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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하기]

21절.    그들이 가버나움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시매

22절.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가 가르치는 것이 권위 있는 자와 같고 /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23절.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24절.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25절.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26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27절.     다 놀라 서로 물어 이르되 이는 어찜이냐 / 권위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에게게 명한즉 순종하는도다 하더라

28절.     예수의 소문이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더라


[성경내용 정리하기]

1. 마가복음은 여전히 사건 전개가 급하게 진행되는 형식으로 전한다. ‘곧’ 안식일이 되었고(21절)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28절) 

2. 안식일 회당에서 사람들은 두 가지 놀라운 일을 경험하게 된다. 첫째는 그의 가르침에 대한 것이었다.(22절) 예수의 가르침은 권위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않았다. 형식적이거나 뻔한 내용의 반복이 아니었다. 그 가르침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거부하거나 부정할 수 없는 무게감이 있었다.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깊은 울림이 있는 말씀으로 생명력이 느껴지는 가르침이었다. 전혀 다른 차원의 가르침이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두번째는 그의 권세있는 말씀(귀신에게 명한즉 귀신도 순종하게 되는)이었다.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단순히 깊은 통찰이나 깨우침을 주는 정도가 아니라 ‘권위’(말을 하면 그 말대로 되는. 심지어 귀신조차도)있는 새 교훈인 것이다.(27절)

3.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한 가르침과 귀신을 내쫓는 말씀은 곧 온 갈릴리 사방에 퍼지게 되었다. 어둠은 빛을 감출수 없듯이, 사람들을 놀라게 한 가르침과 권위는 순식간에 온 갈릴리로 퍼져나가게 된 것이다. 


[질문하기]

1.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시작된 일을 정리해 보자.

제일 처음 하신 것은 갈릴리에서 제자를 부르신 것이었다.(부름받은 제자들은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쫓았다.) 그 이후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셔서 가르치셨다. 권위있는 말씀(귀신을 쫓아내심)을 행하셨다. 이 두 가지는 모두 공동점이 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면 그에 대한 반응(순종)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 주님의 사람(백성. 12명의 제자)이 부르심에 순종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에 놀라고, 심지어 귀신조차도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게 되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2. 예수님이 말씀으로 귀신에게 명한즉 귀신이 나가게 된 사건의 의미는 무엇인가? 

귀신을 내쫓는 사건은 단순한 치유사역과 구별된다. 귀신을 내쫓았다고 말하지 않고 귀신에게 명한즉 순종했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 귀신 조차도 순종할 수 밖에 없는 ‘권위’를 강조하는 것이라 하겠다. 모든 사람이 순종하고, 심지어 하나님의 대적자, 인간의 대적자인 귀신까지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는 순종할 수 밖에 없음을 보여준다. 예수님의 권위가 어디에까지 미치는지 보여주는 장면이라 하겠다. 


[묵상하기]

1.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셨다.(14절) 그리고 첫 사역은 향후 12사도가 될 제자를 부르신 것이었고, 가르침(율법과 대비되는)을 주셨고, 권위있는 일(귀신에게 명하고 귀신이 순종하는)을 하셨다. 이 일은 즉각적으로 이루어졌다(말씀하시면 바로 순종하는 방식으로) 그리고 이 일은 신속하게 확장되었다.(말씀에 권세가 있다는 것과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은 소문으로 갈릴리 사방에 퍼져나갔다.)

공생애를 시작하자 거침없이, 신속하게 예수님의 영역이 확장되고 실현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가복음은 1장은 진행된다. 사람들의 불순종과 무지 그리고 귀신들의 방해로 지금까지 실현되지 못해왔던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 그리스도의 등장과 함께 불순종에서 순종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귀신들의 방해에서 귀신들을 내쫓음으로 전환되었음을 마가복음 1장은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2. 한 나라의 정권이 바뀌기 전에는 많은 노력이 열매를 거둘 수 없지만, 정권이 바뀌고 나면 그 동안 쌓여왔던 적폐들을 해결하고 새로운 질서를 시작할 수 있는 것처럼 예수님은 이전의 권세를 대체하고 새로운 왕으로 이 땅에 오셨으며 그동안 결실을 맺지 못했던 것들을 하나씩 하나씩 실행해 나가시는 것이다. 그 시작을 보여주시는 장면이라 하겠다. 아직 모든 영역에 그 질서를 실현한 것은 아니지만, 시작되었고 완성될 것을 보여준다. 

