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한장 정리]


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할 때에...


  * 26장의 때와 같은 시대로 보이나, 성경의 각주에서도 보여주고 있듯이 <여호야김>은 시드기야를 잘못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27장은 계속해서 시드기야를 유다의 왕으로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3절, 12절, 20절)


2.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줄과 멍에를 만들어 네 목에 걸고, 시드기야 왕을 보기 위해서 온 사신들의 손에 그것을 주어 그들의 왕에게 전해주도록 한다.(에돔, 모압, 암몬, 두로, 시돈의 왕에게)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여 전한다. 


3. 하나님은 큰 능력으로 땅과 지상에 있는 사람과 짐승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기에 옳은 자에게 그것을 주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은 모든 땅을 내 종 바벨론의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주고, 또 들짐승들을 그에게 주어서 섬기게 했다.(5-6절) 그래서 정한 기한까지 바벨론을 섬기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 바벨론이 이지역을 점령하고 다스리게 될 것임을 예언하는 것인데, 그것을 마치 창세기 1-3장에서 아담에게 에덴을 주었다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난 것을 생각나게 하는 말씀을 하셨다. 이 땅도 원래 하나님께서 옳은 사람들에게 주셨는데, (그들이 죄악을 행함으로 그들에게서 빼앗아 자기 백성을 징벌하기 위한 또 다른 종 바벨론) 지금은 바벨론에게 주었다고 말씀하고 있다. 따라서 정한 기한까지는 바벨론을 섬기게 될 것이다.


4. 만약, 바벨론을 섬기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멸망하기까지 칼과 기근과 전염병으로 그 민족을 벌할 것이다. 그리니 선지자나 복술가들이 바벨론을 섬기지 아니하리라 하는 말을 믿지 말라. 그들이 정작 너희들을 멸망하게 할 것이다. 

 

  * 하나님께서 지금 역사를 주관하시되, 그 힘을 바벨론에게 일정 기간 주셨음을 말한다. 따라서 그 앞에 굴복하게 하신다. 그렇지 않다면 그 민족과 나라는 망하게 되는 것이다. 괜한 민족주의나 막연한 소망을 주는 정치인들과 선지자의 말에 흔들려서는 안된다. 


5. 예레미야는 유다의 왕 시드기야에게 이 말을 전하면서, 바벨론 왕을 섬기면 살것이라고 전한다. 그러면서 바벨론 왕을 섬기지 아니하리라는 선지자의 말을 듣지 말 것을 당부한다. (14절) 


6. 하나님은 거짓 예언을 하는 선지자들 멸망시킬 것임을 말하신다. 왜냐하면 이들은 바벨론에 빼앗겼던 여호와의 성전의 기구가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라는 그런식의 예언을 했다. 이런 예언을 믿는 것은 이 성을 황무지로 만드는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들이 참 선지자라면, 빼앗긴 것이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 아니라 지금 있는 것이 빼앗기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해야 옳을 것이다.(바벨론의 2차 침략기에 빼앗긴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주전 598년 / 여고니야(여호야긴) 20절)


7.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돌보시는 날까지 그곳에 있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22절)



[묵상 한 모금]


시드기야 왕 시대에 정치적 분위기는 바벨론을 대적하고 기회만 온다면 그 영향력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선지자들은 오래지 않아 바벨론에 빼앗겼던 성전 물건들을 도로 가지고 올 수 있을 것처럼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했고, 정치적으로 반 바벨론적 여론이 컸다.(물론 물리적으로는 바벨론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었지만) 종교적 희망주의, 정치적으로는 반바벨론 주의.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통해서 시대적 흐름과 다른 메시지를 전하신다. 유다에게 준 땅을 빼앗아 바벨론에게 주기로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바벨론을 섬기라고 말한다. 그리고 종교적으로 비관적인 메시지를 전한다. 빼앗겼던 성전 기물들은 돌아오지 않는다. 오히려 남아 있는 것들이 보존되도록 기도해야 한다고 예레미야는 말한다. 그 당시 예레미야는 종교적으로 회의주의자였을 것이고, 정서적으로는 반민족주의자처럼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아는 자의 태도였다. 


물론 바벨론의 지배는 제한적이다. 정한 시기가 있다. 그 때까지 그렇게 하도록 하신다는 것이다. 그 다음은 다르게 진행될 것이다. 


우리는 기독교인으로 종교적 낙관주의와 민족주의에 대해서 좀 더 고민해 봐야 할 것이다.(반민족주의적 메시지를 전하면서, 본인이 혜택을 입었다면 그것은 권력에 아부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본인이 오히려 고난과 질타를 받았다면 그의 메시지는 주의깊게 들어볼 필요가 있다. 선지자적 메시지가 될 수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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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는가?]



1. 자유주의-보수주의 논쟁가 교착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은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혹은 반증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 즉, 우리의 선이해(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그 증거자료를 가지고 다른 입장으로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저자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전제하는 두가지 

  1) 고고학 또는 문헌학의 성경 외적인 증거들이 우리의 성경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2) 성경의 본질을 진술하려는 모든 신학적 시도는 기꺼이 검증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성경과 성령은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오셨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도하심으로 이끄신다고 본다. 

  * 박영선 목사님이 말한, 실천신학의 개념을 말하는 것 같다. 성경 해석은 현장에서 피드백 되는 것을 통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실천신학이듯, 완전한 해석을 위해서 지금도 그와 같은 과정으로 인도하신다고 저자가 말하는 것 같다. 


3. 창세기는 신화인가 아니면 역사인가?(그룹1에 대해서)


  1) 창세기 1-10장과 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를 비교해보면, 구약성경에도 신화가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문제다. 

  2) 저자는 창세기가 신화인가 역사인가 양자택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은 근대에 와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근대기준으로 역사는 신화보다 더 가치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하지만, 신화는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3) 저자는 오히려 반문한다. 하나님이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신화라고 부르는 장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우리는 신화를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할수만 있다면 신화라는 용어 말고 다른 말을 사용하면 좋겠다.(그러나 할 수없다.)

  4) 신화는 인간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고대인들의 대답 방식이다. 가령,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고대인들이 이야기 형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야기에는 고대인의 세계관, 즉 근대적인 사유나 과학적인 사고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다. 


