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4.3.16)


제목: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1_ 율법

본문: 눅 10:25-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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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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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다른 복음에 넘어간 갈라디아 교회 / 바울이 전한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직접 나타내 보여주신 것.


1. 바울이 갈라디아에 있는 여러교회에 쓴 편지(2절)


2. 바울의 문제제기(6-7)

  1) 그리스도의 은혜 안으로 불러준 갈라디아 교인들아, 어찌 그리 빨리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단 말인가? 몇 몇 사람들이 복음을 교란한 것에 영향을 받음.


3. 바울의 정답(8-10)

  1) 다른 복음은 없다. 천사라도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2) 나는 지금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할 생각이 없다. 내가 사람의 환심을 사려고 한다면 나는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다.

  * 다른 복음이라는 것이 사람의 이성과 심성에 잘 부합하는 내용의 것인듯 하다. 그래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은 매우 빠르고 쉽게 그 가르침에 넘어간듯 하다. 



----------[부연설명]

4. 바울이 사람(사도)의 영향을 받은 자라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적으로 복음을 들은자다.(11)


  1) 내가 받은 복음은 사람에게서 받은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심으로 받은 것이다.(12)

  2)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는 유대의 전통에 강력하게 미친자로서 심지어 하나님의 교회까지 없애려고 하지 않았는가.(오히려 사람의 전통으로부터 배운 것으로는 하나님의 교회를 대적하는 자로서의 역할만 했다.13-14)


  3) 그런 나를, 하나님이 모태로부터 불러주시고, 이방의 사도가 되게 하시려고 나에게 나타내 보이셨다. (직통. 16절)

  4) 또 내가 예수를 만나고 먼저 사도가 된 사람들을 만나려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않고 곧 바로 아라비아로 갔다가 다메섹으로 되돌아왔다.(17절. 즉 사도의 영향을 받은 것도 없다)

  5) 그 후 3년 뒤에 게바를 만나고자 예루살렘에 왔지만, 주의 동생 야고보 밖에는 보지 못했고. 그것도 15일 밖에 있지 않았다. 이것은 사실이고 거짓말이 아니다.(18-20절)

  6) 그 뒤로 나는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방으로 갔다. 그래서 유대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들은 나를 개인적으로 알 기회가 없었다.(21-22절) 다만 바울은 소문으로만 전해졌는데, 그것도 전에 우리를 박해하던 자가 이제는 믿음을 전한다'는 소문으로만 알려졌다. 그래서 그들은 나에 대한 소문을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13-24절)




[2장] 거짓 선지자의 요구 / 이방사역을 사도들로부터 인정받은 바울 / 오히려 사도인 게바가 그릇된 행동을 행함 / 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15-21절)


1. 14년이 지나서 바울은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 예루살렘에 올라간 것도 계시를 따라 간 것인데, 그들에게 이방 사람에게 전한 복음을 설명하고 특별히 유명한 사람(사도들?)들에게도 따로 설명하기 위해서였다.(1-3) 그러나 이렇게 한 것은 우리의 권위가 낮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그들의 권위를 인정한 것으로 그렇게 함으로서 그 동안의 이방인 사역이 헛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함께 했던 디도에 대해서 <할례>에 대한 요구를 받지 않았다.


2. 그런데 몰래 들어온 거짓 신도들이 디도의 할례를 강요하였다.(디도가 그리스인이기 때문에) 이들은 우리를 율법의 노예로 만들려고 우리의 자유를 엿보고 몰래 끼어들었다.(4절) 그러나 우리는 이들의 요구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것은 상징적인 사건으로 복음의 진리를 드러내 주는 일이기 때문이었다.(5절) _ 할례를 하는 것 자체에 문제가 있지는 않지만 이 상황에서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면 그들의 거짓 복음을 인정해주는 상황이 되기 때문.


3. 이 때에 유명하다는 사람(사도들)들도 바울에게 아무런 요구를 하지 않았다. 도리어 베드로는 할례 받은 사람들에게, 나는 할례 받지 않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맡은 것을 알게 되었다. (7-8절) 교회의 기둥같은 야고보 게바 요한은 바울에게 주신 은혜를 인정하고, 바울과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했다. 그리고 서로의 사역은 인정해 주었다.(9절) 다만 한가지 요구한 것이 있다면 가난한 사람을 기억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 자신도 열심히 해오고 있던 것이다.(1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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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바울의 사역과 바울의 복음(할례 없이도 의롭게 됨)을 유대인 사도들도 모두 인정하고 받아들여주었다. 사도행전 15장의 사건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된다.이렇듯 바울의 복음은 유대 사도들에게서부터 나온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유대 사도들로부터도 인정받은 것임을 지금까지 강조했다.



