나님이 여호와 하나님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겠다고 한다.
  5) 또 다시 이스라엘이 아람을 격파하고 벤하닷은 다시 도망하여 신하들과 골방에 숨는다.

4. 아합 왕의 결정적인 잘못들
  1) 벤하닷이 아합 왕에게 생명을 구걸하자, 아합은 벤하닷을 자신의 형제처럼 대함
  2) 벤하닷은 자신의 부친이 빼앗은 모든 성읍을 돌려주고, 다메섹에 이스라엘 왕을 위한 거리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받고는 벤하닷을 살려주었다.
  3) 한 선지자가 다른 친구로 하여금 자신을 치라고 한 것을 거절하자 사자에 의해 죽게 됨.
  4) 다른 친구가 침으로 상하게 된 그 선지자가 왕에게 변장하고 나아가서 상황을 말함.
     전쟁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에게 한 사람을 맡기며 그를 잃으면 그 생명으로 대신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은 한 달란트로 대신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데 자기가 어찌 하다가 맡은 사람을 잃어 버렸다고 하자, 아합 왕은 네가 약속한 것이니 네가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판결한다.
  5) 선지자는 변장한 것을 벗어 버리자, 왕은 그가 선지자 중 한사람인 것을 알게 된다. 선지자는 하나님이 네게 맡긴 벤하닷을 네가 임으로 놓아주었으니 그의 목숨을 대신하고, 네 백성들은 그의 백성들을 대신할 것이라고 말함.
  6)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그의 왕궁으로 돌아가려고 사마리아에 이른다.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아합 왕 시대에 아람 왕 벤하닷의 침공이 있게 된다. 당시 이스라엘에 비해 아람은 강력한 국가였다. 벤하닷은 사람을 보내 이스라엘을 떠 보는데, 이스라엘이 순순히 나오니까 당장 가서 눈에 보이는대로 가져가겠다고 한다. 상대적으로 약국이라고 하지만, 무례할 정도의 방식에 이스라엘의 백성과 장로들은 반발하고 결국은 전쟁을 할 것을 결정한다.


승산이 없는 전쟁일듯 했지만, 한 선지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해 주면서 승리할 것을 약속해 준다. 그리고 젊은 청년들을 중심으로 왕이 직접 지휘하면서 나갈 것을 지시한다. 선지자의 방식대로 아람을 선제 공격하자 아람은 의뢰로 쉽게 무너지고 만다. 첫 전쟁에서의 승리를 얻게 된 것이다.

선지자는 흥분한 아합 왕에게 나타나서 내년에 다시 전쟁이 있을 것이고 그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서 힘을 길러야 한다는 제안을 한다. 다음 해 이스라엘에게 진 아람은 군사를 정비하고 전략을 다시 세운다. 평지에서 전쟁하면 이길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이번 전쟁에서도 승리할 것을 대언한다. 역시 상대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아람을 격파하고, 아람의 왕 벤하닷은 신하들과 함께 목숨을 구하기 위해 골방에 숨게 된다. 두 번째 완전한 승리가 눈 앞에 온 것이다.


그러나 아합은 여기서 잘못을 행한다. 목숨을 구걸하는 벤하닷을 살려주고, 그의 타협안에 결재를 한다. 뺏긴 성읍을 돌려주고, 다메섹에 아합을 위한 도로를 만들겠다는 제안에 넘어간 것이다. 그렇게 아람 왕을 살려줌으로 결국은 훗날 아람이 가시처럼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되고 만다.


이런 아합의 교만과 방만함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른 것이다. 한 선지자는 자신을 전쟁 중에서 온 사람처럼 변장하고는 자신이 맡아야 할 사람을 제대로 맡지 못했다는 것으로 판단을 받으러 온 것처럼 아합 왕 앞에 섰다. 그의 이야기는 바로 아합 왕 자신의 이야기 임에도 불구하고 아합은 자기 자신의 죄를 자신이 정죄하고 만다.


