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5.12.06)


제목: 순례자의 담력

본문: 시편 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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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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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와 갈라디아서 그리고 야고보서를 통해서 본, 믿음과 율법, 믿음과 행함간의 관계를 간략하게 정리해 본다.


1. 율법과의 관계 속에서 믿음


주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사용되고 있는 <믿음>이란 <율법을 행함으로 얻으려하는 자기 의>와 대조되는 개념으로서의 <믿음>이다. 아주 단순화 시켜서 말하면 율법을 행함으로 의를 이루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지는 의라는 의미로서의 <믿음>이다. 이 때, 믿음의 반대말은 행함이 아니라, 자기 의다. 

그래서 바울은 구원얻은 성도가 자랑할 것이 없음을 누차 강조해서 말한다. 


2. 행함과의 관계 속에서의 믿음


주로 야고보서 2장에 언급되고 있는 믿음이다. 여기서의 야고보가 말하고자 하는 믿음이란, 지식과 행함이 함께 통합된 것을 말한다. 따라서 야고보가 말하는 진정한 믿음의 반대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다. 즉 지식으로서만의 믿음이다. 이와 같은 믿음을 야고보는 죽은 믿음이라고 말한다. 


3. 정리하면


성경에서 바울과 야고보가 <믿음>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그 엄밀한 의미는 서로 다르다고 봐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말하는 믿음의 반대말은 <율법>이지만,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이 반대말은 <행함은 없는 지식>이다. 


참된 믿음이란, 자신이 알고 신뢰한 것대로 행동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원의 근거는 자기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만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행함이 있어야 하지만(야고보의 주장) 그 행함에는 구원의 근거를 두지 않는 것(바울의 입장)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와 같은 주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바울은 율법을 통한 구원을 의지하지 않았지만, 그가 말한 복음에는 율법적 삶에 대한 권면을 부정하지 않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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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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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해설]


[15] 형제들아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그리스도라 [17]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삼십 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18]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라 



내용을 정리해 보면

1. 사람의 언약이라도 일단 정해진 후에는 아무도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한다. 즉 변할 수 없다.

  - 언약이라는 단어보다 '유언'이라는 말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낫다고 보기도 하나, 문장안에서 바울이 사용할 때는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것은 분명하다. 

2. 하나님은 그 약속을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하신 것인데, 그 자손이라 함은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3. 하나님이 이미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있는데, 그 언약 이후 430년 지나서 생긴 <율법>이 폐할수는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더 상위적 권한을 가진다는 것을 말한다. 

4. 따라서 유업은 하나님이 약속으로 아브라함에게 주신 것이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맺은 변할 수 없는 언약을 근거로, 그 유업을 약속한 것이다.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그 유업의 유무를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다.  앞 본문에서처럼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 즉 아브라함을 조상으로 둔 유대인과 이방인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에게 <언약>을 근거로 주어진 것이므로 여기서 <율법>이 나서서 무엇인가를 추가하거나 빼거나 할 수 없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19] 그런즉 율법은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 [20] 그 중보자는 한 편만 위한 자가 아니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하나님의 백성들의 의롭게 되는 일과 그 유업을 얻는 일이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로 칭해진 것과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에 근거한 것이라면, 도대체 하나님이 율법은 왜 주신 것인가? 하는 유대인들의 상식적인 질문에 대해서 바울이 설명하고자 먼저 그 질문을 던진 것이다. 


1. 범법함으로 더하여 진 것이라.

2. 천사들을 통해서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

3 그 중보자는 한 편만을 위한 자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구체적인 해석을 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율법은 무엇이냐?에 대한 굵직한 답변은 이것이다. 율법의 용도는 <임시적인 것>이었다는 것이다. 범법함으로 더 하여 진 것(원래부터 있던 것은 아닌)이고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끝이 정해져있다.)이다. 그런데 이것을 그냔 <율법>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 해석하면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율법을 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기 위해서 오셨고, 바울이 율법의 폐기를 주장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율법>이란 엄밀하게 말해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율법과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을 혼돈해서 이해해서는 안된다. 보통 성경에서 율법이라고 사용할 때 이 두 개념이 혼용해서 서술할 때가 많은데 읽는 사람은 문맥을 통해서 이 둘을 구분해서 읽어야 한다. 바울은 율법 자체를 폐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도 여전히 그렇게 믿고 있다. 다만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폐기된 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의 폐기다. 그 방법론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의 방법론: 은혜>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되었고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는 방법론>은 폐기 되었다. 