4. 바울이 오히려 게바를 나무란 사건(11-14)

  게바가 안디옥에 왔을 때, 이방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야고보가 보낸 사람(아마도 유대인일듯)들이 오자 그들을 두려워하여 자리를 피했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런 행위가 위선을 만들었고 바울의 동력자였던 바나바까지도 그들의 위선에 함께 하게 되었다. 그러자 바울은 게바의 잘못을 모든 사람 앞에서 지적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처럼 살지 않으면서, 어찌하여 이방 사람더러 유대 사람처럼 되라고 강요합니까?"


  * 더 나아가 바울은 유대 사도 중에 기둥같은 게바가 오히려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복음을 왜곡시키는 행동을 한 것에 대해서 지적하고, 그것이 큰 문제가 됨을 모든 사람 앞에서 말한 사건을 언급한다. 즉 유대 사도들도 유대인의 인간적인 전통으로 인해서 복음을 훼손시키는 일을 행할 수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의 핵심]


5. 바울이 자신의 믿고 있는 복음의 핵심을 이야기 함(15-21)_복음을 헛되게 해서는 안된다.

  1)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죄인인 이방인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율법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하나님의 주권적 은혜로) 된다. 율법을 지키는 행위로는 아무것도 의롭게 될 수 없다. 


  2) 이런 복음으로 우리가 과거의 것(율법으로 의롭게 되는 것)을 헐어버렸는데, 지금와서 헐어버린 것을 다시 세운다면 그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나는 이미 율법 앞에서는 죽었다.(율법으로는 의에 이르지 못함을 알고 그 방법을 버렸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려고 하는 것이다.(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의를 의지하기 위함이다.)


  3) 율법으로 의롭게 되고자 했던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 이제 내 안에는 그리스도의 의로 말미암아 살아나는 의를 의지하는 나만이 살아있다.(율법을 의지했던 나는 죽었고, 그리스도의 의를 의지하는 나만 살았다.) 만약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는 것이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는 것이 되고 만다.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헛되게 하지 않는다.(21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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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성도들은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다. / 성령의 인치심이 있다. / 이 언약이 율법에 의해 폐기될 수는 없다. / 그렇다면 율법의 역할은 무엇인가? _ 그리스도가 오기 전 임시적 역할 / 그러나 그리스도가 오시면 더 이상 율법 아래에 있을 이유가 없다.


1.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질문과 책망


  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모습이 여러분의 눈에 선한데 누가 여러분을 홀렸습니까?(1)


  2) 여러분은 율법을 지킴으로 성령을 받았습니까? 아니면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써 성령을 받았습니까?(2) 여러분은 왜 어리석게 성령으로 시작하여 율법으로 마치려고 합니까?(3)


2.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한 훈계과 가르침


  1)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처럼,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아십시오.(7)

  2) 하나님은 이방 사람들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실 것을 미리 아시고,아브라함에게 모든 민족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미리 전하셨다.(8절)


  3) 율법의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나 저주 아래 있다. 아무도 율법으로 의롭게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4) 그런데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저주 받은 사람이 되심으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해 주셨다.


  5) 이렇게 하심은 아브라함에게서 내리신 복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이방 사람에게 미치게 하시고,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 성령으로 시작한 성도들이 율법으로 마치려 하자 이에 대한 책망과 바른 복음의 설명을 한다. 성도들은 믿음을 따라 의가 된 아브라함의 자손이다.(롬 4장) 이 일은 이미 아브라함을 복의 근원이 되게 하실 때 모든 민족을 말씀하심으로 이방인도 복을 얻으리라는 기쁜 소식을 전하셨다. 율법으로 사람은 저주아래 놓이게 되었지만, 아브라함에게 내리신 복은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이방 사람들에게도 미치게 되었고, 믿음으로 성령을 받게 하신 것이다.


3. 추가적인 설명: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430년 뒤에 나온 율법이 그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1) 보통 한 번 언약을 맺으면 아무것도 그것을 무효화할 수 없다.(15)

  2)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약속했는데, 그 자손은 '자손들'이 아니다. 단수로 '자손'과 언약을 맺은 것인데 그 자손은 곧 그리스도다.(16) 

  3) 하나님께서 이미 아브라함과 그 자손과 맺은 언약을 430년 뒤에 생긴 율법이 폐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약속을 통하여 아브라함에게 유업을 주셨다.(율법을 통해 주신 것이 아니다. 18절)


  4) 그렇다면 율법은 무엇 때문에 주신 것인가? 그것은 약속하신 자손이 오기 전까지 죄를 밝히려고 주신 것이다. (19)


   ----[부연설명] 율법의 역할

   (1) 율법이 사람을 살릴 수 있는 것이었다면, 의로움이 율법에서 생겼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 아래 갇혀있기 때문에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었던 것이다.(21-22)