하나님은 벤하닷의 목숨을 아합에게서 찾고, 아람 사람의 목숨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찾겠다고 하신다. 이로 인해 아합은 근심하며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아합의 대표적인 죄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으로 그가 교만해 진 것이다.

아합은 아람과의 어려운 싸움을 싸워야 했다. 그런데 그 싸움에서 하나님은 아합과 이스라엘의 승리를 예견하셨고, 또 이길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도 지시해 주셨다. 그대로 따랐을 때, 이스라엘은 승리할 수 있었다.

아람이 여호와 하나님을 산의 신으로만 보고, 평야에서의 전쟁은 승리할 것이라고 생각할 때에도 하나님은 아람의 교만을 깨뜨리고 이기게 하신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며 승리하게 하심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발생하고, 아합의 참 모습은 이 때 나타난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한 승리의 상황(벤하닷을 죽여 완전한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상황)에서 거드름을 피운 것이다. 마음이 높아진 것이며, 마치 자신이 아람보다 훨씬 강한 힘을 가졌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는데도 말이다... 아합은 벤하닷을 형제라고 하고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그를 살려서 내보낸다. 

승리와 영광이 자신의 것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것이라고 착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이 있을까? 부모의 풍요로 말미암은 풍요가 마치 자신에게 능력이 있어서 온 풍요처럼 생각하는 자식만큼 어리석은 사람이 또 있을까? 어리석은 자는 절구에 머리를 넣고 빻아도 그 미련함이 벗겨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아합이 딱 그 꼴이다.

우리는 잘 분별해야 한다. 내 실력인지 주변 누군가의 도움인지.. 그리고 하나님의 도움인지. 하나님의 도움을 인식하고 주변 사람들의 도움을 인식하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사람이 모인다. 그러나 자기 혼자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곁에는 사람이 떠난다. 심지어 하나님도 떠나시는 법이다.

2. 자기가 자신을 정죄하는 사람, 아합.

아합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범했지만 무슨 잘못을 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것이 얼마나 큰 잘못인지도 인식하지 못했다. 그래서 한 선지자가 동원된다. 그는 하나의 쇼를 한다. 마치 전쟁중에 부상당한 병사처럼 자신을 변장하고는 자신의 일에 대한 판단을 받으려고 아합 앞에 나타난다.

전쟁 중에 누가 나에게 사람을 맡겼는데, 그 사람을 잃게 되면 내 목숨으로 갚든지 아니면 은 한 달란트로 갚든지 해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이 사람이 전쟁 중에 경황이 없어서 그만 그 사람을 잃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에 대한 판단을 묻는 것인데, 아합은 그것은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이 맡겨놓은 벤하닷을 풀어준 사건이라는 것을 인식하지도 못한채, 맡긴 사람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고 판단했다. 당연한 판단이다.

그런데 결국 하나님 앞에서 자기 자신의 행위를 판단한 것이 되고 말았다. 하나님은 아합의 판결대로 아합에게 판결하셨다. 벤하닷의 생명을 대신해 아합의 생명을, 아람 사람의 생명을 대신해 이스라엘의 생명을... 얼마나 가슴아픈 판결인가?

나는 종종 내 아들의 그릇된 행동을 판결하면서, 그 아들과 같은 일을 하고 있는 나 자신을 판결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는 깜짝 깜짝 놀란다. 그리고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때는 나를 생각해서라도 아들의 형량을 감해주곤 한다. 나도 그런데... 누군가를 판단하고 정죄하려고 할 때, 혹 그것이 나를 향한 판단과 정죄가 되지 않는가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따라서 다른 사람의 형량을 너무 과다하게 잡지는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혹시 내가 그 자리에 서 있을 수 있으니까 말이다. 이것이 인내와 사랑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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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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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가 역시 정리하기가 쉽지는 않습니다. 단락별로 정리는 할 수 있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아가면서 하는 것은 쉽지 않네요. 그래서 다른 성경에 비해서 제 개인적인 해설(주관적일수 있는)이 많이 들어가게 될 것 같습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제가 이해하는 방식으로서의 해설이라고 보면 될 듯 합니다.(처음부터 정답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일을 시작할 수 없습니다. 약 60점 이상만 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해야 나아질 수 있는 것이지요. 큰 테두리(정통교리)에서 어긋나지 않는 정도 선에서 해설을 해보려고 합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단락별로 정리하는 것]

