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개관] 한장으로 보는 구약_작업(김수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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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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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이 회심후 예루살렘에 두 번 올라간 것으로 갈라디아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라비아 기간 3년 후 한번, 그리고 14년 후 두 번째 올라갑니다. 이 때 사도들과의 악수사건이 있었지요. 사도행전에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이 행 9장 끝부분에 한 번 나옵니다.(첫번째 올라간 사건이라 볼 수 있겠죠.) 그리고 두번째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행 11:27-30이 나옵니다.(예루살렘 교회를 부조하기 위해서 올라갑니다.)_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습니다. 11장이 갈라디아서 바울이 14년 후에 올라간 사건과 같은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이 견해는 사도행전 15장 공의회 결과와 갈라디아서 2장에 나온 사건과 다르다고 보는 것이지요. 당연히 갈 2장의 악수사건이 사도행전 15장 사건 이전의 사건이 되는 것입니다.(이 경우 갈 2장과 행 15장의 유사성보다는 차이점에 강조를 두겠지요.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로 주후 49년 이전으로 잡게 되고요.) 그러나 이 관점에 헛점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11장 사건의 시점을 주후 46년으로 잡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바울의 회심시기가 예수님의 죽으심 전으로 될 경우도 있어서...

 

만약 행 15장 사건과 갈 2장의 사건을 같은 사건으로 본다면 사도행전의 기록연대가 뒤로 밀리게 됩니다. 그럴 경우 또 다른 문제제기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러면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작성할 때는 이미 행 15장을 통해서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정이 있은 후인데,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편지를 쓸 때 왜 이 공적 결정에 대한 근거를 제시하지 않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가장 간단하고 명백한 자료를 갈라디아서에서 제시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하지요.(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행 15장 이전으로 보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더불어 그럼 왜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2번 밖에 예루살렘에 간적이 없다고 하는데, 사실은 바울이 행 11장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을 빼먹었다는 것이 되기도 하구요...

 

좀 복잡합니다. 보통 학자들은 이렇게 정리해 놓고는 년대는 갈라디아서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고 말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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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문은 내용이해를 위해 몇 구절씩 잘라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15-16절.

2. 17-18절.

3. 19-21절.


[본문]


[15]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 [16]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해설]


본 구절에서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이 언급된다. 우리에게 '이신칭의'의 교리로 잘 알려진 내용이 나온다.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해 보면


 1. 바울은 '유대인'의 의롭게 됨에 대해서 말한다. 유대인들은 '이방인'과같은 죄인이 아니지만

 2. 유대인들도 행위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조상인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에 대해서는 로마서에 잘 언급되어 있다. 


(롬 4:1-3) 『[1] 그런즉 육신으로 우리 조상인 아브라함이 무엇을 얻었다 하리요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3. 그것을 알고 유대인들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었다.(예루살렘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바다.)

 4.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 유대인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정리하면, 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그리스도인들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고 게바와 야고보와 요한과 같은 유력한 자들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고 이 복음을 통해서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인들도 의롭다 여김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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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7]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8]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해설]


본문의 표현 그 자체로 해석하려고 하면 이해하는데 좀 난해함이 있다. 그럴경우는 전후의 굵직한 맥락에 비추어서 난해해 보이는 표현을 해석하는 것이 안전하리라 생각한다.큰 맥락에서 17,18절을 풀어서 설명해 보려한다. 이 작업은 엄밀한 주석작업은 아니다.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풀어 설명한 작업이니, 읽고 큰 흐름을 이해하면 족하다. 내가 이해한 바는 이렇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의롭게 되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위의 방법'이 아닌 '믿음(행위가 아닌)의 방법'을 따르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다시 '행위의 방법'으로 여겨지는 '할례'와 같은 것을 '의'의 조건으로 제시하게 된다면, 처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으로 인도했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 잘못된 것을 가르치게 된 것이 되고 만다.(이것을 그리스도께 죄를 짓게 하는 것으로 묘사한듯하다.) - 따라서 이런 논리(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을 가르치고, 그 이후 거기에 덧붙여서 율법으로 그 의로움을 완성해야 한다는 추가적인 가르침)는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추어 볼 때 모순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가 죄를 짓게 하는 분이 될수는 없는 것이 아닌가! 

따라서 '믿음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려 하는 자들이 거기에 추가해서 '율법의 방법'으로 의를 완성하려고 하는 것은 그릇된 것이다. (17절 해설)



바울이 전한 복음도 다르지 않다. 바울은 이전까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믿는 유대주의자였다. 그러나 바울이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복음의 내용을 받으면서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될 수 있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즉 <율법의 방법>으로는 의에 이른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전 것(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법론)을 버리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으로 의롭게 됨을 전한 것이다.  

그런데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들고나와 '할례'와 같은 율법을 해야 '의'에 이른다고 가르친다면 바울은 자신이 헐었던 것을 다시 세움으로 스스로 잘못함을 말하는 꼴이 되고 만다. 이것이 말이 되겠는가!(18절 해설)


  - 바울이 실제로 그렇게 가르쳤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식의 가르침을 주라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요구가 얼마나 모순적인가를 지적하는 것이다. 갈라디아 교회들에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의 논리가 아마 이와 같은 것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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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1]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해설] 


이제 바울은 자신의 입장을 신앙 고백적으로 말한다.