   (2) 그래서 하나님의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근거하여 사람에게 주려고 하신 것이다.(22)

   (3) 믿음이 오기 전까지 우리는 율법에 갇혀 있었는데, 율법은 우리의 개인교사 역할을 하였다.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게 하시려고.(23-24)

   (4) 그런데 믿음이 이미 왔으므로 우리는 더 이상 개인교사 밑에 있지 않는다.(25)


  * 율법이 아브라함과 그 자손(그리스도)과 맺은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율법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이 먼저다. 아브라함과 맺은 언약은 그 자손, 예수 그리스도와 맺은 언약이다. 그리스도가 오기전까지는 우리가 율법에 갇혀있었다.(율법이 우리의 개인교사였으므로) 그러자 지금은 더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다. 


  [성도들의 신분]

   (5) 성도들은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는 그리스도로 옷 입었다. 그것에 차이가 없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남자나 여자나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다 하나이기 때문이다.(26-29)

   (6) 여러분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으면 여러분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을 따라 유업을 이을 사람들이다.


  * 따라서 더 이상 율법에 매여있고, 그의 인도함을 받아야 할 이유가 이제는 없다.




[4장]

율법은 임시적인 역할만 한다 / 때가 되면 종이 아닌 자녀가 된다./ 갈라디아 교회의 구체적 문제,할례, 절기.../ 바울은 다시 해산의 수고를 각오함 / 하갈과 사라처럼 종이 주인을 박해하지만, 그들을 내쫓으라.


1. 율법이 필요한 이유를 다른 것으로 말하자면

  1) 어릴적에는 주인의 아들이지만, 종과 다름없이 누군가의 다스림과 관리를 받는다.

  2) 이와 같이 우리도 어릴적에는 세상의 유치한 교훈 아래서 종노릇 했다.(율법 아래에 있었다. 1-3)


2. 그러나 때가 차자,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보내어 여인에게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놓이게 함.(4)

  - 그렇게 하신 이유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자녀의 자격을 얻게 하기 위함이었다. (5)

  - 이렇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자 하나님께서 아들의 영을 주시어 우리로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하심(6)

  - 그러므로 여러분 각자는 종이 아니라 자녀입니다. 자녀이면 당연히 하나님이 세워주신 상속자입니다. 



[바울의 권면]


1. 전에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지 못해 하나님 아닌 것에게 종노릇했지만, 이제는 여러분이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이 여러분을 아는데 어찌 무력하고 천하고 유치한 교훈으로 돌아가려고 합니까? 왜 다시 종노릇하려 합니까?(8-9)


  1) 여러분이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고 있습니까?(10절) 그것은 내 수고를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11)


  * 갈라디아 교회의 문제가 되었던 것은 <할례>의 문제와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 유대인들의 율법 문제였다.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할례와 날과 달의 절기를 지켜야만 한다고 가르쳤던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여전히 유대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개인적인 경험을 중심으로 메시지를 전함]


  2) 갈라디아 교회에 복음이 전해지게 된 것은 바울의 육체가 병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이들이 바울을 외면하지 않고 따듯하게 영접하여 주었다. 전에는 이들이 자기의 눈을 빼서라도 바울의 병을 고치고자 하는 진심어린 애정을 표현했다. (13-15)


  3) 그런데 바울이 복음의 진리를 전하자(즉 이들이 좋아해서 받아들인 것을 비판하고 복음의 참된 의미를 강조하자) 이들이 바울에게 원수같이 대했던 것이다.(16절) 거짓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 열심을 내는 것은 갈라디아 성도들과 바울을 분리시키려는 것이다.(17) 

  4) 그래서 바울은 다시 한 번 갈라디아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는다.(19)

  5) 이제라도 다시 만나서 어조를 바꾸어 이야기 나눌 수 있으면 좋겠다. 



   * 이런 문제로 바울이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을 책망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일로 인해서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 중 다수가 바울에게 대해서 반감을 품었던 것 같다. 전에는 눈이라도 빼서 줄 것처럼 바울에게 애정을 가졌던 교회 였는데, 바울이 이들의 잘못됨을 지적하자 바울에게 반감을 품었던 사람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이로 인해 바울은 많이 당황스러워했고, 결과적으로는 이들을 위한 해산의 수고를 다시 한번 해야함을 각오했던 것이다. 다시 처음 시작하는 마음으로 바울은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한 것이다.(4:13-20)

 



2. 여전히 율법 아래 있기를 원하는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에게 하는 권면


  [사라와 하갈의 알레고리적 비유]

  1) 아브라함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하나는 종에게서 육신을 따라 났고 다른 하나는 본처에게서 약속을 따라 났다. 땅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의 자녀들이지만,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은 종이 아닌 여자다.

