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시편 27편] 이전에 환난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의 간증이 있다고 해서 다음 환난이 쉽다는 것은 아니다.  환난은 면역력이 없으며, 당하는 사람에게는 늘 적응이 되지 않는다.   <환난>은 말 그대로 <환난>이다. 견딜만한 환난이란 애당초 없는 것이다. 이 때 필요한 것은 의지적 믿음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지만, 하나님은 나를 영접하실 것이다.(10절) 나는 분명히 살아 있을 때, 하나님의 선하심을 볼 것이다.(13절) 그래서 나는 강하고 담대하여 여호와를 기다릴 것이다.(14절) 의지적인 믿음이 필요하다. 


[정리1]


1. 시편 기자가 이전에 위기로부터 구원 받았던 경험과 기쁨(1-4절)


1절.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2절)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3절)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4절)


: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원수들에게서 구원하여 주셨기에 시편 기자는 군대가 와도, 전쟁이 일어난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음을 고백한다. 그의 마음은 평안하여 여호와의 전을 사모하여 그의 집에 머물기를 원한다.


2. 시편 기자가 지금 받은 구원에 대해 제사와 찬송을 드리겠다고 고백함.(5-6절)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의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의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높은 바위 위에 두시리로다. (5절)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둘러싼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의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드리겠고 / 노래하며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6절)


: 여호와 하나님께서 환난 때에 나를 초막과 장막 은밀한 곳에 숨겨 보호하시고, 바위 높은 곳에 두시어 안전하게 하셨다. 그로 인해 나를 둘러싼 원수들에게서 높이 들리시니 나는 장막에서 제사를 드리고 찬양할 것이다. 


3. 또 다른 절박한 고통 속에서 부르짖는 시편 기자의 간구와 응답에 대한 기다림(7-13절)


7절. 여호와여 내가 소리 내어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가 마음으로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8절)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마시고 떠나지 마소서(9절)


: 시편 기자는 또 다시 더 큰 환난에 고통당하여 부르짖는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노하신것 같고, 자기 자신을 떠나 버리신 것 같은 고독을 느낀다. 당신의 얼굴을 감추고 숨어버리신 것 같은 아픔을 느낀다. 이전의 은혜가 모두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인데, 그런데 지금은 전혀 그런 은혜가 없을 것 같은 고통이다. 마치 부모에게 버림받은 자식과 같은 심정이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10절)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생각하셔서 평탄한 길로 나를 인도하소서(11절)


내 생명을 내 대적에게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 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 함이니이다.(12절)


내가 산 자들의 땅에서 여호와의 선하심을 보게 될 줄 확실히 믿었도다. (13절)


너는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기다릴지어다.(14절)


: 시편 기자는 믿는다. 비록 부모가 버렸을지라도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실 것이라는 것을. 그는 여전히 자신의 영혼을 하나님께 맡기며 다시 한번 산 자들의 땅에서(살아 있을 때에)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확고히 한다. 이제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여 여호와의 도우심을 기다려라.



[정리2]


1. 시편 기자는 이미 절박한 상황 속에서 자신을 구원하셨던 하나님을 경험했다.


2. 그는 조금 전까지도 하나님이 대적자들엑 구원하시어 높이 들려주신 경험을 가지고 있다.


3. 그런데 지금 또 다시 더 큰 고통을 당하고 있다. 지금은 나를 구원하셨던 여호와 하나님께서 떠나 버린 것 같은 고통을 느낀다. 고통이란 그런 것이다. 고통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4.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편 기자는 확신한다.(의지적 확신) 여호와는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 그는 나를 인도하시고 이끄시어 참고 견디는 자리로 나아가게 하시며, 승리하게 하신다. 지금은 믿음 속에서 기다리고 기다릴 때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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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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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1편] 시편 1편에서 말한대로,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들의 길은 망할 것이라는 메시지와 같다. 똑같다. 그러나 그걸 믿고 확신하여 늘 의인의 자리에 있는 것은 참 힘들다. 그래서 성경은 계속 같은 이야기를 한다. 성경이 강조할 때는 이유가 있다. 그것이 매우 중요하든지, 그것을 꼭 해야 하든지하기 때문이다.


