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 신약저자들의 구약인용_어떤 점에서 사도들의 해석학이 독특한가?


[결론] 

1. 구약성경은 그리스도 목적적으로 해석해야 한다. 

2. 구약성경은 교회 목적적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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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신약 성경의 해석방법이 제 2성전기의 해석방법과 그렇게 다르지 않다. 물론 사도들은 보다 많은 절제와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사살이지만, 둘 사이의 해석학적 방법에 있어서 현격한 차이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2. 피터 엔즈는 신약성경의 저자도 그 당시의 문화 일원이라는 측면을 강조한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의 해석을 독특하게 만드는 것은 <종말론이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는 그들의 확신에 있다. 이런 확신은 구약 성경 전체를 그리스도를 절정으로 하여 해석하도록 하였다. 즉, 구약 성경을 냉철하게 읽음으로써 그리스도가 주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 아니라, 이미 진리로 확신하고 있는 것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기초로 구약 성경을 새롭게 읽은 것이다. 


4. 이런 관점은 전통적인 복음주의적 성경관에 따르면, 그런 신약 저자들의 해석법은 올바르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곡해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들의 구약해석을 본래의 문맥에서 이탈시켜 자의적으로 해석한 것이 아니다. 


5. 그들은 구약성경을 하나의 문맥에서 이탈시켜, 다른 하나의 문맥, 즉 이스라엘의 역사가 지향하는 최종적인 목표를 반영하는 그런 문맥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6. 신약의 기자가 구약 기자의 언급에 대한 해석을 한 것이다. 이 결과를 보니, 과거 당신의 이야기가 이런 지향점을 말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해석해주는 것이다.(호세아의 말을 마태가 결과를 보고나서 당신의 말이 이런 의미를 가졌던 것임을 설명해 주는 방식이라 볼 수 있다. 호세아의 말을 호세아에게서 듣는 것이 아니라, 호세아의 말을 마태에게 들을 때 그것이 더 정확한 해석이 된다는 말이다.)


7. 이와 같은 해석 방법을 그리스도 목적적(christotelic)이라고 규정함. 기독론적, 그리스도 중심적이라는 용어보다 <그리스도 목적적>이라는 용어를 더 선호한다. 그리스도 목적적이란 말은, 그리스도가 구약성경의 이야기가 지향하는 바, 즉 이야기의 종착점이라는 사실을 주지하고 구약성경을 읽는 것이다. (구약의 모든 것을 그리스도로 대치 시킨다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지향한다는 측면에서 강조하는 것 같다.)


8. 구약 성경을 기독교적으로 해석한다는 것

  1) 문자적 역사적 해석을 하여 읽는다.

  2) 종말론적인 읽기, 그리스도 목적적 읽기이다.(신약의 사도들의 우리에게 보여준 성경해석의 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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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구약성경의 이야기는 그리스도 안에서뿐 아니라 하나님의 새 백성 공동체 안에서도 성취되었다.


10. 사도들의 해석학에는 그리스도 목적적 차원뿐 아니라, 교회 목적적(ecclesiatelic) 차원도 있는 것이다. 사도들이 구약 성경을 다룰 때, 그리스도의 개인에게만 초점을 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몸, 즉 그의 백성, 교회에게도 초점을 두었다. 


11. 그리스도가 아브라함의 이야기를 먼저 성취(그리스도는 아브라함의 씨다. 갈 3:16)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아브라함의 이야기는 교회 안에서 그 텔로스(목적)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개인적 견해] 구약성경이 그리스도 목적적으로 해석되어야 하는데, 그리스도는 교회를 위해서 권면하고 있으므로 교회 목적적으로 더불어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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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제 2성전기 현상으로서의 사도들의 해석학: 해석의 방법]


1. 예수님이 출 3:6의 말씀을 문법적-역사적 주해를 하지 않아 오늘날 우리는 당황스럽지만,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의 해석에 감명을 받았다.(눅 20:39-40) 그것은 예수님이 다름 아닌 바로 제2 성전기의 해석 방법을 사용하셨기 때문이다. 


2. 신약의 저자들이 변증적인 목적으로 구약을 인용했다는 주장(목적 지향적 해석)은 그 당시의 해석 방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오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의 성경해석을 있는 그대로 이해해야 한다. 


3. 예를 살펴보자.

  1) 마 2:15과 호 11:1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1) 1차 문제: 호세아서는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마태는 예수가 애굽으로 가는 상황(올것을 염두하고 쓴 것이라 볼 수 있다.)

   (2) 2차 문제: 호세아에서의 내 아들은 이스라엘로, 예언적 표현이 아니라 오히려 과거의 경험을 말함. 그렇다면 예언적 표현으로 인용하고있는 마태의 인용은 역사적-문자적 해석은 아니다. 

첫째 안: 그 당시의 해석 방법으로는 자연적인 것이다.

둘째 안: 믿음의 해석이다. 구약의 모든 성경이 그리스도를 지향한다는 믿음을 전제한 해석

호세아 서에의 <아들>은 불순종하는 이스라엘이었지만, 마태가 말하는 그리스도로서의 예수는 참 이스라엘이요, 참 아들임을 강조하는 방식의 해석으로 볼 수 있다.(저자의 추측)


  2) 고후 6:2과 이사야 49:8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1) 이사야는 바벨론으로부터의 구원을 예언하는 것으로 이 내용을 썼다. 