  우리는 이삭과 같이 약속의 자녀들이다. (21-28)


  2) 그러나 그 때에 육신을 따라 난 사람이 성령을 따라 난 사람을 박해한 것과 같이 지금도 그러하다.(29) 

    그런데 성경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여종과 그 아들을 내쫓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들은 유업을 함께 받을 자가 아닙니다.(교회 안에서 다시 율법의 종을 만들려고 하는 자들을 내어 쫓으리고 말하는 것이다.30절)


  3) 여러분은 여종의 자녀가 아니라 자유한 여자의 자녀입니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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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배경/역사/내용 정리]


1. 바울은 갈라디아에 복음을 전했으나 갈라디아 교회 성도들이 빠르게 다른 복음으로 넘어간 것에 대해서 문제제기를 하면 쓴 글이다. (1:6)

2.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를 향해서 그들의 잘못됨을 지적하고, 교정해 주려 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런 의도가 갈라디아 교회에서 생각처럼 긍정적으로 나오지 않았고 오히려 바울의 사도성을 의심하거나 아니면 유대 사도들에 비해서 열등한 사역자라는 피드백이 돌아온 것 같다.(4:13-20)

3. 이런 예상치 못한 반응에 바울은 적지 않게 당황한듯 하다.(4:20) 그러나 바울은 마음을 새롭게 하여 갈라디아 교인들을 위해서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기로 결심한다.(4:19)

4. 그래서 바울은 사도로서의 자신의 정체성이 사람(유대 사도들)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임을 분명하게 한다. 바울은 사람에게서 배운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통해서 복음을 알게 된 것이고, 그 이후에도 유대의 사도들을 찾아가거나 배우거나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대 그리스도인들조차 나를 잘 모른다. 다만 교회를 피박하던 자가 변화되어 그로 인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정도일 뿐이다.(1:11-24)

5. 거짓 신도들(할례를 강조하는)로 인해 위협을 받았지만(디도에게 할례를 행하라) 바울은 행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의 그리스도인들과 유명한 사도 야고보, 게바, 요한은 이것을 인정했고, 인정하는 의미의 악수도 했다. 그리고 오히려 사도 바울의 사역(이방인을 위한 사역)자임을 인정해 주었다. 가난한 자에 대한 부탁이 있었는데 이것은 이미 바울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이었다.(2:1-10)

6. 사실 바울은 게바의 그릇된 행동에 대해서 책망까지 한 적이 있다. 게바가 유대인을 의식해서 가식적인 행동을 했고 그것이 교회에 큰 영향(심지어 바나바까지 따라하게 됨)을 받게 되었다.(2:11-14)


[복음의 내용]

7.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다시 설명함(2:15-21)

8. 율법으로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닌, 믿음으로 성령을 받은 것임을 잊지 말라.(성령을 인치심, 구약의 할례와 같은 개념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함) 

   - 유대인들은 성령의 인치심을 할례로 받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듯. 율법과 믿음 논쟁에서 그 결과를 성령으로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인침이 유업(기업)의 보장으로 이어지는 듯 하다. 


9.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것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방인을 위한 것이며, 아브라함의 복을 미리 아시고 이제 이방인에게도 임한 것이다.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었고 그 유업을 얻게 된 것이다. 언약이 먼저이다. 나중 온 율법이 언약을 폐할 수는 없다. 이제는 더 이상 종이 자녀(하갈)가 되지 말고, 자유자의 자녀(사라)가 되라.(3:15-29) 율법은 어린 아이를 위해(종과 같은 상태) 있지만, 커서는 아들이 된다. 


  * 왜 날과 달과 계절과 해를 지키는가? 왜 다시 종노릇하는가?(4:8-11)



[5장] 그리스도로 인해 해방된 자유로 종의 멍에를 매지 마라/할례에 매이지 말라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는 사랑을 향해 살라/ 성령의 소욕을 따라 육체의 소욕을 다스리라. 


1. [핵심 메시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셔서, 자유하게 하셨다. 그러니 다시 종의 멍에를 메지 말자.(1)


  [논리] 

  1) 할례를 받아들이면, 율법 전체를 이행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2.3)

  2)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고 하면, 그리스도에게서는 끊어지고 은혜에서는 떨어진다.(4)

  3) 그러나 우리는 성령을 힘입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을 소망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5)

   - 사실, 할례를 받는 것, 안 받는 것은 핵심이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이다. 


2. [권면] 여러분이 지금까지 잘 달려왔지만, 여러분을 진리에서 왜곡되게 하신 분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님.(8)


  1) 거짓된 진리는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여러분을 교란시키는 자에게서 나온 것이다. 심판받는다.(9)

  2) 만약 내가 아직도 할례를 전했다면, 내가 왜 아직도 박혜를 받겠는가?(11)

    - 할례를 가지고 선동하는 자가 있다면, 그 사람은 지체에서 잘라버리라. 