19절.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

     : 나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에 대해서는 죽었다.(그 방법론으로 의롭게 될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는다는 의미일 수도 있고, 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방법이라는 공식에 <나>라는 변수를 넣어 보면 결국 <죽음_의에 이르지 못함>에 이를 수 밖에 없다는 의미일 수도 있겠고)


19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

    :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은 자신의 의를 근거로 살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방법론을 버림으로서, 다른 방법론(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을 택하게 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아 살기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어떤 문제를 풀기 위한 공식이 두 개가 있었다. A라는 공식이 있고, B라는 공식이 있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인식하지 못했다. A라는 공식은 심플했고, 이해하기도 용이했다. 그리고 왠만한 문제들은 A라는 공식으로 거의 다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장 본질적인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서 A라는 공식을 대입해 보지만 답이 나오지 않는다. 공식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가장 본질적인 질문을 A라는 공식으로 풀기 위해서 하나의 <변수>값이 주어져야 하는데 그 값을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대략적으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해서 이 값과 저 값을 넣고 이런 저런 말로 이것이 <정답>이다라고 합리화하지만 확신을 줄수는 없었다. 

그런데 누가 B라는 공식(이미 전부터 알려져있었지만, 사람들에게는 주목받지 않은 방식)으로 이 문제를 풀었다. 그것은 <변수>의 값이 무엇이든지 정확하게 정답을 줄수 있는 공식이었다. 작은 문제에서부터 큰 문제에이르기까지, 단순한 문제에서 복잡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명확하게 풀어줄 수 있는 공식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B라는 공식이 알려지고, 그 공식이 인정된 이후로부터 사람들은 B라는 공식을 선택한다. 이 말은 이제 사람들이 A라는 공식을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런 비유가 이해를 돕기를 원한다.^^;;) 



20절. 


이 구절은 유명하고 얼마든지 은혜롭게 설명할 수 있는 구절이지만, 지금까지 전체적인 논지의 흐름으로 간략하게 설명하면, 바울 자신은 이제 더 이상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에 대해서는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셨듯이 자신도 죽었다는 것이다. 그 방법을 다시 가져오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제 자신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하나님의 의>라는 방식으로 산다는 것이다. 이 말은 다시는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식>을 끌어들일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위의 예대로 말한다면 A라는 공식은 버리고, B라는 공식을 가지고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을 성경의 말로 표현하면,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인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의 삶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감을 신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1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추가해야 한다면, 그리스도의 죽음은 헛된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즉, 이후로는 율법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성도의 삶에 가미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전체적인 정리]


1. 유대인 성도들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줄 알고 믿음으로 나왔다.

2.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얻은 것이다. 

3.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버린 것이다. 

4. 그런데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버리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택한 자들이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가 더하여 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 _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주장이 문제있음을 주장.

5. 나 바울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방법에 대해서는 완전히 버렸고, 이제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만 살려고 한다. 이것이 참된 <믿음>이다. 

6.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아,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되게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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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게바가 안디옥에 이르렀을 때에 책망 받을 일이 있기로 내가 그를 대면하여 책망하였노라 [12]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 [13] 남은 유대인들도 그와 같이 외식하므로 바나바도 그들의 외식에 유혹되었느니라 [14]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해설]


11절. 바울이 모든 자 앞에서 공개적으로 게바를 책망하다.(14절)


위 본문에서 가장 눈의 띄는 것은 바울이 게바를 공개적으로 책망했다는 것이다. 이전까지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력한 자들과 자기 자신을 비교해서 열등하지 않았는 것을 강조해 왔고, 그들로부터 복음의 내용을 전수 받은 것도 아님과 바울의 부르심도 그들에게서 요청된 것이 아님을 강조해서 설명해 왔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반 더 나간다. 바울이 게바(베드로)를 책망했던 일을 언급함으로 오히려 바울이 게바(예루살렘에 유력한 자 중 하나) 이상의 사도이기도 하다는 것을 드러낸다. 물로 게바보다 바울이 더 높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만큼 서로에게 동등한 권위가 있어서 누구라도 잘못을 행하면 서로 책망할 수 있는 권위를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12,13절. 게바다 안디옥에서 이방인과 식사를 자연스럽게 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그 자리를 피한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게바가 그와 같은 <외식>을 행함(13절)으로 다른 유대인들도 심지어 바나바까지도 그것에 미혹되었다는 것이다. 게바의 행동이 적절치 않았을뿐 아니라 오히려 그 상황에서 거짓 메시지까지 주변에 주게 된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1) 함께 식사하던 이방인들에게는 유대인들과 한 몸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것이다. 함께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예루살렘으로부터 올라온 유대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자리를 피했기 때문에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상처를 주었고, 이방인과 유대인은 여전히 그리스도 안에서도 하나일 수 없다는 메시지를 준 셈이다. 


