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렉산더의 죽음 이후 그 위를 계승할 사람이 없자, 알렉산더의 장군 중 4명이 헬라제국의 영토를 분할하여 통치하게 됨.




  2. 마게도냐는 카산데르
    애굽과 남 시리아는 프톨레미 라기
    트라키아는 리시마쿠스
    지중해로부터 중앙아시아까지는 안티고누스.




  3. 안티고누스의 독주를 막으려고 나머지 3명이 연합.
    프톨레미가 안티고누스에게 아시아 지역의 땅을 요구. 전쟁이 발발하는데.. 프톨레미의 장군인 셀류쿠스가 나가서 전쟁을 치룸. 프톨레마는 유다와 페니키아 지역을 확보함.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 애굽으로. 알렉산드리아...10만명.(안식일에 예루살렘 공격하여 승리)




  4. 세류쿠스는 그 사이에서 시리아 지역을 차지학고 프톨레미로부터 독립.





세류크스와 프톨레미 간의 긴장 관계. 세류크스의후손 중 대왕 안티우쿠스 3세. (주전 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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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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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페르시아의 크세르크세스(아하스에로)의 번영. 헬라 도시국가를 정복하려는 전쟁에서 패배

  2. 그리스 도시국가들은 연합으로 힘을 모으기 힘듬. 마케도니아의 왕 필립이 첫 헬라연합을 이룸(스파르타는 제외) 큰 뜻을 이루기 전에 죽음.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왕을 이어받음.

  3. 알렉산더는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심. 헬라의 가치관을 지님. 정복과 함께 문화를 전파. 자승심.

  4. 소아시아, 페니키아, 애굽정벌(신의 아들),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거쳐 본격적인 페르시아 정복. 핵심적인 도시들을 정복함.

  5. 백성들의 환대를 받음. 해방군으로 인식할 정도.

  6. 인도의 접셩까지 가려했으나 군인들의 반대로 멈춤

  7. 11년 간의 정복전쟁으로 제국을 형성. 33세 열병으로 사망.

  8. 사망후 아들이 태어남.
  9. (주전 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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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해설]


[4:1] 내가 또 말하노니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어렸을 동안에는 종과 다름이 없어서 [2] 그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나니 [3] 이와 같이 우리도 어렸을 때에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 있어서 종 노릇 하였더니



일반적인 원리로부터 시작한다. 유업을 이을 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지만, 임시적으로 제한을 받을 때가 있다.

예를 들면,


1. 어렸을 동안에는 '종'처럼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후견인과 청지기 아래에 있는다. 

2. 이와 같이 우리들도 '아들'이지만, 어렸을 때에는 이 세상의 초등학문 아래에서 종노릇했다.


이 원리는 당시 일반적인 이야기를 통해서 앞으로 바울이 하려고 하는 논리를 이해시키기 위함이다. 이미 있던 제도인 '초등교사'(몽학선생)의 역할이 주인의 자녀를 훈육하는 일을 담당했기에 주인의 아들이었지만 마치 그 초등교사의 통제 아래에서 시간을 보내야 할 때가 있었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원리도 이와 같다는 것이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7] 그러므로 네가 이 후로는 종이 아니요 아들이니 아들이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유업을 받을 자니라



하나님께서 이전까지는 자기 아들들을 율법(초등교사) 아래에 두셨다. 그리고 초등교사(율법)은 하나님의 아들을 훈육하듯이 엄격하게 대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어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때가 된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들(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에게까지)을 더이상 율법의 아래에 두지 않을 때가 된 것이다. 즉 초등교사(율법) 아래에서 자기의 아들을 해방시키신 것이고 원래의 위치인 아들의 신분을 주실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에서 나게 하시고, 그를 통해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셨다. 이것은 우리에게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제 하나님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대속, 부활 그리고 성령의 사역은 하나의 신호탄처럼 하나님의 아들들을 율법 아래에서 해방되어 아들의 자격을 누리는 때가 되었음을 알려주는 사건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속량하신 이후로는 우리가 종이 아니요 아들이다. 시간이 꺼꾸로 흐를 수 없는 것처럼 이제 아들이 된 자는 다시 초등교사 아래로 들어가야 할 이유가없다. 하나님으로부터 유업을 받을 자의 신분만 남은 것이다. 



