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북동 91번지의원: 최명은 원장을 만나다.

글: 김수억 간사

 * 본 내용은 2014년 4월 2일 인터뷰를 근거로 작성한 글입니다. 죠이에서 발간하는 '더 죠이'에는 내용을 축약하여 5월에 발간될 예정입니다.(이 글은 최 원장과 함께 있었던 3시간 반의 나눔과 만남, 상황 속에서 일어난 생각을 본인이 정리한 글)

 * 이미 언론에서 취재한 내용: <동아일보>, <뉴스앤죠이> 이와 같은 병원을 열게된 배경과 원장의 철학 등에 관해서는 이미 취재된 기사를 참고하시라.





한 죠이어의 페이스북에서 독특한 병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성북동 91번지의원". 가정집을 개조해서 병원을 만들었는데, 공간을 가정의 편안함을 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병원이라는 것이 독특하다 생각했다. '병원은 사실 가고싶어서 가는 곳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가는 곳,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일 수 밖에 없는 곳인데 병원이 가정집의 옷을 입었다고 평안한 공간이 될 수있겠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 만큼은 신선해 주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글 아래에 '그 의사 분이 죠이어'라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 궁금해졌다. 결국 '더 죠이'에서 "성북동 91번지의원"의 최명은 원장의 인터뷰를 싣기로 결정했다. 최명은 원장이 서울대 죠이 활동을 할 때 담당 간사였던 정희원 간사와 '더 죠이' 편집국장이신 장정애 국장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4월 2일 화창한 봄 날에 성북동을 향했다. 나는 기사에 실을 내용을 위해서 어떤 내용의 질문을 할 것인가를 정리해서 갔다. 


#1 의원에 들어서는 첫 느낌



작고 이쁘게 쓴 "성북동 91번지의원"이라는 간판(?)이 달린 병원은, 목련 나무가 있으며 커다란 개집이 있는 마당을 둔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2층에서 개 한 마리가 짖었고(이름은 '봄'이란다. 또 다른 개 '가을'이도 있다고 한다.) 

병원이 일반주택을 개조한 것이기에 주변은 모두 일반 주택이었다. 병원 바로 옆에 '피정의 집'이 있었고 큰 길을 건너면 '덕수 교회'라는 크고 오래 된 교회도 있었기에 이 병원도 뭔가 '신성한 어떤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우리 옆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같이 있었다. 혹 환자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 분도 신문에서 이 의원 이야기를 보고 지나가는 길에 들려보고 싶었는데 한 무리가 병원 안으로 들어가니 따라 들어오신 것이다. 그렇게 들어오신 아주머니는 우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30-40분을 이야기 하시다가 일어나셨다. 앞에 있는 덕수 교회 문화교실에서 아이들 미술치료 수업을 하시는 분인데, 혹시 이 '특별한' 병원에서 도울 일이 없을까 물어보시기 위해서 들렸다고 하셨다.

그렇게 '성북동91번지의원'은 지나가던 동네 주민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선뜻 기부하고픈 마음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이곳은 우리 안에 뭍혀있던 '선함'이 고개를 내밀수 있도록 따듯한 온기를 주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




#2 준비한 질문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수다만...

최명은 원장은 우리에게 손수내린 커피를 대접해 주었고, 우리가 둘러 앉은 자리로 볓이 따듯하게 들어왔기에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 꽃을 피웠으나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기사 작성을 위해 온 자리였고, 그 내용을 최 원장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했기에 화기애애한 수다가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수다란 원래 마침표가 없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세 여성분의 대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나는 찾지 못했다. 간신히 조심스럽게 치고 들어가면, 어느새 다른 주제로 흘러흘러... 결국 난 무능한 기자임이 드러났고 이야기 꽃은 더욱 만개했다. 그리고 이내 나도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속의 목적을 위해 왔건만, 세속의 목적은 간곳 없고 따듯한 봄 꽃같은 사람 냄새만 가득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런 분위기에서 점심도 먹었고, 다시 돌아와 다시 커피 한잔을 마셨다. 