  2) 베드로는 자신이 확신한 것에 대해서조차 '유대인들의 눈치'를 봄으로 자신의 확신을 불완전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10장에서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식사를 함께 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하나님께서 이방인을 더럽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행 10: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행 11:17-18) 『[17]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18] 그들이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이르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베드로는 이방인 고넬료와 식사한 것에 예루살렘에 소문이 나서 문제가 되자 그 모든 과정을 일일이 예루살렘 공회에서 설명함으로 <이방인에게도 구원얻는 믿음을 주셨다>는 결론을 내게 된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즉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까지도 유대인들과 똑같이 구원하신다는 것을 몸소 경험하고 증언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지금 안디옥에서 유대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리를 피하는 일을 벌인 것이다. 


이것은 베드로가 복음 안에서 가지는 확신을 온전히 붙잡지 못하고 유대인의 관습과 율법에 매인 행동을 함으로서,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불완전한 것처럼 들려지게 하는 큰 잘못을 한 것이다. 


14절. 그러므로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를 따라 바르게 행하지 아니함을 보고 모든 자 앞에서 게바에게 이르되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억지로 이방인을 유대인답게 살게 하려느냐 하였노라


  3) 베드로의 이와 같은 외식은 다른 유대인들과 심지어 바나바에게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베드로의 행동 하나가 교회 안에 상당히 큰 메시지를 전한 꼴이 되었고, 그릇된 베드로의 행동으로 안디옥 교회의 중심적인 사람들을 함께  외식하게 만들어 버렸다. 


  이 사건은 상징적 사건이 되고, 하나니의 복음을 훼손 시키는 사건이 되었다는 것을 바울이 간파하고 개인적인 책망이 아니라, 모든 사람 앞에서 공개적으로 책망함으로 베드로의 잘못을 지적할 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 전체에 <교육>을 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묵상]


1. 바울은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기쁘게 함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의 종, 즉 그리스도의 복음의 종임을 강조했다.(갈 1:10) 헬라인 '디도'에 대해서 '할례'를 요구하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바울은 굴복하지 않고 할례를 행하지 않았다.(갈 2:3-5) 그러나 베드로는 달랐다. 그는 유대인들을 거스르기 싫어서, 그리스도의 복음에 충실하지 못했다.(갈 2:12, 14) 그럼으로 인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만으로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복음의 내용은 불충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2. 바울은 베드로 개인의 잘못을 개인의 문제로만 보지 않았다. 그것은 그 한 사건이 가지고 있는 상징성과 영향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그와 같은 부정적인 영향력이 교회 안에 미쳤다. 그랬기 때문에 전체를 향한 공개적인 책망을 하였다. 

물론 바울이 베드로를 치리한 것은 아니지만, 교회는 영적인 지도자들을 통해서 그릇된 일에 대해서 개인적인 권면을 통한 훈계도 필요하지만, 공개적인 책망을 통해서 교회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공개적으로 드러내야 할 때가 있다. 이것을 치리라고 하는데, 가능한 치리 해야 할 일이 없도록 해야 하지만, 만약 그 잘못이 상징성이 있고, 부정적인 파급효과가 크다는 공적 치리를 통해 교회를 순결하게 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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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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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1] 십사 년 후에 내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다시 예루살렘에 올라갔나니 [2] 계시를 따라 올라가 내가 이방 가운데서 전파하는 복음을 그들에게 제시하되 유력한 자들에게 사사로이 한 것은 내가 달음질하는 것이나 달음질한 것이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3] 그러나 나와 함께 있는 헬라인 디도까지도 억지로 할례를 받게 하지 아니하였으니 [4]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들 때문이라 그들이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가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5] 그들에게 우리가 한시도 복종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복음의 진리가 항상 너희 가운데 있게 하려 함이라


[6] 유력하다는 이들 중에 (본래 어떤 이들이든지 내게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나니) 저 유력한 이들은 내게 의무를 더하여 준 것이 없고 [7] 도리어 그들은 내가 무할례자에게 복음 전함을 맡은 것이 베드로가 할례자에게 맡음과 같은 것을 보았고 [8]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의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9] 또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해설] 


1절. 14년 후에


여기서 말하는 14년 후라는 시점이 언제인가가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와 긴밀하게 맞물려 있다. 내용상으로 보면 갈라디아서 2장에 언급된 내용이 사도행전 15장에서 다루어지는 문제(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해야 하는가?)와 같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이방인의 할례> 문제에 대한 이슈를 다루었다는 것은 같은 사건이라 볼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는 사도행전 15장 이후(주후 49년 이후)로 넘어가게 될 것이다.


   [참고]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기를 주후 49년으로 보고 14년 전이면 주후 35년이 된다. 여기서 다시 3년(아라비아에서의 3년) 전으로가면 주후 32년이 된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주후 29년으로 보니, 바울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사역 이후 3년 뒤에 회심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반면 사도행전 15장의 내용과 다른 것도 있다. 일단 '디도'를 데리고 올라갔다는 것에서는 다르다. 그리고 논의 결과에 대해서도 차이가 난다. 이방인에게 할례를 요구하지는 말자고 결정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외의 요청에서는 차이가 난다.