   (1) 이스라엘의 문화는 고대근동 세계에서 늦둥이에 속한다. 

   (2) 이스라엘 족장들의 문화는 구전문화였다. (구전문학 형태로 만들어졌고 후대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3)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족장시대였던 주전 2000-1000년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히브리어의 전신격인 언어는 있었지만(셈어, 우가릿어)

   (4) 셈어의 알파벳은 주전 1700년경에 이르러서야 아주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함.(이 알파벳은 히브리어의 기초뿐 아니라 다른 셈어, 아람어, 모압어, 에돔어, 암몬어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성경의 이야기는 애초에 구전문학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후대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봐야 한다. 

   (5) 히브리어가 존재했다는 성경 외적인 증거는 주전 1000년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문서는 게제르 달력이다.(주전 10세기로 추정, 페니키아 어인지 히브리어인지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음. 19개의 단어가 전부)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은 사해문서로 그 중에서도 빠른 것은 주전 2세기 정도다. 

   (6) 현재의 고고학적 자료만 가지고 설명한다면, 창세기는 처음에 구전문학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주전 1000년 이후 어떤 시점에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문자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전부터 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수백년동안 창조신화도 없이 단지 히브리 노예들의 창조신화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4. 그렇다면 창세기가 왜 그토록 다른 고대근동의 문헌과 유사한가? 


  1) 창 11장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사람이고 그는 수메르 문화의 사람이었다.(여호수아 24:2) 아브라함이 들어갔던 가나안 땅도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들이 풍성한 곳이었다. 

  2)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으로서의 아브라함이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은 고대 근동의 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 이것이 이방인의 신화를 너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당시에 이런 메시지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라는 것이다.(바벨론의 신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

  4) 정리하면, 하나님은 당시 고대 세계의 신화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고대인의 신화를 변화시키셔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참된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5. 고대근동 사람들의 세계인식


  1) 74쪽에 있는 그림(고대근동의 세계관)

  2) 그렇다고 창세기가 에쉬마 엘리쉬를 그대로 옮겨다고 볼 필요는 없다. 차이가 많다고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으니까. 저자가 말하는 것은 자료 사이의 상관성이 아니라, 개념적 상관관계다. 즉,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이웃 민족들과 공유했던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3) 창세기의 세계 인식은 현대 과학의 방식이 아니라, 고대 신화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신관은 당시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급진적.

  5) 중요한 것은 창세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의 기원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에 있지 않다. 

      예) 천지 창조의 <날> 문제, 홍수가 전 세계적인가? 국지적인가? 

     창세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위한 답을 주기 위해 기록됨.


 [정리]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세계로 들어가신다. 그분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의 의 미다. 또한 하나님은 낮아지셔서 인간의 문화를 수용하시고, 인간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의 의미다. 


6. 계시인 성경은 독특해야 하는가? (그룹2에 대해서)


  1) 그룹 2의 문서들을 통해서 볼 때도 성경에 언급되는 율법이나 관습 등이 그 당시 주변 나라들과 독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독특한 것은 성경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이 선적인 공동체로 만들어져 가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1,2 계명은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인데, 그 이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상식적인 법들이라는 것이다. 

  3)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잠언이 있다는 것은 모든 법과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만드시기 위해 일련의 행위 기준을 이스라엘에게 부과했다는 것이다. 


7. 좋은 역사서술은 반드시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일 수 있는가?(그룹3에 대해서)


  1) 텔 단 비문(다윗의 집)과 실로암 터널 비문(히스기야 왕)은 역사서술이 아니다. 이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일 뿐이다. 

  2) 메사 비문은 다르다. 이 비문에 오므리 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도 있지만, 이 비문은 메사가 위대한 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역사서술 방식)

  3) 성경에서도 열왕기의 역사서술과 역대기의 역사서술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 

  4) 역사적 사건 - 사건의 기록(문서전승 혹은 구두전승) - 사건을 기록하는 목적 / 상호연관성

  5) 역사서술은 해석작업이다. 역사 기록이 하나의 문학 작품처럼 보이는 이유는  역사가가 특수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6)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 역사 기록이 거짓이 도는 것은 아니다. 사무엘-열왕기서는 '우리는 무엇때문에 유배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기록된 역사서술이다. (우상숭배)

  7) 역대서에 대해서(히브리성경은 구약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사무엘-열왕기서의 보충 자료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단독적인 목적을 가진 역사 서술로 봐야 한다. 역대기는 바베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조망한 역사서술이다. 

  8) 사무엘서와 역대기의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대해서

   (1) 복음주의자: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고 가정. 자유주의자: 문서의 오류

   (2) 어느 것이 진짜 나단이 한 말이냐? 저자의 답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기록된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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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책)


1. '과거'는 이미 지나간 것이며 상실된 것이다. '역사'는 과거에 대한 '우리의' 재구성이다. 모든 대화에 있어서처럼, 쌍방은 나름대로 공헌하는 것이 있다. 그러므로 역사 연구는 어느 정도 주관적인 것이다.

 

2. 역사적 사실들은 단순히 스스로를 증언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들이 각자 이미 나름대로 가지고 있는 사상의 해석틀의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들을 대변하는 것이다. 


3. 그리스도인들은 별도의 특별한 렌즈를 착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별도의 렌즈는 다른 사람들(비그리스도인들)이 보는 것도 볼 수 있게 해주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들이 희미하게 보는 것을 좀 더 확실하게 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별도의 렌즈는 보통의 렌즈를 통해 우리가 보는 것을 '통제'하며, 상식적인 신념이 특수한 신앙과 모순되지 않는 다는 사실을 보증한다. 


4. 그리스도인들은 비그리스도인들이 보는 것과 정반대의 것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보는 것 모두와 그 외에 더 많은 것을 본다. 그 이유는 별도의 렌즈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5. 그리스도인이 비그리스도인들에 비해서 실재에 대해서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다 하더라고 개선장군과 같은 태도를 취해서는 안된다. 겸손과 중용의 태도가 좀더 설득력을 지닌다. 우리가 전체를 볼 수 있는 렌즈를 갖고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희미한 거울을 통해서 보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6. 역사 연구는 인간 이해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찬양이나 비난을 찾기 위한 판단자로서의 자세를 피하는 것이 좋다. 오히려 인생의 모든 측면, 특히 역사 연구에 있어서 우리가 취해야 할 인간적 자세는 공감하는 자세이며 그리스도인들은 더욱더 그래야만 한다. 


