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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by Samuel Martins on Unsplash

[성경본문 정리]

35절.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36절. 시몬과 및 그와 함께 있는 자들이 예수의 뒤를 따라가

37절. 만나서 이르되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38절.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39절. 이에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그들의 여러 회당에서 전도하시고

귀신들을 내쫓으시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한적한 시간에(새벽 미명)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려고 했던 것과 그에 반해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매우 많았음을 대조해서 보여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필요로했기 때문에 예수님은 심지어 새벽 이른 아침 시간조차 홀로 기도하실 수 없었음을 보여준다. 

2. 예수님은 자신을 찾아오는 사람들에게가 아니라,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신다. 거기서 전도하셔야 함을 피력했고 그 일을 위해 오셨음을 분명히 했다. 그렇게 예수님은 바쁘게 온 갈릴리에 다니셨고, 여러 회당에서 전도 하셨다. 그리고 귀신들을 내쫓으셨다. 


[질문하기]

1. 본문은 예수님이 '새벽에 기도'하셨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인가? 

분명히 예수님께서 새벽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기록을 하고 있는 것을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조차도 하나님과 지속적인 소통(기도)이 필요했음은 분명하다. 실제로 예수님은 바쁜 일상속에서도 한적한 시간과 한적한 장소를 찾아 기도하러 가셨다는 것은 강조될만 하다. 

그러나 35절의 이야기가 37절까지 이어지는 내용이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당연히 홀로 있어야 하는 시간, 홀로 있기 위해 한적한 곳을 찾아간 예수님이 따로 충분한 시간을 가질 수 없을만큼 '찾아오는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만큼 예수님은 당시 사람들에게 간절한 필요의 대상이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2. 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37절)라는 말씀을 듣고 그들에게 가지 아니하시고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고 하신 것일까?(38절)

만약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세력을 구축하고 인기를 높이려고 생각하셨다면, 찾아오는 무리에게 가셔서 다시 한 번 능력을 보여주시든지 그들의 필요에 응해 주었다면 더욱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세력을 만들려고 하지 않으셨다. 다만 빨리 인근 모든 지역에 '전도'하기를 원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은 복음의 시작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왔음을 알리시고, 기다리던 새 나라가 이제 시작되었음을 '말씀'과 '실력'(귀신을 쫓아내심)을 보여주셨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능력을 보고(귀신들이 쫓겨감) 새 나라가 시작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묵상하기]

1. 예수님도 새벽 미명에 한적한 곳으로 가셔서 기도하셨다는 것은 성도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간적접으로 말씀하시는 요청이란 생각을 한다.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은 한적한 시간과 한적한 곳을 찾아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인정(사랑하는 자요 기뻐하는 자다)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사역을 진행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서 한적한 곳을 찾아가셨다. 그렇게 노력을 해도 한적한 시간을 확보하기가 쉽지 않다. 예수님을 찾는 사람들이 많아서 였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너무 일이 많아서일수도 있다. 물론 게을러서 일수도 있다. 그러나 주님 앞에서는 어떤 것도 변명이 되지 못한다. 예수님도 그렇게 하셔야 했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자리를 견고하게 붙잡지 못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예수님은 능력과 권세가 있음에도 명성을 얻거나, 세력을 확장하려고 하지 않으셨다. 찾아오는 사람을 향해 가지 않으시고 다른 마을로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전도하셨다. 예수님은 자신과 함께 시작된 복음(하나님의 나라 소식)을 급하게 알리실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 인간의 나라에서 고통받는 자들에게 위로와 기쁨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땅의 나라 외에 다른 나라가 예비되었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함이다. 목회자와 달리 선교사란 바로 이런 사명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예수님은 선교사이시다. 그러나 지금의 선교사와 다른 것은 지금의 선교사는 '복음의 내용'을 증거할 수 있지만, 예수님은 '전도'와 더불어 그 실제의 확증(병고침과 귀신을 내쫓음)을 함께 보여주신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셨다고 해서 우리가 모두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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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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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9-27 >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정리하기) 말하는 것, 특히 성내는 것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질문하기) 말하는 것, 성내는 것과 관련된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교회 안에서 말이 앞서고 논쟁하는 중에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고 감으로 교회에 덕이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하고, 감정적인 부분을 잘 콘트롤하길 바랬던 것 같다. 야고보는 감정적인 폭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격한 감정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묵상하기) 야고보의 권면은 꼭 기독교의 독특한 권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많이 하기 보다 듣기를 권하고,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차분한 대화를 지혜롭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든지 과도한 화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행동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2. (권면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불경건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을 따르라' 라고 권면해도 될텐데, 그 앞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는 권면을 넣은 것은 이 두가지 권면이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쫓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묵상하기) 신앙 생활은 크게 두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더러운 것과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인듯 하지만 '말씀'을 온유함으로 따를 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권면을 '말씀'에 온유함으로 따르라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면2-1)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설명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23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음(24절)