 (갈 2: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행 15:19-21) 『[19]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하지 말고 [20]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옳으니 [21]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라 하더라』

 

또한 사도행전은 예루살렘에서 행해진 공적인 회의인데 비해, 갈 2장에서 14년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은 <사사로이 한 것>이다. 


이와같이 갈라디아서의 기록연대를 이른 시기로 혹은 좀 늦은 시기로 잡을만한 증거들이 둘다 있을 경우에는 좀 열린 태도를 가지고 본문의 내용을 살펴봐도 좋을 듯 하다.  



3절. 디도에게 억지로 할례를 시키지 않았다.


디도가 헬라인이기 때문에 유대인들은(거짓 형제들) 디도와 함께 예루살렘에 오고 혹 성전에라도 들어갈거라면 <할례>를 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바울은 그들과 타협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울이 원칙주의자는 아니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바울이 <디모데>를 제자로 불러 함께 사역하고자 할 때 그의 아버지가 헬라인인 것을 알았기 때문에 할례를 행했다고 나온다. 


 (행 16:1-3) 『[1] 바울이 더베와 루스드라에도 이르매 거기 디모데라 하는 제자가 있으니 그 어머니는 믿는 유대 여자요 아버지는 헬라인이라 [2]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형제들에게 칭찬 받는 자니 [3] 바울이 그를 데리고 떠나고자 할새 그 지역에 있는 유대인으로 말미암아 그를 데려다가 할례를 행하니 이는 그 사람들이 그의 아버지는 헬라인인 줄 다 앎이러라』


이것은 매우 의미하는 바가 큰데, 그 앞에 사도행전 15장에서는 바울이 예루살렘 유대 그리스도인 지도자들과 <이방인의 할례>문제로 심각하게 논쟁해서 이방인에게 할례의 짐을 지우는 것이 합당하지 않다고 해놓고, 16장에서 와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지도 않았음에도 바울은 먼저 사역을 위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도록 했다. 


그런데 갈 2장에서는 유대인들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디도'에게 할례를 의도적으로 시키지 않았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 멋대로 기준을 바꾸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그는 본질적인 것과 비본질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할례>는 본질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 때 그 때 상황에 따라 고려하면서 결정하면 될 문제인 것이다. 



 디모데는 앞으로의 사역을 위해서 <할례>를 받게 하는 것이 낫겠다고 판단했지만, 디도의 경우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신학적이고 전체적인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어떤 요구에도 <할례를 받지 않도록>한 것이다. 



8절. 베드로는 유대인의 사도로,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게바, 야고보, 요한)들에게도 동등한 인정을 받았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과 친교의 악수를 했고, 서로 사역의 대상(유대인, 이방인)이 차이가 있을 뿐이지 어떤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다만 가난한 자를 돌봐 달라고 요청한 예루살렘의 교회 요청에 대해서는 완전히 수긍하지만, 그것조차도 전혀 새로운 요구라기 보다는 이미 바울이 신경써서 하고 있던 사역임을 밝힌다. 즉, 복음 이외의 것에 있어서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빚진 것이 전혀 없음을 말한다.



[묵상/정리]


1. 갈라디아서는 앞부분에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들을 향해서 책망한 것 이후로 하나의 일관된 내용은 바울 복음이 사람에게서 전수 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받은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받았던 오해가 그와 관련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바울의 사도성에도 열등하다고 보았고(상대적으로 예루살렘의 유력한 사도들에 비해),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전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추가적인 손질이 필요했다고 봤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논리는 상당히 사람들의 마음에 합리적으로 들렸을 것이다.


사실 바울은 그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에 비하면 <듣보잡>이었기 때문이다. 처음 바울의 말씀을 듣고 교회가 세워졌을 때는 몰랐지만,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들어와 다른 이야기를 하지 쉽게 넘어간듯 하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한 충분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인지 바울은 꽤 많은 분량을 이야기를 하는데 집중한다. 아직까지 다 끝난게 아니다. 갈 2:11-14까지 이어진다.


2. 바울을 <이방인의 할례> 이슈로 초대 교회의 본고장인 예루살렘 유대인 교회들과 치열하게 논쟁을 하긴 하지만, 그 문제가 복음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할례나 무할례나 복음의 본질은 아닌 것이다. 바울이 싸웠던 논지는 이것이다. <할례를 해야만 한다>는 것에 대해서 <할례를 필수는 아니다>이렇게 말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의 글 속에서는 마치 <할례를 하지 말아야 할 것>처럼 들려질 수 있겠다.(마치 율법으로 말미암은 구원이 아니다라고 말할 때, 율법은 불필요한 것이다라고 오해하는 것처럼)


바울은 상당히 균형잡혀 있는 성도다. 그러나 그 균형이 늘 중간을 택하는 것은 아니다. 치우친 자들에게 균형을 잡아주기 위해서 상당히 강한 어조로 반대 방향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의 진심을 알기 위해서는 바울의 입장이 정확히 무엇인지에 대한 다각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바울은 지금 논쟁 중이기 때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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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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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8] 그 후 삼 년 만에 내가 게바를 방문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그와 함께 십오 일을 머무는 동안 [19] 주의 형제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하였노라 [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다 [21] 그 후에 내가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에 이르렀으나 [22]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23] 다만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전에 멸하려던 그 믿음을 지금 전한다 함을 듣고 [24] 나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해설]


18절. 그 후 3년 만에


다메섹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나와 아라비아에서 3년의 시간을 보낸 후 바울은 게바를 만나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이 때가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처음으로 예루살렘으로 간 때이며, 이 때 처음 유대 사도들을 만난 것이다. 이 때의 배경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 26-30에 나와 있다.