  3) 하나님은 여러분을 부르셔서 여러분에게 자유를 주셨습니다.(율법으로부터의 자유)



 * 성도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자다. 하나님은 우리를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주시기 위해 부르셨다.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1) 그 자유를 육체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구실로 삼지 말라. 사랑으로 서로 섬기라.(13)

   (2) 율법은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여기에 다 들어있다. (14)

   (3) 그런데 네가 서로 물고 먹으면 둘다 망하는 것이다. (15)



 * 그런데 이 자유는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이지, 네 육체의 욕망을 이루기 위한 자유가 아니다. 만약 우리가 얻은 자유로 육체의 욕망을 이루려고 한다면 그것은 망하는 길이다.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는 <사랑>을 위한 자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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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율법으로부터 자유를 얻은 자의 삶: 성령께서 인도하여 주시는 것을 따르는 삶]

   (1)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육체의 욕망을 따라 살지 않게 된다.(16)

   (2) 성령의 인도를 따르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다.(18)

   (3)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사는 행실은 분명하다. 음행, 더러움, 방탕,.. ..(19-21)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21)

   (4) 그러나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와 친절, 선함과 신실, 온유, 절제... / 그리스도 예수께 속한 자는 정욕과 욕망과 함께 자기 육체를 십자가에 못박음

   (5) 우리가 성령으로 삶을 얻었으니,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갑시다.(25)



 * 복음 안에서 주신 자유는 자기 육신의 정욕을 쫓는 자유가 아니라, 성령을 따르는 자유다. 우리가 성령을 받았으니 성령을 쫓는 자유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6장] 겸손히 자기의 할 일을 하고 / 할 수 있으면 남의 짐을 져주라 / 사람은 심은대로 거둔다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라./ 기회있는대로 선을 행하라 / 할례문제는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다./ 내가 세상에 대해 죽었다 / 나는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


 [구체적인 권면] 

1. 어떤 교인이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거든, 성령의 지도를 받는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 잡아 주라. 그리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살피라. 그래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라.(1절)


2. 서로 남의 짐을 져주라.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내가 의로운 것으로 자신감을 얻으려함/비판)를 가진자가 타인의 짐을 져주라.


3. 각 자는 자신을 돌아보고 무엇을 성취한 것처럼 생각지 말라.(3-4)


4. 자기 몫의 짐을 져야 한다. (5)


5. 말씀을 배우는 사람은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같이 나누어야 한다. (6)


6. 자기를 속이지 마라. 하나님은 속지 않으시고 사람은 무엇을 심든지 심은 대로 거둘 것이다.(7)

   - 자기 육체의 욕망을 따라 심는 사람은 육체로부터 썩을 것을 거두고,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사람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둘 것이다. (8)


   - 선한 일을 하다가 낙심하지 말자. 지쳐 넘어지지 말자. 때가 이루면 거둘 것이다. (9)


   - 그러므로 기회가 있는 동안에, 모든 사람에게 선한 일을 합시다.(10)



[전체 정리]


1. 다시 한 번 확고하게 말합니다.(11)


2. 육체의 겉 모양을 꾸미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한다. 그들은 그들의 십자가 때문에 받는 박해를 면하려고 하는 것이다. (12)


3. 할례받는 사람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여러분에게 할례를 받게 하려는 것은 여러분의 육체를 이용하려는 것이다. (13)


4. 그러나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쪽에서 보면 세상이 죽었고, 세상 쪽에서 보면 내가 죽었다.(14절)


5. 할례를 받느냐 받지 않으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하다.(15)


6. 이제부터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내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낙인이 찍혀있다.(17절)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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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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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한 모금]


1. 말라기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이란, 교만하고 악한 자들에게 대한 불 심판의 날이다. 완전히 소멸될 것을 말씀하신다.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기쁨과 영광의 날이 된다. 주님의 재림의 때가 성경에서 말하는 여호와의 날임에는 분명하다. 그 날이 되면 양과 염소가 나누어지며, 알곡과 가라지가 분명하게 갈라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호와의 날의 징후는 주님의 재림 때에만 나타났던 것은 아니다. 주님의 초림때에도 나타났다.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헤롯의 무리와 예수 그리스도를 경배하기 위해서 찾아온 동방의 박사들과 목동들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애 속에서는 이 둘은 분명하게 갈리기 보다는 서로 섞여있기도 하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따르다게 배신했다가 다시 쫓게되는 과정이 있듯이 말이다. 