   (2) 바울의 말하는 지금은 단순한 현재가 아니라, 종말론적인 지금을 말한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과 함께 찾아온 종말론적인 지금이 바로 그와 같은 때라는 것을 말한다. 

    (3) 바울이 하려고 했던 것은 현대 과학적인 주해가 아니라,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이야기의 궁극적인 성취라는 확신에 근거한 성경해석이라는 것이다. 


  3) 갈라디아서 3:16,29과 아브라함의 자손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자손이라고 했다는 것'

   (1) 바울이 인용한 구약은 정확하지는 않지만, 창세기 13:14-17 인듯 하다. 여기에 '자손'이라 표현

   (2) 자손이라는 단어의 히브리어는 <제라>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복수 혹은 단수로 사용 가능함.

   (3) 그러나 문맥 상으로 본다면, 복수로 보는 것이 맞다.(문자적, 문맥적 해석을 통해 본다면)

   (4) 바울은 갈 3:29에서 <자손>을 복수의 개념으로 사용했다.(복수의 뜻이 있음을 알고 있다.)

   (5) 저자의 결론: 바울은 제2성전 시대의 해석 관행에 따라 해석하고 있는 것인데, 단어의 문법적 모호성을 이용하여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 대한 심도 있는 신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는 아브라함의 유일한 참된 자손(단수)이며, 동시에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복수)임을 말한다.)

      : 이런 해석은 그 당시의 자손신학의 입장에서의 해석으로 봐야 한다. 


  4) 로마서 11:26-27절과 이사야 59:20

      이사야 59:20 구속자가 시온에(로 향햐, 을 위하여) 임하며,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

      로마서 11:26 구원자가 시온에서 오사

   (1) 구원자의 개념의 변형: 여호와 하나님 -> 예수 그리스도

   (2) 시온을 위한 구원자 -> 시온에서 나온 구원자(예수 그리스도도 유대인이라는 측면을 증명)


   : 이런 방식으로 구약의 내용을 신약 기자는 의도적으로 변형하여 인용하고 있다는 것(당시 해석방식)


  5) 히브리서 3:7-11과 시편 95:9-10

    책 참조(198-201쪽)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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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저자들의 구약성경 해석_제2 성전기의 성경해석]


 * 신약성경 저자들의 배경이 되었던 시대를 흔히 제2성전기라고 부른다.(주전 516- 주후 70): 신구약 중간기


 *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쓰여진 역사적 문맥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문법적-역사적 방법) 그러나 그것과 더불어 또 하나 고려해야 할 것은 그 당시 성경이 어떻게 해석되었는가에 대한 것도 고려되어야 한다. 고대 문서를 이해하는데, 문법적_역사적 배경이 중요하듯이 고대의 해석학을 이해하는 데에는 해석학사적 문맥을 이해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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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 내적인 해석: 구약 성경에 의한 구약 성경의 해석

  1) 역대서가 대표적인 케이스다. 

   (1) 역대서의 수많은 예들이 이미 사무엘-열왕기서와 같은 특정한 문서를 참고하여 쓰여졌다.

   (2) 대하 35:13 유월절 법에 대한 것으로 고기를 불에 굽고 삶는 것으로의 해석을 가미함.


  2) 다니엘 9장

   (1) 예레미야가 예언한(렘 25:11, 29:10) 바벨론 유수의 기간인 70년에 대한 다니엘의 해석이 나온다. 

   (2) 실제로 바벨론 포로기간은 50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주전 587년~ 538년, 50년)

   (3) 문제해결

- 바벨론 포로생활을 최초의 유배로부터 산정하면, 주전 605년. 70년에 근사한 수치를 얻을 수 있다. 

- 제2 성전이 완공된 해인 주전 516년을 진정한 포로 귀환의 해로 본다면, 70년이라는 수치가 나온다. 

- [저자 강조]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예언한 70년이라는 것을 가브리엘 천사가 주는 지혜와 총명을 통해서 새롭게 해석하게 된다. 70년 이라는 세월은 <일곱이레>로 해석되었다는 것이다. 다니엘은 예레미야가 처음부터 의도하지 않았고, 스스로의 지혜로는 이해할 수 없는 깊은 의미가 담겨 있다는 것을 볼 수 있게 된 것이다 .

   * 센수스 플레니오(충만한 의미)


  3) 예수님의 해석, 예수님께서 그들의 마음을 열어 하늘로부터 지혜를 주실 때 열리게 되는 해석(눅 24:13-35)

      예수님의 고난, 죽음, 부활을 문자적으로 예언해 주는 것이 구약의 전부라고 봐야 할 것이 아니라, 예수님 자신의 이스라엘 이야기의 절정이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약 성경을 객관적으로 읽는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구약성경을 <기독교인>으로 읽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를 지향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성경읽기.


2. 제 2성전기의 성경해석


  1) 고대근동 세계정세의 변화: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로마

  2) 이 시대에 쓰여진 이스라엘인들의 문헌들: 외경, 위경 중 일부, 사해문서, 필로와 요세푸스의 저작 등(상당한 분량)

  3) 이 중에서 제 2성전기의 문서 중 신약성경이 쓰여진 해석학적 배경에 대한 분명한 힌트를 줄 수 있는 두가지 예를 살펴보겠다. 


