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해설]


[7] 너희가 달음질을 잘 하더니 누가 너희를 막아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하더냐 [8] 그 권면은 너희를 부르신 이에게서 난 것이 아니니라 [9]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지느니라 [10]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그러나 너희를 요동하게 하는 자는 누구든지 심판을 받으리라


갈라디아 교회가 바울로부터 처음 복음을 듣고 세워졌을 때, 이들은 순수한 복음 안에서 잘 자라났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이상한 가르침이 들어와 교회 전체에 위협을 가하게 된 것이다. 이것을 바울은 적은 누룩이 온 덩이에 퍼진 것이라고 표현했다. 큰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 정도의 작은 문제는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작아보였던 문제가 큰 문제로 금새 확대되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교회 전체의 존립을 위태롭게 할 만큼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대한 기대를 잃지 않았다. "나는 너희가 아무 다른 마음을 품지 아니할 줄을 확신하노라"(10절) 바울은 다른 복음으로 인해 풍지박산이 난 것 같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여전히 살아날 수 있는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하나님의 교회, 하나님의 백성들은 다시 소생하는 힘이 있다. 바울은 이와 같은 확신 속에서 '지금 연약한' 갈라디아 교회를 향한 기대를 잊지 않는다. 


그러나 여전히 갈라디아 교회에서 <다른 복음>에 사로잡혀 다른 복음을 주장하며 가르치고자 하는 자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은 <순수한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하였기에 사람들이 듣기에는 더욱 그럴듯 하게 들리고 보였을지 모르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격이 되었다.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하자, 복음의 <대적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순수한 복음>에 천차해야 하는 이유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도우려 했던 것(?)이 오히려 원수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11] 형제들아 내가 지금까지 할례를 전한다면 어찌하여 지금까지 박해를 받으리요 그리하였으면 십자가의 걸림돌이 제거되었으리니 [12] 너희를 어지럽게 하는 자들은 스스로 베어 버리기를 원하노라


바울도 알았다. 자신이 이방인들에게 <할례>를 전하지 않았던 것 때문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불편해 했다는 것을. 만약 바울이 자신이 전한 <순수한 복음>에 <할례>라는 유대인들이 만족스러워하는 '가미료'를 살짝 넣었다면 바울은 이방인에게서 뿐 아니라, 유대인들에게서도 충분한 인정을 받으면서 사역할 수 있었다. 그렇게 했다면 바울 자신이 전한 <십자가 복음>에 대한 유대인들의 적극적 방해(장애물)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고 바울의 사역은 순탄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은 그것을 알고도 그렇게 하지 않았다. 왜? <할례>를 복음에 가미한다는 것은 <순수 복음>을 훼손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불충분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 때문이었다.


<할례>를 지속적으로 주장하는 자들에게 대해서 <순수 복음>에는 그와 같은 요구가 들어가서는 안됨을 재차 확인하여 지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그런 주장을 통해 교회를 혼란하게 하고 어지럽게 하려 한다면, 스스로 베어 버리라고 바울은 말한다. 이 말이 의미는 그토록 <할례> 즉, 성기의 끝을 잘라내는 것에 집착하고 중요하게 본다면, 아예 거세를 하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들을 향한 바울의 조롱(?)을 보여주는 표현이다.  


[묵상]


1. 상당한 타격을 입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바울은 여전히 희망을 가졌다. 


교회는 때로 강해 보이지만, 때로는 매우 무력해 보인다. 강력한 외부적 박해 가운데에서도 죽지 않고 살아나는 힘을 가질 만큼 교회는 강하다. 오히려 박해를 통해서 더욱 확대되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오히려 교회는 내부적인 요인으로 인해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이단의 가르침도 그러했고, 갈라디아 교회처럼 다른 복음으로 말미암아 <순수 복음>이 훼손되고 그로 인해 그리스도의 사역이 불충분하다고 여겨질 때 교회는 인간적인 것들이 유입되고 하나님의 교회로서의 생명은 희박해 진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교회라면, <순수 복음>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성도들이 여전히 있다며 그 교회는 소멸되지 않는다. 교회가 사람의 수고와 노력 위에 세워진 것이 아니것처럼, 교회가 사람의 훼손으로 무너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라면, <순수 복음>으로 시작된 교회라면 '소망'은 있다.


2. 그릇된 가르침에 여전히 매여 있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공동체적인 결단을 촉구한다.


그릇된 가르침을 전하는 자들은 <누룩>처럼 공동체 전체를 순식간에 무력화 시킬 수 있다. 그들이 자신이 잘못된 생각을 지적받고 바르게 되도록 요청하는 내용을 듣고도, 그 자리에서 돌이키지 않고 여전히 자신들의 <복음_다른 복음>으로 교회를 흔든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들에게 그와 같은 강력한 경고가 전해져야 할 것이다. 

듣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돌아오는 자들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공동체 밖으로 쫓아내야 한다. 참된 교회란, <거짓된 복음>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혼돈케 하는 자를 경고하고 내쫓는 건강한 징계(치리)가 있는 교회다. 이것을 통해 교회의 순결함과 교회의 권위를 드러내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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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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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2] 보라 나 바울은 너희에게 말하노니 너희가 만일 할례를 받으면 그리스도께서 너희에게 아무 유익이 없으리라 [3]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 [4]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하는 너희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진 자로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해설]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에게 <자유>를 주셨음을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의 자유는 방향이 정해지지 않은 <마음대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여기서의 자유란, 율법의 종된 삶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율법의 종된 삶이란 무엇인가? 율법을 통해서만 의롭게 될 수 있다는 법 아래 사는 삶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 그 법 아래 살아가던 사람들이다.(물론 아브라함과 다윗... 으로 이어지는 구속사적 혈통 속에서는 희미하나마 그 빛을 바라보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셔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리고 율법의 종된 삶으로부터 자유하게 하셨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혜와 의로 말미암은 의로 우리를 이끄셨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더 이상 율법의 종된 삶을 살지 않아도 된다. 그 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은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종의 멍에를 씌우는 것이 있다. 하나는 갈라디아서 교회에 들어와 혼란을 야기시켰던 <다른 복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과 더불어 율법적인 행위를 더 해야 온전한 의에 이른다는 가르침이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종으로부터 자유롭게 된 사람들을 다시 율법의 종 아래로 데리고 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바울이 전한 <은혜의 복음>을 왜곡되이 받아들인 자들로 <율법적 방종>으로 나아가려는 자들이었다. 이들은 율법의 종으로부터는 벗어났지만, 육체의 종이 되어 버린 자들인데 바울은 이들에게도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권면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후자의 견해는 개인적인 견해다.)