[정리1]


1. 시편 기자가 받고 있는 조롱과 위태로움

  1절.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의지하여)

너희는 내 영혼에게 새 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하니 어찜인가?


  2절. 악인이 활을 당기고 화살을 시위에 먹임이여

마음이 바른 자를 어두운 데서 쏘려 하는도다. 

 : 여호와를 의지하여 의를 행하고 선에 머무르려 하는 자를 오히려 넘어뜨리려 하며, 짓밟으려 하는 자가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조롱과 협박에서 두려움을 느낀다. 


2. 시편 기자의 견고한 마음과 확신(의인을 향한)

  3절. 터가 무너지면 의인이 무엇을 하랴

  4절.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전에 계시고

   여호와의 보좌는 하늘에 있음이여

   그의 눈이 인생을 통촉하시고 그의 안목이 그들을 감찰하시는도다.

  : 그러나 그는 그 두려움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그 터(정의와 공의)가 무너지면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호와는 여전히 그의 성전에 계시고, 그분의 보좌는 높은 곳에 있다. 그러면서 이 땅의 인생을 살피시고 있으니 두려움이 없다. 


3. 시편 기자의 확신(악인을 향한)

  5절. 여호와는 의인을 감찰하시고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마음에 미워하시도다.

  6절. 악인에게 그물을 던지시리니 불과 유황과 태우는 바람이 그들의 잔의 소득이 되리로다.

  : 여호와는 악인과 폭력을 좋아하는 자를 미워하신다. 그들을 그물로 잡고 심판하신다. 


4. 결론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 여호와께서는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고, 의인을 바라보신다.



[정리2]


1. 시편 1편의 말씀처럼, 하나님은 의인의 길은 인정하시고 악인은 망하게 되리라는 말씀의 반복이라 볼 수 있다. 


2. 그러나 성경은 이렇게 살려고 하는 자들에게 많은 원수(끊임없는)가 있음을 말하여 준다.


3. 따라서 성도의 삶이란, 이런 환경 속에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판결)을 믿고 의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다. 


4. 그것 외에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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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4편] 하나님은 어떻게 증거되는가? 고양이가 개가 되는 방식으로가 아니라, 고양이가 개 앞에서 여유롭고 넉넉한 태도를 가지고 아량을 베풀어 주는 삶을 통해서다. 하나님의 위대함은 고양이를 개로 만들어서가 아니라, 개보다 더 위대한 고양이를 만드심으로 증명된다. 고양이들이여, 개의 인생을 두려워하지 말라.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정리하기]


1. 서언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


2. 본론


<시편기자가 인생들을 향해서 주는 경고>


  1) 인생들아, 어느 때까지 나의 영광을 바꾸어 욕되게 하며 헛된 일을 좋아하고 거짓을 구하려는가!

  2)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위하여 경건한 자를 택하신 줄을 너희가 알지어다.

   (1) 내가(시편 기자와 그의 백성) 그를(여호와 하나님) 부를 때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리로다.

  3) 너희는 

   (1) 떨며 범죄하지 말지어다. 

   (2) 자리에 누워 심중에 말하고 잠잠할 지어다.

   (3) 의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를 의지할지어다.

   

3. 결론: 여러 사람들이 주의 백성에게 하는 질문과 그에 대한 우리 안의 확신


  1)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 누구뇨 하오니

   (1)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

   (2)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3)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시니이다. 



[정리2. 본문의 정황과 시편기자의 심중으로 들어가기]


시편 기자는 현재 하나님을 부르고 찾는 중에 있다. 그리고 주의 얼굴을 들어 자신에게 비추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그것은 시편 기자의 상황이 문제가 해결된 상황이 아닌, 현재 문제가 지속되는 상황이며, 가시적인 해결의 실마리고 보이지 않는 상황이다. 게다가 여러 사람들(인생들, 너희들)은 우리에게 선을 보일자가 누가 있느냐? 하면서 거들먹 거리고 있다. 그들이 득세하는 것 같고, 하나님의 백성인 시편 기자는 아무것도 보여줄 것이 없는(증명해 낼 만한 것이 없는)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응답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상황 속에서 당연 위축되어 있어야 할 이 사람이, 그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을 떨며 두려워하라고, 그 앞에서 잠잠하라고, 빨리 의의 제사를 드려 여호와를 의지하는 백성이 되라고 말한다.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인생들의 입장에서보면 적반하장인 상황인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인생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보다 더 풍성하고 여유있는 태도를 가진다. 안전에 대한 확신을 가진다. 여호와께서 마침내 그의 얼굴을 우리 자신에게 비추실 것을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노래하고 찬양한 시다. 