2. 말라기 서의 마지막에 하나님은 유다 백성들을 향해서 모세의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고 했고,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오기 전에 엘리야가 올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그 엘리야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 돌이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고 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만난 구약의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다. 이것은 말라기서 4장의 말씀을 연상시키기도 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모세의 역할, 하나님의 법을 온전하게 하셨다는것과 또한 엘리야의 역할, 하나님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돌이키게 하기 위한 역할 모두를 감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그와 같은 성취를 이루신 분이라는 것을 변화산 사건을 통해서 마태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3. 구약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를 마쳤다. 구약 전체를 마친 것은 아니지만, 상당한 만족감이 있다. 감사하다. 





[성경 한 장]


1.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1) 보라 용광로 불 같은 날이 이르리라.

   (1)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다 지푸라기 같을 것이라. 

   (2) 그 이르는 날에 그들을 살라 그 뿌리와 가지를 남기지 아니할 것이로되


   * 용광로 불 같은 심판의 날이다. 교만한 자와 악을 행하는 자는 지푸라기처럼 불타 없어질 것을 말한다. 교만한 자와 악행하는 자에 대해서 심판을 경고하신다.


   (3) 내 이름을 경외하는 너희에게는 공의로운 해가 떠 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리니

   (4) 너희가 나가서 외양간에서 나온 송아지 같이 뛰리라. 

   (5) 너희가 악인을 밟을 것이니, 그들이 내가 정한 날에 너희 발바닥 밑에 재와 같으리라.


  * 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대해서는 영광과 승리를 보장하며, 악인을 밟아 재와 같이 여기게 하실 것을 말씀하신다. 교만한 자와 경건한 자를 대조하며, 교만한 자는 멸망하며 경건한 자는 영광스럽게 드러나게 하신다. 



2. 너희는 하나님이 호렙에서 온 이스라엘을 위해서 모세에게 명령한 법 곧 율례와 법도를 기억하라. 


  1)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라. 

  2) 그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3)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 다시 출애굽 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어서 지키게 하려고 하셨던 법을 기억할 것을 요구하신다. 그 역할을 위해서 선지자 엘리야를 보내시겠다고 하셨다.(마 17장에서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봤던 구약 인물은 모세와 엘리야다.) 모세는 법을 대표하는 인물로, 엘리야는 하나님 아버지와 그 백성의 상한 마음을 다시 회복시켜주는 역할로 언급된다. 법이 회복되고 마음이 회복되는 역할로서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 이와 같은 하나님의 행하심에도 불구하고 돌이키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저주가 임하게 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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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순서가 늘 장 요약하고 묵상으로 이어졌는데, 글의 순서를 바꿉니다. 어차피 장요약 한 것은 묵상을 하기 위한 기초작업인데 혹 읽는 분들에게는 별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묵상 작업을 앞에 놓습니다. 묵상을 보시고 혹 궁금함이 더하시면 본문 정리한 것을 보시라고. ㅎㅎ


[묵상 한 모금]


1. 하나님은 두 부류의 대상에게 실망하시고 분노하신다. 첫째는 제사장들이다. 이들에게는 두가지 책임을 따진다. 하나는 제사며 다른 하나는 율법으로 자기 백성을 지도하는 것이다. 제사의 문제는 말 1장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2장에서는 율법과 관련된 제사장들의 그릇된 태도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율법을 지키고 따르는 삶을 인도해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행하지 아니함으로 하나님은 제사장들과 맺었던 언약(레위의 언약)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희생의 제물의 똥처럼 제하여 버릴 것이라 말씀하신다. 


2. 또 하나의 부류는 유다 백성이다. 이들에게 대해서 하나님은 분노하시는데, 특히 이들이 아내에게 대해서 행하는 악행에 대해서 분노하신다. 어려서 맞은 아내와 경건한 자녀를 낳도록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쉽게 아내를 버리고, 아내에게 폭행을 행하는 것으로 인해 이 결혼관계를 지켜보시는 하나님은 분노하신다. 하나님은 이들의 봉헌물을 받지 않으시고 이들을 야곱의 장막에서 제하여 버리시겠다고 말씀하신다. 


3. 말라기 시대에 유다의 영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제사장들은 허술한 제사를 드리며, 율법으로 자기 백성들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 못한다. 레위와 맺은 언약이 있음에도 자신의 본분을 잊고 산다. 그러하고도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르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서운하게 생각한다. 유다 백성들도 마찬가지다. 가정을 온전히 지키지 않았다. 젊어서 맞이한 아내를 버려 쉬 이혼하고 이방의 딸을 맞아들인다. 아내에게 폭력을 가한다. 그럼에도 이들은 전혀 문제의식을 갖지 못한다. 


