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 정리]


1. 유다의 왕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이 다스리기 시작한 때에


   * 주전 609년 요시야가 므깃도에서 죽고, 애굽의 영향력 하에서 여호야김이 왕으로 세워진다. 국제 정세의 급변하는 환경 가운데 놓이게 되었다. 특히 애굽과 바벨론 누구의 편에 설것인가가 나라의 흥망성쇠에 중요한 결정이 되는 시대가 되었다. 여호야김 시대는 그랬다. 


2. 여호와께서 예레미야에게 성전 뜰에서 가감없이 외치라고 명하신다. 이들이 듣고 혹시라도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려던 뜻을 돌이키시겠다고 말씀하신다. 


  * 예레미야는 유다를 향한 마지막 회심의 기회라고 보았다. 지금이라도 돌아오면 하나님께서 듣을 돌이킬 것이다. 니느웨의 죄에 대해서도 뜻을 돌이키신 하나님께서(요나서) 유다의 회개에 대해서 충분히 뜻을 돌이키실 의향이 있으신 것이다. 


3. 하나님의 말씀

  1) 너희는 나에게 순종하지 않았다. 내 율법을 행하지 않았다. 

  2) 나의 종 선지자들을 꾸준히 보내 그들의 말에 순종하라고 하였으나 순종하지 않았다. 

  3) 그래서 내가 이 성전을 실로같이 되게 하고, 세계 모든 민족의 저줏거리가 되게 하리라.


  * 하나님은 언제나 한 번의 죄로 심판하지 않으신다. 두번이나 세번... 횟수의 문제가 아니다. 태도의 문제다. 그 죄를 지적하고 시정하도록 일깨워주고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돌이킬 의향이 없는 자에 대해서 심판하신다. 하나님은 언제나 반역의 의지를 가진자에게 심판을 행하신다. 


4.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

  1) 제사장들과 선지자들과 모든 백성이 예레미야를 잡아 죽이려고 한다.

  2) 이 성전을 실로같이 될 것이라고 저주하고, 이 성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며 예레미야에게 모여듬

  3) 유다의 고관들은 예레미야가 한 말을 근거로 예레미야가 죽는 것이 합당하다고 판결함.


  * 이 장면에서는 예수님이 생각난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외쳤던 무리들. 예수님의 죄 명도 성전을 허물어 질 것이라는 것에 대한 것임을 생각한다면, 예레미야와 예수님은 유사성을 가진다. 예레미야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한 것으로 죽음에 위협을 당하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심으로 죽음에 이른다. 


5. 백성들의 반응에 예레미야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해 이 성전과 이 성을 향하여 한 예언을 청종할 것을 다시 촉구한다. 그리하면 지금이라도 너희에게 선언하신 재앙에 대해 하나님은 뜻을 돌이킬 것이라고 말한다. 괜히 나를 죽여 무죄한 피를 흘려 그 댓가를 이 성과 성에 사는 주민에게 돌리지 말게 하라.


6. 고관과 모든 백성들이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에게 말한다. 

  1) 이 사람이 우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하였으니 죽일 만한 이유가 없다. 

7.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온 회중에게 말하였다. 

  1) 유다의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에 대해 예언하기를 시온은 밭가는 경작지가 되고, 예루살렘은 돌무더기가 되며, 성전의 산은 산당의 숲과 같이 되리라 했으나, 유다 왕 히스기야가 그를 죽였느냐?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것에 대해 하나님이 뜻을 돌이키지 않으셨는냐! 

  2) 우리가 예레미야를 죽인다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다. 


  * 흥분하며 영적으로 무지한 사람들만 있었던 것은 아닌것 같다. 그 중에서도 여전히 영적으로 민감하려고 하고 역사적인 판단을 고려하여 하려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고관과 백성들 중에 일부가 그랬고,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그랬다. 예레미야를 죽일 죄목이 분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역대 히스기야 왕 때도 그와 같은 선지자가 예레미야와 동일한 메시지를 전했지만, 히스기야는 오히려 겸비하고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있었음을 지적하면서 예레미야의 경우도 그와 같을 수 있음을 지적했다. 하나님은 무리 중에도 고관과 장로들 중에도 정상적이고 영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들을 두어 그들로 하여금 충동적 마귀적 행동에 대해서 제지하도록 역사하신다.(그런데 왜 예수님에게 대해서 만큼은 그리 침묵하셨는지.. 예수님에게는 왜 그와 같은 대변자가 없었는지...)

 

8. 또 여호야김 왕은 전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한 우리야라는 사람이 예레미야와 같은 메시지로 경고하여 예언하자, 그를 죽이려 했고 그가 애굽으로 도망하자 사람을 보내 끝까지 그를 잡아와 칼로 그를 죽이지 않았느냐? 그리고 그의 시체를 평민의 묘지에 던지지 않았느냐...


  * 여호야김이 자신에게 부정적인 말을 하는 선지자를 얼마나 잔혹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죽였는지를 그 당시 사람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최근 그 사건을 언급하면서 그와 같은 일이 반복되지 말아야 함을 지적한다. 


9. 사반의 아들 아히감이 예레미야를 도와주어 백성들의 손에 그를 내주지 않았다. 그래서 죽지 않았다. 


  * 다행히도 예레미야는 사반의 아들 아히감의 도움으로 죽지 않고 살아난다. 죽을 위협으로부터 건짐을 받은 것이다. 이 사건을 통해서 당시 사회 분위기가 어떠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정치 종교 지도자들에게서 어떤 변화를 기대하기가 어려움 상황임을 확인하다. 오히려 예레미야가 죽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일 정도다. 




[묵상 한 모금]


하나님의 심판은 갑작스럽게 한 두 번의 실수와 그릇된 판단으로 임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게 된다. 심판의 근거는 죄의 행위가 아니라 죄를 알고도 돌이키지 않는 완악한 마음이다. 그것이 우리를 심판과 지옥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예레미야 26장의 사건은 그 당시 정치와 종교계가 얼마나 죄 가운데 있었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왕부터 제사장과 고관들 그리고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께서 무고하게 십자가 형벌을 받게 되는 과정을 보면서도 우리는 같은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그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얼마나 죄 가운데 있었는지를 보게 된다. 