그 이후 바울의 논지를 정리하면,(2-4절)



1. 이와 같은 자유의 복음을 믿는 자임에도 불구하고 <할례를 받는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 

2. 네가 만일 할례를 다시 복음 안으로 가져와 의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려 한다면, 할례만이 아니라 율법 전체를 가져와야 하는 것이 맞다. 즉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하는 것인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 전의 요구와 다르지 않다. 

3. 만약 율법을 다시 가지고 와서 율법 안에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한다면(할례를 받으려고 한다면) 너는 그리스도가 가지고 오신 것을 부정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너는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의 법에서 떨어짐을 의미한다. 



 - 이와 같은 논리를 통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결단을 촉구한다. 만약 다른 복음을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그리스도를 끊어버리는 것이요 은혜에서 떨어지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다른 복음>을 받은 갈라디아 교회들의 결단이 복음과 관련하여 얼마나 위험한 수용인지를 분명하게 알게 하기 위한 바울의 촉구로 보인다. 


 

[5] 우리가 성령으로 믿음을 따라 의의 소망을 기다리노니


의의 소망을 기다린다는 바울의 표현을 통해 볼 때,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 안에서 의의 시작이 일어났으나, 아직 의의 완성에는 이르지 못함을 알 수 있다. 물론 우리의 구원에도 시작과 완성이 있듯이 우리의 의도 그와 같은 시간적인 차이가 존재한다고 보면 어려운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시간적 차이를 통해서 중간에 어떤 변수가 발생할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바울이 말한 소망이란 그저 헛 소망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와같은 구원의 완성의 소망을 산소망이라고 표현한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소망을 가진 우리에게 있어서 우리의 의를 더욱 진작시키기 위한 어떤 율법적 노력이 추가적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논리는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과는 동떨어진 논리다. 그 율법의 행위를 부정해야 한다는 말은 아니지만, 그것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은 더욱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할례나 무할례는 큰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뿐이다. 바울의 이 말은 성도란 윤리를 배반한 자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하게 드러내준 것이라 본다. 


바울이 부정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순수 복음>을 강조하는 갈라디아서 5,6장에서 오히려 매우 윤리적인 사람을 요구하고 있다. 구원과 관련하여 <할례>와 <무할례>는 아무것도 아니다. 즉 그와 같은 것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유하다(갈 5:1) 그러나 그리스도인들은 그 자유를 가지고 새로운 종된 삶으로 들어간다. 바로 사랑의 종이다. 


[갈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묵상]


1.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다. 


복음은 우리에게 <자유>를 준다. 갈라디아서에서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자유의 복음>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향방없는, 자기 마음대로의 자유가 아니다. 율법의 종됨으로부터의 자유다. 즉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진노 아래에 있을 수 밖에 없어서 지켜야만 하는 종된 삶이다. 마치 애굽의 종되어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종으로서 일하지 않을 수 없어서 일했던 것처럼. 복음은 우리에게 더이상 율법의 논리로 진노에 이르지 않게 되었다는 해방을 선포했다.(그리스도의 속량으로) 그런 측면에서 우리는 자유를 얻은 것이다. 그러나 그 자유는 진노로부터의 자유만이 아니라, 의로의 인도(의의 종)였음도 함께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성도의 구원이란 방향이 있는 구원이라는 것이다. 죄의 진노에서 구원하여(자유), 거룩한 삶으로 부르심(종). 이것이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순수 복음>의 내용이다. 바울의 <순수 복음>의 조건에 무엇인가를 가미하려고 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순수 복음>을 자신의 소욕의 근거로 삼으려고 하는 것도 심각한 문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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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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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살펴 본 바로, 갈라디아 교회에 대한 문제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1.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에 전했던 <순수 복음>으로 이방인 교회가 세워졌다.


  - 순수 복음이라는 것이 다소 오해스럽지만,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생각했던 복음과 차별을 두기 위한 표현이다. 유대인들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다. 하나님의 의를 얻게 되었다. 이것이 순수한 복음이나 이들은 자신들이 유대인이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율법(의 문화와 가치관)의 옷을 입고 있었다. 이 말은 어디까지가 순수한 복음인지 어디까지가 문화적인 요소인지를 엄밀하게 구분하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 사도행전에 베드로의 고넬료 만남을 통해서 이방인에 대한 구원에 대한 하나님의 뜻(행 11장)과 바울의 증언으로 이루어진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행 15장)이 예루살렘의 사도들로부터 인정되었지만, 이들의 생각을 쉽게 바꾸지는 못했던 것 같다. 유대인들은 태생적으로 이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다.

  - 그런데 바울은 이 둘을 명확하게 구분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바울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들고 나아갈 때 불필요한 유대인의 문화와 습관을 요구하지 않았다. 순수 복음만을 전했다.




2. 바울이 전했던 <순수 복음>은 갈라디아 교회에 두 가지 방향으로 연약함이 드러났다.


