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기획 KBS10.110104.신년특별기획



[정리]


1. 2011년 북한의 위협. 연평도 포격, 핵시설 공개...

2.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안정적인 권력이양에 촛점을 맞추려고 하는 북한의 모습이지 실제적으로 전쟁을 일으키려는 의도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3. 북한은 한국에서의 지원이 끊김으로 공산주의 사회체제가 흔들리고 있다.

4. 미국은 북에 대해서 대화와 협조라는 측면으로 관계를 맺어왔지만, 이제는 한국 정부를 거쳐서 오도록 하는 방식으로 분위기가 바뀌었다. 

5. 그래서 북한은 중국과의 협력을 곤고히 하려고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 중국에게 경제적 종속관계가 될 것을 우려함.

6. 그래서 지금 북한은 매우 난처한 상황 속에 있다. 내부적으로는 권력 이양을 곤고히 하려고 하고, 외부적으로는 경제적 문제로 인해서 외부적인 원조를 받으려하나 미국은 태도를 바꾸었고, 중국은 오히려 부담이 된다.(경제적 종속관계가 될 것을). 

7. 이것이 지금 북한의 상황이다.(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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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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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정리]


1. 바울과 소스데네가 고린도에 있는 성도들에게 편지한다. 

2. 너희들은 모든 언변과 모든 지식에 풍족함.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이 끝까지 견고하게 할 것이다.

3. 난 너희들이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이 되기 원한다.(바울파,아볼로파,게바파,그리스도파)

  - 바울이 너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죽었느냐? 누구에게 세례를 받았느냐로 파당을 지어서도 안된다.

4. 십자가의 도라는 것이 지식을 추구하는 자에게는 미련해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은 오히려 미련함을 통해서(전도)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길 기뻐하셨다.

  - 너희들을 보라. 너희 중에 지혜로운 자가 어디 있느냐? 문벌 좋은 자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은 세상의 천한 것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고 하셨다. 그러니 자랑할게 없지 않느냐?



[해설]


1. 고린도교회의 문제 중 하나는 그들이 매우 말과 지식이 넘치는 지역의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2. 그런데 그 인간적인 지식의 넘침이 교회 안에서 분파를 만들어냈다. 즉 신앙의 파당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의 메시지를 인상깊게 들었고, 어떤 사람들은 에베소에서 사역하다가 온 아볼로의 성경강해가 인상적이었던 것이다. 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께 직접 사사받은 예루살렘 사도 베드로(게바)가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깝다고 보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더 나아가 '그리스도파'란 분파를 만들어 자신들이 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가까운 것으로 포장하기도 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언변도 좋고, 논리적으로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자들이니 교회 안에서 하나가 되기 보다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하는 쪽으로만 나아갔던 것 같다. 마치 인간적인 학파를 따지며, 누가 더 뛰어난가를 겨루는 세상의 학자들처럼 말이다. 


3. 바울은 이들의 말과 지식으로 세운 파당의 집을 허문다. 누가 너희들을 위해 십자가를 지셨는가? 바울도 아볼로도 게바도 아니다. 바로 '역사적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다는 그 사실을 전하기 위해서 부름받은 사람일 뿐이다. 

교회에 들어올 때 받은 세례는 누구의 이름으로 받은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포함한 삼위 하나님의 이름으로 받은 것이지 바울이나 아볼로나 게바의 이름이 들어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그들에게 집착하는가! 그들이 유명하고 탁월하기 때문인가? 


4. 우리가 논리적 설명에 설득해서 혹은 우리의 지적 능력이 다른 사람에 비해 뛰어나서 <복음과 생명>에 이르게 되었는가? 너희 중에 그런 사람이 있는가? 아니다. 하나님은 낮은 것으로 높은 것을 폐하시는 분인데, 낮은 우리가 우리의 낮음을 자랑할 수 있겠는가? 자랑할게 없다. 


[묵상]


1.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지만, 그리스도를 잘 소개하고 전하며 가르치는 누군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어떤 '인간 스승'이 존재하게 된다. 그 탁월한 스승은 자신의 이름으로 하나의 학파를 형성하게 된다.(그를 따르는 사람들에 의해서)

  - 그래서 나는 종종 강단에서 '칼빈'의 입장을 듣고, '박00' 목사님은 뭐라 말씀하셨는지에 대해 듣는다.


