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해주는 삶, 용서 받는 삶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고 한다. 성숙한 사람일수록 겸손해 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말이 <겸손>하게 행동해서 <성숙>함을 보이라는 권면으로 들려질 수도 있고, <겸손>한 사람을 보면서 저 사람이 정말 <성숙>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할 때도 사용되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 겸손은 하나의 덕목이 된다. 성숙한 사람이라면 마땅히 겸손해야 하고, 겸손한 태도로 자신의 성숙함을 입증해 보여야 한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겸손하지 않은 사람이 겸손한 척 행동하는 사람들이 생겨나고, 우리는 그것을 겸손과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겸손한 척하는 자기 자신조차도 말이다.

 

겸손이라는 덕목을 <용서>라는 덕목으로 대체해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많은 횟수를 용서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잘 못을 용서할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성숙함을 평가할 수 있는 지표가 되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잘못에 대해서 화내지 않음으로서, 오히려 쿨하게 웃어 줌으로서 자신이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가를 과시하기도 한다.

 

 

베드로가 예수님께 그런 의도로 질문을 한 듯하다. 자기 자신에게 잘못한 사람을 몇 번이나 용서해 주면 되냐고? 일곱 번이면 되냐고 말이다. 그 말은 자신이 일곱 번 비슷하게 용서해 줄 수 있을 만큼 성숙해진 것 같은데, 이 정도면 상당히 괜찮은 사람 아니냐고 예수님께 확인 받고 싶어서 인 듯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를 그렇게 쉽게 칭찬해 주시지 않는다. 아니 칭찬해주시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베드로의 생각이 전면적으로 틀렸다는 것을 말씀하신다. 어떻게?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하라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고 일만 달란트 탕감받은 사람에 대한 비유를 통해서 말이다.

 

주님의 논지는 간단하다. 일곱 번의 용서로는 턱도 없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백 구십 번을 용서해야 만족스럽다는 말도 아니다. 핵심은 내가 얼마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가에 대한 깨달음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용서하고 기다려주지 않음으로서 그 사람 스스로가 자신이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었다는 것을 그 비유가 우리에게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몇 번이나 용서해 줄 수 있는가를 확인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나의 성숙함을 드러내 주는 성적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성숙함에 대한 진짜 성적표는 내가 얼마나 큰 용서를 얼마나 많은 횟수에 걸쳐서 받았는가!를 깨닫는 것으로 확인된다. ‘주는 것으로가 아니라 받은 것으로 확인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다른 점 일게다. 다른 종교에서의 성숙함이란, 몇 번을 참되게 용서해 줄 수 있고 얼마나 겸손한가를 통해서 확인될 수 있다. 그래서 도덕적인 종교이고 더 근본적으로는 <자기 의>를 이루는 종교다. 반면 기독교는 내가 얼마나 큰 은혜와 용서를 받은 사람인가를 확인하고 깨달음으로서 자기 의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증거하는 종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는 사람들을 향해, 겸손과 용서를 그렇게 강조하면서도 그것을 행하는 것이 전혀 자기 자랑이 되지 못함을 강조한다. 일만 달란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탕감해 주었다고 칭찬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우스운 일이기 때문이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4:32)

 

바울의 이와 같은 권면은 모두 위에서 설명한 것들에 기초한 가르침에 의한 것이다.

 

 

어려서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사람은 참, 건강하다. 자신을 사랑하면서도 타인에 대한 배려도 부족하지 않기 때문이다. 타인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데, 불편한 사람이 있다. 이 사람은 사랑받음에 대한 경험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가르침에 훈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타인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사랑할 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사람들을 세상으로 보내고 있지 않은가 생각한다. 충분한 사랑과 용서 그리고 따듯함으로 수용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향해서 사랑과 용서의 의무를 지니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용서하기도 하고 겸손한 듯한데, 그것이 사람들의 눈에는 건강해 보이지 않고 오히려 안타까워 보이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가 아닐까 싶다.

 

 

벼는 익었기 때문에 고개가 숙여지는 것이다. 내적 충실함이 겸손으로 나타는 것이다. 충분한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좀 더디더라도 건강한 사랑을 한다. 충분한 용서를 받은 사람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서 용납하기 쉬운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에서는 성급한 행동을 요청하기 보다는 사랑과 용서가 우러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서로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더디더라도 좀 기다려 줄 필요가 있다. 나 자신에게도 마찬가지다. 주는 것보다는 받는 것을 건강하게 수용할 수 있어야 한다.

 

사실, 생각해보면 우리는 평생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훨씬 많은 인생이다. 부모로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자연으로서부터 그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말이다. 이걸 좀 알아야 복음적인 삶이 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