  1) 순수 복음은 그 내용 자체 만으로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개념화하기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은 언제나 <율법>이라는 상대적 개념과 대조해서 이해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서에서는 복음에 대한 이런 특징을 잘 설명해 준다.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설명할 때, 이들은 이미 율법에 대한 기초적 이해(와 경험)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이방인의 경우는 그렇지 못하다. 그렇기 때문에 <순수 복음>은 두 가지 측면에서 연약함을 드러낸다. 첫째는 율법적 삶에 대한 무시를 만들어 낸다. 성도들로 하여금 율법 폐기론과 같은 행동을 제어할 수 없는 근거처럼 나타난다. 


  - 보통 이것은 율법에서 자유하게 되었다는 말로 대표될 수 있는데, 이들은 순수 복음을 그렇게 이해해서 육체의 소욕을 따르는데 전혀 문제의식을 느까지 않게 되기도 한다.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자신의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 5,6장에 나오는 바울의 권면은 바로 이와 같은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 주는 권면이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그릇되게 이해한 자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 5,6장에서 매우 율법적인 권면들을 한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는 것을 말하며,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에 대한 삶을 요구한다. 


  - 따라서 갈라디아서는 율법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바울은 그런 가르침을 주고 있지 않다. 복음은 율법을 버리는 삶이 아니다. 다만, 복음에 대한 그릇된 이해로 육체의 소욕을 따르고자 했던 자들의 삶을 바로 잡아 주려고 했던 것이 갈라디아서를 쓴 주요한 이유중에 하나다.


  - 보통 갈라디아서의 핵심을 이야기 할 때, 이부분을 보지 못하는 것 같다. 그래서 5,6장에 대한 오해가 생긴다. 이전까지 율법이 아닌 믿음이 복음이 핵심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가 갈라디아서의 마지막 5,6장은 다시 율법적 삶의 중요성을 강조하니 말이다. 



  2) 다른 한 가지의 연약함을 이방인 교회에 전해 주었던 바울의 <순수 복음>은 예방 주사를 맞지 않은 복음과 같았다. 그래서 작은 변형과 왜곡이 왔을 때, 쉽게 넘어져 버리는 복음이었던 것이다. 일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 의한 <거짓 복음>(율법적 요구가 가미된 복음)이 들어오자 면역력이 없었던 <순수 복음>은 쉽게 무너지고 말았다. 이로 인해 제일 당황하고 분노하게 된 것은 바울이다. 갈라디아서는 바로 이와 같은 상황하에서 쓰여진 것이다. 


  - 그래서 바울은 <거짓 복음>에서 율법적 요구를 제거하고 순수 복음이 무엇인지 다시 선명하게 해줌으로서 바울이 전해주려고 했던 복음의 핵심을 좀 더 분명하게 해준 것이다. 이전의 복음과 다른 것은 아니지만, <다른 복음> 중 어떤 것이 순수 복음이 아닌지에 대해서 설명해 줌으로서 갈라디아 교회는 <순수 복음>의 명확성을 이전보다 가지게 된 것이다. 


  - 갈라디아서는 처음부터 4장에 이르기까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진행한다. 그래서 율법과 복음과의 관계성을 아는 것이 필요하다.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로서의 복음을 설명함으로 복음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를 이루려던 시대를 마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음 통해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를 이루는 시대임을 밝힌다. 



이 두가지 측면에 대한 이해가 갈라디아서를 읽는 사람들에게 먼저, 선명하게 들어와야 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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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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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해설]


[21] 내게 말하라 율법 아래에 있고자 하는 자들아 율법을 듣지 못하였느냐 [22] 기록된 바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으니 하나는 여종에게서, 하나는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 났다 하였으며 [23] 여종에게서는 육체를 따라 났고 자유 있는 여자에게서는 약속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이 어떤 처지에 있는 자인지를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통해서 비유적으로 설명하고자 한다. 이 이야기의 배경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자세히 나와있다. 두 아들 중 여종(하갈)에게서 난 아들은 이스마엘이고, 자유 있는 여자(사라)에게서 난 아들은 이삭이다. 바울은 여종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육체를 따라 났다'고 언급한다. 이는 하갈에게서 난 이스마엘은 하나님의 약속을 통해난 아들이 아님을 말한다. 반면에 사라를 통해 난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았음을 설명한다. 

하갈을 통해서는 육체를 통해서, 사라(자유 있는 여자로 표현하고 있는 것은 '자유'를 강조하기 위함이리라 본다.)는 약속을 통해서, 즉 육체와 약속을 대조하는 방식으로 하갈과 사라를 비교하고 있다. 


[24] 이것은 비유니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이라 하나는 시내 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니 곧 하갈이라 [25] 이 하갈은 아라비아에 있는 시내 산으로서 지금 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니 그가 그 자녀들과 더불어 종 노릇 하고 

[26] 오직 위에 있는 예루살렘은 자유자니 곧 우리 어머니라 [27] 기록된 바 잉태하지 못한 자여 즐거워하라 산고를 모르는 자여 소리 질러 외치라 이는 홀로 사는 자의 자녀가 남편 있는 자의 자녀보다 많음이라 하였으니 


바울은 창세기 16장과 21장에 나온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가 하나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건으로 해석해 냈다. 즉, 이 여자들은 두 언약을 상징하는 것으로 '하갈'은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자로 본 것이다. 시내산은 율법을 받은 장소로, 애굽 여인 하갈을 시내산으로부터 종을 낳은 여인으로 본 것은 하갈이 율법을 상징하는 인물이요, 그의 자손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니 종의 자녀 즉 율법의 종의 자녀임을 상징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바울은 더 나아가 하갈을 시내 산(율법)이라고 규정하고, 지금있는 예루살렘과 같은 곳이라고 말함으로써(25절) 현재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여전히 율법의 종 아래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바울은 하갈은 율법을 상징하고, 율법을 받고(시내 산) 율법을 따르고 있는 지금의 예루살렘도 여전히 율법의 자손(종의 자손)이라고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물론 예루살렘을 율법의 종이라고 규정한 것은 부정적인 평가다. 왜냐하면 하갈의 자식은 '육체를 통해서' 난 자로서 '성령을 통해서' 난 것과 대조되어 설명되기 때문이다.