[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능히 살게 하는 율법을 주셨더라면 의가 반드시 율법으로 말미암았으리라 [22]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 함이라 [23]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 

[24]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게 하려 함이라 [25]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 아니하도다 


또 다른 질문이 유대인들에게서 나올 수 있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라는 질문이다. 유대인들은 율법을 우선하여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들을 해석하려고 했던 것 같고, 바울은 아브라함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을 우선적으로 근거로 하여 율법의 한계성을 설명하려고 하는 것 같다. 


그렇다고 율법과 약속이 대립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율법은 모든 사람이 죄 아래에 있기 때문에 율법으로는 의를 이룰 수 없다는 한계를 하나님이 아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고 한 것이다. 그래서 믿음이 오기 전에(예수 그리스도가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율법은 단순히 수동적이고 어쩔 수 없이 임시적인 것은 아니다. 즉, 생각지 못한 일로 인해 임시방편으로 보강해 놓은 것과 같은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율법은 죄 아래 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의이신 예수 그리스도께로 우리의 시선을 돌리도록 안내해 주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즉, 율법이 없었다면 그리스도를 만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율법은 임시적이지만 고유의 역할이 있었고, 이 역할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그리스도에게로 향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믿음(예수 그리스도 혹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온 후로는 율법이라는 초등교사 아래에 있지는 않는다. 왜? 궁극적인 목적지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까지 와 있기 때문이다. 



[2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 [27]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느니라 [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은 이미 믿음이 왔기 때문에(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을 통한 하나님의 의를 얻게되는 복음을 들었고, 그것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 


1.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에게 주신 약속과 유업을 얻게 되었다.(그 자손, 곧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이기에)

2. 교회에 속한 자는 모두 세례를 받았을텐데, 그 세례를 받을 때 성도는 그리스도와 합하기 위함이었기에 그리스도로 옷을 입은 것이다 .

  - 그리스도의 옷을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세례와 연관함)

3. 그래서 너희들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4.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다. 


이 구절에서의 핵심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들(유대인 헬라인, 자유자나 종, 남자나 여자 등)이 다 하나라는 것이다.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그 유업을 이을 자라는 것이다. 그것에 대한 차별이 없다.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주시는 칭의의 옷을 입는다'는 개념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리스도와 같은 옷을 입었다는 식으로 간단하게 이해할 수도 있겠다. 마치 과티를 입듯이 모두가 한 옷을 입음으로서 한 팀, 한 몸과 같은 것을 강조하듯이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의 옷을 입음으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묵상]


순수한 복음을 전할 때, 가장 오해되기 쉬운 것이 그럼 율법의 용도는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조건으로서 으뜸되는 기준은 당연히 <율법>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바울은 다른 방식의 조건(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방식)을 제시했고, 그것의 구약 성경의 근거로 아브라함이 의롭게 인정받는 것을 들고왔다. 율법보다 상위가 언약이고 이 언약은 변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이 절대적으로 생각했던 율법의 용도는 무엇이고 한계는 무엇이란 말인가? 일단 율법은 인간의 범법함을 제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이지만, 영원한 법으로서 주어진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가 오시기 전까지만 유효한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 기간중에 율법이 복음과 관련해서 해야 할 중요한 역할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지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이 가진 한계이면서 동시에 복음을 위한 결정적인 역할(꼭 필요한)인 것이다. 


1. 여전히 율법의 법에 매여 믿음의 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제 율법이 아닌 믿음으로 말미암는 의의 시대가 왔음을 선포해야 한다. 이것이 복음이다. 


2. 그러나 이미 그 믿음의 시대 안으로 들어와 있는 성도들에게는 다시 옛 율법의 방식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믿음의 시대 이후에 다시 율법으로 인정되는 방식(옛 방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3. 그 다음은 믿음으로 의롭게 된 백성들에게 그럼, 율법의 역할은 무엇이었느지를 가르쳐야 한다. 

