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정리]


1. 내가 너희들에게 책망받을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나중에 때가 이르면 우리 주님께서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시고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을 것이다.(바울 자신도 많이 참고 다 표현하지 않고 자신의 공로를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다. 신령한 자의 태도)


2. 나와 아볼로가 이 일에 본을 보였다. 우리는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하는 교훈을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였다.(교만한 마음으로 대적하는 갈등의 일들이 고린도교회에 있었다.)

  : 그런데 너희들은 마치 배우지 않은 것처럼, 부족하지 않았던 것처럼, 처음부터 지혜로웠던 것처럼 행동하는 구나. 스승인 나는 부족하고 무지했었는데 너희들은 처음부터 풍족했던 것처럼 교만하니 참으로 우리가 부끄러운 존재가 되었구나.(7-13절. 고린도교회를 책망하며 하는 말씀이다.)


3. 이렇게 너희들의 어리석음과 교만을 드러냄으로 너희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은 '너희를 정말 사랑하는 자녀처럼' 대하기 때문이다. 너희들은 복음으로 낳은 내 자식이지 않느냐? 제발 나를 본받아 겸손한 자가 되라.


4. 내가 너희를 바로 지도하기 위해 디모데를 보낸 것인데, 어떤 이는 내가 이제는 오지 못할 것으로 생각하여 방자하고 교만하니 하나님이 내게 기회를 주시면 내가 반드시 가리라. 그리고 내가 그렇게 말한 자를 책망하리라.  



[생각 정리]


1. 고린도교회는 바울과 바울의 사역에 대해서 비판적인 사람들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바울이 정식 사도냐? 하는 바울의 사도성부터 시작해서 예루살렘 사도인 게바와도 비교되었을 것이었을 것이다.(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의 복음은 예루살렘 사도들의 강조점에서 좀 달랐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방인이 교회 안으로 들어올 때의 조건과 관련하여)


2.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을 향해서 상당히 자신의 감정을 억제하려고 애쓰고 있다. 자신의 억울함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판단에 맡기고 있다. 대응할 말이 없어서가 아니라, 말로 상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고전 4:4-5)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또한 감정적이다.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일부를 향해서(교만한 자들) 조롱하듯 그들의 태도를 비꼬아 말하기도 한다. 


(고전 4:7-13) 

[7]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8] 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9] 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10]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1]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2]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3]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러나 조롱 그 자체가 목적이라기 보다는 그들 안에 있는 '모순'을 드러내 줌으로서 그들의 논리가 얼마나 어리석고 유치한 것인가를 드러내 준다.(그들은 말과 지식을 자랑하지만, 얼마나 자기 모순적인지를 말한다.)


3. 바울은 지금 '부모'의 심정으로 이들을 책망하고 있다. 부모의 심정이란 책망의 목적이 다르다. 고쳐서 새롭게 하기 위한 책망이지, 정죄하고 판단하여 망가뜨리려고 하는 책망이 아닌 것이다. 바울은 철없는 고린도교회를 대하면서 많이 속상했을 것이다.(우리가 철없는 사춘기 아이들을 키울때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부모가 자식을 포기할 수 없듯이, 바울 스스로가 다시 출산하는 과정을 거쳐서라도 고린도교회를 새롭게 하기 위해 무서운 매를 든 것이다. 


[묵상 정리]


1. '부모의 심정'으로 책망하겠다는 말은 책망하는 자를 옹호하기 위한 것이 되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심정에는 '다시 출산하는 과정'을 하겠다는 '자기 죽음'의 과정을 결단하는 것이 선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즉, '부모의 심정'으로 누군가를 책망하고 나서겠다고 말할 때는 '자기 죽음'의 태도가 함께 겸비되었을 때 그 진정성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면서 자기의 행동은 '따듯한 것'이라고 말하는 '자기 변명'에 불과한 것이다. 


2. 우리는 의도는 알겠지만, 표현자체에 대해서도 '격'이 있어야 성경적인 사람이요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한다. 내용을 담는 그릇도 그 내용의 가치를 드러낸다는 측면에서 '격'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은 일반적인 것이다. 특수한 상황 그리고 의도적인 목적을 위해서 '격'을 낮추어 표현하는 것이 필요한 순간도 있음을 부정하지는 말아야 한다. 


바울도 '격'을 떨어뜨렸다.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것을 상대방에게 자극적으로 표현하였다. 왜? 그 만큼 상대방의 수준이 낮거나 완악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예수님도 상황에 따라선 종종 격한 표현을 사용하셨으니까.


격이 낮냐 높냐로 성숙하냐 비성숙하냐? 혹은 성경적이냐 비성경적이냐 말하기는 어렵다. 어떤 상황에서 쓴 표현이냐? 누가 한 표현이냐?에 따라서 그것은 성경적일 수도 있고, 비성경적일수도 있는 것이다. 


예수님에게서나, 바울에게서나 '참 인간적인 냄새'가 나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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