다행히 예레미야는 그의 역할이 남아있었기에 하나님이 살 길을 열어주시고 살려주신다. 그러나 예수의 역할은 십자가를 향하는 것이었기에 하나님은 정작 당신의 독생자에게 살 길을 열어주시지 않았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살리기 위해서 영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을 동원하셨지만, 당신의 독생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철저하게 침묵하셨다. 


하나님은 당신의 아들(예수)에 대해서는 왜 이리 모지셨는가!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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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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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의 내용]

로마 가톨릭은 세상을 초월과 자연으로 나누고, 자연을 하나님의 통치 영역에서 배제시킴으로서 자연은 하나님과 독립된 영역이 되었다. 여기에서 이신론과 자연신론이 나오게 되었다. 


[본론]


1. 종교개혁은 당시 자연에 대한 이해 때문이었다. 

  1) 기독교적인 것이 그 내용을 초자연으로만 품는다면, 자연은 어떤 가치가 있는 것인가? 

  2) 가톨릭이 신적인 영역을 초자연으로 제한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으로부터 독립하게 됨.(자연,인생)


2. 종교 개혁자들은 이것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1) 초월과 자연으로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은혜와 은혜 아닌 것으로 구별해야 한다는 견해.

   (1) 로마 가톨릭은 초월만이 신적인 것을 함유할 수 있다고 봤고, 자연은 함유할 수 없다고 봤다. 

   (2) 개혁주의는 초자연도 신적인 내용을 함유할 수 있고, 자연도 신적인 내용을 함유할 수 있다고 봤다. 


  2)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이해

   (1) 우리는 특별한 방식(초월적)으로 계시한 것을 특별계시, 일반적인 방식(자연적)으로 계시한 것을 일반계시라고 이해한다. 

   (2) 그러나, 종교 개혁자들은 하나님은 자연 속에서도 자신을 계시하신다는 것을 알게 된다.(시 19편)

   (3) 로마 가톨릭은 초월과 자연으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를 나누었지만, 종교 개혁자들은 특별 계시가 자연 속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고 봤다. 그러면서 특별계시와 일반계시의 구분을 <은혜>로 봤다. 즉,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특별계시,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것을 일반계시라고 한다. 

   (4) 성경은 특별계시고, 자연은 일반계시는 아니다. 그 계시가 죄의 문제를 해결하고 오느냐의 문제로 규정해야 한다.

   (5) 아담이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되는 방식에는 차이가 없다. 다만 우리가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서 <은혜>가 적용될 때는 특별계시가 되고, 그렇지 않는 것은 자연계시가 되는 것이다. 


3. 세대주의의 문제

  1) 세대주의란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데 그 세대마다 독특한 방법으로 일하신다는 것.

  2) 구약과 신약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이 다르다고 생각하게 됨(구약은 율법, 신약은 은혜)

  3) 이런 의식은 신약 시대에 사는 사람들을 반율법주의자로 만들 수 있다.(은혜 만능 주의)

  4) 구약도 은혜다. 왜? 죄지은 인간에게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셨으니까 은혜다. 

  5) 하나님의 자기 계시는 이미 은혜요 특별계시인 것이다 


4. 사단의 전략

  1) 예전에는 <초월>이라는 방식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게 했다. 

  2) 이제는 <계시의 내용>에 대해서 공격한다.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신앙은 선과 의로 가는 싸움아니냐? 꼭 십자가로 가야 할 필요가 있느냐? (종교 다원주의, 혼합주의 등 죄의 문제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간다)

  3) 그래서 기독교의 적은 도덕이요 철학입니다.(내용의 싸움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인본주의와의 싸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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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동영상(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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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사사기 3장] 우리 가운데 죄가 살고 있는 것인지, 죄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지... 어느 것이든 상관없습니다. 죄를 허용하는 즉시, 죄는 우리의 주인 노릇을 하려고 할 테니까요.(5,6절) 옷니엘, 에훗, 삼갈을 사사로 삼으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이 쓰는 사람의 조건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 생각해 봅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그 땅에 남겨둔 가나안 백성들과 함께 거주하며 치르게 되는 전쟁

  1) 여호와께서 전쟁을 모르는 이스라엘에게 전쟁을 알려주고, 그들을 시험하기 위하여 이방민족을 남겨두셧다.

  2) 남겨둔 이방민족: 블레셋의 다섯 군주, 모든 가나안 족속, 시돈 족속, 히위 족속,

  3) 이 민족들로 이스라엘을 시험하사 모세를 통해 조상들에게 이른 명령을 순종하는지 알고자 했다. 

  4) 이스라엘은 <가나안 족속>, <헷 족속>, <아모리 족속>, <브리스 족속>, <히위 족속>, <여부스 족속> 가운데 거주하면서 그들의 딸을 아내로 맞고, 자기 딸들을 그들에게 주고 그들의 신을 섬겼다. 


2.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서 구원하기 위해 사사 옷니엘을 세우심

  1) 범죄: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를 잊고 바알과 아세라들을 섬겼다. 

  2) 진노: 여호와께서 진노하사, 그들을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의 손에 파셨다. 8년간 그 밑에서 그를 섬겼다. 

  3) 요청: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4) 구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한 구원자를 세워 그를 구원하게 하시니, 갈렙의 동생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라. 

  5) 승리: 여호와의 영이 그에게 임해서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구산 리사다임을 이김.

  6) 평화: 평온한 40년을 보내고 그나스의 아들 옷니엘이 죽었다. 


3. 모압 왕 에글론에서 구원하기 위해 사사 에훗을 세우심.

  1) 범죄: 여호와의 목전에서 여호와께 악을 행했다.  