 [외경: 솔로몬의 지혜서]

  (1) 솔로몬의 지혜서는 성경의 지혜 문서와 유사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솔로몬의 지혜서는 주전 1세기 후반에서 주후 1세기 초반 사이에 그리스어로 쓰여졌다. 

  (3) 솔로몬의 지혜서를 쓴사람이 구약 성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해석적 결론을 받았는가를 살펴보자.  

     - 목적: 로마의 심한 박해에서 그의 독자들에게 용기를 주기 위한 것

     - 내용: 구약의 여러 인물들에 대한 간단한 평가를 해주고 있다. 

     - 이것을 통해서 유대인 전통 해석을 알수 있고, 그 당시의 성경 해석이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 그들은 이미 당시에 일반적으로 해석된(그러나 오류가 있을 수 있는, 예를 들면 동방박사의 이름이나 숫자가 나와있다고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런 내용의 성경이 머릿속에 가지고 있었다. 

   (4) 아담, 가인, 아브라함,롯, 야곱, 애굽 군사들을 토해 냄, 군사들을 약탈함, 아이들의 입으로부터...에 대한 기록에 있어서 전통적인 성경과 맞지 않는 내용들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해석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었던 성경에 대한 선이해라고 볼 수 있다.(173-181쪽) 


 [사해문서: 1QpHab]

  (1) 1947년 유대의 한 동굴에서 처음 발견된 사해문서는 오늘날 성서학 연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대 사본이다. 

  (2) 여기에서도 구약 성경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독특함이 나타난다.(합 1:5)


3. 제 2성전기 문서들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가? 


  1) 사해문서의 저자들이 구약성경을 해석할 때 그들이 옳다고 믿는 것에 성경 본문의 해석을 맞추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목적에 맞추기 위해 본문을 조작하는 경우도 생긴다. (이것이 그 당시 전형적인 성경해석 방법이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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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에 나타난 신학적 다양성의 문제]


 화두: 

유대인들에게는 성경이 풀어야 할 숙제이다. 기독교인에게는 성경이 선포될 메시지다.(유대인 학자)


1. 유대인의 성경해석 역사는 예수님이 태어나시기 수세기 전부터 시작됨.(근거: 외경,위경,사해문서 등)


2. 구약 성경 자체도 후대의 성경 저자들이 그 이전의 저자들을 해석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성경 내적인 해석)


3. 현상: 히브리어 자체가 가지고 있는 모호성(의미가 불분명하다), 내부에 존재하는 갈등이나 모순의 존재


4. 그런데 이런 내적 문제를 해결하는 유대인들의 해석방법은 문제를 깔끔하게 일소시켜 버리는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창조적인 에너지를 가지고 <성경과 대화하는 것> 그리고 그런 대화를 장려하는 공동체 자체가 유대인들에게 있어 중요한 것이었다. (이것이 유대인들의 구약성경 해석의 역사의 한 면이다.)


5. 반면, 기독교 복음주의적 성경해석의 역사를 보면, 성경 내의 갈등과 모호성에 대한 강한 불안감을 찾아 볼 수 있다. 성경 내에 어떤 갈등도 내포되어 있어서는 안된다는 확신이다.(모호성을 해결하기 위해 너무 기발안 생각을 해내거나 그렇지 못한 경우는 회피해 버린다.) 그래서 복음주의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통일된 메시지였다. 한 명의 저자에 의한 책이라면 갈등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6. 유대교와 기독교는 성경의 다양성(통일성과 대조되는 개념의 다양성)에 대해서 입장 차이가 있다. 


  1) 비평적 성경학자들: 성경의 다양성을 설명하는 한가지 방법은 구약성경을 모순으로 가득차 있는, 서로 상충하는 인간의 의견으로 가득 찬 요상한 기록으로 보는 것.(기독교적 사고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것)

  2) 이에 대한 복음주의적 응수: 

   (1)  그런 다양성은 성경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거나

   (2) 그런 다양성은 존재한다 하더라도 사소한 부분에 국한된다. 

   (3) 그런 다양성이 앞으로 조만간 설명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성경을 다양성이라는 혐의로부터 변호하려 함. 


  [문제] 이런 접근 방법은 오히려 다른 문제를 만들어내고, 성경의 다양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피해가는 듯한 인상을 줄 위험이 있다. 


[저자의 접근]

성경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비평적 성경학자들이나 복음주의자들이나 마찬가지다. 성경의 다양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저자는 인식한다. 성경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고, 그 다양성은 오히려 성경의 역동성으로 나타난다. 이제부터는 그 예들의 일부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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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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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9편] 때론 누군가에게 성경의 해석학이 어쩌구 저쩌구 하는 것은 사치처럼 들립니다. 가난하고 억울하며 병들어 절망한 인생들에게, 높이시는 하나님, 공의로우신 하나님, 고쳐주시는 하나님은 학문적인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배움이 없는 사람들에게 바른 해석을 요구해 성경 읽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 버렸다면, 기독교는 우리에게서 멀어졌을 것입니다. 순서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까워지게 그리고 바르게. 바르게 하겠다고 멀어지게 만드는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정리]


1. 시편 기자가 느끼는 인생의 한계성(끝이 있으며, 길지 못하다)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5절.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라.(셀라)


 : 그래서 인생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순간에도 모두가 허사에 불과할 뿐이다. 그만큼 우리 인생은 장담할 수 없이 짧고 약한 것이다. 하루살이가 남의 이야기가 아닌 것이다. 


