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Jordan Whitfield

Photo by Jordan Whitfield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6절.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 메뚜기와 석청을 먹더라.

7절. 그가 전파하여 이르되

나보다 능력 많으신 이가 내 뒤에 오시나니

나는 굽혀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8절. 나는 너희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었거니와 

그는 너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시리라.


9절. 그 때에 

예수께서 갈릴리 나사렛으로부터 와서 

요단 강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10절. 곧 물에서 올라오실새 

하늘이 갈라짐과 /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자기에게 내려오심을 보시더니

11절. 하늘로부터 소리가 나기를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하시니라. 


[성경본문 내용정리]

1. 세례요한은 광야에 사는 전형적인 선지자의 모습이었으며, 그는 스스로 '뒤에 오실자'를 예비하기 위한 사람임을 선포했고 자신보다는 뒤에 오는 분이 '능력 많으시고 감당할 수 없는 분'임을 선포했다. 무엇보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지만(회개의 세례. 막 1:4) 뒤에 오시는 분은 성령으로 세례(어떤 의미인지는 지금으로서는 정확히 알수 없으나, 물 세례와는 전혀 차원이 다른 세례임은 분명하다. 물세례가 가시적이고 의식적인 세례라면, 성령세례는 비가시적 세례이면서 본질적인 능력의 세례임을 짐작할 수 있겠다.)를 베푸시는 분임을 선포한다. 

2. 다른 차원의 세례를 베풀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이 땅에 속한 세례를 받기 위해 세례 요한에게 오셨다. 예수님은 이 땅의 세례가 낮은 차원의 세례이며, 한계가 있는 세례임을 아셨고 그래서 새로운 차원의 세례를 베푸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당신 스스로는 먼저 이 땅의 물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오셨다. 

이는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하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육신의 몸으로 오신 것과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을 듯 하다. 

3.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의 물 세례를 받고 물에서 나오자 하늘이 갈라졌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예수님께 내려왔으며 하늘로부터 소리가 있었다. '너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 이와 같은 사실은 예수님이 물 세례를 받으시는 과정(성육신과 같이 낮아지심으로 하나님의 뜻에 기꺼히 순종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기뻐하심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제 예수님의 생애(공생애)는 본격적인 '복음의 시작'이 되셨음을 알게 된다. 과연 '복음의 시작'으로 예수님의 활동과 메시지는 이 땅의 인생들에게 어떤 파장을 줄 것인가! 기대하게 된다. 


[질문하기]

1. 세례 요한 보다 뛰어난 분이신 예수, 물세례가 아니라 성령 세례를 주실 분인 예수가 직접 세례 요한에게 물 세례를 받으러 오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겸손함'을 의미하며 동시에 이 땅에 그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온전한 순종'을 보여준 것이라 하겠다. 예수님은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신 것(성육신)뿐 아니라 그 몸과 마음과 태도에 있어서도 기꺼이 인간의 몸이 가진 한계에 대해서까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신 것이다. 

2.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신 이후 특별한 현상과 음성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현상 자체에 주목하기 보다는 그 현상이 가지는 의미를 살피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고 본다. 예수님이 인간이 되시고 모든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오기 위해 받아야 할 '회개의 세례'인 물세례를 받으심으로서 '하늘'이 열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의 인정'(너는 내 아들이다. 내가 너를 기뻐하노라)이 공인된 것이다. 새로운 나라(시대)가 열리게 되고, 그 나라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한 하나님의 아들이 본격적인 일을 시작함을 공인한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는 일에 실패했다. 그러나 둘째 아담 예수는 그 일을 온전히 완성할 것인가! 마가는 예수의 등장과 생애를 다루면서 '복음의 시작'이라고 했으니 이미 그 결과는 성공이요 성취였음을 미리 밝힌 것이다. 이제 우리의 일은 마가복음의 나머지 본문을 다루면서 그 일이 어떤 과정을 거쳐 성취되었는가를 확인하는 것이다. 


[묵상하기]

1. 모든 위대한 일은 시대적 사명을 받은 사람의 '자기 포기'와 '자기 희생'에서 부터 시작된다. 복음의 시작이 예수님의 성육신과 온전한 순종으로서 세례 요한의 물세례를 받는 것으로 시작된 것처럼 말이다. 왕의 아들인 모세가 노예인 자기 백성을 구원할 수 있었던 것도 그가 왕의 아들로서의 영화를 포기했기 때문이다. 그 때 비로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이 비둘기 같이 임하며 하늘로부터의 음성이 들린다. 우리 아들 잘한다. 제대로 하고 있구나... 하늘로부터 들려오는 그 목소리에 힘입어 시대적 사명을 감당하게 되는 것이다. 