  2) 진노: 여호와께서 모압 왕 에글론을 강성하게 하사 이스라엘을 대적하게 함. 18년간 섬김

  3) 요청: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4) 구원: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을 위해 한 구원자를 세웠는데, 베냐민 사람 게라의 아들 왼손잡이 에훗이라. 

  5) 승리: 에훗이 모압에게 공물을 바치고 따로 할 이야기가 있는 것처럼 해서 모압 왕을 죽이고, 에브라임 산지에서 이스라엘을 불러 모아 모압을 공격하여 승리를 가져옴. 완벽한 승리.

  6) 평화: 80년 동안 모압 이후로 평온한 시절을 보냈다.


4. 에후 이후 아낫의 아들 삼갈이 있어,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이고 이스라엘을 구원함.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내 글로 쓰기]


여호수아를 통한 정복 이후에도 가나안의 이방민족들을 완전히 좇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하나님은 오히려 이들을 남겨두셨다고 표현한다. 이들이 남겨둔 목적이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것은 전쟁을 모르는 세대로 하여금 전쟁을 통해서 시험하고 이들이 정말로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율법을 지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확인하려 하신다고 한다. 그러나 사사기에서 보면 이스라엘 사이에 가나안 족속들이 사는 것이라기 보다는 여전히 가나안 족속들이 사는 곳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아가고 있는 듯이 묘사하고 있다.(5절) 그만큼 가나안 족속의 영향력이 컸고, 이스라엘의 영향력은 작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겠다. 왜냐하면 이들은 그들과 통혼하면서 그들의 신을 섬기면서 그들처럼 되어갔기 때문이다.(6절)


3장에서는 세 명의 사사를 언급한다. 첫 번째는 여호수아서에서도 언급된 적이 있는 옷니엘(수정:갈렙의 동생 그나스의 아들)이다. 옷니엘은 메소보다미아 왕 구산 리사다임으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한다. 두 번째는 에훗이다. 에훗은 베냐민 사람으로 왼손잡이(오른손을 못쓰는)다. 그는 지혜를 발휘하여 모압 왕 에글론을 죽이고, 에브라임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동원하여 모압의 용사들을 만 명이나 요단에서 죽이는 공로를 세웠다. 세 번째 사사는 아낫의 아들 삼갈인데, 그는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00명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공로를 가지고 있었다. 


옷니엘을 제외한 에훗이나 삼갈과 같은 사람은 뭔가 하자가 있고,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들을 통해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이스라엘이 가나안 이방인들과 하는 전쟁을 물리적 전쟁이면서 영적 전쟁이다. 


초반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나안 족속들이 남겨 있는 것이 이스라엘과 전쟁을 하기 위해서 남겨 둔 것이라고 말씀하면서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가운데 거하면서 그들의 자녀들과 이스라엘 자녀들이 서로 통혼하고 그들의 신을 따라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이스라엘과 가나안 족속들과의 관계가 늘 전쟁상태는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후에 보면 가나안의 여러 족종과 전쟁을 통해서 고통을 당하기도 하지만,(실재의 전쟁) 그와 같은 전쟁이전에는 매일 매일의 일상적인 영적 전쟁이 있었음을 의미하고 그 영적 전쟁에서는 매번 실패하는 이스라엘의 영적인 실존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우리는 우리 주변의 세상적인 가치관들과 전쟁을 치른다. 최근 한국교회는 반기독교집단과 이단집단과 전쟁을 치르고 있다. 최근에는 계속 지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영적 전쟁을 우리는 모를 수 있다. 세속화되어져 가고 있는 한국 교회의 실상을 우리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과 통혼하면서 세상과 섞여 버리고 있는 한국 교회의 모습은 바로 사사 시대의 이스라엘의 모습과 다르지 않다. 외부적인 전쟁도 있다 그러나 내부적 영적 전쟁이 있음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그 전쟁이 더 위험하다는 사실도 말이다. 


2. 사사로 세워진 에훗과 삼갈의 특징


에훗은 베냐민 지파요 왼손잡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베냐민은 야곱의 12아들 중 막내에 해당된다. 가장 작은 지파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훗은 왼손잡이다. 오른 손에 장애가 있어서 오른 손을 쓰지 못하는 사람이란 뜻이기도 한다고 한다. 굳이 왼손잡이라고 쓴 것을 보면 뭔가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맞을 것이다. 암튼, 에훗의 외부적 조건을 봤을 때, 남들보다 앞서는 조건은 없는 셈이다. 삼갈도 마찬가지다. 그에 대한 정보는 별로 없지만,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600명을 죽인 것을 보면 소모는 목동 출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평범한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들이 이스라엘을 고통 속에서 구원해 낸다. 하나님은 그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을 사사로 세우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이렇게 연약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만 들어 쓰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다른 의미로 하나님은 이런 연약한 자라도 사용하신다라는 측면으로 보는 것도 썩 좋은 해석은 아닌듯 하다. 오히려 하나님은 누구든 들어 쓰신다고 보는 것이 더 맞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조건과 상관없이 아무나 필요한 사람들을 들어 쓰신다. 하나님 스스로가 강력하시기 때문에 누구를 들어 쓰셔도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측면으로 봐야 한다. 하나님이 하셨다는 측면 말이다. 그러는 중에 에훗이 있고, 삼갈도 있는 것이다. 만약, 약한자만 들어 쓴다고 보면 <옷니엘>은 설자리가 없다. 그는 여호수아의 아우 그나스의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3. 우리 가운데 죄가 도사리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죄 가운데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인가?(5절)


여호수아서를 볼 때는 이스라엘 가운데 다 멸하지 못한 가나안 족속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였다.(그들의 존재가 무력해 보였다.) 그러나 사사기를 보면 그들의 존재는 상당히 커진다. 오히려 이스라엘이 그들 가운데 살고 있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5절) 그들의 침략과 그들의 유혹에 무너지고 있는 연약한 이스라엘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6절)


처음에 죄는 우리 가운데 약한 존재로 자리를 잡는다. 다리 한 쪽만 들어와 있는 셈이다. 그런데 그 죄는 다른 쪽 다리도, 엉덩이도 몸통도 머리도 다 그 안으로 집어 넣고, 결국은 우리를 위협하는 존재로 있게 되는 것이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내는 격이 되고 만다. 죄란 그렇다. 죄의 크기가 중요하지 않다. 죄가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철저하게 죄를 막아내지 않고 허용하는 순간, 우리는 죄의 밥이 되고 마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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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죄에 대한 이해는 크게 두 갈래로 발전했다. 