6절.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하나이다. 



2. 그래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소망을 하나님께 둔다.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9절. 내가 잠잠하고 입을 열지 아니함은 주께서 이를 행하신 까닭이니이다. 

    (1~3절. 자신이 조심하여 혀로 범죄하지 아니하려고 잠잠한다고 고백, 그래서 답답하다고 고백)


   : 이 짧고 약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하나님께 범죄하지 않으려고 잠잠하며 삼가하는 시편 기자의 모습을 본다. 악인이 내 앞에 있을 때에도 함부로 말하지 않으려 하지만(1절) 혹 선한 말도 조심함은 그 와중에 작은 잘못이라도 하나님께 할까하는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너무 작고 미력한 인생이라... 작은 죄도 조심스럽다. 


11절. 주께서 죄악을 책망하사 사람을 징계하실 때에 그 영화를 좀먹음 같이 소멸하게 하시니 참으로 인생이란 모두 헛될 뿐이니이다.(셀라)


3. 시편 기자의 구체적인 상황


13절. 주는 나를 용서하사 내가 떠나 없어지기 전에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 시편 기자는 병 중에서 자신의 연약함과 무력함 또한 인생의 한계를 느끼며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 병은 중병이며 사람으로 하여금 인생이 얼마나 제한된 존재인가를 발견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래서 그는 더욱 조심하게 된다. 특히, 함부로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심지어 악인을 앞에 두고서라도... 선한 말일지라도... 작은 실수와 범죄로도 쉽게 무너져 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이라는 것을 발견하고 겸비하고 있다. 


그래도 그의 간절한 바램이 있다. <나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묵상]


나의 간절한 바램도 마찬가지다. <나의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나의 아내가 난소암 3기라는 것을 알게 되고, 수술하고 항암치료를 마친 것이 만 2년 전이었다. 이제 내일이면 항암치료 후 중요하다는 2년의 시간이 지난다. 감사하게도 지금까지 재발없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왔다. 내일 병원에서  PET CT 를 찍고 그 결과를 들으면 지난 2년간의 시간에 대한 중간 평가(한 텀의 기말평가와 같은)를 받게 된다. 시편 기자와 동일한 기도를 드리고 싶다. 


주여, 나의 아내의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지난 2년간을 지켜주신 하나님께서 앞으로도 강건하게 지켜주소서! 연약한 육체의 한계를 목도하고 나와 아내를 겸비하게 하신 주여, 건강을 회복시키소서.


해석이 필요없이, 이 구절은 그 쓰여진 그대로 나의 기도가 되고, 소망이 되며 응답이 되리라 믿는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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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문제인가?]


1. 이와 같은 고대근동 문헌들이 성경을 믿는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종류의 문제를 제기한다.


  1) 성경, 그 중에서도 특히 창세기는 역사적인 사실을 기록한 것인가? 아니면 고대근동 문헌을 짜집기 한 것인가?

  2) 하나님의 계시인 성경이 다른 문화의 영향을 받았다면 성경의 독특성이 무엇인가? 

  3) 고대근동 문헌이 발굴되기 이전의 교회 역사는 성경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가지고 흘러온 것이 아닌가?


   : 성경은 정말 하나님의 말씀인가? 


2. 지금까지 발굴된 문헌들을 정리해 보면


  1) 창조와 홍수: <에누마 엘리쉬>, <아트라하시스>, <길가메쉬>

  2) 관습, 율법, 잠언: 누지 문서, <함무라비 법전>, 히타이트 조약 문서, <아메네모페의 교훈>

  3) 이스라엘과 왕들: 텔 단 비문, 실로암 터널 비문, 메사 비문


3. 각 그룹별로 제기될 수 있는 질문들

 

  1) 그룹1_ 창조와 홍수: 창세기는 신화인가 역사인가? 

     (1) 대부분의 학자들은 고대근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를 신화라고 생각한다. 

     (2) 그렇다면 고대근동의 창조와 홍수 이야기와 유사한 성경 이야기도 신화로 봐야 하는 것이 아닌가?

     (3) 저자의 제안

: 신화에 대한 정의에 따라 달라질 것인데, 편견없는 정의는 '신화는 인간과 우주의 기원, 그리고 그것의 궁극적 의미에 대한 질문을 다루는 고대인들의 대답 방식'이다.  당연히 고대인들의 세계관, 즉 근대적인 사유나 과학적인 사고가 생겨나기 이전의 세계 인식을 반영하게 된다. 


고대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세계관으로 설명하는 방식(특히 이야기 형식으로)


  2) 그룹2_관습, 율법, 그리고 잠언: 계시인 성경은 독특한가?


    (1) 누지 문서를 통해서 보면 구약의 족장 이야기는 주전 1500년까지 올라간다.(물론 기록은 주전 1000년 이후라고 본다.)

    (2) 하나님이 족장들에게 따르라고 요구했던 도덕적인 기준은 독자적인 명령이 아니라 주변 문화의 관습에서 나온 것으로 추정됨.(당시 사회적 규범이 고스란히 적용된 결과)

    (3) 당혹스러운 것은 적어도 전통적인 입장에서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은 하나님이 직적계시한 것이기 때문에 고유한 것이라고 여겨졌다.

