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돈에 대한 우리의 이중적 태도.
    세속성(돈을 밝히면) 그러나 현실성(돈이 없으면 불행함)
    그래서 부자들은 돈의 개념이 무엇인가에 앞서서 어려서부터 돈을 관리하는 법을 배운다.


  2. 돈은 무엇인가?

    1) 돈은 피다. 힘겨운 노동을 통해서 얻는 것이기에.
    2) 돈은 돈으로 환산되지 않는 것조차 환원시킨다. 그래서 돈은 폭력적이다.(보통은 불공정한 환산이기에)
    3) 우리가 돈을 주고 구입하는 것에 어떤 노동, 어떤 내용들이 투입되었는지 안다면 우리는 구입할수 없는 것들이 많다. 모르니까 산다. 알면 다친다. 소비는 무지를 먹고 자란다.


    • 나이키 축구공, 닭가슴살, 가발.

  3. 삶을 옥죄는 학생 빈곤

  4.  1) 학생들은 돈이 0이 되는 순간, 고립된다.(사람도 만날수 없고, 연애도 할 수 없다... 소통할 수 있는 기회없음)
     2) 돈은 행복은 가져다 주지 않았지만, 자유는 확실히 빼앗아갔다. 
     3) 죽을 듯이 돈을 버는 이유는 비굴하지 않고, 돈이 있으면 자유로워지기 때문이다. 

4. 돈이 자유라는 말의 의미
 
         1) 돈이 없다는 것은 불편함 그 이상이다. 자유의 박탈이면서 존재의 박탈이다. 
         2) 돈을 통해서 자유로워진다. 돈에 종속될 때 자유를 얻는다. 
  3) 우리가 돈의 노예가 되는 이유는 행복을 쫓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유를 박탈당하지 않기 위해서다. 
  4) 과거 386세대의 자유란 '민주주의'를 말한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반대요 그것은 억제당하지 않을 권리다. 그러나 지금의 자유란 '경제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제적 계층별로 누릴 수 있는 자유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5) 오늘날 자유란 내가 무엇인가를 소비자로서 선택할 수 있는 힘을 의미한다. 즉 선택의 자유, 소비의 자유다.

5. 그리고 돈의 흐름 혹은 틈새

 1) 돈을 소유의 개념으로만 보면 돈의 노예가 되지만, 상상공장처럼 나눔 혹은 공유의 개념으로 다시 바라보면 자본주의의 빈틈이 커다랗게 보인다. 
 2) 교환에는 이면에 일어나는 일들이 감춰져 있지만, 증여에는 따듯한 이야기와 환대가 있다. 
 3) 돈에 대한 이런 개념의 전환들이 서서히 일어나야 하지 않을까?


[나눔 질문]
 1. 돈이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

 2.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과 원천적으로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는 것. 이것이 돈이 없는 사람에게 일으키는 감정은?

 3. 학생들이 틈만 나면, 알바에 목매는 이유는? 소비 때문이다.

 4. 돈이 없어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것은 구질구질한 인생이다.(과거에는 더 돈이 없었는데.... / 다 돈이 없었음)
   - 소비적인 기본 개념이 높은 상태에서 그 기본을 맞출 수 없다면, 만나지 않는 것이 낫다. 민폐를 끼치지 말자. 

 5. 수양회 회비에 부담을 느끼는 학생들. 기회 비용을 잃어버리는 학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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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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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의 순수성을 파악하는데 기여한 갈라디아서.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이슈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가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되어야 할 필요가 있게 되었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이방인 사이에서는 발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이에서 태어난 것이 갈라디아서다. 


우리는 이 갈등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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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해설] 아브라함의 의롭게 인정됨이 어떤 행위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 여기셨다(창 15:6)의 말씀을 근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할례자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이방인(비할례자, 아브라함은 비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았기에)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롬 4장에서도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하라.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해설]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 18: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바울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미 미리 정하신 것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함을 말씀하고 있다. 


  6-9절을 정리하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유대인과 함께 누릴 백성임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들이 같은 백성(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같은 복을 누리게 됨을 강조한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해설] 바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지라도, 큰 맥락에서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를 이루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저주 아래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해설] 10,11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음이 아니고(말미암을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믿는 행위라기 보다는 율법적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즉 은혜로서의 의를 말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의 방법론(자기 의)과 믿음의 방법론(하나님의 의)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율법이라는 것이 것이 작은 것 하나라도 끼어들어올 수 없음을 말한다 보인다. //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아야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 안으로 율법을 끌어들여 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우리는 율법으로는(율법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으로는) 저주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인데(또 우리가 믿는 바인데), 왜 이렇게 행하셨는가 하면 


  1.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다.