2. 예수님도 세례 요한도 세상 사람들의 소리(여론, 인간적인 제안과 타협)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의 자리를 넘지 않았고, 예수님도 인간적인 방법에 넘어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부르심, 소명에 집중했고 그 안에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확인했다. 세상 사람들의 소리를 의존하지 않았고 휘둘리지 않았다. 내가 요즘 나이 50이 되면서 가장 신경쓰게 되는 부분이 이 부분이다. 사람의 소리가 내 안에서 끊임없이 공명되고 있고, 초라할지 모르는 미래 앞에 불안은 그 소리를 더욱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세례요한도. 예수님도 어떻게 사셨는가를 마음에 새겨야 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약 1:9-11> (정리하기)

1. (권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9절)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10절)

    (이유)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질문) 낮은 형제가 자랑할 '자신의 높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묵상) 낮은 형제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신분적으로 낮은 자를 말할 것입니다. 종과 노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과 노예라 할지라도 예수의 자녀가 되고 교회 안의 성도가 되면 육체적인 신분의 차이를 넘어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된다. 당시의 상황이 교회 안에서 주어진 이 관계가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교회 안에서 높아진 자신의 위치를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야고보는 종과 노예의 신분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형제된 성도의 신분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낮은 형제란 이차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주류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조차 교회 안에서는 한 형제요 자매로서 인정받아야 하고, 이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 나그네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서 교회 안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교만이 아니라 구성원의 한 명으로 인정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교회가 사회 선교로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과는 구별해서 봐야할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의 구성원 중 '낮은 형제'에 대한 권면으로 그 대상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제한해서 봐야 할 것이다. 


2. (질문) 부한 자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보통이라 할 수 있다. 그것과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권면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묵상) 부자를 향해서 겸손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르고 성숙한 '태도'에 대한 권면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것과는 좀 다른 권면을 한다고 봐야 한다. 야고보는 부자가 부자로 지내는 시절을 '풀의 꽃'이라고 봤고, '꽃'은 계절의 변화를 따라 필 때가 있고 질 때가 있다는 측면에서 설명했다. 지금 부자라고 해서 영원히 부자인 것이 아니다. 지금 젋다고 해서 영원히 젊을 수 없듯이 '인생의 영광'이라는 것이 '영원'할수는 없는 것이다. 부의 영광도 지나가는 것이다. 

  부한 자는 현재의 부과 과거의 축적으로서의 영광만을 생각하면 어리석어진다. 미래를 봐야 하고 인생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한 자가 낮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부한 자, 높은 자의 경우 낮은 형제와 함께 형제 자매로 지내야 하기에 그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낮아진다. 그러나 부한 자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더 교만해지지 않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인생에 불과하다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정리] 교회란 어떤 곳인가? 모든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의 관계가 되게 하는 곳이다. 낮은 자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게 만들어 주고, 높은 자들은 자신의 낮음을 자랑하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오늘날의 교회가 가진 문제는 무엇인가? 낮은 자를 더 낮아지게 만들고, 높은 자를 더 높게 만들어 더 깊은 격차와 비교의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낮은 자로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 곳, 부한 자로 자신의 낮아짐을 기뻐할 수 있는 곳 그곳이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 된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빌 2:9-11>(정리하기)

지금 본문을 살피기 전에 이전부터 전개되어 온 논리적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고 그 마음은 자기비움을 통한 낮아짐 곧 죽음에까지 낮아지는 태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바로 그와 같은 낮아짐의 절정이 담긴 것임을 예로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2:1-8)

1. 이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를 지극히 높였다.(9절)

  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9절)

  2)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0절)

  3)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11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이 말씀은 어떤 논리적 전개로 이어지는 것인가?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끝이요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하나됨을 이루고, 교회의 하나됨(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담이 허물어짐)을 이루었듯이 교회 안의 성도들간의 갈등(시기와 투쟁)도 성도들 상호간의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서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2) 그러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희생한 사람들의 결말은 무엇인가? 아무도 그를 인정하거나 높임이 없이 잊혀지고 무시됨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를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오히려 지극히 높이셨던 것처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한 성도의 가치를 높이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도 복음 전하는 중에 '매임'을 당하고, 바울을 시기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위임받은 사역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확대되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넘어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 속에서 담긴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허무한 자와 같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죄를 구속하여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를 의지해서 살아가고 사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소망의 근거가 되고 메시지가 된다. 

[묵상] 지금은 십자가의 시대다. 기독교적 상황이 우울하고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도 내적 소망이 없는 냉소적인 시대다.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하는 것은 적극적인 열심도 아니고, 낭만적인 희망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듯이 성도와 사역자들은 죽음과 절망임을 보면서도 십자가로 나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수치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갔던 자들을 높이사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보이실 것이란 믿음을 견지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복음과 함께 수치를 당하고, 지금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낮아지고 녹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교회가 살게 되는 것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빌 2:5-8>(정리하기)


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직접적인 권면)

   =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데.(5절)

  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새번역)(6절)

  2)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7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8절)

  3)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8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정리해서 말하면, 바울이 품으라고 요청한 예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가?(태도인가?)