 - 신앙의 눈으로 본 역사, 로너드 웰즈, IVP / 1장에서 부분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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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화라는 말의 전문적 의미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 역사적 공동체가 믿어 온 이야기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기독교 신앙은 '신화적'이다. (4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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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가?]


1. 이와 같은 고대근동 문헌들이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문제를 제기한다.


  1) 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창세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고대근동 문헌을 짜집기 한 것인가?

  2)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면 성경의 독특성이 무엇인가? 

  3) 고대근동 문헌이 발굴되기 이전의 교회 역사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흘러온 것이 아닌가?


   :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2. 지금까지 발굴된 문헌들을 정리해 보면


  1) 창조와 홍수: <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

  2) 관습, 율법, 잠언: 누지 문서, <함무라비 법전>, 히타이트 조약 문서, <아메네모페의 교훈>

  3) 이스라엘과 왕들: 텔 단 비문, 실로암 터널 비문, 메사 비문


3. 각 그룹별로 제기될 수 있는 질문들

 

  1) 그룹1_ 창조와 홍수: 창세기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1)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근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신화라고 생각한다. 

     (2) 그렇다면 고대근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와 유사한 성경 이야기도 신화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3) 저자의 제안

: 신화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달라질 것인데, 편견없는 정의는 '신화는 인간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고대인들의 대답 방식'이다.  당연히 고대인들의 세계관, 즉 근대적인 사유나 과학적인 사고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 인식을 반영하게 된다. 


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으로 설명하는 방식(특히 이야기 형식으로)


  2) 그룹2_관습, 율법, 그리고 잠언: 계시인 성경은 독특한가?


    (1) 누지 문서를 통해서 보면 구약의 족장 이야기는 주전 1500년까지 올라간다.(물론 기록은 주전 1000년 이후라고 본다.)

    (2)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따르라고 요구했던 도덕적인 기준은 독자적인 명령이 아니라 주변 문화의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됨.(당시 사회적 규범이 고스란히 적용된 결과)

    (3) 당혹스러운 것은 적어도 전통적인 입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하나님이 직적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4) 이 문제는 <계시란 무엇인가>라는 더욱 핵심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5) 성경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문헌 사이에 유사성과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다. 


  3) 그룹3_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왕들: 좋은 역사서술은 받드시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일 수 있는가?


    (1) 텔 단 비문, 실로암 터널에 나타난 자료들은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2) 그러나 이것이 고대 족장의 역사적 신빙성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상대적으로국가적으로 평온했던 시기였기에 자료들을 남길 수 있었다.(어찌보면 근대 역사 기록과 유사한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3) 열왕기를 보면 왕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을 이루는 것을 볼 때, 그래도 미화시킨 역사라기 보다는 정확한 역사서술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4)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5) 메사 비문에서 메사 왕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함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역사 기록은 사실 그대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메사 비문에 거짓말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적인 내용들이 들어가지만, 거기에는 왕이 위대함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들어가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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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24장] 모든 일을 최종적인 마무리가 중요합니다. 여호수아는 자기 인생의 마무리, 가나안 정복의 마무리를 24장을 통해서 합니다. 핵심은 우리의 신앙의 근거를 어디에 둘 것인가을 명확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단에 따른 언약을 체결하는 것이지요. 마무리까지 깔끔한 여호수아. 리더십의 모형이라 볼 수 있겠습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와께서 지금까지 이스라엘을 위해 하신 일

  1) 너희 조상 아브라함의 조상은 강 저쪽에서 거주하면서 다른 신을 섬겼으나

  2)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쪽에서 이끌어 가나안으로 부르고 그에게 이삭을 줬다.

  3)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었는데, 에서는 세일 산을 소유했고 야곱과 그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다. 

  4) 거기서 내가 모세와 아론을 보냈고, 애굽에 재앙을 내려 너희 조상들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었다. 홍해에서 너희는 살렸고, 너희를 좇던 애굽의 병사들은 내가 멸하였는데 너희들이 이 모든 것을 너희 눈으로 봤다. 

  5) 내가 너희를 인도하여 요단 저쪽에 거주하는 아모리 족속의 땅으로 들어가매 싸울 때, 내가 그들을 너희 손에 넘겨주매 너희가 그 땅을 점령하고 나는 그들을 멸절시켰다. 

  6) 모압 왕 발락이 너희와 싸울 때,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하려고 할 때, 오히려 발람이 너희들을 축복하였다.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건져내었다. 

  7) 내가 왕 벌을 보내, 그 아모리 족속의 두 왕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게 하였는데, 이것이 너희의 칼이나 너희의 활로써 한 것이 아니다. 

  8) [결론] 너희는 너희가 수고하지 않은 땅과 건설하지 않은 성읍을 얻었다. 그 가운데 거주하면서 심지 않은 포도원과 감람원의 열매를 먹는다. 이것은 다 하나님이 너희에게 주신 것이다.


2. 이제 우리가 여호와를 위해서 결단해야 할 일

  1) 그러므로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그를 섬기라. 이 강 저쪽과 애굽에서 섬기던 신들을 치워버리고 여호와만 섬기라. 

  2) 만약 여호와 섬기는 것이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가 섬길자를 오늘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3) 백성들의 고백: 우리는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하리라. 여호와는 우리 조상들을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올라오게 하셨고, 우리 목전에서 큰 이적을 행하셨다. 그리고 우리의 모든 길과 우리가 지나온 모든 백성들 중에서 우리를 보호하셨다. 여호와께서는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의 하나님이심이니이다. 


3. 백성들의 결단에 대한 여호수아의 경고와 언약 체결

  1) 여호수아는 백성들에게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 예언함. 왜냐하면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저희들의 잘못과 죄들을 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2) 만약, 너희가 여호와를 버리고 이방 신들을 섬기면 너희에게 복을 내리셨다가도 돌이켜 너희에게 재앙을 내리시고 너희를 멸하시리라. 

