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복음적 삶’이다.

글: 김수억 대표


신약 성경에는 빌레몬서가 있다. 사실 있다지만 ‘없는 듯’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바울 서신 중 가장 적은 분량인 한 장이라 우연히라도 보기 힘든 책이기 때문이다. 종종 설교 본문이 빌레몬서일 경우 색인의 도움으로 찾을라치면, 영락없이 ‘빌레몬서’가 아닌 ‘빌립보서’가 나오고 만다. 빌레몬서의 약자가 ‘빌’이 아니라 ‘몬’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알게 되지만, 그도 이내 잊는다. 빌레몬서는 성경에서 ‘오래된 단역 배우’처럼 그 존재감이 약하다.

빌레몬서는 내용면에서도 그렇다. 보통 신약 성경의 다른 책들은 예수님의 생애나 교회의 확장, 더 나아가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이 가지는 복음의 의미를 해석하는 등 교회를 위한 중요한 주제들을 주로 다룬다. 그러나 빌레몬서는 다르다. 지극히 개인적인 태도 속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의 문제를 다룰 뿐이다. ‘바울이 빌레몬을 향해서 오네시모라는 종을 용납하고 받아들여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 빌레몬서의 내용이다. 매우 개별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상적인 내용인지라 빌레몬서가 ‘정경’으로 인정된 것이 어색할 정도다.


그러나 빌레몬서를 찬찬히 읽다 보면, 빌레몬서의 ‘내공’을 발견할 수 있다. 빌레몬에게 오네시모의 잘못을 용납하고 받아들이라는 바울의 권면 속에는 ‘대속’, ‘회복’, ‘환대’라는 굵직한 복음적 메시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보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불의를 행해 빚진 것이 있다면 그 잘못에 대한 대가를 바울 자신이 대신 갚겠다는 것(18절, 대속)에 있어서나 오네시모를 마지못해 받아 주는 척 하지 말고 잘 받아 달라고 요청한 점(17절, 환대) 그리고 오네시모는 종에 불과한 존재였지만, 이제 주님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 영접해 달라(16절, 회복)는 면에 있어서 그렇다. ‘대속’, ‘회복’, ‘환대’라는 복음의 진리가 바울의 개인적 태도를 다룬 빌레몬서에 완연하게 묻어나고 있음에 새삼 놀라게 된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오히려 빌레몬서의 위대함을 발견하게 된다.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바울의 복음적 삶이 온 우주의 복음적 진리와 맞닿아 있음을 깨닫기 때문이다. 나무에서 떨어진 사과라는 지극히 개별적 현상이 온 우주의 원리인 만유인력의 법칙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복음이 어떻게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되고 확대되었는가? 개별적 삶을 통해서 전해진 것이라 볼 수 있다. 예수의 복음적 삶은 바울에게 복음을 심어 주었고, 바울의 복음적 태도는 빌레몬에게 복음을 각인시켰던 것이다. 훗날 오네시모가 에베소 교회의 감독에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것을 안다면 빌레몬의 복음적 삶은 오네시모에게서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렇게 복음은 성도 개인의 복음적 삶을 모태 삼아 확장되었고, 교회는 종이라는 신분에 대한 편견을 극복해 갔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문제는 무엇인가? 제도 혹은 교리의 문제인가? 아니면 도덕과 윤리의 문제인가? 이런 것들은 세상에 합리성과 명분을 줄 수는 있을지언정 감동을 일으킬 수는 없다. 그렇다면 거대 담론이 배제된 개인화된 신앙이 문제인가? 앞에서 살펴본 관점으로 빌레몬서를 본다면 그것도 아니다. 바울의 개인적인 태도 속에 ‘우주적 복음’이 녹아 있고 그것이 전 우주에 영향을 미치듯 문제의 핵심은 개인의 영역에서 일어나는 복음적 삶에 있음을 알게 된다. 마치 룻과 보아스의 개인적 사랑과 신의 속에서 ‘다윗’이 나오고 ‘이스라엘 왕국’이 형성되며, ‘예수’와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듯이 말이다. 문제는 개별적 성도들의 ‘복음적 삶’이다.

반응형
블로그 이미지

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