상대적으로 '약속'을 따라 아들을 낳은 사라에 대해서 '위에 있는 예루살렘'이라 말한다. 즉 사라를 통해서 난 자손, 약속을 따라 난 약속의 자녀들은 사라의 자녀이며 이들은 자유자의 자녀인 것이다. 이들은 지금 땅에 있는 예루살렘(율법의 종된 곳)과 대조적으로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자유의 자녀, 약속의 자녀)요 참된 예루살렘임을 밝힘으로서 율법이 아닌, 약속을 통해서 난 자들이 참된 예루살렘임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처음에는 잉태하지 못한 자(사라)로 불행해 했지만, 훗날에는 큰 복의 여인이 되었던 것처럼 자유자의 자녀(율법의 종에서 벗어난)에게 큰 복이 있게 될 것을 말한다. 


[28] 형제들아 너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라 [29] 그러나 그 때에 육체를 따라 난 자가 성령을 따라 난 자를 박해한 것 같이 이제도 그러하도다 [30] 그러나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 여종의 아들이 자유 있는 여자의 아들과 더불어 유업을 얻지 못하리라 하였느니라 [31] 그런즉 형제들아 우리는 여종의 자녀가 아니요 자유 있는 여자의 자녀니라


지금은 성도가 마치 아이를 낳지 못한 사라처럼 자유하는 여인이었으면서도 여종에게 위축되어 있지만, 우리는 이삭과 같은 '약속의 자녀'다.


갈 3: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 3: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갈 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속'의 자녀인 우리가 '육체를 따라 난' 자들에게 박해를 받게 되는 것은 마치, 율법의 종인 이스마엘(하갈의 아들)이 자유 자의 아들은 이삭(사라의 아들)을 놀렸던 일(창 21:9)과 같은 것이라 해석하는 것이다. 이 또한 바울이 알레고리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창 21:9 사라가 본즉 아브라함의 아들 애굽 여인 하갈의 아들이 이삭을 놀리는지라. 


현재는 율법의 자녀가 자유자의 자녀를 놀리고 박해하지만, 바울은 그들에게는 '유업'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유자의 자녀가 아니요 여종의 아들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갈이 사라의 요청으로 하갈을 아브라함의 집에서 내쫓기게 된 것을 말한다. 


바울은 지금 예루살렘으로부터 온 유대인들과 그들로 인해 흔들리고 혼란 가운데 있는 갈라디아 교회 안에 있는 성도의 상황을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알레고리적으로 잘 풀어서 설명했다. 알레고리 해석이 옳은 해석이냐를 떠나서 바울은 갈라디아 성도들에게 현재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입장이 무엇이고, 그들의 한계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설명했다. 그리고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그들의 유혹 혹은 박해에 대해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까지 하갈과 사라의 이야기로 잘 풀어서 가르쳤다. 


[묵상]


1. 바울은 예루살렘 유대인들을 까(?)고 있다.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들을 까고 있다기 보다는, 그들의 그릇된 복음을 지적하고 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들어설 수 없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끼워 넣으려 했고, 그것을 끼워 넣어야만 '복음'이 완성될 수 있다고 믿고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바울이 디스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그와 같은 그릇된 복음을 믿고 전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지만, 종의 자녀다. 하나님의 약속의 기업으로부터 배제된 자들임을 바울은 서슴없이 말한다. 

유대인들에게는 상당히 비아냥거리는 조롱으로 들렸을 것이다.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지키기 위해, 선을 명확하게 해주어야 했다. 


2. 복음에 율법을 끼워넣으면 사라의 자손이지만, 하갈의 자손이 된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 가운데서 태어난 약속의 자녀들이다. 그러나 그들은 혈통적으로만 그렇지 영적인 면에서는 여전히 시내 산 율법의 자녀, 즉 하갈의 자녀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율법을 통해서 의롭게 되는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의롭게 되는 복음'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려는 우를 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시 옛 날로 돌아가려고 한 것이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역'을 부정하거나 혹은 불완전한 것으로 보는 행위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결과 그들은 다시 종의 자녀, 하갈의 자녀가 되어 버린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다는 것은 역사적 회귀를 불가능하게 한다. 


때가 차매,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위에 보내셨다. 즉 새로운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이전 시대를 끝내고 싶으셨고, 끝낼 때가 되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예수를 이 땅에 보내신 것을 통해서 말씀하신 것이다. 이전 시대로 돌아갈 이유도 없고, 돌아 가서도 안된다. 예수 이후 새로운 시대가 온 것이다. 


그런데 다시 옛 방식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 사람들은 대표적으로 유대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역사를 되돌릴수는 없다. 일어난 일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십자가 죽으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가 하신 사역의 결과도 마찬가지다. 


예수 이후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의란 없다. 예수는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 


 롬 10: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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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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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대 대학생들은 우파나 좌파에게 모두 소외된 존재다.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입장)이 들리지 않는다.


  2. 이들에게 말할 권리, 들려질 권리가 주어져야 한다.


  3. 성장이란 성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대학생들이 생각이 없다고 판단하는 것은 이들에게 성장이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철이 없다고 말하지만 정말 이들이 생각이 없는가?


  4. 그렇지 않다.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다른 곳이다. 기성세대들과 다른 경험, 다른 판단을 하는 것이다. 기성세대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언어가 다른 것이다. 개와 고양이처럼.