[묵상]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신 것은 그 이전 시대와 그 이후 시대를 구분하는 신호탄이 된 것이다. 그 이전에 우리를 인도했던 것은 율법(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이었다. 유대인에게는 모세의 율법이요, 이방인들은 마음에 새겨진 율법, 양심이었을 것이다. 핵심은 자신의 공로와 수고로 이룰 수 있는 의가 구원의 핵심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시간이 일부러 두신 것이다. 마치 어린 자식에게 초등교사를 붙여 어린 시절의 훈육을 담당하듯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 시대는 율법과 양심이라는 초등교사가 유대인과 이방인을 훈육했다. 마치 자신이 주인인 것처럼 그리고 우리는 그의 종인 것처럼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류의 역사에 그와 같은 시간을 허락하신 것이다. 즉 율법의 종되어 살아야 했던 기간이 필요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영원히 그 아래에 두고자 한 것은 아니다. 왜?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때가 되었다. 더 이상 초등교사인 율법에 맡기지 않아도 될 때가 된 것이다. 


그 때에(때가 차매) 하나님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율법 아래에 보내셨고, 그 가운데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 마치 모세를 애굽의 종 되었던 때에 종의 아들로 태어나게 하시어 그 백성을 애굽에서 건져내셨던 것처럼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을 통해 이제 우리는 종이 아니라 아들이었음이 분명해졌다.(사실 그 전까지는 초등교사의 통제 아래에 맡겨졌기 때문에 주인의 아들인지 종이었는지 확인할 방법이 모호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심으로 우리가 '종'이 아니라 '아들'이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신 것이다. 그것을 바울은 '아들의 영을 보내셨다'는 것으로 표현한듯하다. 그 때로부터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향해서 '아빠 아버지'라는 고백을 하게 되는 새로운 관계로 들어가게 된 것이다. 종이 아니라, 자유자의 아들로 말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때가 되었다는 것은 바로 그와 같은 역사적인 큰 시점이 되었음을 말한다. 주전과 주후는 종의 시대에서 아들의 시대로 바뀐 역사적인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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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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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해설]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사람의 언약이라도 일단 정해진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 즉 변할 수 없다.

  - 언약이라는 단어보다 '유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기도 하나, 문장안에서 바울이 사용할 때는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2. 하나님은 그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것인데, 그 자손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 이후 430년 지나서 생긴 <율법>이 폐할수는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더 상위적 권한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4. 따라서 유업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변할 수 없는 언약을 근거로, 그 유업을 약속한 것이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그 유업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앞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 즉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유대인과 이방인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므로 여기서 <율법>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추가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롭게 되는 일과 그 유업을 얻는 일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 칭해진 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에 근거한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이 율법은 왜 주신 것인가? 하는 유대인들의 상식적인 질문에 대해서 바울이 설명하고자 먼저 그 질문을 던진 것이다. 


1.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이라.

2. 천사들을 통해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

3 그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구체적인 해석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율법은 무엇이냐?에 대한 굵직한 답변은 이것이다. 율법의 용도는 <임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범법함으로 더 하여 진 것(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닌)이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끝이 정해져있다.)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냔 <율법>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고, 바울이 율법의 폐기를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엄밀하게 말해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율법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을 혼돈해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보통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사용할 때 이 두 개념이 혼용해서 서술할 때가 많은데 읽는 사람은 문맥을 통해서 이 둘을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폐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폐기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의 폐기다. 그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의 방법론: 은혜>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은 폐기 되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또 다른 질문이 유대인들에게서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라는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우선하여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해석하려고 했던 것 같고, 바울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적으로 근거로 하여 율법의 한계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율법과 약속이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율법은 단순히 수동적이고 어쩔 수 없이 임시적인 것은 아니다. 즉, 생각지 못한 일로 인해 임시방편으로 보강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은 죄 아래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즉, 율법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율법은 임시적이지만 고유의 역할이 있었고, 이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믿음(예수 그리스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이라는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는 않는다. 왜? 궁극적인 목적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믿음이 왔기 때문에(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얻게되는 복음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에게 주신 약속과 유업을 얻게 되었다.(그 자손,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기에)

2. 교회에 속한 자는 모두 세례를 받았을텐데, 그 세례를 받을 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함이었기에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이다 .

