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장 정리]


갈라디아서 내용의 큰 덩어리 중 하나는 1:6-2:21(본론1)까지다. 다른 복음으로 속히 떠난 갈라디아 교회들에 대한 책망으로 시작해서 바울 자신의 사도성과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이 사람, 특히 예루살렘의 유대 사도들로부터 기인된 것이 아님을 주장하는 내용들이다. 바울이 전한 복음의 핵심 내용은 2:15-16을 통해서 간략하고 명료하게 전해지는데,유대인들도 율법의 행위가 아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로마서의 표현으로 하면, 하나님의 은혜와 의에 근거해서) 말미암아 의롭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폐하고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를 세운 것이기에,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받은 후 추가적으로 다시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를 요구하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헛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바울의 논지를 통해서 볼 때, 바울이 경계하고 갈라디아 교회들을 변질시켰던 <다른 복음>의 내용이 의로움을 얻게 하기 위해 혹은 완성하기 위해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의 방식을 추가적으로 주장한 것이라 보인다. 그 대표적인 경우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다는 복음의 말씀 만으로는 부족하고 거기에 '할례'를 덧붙임으로 의와 완성을 이루려고 했던 것 아닌가 싶다.(할례와 더불어 날과 달과 해와 절기를 지키는 것도 포함된다.)



[본문]


[3: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 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 [2] 내가 너희에게서 다만 이것을 알려 하노니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3]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같이 많은 괴로움을 헛되이 받았느냐 과연 헛되냐 [5]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혹은 듣고 믿음에서냐 


[해설]


갈라디아서의 두번째 본론을 3장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그 시작은 첫번째 내용은 <책망>이다. 첫번째 본론의 시작도 책망(1:6-10)이었는데... 바울은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전하고자 하는 내용들을 써내려가면서 중간 중간 감정적인 격정이 일어난 것이 아니었나 싶다. 죽을 고비를 넘기면서 전한 복음을 통해 세운 교회인데 너무나 속히 <다른 복음>에 넘어지는 모습에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차분하게 편지로서 잘 가르치고자 하지만, 문득문득 올라오는 감정이 그의 글에 모두 묻어난다 하겠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바울을 좀 더 가까이에서 지켜 보는 것 같다. 인간적이라고 할까? ... 바울의 감정이 묻어나는 글이라 함께 감정의 흐름을 타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1. 십자가의 복음을 전한 것이 얼마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쉽게 꾀임에 넘어갈 수 있는가!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듣고 미음이 아니더냐!)

3. 너희가 어리석게도 성령으로 시작해놓고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

4. 너희가 이 복음(믿음으로 의롭게 되는)을 받기 위해 많은 괴로움을 통과해서 받았는데..헛된 것이란 말인가!


본문에서의 특징들을 살펴보면,


1.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1절, 3절)


갈라디아 교회들의 어리석음을 두 번이나 말하고 있다. 바울의 답답함을 보여주는 표현이라 보인다. 바울이 생각할 때는 왜 이렇게 생생한 복음을 들은지 얼마되지 않아, 어리석게도 다시 옛날로 돌아가는 다른 복음을 따르게 되었는지 이해되거나 받아들여지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하기 보다는, 그들이 왜 이렇게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바울의 심정이지 않나 싶다. 


 <갈라디아 사람들아>라는 표현은 그 당시 북 갈라디아 지역의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라고 한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은 이런 표현을 들어서 갈라디아서를 받는 수신자가 북 갈라디아지역의 교회들임을 말하고, 그렇기 때문에 1차 전도여행이 아닌, 2차 전도여행 이후라고 기록연대를 잡으려 한다. 

바울이 1차 전도여행을 한 지역은 남갈라디아 지역인데, 여기는 처음부터 갈라디아 지역은 아니었고 북갈라디아지역이 확대되어서 후에 갈라디아 지역으로 흡수된 곳이라 한다.  


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이 율법의 행위로냐 혹은 듣고 믿음으로냐


갈라디아 교회들이 받은 성령이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음을 말한다. 이 표현은 2장 15-16절에서 말한 복음의 내용에 있어서는 같으나 그곳에서는 '의롭게 됨'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는 '성령을 받은 것'이 믿음으로 말미암았다는 것을 말한다.


믿음으로 받은 것이 <의롭게 됨>이라는 표현에서 <성령을 받은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이것은 주제와 관점을 조금 다른 것으로 넘어가는 것이라 보인다.(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그러나 칭의와 성령의 문제는 별개의 문제는 아니다. 의롭게 됨과 동시에 성령의 내주가 함께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롬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칭의>의 문제에서 <성령>의 문제로 주제를 넘기고 있는 것은 새로운 논지로 들어가기 위한 바울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구체적인 것에 대해서는 다음 본문에서 볼 수 있겠지만, 살짝 맛만 본다면


  (갈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성령의 약속>이라는 관점으로 이어가고자 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한다.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게까지 확대된 것을 설명하는 과정에서 <성령의 약속>을 사용하고 있다. 다음 본문에서 좀 더 자세히 다루어 보자.



[적용]


1. 바울의 흥분과 감정 노출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이 덜 성숙한 태도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런데 바울은 자신의 감정을 노출하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것 같다. 갈라디아 사람들을 향해서 어리석다는 표현을 2번이나 반복하고, 1장에서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 대한 저주를 두번이나 반복했다. 


매번 그러면 안되겠지만, 오히려 감정에 대한 충분한 표현이 상대로 하여금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논지 뿐 아니라 <강도>까지도 충분히 전달된다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겠다. 글 속에서 우리는 많은 것을 읽어낸다. 바울의 갈라디아서에서 우리는 바울의 감정을 충분히 읽어 낸다. 아니 어쩌면 바울은 감정까지도 전달되도록(부정적인 피드백을 주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지금은 그런 오해를 피해 안전하게 글을 쓰는 것보다 자극적이고 그래서 신속하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쓰고 있는 것이라 봐야 할 것이다. 


바울은 지금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논문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릇된 길로 빠지고 있는 자신의 양들을 향해 목양적 차원에서 정신이 번쩍 나도록 호통을 친다. 그리고 주목을 하면 그제서야 차분히 또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듣는 입장에서는 바울이 화가났다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그것은 비이성적인 분노라기 보다는 부모로서 내고 있는 화라는 사실을 알게될 것이다.(갈 4:19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사역자인 우리도 감정을 잘 드러내야 한다. 이성적이어야 할 때도 있지만, 감정적이어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충동에 의한 감정 표현이 아닌, 애정과 사랑에서 흘러나오는 감정적 표현을 사용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가 상대를 해산하는 수고가 먼저 있어야 한다.


 - 끝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