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을 기초로 해서 복음 이야기1_하나님의 복음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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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는 바울에 의해 쓰여졌지만, 바울이 로마의 교회를 세운 것은 아니다.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할 때까지도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를 방문하기를 얼마나 간절했는지 그의 서신을 보면 잘 나와있다.(롬 1:13, 15:22-24) 게다가 바울이 로마서를 작성했을 것으로 보이는 시기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교회에서 연보한 돈을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 주기 위해서 가던 때로, 그 상황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20장에 잘 언급되어 있다. 사도행전 20장 후반부를 보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을 당할지 알지 못하는 상황이다.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고 있는 상황임을 바울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행 20:22-25) 바울은 이런 상황 속에서 로마서를 작성한 것이다.(행 20:3) 


그렇게 본다면 사실 바울은 로마서를 작성할 때, 자신이 이전부터 그토록 가보고 싶었던 로마교회를 살아서는 갈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인식 속에서 편지를 작성하고 있는 것이다.(물론, 실제로 바울은 예루살렘에서 죽음의 위협이 있었지만...죽지 않고 당분간 사역을 지속하지만 로마서를 작성할 때는 그와 같은 마음으로 썼을 것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 수 있다) 따라서 그가 써내려가려고 했던 복음에 대한 바울의 설명을 볼 때, 우리는 바울이 선택한 단어 하나 하나에 좀 더 세심함을 가지고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로마 교회에 복음을 체계적으로 가르쳐 건강하게 세우기를 원했다.(1:11) 그렇게 시작한 로마서의 첫 구절에서 바울은 <복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고, 그것을 수식하는 말로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선택했다. 

"하나님의 복음" 굉장히 자연스럽고 일상적인 수식어 같지만, 복음이라는 단어를 생각할 때 연상되는 것들을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보통 복음이라고 하면 일반적으로 연상되는 단어나 이미지는 예수님, 십자가, 보혈의 피, 은혜, 대속과 같은 것들이다. 어찌보면 <예수님>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단어와 이미지들이다. 그래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고 표현했을 것 같은데, 그렇게 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복음>  이것이 바울은 로마에 있는 교회에게 작정하고 복음에 대해서 쓰고자 한 편지의 첫 구절의 표현이다. 바울이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강조하고자 했던 것은 무엇일까? 



나는 이것이 우리가 복음에 대한 우리의 편향된 견해를 바로 잡아주기 위한 의도적인 표현이라고 본다. 우리가 보통 복음을 말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연상하게 되고 예수의 십자가는 그 분의 피와 그 피로 이루어지는 대속을 강조하게 되고, 대속은 쉽게 우리가 익숙한 중생과 칭의로 언급된다. 실제적으로 복음 안에 대속, 칭의, 중생이 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복음 안에는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예정과 계시, 화목, 화해, 승리, 연합, 양자, 성화, 견인, 영화와 같은 모든 것들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복음 안에 주어지고 있는 개념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대속과 칭의와 중생과 같은  한 시점에 일어나는 극적 변화만에 복음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대속과 칭의와 중생이 되어서 천국에 가게 되었다는 것만을 복음이라고 단순화 시켜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복음이라는 넓고 길고 풍성한 여정은 간과한채, 그 과정중에 있는 순간적이고 충격적인 한 두가지의 경험만이 복음의 전부인양 생각하게 만들어갔다. 그렇게 이해하게 된 데에는 우리가 복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에만 집중하여 연결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복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중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우리에게 경험되어질 때 우리가 받은 충격과 영향력이 너무 커서 복음의 다른 모든 풍성한 주제들을 빨아들였다는 것이다. (마치 이석기 의원 사건이 국정원 개혁의 모든 여론을 빨아들인 것처럼)


십자가 대속과 보혈의 피를 복음 전체의 이미지로 강조하게 될 때, 우리는 자주 복음의 빈곤함을 경험하게 된다. 마치 망망대해에 파선당해 죽음의 위협 가운데 있을 때, 생명을 구해준 배가 자신을 육지에 내려주지 않고 계속해서 생명을 살려준 것을 담보로 평생 그 배에서 고기잡는 일만 하면서 살아가도록 요구한다면 우리는 어떻게 할 것인가? 죽지는 않을찌언정 그 삶은 매우 가난한고 궁핍한 생명이 될 것이다. 죽음에서 살았다는 것자체는 감사하고 감격스러운 사건이지만, 살아가는 생애 전체를 생각해 보면 불행한 것처럼, 우리의 구원이 너무 가난한 것이 된 것은 아닌지 염려가 된다. 즉, 복음의 전체적인 개념을 충분히 알지 못한채, 구원을 얻었을 때의 경험과 그 감정만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는것 만큼 가난한 복음도 없는 것이다. 마치 결혼한 부부가 수 십년의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결혼식과 신혼여행 때의 짜릿했던 경험만을 결혼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것만큼 가난한 결혼생활을 없는 것이다. 풍성한 결혼 생활이란, 지금의 결혼 관계가 행복하기 때문에 결혼식과 신혼여행은 아련한 기억만으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지 않는가! 복음은 그와 같은 것이라 믿는다. 십자가를 경험하고 그 이후에 누리는 것들이 더욱 풍성하고 많아, 날로 날로 더욱 충만해져가는 삶이 바로 복음이 우리에게 주고자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논리로 본다면, 바울이 복음에 대한 수식어로 <예수>를 언급하는 것보다는 <하나님>하는 것이 더 현명한 선택이었다고 본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되지만 교회 안에 들어오고 나서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큰 계획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기 때문이다.(엡 1:3-14) 예수라는 문을 통해서 들어오지만, 결국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분은 성부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의 주도아래 함께 협력하신 성자 하나님과 성령 하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복음>을 설명할 때,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표현으로 자신이 이제 말하고자 하는 복음이 어떤 의미의 복음인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해는 말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라는 말이 협소하다거나, 그릇된 표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렇게 오해하기가 쉽다는 것이다. 충격적 경험이 모든 논리와 설명을 다 빨아들이듯 우리는 종종, 아니 너무 자주 복음을 대속과 칭의와 중생과 같은 사건과만 연결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복음이 가난해 지고, 구원의 여정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복음에 대한 이해가 매우 표피적이고 협소하여 원래 하나님이 베풀고자 하신 그 풍성함과 넓음과 깊음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억하자. 복음과 관련된 첫번째 수식어는 <하나님>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이라고 선언했고, 그 이후 그 하나님의 복음이 얼마나 풍성하고 충만한가를 설명해 가고 있다.


다음에는 롬 1:16,17에 언급되고 있는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써보고자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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