한가지는 죄를 영혼의 오염, 의지의 부패나 연약함으로 보는 존재론적인 관점이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주된 관점이고, 다른 하나는 죄를 하나님을 반역하고 경멸하는 것, 하나님으로부터 돌아서는 것으로 보는 관계론적 관점으로 개신교회의 주된 관점이다. 


전자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영혼은 잡초가 무성한 정원과 같고, 죄악의 싸움은 정원에서 잡초를 제거하는 일이며, 성화는 그 정원에 덕이라는 꼿들을 심고 가구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로마 가톨릭 신학은 죄를 벗고 덕을 쌓아가는 수덕 신앙을 강조한다. 


후자의 관점으로 보면, 인간의 영혼은 잘 가꾸어야 할 정원이 아니라, 갈아엎어야 할 황무지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행동의 교정이나 덕의 함양이 아니라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은혜와 회심이며, 이후 이어지는 정원사이신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관점은 배타적이라기 보다는 상호 보완적이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두 갈래의 이해를 통합하는 좀더 온전한 죄 이해가 필요하다. 


(중략)


오늘날 개신교회는 교회의 오랜 전통이며 로마 가톨릭 교회를 통해 보존되어 온 일곱 대죄론과 같은 죄에 대한 체계적인 분석과 구체적인 죄에 대응하는 경험적인 지혜를 배울 필요가 있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하), 204,205쪽.


[개인생각] 개신교에서는 인간의 죄를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라는 측면과 철저한 갈아엎음에 대한 입장만을 강하게 드러냄으로서 죄의 디테일에 대해서는 간과하거나 약화시키지 않았나 생각한다. 작고 세밀한 것까지 모두 하나의 궁극적 원인으로 환원시킴으로서 치료에 있어서도 예리하지 못하지 않았나 싶다. 반역과 은혜 사이의 그 큰 골짜기를 메울 수 있는 어떤 내용들이 없었기에 그 영역에 있어서 매우 수동적이 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측면에서 그 영역을 세심하게 살핀 수도사들의 지혜를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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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에 대해서 1]


탐식: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


탐식을 죄로 규정하고 경계해 온 중세 교회의 전통은 4-5세기 수도원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수도사들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만 먹어야 했고, 그만큼 음식에 대한 유혹이 키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마른 빵을 물에 적셔 부풀려 먹고 채식을 해야 했던 수도사들은 풍족한 음식과 이전에 먹던 고기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괴로워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여덟 가지 악한 생각'으로 수도사들을 유혹하는데 그 첫 번째가 식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죄들 중에서 탐식이 가장 낮은 수준의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극복하기는 가장 힘든 죄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60쪽)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다섯 유형으로 좀더 세분화했다. 


1. 급하게 먹는 속식: 마치 음식이 곧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재빨리 먹는 것. 이것의 문제는 단지 빠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고 음미할 겨를도 없이 먹으면서 감사를 잃어 버린다. 탐식자는 먹는 일 자체에 골몰할 뿐 감사가 없다. 


2.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 음식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맹렬하게 먹는 것을 뜻한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얼굴을 음식에 바짝 붙여서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려는 욕심으로 맹렬히 먹는 것이다. 이런 식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것이다. 


3. 지나치게 많이 먹는 과식: 배가 부르지만 수저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한계 그 이상으로 음식을 집어 넣는 것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음식에 더 미련을 두지 않지만, 인간은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더 먹고 싶어한다. 


4. 까다롭게 먹는 미식: 이는 조금을 먹더라도 까다롭게 먹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곤혼스럽게 한다. 이들은 자신이 많이 먹지도, 비싼 음식을 원하지도 않고 그저 소박하게 먹는다고 생각하며 '이 간단한 것 좀 제대로 해주면 안 되나?'하고 생각한다.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등장하는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식사량이 줄어든 사람에게는 전략을 바꾸어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 주라고 조언한다. '제가 원하는 건 잘 우려낸 홍차 한 잔이에요. 엷게 타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연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바삭바삭한 토스트 한 조각만 곁들여 주시구요..'


5.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을 뿐 아니라 세련된 분위기 우아한 식탁과 같은 여러 조건을 갖추 식사를 바라고 고집하는 것.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한), 162-164쪽.


[개인생각]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중간적인 균형을 잃어버린 채 과도한 욕심으로 달려가는 것이 탐식인듯 하다. 죄라고 보기 보다는 미련하게 행동했다는 것으로 무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급하고 게걸스럽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식사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까다롭게 먹고, 사치스럽게 먹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난친 가난은 탐식으로 몰고간다. 지나친 부 역식 탐식으로 몰고간다. 


[탐식에 대하여 2]


에바그리우스 역시 탐식은 '정욕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탐식에 빠지면 지성이 흐려지고 욕적이 고조되어 행동이 난잡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제자 카시아누스는 그 누구보다도 이 점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일곱 대죄를 육적인 죄와 영적인 죄로 나누었고, 죄는 육적인 죄에서 점차 영적인 죄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육체에 속한 죄 중에 탐식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은 정욕이 오는데, 이들은 사슬에 연결된 것처럼 앞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그 다음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대인들은 먹을 것은 포기하지 않은 채(맛은 포기하지 않은 채) 좀 더 까다롭게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열량, 저지방, 무가당 식품을 찾기 시작했으며 설탕이 없으면서도 톡 쏘는 사이다, 카페인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자극적인 콜라, 지방이 적은 음식, 유기농 과일 등을 찾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까다로운 식습관을 탐식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도 탐식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168쪽)


<탐식을 이기는 길>(170-177쪽)


1. 신령한 양식에 길들라: 몸은 담백하고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도록 길들이고 영의 양식을 채우기에 힘써야 한다. 