[정리3. 본문에서 시편기자가 전해 주고 싶었던 메시지]


1. 하나님은 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 일하셔서 찬양을 받지 않으신다 


시편 기자의 소원은 인생들을 향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조롱하는 이방 사람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보란듯이 자신을 증명해 주시길 바랬을 것이다. 힘으로 그들을 정복하고, 기적적으로 이스라엘을 일으켜 세워서 보란듯이 그들의 교만을 누르시는 방식으로 일하실 것을 기대하면서 기도했을 것이다. 그러나 기도는 원하는 방식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이방인들의 조롱은 더욱 컸고,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 보이기는 더욱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반드시 우리를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에 흔들림은 없었다. 자신이 원하는 지금은 아니었지만, 반드시 자신의 손을 들어 이기게 하실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확신하고 나니, 그와 같은 하나님을 시편 기자는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찬양이 결과(긍정적)에 대한 찬양이었다는 것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찬양이며, 이방인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믿음이 없는 자가 믿음이 적은 자도 자연스럽게 하는 찬양이다. 그러나 참된 찬양은 신학적인 확신과 믿음 속에서 나오는 찬양이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눈물 속에서도, 고난 속에서도 찬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찬양이 참된 깊이 있는 찬양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2. 하나님(백성)의 승리를 믿는 자는 불리한 중에도 여유와 평안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승리를 믿는 백성들은 지금 패배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도 기쁨이 충만(7절)하고 평안이 눕고 자기도 한다(8절) 오히려 자신보다 유리하고 잘 나가는 사람들을 향해서 당당하게 권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고, 의의 자리로 나아오라고 충고하기도 한다. 


우리는 전도를 하려고 해도 내가 잘되고, 내가 성공해야지 내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하나님이며 살아계신 전능한 하나님이심이 증명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성공하지 못하면, 풍부하지 못하면 간증도 전도도 불가능하고 오히려 하나님을 증명하는데 방해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그런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하시지 않는다. 또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 옳은 것도 아니다. 


오히려 가난한 자가 보여주는 여유과 평온함이 그들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증명하는 방식이다. 불안정한 기반 속에서도 기쁨으로 찬양할 수 있는 자의 그 삶이 하나님을 증거하는 방식이다. 히브리서 11장의 믿음의 선진들이 자신들의 믿음을 그렇게 증명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믿음이었던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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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 (1) 


1. 그리스도인들이 말하는 믿음의 두가지 의미

  1) 단순한 신념(Belief): 기독교 교리를 사실로 여기거나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하는데, 루이스는 자신이 하나님을 믿기 전에 충격을 받은 사실은,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하나의 덕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증거가 충분하면 믿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하면 믿지 못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고, 충분한 증거에도 믿지 못한다면 명석하지 못다하는 것이고, 증거가 충분하지 못한데도 믿는 다는 것은 어리석은 것으로 간주하면 되는 것이라 본 것이다. 


그러나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믿음과 이성은 하나가 되어 증거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정과 상상이 반대편이 되어 믿음을 약화시키는 것을 경험하곤 한다는 것이다. 

  예) 거짓말을 하는 이쁜 아가씨에게 속지 말아야지.... 사람은 물에 뜨니까 수영 선생님의 손을 놔도 괜찬지...


기독교가 충분히 믿음만한 증거가 있다는 판단이 들었더라도 믿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 끼여 있거나, 이런 저런 공격을 받고 기독교를 믿는 것이 손해보는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충분한 증거에 의해 생긴 믿음이 흔들리게 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아무리 기분이 바뀌어도 한번 받아들인 것은 끝까지 고수하는 기술입니다. 기분은 이성과 상관없이 변하는 법이다. 따라서 믿음의 습관을 훈련해야 한다. 