    (4) 이 문제는 <계시란 무엇인가>라는 더욱 핵심적인 질문으로 이어진다. 

    (5) 성경의 내용과 고대 근동의 문헌 사이에 유사성과 연관성을 부정할 수 없다. 


  3) 그룹3_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왕들: 좋은 역사서술은 받드시 객관적인가, 아니면 주관적일 수 있는가?


    (1) 텔 단 비문, 실로암 터널에 나타난 자료들은 오히려 성경의 역사성을 증명해 주고 있다. 

    (2) 그러나 이것이 고대 족장의 역사적 신빙성까지 증명해 주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는 상대적으로국가적으로 평온했던 시기였기에 자료들을 남길 수 있었다.(어찌보면 근대 역사 기록과 유사한 상황이라 볼 수도 있다.)


    (3) 열왕기를 보면 왕에 대한 비판이 대부분을 이루는 것을 볼 때, 그래도 미화시킨 역사라기 보다는 정확한 역사서술임을 암시한다고 볼 수 있다. 

    (4)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역사서술이 가능한 것일까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5) 메사 비문에서 메사 왕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함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역사 기록은 사실 그대로만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고 하겠다.(메사 비문에 거짓말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적인 내용들이 들어가지만, 거기에는 왕이 위대함에 대한 구체적인 해석이들어가게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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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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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석해야 하는 두번째 이유: 인격자의 발언이기 때문에(지,정,의)


1. 하나님은 감정을 가지고 표현하시는 분이시다.(흑백이 아닌 칼라의 측면으로 이해해야 함)

  이 부분을 지성과 의지의 차원으로만 본다면 하나님은 변덕쟁이가 되고 만다.


2. 하나님은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이시다.

  그래서 죄가 없는 욥이나 요셉같은 인물이 고난을 거치도록 하신다. 그것은 그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무엇을 이루고자 하시는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전 역사를 통해서 '인간은 그 속이 변하지 않는 이상은 외적으로는 무슨 방법과 조건을 제시해도 구원을 얻을 수 없다'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필연성을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내적 변화다.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요 중생이다.

  따라서 신약에서는 중생을 결과시키는 작업으로 오시지 더 이상 설득하고 설명하고 잡아끄는 것으로는 오시지 않는다고 본다.


3. 영적인 계시의 내용을 이해시키기 위해 사용하는 것 중 하나 <비유>

  1) 비유(parable)와 알레고리(allegory)의 차이: 

   (1) 비유는 '하나의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가 잘 아는 일상생활에서의 한 장면을 도입하는 것.

예1) 빠른 사람을 <제트기>라고 표현함. 그러나 알레고리는 <제트기>에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함(비싸다)

비유는 1차 개념만 도입하는 것이다. 그러나 알레고리는 모든 의미를 등장시키는 것이다.(삿 9장의 알레고리)


예2)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비유를 들어주시는 목적인 무엇인가? 이웃이 누구인가를 알려주시기 위한 것(따라서 언급된 세부적인 내용들은 무대장치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 하나에 의미를 둘것이 아니라 목적과 방향을 파악)

  : 선한 사마리아 인이 되자! 라고 결론 맺으면 올바른 해석이 못된다. 


예3) 씨 뿌리는 비유: 우리도 옥토가 됩시다(?)

 하나님의 사역이 이 땅에서 방해를 받는 다는 것이다. 그러나 좋은 밭에 떨어진 것이 큰 결실을 얻게 될 것.

 천국이 방해 받을 수 있는 형태의 모습으로 왔으나, 천국은 확장되어 완성될 것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4. 조직 신학을 통한 성경해석

  1) 역사적 흐름


조직신학이라는 것은 마치 자동차 광고를 위해서 차가 가장 잘 드러나는 장면(전면과 측면)을 중심으로 표여주듯이 하는 신학이다. 어떤 주제를 부각하여 드러내는 신학.


사람들은 처음부터 조직신학적 접근을 했다.(주제별로, 논리적으로) 이 때는 성경구절을 주로 신학에 대한 증거구절로 사용했다. 그런데 자신이 하고 싶은 말에 대한 근거를 성경에서 찾아오면서(성경을 증거구절식으로 가지고 옴) 사람들 사이에 그 구절의 원래의 의미를 추적해 보니까 그것이 그런 뜻이 아니더라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성경의 문맥을 중시하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성경신학은 문맥을 중시해서 원래의 의미를 추적하는 신학이다. 


사실 성경신학은 조직신학이 교조주의적으로 성경을 얼토당토 않게 인용해서 쓴 것이 사실은 성경이 하나의 통일된 문서가 아니라 편집자에 의해서 (여러문서가)짜집기 된 것이기 때문에 발생한 문제라고 지적한 문서설에 대한 대답으로 나온 신학이다. 성경이 여러문서를 짜집기 해서 된 것이 아니라, 문맥을 통해서 보면 이런 의도고 이런 뜻이다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 등장한 신학이다.(단어가 갖는 뜻이 중요하지만, 전체적인 해석에서는 결국 단어가 갖는 뜻이 끝까지 고집을 부리도록 안되어있다.)


