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태에 대해서 1]


세상에서는 나태를 관용이라 부르고, 지옥에서는 절망이라고 부른다.(도로시 세이어즈)


사람들은 나태라고 하면, '몸이 굼뜨고 행동이 느리 모습'을 연상하고 그 정의를 '좀처럼 움직이거나 일하기 싫어하는 것' 정도로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교회가 죄로 규정해 온 나태는 이와는 성격이 무척 다르다. 이 전통은 나태를 단순히 몸이 느슨하고 느린 상태가 아니라, 영혼이 병든 것처럼 의욕과 활력을 잃어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 빠진 것으로 이해했다.(111쪽)


이처럼 나태는 의욕이 없어서 무기력해지고 어떤 일에도 감정이 동하지 않아 마침내 손을 놓고 아무것도 행하려 하지 않는 마음의 상태를 가리킨다. 그래서 세이어즈는 나태를 이렇게 정의했다. 


"아무것도 믿지 않고, 신경 쓰지 않고, 알려고 추구하지 않고, 간섭하지도 않고, 즐기지 않고, 사랑하지도 않고, 미워하지도 않고, 위해서 살아야 할 그 무엇도 없고, 또 죽어야 할 어떤 이유도 없기 때문에 그저 살아 있는 죄다."(112쪽)


나태가 다른 죄들에 비해 독특한 점은, 행하는 죄가 아니라 행하지 않는 죄라는 점이다. 어떤 흉악한 악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행해야 할 선을 행하지 않는 것이다. 


[나의 생각] 나태란 자기 관리를 잘 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변명이 아니라는 것이 충격적이다. 우리는 죄를 지어도 술먹고 한 잘못은 실수로 봐주며 관대하듯이, 나태를 단순히 자기 관리를 잘못하는 정도로 관대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나태란 영적 무기력이며 생명력을 잃어 버린 것으로 마땅히 해야할 선을 하지 않는 죄다.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기 관리를 못하는 것과 나태를 혼돈하는가? 자기 관리의 부족은 지혜의 문제지만, 나태는 죄의 문제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나태에 대해서 2] 


<나태의 별명: 정오의 마귀> (수도사 에바그리우스) 


정오에 이르는 재앙처럼(시편 91:6) 밝을 때 넘어뜨리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마귀는 수도사들이 오전 10시 경만 되면 찾아와 슬그머니 말한다. '중천에 떠 있는 해가 족히 50시간은 지지 않을 거라고' '이 따금식 창밖을 내다 보라고' '골방에서 나와 태양이 중천에서 얼마나 움직였는지 바라보라고' '다른 수도사들도 밖으로 나와있는지 확인해 보라고' 유혹한다. 그래서 하루의 일과를 미루게 하고 결국 그 수도사를 수도원 밖으로 밀어내고 만다.


<단테>

나태한 자는 일생 동안 미루는 습관을 갖고 있다가 더러는 회개하는 일까지도 미루고 만다.


[나의 생각] 미룸, 미룸, 미룸... 그것은 의욕을 잃은 것이지요. 우리 안에서 의욕이 있고 흥미로운 것은 우리가 늦은 밤에도 하기 마련이고 없는 시간을 쪼개서라도 혹은 덜 중요한 일을 포기하면서까지 하니까요. 미룬다는 것은 그것을 향한 내 안에 생명력, 열정, 사모함이 없다는 증거가 됩니다. 결국 그것은 미룸, 미룸, 미룸이 되고 말지요.



[나태에 대해서 3] 나태를 이기는 길


1. 목적의식과 소명

   : 에바그리우스는 수련에 소홀하고  태만한 수도사들에게 기도나 성경 암송, 노동 시간을 늘리라고 주문하지 않았답니다. 그는 모든 것에 앞서 왜 수도를 해야 하는지, 왜 하나님을 섬기고 욕망을 절제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지 등을 생각하며 목적을 재확인해 보라고 독려했습니다. 


확고한 목적의식과 소명이야말로 일을 힘차게 추진할 수 있는 동력이 됩니다.


2. 구체적 목표 설정

   : 목표가 명확하고 적절하면 확실히 나태할 수 없게지요.

   : 인생을 여러 단계로 나눌 때, 특히 중년기에 가장 위협적으로 작용하는 죄가 바로 나태다. 중년기는 자녀들을 다 키우고 생활도 안정되어 있으며 특별히 더 추구해야 할 목표가 없기에 현실에  안주하고 싶어지기 쉬운 때이기 때문이다. 


3. 수도사들의 덕목을 따름

   : 여러가지가 있지만, 특히 몸과 마음이 느슨해져 있는 수도사에게는 무엇보다 육체적인 노동이 좋은 치유책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육체적인 노동은 나태를 극복하는 좋은 도구가 되기에 수도사들은 육체적인 노동을 중시한답니다. 


4. 소망의 끈

   : 절망은 낙심을, 낙심은 우울을, 우울은 나태를 만들어 냅니다. 신학적으로는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지라는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기가막힌 상황에서도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시 42:5)고 말씀해 주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도움이 없는 상태(helplessness)보다 소망이 없는 상태(hopelessness)가 훨씬 무서운 것임을 알고 궁극적인 미래에 대한 소망으로 인내하며 구체적인 한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나의 생각] 청소년이나 청년 사역자들이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과 미래에 대한 비전을 치우치듯이 강조하는 이유 중에 하나는 그들이 가지고 있는 나태함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저의 아이들을 봐도 제일 답답한 것은 이녀석들이 시간을 죽이면서 인생을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 대한 부르심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무엇을 위해서 살며, 어떻게 도달할 수 있는가에 대한 동기부여와 그림이 없기 때문에 이들에게 정체성과 비전을 강조한다고 생각해 보게 됩니다. 어떻게 보면 적절한 처방인듯 합니다. 중년들은 안주하지 않는 것, 끝임없이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기 위해 배우기를 힘쓰는 것이 나태함에 빠지지 않는 길인듯 합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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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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