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Jack B

Photo by Jack B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13절. 예수께서 다시 바닷가에 나가시매 큰 무리가 나왔거늘 예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니라

14절. 또 지나가시다가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일어나 따르니라

15절. 그의 집에 앉아 잡수실 때에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았으니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름이러라

16절.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 및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의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 및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17절.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들에게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바닷가로 나가셨고 많은 무리가 나오자 그들에게 가르치셨다.(평범한 사람들의 현장 속을 다니셨고 그들을 가르치셨다.) 그러는 중에 알패오의 아들 레위가 세관에 앉아있는 것을 보시고 그를 부르셨다. 어부들 중에서 제자를 부르신 예수님은 이제 세리(당시 죄인이라고 여겨진)를 제자로 부르셨고 레위는 그 부르심에 순종했다.(13-14절)

2. 예수님은 레위의 집에서 음식을 드실 대, 많은 세리와 죄인들이 함께 있었다. 예수님 주변에 많은 죄인들이 있었기 때문에 죄인들은 편하게 예수님 주변으로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이다.(15절)

3. 이 모습을 본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제자들에게 '예수가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라고 물었고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당신이 의인이 아닌 죄인을 부르러 이 땅에 왔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셨다.(16-17절)

- 중풍병자에게 '죄사함을 받으라'고 하셨을 때 서기관 중에 어떤 사람이 속으로 '하나님 한 분 위에 누가 능히 죄를 사하겠는가!'라고 생각했을 때 주님은 그 속 마음을 알아채시고 답변을 주셨다.(막 2:7,8절) 이번에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노골적으로 제자들에게 의의를 제기했고 그 문제제기에 대한 답을 예수님이 하셨다. 


[질문하기]

1. 왜 예수님은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신 것을 따로 기록하고 있을까? 

- 어부들은 사회적으로 낮은 자를 대표한다면, 레위는 세리로서 죄인들을 대표한다 하겠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 사회적으로 낮은자, 죄인으로 소외된 자를 먼저 하나님 나라의 제자로 부르셨다. 어쩌면 하나님의 나라는 그와 같은 자들이 중심되는 나라이기 때문인지 모른다. 예수님의 이루게 될 나라의 특징을 잘 반영하는 선택인지 모르겠다.


2. 예수님께서 세리인 레위를 제자로 부르시면서 얻은 부수적인 효과는 무엇인가? 

-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앉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러한 사람들이 많이 있어서 예수를 따랐다는 것이다. 레위가 예수님을 따르게 되자 레위와 같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 레위와 함께 일하던 동료들이 예수와 함께 있고, 그 분을 따르게 되었다. 한 사람을 부르는 것은 한 사람으로 끝나지 않는다.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게 된다는 말씀처럼 한 가정이 돌아오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이 돌아오는 연결점이 된다. 한 사람은 한 사람이 아니다. 아담이 아담 혼자일 수 없고, 예수가 예수 혼자 일 수 없다. 


3. 이 사건을 통해서 마가가 명확하게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인가? 

  1) 세리조차 예수님의 제자가 될 수 있고, 세리조차 하나님 나라의 중추적인 인물이 될 수 있다. 

  2)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는 쓸데 없는 곳이된다. 그러나 이 땅에서 죄인으로 인식되고 인정된 자들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곳이 된다. 예수님은 그런 죄인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온 것이다. 


[묵상하기]

1. 한 사람은 사람 한 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세리 레위가 예수의 제자가 될 때, 많은 수의 세리들이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을 만나 교제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들 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레위의 뒤를 이어 예수를 따르게 된듯 하다. 바울을 만나 자주장사 루디아 한 사람을 통해 그의 집이 주님께 돌아왔고, 빌립보 감옥에서 간수장 한사람의 회심으로 그 가족 모두가 세례를 받게 된다. 아브라함 한 사람을 통해서 큰 민족을 이루게 되듯, 한 사람은 숫자 하나가 아니다. 그와 연결된 수 많은 가능성의 시작인 것이다. 아담 한 사람이 모든 인류의 조상이 된것처럼, 예수 한 분을 통해서 모든 구원받은 백성의 나라가 된다. 한 사람에게는 그와 같은 가능성이 있다. 