(정리하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다. 

(질문하기)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는 왜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 것일까? 

(묵상하기) 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비유의 핵심은 '곧 잊는다는 것'(24절)에 있다. 즉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을 때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를 수정해야하며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안다.(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혹은 성장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했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다르다. 깨닫고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지적을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지 않으면서도 나도 나를 안다고 말함으로써 추가적인 권면이 효과가 없게 된다. 마치 항생제를 많이 써서 더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가 장기화될때 염증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설명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정리하기) 제대로된 성도는 율법을 보고 잊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질문하기) 왜 논의가 '말씀'에서 '율법'으로 전환되었는가? 전화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화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율법은 칭의와 관련된 설명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설명했다.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묵상하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오해를 푼다. 하나는 율법은 억압하고 성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고보를 만나 '율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받아왔던 오해(?)를 풀고 제 자리를 분명하게 잡게 된다.

(설명3-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설명3-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리하기) 경건하다고 말하려면 '자기 혀'(말,성내는 것)를 다스려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경건을 논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기) 26절의 '경건'은 말(혀)와 관련이 있다. 27절의 '경건'은 '약자의 돌아봄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심플하다. 그래서 '경건'은 '말'을 조심하고, '약자를 환난중에 돌보고',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하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혀)를 중심 논지로 본다면 26절은 고아와 과부(약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보조적으로)

(묵상하기) 우리가 생각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성품은 온화하고 교회의 여러가지 일로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야고보서는 경건의 첫 요소를 '말'(혀)에 두었다. 말은 '가치관'과 '생각'의 표현인데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담겨져있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약자에 대해서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냐가 그 사람의 경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 의 말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녹아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경건을 파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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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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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식에 대해서 1]


탐식: 꽉 찬 배와 텅 빈 영혼


탐식을 죄로 규정하고 경계해 온 중세 교회의 전통은 4-5세기 수도원 운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 수도사들은 생활에 필요한 최소한의 분량만 먹어야 했고, 그만큼 음식에 대한 유혹이 키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마른 빵을 물에 적셔 부풀려 먹고 채식을 해야 했던 수도사들은 풍족한 음식과 이전에 먹던 고기에 대한 생각으로 종종 괴로워했다. 


에바그리우스는 마귀가 '여덟 가지 악한 생각'으로 수도사들을 유혹하는데 그 첫 번째가 식탐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대죄들 중에서 탐식이 가장 낮은 수준의 마귀로 말미암은 것이지만 극복하기는 가장 힘든 죄라고 보았다. 왜냐하면 이 문제는 인간 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욕구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160쪽)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다섯 유형으로 좀더 세분화했다. 


1. 급하게 먹는 속식: 마치 음식이 곧 없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허겁지겁 재빨리 먹는 것. 이것의 문제는 단지 빠르게 먹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대하면서 감사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고 음미할 겨를도 없이 먹으면서 감사를 잃어 버린다. 탐식자는 먹는 일 자체에 골몰할 뿐 감사가 없다. 