1. 요한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1)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은 죄를 전혀 행하지 않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가 아니라, 죄를 행하고도 죄로 알지 못하는 상황(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도 어둠에 행하는 상황. 1:6)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쓴다고 봐야 할 것이다.
  2) 왜냐하면 1,2절에서 누가 죄를 범하면 우리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과 대언자이신 예수님이 있음을 강조함.
  3) 그와 같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무감각하게) 율법을 어길 수 있는가? 그 분이 행하신 대로 우리도 행하려고 하지 않겠는가?(그래서 죄를 짓지 않는 경향성으로 갈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2. 내가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1) 새 계명은  새로운 계명이 아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던 옛 계명이다.
  2) 새 계명은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3) 빛 가운데 있다고 하면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너희에게 이런 빛이 있으니 깨달으라)
  4) 너희의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라.(12절)/ 하나님을 알고, 악한 자를 이기었다.
  5) 세상의 가치관(어두움에 빠뜨리는)을 사랑하지 말고, 따르지 말라.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것들이다.

3. 마지막 때에 적그리스도가 일어나니 그들에게 미혹당하지 말라. 
  1) 그들은 우리 안에서 나간 자이나, 우리에게 속한 자가 아니다.(그들은 처음부터 한 몸이 아니었기에 결국은 나간 것이다.)
  2) 이들은...
   (1)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자다.
   (2) 예수의 하나님 아들 됨을 부인하기에 하나님의 아버지 됨도 부인하는 자들이다.
  3) 너희는...
   (1) 처음부터 들은 것처럼 아버지와 아들을 인정하는 것이요, 그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영생이 약속되어 있다.
   (2) 처음에 받은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있으니, 또 다른 (영지주의적?)가르침이 필요 없다. 너희를 가르친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의 중심 흐름과 관전 포이트 중심으로 재정리하는 것]

우선 요한의 글이 적그리스도를 적극적으로 의식하는 중에 쓰여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다.(18-29절) 이들은 공동체 안에 있었던 자들이고, 그 안에 있다가 나간 사람들이다.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고 배운(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은 또 다른 지식을 가지고 공동체를 떠났다. 이것은 요한의 공동체를 열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요소가 된다. 요한의 공동체는 공동체를 떠난 자들이 가지고 있는 (추가된)지식에는 도달하지 못한 열등한 공동체로 비춰지는 것이다.(떠난 자들은 그렇게 주변에 소문을 냈을 것이다)


그들은 율법에 매이고, 도덕에 매이는 것은 무지한 것처럼 여겼던 것 같다.(영지주의자 중에는 육체는 본질적으로 악한 것이기에 그와 같은 행동을 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영혼만 잘 간직하면 된다고 보는 부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은 도덕적 양심의 가책도 없이 죄를 행하고 저지른다. 사랑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계명에 대해서 별 구속력을 가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조차 부인했다.(하나님이 악한 육체 속에 올 수 없다고 보기에) 이런 세속적인 가르침이 이들 가운데 들어가 결국 이들은 교회를 떠나고 또한 교회 안에 있는 자들을 그와 같은 논리로 미혹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이 이들과 이들의 거짓된 미혹에 현혹된 자들을 경계하면서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참된 성도란, 죄인된 자신의 죄를 위해서 대속하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믿는 것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율법과 계명(새 계명)을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가는 성도들이다.(비록 온전히 지키지는 못할지라도... 이런 의식조차 없는 자는 참된 성도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지적 교만은 복음에서부터 이탈하게 만든다.

  교회 안에 있던 영지주의자들은 처음에 복음을 새로운 지식으로 보았을 것이다. 인과응보적 가치관 밖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와 그 아들 예수의 대속을 통한 구원을 가르칠 때, 그것은 지식을 추구하는 자들에게는 매우 신선한 지식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 안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새로운 지식에 대한 추구를 버리지 못했고 도를 넘었다. 예수의 복음에서 세속적인 영지주의 가치관으로 결합한 또 다른 가르침으로 발전시켜 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교회의 성도들을 미혹했다.