  5. 같은 질문을 던지는 공동체가 오래간다. 답의 공유가 아니라 질문이 공유된 공동체가 오래간다는 것이다. 따라서 공동체 안에서 낯선 질문들이 이어질 때 공동체는 쇄신된다. 그리고 낯선 것을 환대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낯선 것으로부터 오는 위험을 각오할 용기가 필요하다. 

  6. 대학생들에게 사유할 수 있고 개념화 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면 이들은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에 대해서 어느 철학자들의 원리를 그대로 발견해 가기도 한다. 문제는 사유하고 개념화 하는 일들을 다른 사람들이 대신 해주었던 것을 받아 먹은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 수동성이라고 표현하는 듯.

  7. 집단 지성, 그들의 삶 속에 이미 있다. 교수와 가르치는 자의 역할을 그 안에 있는 것을 끄집어 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8. 교과서는 힘이 세다. 학생들은 공교육에서 배운 것을 결정적인 순간에 정말로 '진리'라고 믿거나 아니면 그것을 '진리'로 이야기 한다. 이것은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그것을 진리로 믿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진리로 믿지는 않지만 그 진리 말고 다른 언어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진리라고 말하는 경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진리가 어떤 행동을 요구하도록 하는 것은 같다. 

  9. 도덕적인 주장이 우리에게 어떤 정치적인 효과를 내는가를 물어야 한다. 선포된 진리는 우리를 부지불식간에 어디로 이끌어가기 때문이다.(즉 그것이 참된 도덕적 진실인지 아니면 정치적 목적을 위한 도덕인지 분별해야 한다.) 도덕주의의 덫에 빠져 우리 스스로를 윤리화할 기회를 빼앗겨서는 안된다. _ 여론 몰이식 도덕주의. 도덕주의는 인간을 서열화하고 분류하는데 인간과 인간 아닌 자를 구분하여 인간이 아닌 자에게 윤리의 혜택을 입지 못함을 당연하게 한다.

  10. 교실에서 이와 같은 것을 발견해가고 깨달아가는 과정을 거치도록 해야 한다. 그러나 대학은 이와 같은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그래서 대학은 죽었다고 말하지만, 사실 대학은 이미 오래전부터 죽어 있었다. 저자가 대학을 다니던 시절에도 자신에게 이런 사고를 가르쳐주었던 것은 대학이 아니라, 대학 내에 있는 동아리와 작은 모임들(아지트)였다. 대학이 죽었다는 것은 오히려 대학이 하나의 권력으로 나타나 이와 같은 아지트들 조차 생존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버렸다는 것으로 봐야 한다. 

  11. "대학을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대학을 떠나지 않으려 하는, 떠나지 않음으로써 죽은 대학에 저항하는 친구들이 있는 한 살아 있는 교실은 여전히 가능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불가능한 곳에서 가능함을 상연하는 것, 그것보다 멋진 혁명을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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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 91번지의원: 최명은 원장을 만나다.

글: 김수억 간사

 * 본 내용은 2014년 4월 2일 인터뷰를 근거로 작성한 글입니다. 죠이에서 발간하는 '더 죠이'에는 내용을 축약하여 5월에 발간될 예정입니다.(이 글은 최 원장과 함께 있었던 3시간 반의 나눔과 만남, 상황 속에서 일어난 생각을 본인이 정리한 글)

 * 이미 언론에서 취재한 내용: <동아일보>, <뉴스앤죠이> 이와 같은 병원을 열게된 배경과 원장의 철학 등에 관해서는 이미 취재된 기사를 참고하시라.





한 죠이어의 페이스북에서 독특한 병원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성북동 91번지의원". 가정집을 개조해서 병원을 만들었는데, 공간을 가정의 편안함을 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병원이라는 것이 독특하다 생각했다. '병원은 사실 가고싶어서 가는 곳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어서 가는 곳, 좀 더 사실적으로 말하면 가고 싶지 않은 곳일 수 밖에 없는 곳인데 병원이 가정집의 옷을 입었다고 평안한 공간이 될 수있겠는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아이디어 만큼은 신선해 주목하게 되었다. 

그런데 누군가 그 글 아래에 '그 의사 분이 죠이어'라는 내용의 댓글을 달았다. 궁금해졌다. 결국 '더 죠이'에서 "성북동 91번지의원"의 최명은 원장의 인터뷰를 싣기로 결정했다. 최명은 원장이 서울대 죠이 활동을 할 때 담당 간사였던 정희원 간사와 '더 죠이' 편집국장이신 장정애 국장 그리고 나 이렇게 셋이서 4월 2일 화창한 봄 날에 성북동을 향했다. 나는 기사에 실을 내용을 위해서 어떤 내용의 질문을 할 것인가를 정리해서 갔다. 


#1 의원에 들어서는 첫 느낌



작고 이쁘게 쓴 "성북동 91번지의원"이라는 간판(?)이 달린 병원은, 목련 나무가 있으며 커다란 개집이 있는 마당을 둔 2층짜리 단독주택이었다. 2층에서 개 한 마리가 짖었고(이름은 '봄'이란다. 또 다른 개 '가을'이도 있다고 한다.) 

병원이 일반주택을 개조한 것이기에 주변은 모두 일반 주택이었다. 병원 바로 옆에 '피정의 집'이 있었고 큰 길을 건너면 '덕수 교회'라는 크고 오래 된 교회도 있었기에 이 병원도 뭔가 '신성한 어떤 곳'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다.



우리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병원 안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 우리 옆에는 전혀 알지 못하는 아주머니 한 분이 같이 있었다. 혹 환자인가 싶었는데 알고보니 그 분도 신문에서 이 의원 이야기를 보고 지나가는 길에 들려보고 싶었는데 한 무리가 병원 안으로 들어가니 따라 들어오신 것이다. 그렇게 들어오신 아주머니는 우리와 함께 커피를 마시며 30-40분을 이야기 하시다가 일어나셨다. 앞에 있는 덕수 교회 문화교실에서 아이들 미술치료 수업을 하시는 분인데, 혹시 이 '특별한' 병원에서 도울 일이 없을까 물어보시기 위해서 들렸다고 하셨다.