2. 게걸스럽게 먹는 탐식: 음식에 대한 욕심과 집착으로 맹렬하게 먹는 것을 뜻한다. 마치 며칠 굶은 사람처럼 입안 가득 음식을 넣고, 얼굴을 음식에 바짝 붙여서 다른 사람이 먹기 전에 먼저 먹으려는 욕심으로 맹렬히 먹는 것이다. 이런 식사는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사라진 것이다. 


3. 지나치게 많이 먹는 과식: 배가 부르지만 수저를 놓지 못하는 것이다. 한계 그 이상으로 음식을 집어 넣는 것이다. 동물은 배가 부르면 음식에 더 미련을 두지 않지만, 인간은 배가 불러도 맛있는 것이 있으면 더 먹고 싶어한다. 


4. 까다롭게 먹는 미식: 이는 조금을 먹더라도 까다롭게 먹는 것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사람들을 곤혼스럽게 한다. 이들은 자신이 많이 먹지도, 비싼 음식을 원하지도 않고 그저 소박하게 먹는다고 생각하며 '이 간단한 것 좀 제대로 해주면 안 되나?'하고 생각한다. 


C.S.루이스의 '스크루테이프의 편지'에 등장하는 삼촌 악마는 조카 악마에게 식사량이 줄어든 사람에게는 전략을 바꾸어 입맛을 까다롭게 만들어 주라고 조언한다. '제가 원하는 건 잘 우려낸 홍차 한 잔이에요. 엷게 타 주시면 좋겠는데, 그렇다고 너무 연하게는 말고요. 그리고 바삭바삭한 토스트 한 조각만 곁들여 주시구요..'


5. 사치스럽게 먹는 호식: 음식 자체도 고급스럽고 질이 좋을 뿐 아니라 세련된 분위기 우아한 식탁과 같은 여러 조건을 갖추 식사를 바라고 고집하는 것.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신원한), 162-164쪽.


[개인생각]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된 것이지만, 중간적인 균형을 잃어버린 채 과도한 욕심으로 달려가는 것이 탐식인듯 하다. 죄라고 보기 보다는 미련하게 행동했다는 것으로 무마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급하고 게걸스럽고 지나치게 많이 먹는 식사는 우리가 물질적으로 가난할 때 일어나는 현상일 것이다. 그러나 까다롭게 먹고, 사치스럽게 먹는 것은 물질적으로 부유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다. 지난친 가난은 탐식으로 몰고간다. 지나친 부 역식 탐식으로 몰고간다. 


[탐식에 대하여 2]


에바그리우스 역시 탐식은 '정욕의 어머니'라고 말했다. 탐식에 빠지면 지성이 흐려지고 욕적이 고조되어 행동이 난잡해진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의 제자 카시아누스는 그 누구보다도 이 점에 대해 매우 설득력 있는 주장을 폈다. 그는 일곱 대죄를 육적인 죄와 영적인 죄로 나누었고, 죄는 육적인 죄에서 점차 영적인 죄로 나아간다고 보았다. 육체에 속한 죄 중에 탐식이 먼저 오고 그 다음은 정욕이 오는데, 이들은 사슬에 연결된 것처럼 앞의 욕망에 사로잡히면 반드시 그 다음 욕망으로 나아가게 된다. 


현대인들은 먹을 것은 포기하지 않은 채(맛은 포기하지 않은 채) 좀 더 까다롭게 먹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저열량, 저지방, 무가당 식품을 찾기 시작했으며 설탕이 없으면서도 톡 쏘는 사이다, 카페인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자극적인 콜라, 지방이 적은 음식, 유기농 과일 등을 찾게 되었다. 그레고리우스는 까다로운 식습관을 탐식으로 분류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이것도 탐식의 한 유형이라고 볼 수 있다.(168쪽)


<탐식을 이기는 길>(170-177쪽)


1. 신령한 양식에 길들라: 몸은 담백하고 적은 양으로도 만족하도록 길들이고 영의 양식을 채우기에 힘써야 한다. 