  만행이란 책을 썼던 현각 스님은 미국의 하버드를 졸업했고, 카톨릭 집에서 자란 사람이다. 그런 그가 불교에 접하고 스님이 되었다. 이런 스토리는 사람들에게 불교가 기독교적인 진리를 넘어서 더 본질적이고, 더 근원적이며 더 진리에 가깝다는 인식을 준다. 서양에서 동양의 종교, 특히 불교에 심취하고 있는 흐름을 볼 때 또한 그와 같은 인식을 준다.

 

2.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중심의 문제다.

  이는 지식의 문제가 아니다. 그 진리를 전해주는 중심의 문제다. 그 진리가 근거하고 있는 중심의 문제다. 자기 자신의 깨달음에 근거할 것인지 아니면 인격적 절대자(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에 근거할 것인지의 문제다.

  적그리스도적이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계시의 내용을 세상의 것으로 대치하거나, 그것에 세상적인 어떤 것을 첨가해서 더 완전해 질 수 있다고 믿는 것을 말한다 볼 수 있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구원의 계시인 복음만으로 충분하다.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에 복음은 부끄럽지 않다.(복음으로 충분하다). 롬 1:16-17.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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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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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5장에서 드디어 반격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그러나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또 기대했던 결과가 나올지 알수는 없다. 다만, 5장에 와서는 유대인으로서 왕후가 된 에스더가 행동을 시작했고, 실낱같은 희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이 희망도 빨리 진척되지 않는다면 더 큰 위험(모르드개의 죽음)이 닥칠 수 있는 상황이 동시에 이루어지고 있서 긴장을 늦출 수는 없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

1. 왕 앞으로 나아가 에스더

  1) 삼일간의 금식을 마치고, 에스더는 왕후의 예복을 입고 왕의 뜰 어전 맞은편에 섰다.

  2) 왕은 왕후 에스더가 선것을 보고 매우 사랑스러웠다. 규를 내밀고 왕후는 규를 잡았다.

  3) 왕이 왕후 에스더에게 무슨 소원이 있어서 왔느냐고 묻고, 무슨 소원이든 들어주겠다 함

  4) 에스더는 잔치를 준비했으니 하만과 함께 오시면 좋겠다고 했다.

2. 에스더의 잔치에 참여한 왕과 하만

  1) 왕은 하만을 급히 불러 함께 에스더의 잔치에 갔다

  2) 왕은 그 자리에서 에스더의 소원을 물었으나, 에스더는 내일 다시 잔치에 하만과 함께 오면 말씀드리겠다고 하고는 말을 하지 않았다.

3. 하만이 교만해지게 됨

  1) 왕후의 잔치에 왕과 자신만 초대받은 것에 우쭐해 진 하만

  2) 그러나 왕궁을 나올 때 유대인 모르드개가 자신을 보고도 본체만체 하자 기분이 상함.

  3) 왕후로 인해 기뻤던 것과 모르드개로 인해 기분 상했던 일을 아내 세레스에게 말함.

  4) 세레스와 친구들은 높이 50규빗되는 장대를 세우고 왕에게 먼저 허락을 받아 모르드개를 그 나무에 달아 죽인 후에 왕후의 잔치에 가라고 제안함.

  5) 하만은 그 말을 좋게 여겨 나무를 세움

 

[정리2. 본문의 재구성]

모르드개를 통해서 바사제국 안에서 벌어진 일을 알게 되고, 모르드개의 촉구로 왕 앞에 나아가기로 결심했던 에스더가 3일간의 금식을 마치고 왕후의 예복을 갖추고 왕의 앞으로 나아간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각오로.

그러나 생각지 못한 상황에서 왕후를 본 왕은 왕후가 매우 아름다워보였고, 사랑스러워보였다. 그리고 왕후가 뭔가 간절히 바라는 소원이 있어서 왕 앞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소원이 무엇이든 들어주고 싶었다.