  1) 믿음이 오기 전 율법의 역할(약속의 경주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해줌)

  2) 믿음이 왔을 때 율법의 역할(바톤을 믿음에게 넘겨줌)

  3) 믿음이 온 이후의 율법의 역할

    - 율법을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라는 방식과 혼돈하여 이해하면, 율법 폐기론자가 된다.(방탕과 방임)

    - 율법을 행해야 하는데, 율법의 의를 쫓으려 한다면 다시 율법이 바톤을 빼앗아 뛰게 하는 것.

    - 율법의 의를 쫓지는 않지만, 율법을 삶의 중요한 원리로 인식하여 살아가고자 하는 삶.(추천)


  * 갈라디아서 5-6장에 가면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자세하게 알려주는 것은 복음과 율법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가운데서 권면으로 주어진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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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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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해설] 아브라함의 의롭게 인정됨이 어떤 행위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 여기셨다(창 15:6)의 말씀을 근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할례자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이방인(비할례자, 아브라함은 비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았기에)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롬 4장에서도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하라.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해설]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 18: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바울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미 미리 정하신 것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함을 말씀하고 있다. 


  6-9절을 정리하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유대인과 함께 누릴 백성임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들이 같은 백성(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같은 복을 누리게 됨을 강조한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해설] 바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지라도, 큰 맥락에서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를 이루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저주 아래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해설] 10,11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음이 아니고(말미암을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믿는 행위라기 보다는 율법적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즉 은혜로서의 의를 말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의 방법론(자기 의)과 믿음의 방법론(하나님의 의)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율법이라는 것이 것이 작은 것 하나라도 끼어들어올 수 없음을 말한다 보인다. //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아야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 안으로 율법을 끌어들여 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우리는 율법으로는(율법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으로는) 저주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인데(또 우리가 믿는 바인데), 왜 이렇게 행하셨는가 하면 


  1.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다.

  2.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한 것이고(십자가 사건이 6-9절의 내용에 근거 제공)

  3.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을 저주에서 속량하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했다.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오늘 본문 정리]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자는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2. 따라서 이방인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얻을 자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의지하는 모든 자를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4.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다시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신다.  



[묵상]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 )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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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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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른 복음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내 보여주신 것.


1.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교회에 쓴 편지(2절)


2. 바울의 문제제기(6-7)

  1)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준 갈라디아 교인들아, 어찌 그리 빨리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몇 몇 사람들이 복음을 교란한 것에 영향을 받음.


3. 바울의 정답(8-10)

  1) 다른 복음은 없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나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이성과 심성에 잘 부합하는 내용의 것인듯 하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매우 빠르고 쉽게 그 가르침에 넘어간듯 하다. 



----------[부연설명]

4. 바울이 사람(사도)의 영향을 받은 자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들은자다.(11)


  1) 내가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이다.(12)

  2)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는 유대의 전통에 강력하게 미친자로서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까지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가.(오히려 사람의 전통으로부터 배운 것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로서의 역할만 했다.13-14)


  3) 그런 나를,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불러주시고,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시려고 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직통. 16절)

  4) 또 내가 예수를 만나고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왔다.(17절. 즉 사도의 영향을 받은 것도 없다)

  5) 그 후 3년 뒤에 게바를 만나고자 예루살렘에 왔지만, 주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보지 못했고. 그것도 15일 밖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고 거짓말이 아니다.(18-20절)

  6) 그 뒤로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그래서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다.(21-22절) 다만 바울은 소문으로만 전해졌는데, 그것도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24절)




[2장] 거짓 선지자의 요구 / 이방사역을 사도들로부터 인정받은 바울 / 오히려 사도인 게바가 그릇된 행동을 행함 / 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15-21절)


1. 14년이 지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계시를 따라 간 것인데, 그들에게 이방 사람에게 전한 복음을 설명하고 특별히 유명한 사람(사도들?)들에게도 따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1-3)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우리의 권위가 낮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그 동안의 이방인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디도에 대해서 <할례>에 대한 요구를 받지 않았다.


2. 그런데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이 디도의 할례를 강요하였다.(디도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를 율법의 노예로 만들려고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몰래 끼어들었다.(4절)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5절) _ 할례를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의 거짓 복음을 인정해주는 상황이 되기 때문.