 (행 9:26-30)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18절. 그와 함께 15일을 머무는 동안... 야고보 외에 다른 사도들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은 게바와 함께 있었던 15일 동안 복음에 대한 어떤 이야기도 없었을 것이라고 보기도 하는데, 현실성이 많이 떨어진다고 보인다. 복음을 전하는 대표적인 두 사도가 15일을 함께 보내면서 복음에 대한 이야기가 없었다는 것이 오히려 더 어색하다. 오히려 진지하게 자신들이 이해하고 받은 복음을 서로 나누었을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게바(베드로)에게서 복음의 내용을 전수받는 차원에서의 만남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바울이 지속적으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며, 15일 동안 함께 있었지만 그 시간을 통해서 복음을 전수받은 것은 아니라는 행간의 의미를 읽어야 할 것이다.(그 기간 중 바울과 베드로는 이미 자신의 복음에 대한 내용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고, 자신의 복음을 이야기하는 정도의 나눔이 있었을 것이라 본다) 그 기간 중 야고보(예수님의 동생)  정도만 보았지 다른 사도들은 만나지도 않았다. 즉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을 형성하는데 그 기원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에게 있지 않음을 바울은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잊지는 말아야 한다. 


22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유대의 교회들이 나를 얼굴로는 알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 교회들은 사실 바울을 제대로 본자는 거의 없다는 말이다. 즉,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만 잠시 보았을 뿐 유대인들과의 공개적인 접촉은 거의 없었음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자신이 예루살렘 사도들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음을 강조하는데, 이는 갈라디아 교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의 복음에 비해 열등하거나 부족하다는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묵상]


갈 1:11절 이후로 1장의 마지막까지 바울이 강조하고 있는 논지는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게서 직접적으로 온 것임을 회심 후 자신의 활동을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바울이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과 자신과의 연관성에 섯을 긋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거나 그들과 자신을 구별하기 위함이 아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지금 바울이 직면한 문제(오해)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비해서 열등한 복음(충분하지 못한 복음)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상황이고, 더 핵심적인 문제는 그래서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추가적인 어떤 내용들을 가미하여 갈라디아 교회를 그릇된 길로 인도 했다는 것에 있다. 지금의 상황이 이와 같은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이 예루살렘 교회 사도들과의 관계성 속에서 대등한 위치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더불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이 예루살렘의 게바다 야고보가 전하는 복음에 대해서 불충분하다고 인정하는 것도 아니다. 



 갈라디아서를 단순히 복음과 율법의 문제로만 봐서는 안된다. 또한 바울이 처한 입장에 대해서도 이해가 있어야 바울의 표현이 좀 더 엄밀한 의미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바울이 게바(베드로)와 야고보의 인정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예루살렘 공회의 권위를 무시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그 권위를 인정해주는 사람이 바울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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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니라 [12]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13]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행한 일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여 멸하고 [14] 내가 내 동족 중 여러 연갑자보다 유대교를 지나치게 믿어 내 조상의 전통에 대하여 더욱 열심이 있었으나 [15]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그의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16] 그의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을 때에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17] 또 나보다 먼저 사도 된 자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고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갔노라


[해설] 


11절. 내가 전한 복음은 사람의 뜻을 따라 된 것이 아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다. 


이제부터 바울은 본격적인 자신의 논지를 펴려고 한다. 우선 <바울이 전한 복음의 신적 계시성>에 대한 강조다.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이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배운 것도 아님을 강조한다. 이와 같은 강조는 갈라디아서를 시작하는 첫 구절부터 드러났던 방식이다. 


 바울의 사도됨이 사람에게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것(갈 1:1)임을 강조한다. 


방식은 비슷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좀 다르다. 갈 1:1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강조이지만, 갈 1:11,12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직접적인 계시>로 말미암은 것에 대함이다. 바울의 서신서 여러곳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을 변호하는 경우가 종종있다. 그러나 갈라디아서에서의 주 내용은 바울의 사도성에 대한 변호가 아니라, <바울이 전하는 복음의 직접적 계시성>에 대한 것이다.


13절. 내가 이전에 유대교에 있을 때에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회심하기 전의 자신의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9장에 잘 드러나 있다. 유대인 중 다른 누구보다 유대교에 열심이었고,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박해하려고 했던 자였다. 