그렇게 '성북동91번지의원'은 지나가던 동네 주민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고,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재능을 선뜻 기부하고픈 마음을 일으키는 곳이었다. 이곳은 우리 안에 뭍혀있던 '선함'이 고개를 내밀수 있도록 따듯한 온기를 주는 곳이란 생각을 했다.




#2 준비한 질문은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수다만...

최명은 원장은 우리에게 손수내린 커피를 대접해 주었고, 우리가 둘러 앉은 자리로 볓이 따듯하게 들어왔기에 우리들은 자연스럽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렇게 이야기 꽃을 피웠으나 나는 마음이 불편했다. 기사 작성을 위해 온 자리였고, 그 내용을 최 원장의 입을 통해서 들어야 했기에 화기애애한 수다가 빨리 끝나길 기다렸다. 

수다란 원래 마침표가 없는 것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세 여성분의 대화 사이를 비집고 들어갈 틈을 나는 찾지 못했다. 간신히 조심스럽게 치고 들어가면, 어느새 다른 주제로 흘러흘러... 결국 난 무능한 기자임이 드러났고 이야기 꽃은 더욱 만개했다. 그리고 이내 나도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세속의 목적을 위해 왔건만, 세속의 목적은 간곳 없고 따듯한 봄 꽃같은 사람 냄새만 가득한 시간이 되어 버렸다. 그런 분위기에서 점심도 먹었고, 다시 돌아와 다시 커피 한잔을 마셨다. 



최명은 원장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또 삶의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했다. 젊지만 많은 생각과 경험을 한 것은 아닌가 생각했다. 더불어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생각도했다. 그래... 모름지기 의사란 사람의 몸을 다루는 것이고, 사람의 몸이란 그 사람이 살아온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가지고 있는 것일텐데 사람에 대한 관심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한 스토리를 모르고서야 어찌 그 몸을 고친다 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들었다. 

"치유란, 환자들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과정"이라는 최명은 원장의 철학이 말로가 아니라 분위기와 상황으로 내게 전달되었다. 설명을 듣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들은 설명보다는 깨달아지는 내용이 더 컸는데 그것은 말이 아니라 영으로 전해졌다고 하면 '오버'인가? 



# 3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

오전 11시부터 점심 먹고 2시 반에 이르는 시각까지 우리는 즐거운 대화를 나누었지만, 약간 걱정되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왜? 환자가 오시지 않지?', '병원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것은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때 즈음 할머니 한 분이 의원 안으로 들어오셨다. 최명은 원장은 가운을 입고 나오더니 할머니를 모시고 진료실로 들어갔다. 병원에 와 있는 3시간 반동안 처음 진료하는 모습을 봤다. 

  _ 사실은 그랬다. 작년(2013년) 11월에 오픈해서 지금까지 방문한 환자가 4백여명 정도란다. 지금까지는 건물 세를 내면 딱 떨어진다고 한다. 개인 생활은 대학원에서 조교를 하면서 받는 것으로 생활한다고 한다. 이 부분은 앞으로 방법을 찾아가야 할 부분이라는 말씀도 하셨다. 


조금 있으니 왠 젊은 엄마가 6개월된 아이를 안고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이 곳이 매우 익숙해 보였고 진료를 목적으로 온 것 같지도 않았다. 진료실에서 진료를 마친 최 원장은 그 아이 엄마와 인사를 하고 그 엄마의 아이를 안는다. 그리고는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정말 동네 젊은 엄마는 아이 데리고 놀러왔으며, 최 원장은 그 아이를 안아주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 원장이 안고 있는 아이의 엄마는 최 원장 뒤에 있어서 사진에 포착되지는 못했다.]


 _ 이 장면을 사진으로 찍지 않을 수 없었다. 정말 동네 주민과 함께 어우러진 병원과 의사의 모습이었다. 이런 모습은 저 오지의 선교현장에서 가능할 거라 생각했는데 서울 도심 한 복판에 있다니..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았다. 

마음을 좀 더 순수하게, 욕심을 좀 덜부리며 피곤하지만 본질에 충실하고자 한다면 그곳이 천국이지 않겠는가 생각했다. 그래, 여기가 천국이라면 이곳은 진정 '신성한 곳'임이 분명하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들은 이야기다. 그 날 저녁에 옆에 계신 신부님(수녀님)들을 초대해 저녁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고... 

나도 가족이 아파서, 의사의 신세를 많이 진 사람 중에 한 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사와 가깝다는 생각을 해본적은 없다. 같은 공동체의 구성원이란 인식을 해본 적은 없었다.  그런데 마치 예수님처럼 몸이 아프고 마음이 아픈 그리고 장차 아플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 함께 생활하는 의사를 본 것이다. 이것도 기적이라면 기적이 아닐까? 

난 성북동, 그 동네는 처음 가봤지만, 이 동네에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진료실에 들어서는 순간.... 아... 여기가 병원이었지? 그제서야 병원임을 깨닫는 병원이다]


[병원에 들어서면 바로 보이는 탁자와 피아노, 첼로... 거실인지 카페인지... 이야기 나누고 싶은 마음이 먼저 든다. 피아노 위에 있는 악보는 죠이 선교회의 자랑스러운 '많은 물소리'찬양집]

[우리를 대접하기 위해 손수 커피를 갈아서 내려주시려는 최 원장. 의사인지 바리스타인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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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

잉여짓을 하는 한심한 대학생들(?)
- 쓸데없는 일에 열정을 바치는 학생
- 무엇을 하는데 열정을 써야할지 모르는 학생들(?)