3. 우리는 지금 그 시작을 과거에 두고 있고, 그 완성을 미래에 두고 있다. 그 시작을 믿는 자는 완성을 확신해야 하며 그 완성을 믿기에 오늘을 흔들림없이(흔들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를 믿지 못하는 자가 미래를 논할 수 없다. 과거의 시작을 믿지 못하는 미래의 완성을 확신할 수 없고 당연히 오늘의 믿음이라는 것도 시련과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것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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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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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하박국 1:1-9 소통되는 하나님의 권위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하박국은 하박국 선지자가 받은 경고의 계시를 말한다. 계시의 형식은 하박국의 질문과 하나님의 답변 형식으로 진행된다. 하박국은 그렇게 도와달라고 기도했는데 왜 들어주시지 않는지, 왜 악과 불의가 일어나고 있는데 하나님은 가만히 계시는지 묻는다. 하나님의 답변이 이어지지만 하박국의 질문에 대한 직접적인 대답은 아니다. 


절별 해설

1:2 <<언제까지 들어 주지 않으시렵니까?>> 하박국이 하나님께 호소하는 첫 번째 내용이다. 그토록 도와 달라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음에도 오랫동안 묵묵부답이신 하나님에게 따지듯이 항변하고 있는 것이며, 선지자의 마음은 하나님에 대한 답답함으로 가득하다.               


1:3,4 <<어찌하여 악을 그대로 내버려 두십니까?>> 악한 자가 활개를 치고 불의와 폭력이 난무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왜 이와 같은 악에 대해새 아무런 심판을 행하지 않는가에 대한 항변이다. 이런 이유로 하박국은 욥과 함께 성경에서 <신정론> 문제를 제기한 본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1:5 <<내가 놀라운 일을 하겠다>> 하나님게서 하박국에게 말하는 놀라운 일이란, 유다를 구원하기 위한 놀라운 일을 말함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 악인들에 의해 멸망을 당하게 되는 놀라운 일을 말함이다.


1:6 <<내가 바벨로니아 사람을 시켜>> 당시 바벨로니아는 앗시리아의 니느웨를 멸망시키고, 갈그미스에서 애굽이 주도하는 연합군을 대파함으로 신바벨로니아 제국을 건설하는 강대국이다. 하나님은 장차 바벨로니아 제국을 하나님의 뜻을 실행하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1:9 <<그들은 모두 싸우러 온다>> 바벨로니아가 전쟁을 할 때, 전력을 다하여 싸운다는 것을 말한다. 바벨로니아는 잔인하며(7절) 날쌔고 사납다.(8절) 그 군대는 빠르게 행군하여서 적을 무찌르며 많은 포로를 잡아가는 전쟁에 강한 민족이다. 


기도

하나님, 하박국이 하나님을 향해 외쳤던 항변이 저의 항변이기도 합니다. 불의하며 악한 세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의 답답함이기도 합니다. 하박국 묵상을 통해 마음의 답을 얻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하박국은 우리가 보기에 하나님께 무례한 질문을 던진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지에 대해서 따진다. 특히, 악과 불의 폭력이 횡행하는데 왜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으시는가 힐난하는 듯 하기도 하다. 선지자가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것은 경건한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낯설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들의 답답함에서 나오는 울분과 억울함의 항변을 막으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 선지자의 입을 막지 않으셨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기록으로 남겨 오늘날 우리들에게까지 읽도록 하셨다. 그런 측면에서 성경의 하나님은 권위있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그 백성들의 목소리를 소중히 여기시는 분임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권위는 우리의 억울함에 대한 호소를 품어 안으시는 권위임을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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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 정리]



[오늘의 내용]


1. 이성은 감각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왜 감각될 수 밖에 없었는지 설명을 요구한다.

  1) 이성이 중심이된 사고는 그것을 인간이 경험하는 영역의 내용으로 설명하려는 경향성을 가진다.(설명주장)

  2) 그런데 성경은 보통 설명보다도 복종을 요구한다.(계시_권위를 주장)

   : 그래서 각 특성상 이성과 계시는 충돌할 수 밖에 없다. 이성은 설명을 통해 이해를 시켜주길 원하고, 계시는 권위로 순종할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2. 오늘의 주제는 그런 측면에서 권위에 대해서 살펴보려고 한다. 