2. 건강한 사람들만 모여 산다면 그들에게 의사는 무용한 사람이고 잉여의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병든 사람에게 의사는 반드시 필요한 사람이요 인생의 구원자다. 주님은 인류의 구원자로 치료자로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따라서 자신의 병을 인식하고 인정한 사람들은 주님을 찾고 만나 구원을 받지만, 자산의 병을 모른채 자신이 건강한 줄로 착각하는 사람들은 결코 주님을 만날 수 없다. 복음의 적용은 자신이 병든 상태, 스스로는 치료가 불가능한 상태, 그 병의 끝은 사명이요 멸망이요 비참이라는 사실을 인식한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그러므로 너희는”에서 “그런즉 우리도”까지


글: 김수억 대표


성도들로 하여금 선교를 대표할 수 있는 성경 구절을 하나 뽑으라고 하면 대다수 성도는 단연 마태복음 28장 18-20절을 뽑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예수님이 제자들로 하여금 선교를 위해 ‘지상 명령’으로 제시한 본문으로 잘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라는 예수님의 선교적 명령에는 두 가지 전제가 있다. 예수님이 하나님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18절) 받으셨다는 사실과 예수님께서 파송한 제자들과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격려의 약속(20절)이 바로 그것이다. 


사실 제자로서 선교적 명령에 즉각적으로 순종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은 내적 능력에 대한 불완전성과 외적인 환경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마태복음 28장 18-20절은 이런 두려움으로 머뭇거리는 청년들에게 큰 힘을 주는 성경적 근거를 제시한다. 모든 권세와 권능을 가진 예수님이 청년들을 파송하고 있고, 청년들과 함께하신다고 하셨으니 그 약속만 믿을 수 있다면 청년들은 그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다. 그래서인지 선교한국 1988 대회부터 2010 대회까지 선교한국의 주제를 단순하게 정리해 보면 한국 교회 청년들에게 선교적 과제를 제시하고 그 사명을 완수하기 위해 너희는 가라고 도전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교한국 2016 대회 주제는 “그런즉 우리도”다. 히브리서 13장 13절에서 문구를 따왔다. 전후 문맥을 보면 예수님도 백성들을 위해 수치를 당하셨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당하신 것처럼 “그런즉 우리도” 선교적 삶을 위해 예수님의 삶을 본받자는 내용이다. “그런즉 우리도”라는 구절에는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의 배후에 있었던 예수님의 권세와 그분의 함께하심에 대한 ‘격려’는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당한 수치’, ‘예수님이 당한 고난’만 있을 뿐이다. “그런즉 우리도”라는 이번 대회의 주제는 선교하려는 청년 대학생들의 흥분을 가라앉힌다. 그리고 오히려 진지하게 묻는다. “자네, 정말 예수님의 수치와 고난의 길을 가려나?”하고 말이다. 선교한국 2016 대회의 주제 구절은 선교사로의 도전이 아니라 제자다운 삶에 대한 도전에 가깝다.


선교한국 2010 대회의 주강사, 자크 니링기에(David Zac Niringiye, 우간다 성공회 소속) 주교는 당시 대회 주제 구절인 마태복음 28장 18-20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가라”라는 선교적 명령을 강해하면서 대회 참가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우리가 선교사로 가기(Go) 위해서는 먼저 예수께로 와야(Come) 한다고 했던 것이다. 선교사가 되기 전에 먼저 ‘제자’가 되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선교한국 2010 대회 이후 6년만에 선교한국 대회는 본격적으로 ‘제자도’와 긴밀한 주제가 되었다. 이런 흐름의 변화는 단순히 주제가 선교에서 제자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선교적 명령 안에 담겨져 있어야 할 제자도에 대한 영역이 그동안 축소되거나 간과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며, 과거 ‘동원’에만 치중함으로 ‘제자로서의 선교사’의 측면이 약화되었던 것이 결국 한국 교회 선교의 문제로 드러나고 있음을 반성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이런 선교한국 대회의 흐름은 지난날 성장 중심의 한국 교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와 교묘히 닮아 있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선교한국 2016 대회는 선교 동원의 한계를 극복하자는 것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안 된다. 선교 안에 포함되어 있는 제자로서의 삶에 맞춰져야 할 것이다. 그것은 이 시대를 향한 선교한국 대회의 메시지가 되어야 할 것이다. 더불어 “그런즉 우리도”의 메시지는 한국교회를 갱신하기 위한 외침이기도 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보자복] 10장. 가볍지 않은 예배의 현대화


복음주의적인 <예배 형식>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다룬 장입니다. 