  -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세례와 연관함)

3. 그래서 너희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4.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유대인 헬라인, 자유자나 종, 남자나 여자 등)이 다 하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시는 칭의의 옷을 입는다'는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와 같은 옷을 입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마치 과티를 입듯이 모두가 한 옷을 입음으로서 한 팀, 한 몸과 같은 것을 강조하듯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묵상]


순수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오해되기 쉬운 것이 그럼 율법의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서 으뜸되는 기준은 당연히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방식의 조건(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식)을 제시했고, 그것의 구약 성경의 근거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인정받는 것을 들고왔다. 율법보다 상위가 언약이고 이 언약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율법의 용도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을 제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만, 영원한 법으로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만 유효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중에 율법이 복음과 관련해서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지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 가진 한계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꼭 필요한)인 것이다. 


1. 여전히 율법의 법에 매여 믿음의 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제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2. 그러나 이미 그 믿음의 시대 안으로 들어와 있는 성도들에게는 다시 옛 율법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믿음의 시대 이후에 다시 율법으로 인정되는 방식(옛 방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3. 그 다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백성들에게 그럼,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었느지를 가르쳐야 한다. 

  1) 믿음이 오기 전 율법의 역할(약속의 경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줌)

  2) 믿음이 왔을 때 율법의 역할(바톤을 믿음에게 넘겨줌)

  3) 믿음이 온 이후의 율법의 역할

    - 율법을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방식과 혼돈하여 이해하면, 율법 폐기론자가 된다.(방탕과 방임)

    - 율법을 행해야 하는데, 율법의 의를 쫓으려 한다면 다시 율법이 바톤을 빼앗아 뛰게 하는 것.

    - 율법의 의를 쫓지는 않지만, 율법을 삶의 중요한 원리로 인식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삶.(추천)


  * 갈라디아서 5-6장에 가면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복음과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가운데서 권면으로 주어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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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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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돈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
    세속성(돈을 밝히면) 그러나 현실성(돈이 없으면 불행함)
    그래서 부자들은 돈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앞서서 어려서부터 돈을 관리하는 법을 배운다.


  2. 돈은 무엇인가?

    1) 돈은 피다. 힘겨운 노동을 통해서 얻는 것이기에.
    2) 돈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조차 환원시킨다. 그래서 돈은 폭력적이다.(보통은 불공정한 환산이기에)
    3)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에 어떤 노동, 어떤 내용들이 투입되었는지 안다면 우리는 구입할수 없는 것들이 많다. 모르니까 산다. 알면 다친다. 소비는 무지를 먹고 자란다.


    • 나이키 축구공, 닭가슴살, 가발.

  3. 삶을 옥죄는 학생 빈곤

  4.  1) 학생들은 돈이 0이 되는 순간, 고립된다.(사람도 만날수 없고, 연애도 할 수 없다... 소통할 수 있는 기회없음)
     2) 돈은 행복은 가져다 주지 않았지만, 자유는 확실히 빼앗아갔다. 
     3) 죽을 듯이 돈을 버는 이유는 비굴하지 않고, 돈이 있으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4. 돈이 자유라는 말의 의미
 
         1)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다. 자유의 박탈이면서 존재의 박탈이다. 
         2) 돈을 통해서 자유로워진다. 돈에 종속될 때 자유를 얻는다. 
  3)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4) 과거 386세대의 자유란 '민주주의'를 말한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대요 그것은 억제당하지 않을 권리다. 그러나 지금의 자유란 '경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계층별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5) 오늘날 자유란 내가 무엇인가를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즉 선택의 자유, 소비의 자유다.

5. 그리고 돈의 흐름 혹은 틈새

 1) 돈을 소유의 개념으로만 보면 돈의 노예가 되지만, 상상공장처럼 나눔 혹은 공유의 개념으로 다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빈틈이 커다랗게 보인다. 
 2) 교환에는 이면에 일어나는 일들이 감춰져 있지만, 증여에는 따듯한 이야기와 환대가 있다. 
 3) 돈에 대한 이런 개념의 전환들이 서서히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나눔 질문]
 1. 돈이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2.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원천적으로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 이것이 돈이 없는 사람에게 일으키는 감정은?

 3. 학생들이 틈만 나면, 알바에 목매는 이유는? 소비 때문이다.

 4. 돈이 없어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구질구질한 인생이다.(과거에는 더 돈이 없었는데.... / 다 돈이 없었음)
   - 소비적인 기본 개념이 높은 상태에서 그 기본을 맞출 수 없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 민폐를 끼치지 말자. 