 (행 9:1-2) 『[1]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려 함이라』



16절. 내가 곧 혈육과 의논하지 아니하고


하나님께서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부르셔서 이방인의 사도로 세우실 때, 사울은 이미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을 만나러가지 않았다.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세멕으로 돌아왔다. 이 부분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은 사도행전은 9장에 언급되는데, 바울이 아라비아로 갔다는 것에 대해서는 사도행전에 언급이 없다. 따라서 사도행전의 기록과 갈라디아서의 기록은 조합해 보면, 사울은 다메섹에서 아나니아를 통해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를 하다가 유대인에게 미움을 받고 생명이 위험해지자 그것에서 피신해서 <아라비아>로 간 것 갔다. 


거기서 사울은 3년 정도의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이 때 바울은 하나님을 통해서 직접적인 복음의 내용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그 기간 중 셋째 하늘에도 올라갔다 온 신비한 경험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후 12:2, 개역)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 십사 년 전에 그가 셋째 하늘에 이끌려 간 자라 (그가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나는 모르거니와 하나님은 아시느니라)』 

 

여기서의 핵심 논지는 사울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이방인의 사도로 세워졌을 때, <복음의 내용>에 대해서 사람에게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순수하게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직접적인 계시를 통해 받은 것임을 강조한다. 


 이는 갈라디아 교회에 들어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사울에 대해서 어떤 모함을 했는지 짐작케 하는 근거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들을 교란하기 위해서 들어온 자들은(1:7) 바울은 다른 사도들보다 늦게 부름을 받았고, 예수님을 직접 따라다니면서 배운 사도가 아니기 때문에 사도로서의 권위도 예루살렘에 있는 유대인 사도들에 비해서 떨어지고, 그가 가르치는 복음은 아직 미숙하기 때문에 예루살렘 사도들의 지도를 받아야 한다고 가르쳤을 것이다. 즉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도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보다 바울의 복음은 불완전하여 보완이 필요하다고 넌즈시 말하자, 갈라디아 교회들은 쉽게 그들의 논리에 넘어갔던 것 같다. 



[묵상]


1.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복음의 권위는 어디에 있는가?


바울은 자신이 전한 복음의 권위를 하나님에게서 받은 것이라고 했다. 즉, 신의 직접적 기원에 둔 것이다. 바울 뿐 아니라 유대 사도들의 복음도 실은 다 마찬가지다. 다만 이들은 복음을 전해야 하는 대상이 다른 것이었다. 그래서 본질은 다르지 않았지만, 구체적인 요구사항은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한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은 어떤가? 지금도 바울과 같이 <신의 직접적 계시>를 받아야만 하는가? 그건 아니다. 이미 바울을 통해서 그리고 유대 사도들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사도들의 복음은 정리가 된 것이다. 우리의 과제는 그것과 다른 <복음>을 직접적으로 받는 것에 있지 않다. 이미 신적 기원을 통해서 기록되고 정리된 복음을 명확하게 파악하여 아는 것에 있다. 


우리는 누군의 복음이 어떤 방식으로 주어졌는가에 대해서 주목할 필요는 없다. 그가 전하는 복음의 내용이 성경적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아무리 신비한 역사와 권세가 나타난다고 해도, 성경에서 말하는 복음을 떠난 내용을 권위를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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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본문

2. 해설

3. 묵상



[1.본문]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해설]


[6절]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만약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이른 시기에 썼다면(주전 49년 이전) 1차 전도여행의 기간을 대략 3년 이내로 보는데, 힘들게 복음을 전하여 세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1,2년이 채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복음(거짓 복음)으로 거의 넘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멘붕의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에 다시 한번 힘쓰고 돌아왔었다.




(행 14:22-23)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은 외부적인 환난과 박해를 염두하고, 이들의 믿음을 견고히 할 것에 대해서 당부하고 왔으나, 갈라디아 교회들은 외부적인 환난이 아닌 변질된 복음, 거짓 복음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해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바울의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알수는 없으나 다른 복음은,


7절. 갈라디아 성도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것이다.

9절. 바울을 통해 전해 받은 것과 핵심적인 관점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도 다르며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과도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핵심에 있어서도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10절. 바울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님을 언급함으로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다른 복음은 복음의 본질에서는 떠났지만, 사람들의 이성이나 혹은 정서에 잘 들어맞는 형태로 변형된 복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성도들까지 다수가 <이같이 속히 (참 복음으로부터)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사하지만 다른 복음은 성도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독>과 같은 것이었다.



[8절]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저주를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을 변질시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혹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의 유력한 사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역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9절)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에 대해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갈라디아서는 인사말을 마치고 본론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감정이 중간 중간 충분히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따듯하고 온화한 감정은 아니지만, 그릇된 자식의 행실과 가치관을 탓하는 부모의 심정이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바울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나며, 감정적인 경고등도 모두 드러난다. 바울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이 모두 드러난다.