2. 금식: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을 끊어 몸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근원을 차단하는 일종의 자기부인 행위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에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과 '노동', '독거'라는 특별 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이중 배고픔은 금식을 가리킨다. 


기독 교회 역사를 통해 매년 교회 안에서 시해되어 온 두 행사는 바로 금식과 만찬이었다. 둘은 모두 음식과 관련된 것으로 금식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며,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한 떡을 떼어 먹음으로써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3.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금식을 윤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개인생각] 금식은 소극적인 경건이라면, 감사는 적극적인 경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구제: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훈련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음식을 금하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는 연습을 하는 것이 몸의 욕망을 다스리는 훨씬 효과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몸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양만 먹고 남은 음식은 먹지 못하는 빈곤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다.


5.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기:  나눔을 일상에서 더욱 풍성히 살아내는 실제적인 방법은 바로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는 일이다. 그런 삶이 몸에 익으며, 음식은 더 이상 자기 만족의 도구가 아니라 이웃과 연결되고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매개체가 된다. 


  [개인생각] 탐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으로 채우고, 필요한 양을 먹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육체적인 훈련을 한 후 점점 이웃과 나누어 먹는 훈련으로 나아갈 때 가장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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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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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노에 대해서1]


고대 그리스 철할자 플라톤은 용기 있는 자만이 분노할 수 있다고 말하며 분노를 현자가 마땅히 지녀야 할 덕으로 간주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화를 낼 만한 일이나 대상에 대해 적절한 때에 화를 내는 일은 칭찬받을 만하며, 이것은 악이 아니라 도리어 미덕이라고 주장했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하), 87쪽.

분노가 악의 도구가 되기도 하지만,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도 함께 생각해 봐야 하는데, 우리는 너무 분노를 용서와 사랑이라는 덕목으로 <억압>만 한 것은 아닌가 반성해 보아야 할듯 합니다. 행동으로 나타나지 않는 분노가, 뒷담화로 나타나기 쉬운데 분노에 대해서는 격하게 정죄하면서도, 뒷담화에 대해서는 서로 관대하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분노에 대해서2]

인간이 화를 낼 때 그것이 치명적인 문제가 되는 이유는, 그 화가 의로운 것이든 아니든 좀처럼 통제하기 쉽지 않다는 데 있다. 바로 여기서 중요한 문제가 발생하는데, 분노해야 마땅한 대상에게 마땅한 몫으로 갚아 주는 정의의 수준을 유지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89쪽)

흔히 분노가 극에 달하면 이성을 잃는다고 표현하는데, 이 말은 복수에 대한 욕망으로 정신이 한 곳으로 몰린다는 뜻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확하다. 이성은 실종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수할 계획과 전략을 짜는 쪽으로 몰린다.(91쪽)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분노에서 태동하는 복수는 그래서 강력하고 집요하며 사악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이 낼 수 있는 최대치의 악이 집중되는 것은 분노로부터 올라온 것이다. 따라서 분노를 다스리지 않고 방치하거나 방임한다면 우리는 지옥으로 가는 문을 열어놓고 사는 것과 다름이 없다... 그래서 분노는 위험하다.


‎[분노에 대해서3]

분노를 이기는 길(98-106쪽)

1. 원수 갚는 일은 나에게 속해 있지 않다.
: 하나님께 심판을 맡기고 내가 심판하지 않기

2. 용서하기
: 분노의 씨앗이 자라지 못하도록 용서해 버리기

3. 분석하고 소통하기
: 객관화하여 분노의 대상을 분산시키기라고 보면 될 듯

4. 입 안에 침이 고이기까지
: 일단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고 참기

5. 생산적 에너지로 전화하라.
: 루터는 화가 나면 화를 솟구치게 하는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글쓰기와 연구에 몰두했다는...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신원하.

올 해는 우선 실천하기 쉬운 것부터 해 봅시다. 입 안에 침이 고일때까지 말하지 않는 것으로 분노를 다스려 보는 것부터 해 봅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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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왕기상 10장과 열왕기상 11장은 한 장 차이지만 영적인 분위기는 완전히 다릅니다. 열왕기상 1장부터 솔로몬의 인생이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면 그것의 정점은 열왕기상 10장이고 11장을 넘어가면서는 하향세를 타게 됩니다. 하향세라기 보다는 급격한 추락으로 성경은 묘사합니다. 한 장 이지만 솔로몬의 추락은 급격하게 됩니다.

 

[정리1. 내용의 정리]

1. 솔로몬이 바로의 딸 외에도 많은 이방여인을 사랑하다.
  1) 모압과 암몬과 에돔과 시돈과 헷 여인...
  2) 이는 여호와께서 명령한 통혼하지 말라는 말씀을 거역한 것으로 다른 신을 섬기게 됨
  3) 솔로몬은 그 여인들을 사랑하였으므로 결국은 그 여인들과 함께 그들의 신도 들어오게 됨.
  4) 솔로몬은 후궁이 700명, 첩이 300명이라. 솔로몬의 마음을 돌아서게 하였다.
  5) 솔로몬이 나이가 들어 그 여인들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과 같이 온전하지 못했다.
  [결과]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진노하사, 전에 두 번 나타나 이와 같은 일을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솔로몬이 그것을 어기고 명령한 법도를 지키지 않았으므로 이 나라를 빼앗아 네 신하에게 주리라. 그러나 다윗을 위하여 네 세대에는 하지 않고 네 아들의 손에서 빼앗을 것이다. 그러나 모두 빼앗지는 않고 네 아들을 위하여는 한 지파를 주리라.