그러나 잉여는 가장 순순한 열정의 산물이다. 대학생들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쏟아부은 열정,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잉여면 어떤가? 다른 사람들이 즐거워하는 것을로 보람이 된다.

그러나 열정이 냉소로 될 때가 있다.
목적의식을 가지고 열심히 달려왔던 대학생들은 좀 더 깊게 들어갈수록 오히려 벽을 경험하고 한계를 경험한다. 꺽인 열정은 냉소로 변한다.
- 열정을 부담스러워하는 관료주의,

열정을 착취하는 자본주의로 인해

자기가 원하는 일을 할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는 것으로 젊은 대학생들의 열정을 착취한다. 오히려 그들은 기회를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열정을 발현하고 그 과정에서 얻는 것들에 관심을 가진다.(중요하다고 본다) 우리의 열정이 삽질처럼 보여질 수 있고, 사회는 그렇게 우리를 이용하지만 우리는 그 과정에서 얻을 것을 얻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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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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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해설]


[8] 그러나 너희가 그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본질상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 하였더니 [9] 이제는 너희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더욱이 하나님이 아신 바 되었거늘 어찌하여 다시 약하고 천박한 초등학문으로 돌아가서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 하려 하느냐 [10] 너희가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삼가 지키니 [11]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


때가 차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셔서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심으로 우리에게 아들의 영을 주셨는데, 그것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하나님이 아닌 자들에게 종 노릇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도 너희들을 아는데 어떻게 다시 옛날의 방식(초등교사인 율법에게 종노릇하던 시절, 이 시절을 거쳐서 이제 자유의 아들이 되게 하셨는데...)으로 돌아가 다시 그들에게 종 노릇을 하려고 하는가!! 지금 너희들이 '날과 달과 절기와 해'를 예수를 믿고 의롭게 되는 방식으로 지키려 하니... 지금까지 너희를 향해 해온 수고가 모두 헛되게 될까 두렵다.



[12]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13]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14]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15]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해서 책망조로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개인적이 이야기를 진행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할 때, 유대인으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내려놓고 이방인과 같이 되었다. 이 말은 자신이 전한 복음 속에서 유대인의 문화와 가치관은 배제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바울은 그리스도의 복음 속에서 순수한 복음과 유대인의 문화와 가치를 구분할 수 있었다는 것이고 이방인들에게 복음에 불필요한 유대문화적 요소들을 가미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게 바울이 복음과 문화적 요소를 구분할 수 있었던 것처럼 갈라디아 교회들도 그렇게 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13절부터의 말씀은 갈라디아 교회들과 바울 간의 개인적인 경험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라 정확한 내용을 알 수 없다. 대략적인 분위기만 파악하는 것으로 한다. 바울이 갈라디아 지역에 이르렀을 때 육체의 약함이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그 지역의 풍토병으로 인한 것일 수도 있고, 유대인의 박해로 인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 처지에 있는 바울을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인들은 불쌍히 여겨졌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바울이 복음을 전한 것으로 보인다. 보잘것 없고 초라한 상황이었지만, 갈라디아 사람들은 바울을 마치 천사를 대하듯 따듯하게 영접해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들의 애정은 '바울에게 눈이라도 빼줄듯 한 것'이었다. 



 즉,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와의 관계는 이와 같은 정서적 친밀관계가 기본으로 전제된 것이다. 그런 사역지에 대한 바울의 애착이 얼마나 컸겠는가? 또한 갈라디아 교회들이 보여 준 바울에 대한 애정은 얼마나 남달랐는가? 그런데 그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인해 바울에 대해서 오해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으로 치우져 버리게 되는 것 같은 상황이니 얼마나 마음이 아프겠는가! 갈라디아서 중간 중간에 바울의 흥분하고 책망하는 내용이 나오는 것은 인간적인 바울의 심정을 잘 반영하는 것이라 하겠다.



[16]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17]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18]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때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이런 관계속에서 갈라디아 교회가 <다른 복음>으로 속히 넘어가게 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바울은 감정적으로 흔들렸을 것이고, 그것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적인 권면과 책망>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미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인해 <바울의 사도성>과 <바울의 복음의 권위>에 대해 열등하게 생각했던 갈라디아 교회들은 바울의 충고를 우습게 여기고, '지가 뭔데?'라는 식으로 반응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인해 바울은 더 큰 감정적 상처를 입게 되었던 것 같다.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는 이 표현은 바울과 갈라디아 교회들간의 이런 감정적 상태를 보여준다 하겠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열심은 너희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그릇된 열심에 불과하다. 좋은 일에 열심이라면 얼마든지 좋지만, 그들의 열심에 속지 말라. 그들의 열심은 너희들을 그릇된 길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이었던 것 같다. 열심이라고 다 좋게 볼 수 많은 없는 것이다. 



[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결국 바울의 마음은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겠다는 것이다.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이 구절 속에 바울의 심정이 담겨져있다. 말로 권면으로 이들을 바로잡아 보려고 했지만, 그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함을 바울은 느꼈다. 자신이 처음에 보냈던 진심어린 충고에 대한 갈라디아 교회들의 반응을 보고 바울은 '벽'을 느낀 것이다. 감정적으로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고 낙심이 많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 지역을 전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돌아 맞아 거의 죽게 되어 성 밖으로 버려졌을 때, 다시 일어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했던 것처럼(행 14장) 감정적 돌팔매를 당하고 나서 다시 툴툴 털고 일어나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하겠다>고 그들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다. 


바울은 감정적으로는 <언성을 높일 만큼> 흥분되어 있었으나 감정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의지를 드려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라면, 다시 처음부터 다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다. 



[묵상]


1. 바울은 매우 감정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을 어느 누구보다 믿고 확신했지만, 그러나 숙명주의자는 아니었다. 잘못되어 간다고 보여지는 것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바로잡으려 했다. 편지를 썼고, 충고를 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최소한에 머물러 있던 사람도 아니었다. 문제가 터지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부지런했다. 

