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어떤 다른 방식으로 이런 문제들에 접근할 수 있는가?]



1. 자유주의-보수주의 논쟁가 교착상태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것은 고고학적 발견이 성경을 어떻게 입증하느냐 혹은 반증하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증거를 어떻게 해석하는가에 달려있다. 즉, 우리의 선이해(믿음)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서 그 증거자료를 가지고 다른 입장으로 설명하게 된다는 것이다. 


2. 저자가 앞으로의 논의를 위해 전제하는 두가지 

  1) 고고학 또는 문헌학의 성경 외적인 증거들이 우리의 성경 이해에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한다. 


  2) 성경의 본질을 진술하려는 모든 신학적 시도는 기꺼이 검증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성경과 성령은 교회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해 오셨다. 지금도 하나님께서 그와 같은 인도하심으로 이끄신다고 본다. 

  * 박영선 목사님이 말한, 실천신학의 개념을 말하는 것 같다. 성경 해석은 현장에서 피드백 되는 것을 통해 다시 해석되어야 한다는 것이 실천신학이듯, 완전한 해석을 위해서 지금도 그와 같은 과정으로 인도하신다고 저자가 말하는 것 같다. 


3. 창세기는 신화인가 아니면 역사인가?(그룹1에 대해서)


  1) 창세기 1-10장과 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를 비교해보면, 구약성경에도 신화가 있지 않는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그리고 이것은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심각한 문제다. 

  2) 저자는 창세기가 신화인가 역사인가 양자택일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이런 구분은 근대에 와서 생긴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구분은 근대기준으로 역사는 신화보다 더 가치있고 하나님의 성품과 부합하지만, 신화는 그렇지 않는다는 것을 가정하기 때문이다. 

  3) 저자는 오히려 반문한다. 하나님이 고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말씀하실 때, 우리가 신화라고 부르는 장르를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는가? 우리는 신화를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할수만 있다면 신화라는 용어 말고 다른 말을 사용하면 좋겠다.(그러나 할 수없다.)

  4) 신화는 인간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고대인들의 대답 방식이다. 가령,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등과 같은 질문들에 대한 고대인들이 이야기 형식으로 대답한 것이다. 따라서 그 이야기에는 고대인의 세계관, 즉 근대적인 사유나 과학적인 사고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 인식을 반영한다. 


   (1) 이스라엘의 문화는 고대근동 세계에서 늦둥이에 속한다. 

   (2) 이스라엘 족장들의 문화는 구전문화였다. (구전문학 형태로 만들어졌고 후대에 문자로 기록되었다고 추청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3) 구약성경의 언어인 히브리어는 족장시대였던 주전 2000-1000년 사이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히브리어의 전신격인 언어는 있었지만(셈어, 우가릿어)

   (4) 셈어의 알파벳은 주전 1700년경에 이르러서야 아주 원시적인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함.(이 알파벳은 히브리어의 기초뿐 아니라 다른 셈어, 아람어, 모압어, 에돔어, 암몬어의 기초가 된다.) 따라서 성경의 이야기는 애초에 구전문학의 형태로 존재하다가 후대에 히브리어로 기록되었다고 봐야 한다. 

   (5) 히브리어가 존재했다는 성경 외적인 증거는 주전 1000년 이전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가장 오래된 히브리어 문서는 게제르 달력이다.(주전 10세기로 추정, 페니키아 어인지 히브리어인지 아직 논쟁의 여지가 있음. 19개의 단어가 전부) 가장 오래된 성경 필사본은 사해문서로 그 중에서도 빠른 것은 주전 2세기 정도다. 

   (6) 현재의 고고학적 자료만 가지고 설명한다면, 창세기는 처음에 구전문학의 형태로 존재했으나, 주전 1000년 이후 어떤 시점에 오늘날의 형태와 같은 문자로 기록되었다. 그리고 창세기는 고대 근동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다는 것이다.(이전부터 문화를 이루고 있었던 메소포타미아인들이 수백년동안 창조신화도 없이 단지 히브리 노예들의 창조신화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



4. 그렇다면 창세기가 왜 그토록 다른 고대근동의 문헌과 유사한가? 


  1) 창 11장의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 사람이고 그는 수메르 문화의 사람이었다.(여호수아 24:2) 아브라함이 들어갔던 가나안 땅도 기원을 설명하는 신화들이 풍성한 곳이었다. 

  2) 하나님은 처음 아브라함을 만났을 때, 그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인으로서의 아브라함이었다. 