4. 구약 시대 동안 이 백성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들이신 공로와 수고가 그렇게도 많은데 이 백성의 종교와 삶과 가정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수천년간 행하신 하나님의 모든 사역이 물거품이 되어버린 것 같다. 이들은 방자하고 하나님은 이제 이 백성에게 지치셨다. 가장 근원적인 것, 가장 기본적인 것조차 이 백성은 행할 능력이 없다는 것이 밝혀졌다. 하나님의 낙심(?)도 이만저만이 아니셨으리라... 구약의 끝은 참, 무력하게 끊나고 만다.



[성경 한 장]


1. 하나님을 공경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은 제사장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말씀


  1) 만일 너희가 듣지 않고, 마음에 두지 않고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2)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3) 이미 저주하였다. 너희가 마음에 두지 아니함으로


  4) 너희 자손을 꾸짖을 것이요 너희 절기의 희생의 똥을 너희 얼굴에 바를 것이라.

  5) 너희가 그것과 함께 제하여 버림을 당하리라.


  6) 하나님이 이런 명령을 내린 것은 레위와 세운 언약이 항상 있게 하려 함이라. 

  7) 그가 나를 경외하고 내 이름을 두려워하였다. 

   (1)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

   (2) 내가 이것을 그에게 준 것은 그로 경외하게 하려 함이라. 

   (3) 제사장의 입술은 지식을 지켜야 하고, 사람들은 그의 입에서 율법을 구하게 되어야 할 것이다. 제사장은 만군의 여호와의 사자가 됨이라.

   (4) 그러나 너희는 옳은 길에서 떠나 많은 사람을 율법에 거스르게 하는도다. 

   (5) 너희가 레위의 언약을 깨뜨렸느니라. 

   (6) 너희가 내 길을 지키지 아니하고 율법을 행할 때에 사람에게 치우치게 하였다. 그래서 너희로 하여금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하였다. 


  * 하나님께서 레위(제사장)들에게 언약을 맺은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사장들이 하나님과의 언약을 깨뜨리고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경외함이 없으므로 하나님은 이들을 절기의 희생의 똥과 같이 여기고 이들을 버리고 제하였음을 말한다. 이들은 옳은 길을 떠나 많은 사람들을 율법에 거스르게 했으며, 사람들을 치우치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이들과 세운 언약, 생명과 평강의 언약을 파기하셨다. 그래서 결국 제사장들은 모든 백성 앞에서 멸시와 천대를 당하게 되었다.


2. 거짓을 행하는 유다


  1) 우리는 한 아버지, 한 하나님을 통해서 지으신 바가 아니냐? 어찌하여 우리 각 사람이 자기 형제에게 거짓을 행하여 우리 조상들의 언약을 욕되게 하느냐?

  2) 그럼으로 유다는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 성결을 욕되게 하여 이방 신의 딸과 결혼하였으니 이 일을 행하는 자에게 속한 자는 깨는 자나 응답하는 자는 물론이요 만군의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는 자도 여호와께서 야곱의 장막 가운데서 끊어버리시리라.

  3) 너희가 이런 일을 행하나니, 여호와께서 다시는 너희의 봉헌물을 돌아보지도 아니하시며 그것을 너희 손에서 기꺼이 받지도 아니하신다.

  4) 그런데 너희들은 이것이 어찜 됨이냐? 하고 놀란다. 


  5) 그 구체적인 이유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너와 네가 어려서 맞이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증인이 되시는데, 너와 서약한 아내에게 네가 거짓을 행한다. 하나님께서 너의 짝으로 하나만 만든 것은 네게서 경건한 자손을 얻고자 하심이 아니냐? 너는 어려서 맞이한 아내에게 거짓을 행하지 말라. 

  6) 나, 여호와 하나님은 두 가지를 싫어한다. 

   (1) 나는 이혼하는 것을 싫어한다. 

   (2) 옷으로 학대를 가리는 자를 미워한다.(가정 폭력을 말하는 것인가?)

  7) 그러므로 너희 심령을 삼가 지켜 거짓을 행하지 말라. 


  * 유다의 죄로 말미암아 유다의 장막에서 끊어질 것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인 유다의 죄에 대해서 결혼한 아내에 대한 사례를 말씀하신다. 어려서 맞이 한 아내와 경건한 자녀를 낳으려 하지 않고, 가정을 소홀히 하고 아내에게 폭력을 가하는 그릇된 방식으로 아내를 버리려하는 유다에게 하나님은 진노하신다. 그런데 유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런 태도에 당황해하고 놀란다. 그 정도로 하나님과 유다의 관계는 유지되기가 어려워졌다. 



3.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여도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 


  1) 이들은 말한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고 그에게 기쁨이 된다.

  2)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 라고 말한다. 