2. 금식: 금식은 일정 기간 음식을 끊어 몸을 지탱하는 에너지의 근원을 차단하는 일종의 자기부인 행위다. 에바그리우스는 수도사들이 육체의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우에 타오르는 욕망을 끄게 하는 방편으로 '배고픔'과 '노동', '독거'라는 특별 처방을 내리곤 했는데 이중 배고픔은 금식을 가리킨다. 


기독 교회 역사를 통해 매년 교회 안에서 시해되어 온 두 행사는 바로 금식과 만찬이었다. 둘은 모두 음식과 관련된 것으로 금식은 자기를 비우고 하나님으로 채우는 것이며, 만찬은 떡과 포도주를 나누며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념하고 한 떡을 떼어 먹음으로써 서로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3. 음식을 감사함으로 받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금식을 윤리적으로 강요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않다. 오히려 감사함으로 받고 누리라고 말씀하고 있다. 


  [개인생각] 금식은 소극적인 경건이라면, 감사는 적극적인 경건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4. 구제: 그레고리우스는 탐식을 극복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훈련은 다름 아닌 사랑의 실천이라고 주장했다. 음식을 금하는 것보다 가난한 사람에게 음식을 나누는 연습을 하는 것이 몸의 욕망을 다스리는 훨씬 효과적인 훈련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수도사들은 몸이 필요로 하는 최소한의 양만 먹고 남은 음식은 먹지 못하는 빈곤한 이웃들에게 나눠 주었다.


5.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기:  나눔을 일상에서 더욱 풍성히 살아내는 실제적인 방법은 바로 이웃을 식탁에 초대하는 일이다. 그런 삶이 몸에 익으며, 음식은 더 이상 자기 만족의 도구가 아니라 이웃과 연결되고 사랑을 나누는 거룩한 매개체가 된다. 


  [개인생각] 탐식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신령한 양식으로 채우고, 필요한 양을 먹는 것으로 만족할 줄 아는 육체적인 훈련을 한 후 점점 이웃과 나누어 먹는 훈련으로 나아갈 때 가장 건강하고 자연스럽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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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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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여름 사역이 한창 진행하는 상황이고, 아이들은 방학인 상황이라 공휴일이라는 생각도 크게 없는 날이네요. 오늘은 아무도 없는 교회 교역자실로 느즈막히 출근해서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장을 정리해 봅니다. 베드로서의 서신은 바울의 서신과는 다른 맛이 있네요.^^ 우리는 너무 바울의 서신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야고보서도 베드로서도... 우리의 신앙에서 바울이 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제공할 수 있는 성경입니다.

조용한 공간, 조용한 시간 또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알아가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흐름과 연관성입니다.]

1. 베드로가 두 번째 편지를 써서라도 이들에게 알리고 생각나게 하기를 원했던 것

  1)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구주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다.

    (1) 먼저,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한다:

     : 주의 재림하신 다는 약속이 어디 성취가 되냐? 봐라. 늘 창조 때와 같은 상황 아니냐?

    (2) 아니다. 이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을 간과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 당시(노아) 세상은 물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한 것 같이, 동일한 말씀으로 하늘과 땅은 불 사르기 위하여 지금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심판 보류중)

  2) 하나님은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분이시다.

    (1) 하나님의 심판이 더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빠르게 임할 것이다.(도둑처럼)

    (2) 다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에 보류하신다.

    (3) 그러나 하나님의 날은 도둑같이 오게 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이 풀어지고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a.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

 

2.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니... 이렇게 살아라.

  1)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2)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급하게 심판하지 않고 더디하심을)

     : 베드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도 그와 같은 내용을 너희들에게 썼다. 그의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진 자들이 있다.