   믿음의 습관을 훈련하는 

첫 단계는 사람의 기분은 바뀌게 마련이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

다음 단계는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상 날마다 조금씩이라도 시간을 내어 그 주요 교리들을 찬찬히 정신에 새겨 나가는 것이다.(매일 기도하며, 성경과 경건서적을 읽고 교회에 나가는 일이 그리스도인의 삶에 필수적인 이유) 신념은 계속 북돋워 주어야 한다. 


믿음을 잃어버리는 사람의 대부분이 분명한 논증을 거쳐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저 어쩌다가 믿음을 잃어 버리는 것이 대부분 아닌가? 



두번째 믿음에 대해서 말하기 전에 이해해야 할 이야기가 있다. 


   (1) 선을 행하기 위해 한 주간이 아니라 6주간 정도를 살아보도록 하자.(이 정도면 충분히 자신에게 실망할테니...)

   (2) 선을 행하기 위해 치열한 노력을 기울여 보기 전까지는 자기가 얼마나 악한 인간인지 깨닫지 못하는 법이다. 

     - 누워서는 바람의 세기를 알수 없다. 바람을 거슬러 본사람만이 바람의 세기를 안다. 따라서 정작 악한 사람들은 악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한다. 왜? 늘 악게 굴복해서 살아왔기 때문에. 악과 진짜 싸워보기 전에는 악의 힘을 알 수 없다. 

   (3) 이 상황이 되었을 때(하나님은 이 상황이 될 때까지 기다리신다.) 우리는 비로소 우리가 가진 모든 기능, 즉 생각하는 능력이나 순간 순간 팔다리를 움직이는 능력은 모두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한 것이 사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임을 알게 된다. 

    예) 아빠, 아빠 선물사게 6펜스만 주세요.


믿음(2) 


두번째 믿음은, 기독교 도덕을 실천하려고 최선을 다했는데도 실패한 후에야, 또 설사 실천에 성공했다 해도 그것은 원래 하나님의 것을 돌려드린 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에야 비로소 대두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지킬려고 힘껏 노력해 본 다음에서야 비로소 알게 된다. 그렇게 해서 깨달은 자신의 한계 때문에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고, 다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데까지 인도해 주시리라고 믿는 믿음이 두번째 믿음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께 맡겼다고 해서 노력을 포기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신뢰하는 사람의 충고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즉 전만큼 안달하지 않으면서 노력하게 됩니다. 행위에 대한 보상을 위해서가 아니라 천국을 이미 맛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이 일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겨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구원에 있어서 행위에 대한 조건을 제기하고, 어떤 사람은 믿음만 있으면 된다고 말하면서 어떻게 살아도 상관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둘다 틀렸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도덕적인 노력을 기울여 봐야 항복할 수 있고, 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어야 그 절망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한 구절로 표현하고 있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선행을 강조)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하나님의 역할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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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루이스는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믿음, 세례, 성만찬. 대표적인 세 가지 통로를 말하면서,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확장되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간결하고 담백하게 설명하다니...새롭고 놀랍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초대까지 한다.


2-5 실제적인 결론.


1.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나타났고, 이 새로운 생명은 우리 안에도 들어올 수 있다.


2.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평평한 옛 생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연상해보자)

  1) 새로운 생명은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진행되었고, 상당히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방식 3가지>

   (1) 세례

   (2) 믿음

   (3) 신비한 행위(성만찬, 미사, 주의 만찬 등 다양한 이름을 불리우는 것들)


   * 루이스는 이 방식 말고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파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제기동에서 송내까지 어떻게 가냐고 물으면 저는 전철을 타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버스로도 자건거로도 다른 방식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다 말하지는 않듯이 나도 이정도만 말한다.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믿음을 더 강조하길 원할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가지를 다 말할 것이기에 이 세가지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 분명한 것은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가르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만큼 명백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루이스는 그렇게 말한 예수의 권위에 입각하여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 권위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믿는 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므로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그런 권위에 입각하여 믿게 됩니다.(뉴욕을 가본적은 없지만,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믿게 됨, 노르만 정복 사건을 직접 본 사람은 없겠지만 역사적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믿게 됨, 이런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평생 믿을 것이 없게 됨)



3.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 그렇다고 해서 세례와 믿음과 성만찬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잘못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부모로부터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없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생명을 소홀히 다루다가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자살함으로 의도적으로 없앨 수도 있다. 따라서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잘 돌봐야 한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생명을 만드는 일은 아니고,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는 한계도 인정해야한다. 