2. 이와 같은 현상을 부정할 수는 없다. 우리는 누군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해서 듣게 되고, 그 누군가가 탁월하게 잘 소개하는 사람이면 듣는 우리에게는 도움이 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누군가의 이름만 남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분들이 원했던 것은 자신을 통해 <그리스도>를 보도록 하기 위함이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의 많은 주옥같은 말과 글들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더 잘 드러나도록 하여야 하는 것이지, 그 표현 자체의 탁월성만이 남아서도 안되는 것이다. 

  * 인간 스승들을 다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불완전성을 인식하고 절대화하려는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그래야 서로들에게서 배울 것이 아닌가!


3. 결론적으로 내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는 매우 중요하다. 그러나 '그 누구'가 드러나는 방식으로, '그 누구의 권위'를 근거로 해서 성경을 가르치는 것 만큼 위험한 것은 없지 않은가 싶다. 아무리 바른 교리와 정통이라는 토대위에 있다고 해도 말이다. 


4. 주님이 말씀인 성경이 빠지고,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한 사람들의 입장(교리)만 남을 때 교회는 누구파, 누구파, 누구파로 나누어지게 되고 만다. 주님의 본질적인 말씀인 '사랑과 용납과 한 몸의식'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배운것이 없는 것처럼 말이다. 


5. 오늘날 이 시대는 고린도 지역처럼 말과 지식이 넘쳐나는 시대다. 그럼에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삶으로부터 더 멀어지는 것을 느낀다. 오히려 당연한 것이라 싶다. 지식과 말의 결여가 신앙을 퇴보시키는 것이 아니라, 말과 지식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우리의 '자기 자랑'이 고린도 교회처럼 신앙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6. 무지를 자랑할 것은 아니지만, 말과 지식을 자랑하는 것도 헛되다. 그리스도의 신앙에서는 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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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스페셜(2005.06.25), 한국 전쟁 영상기록_ 전쟁과 인간

  1. 6.25 전쟁의 시작부터 휴전까지의 기간을 다룸

  2. 평가보다는 사실 중심으로 구성됨

  3. 공산주의니 자유주의니 하는 이념의 입장보다는 그것과 무관한 시민의 입장에서의 선택(피난 혹은 남한과 북한의 점령에 따른 상황에서 생존을 위한 선택)을 중심으로 다룸.

  4. 민간의 무고한 희생을 다룸. 학도병의 죽음, 예비군(?)의 개죽음(?)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죽음.

  5. 서울이(전국이) 북한과 남한의 반복적인 정복으로 인한 무고한 희생(복수), 완전한 폐허로 변함.

  6. 남한의 무참한 사상피해보다 북쪽에서의 피해가 더욱 컸다. 남한 사망자 40만. 북한 150만.

    • 북한이 미국에 대해 가지는 반미적 감정을 어느정도 이해하게 됨.

    • 반면 피난생활 중 미군의 도우과 친근함은 커짐. 친미적 태도.


  7. 6.25년 서로에게 큰 상처, 분노를 만들고 우리는 여기서 자신의 이념을 증명해 보여주어야만 하는 것이 됨.
  8. ------------
    [나눔]
    1. 조선족: 한국인이죠? 한국말? 조선적이지만 중국사람이고, 조선말을 한다. 조선족의 입장에서 조국은 북한일수도, 남한일수도 있다. 
    2.  6.25 전쟁에 대한 이해가 다양하다. (남한, 중국, 미국 입장)
    3. 한국전쟁은 특별히 이념과 생존과 국제권력의 복잡한 상황, 상처와 복수의 복잡성이 역사 속에서 얽혀서 과연 자금 해결을 하ㄹ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김.
    4. 과거 한국전쟁을 경험한 세대는 문제를 풀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이후 세대는 풀어야 할 당위를 갖지 못함. 마치 북한에 대한 감정이 조선족이나 고려인에 대한 태도와 다르지 않지 않을까? 생각해보게 됨.
    5. 과연 답이 있는가 고민되지만, 그래도 고민이 없으면 안될것이다. 그래서 이런 시간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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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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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11] 내 손으로 너희에게 이렇게 큰 글자로 쓴 것을 보라 


바울이 직접 기록한 것과 <큰 글자>, 즉 분명하게 기록한 것을 보라 함으로 앞의 내용을 통해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하고 싶은 마음의 강도와 분명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12] 무릇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바울은 다른 복음을 말하는 자들을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라고 조롱하듯이 말했다. 그들은 할례를 통해 뭔가 외부적이고 가시적인 어떤 표식을 통해서 자신이 하나님의 백성임을 드러내고 싶어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율법 보다도 할례에 집중했던 것 같다. 바울이 말한 <순수 복음>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어떤 가시적인 표식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바울의 복음>이 뭔가 허전한 어떤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누구나 알 수 있고, 본인도 확인할 수 있는 <표식>을 원했다. 그것이 <할례>였던 것 같다. 