  1)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나, 동등함을 당연한 것(권리)로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아버지의 권리, 시민의 권리, 대통령의 권리, 목사의 권리, 성도의 권리 등)조차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주장하지 않았다.) 

    [묵상] 요즘처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가 있었을까? 민주사회가 되면서 소비자지상주의가 되면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시민, 어리석은 소비자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권리주장'의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해 주어야 하는 재판관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은 취할 권리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지 않아도 될 권리를 주장하며 긴장하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까지 주장하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다. 권리 주장에 자신이 누려야 할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그것은 양심이 증언할 것이다.)


  2)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말 사람이 되셨다. 이와 같은 낮아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상] 낮아짐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낮아지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기 위함이고, 낮아짐을 통해서 인간의 수준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지만 인간의 수준(죄있는 인간의 수준)이 되지 않으셨다.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낮은 방식으로 상대하셨지만, 예수님은 높은 수준으로 상대하셨다. 이는 그들과 같아지시기 위함이지만 그들을 높이시려는 그 분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자기를 낮추는데 그 낮추는 지점이 '죽음'까지 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대속'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로 만들고,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사건이다. 죽으심이 없이교회의 하나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묵상] 우리가 성숙한 성인이라면, 성숙한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이 어느 정도 낮아지는 자리까지는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양보는 있고, 어느 정도의 자기 희생이 있다. 교회는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이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만으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죽는 자리'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거기서 하나됨의 꽃핀다. 문제는 누구를 죽이느냐다. '상대를 죽여서 하나를 만들 것인가?' 아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다. 예수님은 누구를 죽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셨고, 자신이 직접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셨다. 


2. 바울의 이와같은 '옳고, 자기희생적 권면'에 저항하고 싶은 논리는 없는가? 

  이쯤되면 우리는 묻는다. 그 말씀이 숭고하긴 하지만 결국 자신만 오해받고 희생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더 악하고 더 부족한 사람이 남아서 그들의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결국 선한 자가, 겸손한 자가 희생하고 사라지면 그 교회는 덜 선한 자와 덜 겸손한 자들에 의해서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빌 1장에서 매인 상태에서 받았던 생각들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복음 전하는데 탁월하고 복음의 메시지가 분명한 제가 왜 잡힌 것입니까? 저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메시지가 불분명한 자들은 저렇게 활개치고 있는데... 저를 시기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애쓰는 자들이 저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왜 이 시기에 접니까? 뭔가 실수하신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을텐데, 그는 답을 찾은 것이다.(빌 1장에서) 그러니까 오히려 빌립교 교회를 향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다.(예수님도 그러셨으니까.)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본문]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해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권면은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권면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권면이다. 6장 1절이 '한 사람의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6장 2절에서는 성도 중 누가 자신의 짐을 지는 것이 힘겨워할 경우 그 짐을 서로 져주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교회는 지상의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여전히 '죄'가 있고, '연약함'이 있다. 죄의 문제를 다룰 때, 그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죄가 드러나게 된 <공동체>의 문제도 개선되어야 한다. 죄는 그냥 발생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토양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란 것이다. 그와 같은 토양이 형성되도록 방치한 공동체도 문제가 없지는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다루는 방식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약한 지체>에 대한 교회 성도들의 태도다. 그들의 연약함에 대해서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 주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각자 개인의 짐을 개인에게만 두어서는 안된다. 기본적인 원칙은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고, 개인의 주변 환경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을 때, 교회 공동체는 그 사람의 연약함을 보고(게으름이 아니다.)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을 이룬 지체다. 지체가 지체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한 몸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한 몸이라 말할 수 있고, 한 몸은 당연히 그렇게 한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을 때에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자랑할 만큼 스스로 높이지를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도 사람들에게 상석에 앉지 말고, 낮은 곳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높여서 자리를 옮겨주면 모르지만, 괜히 높은 곳에 먼저 앉다가 나중에 낮은 자리로 쫓겨나게 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연약한 자의 짐을 많이 져주었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자랑이 되지 못하도록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일수록 자신의 일을 늘 살피어, 겸손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묵상] 