  3)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자신은 고대 근동의 신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가르치려 했다. 이것이 이방인의 신화를 너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은 그 당시에 이런 메시지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라는 것이다.(바벨론의 신은 가치가 없다고 말하는 것)

  4) 정리하면, 하나님은 당시 고대 세계의 신화적 사고방식을 받아들였지만 거기에 머물지 않고 고대인의 신화를 변화시키셔서 이스라엘의 이야기가 참된 하나님에게 초점을 맞추도록 했다.


5. 고대근동 사람들의 세계인식


  1) 74쪽에 있는 그림(고대근동의 세계관)

  2) 그렇다고 창세기가 에쉬마 엘리쉬를 그대로 옮겨다고 볼 필요는 없다. 차이가 많다고 보는 학자들도 적지 않으니까. 저자가 말하는 것은 자료 사이의 상관성이 아니라, 개념적 상관관계다. 즉,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이웃 민족들과 공유했던 세계관을 바탕으로 쓰여졌다는 것은 말할 수 있다. 

  3) 창세기의 세계 인식은 현대 과학의 방식이 아니라, 고대 신화의 방식이었다는 것이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말하는 세계관과 신관은 당시 세계관의 입장에서 보면 급진적.

  5) 중요한 것은 창세기가 우리가 생각하는 우주의 기원에 얼마나 잘 부합하는가에 있지 않다. 

      예) 천지 창조의 <날> 문제, 홍수가 전 세계적인가? 국지적인가? 

     창세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인가? 그렇지 않은가를 위한 답을 주기 위해 기록됨.


 [정리] 하나님은 그 백성들의 세계로 들어가신다. 그분은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말씀하시고 역사하신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떤 특정한 시간과 공간에서 말씀하신다고 할 때의 의 미다. 또한 하나님은 낮아지셔서 인간의 문화를 수용하시고, 인간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들을 만나신다. 이것이 하나님이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신다는 것의 의미다. 


6. 계시인 성경은 독특해야 하는가? (그룹2에 대해서)


  1) 그룹 2의 문서들을 통해서 볼 때도 성경에 언급되는 율법이나 관습 등이 그 당시 주변 나라들과 독특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다른 윤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2) 독특한 것은 성경은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이스라엘이 선적인 공동체로 만들어져 가기 때문이다. 십계명의 1,2 계명은 당시 사회에서는 매우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인데, 그 이외의 내용에 대해서는 누구나 수용할 수 있는 상식적인 법들이라는 것이다. 

  3) 이스라엘에게 율법과 잠언이 있다는 것은 모든 법과 지혜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특별한 민족으로 만드시기 위해 일련의 행위 기준을 이스라엘에게 부과했다는 것이다. 


7. 좋은 역사서술은 반드시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일 수 있는가?(그룹3에 대해서)


  1) 텔 단 비문(다윗의 집)과 실로암 터널 비문(히스기야 왕)은 역사서술이 아니다. 이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중요한 증거일 뿐이다. 

  2) 메사 비문은 다르다. 이 비문에 오므리 왕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언급한 것도 있지만, 이 비문은 메사가 위대한 왕이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고대 근동의 전형적인 역사서술 방식)

  3) 성경에서도 열왕기의 역사서술과 역대기의 역사서술이 상당한 차이가 있다. 

  4) 역사적 사건 - 사건의 기록(문서전승 혹은 구두전승) - 사건을 기록하는 목적 / 상호연관성

  5) 역사서술은 해석작업이다. 역사 기록이 하나의 문학 작품처럼 보이는 이유는  역사가가 특수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역사적 사건을 서술하기 때문이다. 

  6)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그 역사 기록이 거짓이 도는 것은 아니다. 사무엘-열왕기서는 '우리는 무엇때문에 유배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서 기록된 역사서술이다. (우상숭배)

  7) 역대서에 대해서(히브리성경은 구약의 맨 마지막에 나온다.); 사무엘-열왕기서의 보충 자료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단독적인 목적을 가진 역사 서술로 봐야 한다. 역대기는 바베론 포로 생활에서 귀환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재조망한 역사서술이다. 

  8) 사무엘서와 역대기의 같은 말을 다르게 표현한 것에 대해서

   (1) 복음주의자: 두 번의 사건이 있었다고 가정. 자유주의자: 문서의 오류

   (2) 어느 것이 진짜 나단이 한 말이냐? 저자의 답은 모른다.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기록된 것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이 중요하고, 우리는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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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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