2. 솔로몬 시대에 일어났던 대적자들(14-40절)
  1) 에돔 사람 하닷
    전에 다윗 시대에 군대장관 요압이 에돔의 남자들을 모두 죽일 때, 하닷은 작은 아이였다. 그는 그의 아버지와 함께 애굽으로 도망쳤는데, 거기서 바로의 도움으로 정착하고 하닷은 바로의 눈에 들어 자기의 처제와 결혼까지 시킨다. 그러던 하닷이 다윗이 죽은 것과 요압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듣고는 바로의 허락을 받고 고향인 에돔으로 간다. 하닷은 그곳에서 솔로몬의 대적자가 되어 솔로몬을 힘들게 한다.
  2)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
    다윗이 소바 사람들을 죽일 때, 르손이 사람들을 자기에게로 모으고 그 무리의 괴수가 되었다. 그는 다메섹으로 가서 거기서 왕(수리아)이 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솔로몬 평생에 이스라엘을 대적하고 미워하는 존재가 되었다.
  3) 여로보암
    솔로몬의 신하 중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도 솔로몬을 대적하여 일어난 사람인데, 그는 솔로몬이 밀로를 건축할 때, 그의 용맹과 성실함이 눈에 띄어 솔로몬이 요셉 족속의 일을 감독하게 했던 사람이다. 그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서 이스라엘의 10개파를 얻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자,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 했고, 여로보암은 애굽으로 도망해서 솔로몬이 죽기까지 그곳에 있었다. 선지자 아히야는 여로보암에게도 다윗과 같이 여호와의 율례와 법도를 행하면, 다윗의 집과 같이 견고한 집을 세우겠다고 약속하신다.

3. 솔로몬의 죽음
  1) 그에 대한 기록은 솔로몬의 실록에 기록되어 있고, 그는 예루살렘에서 40년을 다스림.
  2) 그를 대신해서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열왕기상 10장까지 솔로몬의 치적은 마무리 된다. 그리고 솔로몬의 그릇된 행동들에 대해서 11장에 언급된다. 결정적인 것은 솔로몬이 나이가 들면서 많은 이방의 여인들을 아내로 맞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그들과 함께 그들의 신과 제사가 이스라엘에 함께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방여인과의 통혼과 이방신에 대한 제사로 말미암아 여호와 하나님은 분노하시게 되고, 솔로몬에게 네 아들의 세대에 가서는 한 지파만을 주고 나머지는 모두 빼앗기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솔로몬의 인생 말엽에는 많은 대적자들이 나타났던 것으로 보인다. 대표적인 사람이 에돔 사람 하닷과 엘리아다의 아들 르손이었다. 르손은 당시에 수리아의 왕이었다. 또한 내부적으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이었다. 여로보암은 솔로몬 자신이 직접 세운 관리였는데, 그가 선지자 아히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10개 지파를 다스리게 될 것이라는 예언을 받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솔로몬은 여로보암을 죽이려 하고, 여로보암은 살기 위해서 애굽으로 망명을 하게 된다. 결국 이들은 모두 잠재적인 솔로몬의 적이 되었고, 솔로몬의 평생에 가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솔로몬의 나라가 점점 쇠약해 졌으리라는 것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이다.

결국 솔로몬은 40년간의 통치를 마치고 조상들과 함께 자고 그의 아들 르호보암이 대신하여 왕이 되었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솔로몬의 쇠락에 있어서 이방여인을 사랑한 것과 그로 말미암은 이방 제사가 이스라엘로 급격하게 들어오게 된 것이다.

  죄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들어온다. 솔로몬은 여인을 사랑한 것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금하신 이방여인들이어고, 그들과 통혼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자기의 신들을 가지고 들어왔으며 그로 말미암아 이방 신에 대한 제사가 예루살렘의 솔로몬 궁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이스라엘 전역으로 확산되게 된 것이다.

   작은 죄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큰 죄를 일으킨다. 적은 지역에서 일어난 죄가 전국적으로 확산하게 된다. 솔로몬은 나이가 들면서 하나님을 향한 엄격한 기준이 약화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틈을 이용해 죄는 물밀듯이 들어왔고, 이스라엘 전역을 장악하게 된다. 죄란 이런 것이다. 참으로 두렵고 무서운 것이다.

2. 다윗의 시대에 다윗에게 당한 사람들이 솔로몬의 시대에 대적자가 되었다.

  다윗은 강한 왕이었다. 주변에 많은 나라들을 정복했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윗에 대한 강한 불만을 가지고 피해를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장은 힘이 없기 때문에 애굽으로 피해가서 지낸다. 그러나 자신들에게 힘이 생기고, 다윗이 죽고 전과 같은 상황이 아니라는 것을 알자, 자신과 자기 민족이 당한 고통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서 솔로몬 시대에 솔로몬을 괴롭히는 존재가 된다. 이와 같은 여러가지 어려움이 솔로몬의 왕조를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보게 된다.

   적이란 없는 것이 아니다. 어딘가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러다가 우리가 약해지거나 정신이 없는 틈을 이용해서 우리를 공격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평안의 시대를 산다고 해서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적은 잠재되어 있다. 오히려 평안의 시대에 더욱 그렇다. 그런 평안을 만들기 위해 많은 전쟁이 있어어야 했기에 그로 인하 많은 피해자가 있게 마련이다. 따라서 평온하고 부강할 수록 그것을 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마음을 달래주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위험과 반란이 싹 틀 수 있기 때문이다.