  3) 이제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4)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큰 흐름으로 내 논리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내 논리로 정리한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지 내용을 주관적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과 신약의 사도들의 명한 것 속에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종말에 대해서 거짓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자들은 앞으로는 심판이 없다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니 삶은 느슨해지고, 도덕은 약해지며 점점 방탕한 자리로 나아가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성도들에게 솔깃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말한다.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금 심판을 보류하고 있는 것이지, 앞으로의 세상은 전에 물로 심판에 이른 것처럼 불로 심판을 받기 위해서 보존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어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판은 도둑처럼 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미혹하는 자들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알아가는 자리에서 자라가야 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세상에 심판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심판이 없는 것처럼 느꼈다. 악인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더욱 인정받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오랜 관찰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은 판단한다. 심판은 없다. 심판이 있다면 이럴수가 없다. 그렇다면 의를 행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런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이면서, 동시에 교회 안에서 몇 몇 성경구절을 그릇된 입장에서 사사로이 해석하여 마치 성경에도 주님의 심판이 없다거나 혹은 이미 주의 재림이 지나갔다는 식의 해석을 가함으로 믿는 자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아마 바울이 쓴 서신을 근거로 그런 논리를 펴지 않았는가 싶다.) 그것이 교회에 큰 문제가 되었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베드로는 편지를 쓰지 않았나 싶다.

  베드로는 말한다. 더딘 것이라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딘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더딘 것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디면 그리고 장시간 그 사인조차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판단을 내리기 쉽다. 없는 것으로 해야 삶이 편해지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혹 심판이 있는가하여 긴장하였다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방종으로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심판의 더딤은 참과 거짓을 가르는 하나님의 방편인지 모르겠다. 더딤을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마음껏 살고자 하는 자와 더디지만 심판이 있음을 믿고 단정히 행하는 자를 가르기 위한 하나님의 기준인 것이다.

 

2. 심판이 남아있다고 믿는 다면 우리는 거룩한 행실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무법한 삶으로 미혹되어서는 안된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이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와 자비로 시작되는 것이므로 법(행한대로 갚는다는 논리)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구원의 자리로 들어온 다음에 바로 의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풀어지고 밝혀지는 순간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삶에 대한 평가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경건이다. 그런데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불경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시작은 은혜와 자비(무법)에 의해서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생명은 행한대로 판단하신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법)임을 알고 경건한 태도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문제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3. 바울 신학에만 익숙해진 우리가 야고보나 베드로 사도의 신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균형있는 성도의 모습을 제시하고, 교회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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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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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베드로전서를 지나 베드로후서로 들어왔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책입니다. 보통은 앞 부분에 가벼운 인사가 들어가는데 베드로후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긴장이 되고, 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지만, 겁먹지 말고 찬찬히 들여다 보면 크 어려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의 정리]

1. 편지 서론에서 말하는 베드로의 본론적인 이야기(부르심과 택하심)

  1) 하나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이미)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 약속을 모르고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

  3)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1)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

    (2) 이런 것이 없으면,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9)

  4)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실족하지 않으리라.

     : 이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2. 베드로는 재차 삼차 이 사실을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우리가 이 장막(육체)에 살고 있는 동안은)

  1) 너희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한다.(12,13)

  2) 베드로가 떠난 이후에라도 계속 해서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4,15)_ 곧 장막을 벗을 때가 되었다고 고백함(죽음에 대한 임박함?)

  3) 나는 우리 주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은 내가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봤기 때문이다.

    (1) 베드로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것을 본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다.

    (2) 또 더 확신한 예언(성경)이 있는데, 그것은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정리2. 본문 내용을 다시 정리]

베드로후서는 처음 시작부터가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분위기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전제를 먼저 깔아놓고 시작한다.

