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롬 1:1) 




하나의 이야기로 시작해 보고자 한다. 망망대해에서 난파되어 홀로 살아남은 한 사람이 있었다. 구조의 손길을 기다렸지만, 가능성은 희박했다. 결국은 수 일을 견디다 의식을 잃고 죽어가던 중 지나가던 배가 그 사람을 발견하고 구해준다. 정신을 차려보니 살아있는 자신을 발견했고, 자신을 구해준 선장에게 한없이 감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자신을 구원해준 선장은 자신을 집으로 돌려보내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자기와 비슷한 처지에 있는 사람들과 함께 하루 종이 고기 잡는 노역에 시달려야 했다. 음식도 풍요롭지 않았다. 육지에 데려다 달라고 몇 차례 요청을 해보았지만, 알았다고만 할 뿐 육지로 갈 의지는 없는 것 같았다. 그래도 그 선장이 죽어가던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은인이기에 적극적인 항변을 하지 못하며 시간을 보냈다. 한 두 해는 그렇게 참고 견디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생명을 얻었다는 기쁨보다는 그 때 차라리 그대로 죽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더 많아지기 시작했다. 지금의 생명보다는 그 때의 죽음이 더 낫지 않았을까...



상상으로 지어낸 이야기지만, 이것은 우리가 구원은 받았지만, 가난한 구원을 살고 있는 모습을 비유적으로 묘사해 본 것이다. 지금 우리의 구원은 이와 같지 않은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은 우리는 그 감격으로 교회 안으로 들어오고 또 그 사랑에 대한 감사와 감격으로 이곳 저곳에서 봉사하고 헌신한다. 그러나 구원의 감격도 시간의 흐름과 함께 결국 조금씩 감소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러다 보면 섬기고 있는 일들이 감사에 대한 반응이라기 보다는 무거운 짐이 되고 만다. 그러나 쉽게 그 짐을 벗지 도 못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예수님께 <생명의 빚>을 졌기 때문이다. 죄인을 용서하시고, 죽을 자를 살려주셨는데... 게다가 위의 비유에서와는 달리 그 분의 생명을 나의 생명으로 대체해서 살려주셨는데... 그것을 경험한 내가 어찌... 그러나 이전과 같은 감격이 점점 소멸되어져 가는 현실은 어쩔 수 없다. 그렇게 한해 두해가 간다.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죽어주신 예수님께 빚졌다는 충격적이고 결정적인 사랑의 사건으로 인해, 우리는 힘들고 메마르지만 이 길을 멈출 수 없다. 절대 다수는 아닐지 모르지만, 적지 않은 성도들이 이와 같은 상태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한마디로 가난한 신앙 생활 말이다. 



그 원인이 무엇일까? 아니,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은 무엇일까? 다시 십자가의 은혜를 체험하기 위해 회개하는 것이고, 첫 사랑을 회복하는 것에 집중하는 것일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는 있겠으나 내가 볼때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결국 시간이 지나고 나면 다시 재자리라는 것을 우리는 경험적으로 알기 때문이다. 


결혼 10년차, 20년차된 부부가 부부간의 사랑을 더욱 곤고히 하기 위한 방법이 그 옛날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 동영상을 다시 보는 것 말고 없다면, 이 부부의 결혼 생활이라는 것이 그 동안 얼마나 가난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결혼 생활의 지극히 짧은 이벤트와 사건인데, 그것만을 결혼 생활의 내용으로 채우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은 실로 가나한 부부관계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복음도 마찬가지라 본다. 만약 우리가 말하는 복음이 십자가에서 나를 위해 대속하여 죽으신 예수님의 대속만이 전부라면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매우 가난해질 수 밖에 없다. 우리가 주로 복음이라는 이름으로 경험하고, 또 경험되도록 요청하는 신앙의 주제는 <회심>과 <중생>과 같은 결정적 이벤트들이다. 이와 같은 것이 복음의 한 요소이기는 하나, 사실 복음에서 말하는 구원은 좀 더 포괄적이고 다양한 요소들이 있다. 예를 들면, 화해, 회복, 양자됨, 성화, 연합 등과 같이 단회적이고 순간적인 사건이 아닌 지속적인 관계와 과정을 다루고 있는 요소들이 많다. 그리고 이런 과정 속에서 구원의 풍요로운 내용들이 드러나고 경험되어지는 것이다. 즉, 여기에 구원의 풍요와 구원의 충만한 내용들이 들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이런 내용들을 중요하게 다루어주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구원의 일부, 특히 단회적 사건(물론 임팩트가 큰 경험들이지만)을 구원 내용의 전부인양 인식하고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가난한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다시 결혼식 사진과 신혼여행 동영상을 들춰보는 것으로 옛 사랑을 회상하고, 그 회상의 힘으로 현재의 결혼 생활을 이끌어 가려고 할 때 가난한 결혼 생활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처럼, 과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얻은 <큰 경험> 하나를 반복적으로 우려내는 것으로 신앙의 긴 여정을 이끌어가는 것은 참으로 가난한 복음으로 사는 것이다. 




서론이 길었다. 왜 바울은 로마교회를 향해 복음을 체계적으로 그리고 절박하게 전하려고 한, 편지의 첫 줄에서 <복음>이라는 단어를 수식하는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하나님>이란 단어를 선택했을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의미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들이 <복음>이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떠오를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_왜냐하면 그 십자가를 경험하고 돌아온 사람들이 성도였기 때문에_대신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선택한 것에 나는 위에 설명한 긴 논리가 있지 않나 생각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했을 때 연상되는 단어와 개념은 십자가와 피, 죽음 그리고 대속과 같은 자극적인 사건들과 개념들이다. 이 모든 사건과 개념이 매우 중요한 것이지만, 너무나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기 때문에 그것들은 복음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모두 삼켜 버리고 말 우려가 있는 것이다.(이것은 우리 인식의 연약함에서 오는 문제다. 마치 최근 통합진보당의 이석기 의원의 내란음모 혐의에 대한 이슈가 국정원 개혁과 같은 다른 중요한 이슈를 모두 덮어버린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 그것만이 복음에서 너무 부각될 때, 복음은 자칫 단순화되어 성도의 신앙을 가난하게 만들어 버리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하는 로마서 첫 구절에 <하나님의 복음>이란는 단어를 선택한 것은 아닐까 생각한다. 



하나님의 복음이란 포괄적인 개념들을 다룬다. <예정>에서부터 시작해서 <영화>에 이르기까지 구원과 관련된 모든 주제를 포함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 조차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구원하시려고 하신, 그 분의 방법(유일한 방법이기도 하시면서)였음을 성경을 말씀하고 있다.(롬 5:8) 성경의 많은 부분은 복음을 준비하시고 우리에게까지 전해주시어 그것을 이루어 가게 하시는 분을 <성부 하나님>을 중심으로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이심을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복음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피에만 집착할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물러서서 그 전과 후에 이루셨고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큰 계획을 함께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을 사용할 때 말하고자 한 복음일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길 원하셨던 것이다. 


바울은 바로 그 복음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한 평생 살면서 옛날의 경험을 우려먹으면서 사는 신앙이 아니라, 매일 매일 새롭게 알아가고 그 순간에만 예비된 복음을 경험하며 날마다 더 풍성해지는 은혜를 누리도록 예비하신 그 복음을 바울은 로마서를 통해서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복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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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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