3. 이 때에 유명하다는 사람(사도들)들도 바울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다. (7-8절) 교회의 기둥같은 야고보 게바 요한은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 그리고 서로의 사역은 인정해 주었다.(9절) 다만 한가지 요구한 것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 자신도 열심히 해오고 있던 것이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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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복음(할례 없이도 의롭게 됨)을 유대인 사도들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다.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이렇듯 바울의 복음은 유대 사도들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도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것임을 지금까지 강조했다.



4. 바울이 오히려 게바를 나무란 사건(11-14)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아마도 유대인일듯)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위선을 만들었고 바울의 동력자였던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은 게바의 잘못을 모든 사람 앞에서 지적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처럼 되라고 강요합니까?"


  * 더 나아가 바울은 유대 사도 중에 기둥같은 게바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복음을 왜곡시키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됨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한 사건을 언급한다. 즉 유대 사도들도 유대인의 인간적인 전통으로 인해서 복음을 훼손시키는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


5. 바울이 자신의 믿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 함(15-21)_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1)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죄인인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것도 의롭게 될 수 없다. 


  2) 이런 복음으로 우리가 과거의 것(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헐어버렸는데, 지금와서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율법 앞에서는 죽었다.(율법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 그 방법을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기 위함이다.)


  3)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의를 의지하는 나만이 살아있다.(율법을 의지했던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나만 살았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는 것이 되고 만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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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성도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 / 이 언약이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는 없다. /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_ 그리스도가 오기 전 임시적 역할 /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을 이유가 없다.


1.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질문과 책망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1)


  2)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2) 여러분은 왜 어리석게 성령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려고 합니까?(3)


2.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훈계과 가르침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7)

  2)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아시고,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셨다.(8절)


  3)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 아래 있다.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5) 이렇게 하심은 아브라함에게서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령으로 시작한 성도들이 율법으로 마치려 하자 이에 대한 책망과 바른 복음의 설명을 한다. 성도들은 믿음을 따라 의가 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롬 4장) 이 일은 이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때 모든 민족을 말씀하심으로 이방인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율법으로 사람은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이방 사람들에게도 미치게 되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하신 것이다.


3. 추가적인 설명: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430년 뒤에 나온 율법이 그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1) 보통 한 번 언약을 맺으면 아무것도 그것을 무효화할 수 없다.(15)

  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했는데, 그 자손은 '자손들'이 아니다. 단수로 '자손'과 언약을 맺은 것인데 그 자손은 곧 그리스도다.(16) 

  3)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을 430년 뒤에 생긴 율법이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다.(율법을 통해 주신 것이 아니다. 18절)


  4)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인가?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 전까지 죄를 밝히려고 주신 것이다. (19)


   ----[부연설명] 율법의 역할

   (1)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로움이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것이다.(21-22)

   (2)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주려고 하신 것이다.(22)

   (3)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에 갇혀 있었는데, 율법은 우리의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23-24)

   (4)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개인교사 밑에 있지 않는다.(25)


  * 율법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과 맺은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율법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먼저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가 오기전까지는 우리가 율법에 갇혀있었다.(율법이 우리의 개인교사였으므로) 그러자 지금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성도들의 신분]

   (5)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그것에 차이가 없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26-29)

   (6)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이다.


  * 따라서 더 이상 율법에 매여있고, 그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4장]

율법은 임시적인 역할만 한다 / 때가 되면 종이 아닌 자녀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체적 문제,할례, 절기.../ 바울은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각오함 / 하갈과 사라처럼 종이 주인을 박해하지만, 그들을 내쫓으라.


1.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1) 어릴적에는 주인의 아들이지만, 종과 다름없이 누군가의 다스림과 관리를 받는다.

  2)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적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서 종노릇 했다.(율법 아래에 있었다. 1-3)


2.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놓이게 함.(4)

  -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5)

  -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시어 우리로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심(6)

  -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권면]


1.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 아닌 것에게 종노릇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는데 어찌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왜 다시 종노릇하려 합니까?(8-9)


  1)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습니까?(10절) 그것은 내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11)


  *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할례>의 문제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였다.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할례와 날과 달의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유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함]


  2)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바울의 육체가 병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바울을 외면하지 않고 따듯하게 영접하여 주었다. 전에는 이들이 자기의 눈을 빼서라도 바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진심어린 애정을 표현했다. (13-15)


  3)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자(즉 이들이 좋아해서 받아들인 것을 비판하고 복음의 참된 의미를 강조하자) 이들이 바울에게 원수같이 대했던 것이다.(16절)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바울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17) 