  3) 백성들은 강력하게 부인하며, 여호와를 섬기겠다고 고백한다. (21절)

  4) 여호수아는 그렇다면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들을 치워버리고, 너희 마음을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권면한다. 

  5) 백성들은 여호와만을 섬기고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겠다고 다시 고백한다. (24절)

  6)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고 그들을 위하여 율례와 법도를 제정함.

  7) 여호수아가 이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율법책에 기록하고 큰 돌을 가져다가 증거로 삼음.

  8) 언약을 체결하고 각기 기업으로 돌아갔다. 


4. 여호수아서의 마무리

  1) 이 일 후에 여호와의 종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백십 세에 죽었다. 

  2) 여호수아를 에브라임 산지 가아스 산 북쪽인 딤낫 세라에 장사했다. 

  3) 여호수아가 사는 날 동안과 그 뒤에 생존한 장로들 곧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행하신 모든 일을 아는 자들이 사는 날 동안 여호와를 섬겼다. 

  4)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하였다. 

  5)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으매 그의 아들 비느하스가 에브라임 산지에서 받은 산에 장사.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풀어서 쓰기]


[여호수아의 마지막 권면] 여호수아가 장로와 수령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세겜으로 부름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인 장로들과 수령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세겜으로 불러모았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결단을 통한 언약을 체결하는 과정을 이끈다.


여호수아는 먼저 이들에게 우리 조상의 과거가 어떠했는지를 말한다. 아브라함의 조상은 강 저편에서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조상 아브라함을 우상을 섬기던 그 자리에서 불러내어 가나안으로 불러오셨다. 그리고 씨에 대한 약속을 주시고는 이삭을 주셨고, 이삭에게는 야곱과 에서를 주셨다. 에서는 세일 산을 기업으로 받았지만, 야곱의 자손들은 애굽으로 내려갔고 거기서 하나님은 모세와 아론을 부르셔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셨다. 애굽을 나오게 하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이적을 봤고, 대적자들을 어떻게 하시는가도 경험했다. 그 때 뿐만이 아니라 요단 저편에서도 아모리와 전쟁에서도 모압의 위협(발람의 저주) 속에서도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들을 지켜 오셨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 우리가 수고하지 않은 열매를 거두어 먹고 있다고 먼저 역사적인 정리를 한다. 


그 뒤를 이어서 이들을 향해 결단을 촉구한다. 이제 우리가 믿을 신을 정해야 한다고.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길 것인데, 너희들은 어떤 신을 섬기리 것인지를 결정하라고 촉구하자 이들도 여호와만을 섬길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백성들의 결심을 듣고 여호수아는 이들을 향해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은 거룩하고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너희들의 잘못과 죄를 사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고 여호수아는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은 복을 내리셨다가도 돌이켜 재앙을 내리시는 분이라고 말한다. 그러자 백성들은 절대로 이방신을 섬기지 않을 것이라고 재차 다짐한다.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언약을 맺는다. 그리고 백성들은 집으로 돌아간다. 


여호수아서의 마지막은 여호수아가 죽어 장사 지내게 되었다는 것, 그제서야 비로소 애굽에서 가져온 요셉의 뼈를 세겜에 장사했다는 것,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도 죽어 장사지나게 되었다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메시지와 생각들]


1. 다 경험하고 다 아는 내용이지만 결단이 필요하다. 


여호수아는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다 불러 모아놓고 지난 과거부터 지금까지의 역사를 다시 회고하고 정리해 준다. 그 이야기는 모여있던 지도자들은 다 아는 이야기이거나 함께 경험한 이야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호수아는 이들에게 다시 정리해서 이야기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 다음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결단할 것을 촉구하신다. 심정적으로 당연히 여호와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입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고백하는 것이 필요하다. 아마 이스라엘 무리 중에는 은근히 한 두개씩 가나안의 우상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지도 모른다.(23절) 그러니까 심정적으로는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명확하지만, 보험처럼 우상을 한 두개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모두 아는 내용이라고, 다 그럴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우리는 그렇지 않다. 모두 한 두가지 말하지 않는 자기만의 우상을 붙잡고 있다. 공개적으로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모를 한 두가지의 불필요한 것들을 쥐고 있다. 결단은 그것마져 버려야 한다고 요구하고 내 스스로 그렇게 하겠다고 공개적으로 말함으로서 자신의 신앙을 결단하게 하는 것이다.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그 안에 무슨 내용이 담겨져 있는 것인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결단은 선을 명확하게 하는 것이다. 이제 선 안에서 행하든지 선 밖으로 나갔는지를 자기 자신에게 속일 수 없게 되는 것이다. 


2. 언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체결자의 의지를 점검해야 한다. 


여호수아는 백성들이 여호와만을 섬길 것이라는 것에 대해서 의심했다.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성들이 전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여호와만을 섬기겠다고 말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어쩌면 이들의 연약함 때문만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완전하심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일 수 있다. 암튼, 여호수아는 백성들을 계속 의심했고, 불가능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그렇지 않다고 재차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그리고 나서 여호수아는 이들과 언약을 체결한다. 언약의 체결이란 서로의 언약에 대한 내용에 대한 온전한 숙지와 함께 그것을 체결하려고 하는 그 사람의 의지가 명확해야 한다. 왜냐하면 약속이기 때문이고, 언약을 어겼을 경우에는 그에 상응하는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그것을 명확하게 한다. 