....

성경적에서 정한 특별한 형식은 없다는 것이 저자의 결론입니다.(마음에 드는 결론입니다.ㅎ)


다만, 현대의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에게 경고합니다.


아무 생각 없이 전통만 고집하거나, 실험이나 오락으로 돌진하는 것은 예배를 하찮게 만드는 지름길이다. 

예배를 하찮게 만드는 것은 현대성이 아니라 무절제한 실험과 오락이다.



[생각한 지점] 보수적이 교회가 예배 형식이 매우 보수적으로 고집할듯 한데 그렇지 않다. 오히려 매우 자유롭고 가볍게 한다.(열린예배 도입)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지만, 예배에 있어서 급진적으로 자유롭게 변하는 것은 '전도'와 '선교'라는 더 큰 사명을 앞세우기 때문이라 본다. 

그렇다면 신학적 보수주의도 결국은 실용(사명으로 포장된 교회 성장이라는 측면에서) 앞에서는 고집을 꺽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본문]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6]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그에게 의로 정하셨다 함과 같으니라 [7] 그런즉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들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줄 알지어다 

 

  [해설] 아브라함의 의롭게 인정됨이 어떤 행위와 율법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 여기셨다(창 15:6)의 말씀을 근거한 내용이다. 따라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된 자들>은 모두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이는 아브라함이 유대인의 조상(할례자의 조상)이면서 동시에 이방인(비할례자, 아브라함은 비할례시에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았기에)의 조상이 되기도 한다. 이 내용에 대해서는 롬 4장에서도 바울이 잘 설명하고 있으니 참고하라. 





[8] 또 하나님이 이방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 [9]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 


  [해설] 아브라함이 강대한 나라가 되고 천하 만민은 그로 말미암아 복을 받게 될 것이다.(창 18:18)라는 말씀을 근거로 바울은 이방인들도 아브라함을 통해서 복을 받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이 이미 미리 정하신 것이라 본 것이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복이 유대인에게 뿐 아니라,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된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함을 말씀하고 있다. 


  6-9절을 정리하면, 이방인도 유대인과 같이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유대인과 함께 누릴 백성임을 말한다.  바울은 계속해서 믿음으로 의를 얻은 자들이 같은 백성(아브라함의 자손)이며 같은 복을 누리게 됨을 강조한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해설] 바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했는지는 잘 모른다고 하지라도, 큰 맥락에서 의미는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 중 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을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따라서 율법의 행위를 통해 의를 이루기 원하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 저주 아래에 놓인 존재라는 것이다.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 


  [해설] 10,11절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결론적으로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의인은 율법으로 말미암음이 아니고(말미암을 수 없고), 믿음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믿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의 '믿음'이란, 믿는 행위라기 보다는 율법적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하나님의 의, 즉 은혜로서의 의를 말한다.)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은, 율법의 방법론(자기 의)과 믿음의 방법론(하나님의 의)이 서로 연관되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듯 하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에 율법이라는 것이 것이 작은 것 하나라도 끼어들어올 수 없음을 말한다 보인다. // 율법을 행하고자 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아야지..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 안으로 율법을 끌어들여 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 같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해설] 우리는 율법으로는(율법의 방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하는 것으로는) 저주에 이를 수 밖에 없는 자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나무에 달려 저주를 당하심으로 우리를 속량하셨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서 행하신 일인데(또 우리가 믿는 바인데), 왜 이렇게 행하셨는가 하면 


  1. 사람들을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했다.

  2.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려 한 것이고(십자가 사건이 6-9절의 내용에 근거 제공)

  3.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의 저주 아래 있던 자들을 저주에서 속량하고,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도 미치게 했다. 그리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셨다. 



[오늘 본문 정리]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인정받는 자는 이방인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다. 

2. 따라서 이방인도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복을 얻을 자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서, 율법을 의지하는 모든 자를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4.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다시 율법이 아니라)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에 미치고,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하신다.  