  1) 우리의 일반적 개념: 권위 <-> 자유 /  자유의지 <-> 하나님의 절대주권

    : 자유란 구속과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라는 개념으로 형성됨.(권위에 대한 나쁜 경험때문임)

  2) 그러나 긍정적인 권위가 있다. 

   (1) 부모가 어린 자녀들에게 권위를 가지고 말한다.(주사를 맞음, 학교에 가야함..)

   (2) 어떤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결정권을 갖는 힘이다. 

  3)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란(소극적인 자유)

   (1) 소극적 개념의 자유, 즉 무엇을 할 수 있는 자유가 아니 무엇을 하지 않아도 되는 자유이다. 

   (2) 소극적 개념의 자유는 결국 어떤 권위라는 개념이 없으면, 존재할 수 없는 개념이 되고 만다. 

   (3) 독재를 깨고 자유를 누리자고 했는데, 독재를 깨고나면 자유도 함께 없어지는 꼴이 되고 만다. 

      예) 수업하지 말고 놀아요~ 그래 그러자 그러면 심심해요.(소극적 거부만 있는 것)

   (4) 이런 소극적인 자유(권위를 거부하는)는 우리 인간의 죄성에서 나온 것(권위자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이다. 


  4) 적극적인 의미에서 권위란 무엇인가? 

권위란 권위를 행사하는 쪽의 힘에 의해서 권위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에 자꾸 독재성으로 가게 된다. 그러나 권위란 그 권위가 갖는 진리 됨과 힘이, 그것을 요구받아 순종해야 되는 대상의 만족에 의해서만 성립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권위란 자신을 힘으로 증명하는 것이 아니라 내용 자체로 자신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권위이다. 

   (1) 그러나 권위는 상대방에게 설명이 되지 않으니, 상대방은 그것을 독재라고 느끼게 된다.

   (2) 하나님이 계신가 안계신가?를 증명할 수 없다. 그렇다고 투표로 할 수도 없다. 다만 있다고 확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날 죽이려면 죽여라. 있는 건 있는 거다'라고 우길 수 밖에 없는 것이다. 

   (3) 기독교가 편협하다고 듣는다. 왜냐하면 한 끝차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중재안을 거절하면 편협하다함)


  5) 권위에 대한 반발이 정당한가?

  우리는 보통 권위에 대한 반발이 정당한 정신 위에서 시행된 것이 아니라 권위 자체에 대한 반발을 위해 인간의 죄성과 유치한 기분파적인 반발에 불과할 때가 많다. 그것을 어떻게 확인했는가 하면, 자유를 기껏 권위를 반대하기 위해서만 사용했다.(권위의 부정에 온 힘을 다 기울임)


  6) 자유는 무엇으로부터의 자유(free from)만이 아니라 무엇을 위한 자유(free for)가 있어야 한다. 이것이 정당한 자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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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루이스는 새로운 생명이 우리에게 어떻게 올 수 있는지에 대해서 말한다. 믿음, 세례, 성만찬. 대표적인 세 가지 통로를 말하면서, 새로운 생명이 어떻게 유지되고 어떻게 확장되어지는지에 대해서도 말한다. 신학적으로 말하면 구원론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간결하고 담백하게 설명하다니...새롭고 놀랍다. 그리고 새 생명으로 초대까지 한다.


2-5 실제적인 결론.


1. 예수의 사역을 통해서 우리 안에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나타났고, 이 새로운 생명은 우리 안에도 들어올 수 있다.


2. 그렇다면 이 일이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평평한 옛 생명을 어떻게 얻게 되었는지 연상해보자)

  1) 새로운 생명은 우리와 상의하지 않고 진행되었고, 상당히 기이한 방식으로 진행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우리에게 전파되는 방식 3가지>

   (1) 세례

   (2) 믿음

   (3) 신비한 행위(성만찬, 미사, 주의 만찬 등 다양한 이름을 불리우는 것들)


   * 루이스는 이 방식 말고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전파될 수 없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통상적인 방법이라는 것이다. 누군가에게 제기동에서 송내까지 어떻게 가냐고 물으면 저는 전철을 타라고 말해줄 것이다. 물론 버스로도 자건거로도 다른 방식으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게 다 말하지는 않듯이 나도 이정도만 말한다. 신학적인 성향에 따라서 어떤 사람은 믿음을 더 강조하길 원할 수도 있겠으나 기독교 교리를 가르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세가지를 다 말할 것이기에 이 세가지만 말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 분명한 것은 예수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새 생명이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달된다고 가르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니만큼 명백한 일이라 할 수 있다. 루이스는 그렇게 말한 예수의 권위에 입각하여 그렇게 말한다고 한다. 