이제 여호수아 이후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태도가 어떠했는가? 또한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서 어떻게 대하셨는가?에 대한 진행이 어떻게 될지 호기심을 가지고 살펴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여호수아를 지나 사사기에 이르면 그것을 확인해 갈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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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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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여호수아 4장] 요단 강을 마른 땅으로 건넌 사건은 홍해를 건넌 사건과 대조됩니다. 이번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는 모세와 대견될만한 지도자임을 인정받습니다. 역사를 통한 교훈을 지속하려고 했던 여호수아의 모습 속에서 우리에게 어떤 역사의식을 가진 지도자가 필요한지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됩니다. 아픈 역사를 통해서 배우려고 하는지 아니면 아픈 역사를 감추려고만 하는지에 따라서 지도자의 미래, 그 민족의 미래가 보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모든 백성이 요단을 건너는 과정 중에서 행한 일.
  1)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각 지파 대표 한명씩 요단강에서 돌 하나씩을 취하여 오늘 유숙할 그곳에 두게 하라.
  2) 여호수아는 요단 강 중앙에 서 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 있는데까지 가서 각 지파별로 돌을 메라고 하고, 이것이 표징이 될 것인데 훗날 자손들이 이 돌들이 무엇인가 물을 때 여호와의 언약궤가 요단을 건널 때 그 앞에서 물이 끊어졌으므로 영원한 기념이 될 것이라 하라.
  3) 각 지파 대표들은 돌을 취하여 자기들의 유숙할 곳으로 가져가 거기 두었고, 여호수아는 요단 가운데 있는 언약궤를 맨 제사장의 발이 있는 곳에 돌 열둘을 세웠는데 지금까지 있더라.
  4) 요단 중앙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서있고, 물은 멈췄을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요단을 건넜다. 모두 건넌 후에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백성들의 목전에서 건넜다.
  5) 루우벤 자손과 갓 자손과 므낫세 반 자파가 먼저 무장하고 모든 이스라엘보다 먼저 건넜다.
  6) 무장한 사만 명이 가량이 여호와 앞에서 건너가 싸우려고 여리고 평지에 이르렀다.
  7)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육지에 발을 밟는 동시에 요단 물이 본 곳으로 도로 흘러갔다. 그리고 전과 같이 언덕에 넘쳤다.

  [효과] 그 날에 여호와께서 모든 이스라엘 앞에서 여호수아를 크게 하시매, 생존하는 날동안 백성들이 모세를 두려워하듯이 여호수아를 두려워하였다.

 

2. 여리고 동편 길갈에 진을 치다.
  1) 1월 10일에 백성이 요단에서 올라와 여리고 동편 경계 길갈에 진을 쳤다.
  2) 길갈에 요단에서 가져온 돌 12개를 세웠다.
  3) 훗날 자손들이 묻거든 너희 자손들에게 알게 하라. 이스라엘이 마른 땅을 밟고 이 요단을 건넜다는 것을... 요단을 마르게 하고 건너게 하신 것은 홍해를 말리시고 우리를 건너게 하심과 같은 것임을 자손에게 알리게 하라.

  [효과]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고, 너희가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게 하려 하심이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다시 나의 말로 풀어말하기]

 

본장은 이스라엘 요단 강을 건너게 되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은 요단의 중앙에 서서 물을 막고 있다.(물이 멈추었다) 그러는 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을 건너는데, 그 맨 앞에서 사람들은 요단 동편에 기업을 얻은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 사람들이다. 이들은 여호수아와 약속한대로 앞장서서 가나안을 향해서 갔고, 많은 무장한 사람들이 그 뒤를 따라갔다. 아마 그 뒤를 이어 다른 지파와 여인들, 아이들이 요단을 건넌 것으로 보인다.


요단을 건너는 중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하나의 돌, 그래서 12개의 돌을 요단에서 취하라고 말씀하신다. 여호수아는 즉각적으로 각 지파별 대표를 세워 12개의 돌을 취하도록 하고, 더 나아가 이 돌을 취하는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추가적으로 언급한다. 여호수아는 이것이 하나의 징표가 되는 것인데, 후손들에게 지속적으로 지금의 이 사건을 기억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한듯 하다.


이 사건을 계기로 여호수아는 모세와 같은 권위를 인정받게 된다. 백성들은 모세를 대하듯 여호수아를 대하게 되었다고 기록한다. 그리고 다시 한 번이 사건은 홍해의 사건과 같은(유형의) 사건임을 확인하면서 하나님이 모든 백성의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그 백성이 항상 여호와를 경외하도록 하기 위함임을 분명히 했다.

 

[정리3. 정리하면서 발견하는 자연스러운 메시지와 교훈]

 

1. 여호수아는 사건을 교육의 과정으로 연계했다.

 

여호와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각 지파별로 한 명씩 돌을 하나 취하여 오늘 묵을 곳에 두게하라는 명령을 여호수아에게 했다. 여호수아는 그 명령을 수행하면서 좀 더 구체적인 목적까지 부여한다. 그와 같이 하는 것은 우리의 후손들을 위함이라는 것이다. 훗날 요단 강바닥에 있어야 할 돌이 길갈이라는 곳에 쌓여있는 것을 볼 때, 색다른 저 돌들은 무엇인가? 묻는 후손들에게 요단 강의 기적을 상기 시키고, 그것은 또한 홍해 사건으로까지 이어지도록 하기 위한 것임을 여호수아는 간파한다.

 

여호수아는 위대한 지도자였다. 능력면에서 모세와 비견되는. 그리고 더불어 그는 교육적인 지도자였다. 지금 당장의 기적을 약간의 흥분이 아닌, 후대의 교훈으로 가지고 가고자 했던 지도자였다. 위대한 지도자란 당대에 위대한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것의 영향력이 후대에까지 더 확대되도록 준비하는 지도자이다. 그래서 교육은 백년지계라고 했고, 교육은 향상된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인 것이다.

 

우리가 참된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는 사건을 교훈으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좋은 사건이든 나쁜 사건이든 그것을 교육의 장으로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좋은 사건을 통해서는  그것을 지속할 수있는 시스템을 만들고, 나쁜 사건을 통해서는 재발을 방지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육의 목적이다. 지금의 우리의 잘못과 실수가 정당화 될 수있는 유익할 이유는, 우리 다음 세대에는 이와 같은 잘못을 하지 말라는 측면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그래서 역사를 배워야한다. 속이려는 자는 역사를 감추겠지만, 바르게 인도하려고 하는 자는  역사를 들춰낸다. 잘못을 인정한다. 타인의 잘못에 대해서도 정확히 짚고 넘어가려 한다. 과거 혹은 현재의 아픔을 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안고 미래로 도약하기 위해서 그렇게 해야 한다.

 

과거의 역사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아프더라도 과거의 역사를 공개하고 들춰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자가 미래를 위한 지도자라고 할 수 있겠다. 역사를 감추고 은폐하는 자에게 밝은 미래를 기대할 수는 없겠다.