 <가시적 표식>이 우리에게 주는 안도감은 무엇인가? 그것은 <확인증>과 같은 것이다. 그 가시적 흔적을 통해서 자신의 내용(구원, 의)을 확인할 수 있는 안도감이다. 그러나 이것은 금새 그릇되게 된다. 내용에 본질을 두기 보다는 그 흔적과 표식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원과 의라는 내용과 그 표식으로서의 할례와의 연관성에 오해가 생기고 그로인해 '복음을 통한 하나님의 뜻'은 왜곡되기 시작한다. 


우리는 할례인 표식을 원한다. 그래야 분명하게 대답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는 할례까지 해야 복음의 본고장인 예루살렘 교회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같은 수준으로 인정받게 된다. 다른 설명이 필요하지 않다. 있어야 한다는 것은 더욱 그럴듯하고 좋아 보이지만, 없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매우 궁핍한 변명으로 보여질 수 있기 때문이다. 


[13] 할례를 받은 그들이라도 스스로 율법은 지키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 하는 것은 그들이 너희의 육체로 자랑하려 함이라 


<할례>를 주장하는 유대인들의 경우, 그들이 율법 전체를 따르는 사람으로서 그 중에 <할례>를 강조한 것이 아님을 바울은 말한다. 유대인들도 율법 전체를 따르는 일에는 온전하지 못했다. 그들이 요구했던 것은 <할례>를 중심으로 한 몇 가지 사항 뿐이었다. 이들이 원한 것은 <율법> 전체라기 보다는 그 중에서 <육체적 자랑>을 할 수 있는 어떤 것에 대한 것 뿐이었다. 


이들은 종교적인 형식과 희생을 통해서 자신의 종교적 헌신과 흔적을 보여주길 원했던 것이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다. 기도든 금식이든 선행이든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잊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마 6장)


[14]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15]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순수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입장에서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자랑할 것>을 찾는다면 바울 자신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 여기서 바울이 <십자가 표식>을 자랑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외부적인 표식으로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부정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 대속의 사역, 즉 하나님이 죄인들을 위해서 해주신 은혜로은 사역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과 세상을 대하여 내가 못박혔다는 것은 <순수 복음 안에서> 내가 세상을 향해 자랑할 수 있는 것이 전혀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세상이 우리를 향해서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한다.(나나 세상 모두 복음 안에서는 아무런 자랑을 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하나님이 실천하신 것이다. 세상은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였다....)


 결론적으로 <순수 복음> 안에서 할례를 행하는 것이나, 무할례나 아무것도 아니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다. 정작 중요한 것은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이다. 새롭게 거듭나는 것, 실제적인 생명이 중요한 것이다. 중요한 것은 <생명>인 것이다. 겁데기의 흔적이 아니라, 내재적인 생명을 얻는 것이 <순수 복음>의 핵심이다. 



 [16]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17] 이 후로는 누구든지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18]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아멘


<다른 복음>은 <순수 복음>을 위해 부르심을 받고 그 일에 헌신해온 바울의 심령을 괴롭게 하는 것이었다. 전혀 다른 이야기가 아니라, 비슷한 이야기같은데 다른 방식으로 복음을 왜곡하였기 때문에 자신이 해산의 수고로 낳은 갈라디아 성도들을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바울을 공격했다. <할례>를 통해 육체의 흔적이 필수적임을 강조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런 흔적이라면, 예수의 흔적(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이 거치고 간 흔적)으로 충분함을 고백한다. 


