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이 회심후 예루살렘에 두 번 올라간 것으로 갈라디아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아 기간 3년 후 한번, 그리고 14년 후 두 번째 올라갑니다. 이 때 사도들과의 악수사건이 있었지요.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행 9장 끝부분에 한 번 나옵니다.(첫번째 올라간 사건이라 볼 수 있겠죠.) 그리고 두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행 11:27-30이 나옵니다.(예루살렘 교회를 부조하기 위해서 올라갑니다.)_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11장이 갈라디아서 바울이 14년 후에 올라간 사건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사도행전 15장 공의회 결과와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온 사건과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요. 당연히 갈 2장의 악수사건이 사도행전 15장 사건 이전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이 경우 갈 2장과 행 15장의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에 강조를 두겠지요.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로 주후 49년 이전으로 잡게 되고요.) 그러나 이 관점에 헛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11장 사건의 시점을 주후 46년으로 잡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바울의 회심시기가 예수님의 죽으심 전으로 될 경우도 있어서...

 

만약 행 15장 사건과 갈 2장의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본다면 사도행전의 기록연대가 뒤로 밀리게 됩니다. 그럴 경우 또 다른 문제제기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러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작성할 때는 이미 행 15장을 통해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 있은 후인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왜 이 공적 결정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하고 명백한 자료를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지요.(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행 15장 이전으로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그럼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2번 밖에 예루살렘에 간적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바울이 행 11장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빼먹었다는 것이 되기도 하구요...

 

좀 복잡합니다. 보통 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해 놓고는 년대는 갈라디아서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말하지요.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오늘 본문은 내용이해를 위해 몇 구절씩 잘라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5-16절.

2. 17-18절.

3. 19-21절.


[본문]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해설]


본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언급된다. 우리에게 '이신칭의'의 교리로 잘 알려진 내용이 나온다.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1. 바울은 '유대인'의 의롭게 됨에 대해서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같은 죄인이 아니지만

 2. 유대인들도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잘 언급되어 있다. 


(롬 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3. 그것을 알고 유대인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다.)

 4.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유대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리하면, 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게바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유력한 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고 이 복음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도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


[본문]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해설]


본문의 표현 그 자체로 해석하려고 하면 이해하는데 좀 난해함이 있다. 그럴경우는 전후의 굵직한 맥락에 비추어서 난해해 보이는 표현을 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리라 생각한다.큰 맥락에서 17,18절을 풀어서 설명해 보려한다. 이 작업은 엄밀한 주석작업은 아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 설명한 작업이니, 읽고 큰 흐름을 이해하면 족하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위의 방법'이 아닌 '믿음(행위가 아닌)의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다시 '행위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할례'와 같은 것을 '의'의 조건으로 제시하게 된다면, 처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 인도했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된 것이 되고 만다.(이것을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듯하다.) - 따라서 이런 논리(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 이후 거기에 덧붙여서 율법으로 그 의로움을 완성해야 한다는 추가적인 가르침)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될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믿음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이 거기에 추가해서 '율법의 방법'으로 의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17절 해설)



바울이 전한 복음도 다르지 않다. 바울은 이전까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믿는 유대주의자였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의 내용을 받으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율법의 방법>으로는 의에 이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 것(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법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들고나와 '할례'와 같은 율법을 해야 '의'에 이른다고 가르친다면 바울은 자신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움으로 스스로 잘못함을 말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이 말이 되겠는가!(18절 해설)


  -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식의 가르침을 주라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아마 이와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


[본문]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해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신앙 고백적으로 말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죽었다.(그 방법론으로 의롭게 될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이라는 공식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보면 결국 <죽음_의에 이르지 못함>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19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은 자신의 의를 근거로 살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방법론을 버림으로서, 다른 방법론(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을 택하게 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이 두 개가 있었다. A라는 공식이 있고, B라는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인식하지 못했다. A라는 공식은 심플했고, 이해하기도 용이했다. 그리고 왠만한 문제들은 A라는 공식으로 거의 다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A라는 공식을 대입해 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공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A라는 공식으로 풀기 위해서 하나의 <변수>값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값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이 값과 저 값을 넣고 이런 저런 말로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합리화하지만 확신을 줄수는 없었다. 

그런데 누가 B라는 공식(이미 전부터 알려져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않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그것은 <변수>의 값이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정답을 줄수 있는 공식이었다.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이르기까지, 단순한 문제에서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명확하게 풀어줄 수 있는 공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B라는 공식이 알려지고, 그 공식이 인정된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선택한다. 이 말은 이제 사람들이 A라는 공식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런 비유가 이해를 돕기를 원한다.^^;;) 



20절. 


이 구절은 유명하고 얼마든지 은혜롭게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지만, 지금까지 전체적인 논지의 흐름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바울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듯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을 다시 가져오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제 자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라는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위의 예대로 말한다면 A라는 공식은 버리고, B라는 공식을 가지고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의 말로 표현하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인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감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1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추가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이후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성도의 삶에 가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인 정리]


1. 유대인 성도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믿음으로 나왔다.

2.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은 것이다. 

3.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버린 것이다. 

4. 그런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버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더하여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_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주장이 문제있음을 주장.

5. 나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버렸고,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만 살려고 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6.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