 

  * 회개에 대해서, 반성과 성찰에 대해서도 같은 입장에서 설명할 수 있으리라 본다.

 

2. 여호수아는 모세와 요단강 기적은 홍해의 기적으로 대조된다.

 

요단강 사건은 홍해 사건과 비견된다. 여호수아가 계속해서 모세와 비교되고 있는 것처럼. 그럴수 밖에 없을 것이다. 선임 지도자 모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에 사람들은 은연중에 여호수아의 말과 행동 그리고 그의 결정과 결과들을 통해서 모세와의 끊임없는 비교를 하고 있을 것이다.

 

성경은 요단 사건을 통해서 여호수아가 완전하게 모세에서 자신에게로 백성들의 신뢰가 옮겨 왔음을 보여주고 있다.(14절) 여호수아가 처음 모세를 대신해 지도자로 부름 받았을 때, 여호수아의 고민은 바로 이와 같은 고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렇게 강하고 담대하라고 몇 번이나 격려해 주셨는지 모르겠다. 암튼, 여호수아는 첫 사역을 완벽하게 해냄으로서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오히려 모세보다 더 나아가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를 하는 더욱 위대한 일을 감당했다고 봐도 좋다고 본다.

 

모든 후임 지도자가 선임 지도자보다 뛰어날 수 없다. 오히려 그만 못한 경우가 더 많을지 모른다. 그러나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된 자리라면 우리는 여호수아처럼 강하고 담대함을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사람의 눈치와 평가에 연연하지 말고 자신의 해야 할 일을 해야한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손에 있게 마련이다. 그 자리에 집착하게 되고, 사람들의 평가를 먼저 의식하게 될 때 자신을 세운 하나님의 뜻을 행하지 못하고, 다른 일을 하게 되고 만다. 자고로 하나님이 세워 준 지도자 혹은 백성을 통해서 세워진 지도자는 소신을 가지고 시대적 부르심을 감당하는 자여야 한다.

 

3. 이 모든 일을 두가지 목표를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통해 요단강을 가르신 것은 두 가지 목적을 위함이었다.

첫째, 이 땅의 모든 백성에게 여호와의 손이 강하신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홍해 사건을 통해서 이 지역 사람들은 모두 두려워 떨었다. 바로의 손에서 건져낸 여호와 하나님은 어떤 신이간에 대한 두려움을 가졌던 것처럼, 요단의 마른 땅으로 건너게 한 이들의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가에 대한 다시 한번의 확인을 통해 두려움을 확증해 주신 것이다.

둘째는 이 사건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여호와 하나님을 항상 경외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사건은 이 백성들의 머리 속에 대대로 박혀서 크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을 일으키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적은 늘 이 두가지를 고려한 것임을 기억하자.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크심에 놀라고, 그의 백성들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여 다른 것에는 관심을 돌리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따라서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기적에 대한 체험이 부족해지고 멀어질 때, 우리는 쉽게 신앙이 약해지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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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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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아우구스티누스"와 "벤자민 워필드"와 같은 신학자들은 새롭게 밝혀지는 과학적, 역사적 진실에 대해서 어떤 입장을 취하는 것이 현명한가에 대해서 아래와 같이 이야기 합니다. "모든 빛에 우리는 조심스럽게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책 내용 인용)


1.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창세기 1장 해석에 다시 귀를 기울여보면, 그리고 당시에는 진화나 지구의 나이에 관한 과학적 증거가 없었다는 점을 기억한다면, 성경 원문을 세심하고 진지하고 경건하게 읽는다고 해서 젊은지구창조론처럼 글자 하나하나에 얽매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 분명해 진다. 


사실 성경을 이처럼 좁은 의미로 해석하는 것은 주로 지난 100여 년간 다윈의 진화론에 반발해 일어난 결과다.(p.177)



2. 아우구스티누스는 창세기를 언급하면서, 17세기 교회가 마땅히 유념했어야 할 간곡한 훈계를 잊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도 대개는 알고 있다. 땅과 하늘과 그 밖의 이 세상 것들, 별의 움직임과 궤도, 심지어 그 크기와 상대적 위치, 예측 가능한 일식과 월식 그리고 일 년 열두 달과 계절의 주기, 동물과 관목과 돌 등에 대해. 그리고 이 지식을 이성과 경험에서 나온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인다. 


이제 성경의 의미를 전달한다며 이런 주제에 관해 허튼소리를 해대는 그리스도인에게 귀를 기울이는 것이 이교도들에게는 수치스럽고도 위험한 짓이 되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 전반에 대해 잘 모르거나 그리스도인을 비웃는 당혹스러운 상황을 막아야 한다. 


무지한 한 개인이 비웃음을 받는 거야 문제될 게 없지만, 종교계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성경을 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런 의견을 가지고 있으려니 생각한다면, 그리고 성경을 쓴 사람들이 비난 대상이 되고 교육 받지 못한 사람으로 내몰려 우리가 애써 구원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도 큰 피해가 돌아가는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것이야말로 수치스러운 일이다. 그리스도인이 일반 사람들도 빤히 아는 사실을 두고 실수를 하거나 성경에 관해 바보 같은 말만 늘어놓는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우리 성경을 믿을 것이며, 죽은 자의 부활이니 영적 삶이니 천국이니 하는 것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이 이미 경험을 통해 이성적 시각으로 터득한 사실을 놓고 성경은 온통 바보 같은 소리만 지껄인다면 그들은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 p.160-161)



3.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보수적인 개신교 신학자였던 벤저민 워필드는 사회적, 과학적으로 아무리 큰 변화가 일어나도 종교인들은 그 믿음의 영원한 진실에 굳건히 발을 딛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가진 그 역시 하느님이 창조한 자연계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면 그것을 축하해야 한다고 보았다. 워필드는 오늘날의 교회에서도 깊이 새겨들어야 할 위대한 말을 남겼다. 