  4)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19)

  5)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 이런 문제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중 다수가 바울에게 대해서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전에는 눈이라도 빼서 줄 것처럼 바울에게 애정을 가졌던 교회 였는데, 바울이 이들의 잘못됨을 지적하자 바울에게 반감을 품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바울은 많이 당황스러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번 해야함을 각오했던 것이다.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4:13-20)

 



2. 여전히 율법 아래 있기를 원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권면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적 비유]

  1)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종에게서 육신을 따라 났고 다른 하나는 본처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의 자녀들이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21-28)


  2)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하다.(29)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유업을 함께 받을 자가 아닙니다.(교회 안에서 다시 율법의 종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리고 말하는 것이다.30절)


  3) 여러분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입니다.(31)


--------------


[갈라디아서 배경/역사/내용 정리]


1. 바울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했으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빠르게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쓴 글이다. (1:6)

2.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갈라디아 교회에서 생각처럼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거나 아니면 유대 사도들에 비해서 열등한 사역자라는 피드백이 돌아온 것 같다.(4:13-20)

3.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바울은 적지 않게 당황한듯 하다.(4:20) 그러나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한다.(4:19)

4.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사람(유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된 것이고, 그 이후에도 유대의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배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조차 나를 잘 모른다. 다만 교회를 피박하던 자가 변화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도일 뿐이다.(1:11-24)

5. 거짓 신도들(할례를 강조하는)로 인해 위협을 받았지만(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라) 바울은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유명한 사도 야고보, 게바, 요한은 이것을 인정했고, 인정하는 의미의 악수도 했다. 그리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역(이방인을 위한 사역)자임을 인정해 주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부탁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2:1-10)

6. 사실 바울은 게바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 책망까지 한 적이 있다. 게바가 유대인을 의식해서 가식적인 행동을 했고 그것이 교회에 큰 영향(심지어 바나바까지 따라하게 됨)을 받게 되었다.(2:11-14)


[복음의 내용]

7.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다시 설명함(2:15-21)

8. 율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임을 잊지 말라.(성령을 인치심, 구약의 할례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함) 

   - 유대인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할례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율법과 믿음 논쟁에서 그 결과를 성령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침이 유업(기업)의 보장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9.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을 위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복을 미리 아시고 이제 이방인에게도 임한 것이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그 유업을 얻게 된 것이다. 언약이 먼저이다. 나중 온 율법이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자녀(하갈)가 되지 말고, 자유자의 자녀(사라)가 되라.(3:15-29) 율법은 어린 아이를 위해(종과 같은 상태) 있지만, 커서는 아들이 된다. 


  * 왜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가? 왜 다시 종노릇하는가?(4:8-11)



[5장] 그리스도로 인해 해방된 자유로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할례에 매이지 말라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는 사랑을 향해 살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라. 


1. [핵심 메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1)


  [논리] 

  1) 할례를 받아들이면,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2.3)

  2)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 그리스도에게서는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떨어진다.(4)

  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5)

   - 사실, 할례를 받는 것, 안 받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2. [권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잘 달려왔지만, 여러분을 진리에서 왜곡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8)


  1) 거짓된 진리는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심판받는다.(9)

  2) 만약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했다면, 내가 왜 아직도 박혜를 받겠는가?(11)

    - 할례를 가지고 선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체에서 잘라버리라. 


  3)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율법으로부터의 자유)



 * 성도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1)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13)

   (2)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 다 들어있다. (14)

   (3) 그런데 네가 서로 물고 먹으면 둘다 망하는 것이다. (15)



 * 그런데 이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지, 네 육체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자유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얻은 자유로 육체의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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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따르는 삶]

   (1)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16)

   (2)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18)

   (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행실은 분명하다. 음행, 더러움, 방탕,.. ..(19-21)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21)

   (4)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와 친절, 선함과 신실, 온유, 절제...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는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음

   (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25)



 * 복음 안에서 주신 자유는 자기 육신의 정욕을 쫓는 자유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자유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을 쫓는 자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6장] 겸손히 자기의 할 일을 하고 / 할 수 있으면 남의 짐을 져주라 / 사람은 심은대로 거둔다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기회있는대로 선을 행하라 / 할례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 /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권면] 

1. 어떤 교인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거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피라.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1절)


2.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내가 의로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으려함/비판)를 가진자가 타인의 짐을 져주라.


