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


글: 김수억 간사


마태복음에는 '비유'가 많이 나온다. 그 많은 비유의 많은 비중을 '천국'이라는 주제가 차지하고 있다는 것은 마태복음을 찬찬히 읽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쉽게 '천국은 ... 와 같으니'라는 문구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천국'은 문자적인 의미로만 따진다면 '하늘 나라'를 말한다. 그러나 마태복음이 유대인들을 주 대상으로 쓴 글이라는 것을 고려한다면, 유대인들인 '하나님'이라는 표현을 매우 조심하고 삼가고 있다는 것은 익히 들은 상식일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이 아닌 마가 복음서에서는 '천국'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라는 표현이 언급된다는 것을 다른 복음서와 조금만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비교, 마 4:17 / 막 1:15) 간단하게 말하자면, 마태복음에서 '천국'이란 의미는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의미로 봐도 된다고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천국'이나 '하나님의 나라'나 글자의 차이 말고 무슨 차이가 있는가 생각하시겠지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그 약간의 차이는 큰 차이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천국'이라고 할 때, 성도들의 궁극적으로 기대하고 소망하는 나라가 '이 곳'이 아닌 '저기 어딘가'로 규정되기 쉽다. 문자대로만 본다면 '천국'의 반대말은 '이 땅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로 이해하면 그 의미는 약간 달라진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니라, 통치권의 개념으로 옮겨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문자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나라'를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통치의 영역은 하늘일 수도 있고, 땅일 수도 있다. 이곳일수도 있고, 저곳일 수도 있다. 우리 안 일수도 있고, 우리 밖일 수도 있는 것이다. 공간적인 개념이 아닌, 누구의 다스리심을 받는가의 문제로 전환된다. 


따라서 우리가 마태복음에서 '천국'에 대한 비유를 읽을 때, 하나님 나라가 어떤 공간이냐?라는 정적인 개념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어떤 원리와 다스림으로 운영되는 곳인가로 읽어야 한다. 서두가 길었지만, 이런 이해가 어떤 분들에게는 필요했으리라 생각한다. 



천국은 품꾼을 얻어 자기 포도원에 들여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 주인과 같다(마 20:1)고 말한다. 따라서 우리는 이 집 주인(포도원 주인)의 행동을 관찰해야 하고 특별히 그 중에서 이상한 행동(왜냐하면 이 땅의 원리와는 다른 원리를 제시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땅의 원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좀 이상한 것이고, 그것이 천국 비유의 핵심에 다가갈 수 있는 열쇠가 된다.)에 주목해야 한다. 가장 대표적으로 이상한 행동은 오후 5시(십일시)까지 아무 일도 얻지 못해 놀고 있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이 사람이 포도원 주인의 부름을 받아 1시간이라도 일했다는 것에 주목해서는 안된다. 이 사람은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할 수도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그 포도원 주인의 호출이 없이는 하루를 공친 존재인 것이다. 누구도 하루 해가 지는 그 순간에 사람을 불러다 일을 시키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그런데도 포두원 주인은 그 사람을 불러 들였다. 


왜 이 사람은 오후 5시까지 놀고만 있었는가?(마 20:6) 이 사람들은 품꾼으로 써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20:7) 몇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노동 시장에 늦게 나온 사람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게으르거나 책임감이 약한 사람일 수 있다. 어떤 이유든 사회는 이런 사람들의 변명에 귀기울이지는 않다. 인력은 언제나 넘치니까. 어쩌면 이른 아침부터 나와있었지만 고용주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한 사람일 수 있다. 체격이 외소해서 노동 효율이 적은 사람처럼 보였을 수도 있고, 아니면 신체적인 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다. 아니면 고용주의 입장에서 인상이 별로 였을 수도 있다. 암튼, 오후 5시가 되도록 이들은 부름을 받지 못함으로 소외 되었다. 이는 이 사람이 이 사회에 무능하며 무가치한 존재 즉 잉여에 불과하다는 무언의 싸인이였다.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이 말처럼 이들의 마음을 후벼파는 말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들은 그 말을 부인할 수 없었고 정말 그들은 아무도 자신을 써주지 않아 놀 수 밖에 없었다. 심지어 집에 돌아갈 수도 없었다.(가장이 어찌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 나라의 반전은 여기에 있다. 포도원 주인에게도 별 도움이 되지 않을 이 사람을 포도원 주인인 천국은 불러들인다.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20:7) 


예수님께서 왜 세리와 죄인들을 가까이 하셨는지 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고 버려진 병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는지 오히려 그들만을 위해 오신것처럼 행동하셨는지 이제는 더욱 분명해 진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천국' 곧 '하나님의 나라'이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예수가 복음(자기와 같이 버려진 존재를 담아주셨기에)인 것처럼, 오후 5시에도 놀고 있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 나라'는 복음이 된다. 왜? 다른 포도원 주인들은 오후 5시까지 놀고 있는 잉여들에게 자기의 포도원에는 들어 올 수 없다는 신호를 주었지만, '하나님의 나라'인 포도원 주인은 그들의 처지를 알자 자기의 포도원으로 들어오라고 초청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들어간 포도원에서 그들은 무엇인가를 했다고 말하기도 부끄러울 만큼 일했다. 아니 아무것도 한 것이 없고, 자신을 부른 포도원 주인에게 어떤 유익을 끼쳤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주인은 다른 일꾼보다 먼저, 그 사람에게 하루치의 품삯을 주었다. 일을 한 사람에게는 그 삯이 은혜가 아니라 보수에 불과하다. 그러나 일을 하지 않은 자에게 주어진 삯은 은혜다.(롬 4:4,5) 오후 5시에 들어간 사람이 경험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이 비유를 통해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이 적어도 하나 더 있다고 본다.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의 모순되지만 누군가에게는 굉장히 공감되는 항변을 통해서 주시고자 하는 교훈도 있다. 그러나 여기까지만 다루고자 한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어떤 일꾼으로 생각하는가? 이른 아침에 온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보고도 하나님에게 불합리의 죄를 뒤집어 씌우며 불평하는 성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오후 5시에 들어온, 이 세상에서는 '잉여'로 판명된 그 순간에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요 자녀로 인정하셨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신앙 생활하는 우리의 태도가 달라질 것이다. 


성도의 또 다른 이름은 '오후 5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 간이역 2.0 / 2014. 2월호에 실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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