(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언성을 높여 혼을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낳은 자식과 같은 교회 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첫 이방 선교를 통해서 얻은 첫 아이이기 때문이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3. 묵상]


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충분했지만, 듣는 성도의 이해와 확신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이해는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만큼 분명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생생하게 전할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듣는이의 이해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복음은 다양한 상황과 입장 혹은 질문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들려져야 한다. 복음은 입체적이지만, 우리는 한번에 한 면씩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바울이 전해도 이와같다면, 우리는 복음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해야 하겠지만,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을 보는 수고를 해야한다. 구약도 다르지 않다. 구약의 말씀이 예수를 지향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바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전한 복음도 충분한 이해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다양한 측면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단이 발생하는 그 지점은 정통교회가 잘 풀어가르치지 못한 부분임을 알아야한다.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곳에서 [다른복음]이 자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단의 긍정적 역할은 정통교회의 사각지대를 보여줌으로, 우리로 보완할 것을 가르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복음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반복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내용의 무한반복이 아니라 풍성한 내용의 다각적 반복이어야 한다.


2. 사람에게 이성적 정서적 합당함이 진리의 합당함과 다를 수 있고, 심지어 치명적인 위험성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이성에 부합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말은 복음이 사람의 이성과 감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해 그럼 측면에서 더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복음으로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분명한데, 하나님의 진리에 가깝기 보다는 우리의 정서와 이성에 더 가깝게 여겨지기에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즉 복음의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이 구분이 어려우면, 우리 마음에 더 부합한 주제들인 주변에 있는 것들이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들이 들어왔고 오늘날은 성공과 번영과 기적과 능력이 들어온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복음 내용의 중심과 주변이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을 배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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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개역개정]


[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도 된 바울은 


[2] 함께 있는 모든 형제와 

     더불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에게 


[3]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4]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이 악한 세대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하여 

    자기 몸을 주셨으니 


[5] 영광이 그에게 세세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해설]


1. 바울의 서신은 주로 편지를 받는 대상의 교회의 이름을 따거나 받는 사람의 이름을 따서 지어져있다. 그리고 보통 바울이 교회에 편지를 보낼 적에는 본인이 전도하여 개척한 교회에 대한 AS차원에서의 서신이다. 물론 <로마서>의 경우는 예외다. 그러나 고린도전후서나 데살로니가 전후서 그리고 빌립보서와 같은 서신들은 바울의 전도 활동을 통해서 세워진 교회에 보낸 편지다.


2. 갈라디아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바울의 전도여행 내용을 읽어보면 '갈라디아'라는 언급이 나오기는 하지만 그곳은 빌립보와 같은 식의 한 지명이 아니다. 갈라디아라는 지역의 이름인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2절에서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라고 언급한다. 비시디아 안디옥,루스드라, 이고니온, 데베라는 도시를 포함하고 있는 지역이 갈라디아인 것이다. 

 

3. 그러나 사실 일반적으로 <갈라디아 지역>이라고 하면 위에 언급한 지명이 있는 남갈라디아 지역이 아니라, 북갈라디아 지역(위 지도 참고)이다. 남갈라디아 지역은 나중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편입된 곳이기에 <갈라디아 사람들>(갈 3:1)이라고 했을 때 일반적으로는 북갈라디아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여기에서 약간의 논란이 있다. 


4. 일반적인 북갈라디아 지역의 교회들에게 보낸 편지라면, 바울의 갈라디아서는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가 된다. 왜냐하면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통해서 전도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이기 때문이다. 2차 전도여행때 1차 전도여행한 지역인 남갈라디아 지역을 지나 유럽으로 넘어가기 전에 북갈라디아 지역을 다녀간거 같다.(행 16:6) 그렇게 되면 적어도 2차 전도여행 이후에 갈라디아서를 쓰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런데 갈라디아서 안에 중요한 이슈 중에 하나인 '할례'문제를 다루는데 이 문제와 관련하여 사도행전 15장에 공식적으로 다루고 있고 예루살렘 공의회에서 공식적인 결론을 맺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갈라디아 지역 교회에서 '할례' 문제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 혼선이 있다는 것은 갈라디아서가 사도행전 15장 이전, 즉 예루살렘 공의회가 있기전(주전 49년)에 기록된 것이라는 견해가 있는 것이다. 그게 맞다면 <갈라디아 여러 교회들>이란 바울이 1차 전도 여행을 통해서 세웠던 <남갈라디아 지역> 교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 하겠다.  



   * 좀 더 세부적인 논의가 더 있긴 하지만, 이 정도로만 정리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어떤 분은 남갈라디아 지역과 북갈라디아지역에 있는 모든 교회를 포함하여 말하는 것이라고 말씀하기도 하신다. 

  * 갈라디아서의 저작 시점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정작 논의를 하는 분들도 갈라디아서의 본문을 파악하는데 저작 시가 이르던 좀 늦던 큰 상관은 없다고 보는듯 하다. 