갈라디아서를 보면 바울의 이와 같은 감정들이 모두 살아 있는 것 같아서 좋다. 바울도 사람이고 바울도 감정적 격정이 있었던 사람이며 바울도 언성이 높아지는 사람이다. 더불어 바울조차도 사역의 허술함이 나타날 수 밖에 없음도 알수 있다. 바울은 감동도 잘 했고, 배신감도 느꼈으며 원수와 같은 관계로 인식될 만큼 감정의 요동이 있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없다는 것은 좀 더 이성적으로 비춰질 수 있을지 모르나, 감정없는 로봇처럼 비인격적이다. 사람은 감정이 뭍어나는 사람을 좋아한다. 물론 감정적인 사람(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고 감정이 매마른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는 사람도 별로 없다. 사람을 상대하는 목회자 혹은 리더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가? 감정에 휘둘리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된다. 감정을 다스리고 조절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렇다고 감정을 숨기려 해서도 안된다. 감정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이성적으로 보일 수는 있었도 상대에게 감동을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동질감을 느낄 수도 없기 때문이다. 


감정은 상대방을 가장 멀리 내쫓기도 하지만, 가장 가까운 곳으로 들어오도록 하기도 한다. 



2. 바울은 매우 이성적이고 의지적인 사람이다. 


이성적이라는 말은 감정이 없다는 말이 아니다. 그는 감정적으로 큰 홍역을 알았다. 그래서 절망도 했을 것고 사역적인 허무감도 느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다시 자신을 추스린다.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다시 해산하는 수고를 해야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감정은 큰 손상을 입었지만, 그것이 자신의 사역을 마음대로 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 가운데서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다시 파악하고 그것을 하기로 결단한다. 


다시 해산하는 수고. 이 말은 바울에게 부모의 심정과 의지가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부모는 자식으로 인해 수 없이 많이 감정적 좌절을 경험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로 인해 자식을 포기하는 부모는 없다. 바울도 그와 같은 심정으로 다시 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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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안티오쿠스 대왕이 주전 198년에 팔레스타인을 차지하게 됨. 이 때, 하니발은 로마에 패해 안티오쿠스에게 피신해 있었다, 그러면서 안티오쿠스를 충동하여 그리스를 공격하도록 함으로 로마는 안티오쿠스에게 선전포고를 했다. 이런 상황에서 로마에게 소아시아 지역의 패권을 뺏기게 되고, 안티오쿠스 대왕의 동생(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은 로마에 12년 동안 볼모로 잡혀가 있게 된다. 여기서 그는 로마의 생활 방식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게 된다. 


  2. 셀류쿠스 왕조는 헬레니즘 문화를 유대인들이 받아들이도록 강요함으로 팔레스틴에 큰 파장이 일어난다.


  3. 안티오쿠스 4세는 아테네에서 태어나, 이제 곧 세계를 제패할 로마의 세력으루존경하게 되었다. 안티오쿠스 4세느누자신을 "에피파네스"(신과 같은 칭호. 영화로운 자)하는 칭호를 부르더록 했으니, 유대인들은 그를 "에피마네스"(미친 놈)이라 불렀다.

  4. 그 당시 예루살렘은 의인 시몬의 자손인 정통 유대인 '대제사장 오니아스 3세'가 다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에 찬성하는 사람들은 그의 동생 야손을 지지했다. 야손은 안티오쿠스에게 더 많은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함으로 안티오쿠스에게 대제사장으로서 지명을 받는데 성공하게 된다. (안티오쿠스는 대제사장직은 정치적인 직책이라고 생각하고 지명했으나, 유대인들에게는 대제사장직은 신에게 기원을 두는 것이다. 이로 인한 갈등이 시작된다.)

  5. 야손은 헬라파 유대인들을 충동하여 예루살렘에 연무장을 세우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관습대로 나체로 운동을 했다.... 이런 식으로 헬레니즘의 물결이 드높아 지자, 반대 세력도 거세게 일어났다. '하시딤'(경건한 자들)은 조상들의 길을 따라 정통 유대인의 제도를 옹호할 것을 꾀함.

  6. 이러는 와중에 안티우쿠스는 더 많은 조공을 약속한 '메네리우스'라는 사람을 대제사장으로 임명하는데, 그는 베냐민 지파 사람으로 제사장 직을 감당할 권한이 없는 사람이다. (야손은 실각한다.)

  7. 야손은 안티오쿠스가 애굽과 전쟁하는 사이에 군대를 일으켜 예루살렘을 습격하게 된다. 그러나 성공하지 못한다. 이로 인해 안티오쿠스는 유대교가 대체로 헬레니즘과 시리아의 팔레스타인 통치를 적대시 한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다. 

  8. 안티오쿠스가 애굽을 거의 정복하게 되려는 상황 속에서 로마가 지중해의 권력자로 등장하면서 애굽을 포기할 수 밖에 없게 된 안티오쿠스는 팔레스타인을 장악하는 것을 더욱 곤고히 하게 된다. 이러는 과정에서 안식일에 메네리우스의 대적자들을 수없이 학살함으로 유대인들에게는 암흑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9. 안티오쿠스는 예루살렘에 이방의 신상을 성전 제단 위에 세우라고 명령하고, 성전 뜰에서는 음탕한 이교도의 제사를 드렸다. 돼지가  제단에 드려졌다. 또한 할례와 안식일을 지키는 것과 유대인의 절기를 지키는 것은 사형으로 금지시켰다. 그리고 히브리 성서의 사본들을 파괴하라고 명령함. 

  10. 이러는 과정에서 유대교의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했다. 야훼에게 예배드리던 성전은 쥬피터를 섬기는 곳이 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유대 독립군을 만들어 내는 반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주전 1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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