다른 복음으로 미혹할찌라도, 당황하지 말고 <순수 복음>만 붙잡으면 끝-



 첨언, <순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 안에서 다른 부차적인 노력과 행위(할례와 절기 지킴 등)가 필수적이 아님을 강조하는 것을 강조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다루고 있는 <골로새서>의 연구를 통해 보완되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다음 성경공부는 <골로새서>로 가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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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야고보서를 통해서 본, 믿음과 율법, 믿음과 행함간의 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 율법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


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믿음>이란 <율법을 행함으로 얻으려하는 자기 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의 <믿음>이다. 아주 단순화 시켜서 말하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라는 의미로서의 <믿음>이다. 이 때, 믿음의 반대말은 행함이 아니라, 자기 의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얻은 성도가 자랑할 것이 없음을 누차 강조해서 말한다. 


2. 행함과의 관계 속에서의 믿음


주로 야고보서 2장에 언급되고 있는 믿음이다. 여기서의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이란, 지식과 행함이 함께 통합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야고보가 말하는 진정한 믿음의 반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즉 지식으로서만의 믿음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3. 정리하면


성경에서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엄밀한 의미는 서로 다르다고 봐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반대말은 <율법>이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반대말은 <행함은 없는 지식>이다. 


참된 믿음이란, 자신이 알고 신뢰한 것대로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행함이 있어야 하지만(야고보의 주장) 그 행함에는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는 것(바울의 입장)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한 구원을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복음에는 율법적 삶에 대한 권면을 부정하지 않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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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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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해설]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은혜와 사랑, 자비와 구제를 힘써야 하는 것이 교회이지만 교회는 구제단체는 아니다. 교회가 구제하고 도와야 하는 대상은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개인의 병과 환경 그리고 제도적인 문제로 인해 개선하기 어려운 대상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가 해야할 혹은 할 수 있는 복지의 영역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제도적으로 도움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찾아 도와야 하는 것이 교회의 구제 사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구제하기 이전에 교회는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교회가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보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개인의 짐을 스스로가 져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책임져야 할 대상의 가족은 먼저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서로의 짐을 져주어야 한다.(갈 6:2)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 말씀은 가르침을 주는 대상을 존중하고 잘 대접하도록 힘쓰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단순히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대접을 잘 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그 중요함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이 권면은 더 나아가서 '가르치는 자'를 선정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전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참석했던 한 성도는 집회를 인도했던 부흥사에 대해서 큰 실망을 했다. '우리를 어떻게 보고 저런 분을 모셨는가?'에 대해서 분개해하셨다.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교사를 선택할 때도, 또 가르침을 받는 자를 대할 때에도 매우 신중하고 또 그에 대한 대우를 함으로서 계속해서 그와 같은 좋은 가르침을 기대하로 바란다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어느 교회는 '가르치는 자'를 고용(?)하듯 데리고 와서는 함부로 하려고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가르치는 자'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종'을 데리고 온 것에 불과하다. 그 교회의 수준이 어찌 될지는 뻔한 것이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사람들의 행위는 그 행한대로 대우를 받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은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있다.(갈 6:7) 육체의 소욕을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반면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된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한 육체와 성령의 대조를 다시 한 번 언급해 준다. 


갈 6:1-6까지의 여러가지 권면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우리 육체의 소욕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썩어질 것 밖에는 거둘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쉽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때가 이르게 되어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때가 되어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듯이, 우리 인생에도 때가 되면 결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묵상]


1. 특별법을 가르치기 전에 일반법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복음이라는 특별법이 선포되기 전에 우리는 윤리라는 일반법이 선포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율법이 온 이후에 복음이 온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마땅히 해야할 윤리를 배우고 그 다음에 관용과 자비인 복음을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서로의 짐을 져주기 전에 우리는 자기의 짐을 자기가 지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이 져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복음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때로는 복음이 사람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게 된다. 


값싼 복음에 물든 한국 기독교가 바로 그 지경에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한다. 특별법 이전에 일반법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2.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의 일을 자신이 하는 것(책임감)도,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는 것(돌아봄, 섬김)도 서로 종노릇 하는 것도 모두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 공동체 있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섬김'을 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성도들이 많을 때 교회 공동체는 성숙함으로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특별법을 가르치기 전에 보편적인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보편적인 법을 모른채, 특별법만 강조하게 되면 이상하게 되는 것처럼 '은혜라는 측면에서의 특별법'만 가르친 것이 오늘 많은 한국 교회 성도를 방자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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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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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해설]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하고 있는 권면은 개인적인 경건을 위한 권면은 아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에 벌어지는 일들에 대한 권면이다. 6장 1절이 '한 사람의 범죄'한 사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교회 공동체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권면하고, 6장 2절에서는 성도 중 누가 자신의 짐을 지는 것이 힘겨워할 경우 그 짐을 서로 져주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교회는 지상의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이지만, 여전히 '죄'가 있고, '연약함'이 있다. 죄의 문제를 다룰 때, 그 죄를 범한 자를 온유한 심정으로 바로 잡는 것이 우선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된다. 그 죄가 드러나게 된 <공동체>의 문제도 개선되어야 한다. 죄는 그냥 발생하지 않는다. 그와 같은 토양이 마련되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자란 것이다. 그와 같은 토양이 형성되도록 방치한 공동체도 문제가 없지는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이 교회 공동체 내에서 죄를 다루는 방식이다. 