   참된 리더는 평온한 시대에 자신의 치적에 도취될 것이 아니라, 그런 성공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발생한 상처입은 대상들을 찾아 위로해 주고, 때로는 고개도 숙여주어 그들의 마음 속에서 분노를 누그려 뜨릴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그들의 마음 속에 있는 억울함을 풀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잠재적인 적을 내 편으로 만들어 진정한 화합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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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후서를 지나 이제 요한일서로 들어와봅니다. 요한일서를 하지 말고 다른 본문으로 넘어가 볼까 하는 유혹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요한일서가 좀 정리하기가 난해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그러나 해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흠없이 잘하려고 시작한 것이 아니라, 흠이 많고 거칠겠지만 그래도 이런 방식으로 해보는 것이 유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면서 시작한 일이니... 좀 부족하더라도 용기내어 해보기로 했습니다. 분명히 큰 흐름 속에서 건지는 것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ㅋ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문단을 나누어 잘 정돈하며 정리해 봅니다. ]

1. 태초부터 있던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해서, 그리고 너희에게 전하는 이유(1-4절)
  1)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2) 이 생명은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난바 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다.
  3) 우리가 이렇게 전하는 것은 너희와 우리 사이에 사귐이 있게 함이다.(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리는 사귐이다.)

2.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다.(5-10절)
  1) 하나님은 곧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
    :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는 행하지 않은 것이다.
    : 그런데 우리가 빛 가운데 행하면,
    (1)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다.
  2)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이것은 어둠에 행하는 것이다)
   (1) 그것은 스스로 속이고, 진리가 우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빛이 없는 것을 말한다.)
  3)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1)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4)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1)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을 정리한 것을 토대로 하나의 매끄러운 흐름으로 연결해 가는 작업이면서 동시에 내용을 개인화하는 작업입니다.]

요한은 지금 자신이 받은 것과 전하는 것이 매우 확실한 것임을 확신하며 말하고 있다. 그것은 생명의 말씀인 예수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것을 전하는 것을 통해서 받는 자와의 사귐(연합)을 확대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생명의 말씀인 예수를 전한다고 한다.


그 첫 번째 내용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빛이고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요, 진리를 행하지 않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죄 없다고 말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행위이니 자신의 죄를 자백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됨을 받으라고 제안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오랫동안 묵었던 하나의 오해를 풀며.

 

위의 논리라면 우리가 요한일서에서 가지는 오해 중 하나가 자연스럽게 해결된다.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 이 내용은 성도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자연스럽게 <구원을 받았는데 여전히 죄를 짓는다면>으로 해석했고 그것은 진리를 행하지 아니하는 것(5절)으로 <여전히 구원받지 못한 상태임>을 반증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을 하고도 삶에 있어서 여전히 죄된 행실을 벗어버리지 못하는 대부분의 성도들에게 구원의 확신을 불안케 하는 구절이 되었다.

그러나 그 다음 구절부터 성도들은 오히려 자신의 죄에 대한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죄를 고백하면 오히려 죄사함을 받는다는 명백한 복음적 메시지가 나오고), 오히려 죄가 없다고 말하는 자는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라는 말씀이 이어지니(10절) 이로 볼 때,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고 하면서 어둠에 행한다면>이라는 구절은 <예수를 믿고도 죄를 범한다면>이라는 의미로 해석해서는 안된다. <어둠에 행한다면>을 <죄를 범한다면>이 아니라, <죄를 범하고도 깨닫지 못하는 어두움에 있다면> 정도로 해석하는 것이 적합하다는 것이다.

생명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와 사귐이 있는 사람은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죄가 없다라고 말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자신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죄를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면 하나님은 예수의 피로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시는 그런 상호관계(이것인 하나님과의 사귐의 근거이면서 핵심이다)가 형성된 것을 의미한다.

가장 위험한 것은 <자신의 죄가 없다>(8절)고 말하는 <어둠에 행하는 행위_죄를 발견하지 못하는 어둠>(6절)인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진정한 하나님과의 사귐은 없는 것이다.

이 땅에서 성도와 하나님과의 긴밀한 사귐이란, 성도가 죄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의 죄를 깨닫고 하나님께 고백할 때, 하나님의 죄사함의 은혜(예수의 피로 말미암은)가 지속적으로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그 죄사함을 믿고, 성도는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은 그 죄인을 예수의 피로 세운 언약을 통해 다시 품으시는 긴밀한 사귐이 존재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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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라가 읽은 모세의 말씀을 읽고는 백성들은 울고 말았지요. 그러나 충분히 회개하고 울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성일 이었고, 즐거운 날이어야 했으니까요. 먹고 마시며 즐기는 날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초막절의 7일을 보냈습니다. 초막절이 끝난 것이 일곱째 날 22일(15일부터 일주일을 초막절로 지키니) 정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일곱째 날 24일이 되었습니다. 절기는 마쳤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자신과 조상들의 죄를 회개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서는 분명했던 것 같습니다. 일곱째달 24일에 사람들은 다시 모여 온 민족적인 회개를 합니다. 그리고 그 회개이후에 새로운 언약 체결을 통해서 다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를 다시 구하게 되지요.

 

[1차 정리. 내용정리]

1. 귀환한 유다 백성들의 이스라엘 역사관

  1) 일곱째 달 24일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 모여 금식하며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릅씀

  2) 모든 이방 사람들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조상들의 허물을 자복함.

   (1) 낮의 사분의 일은 그 제자리에 서서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함

   (2) 낮의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였다.

   (3) 레위 사람 예수아와 같은 사람들은 단 위에 올라가서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2. 여호와 하나님과 관련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함.(5- 37)

  1)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과 일원 성신과 땅과 땅 위의 만물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지으시고 다 보존하시오니 모든 천군이 주께 경배합니다.

  2) 옛적에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더불어 언약을 세우시고... 그 말씀대로 이루심(7,8절)

  3) 애굽의 고난받는 것을 감찰하시고,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이적과 기사로 애굽을 치셨다.

   : 홍해를 가르시고 광야에서 불기둥,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심

  4) 시내산에서 강림하셔서 율법과 선한 율례와 계명을 그들에게 주셨다. 안식일 알리심.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주셨다. (11-15) 그 땅에 들어갈 것을 말씀하여 주셨다.