1. 바울의 권면은 개인 경건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2. 죄를 범한 자에게 대해서는 바로잡도록 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3. 연약한 자에 대해서는 서로 짐을 져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남의 일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4. 능력있어서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까지 섬긴 자는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회 공동체는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사람을 공평케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약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고, 강해도 자만할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약한 자도 함께 존중받으며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강한 자의 능력은 섬기기 위한 능력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는 심지어 '죄'가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 죄를 일으킨 사람을 '옳게 세우는 곳'이며 심지어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교회 전체가 새롭게 갱신되는 곳이다. 교회를 이런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지상의 교회 공동체에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를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자 강한 공동체로 만들려고하는 시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죄'와 '연약함'을 부정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여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와 '연약함'으로 불완전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선'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바로 이 땅의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통해 공동체의 자정능력을 키우고, 한 사람의 연약함이 공동체의 한 몸 됨을 드러냄으로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죄와 연약함을 부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연약함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시편 29편]사자의 포효하는 소리에 작은 짐승들이 겁을 먹고 도망치지 못하듯, 세상의 권능있는 자들이라 할찌라도 여호와께서 한 번 소리를 발하시면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마련이다. 따라서 자기들이 힘이 있다고 하여 여호와의 백성들을 불의와 폭력으로 압제해서는 안된다. 그러면 여호와의 백성들은 고통 속에서 여호와를 찾을 것이고, 그러면 여호와께서 나타나 심판하지 아니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 권세있는 자들아, 정의와 공의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대하라. 하나님은 가난한 자와 고아와 과부의 아버지시다. 


[정리1]


1. 권능있는 자들아 여호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예배하라.(1-2절)

1절. 너희 권능 있는 자들아

영광과 능력을 여호와께 돌리고 돌리지어다.


여호와께 그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예배할지어다.(2절)


2. 여호와 하나님은 큰 능력과 큰 영광을 가지신 분이시다.(여호와의 소리로 그것을 표현함.3-9절)

여호와의 소리가 물 위에 있도다. 

영광의 하나님이 우렛소리를 내시니 여호와는 많은 물 위에 계시도다.(3절)


여호와의 소리가 힘 있음이여

여호와의 소리가 위엄차도다.(4절)


여호와의 소리가 백향목을 꺾으심이여

여호와께서 레바논 백향목을 꺾어 부수시도다.(5절)


그 나무를 송아지 같이 뛰게 하심이여

레바논과 시룐으로 들송아지 같이 뛰게 하시도다.(6절)


여호와의 소리가 화염을 가르시도다.(7절)

여호와의 소리가 광야를 진동하심이여

여호와께서 가데스 광야를 진동시키시도다.(8절)

여호와의 소리가 암사슴을 낙태하게 하시고

삼림을 말갛게 벗기시니


그의 성전에서 그의 모든 것들이 말하기를 영광이라 하도다.(9절)


3. 그 여호와 하나님의 백성은 힘과 평강을 얻을 것이다.(10-11절)

여호와께서 홍수 때에 좌정하셨음이여

여호와께서 영원하도록 왕으로 좌정하시도다.(10절)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힘을 주심이여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평강의 복을 주시리로다.(11절)



[정리2]


1.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 자들아, 하나님 앞에서는 겸비하여 합당한 예배를 드려야 한다.


2. 그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와 능력은 심히 크기 때문이다.


3. 그의 소리는 우렛소리와 같아서, 많은 물 위에 있으며 그가 소리를 발하시면 레바논의 백향목들은 태풍에 쓰러지듯 쓰러진다. 쓰러질 뿐 아니라 송아지가 뛰듯이 날아가게 하신다. 그의 소리는 화염을 가르고, 그의 소리는 광야를 진동하게 한다. 그 소리에 놀란 동물들이 낙태하고 산은 말갛게 벗겨지고 만다. 이 모든 표현은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강력한 가를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9절)


4. 그와 같은 영광을 가지신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물의 왕으로 계시며, 자기 백성을 모든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시어 힘과 평강을 주시지 않겠는가!


5. 그러니 너희 세상의 권세와 능력을 가진 자들이여, 여호와의 백성인 우리를 함부로 하지 말고 겸비하여 하나님 앞에 절하듯 그의 백성인 우리들에게 공의와 정의로 대하라.(불의와 폭력으로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시편 8편] 하나님은 인생을 매우 존귀하게 지으셨고, 하나님이 만드신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셨으며 그 발 아래 두셨다(5,6절)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 의미를 <인간이 마땅히 군림해야 한다>라는 의미로 쓰지 않았다. 오히려 거대한 자연과 다양한 생물에 비해 무력하고 무능한 별 볼일 없어 보이는 인간에게 그와 같은 큰 책임을 맡기신 것에 대한 놀람과 경이의 태도로 기록하고 있다. 우리가 이 태도는 잃어버리고, 성경의 문구만 붙잡으니... 어쩌면 좋단 말인가! 왜 우리는 자연 앞에 겸손을 잃어 버렸는가? 이 겸손을 잃으니 하나님을 향한 경이도 잃어버리게 된 것이 아닌가!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보기]


1. 시편 기자의 첫 고백(1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 


2. 시편 기자가 경험한 것(2절)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 시편 기자는 천지에 대한 아름다움에 감탄하여 대부분 그와 같은 고백을 하지만, 그와 같은 감탄의 고백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대적을 강한 자를 통해서 제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린 아이와 젖먹이를 세우셔서 그들을 잠잠하게 하신 것으로 인하여 한 고백이다. 도대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와 같은 방식으로 일하실 수 있는 것인가 놀라게 된다. 두가지에 대해서 놀랐다고 봐야 하는데, 첫번째는 하나님의 전능성이다. 또 하나는 자기 백성(인생)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크기이다. 도대체 인생이 무엇이길래... 이와 같은 일을 벌이시는가! 하는 것이다 .