 5. 수양회 회비에 부담을 느끼는 학생들. 기회 비용을 잃어버리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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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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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순수성을 파악하는데 기여한 갈라디아서.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방인 사이에서는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갈라디아서다. 


우리는 이 갈등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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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해설] 아브라함의 의롭게 인정됨이 어떤 행위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 여기셨다(창 15:6)의 말씀을 근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할례자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이방인(비할례자, 아브라함은 비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았기에)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롬 4장에서도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하라.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해설]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 18: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바울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미 미리 정하신 것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함을 말씀하고 있다. 


  6-9절을 정리하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유대인과 함께 누릴 백성임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들이 같은 백성(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같은 복을 누리게 됨을 강조한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해설] 바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지라도, 큰 맥락에서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를 이루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저주 아래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해설] 10,11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음이 아니고(말미암을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믿는 행위라기 보다는 율법적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즉 은혜로서의 의를 말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의 방법론(자기 의)과 믿음의 방법론(하나님의 의)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율법이라는 것이 것이 작은 것 하나라도 끼어들어올 수 없음을 말한다 보인다. //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아야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 안으로 율법을 끌어들여 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우리는 율법으로는(율법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으로는) 저주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인데(또 우리가 믿는 바인데), 왜 이렇게 행하셨는가 하면 


  1.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다.

  2.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한 것이고(십자가 사건이 6-9절의 내용에 근거 제공)

  3.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을 저주에서 속량하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했다.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오늘 본문 정리]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자는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2. 따라서 이방인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얻을 자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의지하는 모든 자를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4.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다시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신다.  



[묵상]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 )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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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정받기 위해 사는 사람들
    <인정투쟁> 남에게 인정 받기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 적어도 나 자신에게라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나를 드러내기와 남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기, 얼핏 보기에는 이율배반적인 이 두 가지는 소비를 통해 동시에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서 다른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너와 같은 트렌드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려고도 한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자존감을 획득하는 과정.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특별한 혹은 다르지(급이) 않은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려주어야 한다. 소비는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명품은 1회성이라는 생각도 나온다.

    다른 사람보다 급이 다르게 보일 때는 (풀셋팅, 자신감이 있음) 밝고 자신감도 넘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추리하게 보이면, 숨고 싶어지고 자존감은 낮아진다.

    꾸민 것은 허락되지만, 그냥 놔둔 것은 금기시 된다.


티브이 프로도 마찬가지. 남들이 보는 것을 소비해야 소통이 되고 소외되지 않는다. 동료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음.... 유행과 트렌드..가 매우 중요함(한류도)


2. 다이어트, 몸이 최고의 아이템이다.

  몸은 노동의 도구에서 상품으로 대체되었다. 몸을 가꾸는 것이 중요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따라서 뚱뚱하다는 것은 자기를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무능을 의미한다.

  화장을 하지 않고 운동화를 신고 다닐때랑, 화장을 하고 하이 힐을 신었을 때와 자신감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다이어트는 자기 자신과의 인정투쟁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름다워지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다이어트를 위한 투쟁은 쉽지가 않다. 빼는 것도 힘들지만(친구관계를 끊어야 가능함)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다이어트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포기한다는 것인데...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보이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하나의 '제자도'다.


3. 자기 관리와 자기감시 사이에서

관리란 끊임없는 감시와 측정이다. 감시는 지켜본다는 것이고 측정이란 품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청각적이고 성찰적이지 않고 이 시대는 시각적이고 즉자적이다. _ 트위터가 그렇고, 대학 강의의 프리젠테이션이 그렇다. 이미지와 쇼가 되었다. 

 사생활이란 사회로부터 내가 물러날 수 있는 권리인데, 그런 사생활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CCTV 가 그렇고, 우리의 모든 정보들이 공개되는 것이 그렇다(통신사, 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이런 사회에서 사람의 몸을 상품화하는 것에 대해서 분개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토론]

1. 시각과와 드러냄의 시대에서 청년들이 가지게 되는 고민

  - 몸과 보이는 것과의 싸움(허상,허무), 자존감, 비교의식, 세속화

2.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1) 세련된 방식, 간지, 자신감,

  2) 학생들에게 이런 유혹과 행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절박하고 상식화되어 있다는 인식.