또 다른 문제는 <연약한 지체>에 대한 교회 성도들의 태도다. 그들의 연약함에 대해서 공동체가 함께 감당해 주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각자 개인의 짐을 개인에게만 두어서는 안된다. 기본적인 원칙은 자기의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다.(각자 자기의 일을 돌아보는 것이 기본이다.) 그러나 개인의 역량이 부족할 수도 있고, 개인의 주변 환경이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운 상황이 될 수도 있다. 그와 같을 때, 교회 공동체는 그 사람의 연약함을 보고(게으름이 아니다.) 남의 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 짐을 함께 져주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이다. 우리는 서로 한 몸을 이룬 지체다. 지체가 지체를 돌아보는 것이 필요하다. 강한 지체가 약한 지체의 부족함을 보완하는 것은 한 몸으로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 그래야 한 몸이라 말할 수 있고, 한 몸은 당연히 그렇게 한다.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자랑하지 말고 교만하지 말라는 바울의 권면이다. 자랑할 만한 것이 있을 것 같을 때에라도 그것이 자기 자신에게만 그렇다고 생각해야지... 다른 사람들에게 모두 자랑할 만큼 스스로 높이지를 말라는 것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일을 경계해야 한다. 주님도 사람들에게 상석에 앉지 말고, 낮은 곳에 앉으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이 높여서 자리를 옮겨주면 모르지만, 괜히 높은 곳에 먼저 앉다가 나중에 낮은 자리로 쫓겨나게 되면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셨다. 


연약한 자의 짐을 많이 져주었다고 할찌라도 그것이 자랑이 되지 못하도록 늘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것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강한 자일수록 자신의 일을 늘 살피어, 겸손해야 함을 바울은 권면하고 있다.


[묵상] 


1. 바울의 권면은 개인 경건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 안에서 성도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다. 


2. 죄를 범한 자에게 대해서는 바로잡도록 하고, 공동체의 경계를 삼아야 한다. 


3. 연약한 자에 대해서는 서로 짐을 져주는 관계를 맺어야 한다. 남의 일처럼 여겨서는 안된다. 


4. 능력있어서 자신의 일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일까지 섬긴 자는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교회 공동체는 강한 자도 있고 약한 자도 있다. 모든 사람을 공평케 만드는 곳이 아니다.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약해도 절망할 필요가 없고, 강해도 자만할 수 없는 곳이어야 한다. 약한 자도 함께 존중받으며 공존할 수 있는 공동체여야 한다. 강한 자의 능력은 섬기기 위한 능력으로 인식되어야 하는 곳이 교회 공동체다. 

교회 공동체는 심지어 '죄'가 일어나는 곳이지만, 그 죄를 일으킨 사람을 '옳게 세우는 곳'이며 심지어 그 한 사람의 죄로 인해 교회 전체가 새롭게 갱신되는 곳이다. 교회를 이런 공동체여야 하는 것이다. 



지상의 교회 공동체에 죄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한 것도 없습니다. 또한 지상의 교회를 세상의 어떤 공동체보자 강한 공동체로 만들려고하는 시도도 위태롭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교회는 '죄'와 '연약함'을 부정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세상의 여느 공동체와 마찬가지로 '죄'와 '연약함'으로 불완전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선'을 만들어 내는 공동체가 바로 이 땅의 교회 공동체가 지향해야 하는 목표입니다. 한 사람의 죄를 통해 공동체의 자정능력을 키우고, 한 사람의 연약함이 공동체의 한 몸 됨을 드러냄으로 불완전하지만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공동체가 바로 교회입니다. 