문서설과 비평적인 여러 사조 때문에 성경 신학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대두되어, 20세기에는 매우 인기있는 사조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도 문제가 있다. 마가복음 16:15과 같은 곳을 해석하는데는 성경신학도 한계를 가진다.(뱀을 집고 독을 마시는 것) 그래서 최근에는 성경신학적 접근이 선행된 위에 조직신학이 서야 한다는 것이 최근 성경신학의 답이다. 막 16:15은 단순히 문맥만으로는 해석이 불가능하다. 조직신학적 도움이 필요하다. 그렇게 본다면 본문은 하나님께서 하시려고 하는 그 일을 반드시 이루시고 말 것이라는 것으로 해석하면 될 것이다. 


  예) 요 3:16 만인구원설? / 성경의 다른 본문 내 양은 나를 안다.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진을 찍어야 한다.)


5. 성경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들이 걸리는 두가지 올무

  1) 성경을 많은 정보들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는 것을 자랑으로 생각하는 올무


  2) 가난한 성경신학적인 방법으로 이해하는 올무

예) 북한군에게 국군 2명을 숨겨준 목사 / 거짓말 하지 않음.(문자적으로만 생각 / 거짓말_하나님 편들지 않은 것) / 풍성한 성경신학적 방법의 예_초대 교회 시대에 십자가를 밟고 온 교부(주님의 십자가 말고 강도의 십자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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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을 해석해야 하는 이유_ 계시의 초월적 내용이 인간의 이성에 인식가능하기 위해서는 변형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1. 초자연주의와 자연주의 부작용은 계시된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잘 나타난다.


2. 계시의 내용은 초월적이다. 그러나 계시가 드러난 방식은 초자연으로 계시될수도 있고, 자연으로 계시될 수 있다. 그런데 로마 카톨릭은 계시가 내용적으로 가지고 있는 초월을 계시 방식의 초월성으로만 이해하게 되었다. 그래서 신비 자체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예) 마리아 - 로마 카톨릭은 마리아를 신비적인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결과적으로 중보자)

  개혁주의는 마리아가 가지는 신앙과 그 자세에 초점을 맞추게 됨


  예) 성령의 은사를 받았다 - 그 은사가 어떤 메시지를 가지느냐로 가야 하는데, 은사 자체의 신비 쪽으로만 갔다.(은사가 가지는 의미를 해석하지 않고, 그 현상의 신비만을 추구함)

: 고전 12-14장에서 은사에 대한 이야기 / 한 몸이라는 비유 / 불완전한 지금

  - 밤중에 손전등이 필요한 것은 사람의 시력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 내가 손전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빛과 더 가깝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정리해서 읽을 것] 113쪽 7줄부터~


3.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종들은 그 말씀을 단순히 그대로 전하는 자가 아니라, 먼저 내가 그 말씀에 의해서 항복하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그러기 위해서 하나님은 언어의 수단이나 논리성의 수단 등을 이용하신다.) _ 단순히 제스쳐로 단어 맞추는 게임식 전달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시(초월성)가 우리의 인식 가능한 형태로 변형되어 왔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의 원형을 찾기 위해서 해석해야 한다.(A를 전달하기 위해서 A'로 왔는데, 이미 이 땅에는 A'라는 것이 존재한다. 그러나 기존의 A'와 하나님이 보여주신 A'는 완전히 같은 내용을 가진 것이 아니다. 기존의 A'이 개념을 빌려서 원래의 A 개념의 일면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동일한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해석자는 계시된 A'를 시작으로 해서 하나님이 뜻하시는 바의 내용까지 들어가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4. 해석을 하지 않게 되면, 초월이라는 계시된 형식자체를 내용으로 받아 초월주의로 빠지게 되거나 혹은 계시된 것(A')을 원래 인간들이 가지고 있던 개념(A')와 동일시 해 버리게 되고 만다(자연주의).

  예) 자유주의 신학은 <부활>을 <부활적인 개념>으로 바꾸어 버린다. 


5. 성경의 특징: 구약은 사건적이고 신약은 설명적이다. 

  영화를 예로 든다면,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자막이 있는 편이 낫다. 화면만으로는 그 뜻을 명확하게 알아내기 어렵다.(법정영화)_그래서 신약이 내용을 파악하는데는 더 좋을 수 있다. 그러나 영상이 없으면, 잃어버리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스케일이다. 구약은 그와 같은 스케일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구약은 사건과 스케일을 통해서 단어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는 작업을 한다. 

예) 죄의 값은 사망이다. - 문둥병으로 죽는다, 지진으로 죽는다.... 그 죽음의 잔혹함을 보여준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다.- 십자가 사건, 우상숭배하면 질투하시는 하나님

  구약의 사건들을 통해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단어들을 만드시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는 그것을 가지고 내용을 만드는 작업을 한다. 


6. 국어를 공부하는 방식

  1) 초등학교 때에는 문자를 가르친다. 단어를 정확하게 아는 것에 주안점을 맞춘다. 

  2) 중학교 국어교육: 그 단어들을 엮어서 문장을 만들어 문장 안에 사상을 담기 시작한다. 글자가 연결되어 사상을 담는 그릇을 만들게 된다. 따라서 우리 말을 배운다는 것은 우리의 사상을 배운다는 것이라는 측면에서 <민족사상교육>이 되는 것이다.  

  3) 행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개념과 이유와 목적을 알아야 한다)

일상: 네 마음대로 해!    집에 들어오지 마!!