3. 시편 기자의 탄성과 놀람(3-8절)

  내가 봅니다.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 주께서 베풀어 주신 달과 별들.

  : 하나님은 그의 손가락을 하늘과 하늘의 달과 별들을 만드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말한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 인생이 다른 피조물과 비교해서 무엇이 다른데(사실 다른 것이 없는데) 이렇게 인생을 생각하여 일을 진행하시니 놀랍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다.


그를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의 손으로 만드신 것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으니


곧 모든 소와 양과 들짐승이며

공중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와 바닷길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 자연의 거대함과 생명의 풍성함을 생각해보면 감히 인간이 그것들을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에 불과한데, 하나님은 무력한 인간(인생)들에게 그것을 맡기셨다. 인간이 마치 하나님보다 조금 정도만 못한 것처럼 만드셔서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다. 별것 없는 인생에게 말이다. 시편 기자는 생각하면 할 수록 그 신비에 놀라게 된다. 


4. 시편 기자의 마지막 고백(9절)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의 이름으로는 충분히 찬양을 받을 만 하시다. 



[정리2. 본문에서 주고 있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시편 기자는 일상의 경험(대적을 이긴)을 통해서 우주와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경이를 가지게 된다.


2. 인생은 자연의 거대함에 비하면 젖먹이와 같은 무력한 자에 불과하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생에게 과분한 존귀와 역할을 맡기셨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 사사기 7장] 기드온이 모은 힘(병력)을 빼시는 하나님을 본다. 이유는 그 스스로 전쟁에서 이겼다고 생각할까봐다. 그런걸 보면, 우리에게 맡겨진 어떤 사역을 감당하도록 힘을 주셔야 할 하나님께서 오히려 우리의 힘을 빼실 때 우리 안에 자라 오를지 모르는 교만을 제거하시고, 하나님의 충만한 도우심을 보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의도를 눈치채야 할 것이다.(그 순간에는 왜 이 눈치가 그리 없는지...)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기드온의 이스라엘의 병사들을 줄이시는 하나님.

  1) 기드온을 따르는 이스라엘과 미디안 병사들이 대치하고 있었다.

  2)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 많아서 미디안을 넘겨 주지 않겠다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이 스스로 하나님을 거슬러 자랑하게 되는 것을 우려하셨기 때문이다. 

  3) 백성 중에서 두려워하는 자를 돌려보내라고 하니, 22000명이 돌아가고 1만 명만 남았다. 

  4) 여호와께서는 이 숫자도 너무 많다고 하셨고, 그들을 물가로 인도하여 그들을 시험하시고자 했다. 

  5) 그 중 손으로 움켜 입에 대고 마신 자의 수는 300명이고 그 외의 숫자는 다 무릎을 꿇고 물을 마셨다. 

  6) 여호와께서 손으로 물을 움켜 먹은 자 300명만 남기고 남은 백성은 집으로 돌려보내라고 명령하셔서 다 돌아가고 300명만 남게 되었다. 


2. 기드온으로 하여금 용기를 주시는 하나님

  1) 그 날 밤에 기드온으로 하여금 진영으로 내려가라 그들을 네 손에 넘겨 주었다고 말씀하심

  2) 만일 네가 내려가기 두렵거든, 네 부하 부라와 함께 그 진영으로 내려가 보라. 그러면 네가 그들의 하는 말을 듣고 강하여 지리라.

  3) 기드온은 그의 부하 부라와 함께 미디안 진영으로 내려갔는데, 그들의 진영에 미디안과 아말렉과 동방의 모든 사람들이 골짜기에 누웠는데, 메뚜기 떼와 같고 낙타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4) 그러나 병사들의 이야기 속에서 그들이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기드온의 이스라엘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그들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알게 된다. 


3. 기드온으로 승리하게 하시는 하나님

  1) 용기를 얻은 기드온은 그 밤에 300명의 병사들을 이끌고 미디안의 진영으로 향한다. 

  2) 군대를 셋으로 나누어 기드온 무리의 행하는대로 행하도록 지신한다. 기드온과 백 명은 이경 초에 파수꾼이 교대하는 시간 때에 나팔을 불며 손에 가졌던 나팔을 불며,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라>라고 외치자 세 부대가 모두 함께 그렇게 외쳤다. 