최명은 원장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삶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젊지만 많은 생각과 경험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더불어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했다. 그래... 모름지기 의사란 사람의 몸을 다루는 것이고, 사람의 몸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일텐데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스토리를 모르고서야 어찌 그 몸을 고친다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치유란, 환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이라는 최명은 원장의 철학이 말로가 아니라 분위기와 상황으로 내게 전달되었다. 설명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들은 설명보다는 깨달아지는 내용이 더 컸는데 그것은 말이 아니라 영으로 전해졌다고 하면 '오버'인가? 



# 3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오전 11시부터 점심 먹고 2시 반에 이르는 시각까지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지만, 약간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왜? 환자가 오시지 않지?', '병원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때 즈음 할머니 한 분이 의원 안으로 들어오셨다. 최명은 원장은 가운을 입고 나오더니 할머니를 모시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병원에 와 있는 3시간 반동안 처음 진료하는 모습을 봤다. 

  _ 사실은 그랬다. 작년(2013년) 11월에 오픈해서 지금까지 방문한 환자가 4백여명 정도란다. 지금까지는 건물 세를 내면 딱 떨어진다고 한다. 개인 생활은 대학원에서 조교를 하면서 받는 것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앞으로 방법을 찾아가야 할 부분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조금 있으니 왠 젊은 엄마가 6개월된 아이를 안고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이 곳이 매우 익숙해 보였고 진료를 목적으로 온 것 같지도 않았다. 진료실에서 진료를 마친 최 원장은 그 아이 엄마와 인사를 하고 그 엄마의 아이를 안는다. 그리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정말 동네 젊은 엄마는 아이 데리고 놀러왔으며, 최 원장은 그 아이를 안아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 원장이 안고 있는 아이의 엄마는 최 원장 뒤에 있어서 사진에 포착되지는 못했다.]


 _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동네 주민과 함께 어우러진 병원과 의사의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저 오지의 선교현장에서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있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을 좀 더 순수하게, 욕심을 좀 덜부리며 피곤하지만 본질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곳이 천국이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래, 여기가 천국이라면 이곳은 진정 '신성한 곳'임이 분명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들은 이야기다. 그 날 저녁에 옆에 계신 신부님(수녀님)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고... 

나도 가족이 아파서, 의사의 신세를 많이 진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가깝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인식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마치 예수님처럼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그리고 장차 아플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생활하는 의사를 본 것이다. 이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 아닐까? 

난 성북동, 그 동네는 처음 가봤지만, 이 동네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 여기가 병원이었지? 그제서야 병원임을 깨닫는 병원이다]


[병원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탁자와 피아노, 첼로... 거실인지 카페인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피아노 위에 있는 악보는 죠이 선교회의 자랑스러운 '많은 물소리'찬양집]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손수 커피를 갈아서 내려주시려는 최 원장. 의사인지 바리스타인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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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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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잉여짓을 하는 한심한 대학생들(?)
- 쓸데없는 일에 열정을 바치는 학생
- 무엇을 하는데 열정을 써야할지 모르는 학생들(?)

그러나 잉여는 가장 순순한 열정의 산물이다. 대학생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쏟아부은 열정,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잉여면 어떤가?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로 보람이 된다.

그러나 열정이 냉소로 될 때가 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달려왔던 대학생들은 좀 더 깊게 들어갈수록 오히려 벽을 경험하고 한계를 경험한다. 꺽인 열정은 냉소로 변한다.
- 열정을 부담스러워하는 관료주의,

열정을 착취하는 자본주의로 인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으로 젊은 대학생들의 열정을 착취한다. 오히려 그들은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열정을 발현하고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중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열정이 삽질처럼 보여질 수 있고, 사회는 그렇게 우리를 이용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얻을 것을 얻어야 한다.