   * 권위에 입각하여 어떤 것을 믿는 다는 것은 믿을 만한 사람의 말이므로 믿는다는 뜻이다. 우리는 대부분의 것을 그런 권위에 입각하여 믿게 됩니다.(뉴욕을 가본적은 없지만,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 믿게 됨, 노르만 정복 사건을 직접 본 사람은 없겠지만 역사적 증언을 통해서 우리는 믿게 됨, 이런 믿음을 부정하는 사람은 평생 믿을 것이 없게 됨)



3.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유지되는가?


   * 그렇다고 해서 세례와 믿음과 성만찬만 있으면 그리스도를 본받으려는 노력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잘못이다. 우리의 자연적인 생명이 부모로부터 온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노력없이 유지되는 것은 아니다. 그 생명을 소홀히 다루다가 영영 잃어버릴 수도 있고 자살함으로 의도적으로 없앨 수도 있다. 따라서 생명을 유지하려면 영양을 공급해 주어야 하며 잘 돌봐야 한다. 그러나 역시 이것은 생명을 만드는 일은 아니고, 생명을 돌보는 일이라는 한계도 인정해야한다. 


  1) 우리 몸에 자연적인 생명이 있는 한, 그 생명은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 많은 일을 한다. 

   (1) 상처를 입었을 경우는 어느 정도까지는 상처를 스스로 치유할 수 있다. 

   (2) 상처를 절대로 입지 않는 것이 아니라,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이 살아있다는 것의 증거다. 

   (3) 마찬가지로 우리가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회개하고 다시 일어나 몇 번이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매번 그를 회복시킨다)


  2) 그리스도인이 선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은 여타의 사람들과 구별된다. 

   (1) 여타의 사람들은 선하게 삶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만족시키거나(신이 있다고 믿는다면), 아니면 적어도 자신이 선한 사람들에게 인정받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2)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선한 행동은 모두 자기 안에 있는 그리스도의 생명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한다. 

       : 창 자체가 밝아서 햇빛을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햇빛이 먼저 창을 비추었기 때문에 밝아지는 것처럼...

       * 우리 안에 그리스도가 있고, 그리스도 안에 내가 있다는 것은 실제로 그리스도가 우리를 통해 움직인다는 뜻.


4. 새로운 생명은 어떻게 확대되어 가는가?

   믿음: 정신적인 행위를 통해서

   세례와 성만찬: 물리적인 행위를 통해서


  이 생명의 전파는 단순히 사상의 전파만이 아니다. 사상의 전파보다는 진화, 즉 생물학적 사실 내지는 초생물학적 사실에 더 가깝다. 인간은 원래 순전히 영적인 피조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그것이 떡이나 포도주 같은 물질을 사용해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는 이유다. (하나님은 물질적인 것을 통해서 생명을 불어 넣어주시고 확대하신다.) 


  [반론] 그리스도를 들어 볼  기회를 얻지 못한 자들에게는 이 생명 수여의 방법이 불공평한 것이 아닌가?

  (1) 하나님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어본 바가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우리에게 말씀하신 바가 없다. 우리는 다만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2) 여러분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의 운명이 걱정된다면, 여러분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이 되어 주변으로 불려나가야 할 것이다. 


  [반론] 왜 지금 당장 와서 세상의 악에 대해서 전복시키지 않는가?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때가 되면 대군을 이끌고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그 때가 언제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일을 지체하시는 이유는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자진해서 그의 편에 가담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다 이기고 나서, 혹은 패하고 나서 편을 옮기는 것이 무슨 상을 받을 수 있겠는가? 


그 때는 우리가 참으로 어느 편을 선택했는지 드러나는 때이고, 우리가 그 사실을 전에도 알았는지 몰랐는지 깨닫게 되는 때이다. 오늘 이 순간이야말로 옳은 편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의 때이다. 


우리는 지금 이 기회를 잡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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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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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학교 준비로 바쁜 시간을 보냈네요. 감사하게도 잘 마쳤습니다. 이제 또 청년 아웃리치가 남아 있긴 한데... 그래도 할건 해야겠지요?^^

오랫만에 하는 거라 먼저 지난 번 정리했던 내용들을 다시한번 살펴보고 흐름을 잡아 봅니다.