3. 각 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을 성취한 것처럼 생각지 말라.(3-4)


4.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 (5)


5.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 (6)


6. 자기를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7)

   -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8)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지쳐 넘어지지 말자. 때가 이루면 거둘 것이다. (9)


   -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10)



[전체 정리]


1. 다시 한 번 확고하게 말합니다.(11)


2. 육체의 겉 모양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그들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12)


3. 할례받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13)


4. 그러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14절)


5.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15)


6. 이제부터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있다.(17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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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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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하박국 2:1-10 더디지만 이루어진다.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하박국은 하나님이 답변을 주실때까지 작심하고 기다리겠다고 말하고, 하나님은 그에 대하 답변을 명백하게 보여주겠다고 말씀하신다. 바빌로니아는 그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교만으로 인해 오히려 그들이 침략하고 빼앗은 나라들로부터 도리어 약탈을 당하는 운명이 될 것임을 말씀하신다. 더디게 이루어지겠지만, 참고 믿음으로 기다리라고 말씀하신다.  


절별 해설

2:1 <<내가 보초처럼 서서 지키겠습니다.>> 1:17에 했던 하박국의 항변에 대해서 하박국 선지자는 그 답을 들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겠다고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다. 그만큼 하박국 선지자의 고민은 컸고,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해 답답해 하고 있는 것이다. 


2:2 <<그것을 돌판 위에 뚜렷이 새겨서>> 돌판 위에 새긴다는 것은 변하지 않을 말씀이라는 측면에서의 강조점이고, 뚜렷이 새긴다는 것은 달려가면서도 그 내용을 누구나 볼 수 있도록 선명하게 하기 위한다는 말씀이다. 


2:5 <<포도주를 즐기는 바빌로니아 사람은 교만하기 때문에>> 바빌로니아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신을 과신하고 또한 포도주를 즐기므로 이성의 통제를 받지 못하고 그 힘을 함부로 사용하는 잘못을 행하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바빌로니아는 다함없는 욕심으로 인해 오히려 해를 자초하게 될 것임을 예견하게 된다. 


2:8 <<네가 여러나라를 털었음로, 살아 남은 모든 백성들이 너희 것을 빼앗을 것이다>> 바빌로니아는 자신이 가진 힘으로 주변의 많은 나라들을 공격하고 빼앗고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그와 같은 침략으로 인해 침략당한 백성에 의해서 빼앗기는 운명이 될 것이다. 


2:9 <<화가 있을 것이다... 재난을 피하기 위하여 높은 집에 둥지를 세우는 자야!>> 바빌로니아는 주변 나라를 공격하고 또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높은 성을 쌓고 철저한 대비를 통해 자신의 세력을 유지하려고 하겠지만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안전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바빌로니아가 행한 악행대로 스스로 당하게 될 것을 말씀하신다. 


기도

하나님, 교만한 자는 자신의 힘을 과신하여 끝임없는 욕심을 채우며 살아가려 합니다. 자신의 한계를 알고 인정하여 겸손한 인생이 되게 하시고,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하박국을 향한 하나님의 답변이 뭔가 분명할 것이라고 기대했지만, 사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답변이 하박국과 독자들의 마음에 시원한 느낌을 주지는 못했다. 바빌로니아에 대한 하나님의 즉각적인 심판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확실하게 말씀하신 것은 일이 더디게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참고 기다리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역으로 이야기 하면 지금은 아무런 변화가 없을 것이고, 상당한 시간을 이렇게 참고 견디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땅을 운행하시고 섭리하시는 방법도 이와 다르지 않음을 우리는 알게 된다. 하나님의 대원리는 언제나 살아있다. <의인은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할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서 더디게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기에,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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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복음의 또다른 단언적 명제는 <부끄럽지 않은 복음>이다. 이 표현은 보통 <전도>할 때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다. 성도가 복음 전하는 행위가 물론 부끄러워서는 아니되겠으나, 이 구절에서 바울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좀 더 강렬한 확신이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개인적인 기질과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것이란,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이 지리산의 천왕봉 정상을 1시간 만에 오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시작했으나, 정상 근처도 못가보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때, 이것을 부끄럽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는 그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고 자기의 가진 것으로 준공하기까지 족할 것인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계산이 없이 덤벼들었다가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를 보는 자가 다 비웃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온다.(28-30)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시작은 했으나,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일을 시작한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만다. 