죄와 연약함을 부정함으로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려는 것이 아니라, 죄와 연약함을 거쳐서 '하나님 나라'에 이르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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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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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3]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 [4]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해설]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5장에서는 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라고 하고 그것이 성령을 따르는 삶이라고 말했다. 대조적으로 자신을 중심으로 자기 자신의 소욕에만 충실한 삶은 육신의 일이라고 했다. 즉 자신의 소욕을 중심으로 살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순수 복음>을 받은 성도의 마땅한 삶인 것이다. 


이제 6장에서는 좀 더 구체적인 이야기로 들어간다. 만일 교회 공동체 안에서 어떤 사람에 대해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의 상황이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권면이다. 


첫째, 신령한 성도들은 온유한 심령으로

둘째,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


먼저 확인할 것은 바로 잡아야 하는 대상의 범죄가 명확하게 드러난 경우에 해당된다. 따라서 범죄가 명확하게 드러난 것이 아닌 상태에서 섣불리 바로 잡으려고 성급하게 접근하다가 문제가 생길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람의 잘잘못을 공정하게 판단해야 할 공식적인 조직을 형성해서 그곳의 판단을 근거로 그 다음를 진행해야 한다. 위의 바울의 권면은 공식적인 기관에서 <범죄가 있음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경우>에 한해서 적용해야 할 내용이다. 


그렇게 범죄가 드러났을 때, 교회는 그러한 자를 바로 잡아야 한다. 이것이 원칙이다. 용서와 관용이라는 덕목을 먼저 들이댈 것이 아니다. 바로잡아야 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범죄한 자는 자신의 죄를 심각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고, 교회의 성도들 또한 그 죄의 심각성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래야 교회는 죄에 대해서 정결함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검찰과 같은 입장에서가 아니라, 부모의 입장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그것이 <온유한 심령으로>라는 말이 가지는 의미일 것이다. 엄중한 책임을 묻지만, 단순히 책임을 묻기 위해서가 아니라 교정하고 바르게 하기 위하는 따듯한 마음으로 해야 함을 말한다. (절대로 사적 감정으로 봐주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그 다음 교회 공동체는 <그 범죄 사건>을 계기로 어떤 반응을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바울은 말한다. 


첫째로 너 자신을 살펴보아

둘때로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를 찍어 내는 방식으로 <범죄가 드러난 사건>을 마무리하도록 하지 않았다. 그 범죄 사건을 통해서 공동체 전체가 영향을 받아야 한다고 보았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살펴보는 계기>를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 나도 그와 같은 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연약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살피고 겸비해야 함을 말한다. 


마치 교회 안에서 건강하던 한 권사님이 암에 걸리게 되면, 그 비슷한 또래의 여성 분들이 놀라고 안타까워하면서 대부분 '건강검진'을 하듯 혹은 암보험을 들듯 말이다. 아니 그것을 계기로 자신이 먹는 음식과 생활습관을 새롭게 할 것을 결심하듯 말이다. 한 사람의 질병은 안타까운 일이지만, 그 병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오히려 공동체가 자신의 건강상태를 돌아보고, 안일함을 돌아보고 건강한 방향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계기가 되어야 하듯이 말이다. 



[묵상]


전국민을 애도하도록 만든 '세월호 참사'. 이 비극적인 참사로 인해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다. 사고도 사고지만, 그 사고를 수습하고 해결해가는 과정 속에서 보여준 국가재난시스템의 문제점이 더욱 명확하게 드러났다. 한마디로 총체적인 부실이다. 수많은 생명을 잃은 아픔도 크고, 무능하며 무책임한 정부를 보는 것도 큰 고통이다. 


1. 이 사고가 잃어나게 된 원인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밝혀야 한다. 그리고 반드시 바로 잡아야 한다.

2. 그리고 그로 인해 우리 자신을 살펴야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안일함과 죄를 살펴야 한다. 우리도 세월호의 선장과 직원들과 다르지 않으며, 선박회사의 불법적 태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3. 더 나아가 우리 개인을 넘어, 이 나라 전체의 시스템과 조직 그리고 태도에 변화가 필요하다. 


바울은 한 사람의 범죄에 대한 이야기를 다루면서, 그 범죄가 드러난 사람을 바로 잡고 더불어 그 범죄 사건을 통해서 공동체가 자신을 돌아보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말한다. 