 

[정리1. 본문 내용 정리]

  5) 모든 악독과 모든 기만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라. 그리고 갓난 아이들 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그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다.(1,2)

   :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4. 너희가 세상 사람들에게는 버린바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너희도 예수와 같은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5절)

  1) 너희들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처럼 건축자들이 버린 모퉁이 돌에 불과하지만

  2) 하나님 앞에서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다. 하나님의 기이한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다.(9절)

5. 우리가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같은 인생이지만, 사람구체적인 영역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나?

  1)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11절)

   : 이방인들의 비방에 대해서 할 말이 없도록, 선을 행하라.(12절)

  2) 인간의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해 순종하라.

    (1) 왕이나 총독에게 순종하라. 이들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상하는 자들이다.

    (2) 이들의 말에 순종함으로(선을 행함으로) 어리석은 자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다.

  3) 너희가 가진 자유로 악이 아닌,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 뭇 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존대하라.

  4)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종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 뿐 아니라 까다로운 자에게도...

    (1) 선을 행했는데 억울하게 고난을 받는 것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아름답지만, 잘못이 있어 매를 맞으면 무슨 칭찬이 있겠는가?

    (2) 너희는 예수님처럼 죄를 범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억울하게 고난 당했을 때, 위협하지 않으시고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께 부탁하셨다.

    (3) 우리도 예수님의 그와 같은 삶을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된 것처럼, 너희들도 그와 같은 삶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2. 본문 내용 중 핵심 가치관과 구체적 행동요구 정리]

  [중심가치관]

성도는 이 땅에서는 나그네와 거류민과 같이 별로 중요하지 않는 존재처럼 대우받는다.(건축자들의 버린 돌처럼) 그러나 우리의 참된(하늘의) 정체성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는 버린 돌처럼 여기받았지만, 하나님께는 보배로운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진 것처럼 우리도 그와 같이 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행동할 것인가?]

  1.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비방받지 않도록 선을 행하라.

  2. 인간의 모든 제도를 순종하라.(왕이나 총독의 말에 순종)

  3. 자유로 하나님의 종처럼 행하라.

  4. 사환들은 주인을 공경하라.

   : 심지어 까다로운 자에게도.

   : 억울함에 대한 심판은 하나님께 맡기라.

  5. 우리의 이와 같은 삶으로 주변사람들을 구속할 수 있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성도는 이 땅에서 잉여인간으로 여겨진다.

이 땅에서 성도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 나그네와 거류민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불필요한 자, 쓰다남은 돌 정도로 밖에는 인식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요즘 말로 보면 잉여인간인 셈이다. 없어도 상관없는 자, 아니 있는 것이 오히려 이 땅에 피해를 주는 것 같은 자.... 이 땅에서의 성도의 정체성이다.

그런 우리를 향해서 베드로는 쓸모있는 인간이 되라고 권면하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 편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가를 확인시켜주고 있다. 왕같은 제사장이고 택하신 백성이라는 것이다. 신령한 집으로 세워가는 중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에 쓸모있는 인간이 되는 것 이전에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에게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자기 인식이 먼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 땅에서 어떤 존재로 인정받고 있느냐이기 이전에 우리의 흔들리지 않는 영적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먼저 되어야 한다.

2. 나그네에게 요구하시는 철저한 시민의식.

베드로는 나그네이면서 동시에 나그네처럼 천대 받는 사회 속에서 더 철저한 시민의식을 가지라고 언급한다. 3류 인간들과 같이 육체의 정욕대로가 아니라, 정욕을 다스리며 통제하는 인간으로 살라고 권면한다. 나라의 모든 제도에 대해서 순종하도록 하라고 요구한다. 왕이나 총독의 말에 순종하라. 사환으로 있는 성도들은 주인을 더 주인답게 섬기라고 말한다. 심지어 까다로운 주인까지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 맡기라고 말한다.

나그네와 같이 천대받는 사회에서 오히려 더욱 높은 수준의 시민의식을 가지고 살 때, 놀라운 일을 기대할 수 있다. 주님께서 적대적인 세상을 향해서 폭력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고난을 당하셨지만, 그로 인해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처럼, 우리의 주님을 닮은 삶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돌아오게 될 것을 기대하게 된다. 