왕후 에스더는 소원을 말하기 보다는 왕을 위해 준비한 잔치에 하만과 함께 올 것을 요청한다. 아마 에스더는 삼일동안 금식만 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 일을 진행해야 될지에 대한 고민을 했으며 전략을 짰을 것이다. 어쩌면 기도하는 중에 지혜를 얻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무튼 에스더는 성급하게 않았고, 침착했다.

왕이 잔치에 참여하여 소원을 물었는데도 에스더는 말하지 않고, 다음 날 또 다시 잔치에 오면 말씀드리겠다고 한다. 소원을 말하는 사람 편에서 애가 닳는 것이 아니라 소원을 들어주는 사람 편에서 애가 닳도록 한 것인지 모르겠다. 암튼, 왕의 입장에서는 무슨 소원이길래 이렇게 뜸을 드리는가 생각했을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하만은 교만해졌다. 왕의 총애를 받고, 왕후의 인정을 받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교만한 마음이 하만으로 하여금 무리한 행동(밤 늦게 왕을 찾아가서 모르드개를 죽게 하려는 결정을 얻어 내려는 행동)을 하게 만들었다. 여기서부터 하만의 계획은 엉키기 시작했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에스더는 조급하지 않으므로 '을'이 아니라 '갑'이 되었다.

왕후가 등장했을 때, 그를 인정해 주고 받아 준 것은 왕이었다. 그리고 왕후의 소원을 들어줄 수 있는 권세와 능력을 가진 사람도 역시 왕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왕은 에스더에게 네 소원이 무엇이냐고 묻고, 무슨 소원이든지 들어주겠노라고 한다. 그러나 왕후는 요청을 미루고 연기함으로서 주도권이 왕이 아닌, 왕후에게로 넘어 오게 했다.

한마디로 왕후는 '을'의 입장인데도 '갑'의 자리에 있는 형국이 된것이다. 왕은 소원이 무엇이냐고 자꾸 묻고, 왕후는 좀 있다 말씀드리겠다고 하면서 왕의 마음이 더욱 간절하게 된 것이다.

세상은 많이 가지고 힘이 있으면 <갑>이 된다. 부하고 힘이 있는 사람에게 무엇인가를 좀 얻으려고 하는 사람은 <을>이 된다. 이것은 세상의 법칙이고, 이 법칙은 좀처럼 깨질 수 없다.

그러나 성도인 우리는 어떤 존재인가? 세상에서는 <을>의 위치를 살지만, <갑>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아닌가? <을>의 생존이 <갑>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하면 우리는 영원히 <갑>의 종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갑>이든 <을>이든 우리의 생명(생활)이 진정한 갑이신 <하나님>께 달려있다고 믿는다면, 우리는 <을>이면서도 <갑>처럼 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에스더는 이 땅을 사는 모든 <을>에게 말한다. 당신도 주 안에서 <갑>이 될 수 있다고. 

 

2.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이 말은 성도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될 수 있는 진리인 것이다. 하만은 교만했다. 왕이 자신을 모든 신하중에 제일로 높였고, 왕후도 자신을 특별히 대우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이 미치고 보니, 아무때에라도 왕에게 가서 무슨 말이든 하면, 왕이 그대로 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만의 마음은 이미 왕이 되어있다. 자신의 자리를 넘어선 것이다. 교만이다. 어쩌면 에스더는 하만을 교만하게 해서 그로 스스로 올무에 빠지기를 기다렸는지 모른다. 교만한 자는 결국 사고를 치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교만은 일을 망치는 지름길이다. 교만한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교만한 사람 주변에 좋은 인재들이 모여들리도 만무하다. 교만을 자기의 자리를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결국은 만용으로 나타나고 그 결과 자멸하게 된다.

누군가를 망치고 싶은가? 그를 짓밟지 말고 그를 교만하게 하라.

실패하기를 원치 않는다면 교만을 경계하라. 고통도 영화도 모두 지나가는 것이다. 늘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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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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