  2.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한 것이고(십자가 사건이 6-9절의 내용에 근거 제공)

  3.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을 저주에서 속량하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했다.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오늘 본문 정리]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자는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2. 따라서 이방인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얻을 자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의지하는 모든 자를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4.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다시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신다.  



[묵상]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 )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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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인정받기 위해 사는 사람들
    <인정투쟁> 남에게 인정 받기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들. 적어도 나 자신에게라도 인정을 받아야 한다.

    나를 드러내기와 남과 다르지 않음을 드러내기, 얼핏 보기에는 이율배반적인 이 두 가지는 소비를 통해 동시에 드러나야 한다.... 우리는 소비를 통해서 다른 존재임을 부각시키려고 하지만 동시에 너와 같은 트렌드에 속해 있음을 증명하려고도 한다.

    타인의 시선을 통해서 자존감을 획득하는 과정. 다른 사람에게 자신이 특별한 혹은 다르지(급이) 않은 사람이라는 모습을 보려주어야 한다. 소비는 나를 위함이 아니라 남을 위한 것(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명품은 1회성이라는 생각도 나온다.

    다른 사람보다 급이 다르게 보일 때는 (풀셋팅, 자신감이 있음) 밝고 자신감도 넘친다. 그러나 다른 사람에게 추리하게 보이면, 숨고 싶어지고 자존감은 낮아진다.

    꾸민 것은 허락되지만, 그냥 놔둔 것은 금기시 된다.


티브이 프로도 마찬가지. 남들이 보는 것을 소비해야 소통이 되고 소외되지 않는다. 동료의식에서 벗어나지 않음.... 유행과 트렌드..가 매우 중요함(한류도)


2. 다이어트, 몸이 최고의 아이템이다.

  몸은 노동의 도구에서 상품으로 대체되었다. 몸을 가꾸는 것이 중요한 프로젝트가 되었다. 따라서 뚱뚱하다는 것은 자기를 관리하지 않는다는 것이고 무능을 의미한다.

  화장을 하지 않고 운동화를 신고 다닐때랑, 화장을 하고 하이 힐을 신었을 때와 자신감이 달라진다. 마찬가지로 다이어트는 자기 자신과의 인정투쟁이다. 그리고 이것은 아름다워지기 위한 투쟁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투쟁이다. 

  다이어트를 위한 투쟁은 쉽지가 않다. 빼는 것도 힘들지만(친구관계를 끊어야 가능함) 그것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포기하기가 어렵다. 다이어트를 포기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시선을 포기한다는 것인데... 보이는 것을 중시하는 세상에서 보이는 것을 포기한다는 것을 하나의 '제자도'다.


3. 자기 관리와 자기감시 사이에서

관리란 끊임없는 감시와 측정이다. 감시는 지켜본다는 것이고 측정이란 품평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끊임없이 보여주어야 하고 그것에 대한 평가를 들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청각적이고 성찰적이지 않고 이 시대는 시각적이고 즉자적이다. _ 트위터가 그렇고, 대학 강의의 프리젠테이션이 그렇다. 이미지와 쇼가 되었다. 

 사생활이란 사회로부터 내가 물러날 수 있는 권리인데, 그런 사생활 따위가 존재하지 않는다. CCTV 가 그렇고, 우리의 모든 정보들이 공개되는 것이 그렇다(통신사, 카드사의 개인정보 유출...) 이런 사회에서 사람의 몸을 상품화하는 것에 대해서 분개하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승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토론]

1. 시각과와 드러냄의 시대에서 청년들이 가지게 되는 고민

  - 몸과 보이는 것과의 싸움(허상,허무), 자존감, 비교의식, 세속화

2. 이런 시대에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것이 있다면?

  1) 세련된 방식, 간지, 자신감,

  2) 학생들에게 이런 유혹과 행동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절박하고 상식화되어 있다는 인식.

3. 성경적 가치에 대한 바른 전달

  1) 은둔주의, 패배주의, 자아죽음(자기 십자가)

  2) 금욕이 아닌 절욕, 죽음이 아닌 건강한 삶, 허접이 아닌 단아함 / 내면의 강인함을 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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