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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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해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때가 차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심으로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도 너희들을 아는데 어떻게 다시 옛날의 방식(초등교사인 율법에게 종노릇하던 시절, 이 시절을 거쳐서 이제 자유의 아들이 되게 하셨는데...)으로 돌아가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지금 너희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예수를 믿고 의롭게 되는 방식으로 지키려 하니... 지금까지 너희를 향해 해온 수고가 모두 헛되게 될까 두렵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해서 책망조로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개인적이 이야기를 진행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 이 말은 자신이 전한 복음 속에서 유대인의 문화와 가치관은 배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순수한 복음과 유대인의 문화와 가치를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에 불필요한 유대문화적 요소들을 가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울이 복음과 문화적 요소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들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13절부터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들과 바울 간의 개인적인 경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대략적인 분위기만 파악하는 것으로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이르렀을 때 육체의 약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지역의 풍토병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처지에 있는 바울을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인들은 불쌍히 여겨졌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보잘것 없고 초라한 상황이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마치 천사를 대하듯 따듯하게 영접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애정은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줄듯 한 것'이었다. 



 즉,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와의 관계는 이와 같은 정서적 친밀관계가 기본으로 전제된 것이다. 그런 사역지에 대한 바울의 애착이 얼마나 컸겠는가? 또한 갈라디아 교회들이 보여 준 바울에 대한 애정은 얼마나 남달랐는가? 그런데 그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인해 바울에 대해서 오해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치우져 버리게 되는 것 같은 상황이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갈라디아서 중간 중간에 바울의 흥분하고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인간적인 바울의 심정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이런 관계속에서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속히 넘어가게 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바울은 감정적으로 흔들렸을 것이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적인 권면과 책망>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인해 <바울의 사도성>과 <바울의 복음의 권위>에 대해 열등하게 생각했던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의 충고를 우습게 여기고, '지가 뭔데?'라는 식으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인해 바울은 더 큰 감정적 상처를 입게 되었던 것 같다.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는 이 표현은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들간의 이런 감정적 상태를 보여준다 하겠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열심은 너희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그릇된 열심에 불과하다. 좋은 일에 열심이라면 얼마든지 좋지만, 그들의 열심에 속지 말라. 그들의 열심은 너희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이었던 것 같다. 열심이라고 다 좋게 볼 수 많은 없는 것이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결국 바울의 마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것이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구절 속에 바울의 심정이 담겨져있다. 말로 권면으로 이들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바울은 느꼈다. 자신이 처음에 보냈던 진심어린 충고에 대한 갈라디아 교회들의 반응을 보고 바울은 '벽'을 느낀 것이다.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낙심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거의 죽게 되어 성 밖으로 버려졌을 때, 다시 일어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행 14장) 감정적 돌팔매를 당하고 나서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바울은 감정적으로는 <언성을 높일 만큼> 흥분되어 있었으나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의지를 드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묵상]


1. 바울은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느 누구보다 믿고 확신했지만, 그러나 숙명주의자는 아니었다. 잘못되어 간다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바로잡으려 했다. 편지를 썼고, 충고를 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에 머물러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문제가 터지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의 이와 같은 감정들이 모두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좋다. 바울도 사람이고 바울도 감정적 격정이 있었던 사람이며 바울도 언성이 높아지는 사람이다. 더불어 바울조차도 사역의 허술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음도 알수 있다. 바울은 감동도 잘 했고, 배신감도 느꼈으며 원수와 같은 관계로 인식될 만큼 감정의 요동이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좀 더 이성적으로 비춰질 수 있을지 모르나, 감정없는 로봇처럼 비인격적이다. 사람은 감정이 뭍어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감정적인 사람(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감정이 매마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도 별로 없다. 사람을 상대하는 목회자 혹은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감정을 숨기려 해서도 안된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일 수는 있었도 상대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질감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상대방을 가장 멀리 내쫓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오도록 하기도 한다. 



2. 바울은 매우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사람이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감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큰 홍역을 알았다. 그래서 절망도 했을 것고 사역적인 허무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시 자신을 추스린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감정은 큰 손상을 입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사역을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파악하고 그것을 하기로 결단한다. 


다시 해산하는 수고. 이 말은 바울에게 부모의 심정과 의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수 없이 많이 감정적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는 없다. 바울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다시 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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