1. 우리는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과 같은 덕목들을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쌓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한즉 실족함이 없어 오히려 넉넉하게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베드로는 이와 같은 보배로운 소식을 반복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죽더라도(장막을 벗음) 이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친히 본자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근거는 <확실한 예언, 곧 성경>이다. 성경은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너희는 그 뜻이 밝혀질 때까지 신중히 해석해야 한다. 사람의 뜻으로 사사로이 풀거나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우리가 성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성화를 위한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근사한 약속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보장된 약속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생명을 얻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성품의 형상(참여)에 까지 약속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모든 자원,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는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을 보장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성품의 형상을 본 받는 자가 되다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과대포장해서도 안되겠지만, 과소포장해서도 안될 것이다. 인간을 또한 구속된 인간을 무능한 죄인으로만 규정해서도 안된다. 종종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낮은 영적 자존감만 가지고 살아간다. 교만의 반대는 낮은 자존감이 아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다. 겸손은 낮은 자존감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 조종 우리는 겸손과 낮은 자존감을 구분하지 못한 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래서 성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매우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을 종종 본다.

2. 베드로는 자신의 본 경험(변화산의 영광)도 근거했지만,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 성경을 강조했다.

베드로는 사도로서 예수를 친히 본자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화산 영광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베드로도 그 사실을 언급하고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베드로는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의 성경을 강조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의 경험은 자신의 죽음(장막을 벗는 것)과 더불어 약화되어 사라지지만, 더 확실한 예언인 성경은 성도들과 함께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서 그 확실성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성경을 풀때는 사사로이 함부로 풀거나 성급하게 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치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기다려야 하듯이 명백한 뜻이 나올 때까지 성급히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19절)

성경을 읽고 은혜와 감동을 받는 것은 좋은데, 좀 더 그 뜻이 명확하게 떠오를때까지 좀 기다려주고, 묵상하고 생각해보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성급하게 은혜만을 얻고 가려고하는 방식의 성경묵상은 인스턴트 묵상처럼 여겨진다. 반복되는 인스턴트 음식의 섭취가 금새 질리게 하고 건강을 손상시키듯, 쉽게 알짜를 끄집어 먹으로는 경건생활이 빈약한 신앙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까지 고대하며 기다릴 수 있는 묵상이 실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강건하게 한다. 경건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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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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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 야고보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 1장은 처음 시작부터 여러가지 주제의 권면을 합니다. 믿음의 시련과 지혜와 믿음,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욕심으로 말미암은 것, 말을 더디하고 성내지 말아야 할 것, 듣기만 해서는 안되고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 또한 경건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권면한다.

첫장부터 이렇게 다양한 주제로 여러가지 권면을 쏟아 놓는 서신은 야고보서가 처음이지 않는가 싶다. 어쩌면 그만큼 야고보가 하고 싶은 권면이 많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여러가지 권면 중 한가지만 생각해 보고자 한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라.(9-11절)

왜냐하면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가는 것들이고 모두 쇠잔해 지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부한 것도 자랑할 것이 되지 못하지만, 낮은 것에 대해서도 너무 낙심해서는 안될 것이다. 많이 가진 자가 교만하게 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가 자주 듣는 것이기는 하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 중에 하나는 없는 것에 대해서도 너무 집착하거나, 그것만을 봐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낮은 자, 없는 자는 높은 것, 많은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과 형편만으로 평가해서는 안되고, 찾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동원해서라도 자신을 높이 여기는 태도를 가져야 한다. 부족하고 없는 것에 대해는 간과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는 작고 미력한 것이라 할지라도 주님 안에서 크고 강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긍정적 관점이 있어야 한다.

 

요즘처럼 자존감이 전체적으로 낮은 시대 속에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낮은 것과 부족한 것도 모두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는 것임을 볼 수 있는 안목도 필요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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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브리서의 마지막 장인 13장까지 왔다.^^

히브리서 13장은 12장의 후반부부터 시작된 여러가지 권면들이 이어지는 것으로 볼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그 항목을 정리하고, 필요한 부분에서 간단한 코멘트를 하는 방식으로 해야 할 것 같다. 