"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이성의 진실, 철학의 진실, 과학의 진실, 역사의 진실, 비평의 진실에 반감을 가져서는 안된다. 빛의 자녀인 우리들은 모든 빛에 조심스레 열린 태도를 취해야 한다. 그러니 오늘날의 연구 결과를 당당히 마주하는 용기를 기르자.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더 그것에 열광해야 한다. 우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빨리 모든 영역에서 진실을 식별해야 하고, 더 적극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이 어느 곳으로 향하든 더 충실히 따라야 한다." (p.181-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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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가서 5장을 묵상하던 중

선지자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의 역사를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 묵상한 글입니다.

 

선지자는 이스라엘이 바빌론에 의해서 침략을 당하고 결국은 멸망을 당하는 역사적인 상황을 두 가지 측면에서 해석하고 있다. 하나는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우상숭배와 불순종하는 범죄로 말미암아 받게 되는 심판이라는 측면이다. 그래서 바빌론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심판하시는 도구 정도로 보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의 측면은 이스라엘이 당하는 고난이 장차 얻게 될 구원을 위한 진통과정이라는 것이다. 진통이 없이 생명의 탄생이 없듯이, 이스라엘이 지금 당하고 있는 고통이 없이는 새로운 생명과 구원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측면에서의 고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통은 우리의 잘못에 대한 징계일수도 있으면서 동시에 새로운 변화를 위한 과정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미 5:3 쉬운성경)

주께서는 진통중인 예루살렘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그 백성을 바빌론에 남겨 두실 것이다. 그런 뒤에 포로로 끌려갔던 그의 형제들이 유다에 사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로 돌아올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관점에서 한국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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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65번째 책인 유다서를 정리하고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구약으로 돌아와 성경의 11번째 책인 열왕기상으로 왔습니다. 작년에 정리했던 열왕기 역사를 다시한번 살펴볼 생각도 있고 해서 열왕기상로 왔습니다.

열왕기는 이야기와 역사와 정치를 다루는 책이면서 동시에 그 과정 속에서 오는 신학적 메시지를 주는 책입니다. 기대해 봅니다. 오늘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스토리 중심으로 정리해 봅니다.]

1. 다윗의 나이가 많아 늙었다.(1-4절)
  1) 몸을 따듯하게 할 몸 종으로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주었으나, 다윗이 동침하지는 않았다.

2. 아도니야가 스스로 왕이 되고자 했다.(5-10절)
  1) 그는 압살롬 다음에 태어난 자로 학깃의 아들이다. 용모가 준수하고 아비에게 칭찬만 받음.
  2) 아도니야는 당시 군대장관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모의하였고 그들은 아도니야를 따름.
  3) 반면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과 브나야와 시므이와 레이와 다윗의 용사들은 따르지 않음.
  4) 아도니야를 따르는 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잔치를 벌임

3. 선지자 나단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자 함(11-27절)
  1) 나단이 솔로몬의 어머니 밧세바를 찾아가 지금의 상황을 알려줌(아도니야가 왕이 되려 함)
  2)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기 위한(하나님의 약속대로) 방책을 알려줌
  3) 밧세바가 다윗의 침실에 들어가 빨리 왕이 될 자를 선정해 달라고 요청함. 아비아달이 왕이 되려고 하고, 그렇게 되면 솔로몬이 죄인이 될 것을 지적한다.
  4) 나단이 다시 들어가 재차 솔로몬을 왕으로 세울 것을 강조하여 요청함.

4. 다윗이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다(28-39절)
  1) 밧세바를 불러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솔로몬을 오늘 왕으로 세울 것을 약속하여 준다.
  2) 다윗이 제사장 사독과 선지자 나단,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불러서 솔로몬을 기혼으로 데리고 가서 거기서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과 유다의 통치자로 삼으라고 명령한다.
  3) 그대로 시행하여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고, 나팔을 불어 온 국민에게 알린다.

5. 오히려 위기에 처한 아도니야(40-53절)
  1) 아도니야와 함께 있던 사람들이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게 된다.(제사장 아비아달의 아들 요나단을 통해서)
  2) 아도니야와 함께 했던 모든 손님들이 다 놀라 도망갔다.
  3) 아도니야는 솔로몬을 두려워하여 제단 뿔을 잡고 <자기 종을 죽이지 않겠다>는 맹세를 원하자 솔로몬은 선하다면 살겠지만, 악하다면 죽으리라는 말만 주고 아도니야를 집으로 돌려보냄.

[정리2.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재정리, 요약해 봅니다.]

열왕기상 1장은 다윗의 시대가 끝나고 그 다음 시대로 이어지는 과정 속에서 당시에 유력한 왕자 아도니야가 왕이 되지 않고, 솔로몬이 되었는가를 보여준다. 본문에서 아도니야는 왕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고, 솔로몬은 매우 수동적으로 표현되고 있다.(나단과 밧세바가 솔로몬을 왕으로 만드는 일에 주력하고, 다 이루어진 것을 솔로몬을 받는 형식으로 비춰짐)


하나님은 힘있고 강한자, 당시의 대세인 아도니야를 왕으로 세우지 않고, 결국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솔로몬을 왕으로 세우셨다. 이는 이스라엘의 왕조가 단순한 힘과 정치의 역학 속에서 이어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1. 아도니야는 솔로몬 왕에게 매우 위협적 존재가 될 것이다.
2. 제사장 아비아달과 군대장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은 아도니야의 편이었다.
3. 반면, 선지자 나단과 제사장 사독,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는 솔로몬의 편에 선 자들이었다.
4. 솔로몬은 왕이 되는 과정에서 위태로웠으나, 왕이 된 이후에는 왕으로서 <아도니야>를 견제하였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왕은 되고자 하는 자가 되는 것인가, 세워주는 자로 말미암아 되는 것인가?

  우리는 이 이야기를 읽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이 다윗의 다음을 이을 왕이 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읽게 된다. 따라서 아도니야는 하나님의 결정(뜻)을 거스르는 자가 되는 것이고, 나단과 밧세바의 경우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고 하는 사람들로 나타난다. 그리고 결국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려는 사람들의 승리로 일단락 된다.

   그러나 역사를 좀 더 생동감있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본문을 읽으면서 드는 질문은 이런 것이다. 왕이란, 되고자 하는 자가 되는 것인가?(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세워주는 자들로 말미암아 세워져야 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다.