  1) 우리 몸에 자연적인 생명이 있는 한, 그 생명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한다. 

   (1) 상처를 입었을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2) 상처를 절대로 입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다. 

   (3)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킨다)


  2)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된다. 

   (1) 여타의 사람들은 선하게 삶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만족시키거나(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움직인다는 뜻.


4.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확대되어 가는가?

   믿음: 정신적인 행위를 통해서

   세례와 성만찬: 물리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 생명의 전파는 단순히 사상의 전파만이 아니다. 사상의 전파보다는 진화, 즉 생물학적 사실 내지는 초생물학적 사실에 더 가깝다. 인간은 원래 순전히 영적인 피조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떡이나 포도주 같은 물질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고 확대하신다.) 


  [반론] 그리스도를 들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생명 수여의 방법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1)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없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2) 여러분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걱정된다면,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주변으로 불려나가야 할 것이다. 


  [반론] 왜 지금 당장 와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전복시키지 않는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면 대군을 이끌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을 지체하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진해서 그의 편에 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다 이기고 나서, 혹은 패하고 나서 편을 옮기는 것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때는 우리가 참으로 어느 편을 선택했는지 드러나는 때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전에도 알았는지 몰랐는지 깨닫게 되는 때이다.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옳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때이다.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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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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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이재철 목사님의 <청년아 울더라도 뿌려야 한다> 라는 책을 읽고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20가지의 주제가 청년들에게 꼭 다루어져야 할 것이라 여겨져서 한 장씩 책을 읽고 내용을 정리할 수 있도록 질문지를 만들어 봤습니다. 책을 읽거나 스터디 하는데 도움이 되시길 바라며.



2. 믿음이 시작하는 곳

 

작성: 김수억 목사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16:24)

 

[타고르의 글]

 

1. 22면에는 인도의 지성 타고르가 쓴 <기탄잘>라는 작품 속에서 신께 바치는 노래의 일부를 실려 있. 이 글을 읽고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 서로 나누어 보자.

 


 

2. 우리의 신앙은 진리의 지배를 받으려고 하는 것에 근거하는가 아니면 진리를 자신의 도구로 삼으려고 하는 마음에 근거하는가? 두 가지 신앙의 결과는 무엇인가?



 

3. 이재철 목사는 믿음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된다고 말하는가? (4:23)



 

4.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16:24)는 주님의 말씀을 뒤집어서 표현하면 어떻게 되는가?



 

5. 예수님이 마 5:3에서 복 있는 자로서의 심령이 가난한 자는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인가?



 

6. 이재철 목사가 말하는 마음이 가난한 자마음의 걸인의 차이는 무엇인가?(p29)



 

7. 이재철 목사가 말하는 다음 비유들을 생각해보자

1) 잎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잎을 버리는 것이다.

2) 일류 도공과 삼류 도공의 차이

3) 일류 소설가와 삼류 소설가의 차이

 

8. 청년의 때를 사는 크리스천으로서 우리는 지금부터 무엇을 훈련해야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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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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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측에는 벽이 우측에는 높은 낭떨어지 가 있는 좁은 길을 갑니다. 그런데 길은 막히고 좌측에 있던 벽이 천천히 우측으로 움직여 제가 서있을 수 있는 자리는 점점 좁아집니다. 조금 있으면 벽에 밀려 낭떨어지로 떨어질 형편입니다.

다행히 제 위로 여러개의 줄이 달려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에 제 몸을 묶는다면 죽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그 줄에는 각각 이름이 있는데 하나의 줄에는 예수라는 이름이 있습니다. 모든 줄은 튼튼해 보였습니다. 오히려 가장 허술하게 보인 줄이 예수라는 줄이었습니다.

구원 얻는 믿음이란 어떤 것일까요?