  3) 당황한 적들은 자신의 진영에서 친구끼리 칼로 치고 혼란스럽게 된다. 도망치던 그들을 이스라엘의 납달리, 아셀과 온 므낫세에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추격한다. 

  4)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의 두 방백 오렙과 스엡을 사로잡아 죽였다.그들의 머리를 기드온에게 가져왔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을 다시 풀어서 쓰기]


이제 기드온이 모집한 이스라엘 군대와 미디안, 아말렉 그리고 동방 사람들 사이의 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스라엘 병사들의 너무 많음을 지적하셨다. 절대적인 숫자가 많다기 보다는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겼다고 생각할 만큼, 많다고 보셨다. 그래서 일부를 돌려보내라고 하신다. 그렇게 22000명이 갔고, 만 명만 남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숫자도 많다고 하셨다. 물가로 데리고 가서 물을 먹는 모습을 통해서 한 번 더 선별하셨다. 손으로 움켜 물을 마신 자, 300명만 남기고는 모두 돌려보내게 하신다. 


300명. 도저히 자신들의 힘으로 이겼다고 말할 수 있는 숫자가 되질 못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제 충분한 숫자가 된 것이다.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그 날 밤에 진격하라고 했지만, 혹 두렵다면 부하 부라를 데리고 먼저 그 진영으로 가보라고 말씀하신다. 가보고 나면 하나님께서 강하게 하실 것이라는 약속을 받고 말이다. 미디안과 아말렉의 병사들은 너무 많았다. 그러나 기드온은 그 병사들의 꿈 이야기를 통해서 그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보았고, 그것으로 인해 승리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 기드온은 3백 명을 백 명씩 셋으로 구분하고 밤 이경 시간에 기습적으로 나팔을 불고, 항아리 속에 감추었던 횃불을 드러내게 했다. 아마 그들을 당황스럽게 하기 위함이었을 텐데, 실재로 그들은 너무 당황한 나머지 서로 자기편끼리 죽이게 된다. 이들을 섬멸하는 과정에서 기드온은 특별히 에브라임의 도움을 요청하고, 에브라임은 전쟁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정리3. 정리하면서 나오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와 묵상들]


1. 하나님은 병력을 줄이신다. 

3만 2천명이던 병력이 많다고 줄이라고 하신다. 이유는 자신의 힘으로 이겼다는 생각을 조금도 갖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만 명이 남았는데 이도 많다고 하셨다. 결국 2차 선정을 통해 300명으로 줄이신다. 

300명은 되고 200명이나 100명은 안되는가? 그러나 더 줄이실 필요는 없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히 부족하고 불가능한 숫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구원이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이길 원하셨다.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적으로 우리 자신의 힘을 빼야 한다. 하나님이 우리를 무력하게 만드시는 이유는 분명할 것이다. 하나님만 의지하라고 의도적으로 우리 힘을 빼신다.

우리가 늙어 힘이 빠진다는 것은 은혜다. 하나님께 좀 더 가까이 갈수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힘이 없다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 때 하나님을 의지하는, 구원에 대한 소망과 더불어 그 소망 가운데 의지할 대상이 있어야 한다. 구원은 그래서 우리의 힘을 빼시는 과정 속에서 오나보다.

약함을 자랑하라는 바울의 역설이 이해되는 아침이다.

2.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용기를 얻을 확신의 기회를 주신다.

300명을 만드시고 그 날밤에 전쟁을 하라고 요구하신다. 무리한 요구라고 느끼셨는지, 아니면 기드온이 여전히 두려워하고 있는 것을 아셨던 것인지... 하나님은 요구하지도 아니한 증거를 추가로 제공하신다. 기드온에게 미디안의 진영으로 가보라는 것이다. 

기드온은 진영에서 들었던 꿈 이야기를 통해서 최종적인 확신을 가진다. 그리고는 순발력있게 전쟁을 치른다. 

하나님은 스스로 증거를 제공하시고 확신시켜 주신다. 하나님에 대한 많은 상처가 있는 사람(기드온)에게는 많은 위로와 확신의 기회를 주신다. 요구하지 않는 증거까지도 직접 챙겨주신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의 불안과 불신에 대해서는 관용이 별로 없는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을 향한 많은 상처를 가진 자들에게 대해서는 그 상처를 치유하여 믿음으로 나올만한 많은 기회들을 주신다. 

3. 전쟁 승리의 마지막에 에브라임이 등장한다.

이전에 전쟁을 위한 모집때는 보이지 않던 여로버암 지파가 등장한다. 드보라때도 기드온 때도 유명지파, 즉 유다나 에브라임이나 므낫세 자파에 대해서는 별로 등장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의 역할을 하지 않는 모습으로 등장한다.(삿 5장)

여기서 에브라임의 등장도 뒷장에서는 부정적인 모습으로 비춰지는데, 이는 에브라임에 대한 부정적인 모습을 강화시켜 주는 장치가 아닌가 싶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본격적인 분열왕국의 모습이 시작된다.