3. 성경적 가치에 대한 바른 전달

  1) 은둔주의, 패배주의, 자아죽음(자기 십자가)

  2) 금욕이 아닌 절욕, 죽음이 아닌 건강한 삶, 허접이 아닌 단아함 / 내면의 강인함을 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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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4.4.6)


제목: 한 부자의 비유_탐심

본문: 눅 12:1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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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정리]


갈라디아서 내용의 큰 덩어리 중 하나는 1:6-2:21(본론1)까지다.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난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해서 바울 자신의 사도성과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사람,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2:15-16을 통해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전해지는데,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로마서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의에 근거해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폐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세운 것이기에,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받은 후 추가적으로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요구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지를 통해서 볼 때, 바울이 경계하고 갈라디아 교회들을 변질시켰던 <다른 복음>의 내용이 의로움을 얻게 하기 위해 혹은 완성하기 위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추가적으로 주장한 것이라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의 말씀 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할례'를 덧붙임으로 의와 완성을 이루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다.(할례와 더불어 날과 달과 해와 절기를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



[본문]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해설]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본론을 3장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 시작은 첫번째 내용은 <책망>이다. 첫번째 본론의 시작도 책망(1:6-10)이었는데...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써내려가면서 중간 중간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한 복음을 통해 세운 교회인데 너무나 속히 <다른 복음>에 넘어지는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차분하게 편지로서 잘 가르치고자 하지만, 문득문득 올라오는 감정이 그의 글에 모두 묻어난다 하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 보는 것 같다. 인간적이라고 할까? ... 바울의 감정이 묻어나는 글이라 함께 감정의 흐름을 타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1.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것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꾀임에 넘어갈 수 있는가!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미음이 아니더냐!)

3. 너희가 어리석게도 성령으로 시작해놓고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 복음(믿음으로 의롭게 되는)을 받기 위해 많은 괴로움을 통과해서 받았는데..헛된 것이란 말인가!


본문에서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절, 3절)


갈라디아 교회들의 어리석음을 두 번이나 말하고 있다. 바울의 답답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보인다. 바울이 생각할 때는 왜 이렇게 생생한 복음을 들은지 얼마되지 않아, 어리석게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는지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바울의 심정이지 않나 싶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표현은 그 당시 북 갈라디아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런 표현을 들어서 갈라디아서를 받는 수신자가 북 갈라디아지역의 교회들임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1차 전도여행이 아닌, 2차 전도여행 이후라고 기록연대를 잡으려 한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인데, 여기는 처음부터 갈라디아 지역은 아니었고 북갈라디아지역이 확대되어서 후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흡수된 곳이라 한다.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 교회들이 받은 성령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이 표현은 2장 15-16절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곳에서는 '의롭게 됨'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성령을 받은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받은 것이 <의롭게 됨>이라는 표현에서 <성령을 받은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주제와 관점을 조금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라 보인다.(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그러나 칭의와 성령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는 아니다. 의롭게 됨과 동시에 성령의 내주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주제를 넘기고 있는 것은 새로운 논지로 들어가기 위한 바울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 본문에서 볼 수 있겠지만, 살짝 맛만 본다면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약속>이라는 관점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게까지 확대된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약속>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 본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자.



[적용]


1. 바울의 흥분과 감정 노출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 덜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어리석다는 표현을 2번이나 반복하고, 1장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두번이나 반복했다. 


매번 그러면 안되겠지만, 오히려 감정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상대로 하여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논지 뿐 아니라 <강도>까지도 충분히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글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읽어낸다.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바울의 감정을 충분히 읽어 낸다. 아니 어쩌면 바울은 감정까지도 전달되도록(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오해를 피해 안전하게 글을 쓰는 것보다 자극적이고 그래서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쓰고 있는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길로 빠지고 있는 자신의 양들을 향해 목양적 차원에서 정신이 번쩍 나도록 호통을 친다. 그리고 주목을 하면 그제서야 차분히 또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바울이 화가났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비이성적인 분노라기 보다는 부모로서 내고 있는 화라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갈 4:19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역자인 우리도 감정을 잘 드러내야 한다. 이성적이어야 할 때도 있지만, 감정적이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충동에 의한 감정 표현이 아닌, 애정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적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상대를 해산하는 수고가 먼저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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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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