1. 예수가 아닌 다른 줄에 자신의 몸을 묶는 것은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다른 줄에 비해 굵기가 두배라고 해도, 그것은 구원을 줄 수 없습니다. 썩은 동아줄이기 때문입니다.

2. 여러 개의 줄을 내 몸에 감는 것입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많은 줄을 감으면 아무래도 한 줄에 감기는 것보다는 나을테니까요. 그런데 이것도 구원 얻는 믿음이 아닙니다. 그 중에 예수라는 줄이 혹 있더라도 말입니다.

3. 먼저 예수라는 줄에 몸을 감습니다. 교회다니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겠지요. 그리고 덤으로 옆에 있는 줄도 시간이 되는대로 감아봅니다. 날 구원해 줄 줄은 당연히 예수라는 줄이겠지만 다른 줄을 보테면 그래도 더 튼튼할테니까요... 뭐라도 하나 더 있으면 낫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으로. 시간이 있는대로 감아 봅니다. 여기에도 구원은 없습니다.

이스라엘의 문제가 이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도 믿고 다른 것도 추가로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4. 구원 얻는 믿음은 무엇일까요? 우선 예수를 제외한 나머지 줄을 끊어 버립니다. 촉박한 시간이지만 먼저 그 일을 합니다. 예수 외에 다른 것에 대한 부인이 먼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예수라는 줄만이 나의 구원에 있어서 유일한 줄이라는 의식 속에서 그 줄에 내 모든 무게를 실는 것이 구원 얻는 믿음이다. 다른 것에 대한 부인, 그리고 유일한 소망으로 예수를 의지해 내 몸의 모든 하중을 거는 것.

다른 줄을 끊느라 시간이 없어 예수라는 줄을 자기 몸에 제대로 묶지못해도 괜찮다. 오히려 예수라는 줄이 당신을 묶어줄테니... 따라서 구원 얻는 믿음이란  다른 줄을 끊는 것에서 부터 시작된다.

예수님이 가난한 자와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에게 관대했던 것은 그들은 자의적이지는 않았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모든 끈에서 끊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바리새인들에게 까다롭게 한 것은 그들에게는 다른 줄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비유가 적절한가요?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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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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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느헤미야로 들어왔습니다. 에스라에 이어지는 성경인데, 역사적인 시점으로 볼 때, 스룹바벨로부터는 93년 시간 차, 에스라의 귀환으로부터는 13년의 시간 차이를 가지는 이야기 입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을 중심으로한 재 배열]

 

1. 느헤미야가 들은 유다 땅 예루살렘의 형편(1-3절)

1) 아닥사스다 왕 20년 기슬르월에 느헤미야가 수산 궁에 있을 때의 일이다.(B.C. 445년)

* 에스라의 귀환은 아닥사스다 왕 7년 다섯째 달에 있었던 일이다.(B.C 458년, 13년 전)

* 고레스의 명령으로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한 때가 주전 538년.(93년 전)

2) 예루살렘을 다녀온 사람들 중 동생 하나니로 부터 그 형편을 듣게 됨.

(1) 그 지방 거기에서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2)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을 불탔다.

2. 예루살렘의 소식에 대한 느헤미야의 반응(4-11절)

1) 그 소식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함.

2) 느헤미야의 기도

(1) 하늘의 하나님,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2)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언약을 지키시며 긍휼을 베푸시는 주여

(3) 우리와 우리 조상들이 모세의 명령한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않았다. 지금 당하고 있는 자신들의 형편이 자기들의 죄로 말미암은 것임을 확인하고 고백함.

(4) 그러나 하나님이 흩으신 곳에서 마음을 돌이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고 행하면, 거기서부터 그들을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서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기억하소서.

(5) 이 백성들은 일찍이 큰 권능과 강한 손으로 구속하신 주님의 종들이요 백성입니다.

(6) 주여 종의 기도를 들으시고 오늘 종이 형통하여 이 사람들 앞에서 은혜를 입게 하소서.

3. 그 때 느헤미야는 왕의 술 맡은 관원이었다.(11절)

 

[정리2. 본문 내용을 내 것으로 만들어 재 배열]

 

느헤미야의 이야기다. 느헤미야는 에스라가 귀환한 시점보다 13년 후의 일을 다룬다. 스룹바벨의 귀환과는 93년, 성전 재건과는 73년 이후의 일이다.