<이어지는 권면들>

1)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 지금까지 하고 있었겠지만, 형제 사랑은 계속해서 신경써서 해야 할 항목임.

2)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 손님 대접을 꾸준히 하다보면 생각지 못한 복을 얻게 될 것이다.

3) 너희도 갇힌 것 같이 갇힌 자를 생각하라

4) 너희도 몸을 가졌은즉 학대 받는 자를 생각하라.

    :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과거의 어려운 시절을 지나온 것은 지금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는 사람을 생각하고 도우라는 것을 잊지 말자. 그것이 고난과 아픔을 겪고 나온 자의 사명이다.

5) 모든 사람은 결혼을 귀히 여기고, 침소를 더럽히지 않게 하라:음행하는 자들과 간음하는 자들을 심판하심.

    : 모든 사람이 결혼을 귀히 여겨야 한다. 결혼을 소홀히 혹은 가벼이 여기면서 결혼 외의 관계 속에서 성적인 필요를 채우려고 해서는 안된다. 음행을 행하는 자들이나 간음을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 잊지 말아야 한다.

6)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 여기서 돈을 사랑한다는 것은 돈을 필요 이상으로 가지려고하는 욕심을 말한다. 즉 자족하는 마음이 없이 끊임없이 돈에 대한 갈망을 가지고 얻으려고 하는 자는 경건으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있는 것을 족한 줄로 아는 것이 경건이다.

*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6절)

    : 이와 같은 내용의 믿음이 있어야 하며, 고백이 동반되어야 한다. 사람이 내게 어찌하라... 아멘!!

7) 하나님의 말씀을 너희에게 일러주고 너희를 인도하던 자들의 행실의 결말을 보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음.

: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

    : 말씀을 가르치고 인도하던 사람들의 결말이 어떻게 되는가 살펴야 한다.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도우시는지 불가능한 것 같은 일이 어떻게 현실로 나타나는지 살펴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예나 지금이나 언제나 동일하시니까...^^

8) 여러 가지 다른 교훈에 끌리지 말라: 마음은 은혜로서 굳게 해야지 음식으로써 할 것이 아니다.

    : 음식 문제는 여전히 초대교회의 중요한 이슈중에 하나였던 것 같다. 정결한 음식을 먹는다고 사람이 정결해지는 것은 아니다. 마음이 은혜로서 굳게 해야 하는 것이다.

9) 우리도 그의 치욕을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제물의 육체가 영문밖에서 불살라지듯이, 예 수 그리스도가 영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듯이 우리도 그리하자.

    : 우리도 주님처럼 고난받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고난의 현장으로 들어가자.

10)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언하는 입술의 열매이다.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

    : 신약에서의 제사는 입술로 드리는 찬송의 제사와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는 것과 같은 선의 제사를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11)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의 일처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행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 말씀으로 섬겨주고 인도하는 영적 리더에게 순종하라. 왜냐하면 그는 부모처럼 너의 일을 자신 일처럼 생각하고 행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즐거움으로 행하고 근심으로 하지 않도록 하라.

12)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 확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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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딤전 4:6-16 경건: 성도 성숙의 과정

본문관찰(첫 독자의 입장으로 읽고 이해하기)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꾼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따르는 좋은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도록 네 자신을 연단하라

[8] 육체의 연단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 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11] 너는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있어서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전념하라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을 통하여 받은 것을 가볍게 여기지 말며

[15] 이 모든 일에 전심 전력하여 너의 성숙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살펴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1. 본문을 천천히 3번 정독 합니다.

: 집중해서 읽어야 하고, 내용의 흐름을 이해하며 읽으라.

필기구(색연필 등)를 사용해 내용이해를 도우라.

2. 본문의 내용을 자신의 말로 정리해 봅니다.(작성하라)

1) 6-7절.

2) 8-11절.

3) 12-13절.

4) 14-16절.

3. 다음 질문에 대한 답을 본문에서 찾아보라.

