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되면서,특히 사춘기 자녀를 키우는 부모가 되면서 나의 청소년 시절을 생각한다. 동시에 나의 부모님은 그 시절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에 대해서 자주 생각해 보게 된다. 그러나 막상 생각을 더듬어 가보면 일관된 양육방식이나 교육철학이랄 것을 건져 올리지 못한다. 선명한 방식보다는 흐릿한 느낌만이 한 두가지 남을 뿐이다. 


그 중 하나는 나의 부모님은 나에게 <공부해라>는 잔소리를 거의 하신적이 없는 것 같다. 거의 없다고 했으나 사실 지금 내 기억으로는 단 한 번도 없다. 내가 기억하지 못한 것일수도 있으니, 거의라고 표현했다. 그만큼 <공부>에 대한 스트레스를 거의 받지 못하고 컸음을 의미한다. 내가 공부를 어느 정도 유지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내 동생에게도 <공부해라>는 말씀을 거의 하지 않으셨으니 말이다. 물론 우리 삼형제들의 공부를 봐주신적도 거의 없다. 그도 그럴것이 두 분 모두 장사하시느라 여념이 없으셨고 또한 두 분다 초등학교만 졸업하셨기에 사춘기 자녀들의 공부를 봐 주실 능력도 없으셨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부모님께서 우리 형제들에게 요구하셨던 것은 거의 없으셨던 것 같다. 아침 일찍 나가셨다가 저녁늦게 들어오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점심과 저녁은 챙겨 먹어야 했고, 청소와 설겆이를 해야 한다는 것 정도다. 종종 가게 일이 바쁘면 도와 드리러 가야했고, 방학이면 가게 일을 봐야 한다는 것이 좀 그렇긴 했지만 그렇게 심한 정도는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자리잡고 있는 생각은, 그렇게 바쁘고 여유없게 사시면서도 우리들에게 좀 더 많은 것을 충분히 못해주는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시는 모습이었다. 못배우신 것이 자신의 탓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못배우심 때문에 자식의 공부를 좀 더 살펴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셨고, 풍족한 형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좋은 것으로 입히거나 먹이지 못하신 것에 대해서 미안해 하셨다. 그래서 그러셨겠지만, 약간의 여유가 생기면 당신의 욕구를 챙기시기보다는 언제나 자식의 필요를 먼저 채우고자 하셨다. 그렇게 하시면서도 더 충분히 채워주지 못해 주시는 것에 대해 미안해 하시는 눈치였다. 이것이 지금 내가 나의 사춘기 시절을 돌아보며 머리 속에 남는 인상이다. 다른 것들은 세월의 풍화 속에서 기억 너머로 사라졌지만, 이 기억만큼은 머리에 각인된듯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그 이후로 30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다. 종종 부모님댁을 찾아 갔다가 돌아올 때가 되면, 언제 준비해 놓으셨는지 이것 저것 한 아름 챙겨주신다. 그러고도 더 못 주셔서 안타까워하시는 모습을 지금도 본다. 자식에 대해서 늘 충분히 해주지 못해 미안해 하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노라면, 마음이 짠하다. 


지금 나의 가정은 어떤가? 나와 나의 아내는 나쁘지 않은 4년제 대학을 나왔다. 부족하지 않게 공부했다는 말이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안정적인 집에서 두 자녀와 화목하게 살고 있다. 아내가 맞벌이를 해야 해서 가정을 잘 챙겨보지 못하는 상황도 아니다. 일주일에 세번 오후에 초등학교에서 방과후 교실로 영어를 가르친다. 당연히 집에서 두 아이에게 어려서부터 영어를 가르쳤다. 지금은 좀 어려워지긴 했지만, 아직까지는 작은 아이의 수학 정도는 봐줄 수 있는 상황도 되고 실력도 된다. 아내는 교육학을 전공했고, 나는 캠퍼스에서 대학생을 상대로 사역했고, 교회에서는 목회자로서 사람에 대한 이해가 적지 않은 편이다. 나의 부모님에 비하면 나와 나의 아내는 매우 충분한 부모로서의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나와 나의 아내에게 부모로서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있다. 그것은 <미안해 하는 마음>이다. 우리의 부모님들에게는 너무나 많았던 그 마음이 지금 우리 가정에는 얼마나 빈약한지 모른다. 우리 안에 가득한 것은 <못해준 것이 무엇인가>라는 마음이다. 

 

나와 아내는 우리 아이들에게 얼마나 많이 <공부해라>고 하는지 모른다. 너무 많이 공부한다고 항변하는 자녀에게, 다른 아이들에 비해서 너무 공부량이 적다고 일축한다. 우리는 부모가 되어 자녀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해주고(충분한 양은 아니지만), 가정은 정서적으로 안정될 수 있도록 평온하고 필요에 따라서는 자녀들의 지적인 부족을 채워줄 수 있을 만큼 우리는 부모로서 부족하지 않는데, 너는 왜 이리 부족한가?라고 우리는 늘 몰아붙인다.  


"내가 너희에게 못해 준게 뭐니? 너희들은 공부만 하면 되는데, 도대체 뭐가 문제니?"


생각해 보면, 부모들의 미안해 하는 마음(필요를 충분히 채워줄 수 없었기에)을 먹고 자란 우리가, 부모들의 당당함을 먹고 자라는 우리의 자녀들보다 행복했다. 적어도 스트레스가 적었던 것은 분명하다. 



나는 서로에게 <미안해 하는 삶>을 복음적인 삶이라고 규정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충분히 자신의 의무를 다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마음이 복음적인 삶을 만들어 가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해야 할 것을 다 했다고 주장하는 순간부터 화평은 깨지기 시작한다. 부모가 자식에게 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자식이 해야할 도리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부모와 자식간의 관계 속에서의 인내와 용납은 사라지고 만다. 부부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부족함에도 나와 결혼해준 배우자를 생각할 때, 가정은 화평하다. 지금도 여전히 기대하는 만큼의 충분한 역할을 다하지 못해서 미안해 하는 마음을 가질 때 그곳에 지속적인 평화가 임하게 된다. 가정 안에서 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회사 안에서 노사간의 관계도 같은 원리요, 국가와 국민간의 원리도 같다고 본다. 




요즘은 자신의 권리를 주장해야 하는 시대가 되었다. 내가 나의 해야할 책임을 충분히 다했으니, 내가 누려야 할 권리를 적극적으로 취해야 마땅하게 된 것이다. 일면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니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들만 남았고 세상은 온통 당당한 사람들만이 존재하는 것 같다. 미안하고 송구한 마음은 사라지고 치열한 권리주장만 남았다. 여기에 무슨 화평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나는 부족함과 결핍을 찬양할 생각은 없다. 그러나 서로에게 대한 <미안해 하는 마음>에 대해서는 찬양하고 싶다. 5리를 가고자 하는 자에게 10리까지 못가준 것에 대한 미안함, 속옷을 달라고 하는 자에게 겉 옷까지 주지 못하는 미안함, 더 좋은 것으로 대접하지 못하는 미안함, 더 충성스럽게 섬겨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 이런 미안함이 이 사회를 따듯하게 하고 긴장을 풀어 화평을 이루어 내는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 하였다."(창 2:25)


에덴은 부끄러울 것이 없었던 곳이라기 보다는 부끄러울 만한 것이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았던 곳이다. 서로가 벌거벗었기에, 서로가 부족했기에 상대의 수치를 수치로 지적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족함을 알고 고백하는 것에서, 우리는 화평을 누리고 복음적 삶을 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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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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