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2. 해설

3. 묵상



[1.본문]


[6]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7]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 함이라 [8]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



[2. 해설]


[6절]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


만약 바울이 갈라디아서를 이른 시기에 썼다면(주전 49년 이전) 1차 전도여행의 기간을 대략 3년 이내로 보는데, 힘들게 복음을 전하여 세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가 1,2년이 채 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다른 복음(거짓 복음)으로 거의 넘어가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바울의 입장에서 보면 거의 멘붕의 상태라고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의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할 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의 충동으로 돌에 맞아 거의 죽을 뻔 한 적이 있었다.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갈라디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돌아오는 길에 바울은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오면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는 일에 다시 한번 힘쓰고 돌아왔었다.




(행 14:22-23) 『[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23]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 하며 그들이 믿는 주께 그들을 위탁하고』

바울은 외부적인 환난과 박해를 염두하고, 이들의 믿음을 견고히 할 것에 대해서 당부하고 왔으나, 갈라디아 교회들은 외부적인 환난이 아닌 변질된 복음, 거짓 복음에 의해서 내부적으로 허물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 바울의 허망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상하게 여기노라> 이해하지 못한다기 보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든 바울의 심적 상태를 말하는 것이리라 생각한다.



[7절]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말하는 것인지 아직 알수는 없으나 다른 복음은,


7절. 갈라디아 성도들을 교란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게 하려는 것이다.

9절. 바울을 통해 전해 받은 것과 핵심적인 관점이 다른 것임을 알 수 있다.

- 즉, 그리스도의 복음과도 다르며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과도 다른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 표현은 바울 자신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의 복음과 핵심에 있어서도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말한다.


10절. 바울 자신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사람이 아님을 언급함으로서 <다른 복음>은 사람들을 만족하게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즉, 다른 복음은 복음의 본질에서는 떠났지만, 사람들의 이성이나 혹은 정서에 잘 들어맞는 형태로 변형된 복음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지도자로부터 시작해서 일반 성도들까지 다수가 <이같이 속히 (참 복음으로부터) 떠나 다른 복음>으로 넘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의 복음과 유사하지만 다른 복음은 성도들에게는 매우 위험한 <독>과 같은 것이었다.



[8절]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바울이 저주를 선언하고 있는 구절이다. 복음의 핵심 내용을 변질시킨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가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그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혹 예루살렘에서 온 유대의 유력한 사도들이라고 할지라도 그들이 다른 복음을 전한다면 그 역시 저주를 받을 것이다. 누구든지 바울이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9절)


바울이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에게 임할 [저주]에 대해서 두 번이나 반복하여 언급하고 있다. 지금 갈라디아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심정을 엿볼 수 있는 표현이다.





갈라디아서는 인사말을 마치고 본론을 시작하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하고 있다. 갈라디아서는 바울의 감정이 중간 중간 충분히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따듯하고 온화한 감정은 아니지만, 그릇된 자식의 행실과 가치관을 탓하는 부모의 심정이 뭍어나고 있는 성경이다. 바울의 당황스러움이 드러나며, 감정적인 경고등도 모두 드러난다. 바울의 허망함과 안타까움이 모두 드러난다.


(갈 4:20)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바울은 언성을 높여 혼을 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목숨을 걸고 낳은 자식과 같은 교회 이기 때문이다.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을 받고 첫 이방 선교를 통해서 얻은 첫 아이이기 때문이다.


(갈 4:19)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3. 묵상]


1. 바울이 전한 복음은 충분했지만, 듣는 성도의 이해와 확신은 불충분했다.

그래서 성도들이 잘못했다는 말은 아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이해는 한계를 가질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바울만큼 분명하게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복음 생생하게 전할수 있는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사람의 말이라는 것은 불완전한 것이다. 듣는이의 이해와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 인간의 한계다.

그래서 복음은 다양한 상황과 입장 혹은 질문 속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다시 들려져야 한다. 복음은 입체적이지만, 우리는 한번에 한 면씩 밖에는 보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바울이 전해도 이와같다면, 우리는 복음을 알고 이해하기 위한 노력을 반복적으로 해야 한다. 바울의 서신을 통해서 해야 하겠지만, 야고보서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서의 말씀과 요한계시록의 말씀 속에서도 복음을 보는 수고를 해야한다. 구약도 다르지 않다. 구약의 말씀이 예수를 지향한다는 것은 우리가 믿는바다.

복음을 전하는 자도 마찬가지다. 바울이 전한 복음도 충분한 이해가 될 수 없다면 우리는 더욱 그렇다. 따라서 우리는 성도들에게 복음의 다양한 측면을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수고를 해야 한다.

죄송한 표현이지만, 이단이 발생하는 그 지점은 정통교회가 잘 풀어가르치지 못한 부분임을 알아야한다.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곳에서 [다른복음]이 자라는 것이다. 어찌보면 이단의 긍정적 역할은 정통교회의 사각지대를 보여줌으로, 우리로 보완할 것을 가르치는 <몽학선생>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복음은 전하는 자나 듣는 자나 반복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단순한 내용의 무한반복이 아니라 풍성한 내용의 다각적 반복이어야 한다.


2. 사람에게 이성적 정서적 합당함이 진리의 합당함과 다를 수 있고, 심지어 치명적인 위험성이 될수도 있다는 것이다.

다른 복음의 특징 중 하나는 <사람을 좋게 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과 이성에 부합하다는 특징을 가진다. 이 말은 복음이 사람의 이성과 감성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다른 복음]은 사람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에 비해 그럼 측면에서 더 밀착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험한 것이다.

복음으로서 하늘로부터 온 것임은 분명한데, 하나님의 진리에 가깝기 보다는 우리의 정서와 이성에 더 가깝게 여겨지기에 위험한 것이다.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은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즉 복음의 내용의 핵심과 주변을 구분할수 있어야 한다. 이 구분이 어려우면, 우리 마음에 더 부합한 주제들인 주변에 있는 것들이 중심으로 들어오도록 허용하기 때문이다. 갈라디아 교회에서는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들이 들어왔고 오늘날은 성공과 번영과 기적과 능력이 들어온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 복음 내용의 중심과 주변이 무엇인지를 보는 안목을 배우는 기회가 되길 소망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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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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