또한 우리가 의지한 것이 우리가 목표한 곳까지 온전하게 이르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입시학원에서 월 천 만원씩 내면 실력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보장하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하자. 그 만큼 그 학원의 노하우와 강사가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 하겠다. 학부모는 학원비가 부담스럽지만 자녀를 일류 대학에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무리해서 학원을 등록시키고 그 학원에서 지도하는대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결과는 일류가 아니라 이류대학에 입하게 된 것이다. 학원의 노하우와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나, 그 자녀의 수준이 너무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학원을 믿고 월 천만원씩을 들여 공부시켰으나, 부모의 기대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 그 학원을 믿고 의지해서 자신의 자녀를 맡긴 부모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나를 의지했는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부끄럽게 되고,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했는데 그것이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우리의 기대(믿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것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의지했다. 율법을 따르고 의지하면 반드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고 말았다. 율법을 의지하며 쫓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어서 중간에 결국 낙오하고 만 것이다.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전 인생을 걸고 율법을 쫓아 살아왔던 바리새인들 조차도 우리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고민끝에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 3장) 결국 <율법>을 철저하게 의지한 삶 조차도 우리를 부끄럽게 할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고자하는 그 복음은 어떤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 명의 예외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16절) 그것이 지금 바울이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바울은 로마서 후반부에 이와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함으로 자신의 확신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1-13)



<율법>이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믿음/은혜>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가운데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것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기대를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열심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갈 것인가?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의지할 것인가? 이 땅의 교육과 학원 시스템을 의지할 것인가? 나의 직장을 의지할 것인가? 은행에 맡겨진 돈을 의지할 것인가? 부동산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의지할 것인가? 


나라마져 부도가 나고 파산에 이르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이 땅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단언컨데 없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고 불신 가운데 표류하며 살아갈 것인가? 과연 그것은 가능할 것이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 보장할 수 있는가?



바울은 복음을 접하고 깨닫고 나서,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는대로 <복음>을 전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복음> 말고는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도 <복음>을 전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신가운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을 담고 있길래, 율법을 의지해서 살아가던 바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다음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조금씩 다루어 보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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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하는 영상이네요. 구도자 박진영. 그러면서도 마지막 한 걸음을 넘지 못한 상황(자신이 넘을 수 있는 문제라고는 볼 수 없습니다만)이지만, 곧 누군가 그 문을 넘어와 인도하시리라 기대합니다. 구원해 달라고 부르고 있으니까요... 기다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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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5편]우리가 감정적으로나 이성적으로 잘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은 나는 선으로 행했는데, 그 사람은 나에게 악으로 대할 때다. 선의로 보증을 서 주었는데, 오히려 그 사람은 나몰라라 하는 식으로 되 돌아올 때 우리는 분노하게 된다. 그러나 더 큰 분노는 왜 이런 악한 자를 심판하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사회 법으로건 혹은 하나님의 법으로건) 결국 이 분노는 공의를 실행하지 않는 사회와 하나님에게 대한 분노로 옮겨가게 된다. 오늘 우리 사회에 대한 분노가 커지고, 기독교에 대한 반감이 커진 이유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에 기인되어 있지 않을까 싶다. 억울함이 많은 사람들_힘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배운게 없어서... 공정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생긴 문제일 것이다. 어찌할꼬... 이 땅에서 답을 찾지 못하고, 하나님은 당장 일하시는 것 같지 않으니.... 정말 필요한 것은 공의의 하나님을 믿고 의의 자리에 서려는 인내로다. 


[정리]


1. 급히 자신의 편에서 싸워 달라고 요청하는 시편 기자


1절.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


2. 시편 기자의 적: 악을 선을 갚는 자들에 대한 자들


12절. 내게 선을 악으로 갚아 나의 영혼을 외롭게 하나

13절. 나는 그들이 병 들었을 때에 

굵은 베 옷을 입으며 금식하여 내 영혼을 괴롭게 하였더니

내 기도가 내 품으로 돌아왔도다.