성경: 내가 이 백성을 다 진멸해 버리겠다. 그러다가 다음 장에선 내 백성 치는 자는 죽는 줄 알아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따라서 성경의 내용들을 일차적으로 그 단어가 성경상에 어떤 뜻을 가지는가를 알아야 제대로 해석되는데, 그걸 알기 위해서는 많은 사건들을 알아야 된다. 왜냐하면 사건들이 그 단어를 정의하기 때문이다. 


7. 성경에 기록된 제일 중요한 계시의 핵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냐 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대접하시느냐 하는 것이다. 

  1) 그런데 우리는 실존주의 영향으로 우리 자신에게 초점이 맞춰진 주제로 성경을 이해하도록 했다.


8. 근본주의란?

근본주의라는 것은 성경이 초월의 내용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어떤 형태와 모습으로 계시했을 때(A'), 그 내용(A)은 꼭 그 모습(A')만을 가져야 된다고 하는 것.

  1) 정당한 근본주의: 자유주의를 대항 할 때는 근본주의가 필요하다.

- 예수의 유일성, 역사적인 인물로서의 예수, 하나님의 아들, 부활 등.


      곤란한 근본주의(율법주의적 근본주의)


  2) 이혼 증서: 이혼증서를 써주어 내보내라고 했으니까, 그렇게해서 이혼하면 적법하다.

그러나 이혼에 합당한 이유없이 아내를 버리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런 절차를 두었다는  내용에 대해서는 알지 못함. 더 나아가 부부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임을 이해하지 못함.


  3) 침례에 대해서.

어느게 맞느냐 하면, 물속에 집어 넣는 게 옳다. 그러면 왜 물을 뿌리냐? 그것은 의미가 같기 때문이다. 

  4) 유아세례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 아니라, 은혜를 구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마땅함.

  5)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근본주의적 사고방식:

   (1) 6일 창조 / 6세대 창조(날: 욤 에 대한 해석문제) 

  6) 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

하나님은 죄를 미워하신다는 의미지, 간음한 자는 돌로쳐서 죽여도 좋다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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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하면] 신학이란 이성을 통해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시를 통해서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학에 이성이 동원되는 것은 이성이 신학의 내용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이 이성을 통해서만 신적 계시를 합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은 계시의 내용을 우리에게 인식 가능한 형태(합리적으로 인식 가능한 형태)로 드러내신다.(그래야 우리가 인식할 수 있기에) 그러나 사람의 이성은 보통 그것을 체계화하려는 경향, 폐쇄적 경향성을 가지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자신을 계시하실 때, 이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방식으로 계시하시면서도 초월적인 내용들을 보이심(시공간적 초월, 기적과 같은)으로 우리의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닫힌 시스템으로가 아니라, 열린 시스템으로 하도록 하신다. 



[내용 정리]


1. 지난시간: 계시란 하나님의 자기 진열이 아니라, 계획과 목적을 가지고 일을 하시고 주도권을 갖는 것이 계시다. 


  예 1) 하박국의 질문: 왜 의인이 불의한 자들에게 횡포를 당하는데 가만히 계십니까? 

           하나님의 답변: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우리가 원하는 방식으로의 답변을 주시지 않는다)

  예 2) 시편 96편. 하나님에 대한 증명은 없고, 하나님에 대한 찬양과 송축을 다룬 내용

           * 작자가 불분명: 선지자나 제사장 혹은 기름부음 받은 자가 썼다면, 저절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채택되어 성경으로 구분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시편은 저자가 누군지 모르는데, 성경으로 받아들였다. 이것은 그 내용이 정경에 포함될 만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에 채택된 것이다. 초월적이기 형태의 모습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성경에 포함된 것이 아니라, 전 생애를 걸쳐서 확인되었기 때문에 포함된 것이다.(간적적이고 완곡한 방식으로 자기를 증명하신다.)


2. 오늘 본론: 신학이 하나님의 계시로만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성까지 포함되어야 하는가? 


  1) 신학의 방법론은 이성이 아니라, 계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에 대해서는 지난 시간에 확인했다. 

  2) 이성은 분명히 신학의 주제와 내용에서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에 대해서도 확인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시와 이성의 문제가 계속 제기되는 것은 계시는 그 첫번째 목적이 초월적인 것을 인간에게 알리려는 것인데, 인간이 그것을 인식하는 방법과 기능이 이성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제한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4) 이 말은 인간은 하나의 내용을 인식하고 이해하는데 합리성을 요구한다는 것이다.(합리적인 방식으로 계시되어야 만 인간은 인식하게 된다는 것)


   (1) 교리와 사상의 차이를 생각하면서 폐쇄된 체계를 이해해 보자.

   (2) 교리는 우리가 신앙하는 것을 객관적으로 체계화하고 지적으로 체계화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사상은 한 개인이 자기가 믿는 것을 자기의 지적체계, 자기의 이해의 어떤 인식체계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이 둘은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는데 서로 같을 수도 있고, 서로 조금씩 다를 수도 있다. 

   (3) 개인의 신앙 체계인 사상은 그 사람이 중요하다고 여긴 것을 더욱 부각시키는 개인적인 경험과 신앙의 칼라에 따라서 재편집된 모양을 가진다. (진보적이다 혹은 보수적이다)

      예]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서 어느 쪽을 더 선호하느냐에 따라 사상이 조금씩 달라지게 된다. 