 

[정리1. 내용 정리]

1. 르호보암이 죽고 그 아들 아비얌이 왕이 되었다.(여로보암 왕 18년 되던 해 왕이 됨)
  1) 그의 어머니의 이름은 마아가요 아비살롬의 딸이었다.
  2) 그 아비의 행위대로 여호와 앞에 온전하지 못했다. 그의 조상 다윗의 마음과 같지 않음.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가 견고했던 것은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우리아의 일 외에는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기 때문이었다.
  4) 르호보암과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이 있었던 것처럼, 아비얌과 여로보암 사이에 전쟁있음.
  5) 아비얌이 죽고 다윗 성에 장사됨. 그 아들 아사가 대신하여 왕이됨.

2. 남유다 아사 왕의 이야기
  1) 예루살렘에서 41년을 통치, 그의 어머니는 마아가. 아비살롬의 딸.
  2) 그의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했다.
   (1)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조상들이 만든 모든 우상을 없앴다.
   (2) 그의 어머니 마아가가 혐오스러운 아세라 상을 만들었는데, 그로 인해 아사는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 기드론 시냇가에 불살랐다.
   (3) 산당까지는 없애지 못했지만, 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다. 성별하여 성전에 바쳤다.
  3) 아사와 이스라엘 왕 바아사 사이에 일생동안 전쟁이 있었다.
   (1)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 라마를 건축하여 사람을 왕래하지 못하게 함.
   (2) 아사 왕은 다메섹의 벳하닷에게 은과 금을 보내 지원을 요청함. 벳하닷은 아사의 요청을 받아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로 인해 이스라엘의 바아사는 라마를 건축하는 일을 멈추고 돌아갔다.
   (3) 아사왕은 온 유다에 명을 내려 바아사가 라마에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오게 하고 그것으로 베냐민의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하였다.
  4) 아사는 늘그막에 발에 병이 들어 죽었고 다윗의 성읍에 장사되었다.

3. 이스라엘의 왕 여로보암의 아들 나답에 대한 이야기(2년간 통치)
  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그의 아버지의 길로 행하며 이스라엘로 범죄케 한 죄.
  2) 잇사갈 족속  아히야의 아들 바아사가 모반하여 나답을 깁브돈에서 죽이고 대신 왕이 됨.
  3) 왕이 될 때에 여로보암의 온 집을 쳐서 생명있는 자를 한 사람도 남기지 않음.
   (1) 여호와께서 실로 사람 아히야를 통하여 하신 말씀과 같이 되었다.
   (2) 여로보암이 범죄하고 또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를 노엽게 한 죄.
  4) 바아사가 디르사에서 41년간 이스라엘의 왕이되어 다스림.
   (1)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함.

 

[정리2. 내용의 재정리_서술식으로 큰 흐름으로 정리한다.]

본장은 남유다의 아비얌 왕과 그 아들 아사 왕에 대한 이야기와 북이스라엘의 나답과 바아사 왕에 대한 이야기다.


남유다의 아비얌 왕은 다윗의 선해을 본받지 못하고 그의 아버지 르호보암의 길을 따라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라가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의 선조인 다윗의 선행을 의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의 아들 아사 왕은 다윗의 길로 행했던 선한 왕이다. 남색하는 자를 쫓아내고 모든 우상들을 제거했다. 심지어 자신의 어머니가 우상을 만들자, 태후의 자리를 폐하고 그 우상을 태워버렸을 정도로 그의 개혁의 의지는 강했다. 북이스라엘의 바아사가 라마를 침략해서 위기를 맞았지만, 아사 왕은 다메섹의 벤하닷의 지원을 받아 위기를 모면하고 오히려 북이스라엘이 남기고 간 자재를 활용하여 유다의 성읍을 보강하는데 사용하였다. 성경은 아사 왕의 정치적 지혜를 강조하는 것 같다. 암튼, 이 시대는 북이스라엘과 전쟁이 끊이지 않고 일어나던 때였다.


북이스라엘에서는 여로보암의 뒤를 이어 나답이 왕이 되었으나, 그는 이년 만에 바아사에게 모반을 당해 살해된다. 더불어 여로보암의 혈통이 모두 제거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아히야 선지자에게 말씀하신 예언대로 저주를 받은 것이다. 바아사는 강력하게 나라를 이끌어 간 것 같다. 남유다를 압박하기도 했고 긴 기간 통치한 것으로 보아 바아사의 영향력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문제는 똑같다. 여호와 하나님께 범죄했다는 것이고, 그것은 자신의 범죄로만 끝나지 않고 이스라엘로 죄 중에 거하도록 했다는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라 하겠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과거 다윗의 선행으로 오늘 그 혜택을 누리는 아비얌 왕.