내가 나의 친구와 형제에게 행함 같이 그들에게 행하였으며

내가 몸을 굽히고 슬퍼하기를 어머니를 곡함 같이 하였도다.


15절. 그러나 내가 넘어지매 그들이 기뻐하여 서로 모임이여

불량배가 내가 알지 못하는 중에 모여서 나를 치며 찢기를 마지아니하도다.

그들은 연회에서 망령되이 조롱하는 자 같이 나를 향하여 그들의 이를 갈도다. 


: 우리가 제일 참기 어려우며,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케이스가 바로 이것이다. 내가 선을 베풀었는데 그것을 망각하고는 악으로 되갚는 것이다. 이것은 공의가 아니며, 이런 악한 자가 심판받지 않거나 혹 잘 된다는 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는 것(혹은 그 역할을 하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행한 선의의 결과가 하나님이 없다는 것으로 되돌아 오는 것 같아 참, 마음이 아프다. 


3. 여호와여 언제까지 놔두고 계시렵니까? 얼마나 더 참아야 합니까? 저들이 마침내 나를 짓밟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셔야 하겠습니까?


17절. 주여 어느 때까지 관망하시려 하나이까

내 영혼을 저 멸망자에게서 구원하시며

내 유일한 것을 사자들에게서 건지소서.


: 시편 기자의 원망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에게 있다. 사람이 어떻게 그럴수가 있느냐?로 시작했지만, 왜 하나님은 그런 인간을 내버려 두시는가? 하는 신정론의 문제로 귀결된다. 


28절. 나의 혀가 주의 의를 말하며 종일토록 주를 찬송하리이다.

: 결국 시편기자의 결론은 자신의 혀로 주님의 의를 말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반드시 의를 이루시고 의인의 편에 서신다는 것을 확신하고는 주를 찬송한다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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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28편] "주께서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에 내려가는자와 같습니다."라는 표현 속에서 기도하는 성도의 절박함을 봅니다. 그러나 이 기도의 핵심은 절박함이 아닙니다. 악인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혹은 악인들과 의인들을 함께 심판하신다면(분별력없는 심판), 하나님의 편에 서서 의인의 길을 가려고 했던 성도들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버린다의 의미일것입니다. 기독교인은 두 가지를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판단을 하신다는 것과 우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리1]


1. 의인이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의 심정


1절. 여호와여 내가 주께 부르짖으오니 

나의 반석이여 내게 귀를 막지 마소서

주께서 내게 잠잠하시면 

내가 무덤을 내려자는 자와 같을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지성소를 향하여 

나의 손을 들고 주께 부르짖을 때에 

나의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2절)


2. 악인들의 행위대로 심판하소서. 우리와 구별하소서.


악인과 악을 행하는 자들과 함께 나를 끌어내지 마옵소서.

그들은 그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나

그들의 마음에는 악독이 있나이다.(3절)


그들이 하는 일과 그들의 행위가 악한 대로 갚으시며

그들의 손이 지은 대로 그들에게 갚아 그 마땅히 받을 것으로 그들에게 갚으소서(4절)


그들은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으신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파괴하고 건설하지 아니하시리로다.(5절)


여호와를 찬송함이여

내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심이로다.(6절)


3. 여호와는 의인들의 힘과 방패시며 요새이시다.


여호와는 나의 힘과 나의 방패이시니 내 마음이 그를 의지하여 도움을 얻었도다. 

그러므로 내 마음이 크게 기뻐하며 내 노래로 그를 찬송하리로다.(7절)


여호와는 그들의 힘이시요

그의 기름 부음 받은 자의 구원의 요새이시로다.(8절)


주의 백성을 구원하시며 주의 산업에 복을 주시고

또 그들의 목자가 되시어 영원토록 그들을 인도하소서(9절)


[정리1]


1. 여호와여,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무덤을 내려가는 자 같습니다.


2. 악인들과 우리를 같이 취급해서는 안됩니다.(그들은 심판하시되 우리는 구원해 주소서!)


3. 악인들은 정말 악한 사람들입니다. 

   : 이웃에게 화평을 말하지만, 마음에는 악독이 있고 그들의 행위가 악합니다. 그들은 여호와의 행하신 일과 손으로 지은 것을 생각하지 아니합니다. 


4. 우리는 여호와를 의지합니다. 여호와는 힘과 방패와 요새이십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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