5. 이제 다른 주제로 넘어가서 바울이 자신의 사도됨을 설명할 때,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예수님과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은 표현은 본론에 가서도 자주 반복된다. 특히 자신의 사도됨을 <사람>으로부터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님>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한다. 그러니까 바울은 갈라디아서의 시작부터(1:1) 자신의 이야기 하려는 논지의 <색깔>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갈라디아서를 읽다보면 논지 파악이 혼란스럽다고 한다. 나도 다르지 않은데... 읽으면서 느낀 것은 갈라디아서는 차분히 앉아서 쓴 글이라기 보다는, 약간은 감정적으로 흥분한 상태에서 쓴 글로 보인다. 그래서 중간 중간 차분한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감정적 표현들을 한다. 논리적인 글이 아니라는 느낌 보다는 바울의 감정이 많이 뭍어나는 글이라 생각하면 보면 좋을 것 같다. 


 

6. 한 절에 축약한 복음(4절)


간략하게 정리하면 <그리스도께서 자기 몸을 주셨다>는 것이다. 왜? 우리를 <이 악한 세대에서 건지시고>, <우리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그리하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역사는 <우리 아버지의 뜻을 따라> 된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짧지만 명확한 복음의 내용이다. 


자세한 설명보다는 갈라디아서의 편지의 서문의 특징을 생각해 보자. 다른 편지 서문에 비해 상당히 짧은 편이다. 이 짧은 인사말 속에서 바울은 자신의 사도성이 하나님에게서 온 것과 복음의 핵심이 무엇인지를 선명하게 밝힌다. 갈라디아서의 글이 상당히 밀도 있고, 공격적(?)인 글이 될 것임을 예견해 볼 수도 있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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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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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바울의 서신 중 하나인 갈라디아서에 대해서 조금씩 소개해 볼까 한다.


먼저 밝힐 것은 이글은 전문가의 글이 아니다. 신학을 공부하기는 했지만, 원어의 뜻까지 세밀이 살피고 다양한 학자의 견해까지 소상히 밝힐만한 능력은 없는 자다. 다만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읽으면서 그 안에 핵심적인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를 즐겨하는 자이기에 나와 같이 성경을 사랑하고 배우기를 원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자 쓰는 글이다


갈라디아서로부터 시작하게 된 것은 이 본문에 가장 자신이 있어서가 아니다. 최근에 공부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좀 더 자신있는 본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내가 읽는 방식을 함께 나누고 또 점검도 받으면서 가고 싶은 마음이기 때문에 이 본문을 택했다.(어떤 페친분의 개인적 요청이 자극이 되었는데, 울고 싶었는데 뺨을 맞은 격이기도 하다) 


끝까지 완전히 정리한 다음에 쓰는 글이 아니기 때문에 본문을 다루어가면서 조금씩 논지가 바뀔수도 있다. 그래서 열린 글이 아닐까 싶다. 나는 교리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고, 글을 써내려가는 성경 기자의 의중을 파악하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의중의 메시지가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가 찾아보고 싶은 것이다. 끝을 알아버린 글처럼 읽기에 흥미가 없는 책은 없을 것이다. 결론도 중요하지만, 그 결론에 이르게 되는 논지도 중요하다고 본다. 보통 글은 앞에서부터 읽는 것이고 읽어가면서 처음 읽은 것이 보완되기도 하고, 구체화되기도 하는 법이다. 종종 처음의 생각이 그게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마지막까지 다 읽고 하게 되기도 한다. 나는 이런 과정이 모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학적인 토론을 할만큼 실력은 없으니, 읽으시는 분들 중 마음에 걸리는 부분이 있으면 댓글로 남겨주시라. 일일이 답변드릴 능력은 안되지만, 타당한 견해는 언제든지 수용할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바로 수정할 수도 있고, 검토해서 나중에 다시 글을 쓰게 될때 사용할 수도 있겠다. 객관적인 팩트의 오류가 있다면 즉각적인 지적을 해주시면 좋겠다. 논문을 쓰듯이 쓰는 작업이 아니라 편하게 쓰는 글이므로 중간중간 오류가 있을 것이다. 지적해 주시면 감사의 마음으로<바로> 수정하도록 할 것이다. 어떤 주제에 대해서 견해가 다르시면 그것도 남겨주시면 감사하겠다. 다른 견해도 듣고 내 생각도 보완하도록 하겠다. 


나는 성경은 읽으면 해석이 되는 책이라고 믿는다. 원어가 아닌 모국어로 번역된 성경이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번역자체가 가지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인정하는, 핵심을 흔드는 결정적인 오류는 없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성경학자들이 그와 같은 오류를 알고도 남겨두지는 않았을테니...그렇다면 시중에 나와 있는 공인된 번역본들을 믿고 봐도 충분하다고 나는 본다. 사소한 표현의 차이로 인한 오해에 집착하고 싶지는 않다.(그것은 학자들의 몫이라 본다) 이런 생각으로 쓰여지는 글이니, 도움이 되겠다 싶은 분들은 참고하시고 이런류의 글에 관심이 없는 분들은 패스하시라.


다른 것도 마찬가지지만, 이 글도 나 자신을 위한 글이다. 내가 과제를 하기 위해 내가 나에게 과제를 내 준 꼴이다. 그리고 그 과제를 해 가는 과정을 나는 즐기고 싶을 뿐이다. 그 과정이 누군가에게도 도움이 된다면 이는 덤이다. 


 - 읽어 주신 분들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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