르호보암의 뒤를 이은 아비얌 왕은 사실 북이스라엘의 왕과 같은 평가를 받은 사람이다. 그에 대한 하나님의 평가는 나쁘다. 그런데 그가 왕으로 있던 시절 유다는 상황이 나쁘지 않고 괜찮았다.

성경은 그 이유가 아비얌에게 있지 않고, 오히려 선조였던 다윗에게 있다는 것을 부각시킨다.(4-5절)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한 약속한 것 때문에 그리 하셨다는 것이다. 정작 아비얌은 그것을 알았는 모르겠다. 몰랐을 것이다. 알았다면 그도 다윗처럼 행동했을 것이다. 그는 죽을 때까지 자기가 괜찮아서 강건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복을 누리고 강건하고 있다면, 그것은 지금 나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긍정적인 평가라고만 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어쩌면 그 평안과 복락은 이전의 누군가의 선행에 의한 결과가 나에게까지 미친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내가 하나님을 떠나 생활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있지 못한 중에도 큰 어려움없이 지내고 있다면, 그것은 부모님의 기도와 중보해 주시는 분들의 수고로 그렇게 되었는지 모를 일이다.

따라서 우리는 평안할 때, 겸손해야 한다. 이 평안의 근원이 누구에게로 부터 왔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받고 있는 복와 은혜는 사실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예수의 선행, 예수께서 하나님을 만족시키신 그 능력으로 예수님의 자녀된 우리에게까지 그 복이 흘러오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2. 여호와께서 북 이스라엘 왕에게 진노하시는 진짜 이유는?

여로보암의 뒤를 이은 나답에 대한 묘사도 그렇고, 그를 죽이고 반역하여 왕이 된 바아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하나님께 죄를 범했다. 동시에 그는 이스라엘에게 죄를 범하게 했다.(26, 30절)

나답과 바아사의 경우 그의 영향력은 한 개인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자기 자신도 죄를 범했지만, 그의 통치 아래에 있는 백성들로 하여금, 그의 영토에 있는 지역으로 하여금 범죄하게 만들었다. 죄를 일반화시켰고, 죄를 배양했으며 죄를 전도했던 것이다. 이것이 북이스라엘 왕들의 큰 죄였다. 그리고 그 죄는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로 이어졌다.

한 나라의 지도자가 바르게 서야 함은 당연한 것이다. 그러나 그 사람 또한 연약함이 있다는 것도 우리는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연약함으로 인한 잘못에 대해서 결정적인 것이 아니었다면, 적절한 평가 속에서 수용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정책적 결정이나 판단시기 등의 문제에 대해서)

그러나 나라 전체를 범죄하게 만드는 행위를 한 사람에 대해서는 용납해서는 안된다. 그 권세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성경적 근거가 있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그 권세를 허락하신 이유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지하기 위한 것임을 기억한다면 국가 전체적으로 바른 판단을 왜곡시키고 정보를 조작하여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고 확대하려는 악을 도모하는 권력이라면 진정으로 그 권력이 신적인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권력인지는 재고해 보아야 한다.     

왕정 시대에는 왕의 권력으로 왕이 죄를 범할 뿐 아니라, 그 나라를 범죄가운데로 이끌어 가기가 수월했을 것이다.(백성들은 무지하고 정보가 없으며 힘이 없었기 때문에) 그러나 이제는 다른 시대다. 왕이나 대통령이 잘못된 길을 가려고 한다면 시민들이 힘을 모아 그렇게 할 수 없도록 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따라서 시민 사회는 눈을 뜨고 우리가 바른 방향으로 가고 있는가를 잘 살펴 그릇된 길로 가지 않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래야 지도자도 우리도 살수 있게 되는 것이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오늘부터 야고보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은 처음 시작부터 여러가지 주제의 권면을 합니다. 믿음의 시련과 지혜와 믿음,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 말을 더디하고 성내지 말아야 할 것,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권면한다.

첫장부터 이렇게 다양한 주제로 여러가지 권면을 쏟아 놓는 서신은 야고보서가 처음이지 않는가 싶다. 어쩌면 그만큼 야고보가 하고 싶은 권면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여러가지 권면 중 한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라.(9-11절)

왜냐하면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가는 것들이고 모두 쇠잔해 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한 것도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하지만, 낮은 것에 대해서도 너무 낙심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이 가진 자가 교만하게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주 듣는 것이기는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없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집착하거나, 그것만을 봐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낮은 자, 없는 자는 높은 것,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형편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고,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높이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부족하고 없는 것에 대해는 간과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작고 미력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크고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긍정적 관점이 있어야 한다.

 

요즘처럼 자존감이 전체적으로 낮은 시대 속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낮은 것과 부족한 것도 모두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임을 볼 수 있는 안목도 필요하겠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