예루살렘의 형편은 100여년 전에 1차 귀환한 백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별로 나아진게 없다. 여전히 유다와 예루살렘에 사는 동포들은 환난과 능욕 가운데 살았고, 성은 허물어진 상태며 성문들도 불타 재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지만, 여전히 보수할 여력이 없는 상태로 방치되고 있었던 것이다.

스룹바벨과 함께 1차 귀환을 했을 때(93년 전), 방해 속에서도 성전을 재건했을 때(73년 전), 에스라가 2차 귀환하여 개혁을 시행했을 때(13년 전) 경건한 유다인들은 뭔가 기대했을 것이고, 특히 멀리 타국에 있은 신실한 유다인들 중에는 자기 고향 예루살렘에서 뭔가 새로운 일과 옛 영광의 회복이 소식을 기대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첫 귀환 후 100여 년의 시간이 지나고 성전의 재건도 에스라의 개혁도 있었지만, 여전히 그 땅의 자기 백성은 비탄 속에 방치되어 있는 듯한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다시 한 번 속에서부터 하나님을 의뢰하며 고민하던 유다인이 있었으니 그가 당시 왕의 술관원이었던 느헤미야였던 것이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바사 왕 고레스에 의해 시작된 돌아온 백성 공동체는 처음 기대하고 꿈꿨던 것처럼 이루어지지 않았다.

성전을 건축하는 과정에서, 성전을 건축한 후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에 있어서도 외부적으로나 내부적으로나 쉽지 않았다. 오히려 외부적인 어려움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막혔던 길도 열여졌다. 그러나 내부적인 것은 그렇지 않았다. 모세의 말씀을 따르겠다던 백성들은 금새 타락한 것이다. 성전은 다시 엉망이 되었고, 구별된 백성을 통해 세운 귀환 공동체는 다시 이방 여인과의 결혼으로 부정하게 되었다. 이것이 스룹바벨과 에스라의 1,2차 귀환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준 모습이었다.

에스라를 통해서 회개하고 하나님의 편에 설것 같았던 백성들은, 여호수아의 결단 촉구 이후 사사시대에 혼잡했던 모습처럼 그렇게 되고 만 것이다. 단순한 땅의 귀환, 성전의 재건, 직분의 회복, 제사의 다시 드려짐 만으로는 예루살렘 언약의 성취가 필요충분의 조건이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귀환 공동체를 통해서 보여준 것은 외부로부터의 하나님의 역사는 충분히 보여주었지만, 내부로부터의 변화가 없이는 온전한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래서 내면으로부터의 변화를 주도하시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가 신약 시대에 와서 강조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그런 측면에서 신약시대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과 더불어 성령 하나님의 사역이 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반복되는 절망 속에서 느헤미야가 다시 붙잡았던 것은 다시 하나님의 언약이었다.

  죄를 지어 온 땅에 흩어졌을지라도,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 지라도(9절) 돌아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하나님의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언약의 말씀을 느헤미야는 붙잡은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은혜와 긍휼을 기대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이다.

  회복은 한 번에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귀환한 이스라엘의 회복을 위해서도 수차례의 회개과 개혁이 진행되었다. 그러고도 형편이 나아진 것이 없었다. 절망하게 되고 회의주의에 빠질 수도 있다. 아니, 대부분은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렇지 않았다. 어떤 결과를 미리 볼 수는 없었지만, 다시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았고, 그 약속을 가지고 은혜를 구하며 기도했다.

  다시 시작하는 믿음, 다시 도전하는 믿음, 다시 희생하는 믿음.

  느헤미야는 수많은 실패의 역사 속에서 안정된 자신의 상태를 버리고 다시 그 실패의 역사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약속을 끝까지 믿는 믿음이 참된 믿음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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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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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이 믿음의 장이고, 그 장에는 많은 믿음의 위인들이 언급되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히브리서 기자는 그 믿음의 결실을 얻은 위인들의 현재적 삶에 과정으로서의 수 많은 부끄러움과 연약함, 낙심과 환난으로 점철되어 있음을 노골적으로 말한다. 이 모든 과정을 도망치지 않고 거치고 나올 때, 우리는 그를 믿음의 위인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이다.