[6:1]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개인적인 성찰만을 의미하지는 않으리라 생각한다. 공동체 전체가 그 안에서 일어난 '사건'을 통해서 뭔가 자각을 하는 기회를 삼아야 한다고 보는 것 같다. 한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는 큰 희생을 치르고 있고, 전 국가적인 아픔을 느끼고 있다. 그런데 이 사건을 통해서 잘못한 개인 몇 명을 처벌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될 것이다. 잘못의 시작은 그들로부터 된 것이지만, 그것을 통해 우리는 이 나라 전체가 곳곳에 큰 문제(구조적, 제도적)가 있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한 두명의 희생으로는 이렇게까지 밝혀지지 않았을 것이다. 대충 얼버무렸을 것이고, 우리도 그런줄 알았을 것이다. 그래서...그래서 이렇게 큰 희생을 치르게 되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이 나라 관료들과 조직은 이 정도의 희생이 아니고서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어쩌면 이들의 무감각을 지적하여 변화시키기 위해 이와 같은 큰 희생이 필요했는지 모를 일이다. 그만큼 이 나라를 부패와 관행이 팽배한 것이다. 


이 무고한 희생자들은 이 일을 위해서 희생을 자초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들의 큰 희생이 이 나라의 썩고 부패한 곳을 들춰내고 비추었다. 그리고 전 국민은 그것을 직면했다. 그렇다면 이 젊은 희생자들의  죽음이 무의미한 것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사건을 통해서 드러난 국가적 제도와 구조를 이번 기회에 뜯어 고쳐야 한다. 그래야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된다. 계속해서 이와 같은 관행이 지속되는 한 제 2, 제3의 세월호 사건을 일어날 것이다. 


이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게 하는 일, 한 두사람의 죄를 범한 사람을 처벌하는 것에서 끝나서는 안된다. 이런 일을 만들어내는 구조적인 문제들을 뜯어 고쳐야 한다. 그래야 조금이나마 이들의 희생이 역사속에서 의미를 가지게 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와 같은 의미를 가지도록 만들어가야 한다. 살아남은 자들이 그와 같은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희생을 헛되게 하고 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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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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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해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가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18]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바울의 권면대로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 의미를 살펴보자.


1. 바울이 율법의 완성인 <사랑으로서 서로 종노릇 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면서,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한다. 이는 서로 별개의 권면이라기 보다는 서로 연관되어 있는 권면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라는 것은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는 삶>과 연관된 삶이다. 


2. 바울은 <성령을 따라 행하라>고 권면하면서도 동시에 그렇게 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라고 말한다. 이는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과 <육체의 욕심을 이루는 삶>이 대조됨을 말한다. 즉,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은 육체의 욕심을 쫓지 않는 삶과 관련되어있다고 봐야 한다. 


그래서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른다고 바울은 말한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단순한 대조라기 보다 적극적으로 서로를 대적하는 관계로까지 대조시킴으로서 하나를 택하면 다른 하나는 택할 수 없는 것임을 말한다.  


3.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다고 바울은 말한다.(18절)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자유를 얻게 되는 것은 <순수 복음>이 주고 있는 삶이다. 자가의 의를 근거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와 은혜를 근거로 살아가는 삶이 <율법 아래에 있지 않는 삶>이고 그것이 바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임을 알수 있다. 


 정리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은, 구원을 위해 율법적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삶(의무 혹은 정죄)에서 자유로운 삶이지만,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 사는 삶이 아니라 사랑의 종노릇 하는 자리로 자신을 드리도록 하는 삶이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삶인 것이다. 



[19]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20]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21]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육체의 일이란 무엇인가? 구체적인 항목들이 언급되어 있지만 언급된 내용만이 전부는 아니다. 육체의 일이란 <육체의 욕심을 따르는 일>(16절)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의 일이, 육체와 관련된 일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그와 같은 생각은 영육 이원론적 사고방식이다.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자 한, 육체의 일이란 육체의 욕심(즉 자신의 욕구에만 충실한 행동을 하는 삶)을 따라 사는 삶인 것이다. 그것은 성령을 거스르는 것이다.(17절) 그렇다면 성령을 따라 산다는 것은 무엇인지 자연스럽게 알 수 있다. 그것은 <육체의 욕심, 소욕>대로 살지 않는 삶을 말한다. 본능적, 동물적 욕구와 생각을 하나님의 말씀과 생각으로 다스리며 사는 삶이 바로 성령을 따라 행하는 삶인 것이다. 