 

3. 고지론에서 저지론(?)으로

한 사회 속에서 잉여인간이 된다는 것, 나그네가 된다는 것... 그것은 사회적으로 는 매우 불안정한 요소에 해당된다. 사회는 이들에게 관심을 가질 수 없고, 관심을 가져야 별 소득이 없는 집단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이 사회 속에 존재함으로 사회의 불안은 가중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데 이들이 더 높은 시민의식을 가지고 참된 시민 정신을 실천한다는 것은 자신을 잉여인간으로 만들어버린(쓸모없어 버린 돌처럼 여긴) 사회에 큰 충격을 줄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고지론은 높이 올라가서 낮은 곳으로 내려올 때 생기는 에너지를 통해서 세상을 바꾸자는 이야기이다. 그런데 오히려 성경은 낮은 곳에 있는 자들에게 높은 곳에사는 자를 능가하는 시민의식을 통해 그들을 놀라게 하고, 그것이 그들을 바꾸게 할 것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그렇다면 우리는 고지론이 아니라, 저지론으로 가야 할 것이고 이것이 성경적인 방법일게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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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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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도서 3장은 두 부류의 권위자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다.(2:15을 포함해서) 첫째는 그레데에 있는 교회를 목회하고 있는 디도의 권위에 대해서, 다른 하나는 당시 정치권력의 통치자에 대해서 권면한다. 요즘처럼 민주주의적 사고가 편재하고, 탈 권위적인 사회 속에서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권면같지만, 시대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메시지가 있다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본다.

1. 목회자의 권위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2:15)

목회자가 권위로 권면과 책망을 해야 한다는 것과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는 말이다. 우선 이 말이 목회자의 권위주의를 인정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알것이다. 권위주의란 자기 스스로가 권위의 근거가 되어 언제든지, 누구든지, 어떤 일에 대해서건 권위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권위는 권면과 책망의 내용에 대한 권위를 말하는 것이다. 목회자가 권면하고 책망하는 근거가 권위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을 때, 그 권위가 흔들리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다. 또한 그것을 시행하는 목회자는 평소에 권위있는 내용이 가벼운 것이 되지 않도록 품위를 잃지 않아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포장보다 내용이 중요하긴 하지만 내용에 맞는 포장이 있어야 한다. 특별히 하나님의 말씀이 권위있게 교회와 세상 가운데 들려지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하고 보여주는 목회자와 성도(교회)가 걸맞는 포장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가톨릭의 권위, 불교의 권위는 사제와 승들의 자기 희생적 삶의 태도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는 목회자와 교회의 삶에 모습으로 업신여김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목회자와 성도는 품위있는 겉모습을 가져야 한다. 정직하고, 공중도덕을 잘 지키며 자신의 꾸밈에 있어서도 품위를 잃지 말아야 한다. 편하다고 다 허용되는 것은 아니다.

 

2. 통치자의 권위

  통치자들에게 대해서 다른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듯이, 복종하고 순종하며 선한 일을 하기에 준비하게 하라고 권면한다. 국가의 권력이라는 것이 악을 지양하고 선을 격려하는 것이 기본일찐데 우리는 마땅히 그 권위 아래에서 순종하고 복종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멀리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권위를 잃게 만드는 것은 공직자들(권세자들)의 부정과 부패다. 권위는 인정하되 그들의 부정과 부패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책임을 묻고, 밝혀 낼 수 있는 구조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 방치된다면 국가의 권위라도 정당한 힘을 잃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 권력의 권위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공직자들의 부정과 부패는 반드시 감시되고, 처벌되어야 하는 구조를 가져야 한다.

 

교회든 국가든 권위가 중요하다. 하나님의 말씀으로서의 권위가 잃어지지 않도록 목회자와 성도는 품행을 단정하게 해야 할 것이다. 성도다운 높은 수준의 삶을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국가는 공직자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도록 권력을 가지고 사적 이득을 취하려고 하는 부정과 부패를 척결해야 한다. 그래야 공직자의 권위가 살고, 그들이 권위를 주장하여 선을 격려하고 악을 제지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한가지 더 있다. 어떤 일을 결정하는 절차가 옳아야 한다. 절차가 합법적이지 못하면 그 권위의 기반이 약해지는 것은 당연하다. 민주적이다, 비민주적이다라는 것은 그런 절차의 합법성을 말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통진당의 행태를 보면서 만약 당권파가 다시 당 권력을 장악한다고 한들 거기에 무슨 권위가 실리겠는가 생각한다. 만에 하나 그들이 다시 당을 장악한다고 하더라고 그 당은 금세 무너질것이고 지리멸멸해 질 것이 분명하다. 스스로의 권위를 헐어버렸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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