그와 같은 성도가 되기 위해서 가져야 할 두 가지 중요한 지침이 있다.

첫째는 예수를 바라보면서 현재의 고난과 수치를 참고 견디는 것이다.

둘째는 땅뿐 아니라 하늘까지도 진동하게 하실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건한 마음이다. 그럴때 흔들리지 않을 영원한 나라를 받게 될 것이다.

 

1.예수를 바라보고 참고 견디자.

성도로 살아가면서 부끄럽고 피곤하고 낙심되며 여러 가지 환난으로 인하여 손은 피곤해 지고 무릎은 연약해져서 서 있을 힘도 없겠지만, 두 가지를 기억하며 견디자.

하나, 우리를 낙심하지 않게 하기 위해 더 나아가 세우기 위해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고 자기를 거역한 일을 참으시고 그들을 위해 십자가로 나아가신 예수를 생각하고 바라보자.

둘, 하나님께서 자식에게 더 엄격하게 때론 혹독하게 징계하신다는 것을 기억하자. 지금의 고통과 부끄러움이 크면 클수록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부성애가 더욱 강렬함을 잊지 말자.

2.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자.

망령되이 행동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죄를 짓지 않고(음행, 쓴 뿌리) 사람들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에 이르라.

 

[성도의 맷집]

믿음이 좋다는 것은 환난과 시험에 대한 맷집이 좋다는 것이고, 마음이 강하다는 것이다. 믿음의 거장이란 바로 이와 같은 영적 맷집에서 나오는 것이다.

한 여집사님이 생각난다. 외소한 체구에 늘 소녀같으신 분인데, 그 분의 환경이라는 것은 감당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는 가정이다. 그런데 늘 밝게 생각하시고 성실하게 교회를 섬기신다. 나이가 더 많은 권사님이 오히려 그 분이 더 어른스럽다고 묘사할 정도다.

믿음이란 외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부드러움과 친절함. 웃음과 관용 속에서도 영적 맷집이 있어서 왼만한 것에도 좀처럼 흔들리지 않는다.

믿음이 좋다는 것이 현재적으로 형통하다는 것과 거리가 멀다는 것을 성도들이 안다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스러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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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장으로 잘 알려져있는데, 성경의 여러 인물들을 거명하며 그들이 믿음의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에 있어서 감동적인 내용을 다룬 장인데, 이 글을 읽을 때 잊지 말아야 할 3가지 지침이 있다. 

1. 과거 믿음의 선조들을 자랑하기 위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믿음으로 살 것을 요청하기 위해서다.

2. 믿음으로 살것을 요청한다는 의미는 구체적으로, 지금 당장은 하나님이 약속해 주신 것들을 얻거나 누리면서 살 수 없다는 현실을 신학적으로 이해하라는 측면에서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즉 지금은 바라는 것이 성취되지 못하는 시대요, 약속했던 것을 얻을 수 없는 시대라는 것이다. 오히려 빼앗기고 고난당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원래 믿음이란 이런 상황을 뚫고 약속하신 분을 믿은 것이기에 그렇다.

3. 궁극적인 믿음은 자기 자신의 믿음이 이와 같은 결실을 만들어냈다로 가면 안된다. 왜냐하면 신실하심의 대상은 언제나 하나님이고, 그 하나님이 때가 되어 성도의 믿음을 실망시키지 않고 성취해 주셨다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은 결국 그 성취를 볼 수 있는 자리에 가느냐 못가느야의 믿음인 것이다.

아래의 글은 히브리서 11장 33-38절을 그대로 옮긴 글이다. 초대교회 당시의 믿음을 가진 자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능력이 있기도 하고 때로는 죽음에 이르기도 한다. 그러나 아무도 그들을 배교하도록 하지 못한다. 그들에게는 이 땅에서 누리는 잠깐의 죄악의 낙보다는 하나님의 백성들과 누리를 고난 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이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감동적인 글을 그대로 옮겨본다.

             ***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련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로 죽임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느니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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