1) 경건의 유익을 육체의 연단과 비교하여 설명하라.

2) 본문에서 구체적으로 경건의 훈련이 필요한 분야는 어디인가?(12절)

3) 경건의 훈련을 통해서 궁극적으로 도달해야 할 목표는 무엇인가?

내용 이해를 돕는 해설

해석/적용(오늘 우리시대의 의미로 이해하기)

[본문이해]

바울이 목회하고 있는 디모데에게 쓴 편지인데, 디모데는 적은 나이로 목회 사역을 감당한다는 것이 어려움이 있었던 것 같다.(12절) 바울은 목회자로서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지속하고 경건을 위해 훈련함으로 잘 감당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단어/문장 이해]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

:godless myths and old wives' tales

▯육체의 연단: physical training

▯금생과 내생: both the present life and the life to come.

▯미쁘다: This is a trustworthy saying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when the body of elders laid their hands on you.

나의 신앙의 목표는 무엇인가? 나는 성숙한 자가 되기 위해서 무엇을 훈련하고 있는가?

내 자신이 평가할 때, 경건의 훈련에서 가장 개선해야 하는 부분은 어디라고 생각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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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은 말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고통의 때라고 표현한다.(1절) 갑자기 껑충뛰어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역사적 이해와 현실 감각을 가져야 할지를 알려준다.

말세의 특징을 한 마다로 표현하면, 불경건이라고 볼 수 있다.(2-5절)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5절)는 것이다. 종말에 가서는 불경건함이 더욱 거세질 것이고, 그것은 주류가 되고 상식이 될 것이다. 오히려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낯선 사람이 될 것이고, 비주류가 될 것이다.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직장 생활을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과 능력과 실력의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는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말한다. 직접적인 갈등도 있지만, 그들(의 불경건)과 어울릴수 없는 것으로 인한 고립감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하나의 고통이며 박해이다.)

또 하나의 말세적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미혹'이다. 거짓 가치관, 거짓 진리로의 미혹이다. 이들은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나 마침내 진리에는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7절)

이 두가지 현상들이 말세의 현상이라면, 적어도 말세는 모세 때부터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시대에도 사람들을 미혹하던 얀네와 얌브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말세라는 것은 먼 미래의 종말의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말세의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종적인 종말에는 그와 같은 현상의 농도가 더우 진해질 것이며, 강해질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담의 타락이후 아담이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의 현상들을 인류가 직면하면서 말세는 존재해왔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된다.

암튼,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절)이다.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지침 중에 하나는 이와 같은 불경건의 가치관과 현상 속에서 날마다 돌아서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 의해 흘러가고 그와 같은 가치관이 주류가 되어 다른 말을 하거나 가치관을 피력할 때, 왕따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와 같은 가치관에 동조할 수 없다고, 그와 같은 불경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매일 매일의 결단과 순종이 일상의 제자도인 것이다.

세상은 모든 것을 잠식할 것같이 덤벼들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역사적 의식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모세 시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향력 그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어리석음은 드러났고 그들의 공격도 힘을 잃었다.(8,9절)

하나님은 불경건과 거짓 진리의 미혹에 대해서는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 어느 정도는 활동하여 영향력을 키울수는 있지만, 항상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도 정해져있다.(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이를 수 없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또하나의 중요한 지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배운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가운데 거하는 삶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따라서 진리다.)으로 된 것으로 읽고 순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유익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14-17절)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이 일에 착념할 것을 계속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불경건과 미혹의 시대에 살아남는 길은

1. 불경건함과 미혹의 가치관으로부터 매일 매일 돌아서는 것이다.

   : 집에 돌아오면 손을 깨끗이 씻는 것만으로도 많은 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더러운 것이 뭍어 들어오지 않도록 (정신)위생을 철저히 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건강한(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몸에 좋은 음식으로 식생활을 하며, 적절한 운동으로 자신을 훈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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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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