 [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르나니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면서, 자기 육체의 소욕을 쫓는 것에 혈안이 되어 사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구원의 복음을 <이용>했기 때문이다. '순수 복음'을 자신의 육체적 소욕을 정당화하는데 이용한 사람이지 참된 신앙을 가진 사람은 아닌 것이다. 



[22]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23]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24]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25]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26]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성령의 열매란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서 나타나는 열매를 말한다. 그 내용들이 모두 동물적 본능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서 나타날 수 없는 것들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성령의 열매를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백성다운 삶(서로 사랑으로 종노릇하는 삶)으로 말미암아 맺게 되는 열매인 것이다.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다는 것은 <순수 복음>을 올바로 믿고 성령의 다스림을 받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이와 같은 성령의 열매가 맺혀지게 됨을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따라서 <순수 복음>을 믿고 하나님을 따르는 자는 <육체의 소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다. 예수님이 자신의 육체를 십자가에 못 박히셨듯이(그의 인간적인 욕망도 함께 못 박혔듯이), 예수를 믿고 따르는 우리도 그와 같은 존재여야 함을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헛된 영광을 구하거나 서로를 노엽게 하거나 투기하는 식의 절제되지 않은 육체적 소욕으로 말미암은 행위들을 삼가해야 한다. 


[묵상]


1. 성령을 따라 행한다는 것의 의미


2. 육체를 따라 산다는 것의 의미


3. 우리가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것의 의미


4. 순수 복음 안에서 '거룩한 삶'의 위치(율법적 의의 근거는 아니지만,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의 삶)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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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해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바울의 복음은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바울의 논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란 말만 떼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 5:1에서 바울의 언급한 '자유'도 마찬가지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잘 못 이해해서 '방종'으로 나아갔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말할 때, 그 자유는 단순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율법 혹은 마음에 새긴 율법(양심)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법,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의'로 구원을 이루시는 시대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법이 드러나면서, 이전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전환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다 보니,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이 '복음이 말한 자유'를 자기들의 방탕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오용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의 핵심은 교리적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3,4장)를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완전한 복음의 의미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이론, 3,4장)와 적용(실천, 5,6장)으로 구분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듯 하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총체적인 것으로, <율법의 종으로부터의 자유와 사랑의 종으로의 부르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육체의 정욕을 합리화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됨을 바로 이어서 지적한다.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4절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말한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율법 자체'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고 본다. 바울은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고 권면함으로서 오히려 참된 복음은 '율법의 완성,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으로 인해서 '방종'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복음을 자신의 정욕을 위한 근거로 받아들인 사람이지 '순수한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또한 복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순수 복음'이 왜곡될 수 있는 두 가지 변종을 보여준다. 하나는 '순수 복음'이 사람의 생각에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것이다.(행위에 대한 요소가 하나도 없으므로... 허전하다.) 또 다른 하나는 '순수 복음'을 근거로 자기의 욕구(정욕)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두가지 모두를 경고한다. '순수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할례)하든지, 아니면 용도에 맞지 않게 오용(방종)하려고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 5:19-21)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갈라디아서 안에 심각한 논쟁이나 분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갈등은 어느 정도의 도를 넘어 서로 '물고 먹는', 즉 죽자고 싸우는 형국이 되었을 정도로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죽자 살자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피차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사기 19-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의 악행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11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킬 뻔했다. 서로를 견제하고 권면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지만, 형제란 서로 죽여서는 안되는 관계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안되는 것처럼, 11개 지파는 한 개의 지파를 전멸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죽자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어야 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싸워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다툼에 대해서 아직 언급하지 않았지만, 심각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가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서로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종이 될 것에 대해 권면하면서 말이다. 



[묵상]


해설을 쓰는 가운데 중간 중간 묵상의 내용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참고자료. 

'자유'란 오늘날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말이다. 자유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다양한 사람이 자유를 주창하고 권한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민족 독립'을 얻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가 있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자유다. 자유 무역, 관세 철폐를 믿는 경제학자가 있다. 중앙 통제가 자유 기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하는 자본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자유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가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에 처음 선언한 네 가지 자유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나 말할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자유, 어디서나 궁핍하지 않을 자유, 어디서나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다.

  - 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주석, 173쪽.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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