  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여 주의 명령을 듣지 않고 거역했으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사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17절)

  6) 약속의 땅에 들어가 그들의 것을 차지하게 하셨으나, 이스라엘이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고 거역하여 주의 율법을 등지고, 주께로 돌아오기를 권면하는 선지자들을 죽여 주를 심히 모독하였다.(18-26)

  7) 그래서 주께서 그들을 대적의 손에 넘기셨다가 그들이 환란때에 부르짖을 때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다시 구원하였으나 평강을 얻은 후에 다시 주 앞에서 악을 행하였다. 이러기를 계속 반복하는 역사를 보냈다. 그래서 결국은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하는 자리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크신 긍휼로 이스라엘을 아주 버리시지는 않았다.(27-31)

  8) 앗수르 이후부터 지금까지 당한 고난을 이제 작게 여기지 마소서. 우리는 악을 행하였으나, 주께서는 진실하게 행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땅에서 우리가 종이 되었고, 그들이 우리의 소산을 누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심히 곤란하게 되었습니다.(32-37)

3. 재 언약을 약속하는 귀환한 백성들

우리가 이 모든 일로 말미암아 이제 견고한 언약을 세워 기록하고 우리의 방백들과 레위 사람들과 제사장들이 다 인봉하였나이다.

 

[2차 정리. 성경 내용을 내 것으로 재정리]

에스라가 읽어 준 말씀에 순종하여 귀환한 백성들은 회개했고, 일곱째 날 15일에 7일간 초막절의 절기를 온 마음을 다해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나고 이틀 후 그 달 24일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회개하였다. 아마 에스라가 처음 말씀을 읽었을 때, 사람들이 회개의 마음으로 울려고 했던 것(8:8-10)을 성회이기에 즐거워하라고 했었던 것에 대해서 절기를 지나 따로 회개의 날을 잡아 진행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백성들은 우선 이방인과의 절교를 하고, 죄를 회개했다. 한 낮의 사분의 일은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여 듣고, 또 사분의 일은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경배하며 시간을 보냈다.

이 때 예수아를 중심으로 한 레위인들은 이전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자신들의 죄가 무엇이며, 하나님은 어떤 분이며, 이제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한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시고 다스리시며 섭리하시는 분인데, 그 분의 언약 속에서 아브라함이 부름을 받았는데.. 그리고 그 분은 성실하게 우리의 필요들을 채우며 인도해주셨는데, 우리 조상 이스라엘은 교만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다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큰 긍휼로 다시 기회를 얻기도 했지만, 이스라엘은 돌아오도록 보낸 선지자마저 듣지 않았다. 이런 악순환의 역사가 반복되었다. 결국은 하나님은 앗수르에 손에 이스라엘을 붙였다. 그러나 아주 멸하게 하시지는 않았다. 이제 우리가 충분히 고난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고 있으니 주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다시 견고한 언약을 다시 세워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오오니 하나님이여 돌이키시사 회복시켜 달라고 요청하는 것이다.

 

[3차 정리. 묵상과 적용]

 1. 반드시 죄의 문제는 퉁치고 가야 한다는 의식이 있었다.

에스라를 통해서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을 때, 이들은 이들이 직면한 이 모든 고난의 역사가 하나님의 징계며, 조상들과 자신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인 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자연스럽게 회개의 눈물을 흘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성일이요 기쁨의 날이었다. 이들은 이들의 감정조차도 하나님이 정하신 것에 맞춰 순종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감정이 상하거나, 감정이 흥분되면 어떻게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도 감정대로 행동하는 것이 요즘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감정적으로 아팠고 슬펐지만, 이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했다. 그리고 자신의 감정을 다스렸다. 그렇게 일주일의 시간을 초막절로 지켰다.

그리고 초막절이 끝났다. 이들은 말씀을 듣고 깨달았던 자신의 죄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고 갈 수는 없었다. 지도자들도 그것을 알았다.  초막절을 마치고 이틀만에 다시 모였다. 본격적인 회개의 시간을 갖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종종 회개의 감정을 갖는다. 그러나 그 감정은 시간의 흐름을 따라 무뎌진다. 잠시 회개의 내용들을 말한 후, 아니면 그 감정의 때를 놓치고 나면 회개에 대한 의식조차 잊어 버린다. 그것은 우리가 가지는 회개의 무게가 가볍기 때문이다. 통회, 통증있는 회개가 아니기 때문이다. 잠시의 파장이며, 느낌이었지 우리의 심비에 새겨질만한 아픔이 없는 죄책감이기 때문이다. 귀환한 이들은 그런 회개는 아니었다. 이들이 말씀을 들었을 때 깨달았던 본인들의 죄는 거대한 파도같아서 자신을 덮쳐왔고, 그 충격과 감정은 우리의 이성에 새겨지는 아픔이었다.

절기를 마친후 이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하기 위해 다시 모인 것이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쉽게 죄를 잊는 것이 아니라, 쉽게 죄를 잊지 않는 것이다. 그 아픔과 파장과 파멸을 잊지 않는 것이다. 그래야 복음이 복음으로 우리 안에 계속 남아 있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죄의 아픔과 크기를 잊게 하는 복음이 우리를 방종으로, 무례함으로 교만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2.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인하여

긍휼이란 단어 만으로도 호의가 느껴진다. 그런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긍휼에 <크신>이라는 단어를 반복적으로 사용한다. 그 이유는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금새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혜는 단순히 <긍휼>이란 단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크신 긍휼>로 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렇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많이, 얼마나 반복적으로 긍휼을 베푸셨는지... 얼마나 많은 거절과 완고함과 교만에 대해서 다시 긍휼을 베푸셨는지 이스라엘의 역사는 너무나 분명히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단순히 긍휼하시다는 것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나님의 긍휼은 참으로 크다라고 놀라고 감탄하고 경배하는 것이 진정으로 하나님은 긍휼하시다는 말씀에 그나마 어울린다고 볼 수 있다.

복음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경험하는 것이다. 우리의 큰 죄를 덮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는 큰 긍휼을 성경은 복음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표현하자면 이렇게 할 수 있겠다.

우리의 큰 죄 <<<<< 하나님의 크신 긍휼

믿는 자는 복이 있을 것입니다. 아멘.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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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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