[묵상]


기독교 초기 이방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장애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복이 유대인에게 한해서 인가 아니면 이방인에게도 흘러가는 복이었던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여전히 구약적 선민의식과 맞물려 유대인에게만 제한된 것으로 믿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초기에는 예루살렘 교회를 중심으로 교회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그와 같은 견해에 문제제기를 하는 사람들은 없었을 것이다.(이미 이들은 '할례'를 받았고, 유대인으로서 율법의 절기를 지키는 것이 <의롭게 되기 위해> 뭔가 추가되는 어떤 요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인의 테두리를 넘어 이방인으로 흘러가고 그들이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의 복음 가운데 나아올 때 그 때 문제는 불거지게 된 것이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해하는 바울의 입장에서는 본래적 복음(유대인들에게는 당연하게 여겨졌던 할례와 절기와 같은 의식적 요구가 빠진)만 전하면 될 문제였다. 그러나 유대인으로 태어나 유대인으로 살다가 유대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유대 사도들의 입장에서는 (혹은 당시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입장에서는) 순수한 복음의 내용과 기존의 문화와 가치관이 함께 섞여 있었던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것을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복음이 이방인에게 넘어가면서 순수한 복음과 문화/가치관이 분리될 수 있게 된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 안에 할례와 절기를 지키는 것까지 같이 들어와야 하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도 바울과 유대인 사도들(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었던 것같다. 그런 문제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성경이 바로 갈라디아서가 아닌가 싶다. 이방인들에게 순수한 복음을 전한 바울, 그 이후 유대 문화와 가치관이 섞인 복음(다른 복음: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해롭지 않았지만, 이방인들에게는 복음을 왜곡하는 결과를 낳게되는 치명적 해로움이 된 복음 )이 들어오자 갈라디아 교회는 큰 병을 앓고 말았다. 이를 고치기 위해서 바울은 유대의 사도들(혹은 그리스도인들)과 복음의 순수한 내용을 가지고 싸우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그 덕분에 순수한 복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볼 수 있는 은혜를 얻게 된 것이다. 갈라디아서를 통해서 말이다 .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1872년 6월, 테일러는 매년 열리는 마일드메이 집회에서 D.L.무디와 함께 단상에 서게 되었다. 회중은 서서 힘차게 찬양을 불렀다. ‘불어라, 바람아! 그분의 이야기가 바람에 날려 전해지도록.’ 


그러고는 중국 내지 선교회의 창시자가 하는 말을 들으려고 자리에 앉았다. 허드슨 테일러는 장난기 어린 눈을 빛내면서 일어섰다. 그러면서 아주 중요한 점을 지적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바람은 결코 복음을 전해주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복된 사랑 이야기가 세상의 어두운 곳에 전해지기 위해서는 위대한 선교 명령에 순종하려는 우리 같은 사람들이 그것을 들고 가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따르는 길, OMF, 51쪽)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

성경의 말씀은 종이 책의 형태로 2500년 이상 전달되어 왔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아니라 그 말씀이다.

역사상 가장 많이 시청한 필름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도 <스타워즈>도 <타이타닉>도 아니었다. 그것은 바로 <예수> 영화였다. 이 영화의 영어 번역문은 GNB에서 따온 것이다.

이는 대학생 선교단체인 CCC의 창립자 빌 브라이트가 프로듀서이자 연예계 기업가인 존 헤이맨을 만나서 서로 손을 잡고 누가복음을 영화로 제작한 것이었다.(본래는 성경 전체를 활동사진으로 만드는 계획의 일환이었다). 500명의 학자들이 역사적인 정확성을 기하기 위해 참여했고, 이스라엘에서 이루어진 촬영도 꼼꼼하게 진행되었다. 1979년에 상영된 이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고 말았고, 성경의 나머지 부분을 영화로 만드는 것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1980년에 CCC의 한 부서인 <예수> 영화 프로젝트가 그것을 다른 언어들로 번역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천 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는데, 그 중에는 카라칼팍어(우즈베키스탄), 파르시어(이란), 쇼나어(짐바브웨), 다니어(인도네시아), 쉬피보-코니보어(페루)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 영화는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정도인 수십 억의 사람들이 시청한 바 있고, "남녀노소를 다 합하여 예수를 따르기로 결단한 사람이 모두 2억 2,500만도 넘는다"고 한다.

....(일화중에 하나)

한 선교사 부부가 페루의 어떤 마을에서 그 영화를 보여주려고 가던 도중에 테러리스트들에게 가로막혀 영사기와 필름을 빼앗겼다. 나중에 이들 중 한 명이 그 부부를 찾아서 말해주기를, 테러리스트들이 무척 지루해 그 필름을 일곱 차례나 본 뒤에 그 자신을 비롯한 몇 명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 영화야 말로 역사상 가장 널리 유통된 성경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p215,216.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