아도니야는 왕이 되고자 했다. 그는 왕이 될만한 인물이었다. 어려서부터 왕의 인정을 받았으며, 준수했으며 사람들을 규합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아마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알면서도 솔로몬을 왕으로 정하지 못한 이유가 있다면, 아도니야가 솔로몬보다는 훨신 왕의 자질을 가지고 있다고 봤기 때문인지 모른다.) 아도니야는 거의 왕이 될 뻔 했다. 이에 반해 솔로몬은 왕이 되기 위해서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성경에서 볼 때) 그는 왕으로 세워진 왕이다. 나단에 의해서 밧세바의 요청과 나단의 직언의 도움을 받아 왕으로 세워진 인물인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솔로몬이 왕의 자격이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가 왕이 된 후에 아도니야를 다루는 모습(51-53절)은 왕의 권위와 풍모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다.

왕이 되고자 하는 자(능력과 의지를 가진 자)를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본인은 소극적이지만 세워져야 할 사람을 세워야 할 것인가? 물론 세워져야 할 사람이 누군인지 어떻게 알겠는가?(솔로몬이라는 것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서 확인한다지만.. 현실 정치에서는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러나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면, 권력과 힘과 의지를 가진 누군가가 아니라, 시대 정신 혹은 사람들의 지지를 일으키는 그 누군가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 그가 수동적일지라도 그를 세워야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물론 하나님의 명확한 뜻으로 세워진 솔로몬 조차 많은 과오와 실패를 가진 왕이라는 것을 성경은 말한다. 우리는 무흠한 자를 우리 가운데 세우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를 이끌어갈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다. 시대 정신의 반영이면서, 사람들로부터 세워져가는 지도자를 세우는 것이다. 그것이 역사의 흐름이 아닌가 싶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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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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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수양회 중 쓴 글이라 좀 늦었습니다.

 

[정리1. 본문 정리]

1. 결국 아달월 십삼일(12월 13일)에 일어난 심판의 날

  1) 드디어 유다인들이 대적들에 의해 제거되기를 원했던 날 오히려 대적을 심판하게 된 날.

  2) 당시 본토의 지방관들은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유다인들에게 협조적으로 도왔다.

  3) 유다인들은 각 지방에서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죽였는데, 미워하는 자를 마음대로 행함.

  4) 수산 궁 안에서만 500명을 죽이고, 하만의 아들 10명을 또한 죽였다.

2. 왕은 왕후 에스더에게 혹시 또 다른 소청이 있는지를 물어 본다.

  1) 좋게 여긴다면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이 내일 하루 더 조서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요청함.

  2) 왕이 허락함으로 수산에 있는 자들은 14일에도 유다인들이 300명을 도륙함. 그러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음.

  3) 전국적으로는 75000명을 도륙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3. 부림절을 아달월 14,15일에 지키게 된 배경

  1) 대부분의 지방은 13일에 유다인들의 대적을 죽이고, 14일에 잔치를 베풀고 즐겼다.

  2) 그런데 수산에서는 13,14일에 유다인의 대적을 죽이고, 15일에 쉬며 잔치를 베풀었다.

  3) 모르드개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하게 하고, 왕의 각 지방에 글을 보내어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키게 하였다.

  4) 유다인들이 대적에게 벗어나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기에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

  5) 하만이 유다인들을 죽이는 날을 정하려고 제비를 뽑은 것, <부르>의 이름을 따서 부림이라고 하고 해마다 그 날을 정해서 지키고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함.

  6)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이와 관련하여 글을 쓰고 부림에 대한 둘째 편지를 굳게 지키게 하고 아하수에로의 나라 127 지방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에게 보내 부림일을 지키게 함.

  7) 에스더의 명령이 부림에 대한 일을 견고하게 하였고 그 일이 책에 기록되었다.

[정리2. 재정리]

결국 시간은 지나 아달월 13일이 되었다. 대적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한 날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오히려 역전케 하시어 대적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날이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조서에 따라 신속하게 대적자들을 도륙하였다. 수산에서만 500명을 죽였고, 전국적으로 75,000명이 죽임을 당했다. 수산에서는 하만의 열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 유다인들이 대적자들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그의 재산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은 정당한 복수의 개념이지 약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유다인들은 대적을 심판하기는 했지만, 약탈하지는 않았다.

이 심판의 날이 있은 후 12월 14일은 축제의 날이 되었다. 유다인들은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는 날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15일까지 축제를 벌이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산 궁에서는 12월 13일 하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대적자들을 위한 심판일을 14일 하루 더 연장할 수 있도록 에스더가 요청했고 왕이 이를 허락하여 추가로 300명의 사람이 죽었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는 나무에 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수산은 13,14일의 심판을 마치고 15일에 쉬게 되는데, 전체적으로는 14,15일을 부림일로 정해 이틀간 축제로 지키게 된 것이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 역사를 잘 간수하고 전국적으로 매해 이 날을 지키게 하였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아달월 13일은 심판의 날이다.

하만의 계략도 잔인했지만, 유다인들도 똑같이 잔인하다고 여겨지는 본문이다. 심지어 에스도는 수산에서 하루만의 복수도 부족해서 하루 더 연장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하만의 열 아들을 죽인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그 아들을 나무에 달도록 요청했다.

이와 같은 유다인들의 잔임함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잠시 고민하게 되지만, 중간 중간 대적자들을 도륙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을 보면, 이 일은 탐욕에 의한 살육이 아니라 정당한 심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따라서 <복수>라는 입장에서 유다인들의 입장을 볼 것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입장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이와 같이 대적자들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복수>와 <심판>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복수>는 금지되어야 하겠지만, <심판>은 정당하게 일어나야 한다. <복수>로 다스려지는 사회는 끔찍하지만, <심판>이 없는 사회 또한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고, 그 법을 집행할 대행자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복수>는 금지하지만, <심판>은 인정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2. 역사의 기록과 보존은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도 적용하고 상기하기 위한 것이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 날의 역사에 대해서 기록했고, 그 기록을 보존하고 후대의 사람들도 부림일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이 날을 상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적어도 자기 민족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고,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모르드개가 죽어도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던 것처럼 민족적 자존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유다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족한 것이 민족의식이다. ...(내용 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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