   (4) 그래서 인간이 가지는 정신 체계는 언제나 단원론적이요, 페쇄된 체계가 되기 쉽다.(닫힌 시스템)

      예] 우리는 우리가 경험하고 본 것을 더욱 확대하는 경향으로 해석하려고 한다.(경험과 환경)

      예] 하나님의 주권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도 한 부분을 가지고 전체를 해석하려고 할 때, 폐쇄성 체계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가지고만 성경 전체를 확대 해석하면 알미니안주의가 되고, 하나님의 주권만을 이야기하면 칼빈주의가 된다. 서로 문호를 개방하지 않으면 한 부분으로 확대되는 경향이 나타나게 된다. 

   (5) 인간은 합리석을 추구하게 되고, 그렇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존재다. 

     예) 돈을 잃어 버렸을 경우

     예) 방언 문제, 구원의 확신 문제_단원론적인 체계로만 가지고 있어서 발생하는 문제들.


3. 왜 자꾸 계시의 문제에 이성이 끼어들게 되는가? 어떻게 극복해야 하는가?

  1) 이성이 없이는 계시가 인식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성이라는 것이 마치 내용인것처럼 끼어들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내용인 것처럼 자신을 주장하게 된다. 

  2) 하나님은 초월적인 어떤 내용을 인간에게 알게 하시려 할 때, 이성이라는 틀로 이해 가능한 형식을 취하셔서 전해 주시는데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의 이성의 틀에 맞춰서 보여 주셨기 때문에, 이성의 틀에서 벗어난  내용에 대해서는  하나님의 내용이 아니라고 역으로 주장하게 되더라는 것이다. 

  3) 그래서 자신의 이성적 합리성에서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는, 자신의 체계로 변형시키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렇다고 받은 것을 그대로 전하면 될 것이 아니냐? 말할지 모르겠지만 인간은 그렇게 할 수없다. 우리가 받는 것이 물건이 아니라, 사상과 내용이기 때문에 반드시 이해해야 하고 해석해야만 한다. 그래야 전달될 수 있는 것이다. 

     예] 모션으로 단어 맞추기 게임과는 다르다.


  4)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해석해야만 한다.(이성을 통하여 계시된 내용을 가공하는 것이 필연적인데, 잘 해야한다.) 그리고 바르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이성이 가지는 한계, 합리성과 폐쇄성과 단원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개방성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5) 개방성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자유의지와 하나님의 주권을 모두 인정)을 모두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_ <계시의존 사색>이라고 말한다. 


4. 인간의 이성은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으며, 하나님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신다. 

  1) 순수이성비판

  2) 성경은 활자로 우리에게 주어졌다. 하나님의 글자가 아닌 우리의 문자로. 우리의 활자 속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찾아 내야 한다. 이것이 해석이다. 그러나 이것은 학문적 차원에서가 아니라, 성령의 조명 가운데서 이루어 져야 한다 

  3) 우리의 이성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는데, 하나님은 초월적인 존재이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시간과 공간 속에서 자신을 펼쳐 보이심으로 자신이 초월자라는 것을 나타내신다. 그래서 성경 기적은 두 가지 유형을 갖는다. 하나는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공간을 초월하는 것이다. (예, 죽은 자를 살리심, 바다 위를 걸으심, 홍해를 가르심, 문둥병을 고치심(공간 초월) // 예언(시간 초월)) 이런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개방 체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하신다. 

  4) 성경은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해 졌다.그러나 그 내용들 속에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기적이 점철되어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역사로 오시고, 예수님이 이 땅에 성육신하시는 것으로 오신다. 

  5) 이성은 계시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면서, 그것을 가공(제단)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5. 신학을 하다보면 가장 무서운 것

  1) 근본주의: 해석을 금하는 것. 이성은 운반만 해라. 나타난 대로만 보자고 말하는 것이다.(편협하게 됨) A로 나타난 것은 A로만 나타나야 한다는 식으로 해석함. 


  2) 자유주의: 이성이 받아들일 것과 받아들이지 못할 것을 판단해서 선택권을 가지려고 함. 이성에 합하지 않은 내용들에 대해서 이성적으로 받아들 수 있는 방식으로 바꾸어 버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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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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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적-역사적 해석이란

쓰여진 글이 어떤 역사적 상황 속에서 또는 정황 속에서 한 말인가를 찾는 것이다. 따라서 원래 저자가 말하려고 하는 의도에 대한 본래적 의미가 무엇인가를 찾는 것이 역사적 해석이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서도 그와 같은 원리가 사용되어야 함은 당연하다.

구체적인 사례를 하나 보자.

에스라 5:5

하나님이 유다 장로들을 돌보셨으므로 그들이 능히 공사를 막지 못하였다.(5절)

하나님의 돌보심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외부로부터의 공격을 도와 지켜주셨다는 것으로 문자적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본문에는 그와 같은 공격이 있음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강 건너편에서온 사람들의 위협에 대해서 겁먹지 않고, 위축되지 않고 원래 하려고 하던 성전 공사를 계속 했다는 것으로 보아(5절) 그 의미는 마음이 약해지지 않았다는 것이고, 그 마음 또한 하나님의 돌보심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될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돌보심이란 말의 구체적인 의미이다. 외부의 공격이 없거나 있어도 그것을 막아 주시는 것만이 하나님의 돌보심이 아니다. 외부의 위협에도 흔들리지 않고 자신 해야 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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