  * 이들은 악을 행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판단과 정죄하지 않고 오히려 여호와께서 좋게 보실 것이라, 기쁨이 될 것이라 말한다. 하나님을 오해하고 왜곡하는 행태다. 더불어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라고 말하면서 하나님을 경시하며 자신의 불의에 대해 아무런 죄 의식도 갖지 않음을 말한다. 이들은 뻔뻔하게도 우리가 하나님께 잘못한게 무엇이 있냐고 고개를 치켜들도 따지고 있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참으로 당황스러워 하시면 더 이상 손 쓸수 없는 답답함을 느끼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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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롬 1:16)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복음의 또다른 단언적 명제는 <부끄럽지 않은 복음>이다. 이 표현은 보통 <전도>할 때 복음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할 때 인용되는 구절이다. 성도가 복음 전하는 행위가 물론 부끄러워서는 아니되겠으나, 이 구절에서 바울이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좀 더 강렬한 확신이 담겨 있는 내용이다. 


그 의미를 좀 더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운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끄러움이란 개인적인 기질과 성향의 문제가 아니다. 부끄러운 것이란, 최선을 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과를 얻지 못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면, 어떤 청년이 지리산의 천왕봉 정상을 1시간 만에 오르겠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시작했으나, 정상 근처도 못가보고 중간에 포기하고 말았을 때, 이것을 부끄럽다고 말한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4장에는 그 비슷한 비유가 나온다. 누가 망대를 세우고자 하고 자기의 가진 것으로 준공하기까지 족할 것인지 그 비용을 계산하지 않겠는가? 만약 그런 계산이 없이 덤벼들었다가 기초만 쌓고 능히 이루지 못할 것이니 이를 보는 자가 다 비웃을 것이라는 예수님의 비유가 나온다.(28-30)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을 의미한다. 시작은 했으나, 완성에 이르지 못하게 되었을 때 이 일을 시작한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만다. 


또한 우리가 의지한 것이 우리가 목표한 곳까지 온전하게 이르도록 인도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러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느 입시학원에서 월 천 만원씩 내면 실력에 상관없이 원하는 대학에 입학을 보장하겠다고 광고를 냈다고 하자. 그 만큼 그 학원의 노하우와 강사가 뛰어나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라 하겠다. 학부모는 학원비가 부담스럽지만 자녀를 일류 대학에 들여보내고 싶은  마음으로 무리해서 학원을 등록시키고 그 학원에서 지도하는대로 공부하도록 지원했다. 그런데 결과는 일류가 아니라 이류대학에 입하게 된 것이다. 학원의 노하우와 실력은 상당히 뛰어났으나, 그 자녀의 수준이 너무 함량미달이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그 학원을 믿고 월 천만원씩을 들여 공부시켰으나, 부모의 기대는 이루지 못하게 되었다. 그 때 그 학원을 믿고 의지해서 자신의 자녀를 맡긴 부모는 부끄러움을 당하게 된 것이다. 



부끄럽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다. 내가 나를 의지했는데 기대했던 결과를 얻지 못할 때 부끄럽게 되고, 내가 무엇인가를 의지했는데 그것이 우리의 기대를 이루어내지 못했을 때 우리의 기대(믿음)은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이것과 관련하여 성경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을 의지했다. 율법을 따르고 의지하면 반드시 의롭게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이스라엘을 부끄럽게 하고 말았다. 율법을 의지하며 쫓아갔던 많은 사람들이 수 많은 율법을 온전히 이룰 수 없어서 중간에 결국 낙오하고 만 것이다. 부끄러운 인생이 되고 만 것이다. 전 인생을 걸고 율법을 쫓아 살아왔던 바리새인들 조차도 우리가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의 기준에 만족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확신을 가지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문제는 외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하나님의 말씀도 그것을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고민끝에 한 밤 중에 예수님을 찾아 온 니고데모에 대해서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요 3장) 결국 <율법>을 철저하게 의지한 삶 조차도 우리를 부끄럽게 할수 밖에 없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 바울이 지금부터 말하고자하는 그 복음은 어떤가? 결코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단언한다. 한 명의 예외없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16절) 그것이 지금 바울이 로마의 교회 성도들에게, 그리고 우리들에게 말하고자 하는 복음에 대한 확신이다. 바울은 로마서 후반부에 이와 같은 내용을 반복적으로 다시 언급함으로 자신의 확신을 다시한번 강조하고 있다.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 10:11-13)



<율법>이란 방법으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만, <믿음/은혜>라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 사람이 누구이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라고 바울은 확신가운데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울이 독자들에게 전해주고 싶은 복음이다. 




우리는 이 땅을 살면서 나 자신을 포함해 많은 것을 의지해서 살아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무엇이 우리의 기대를 부끄럽게 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자신의 열심과 능력을 의지해서 살아갈 것인가? 주변 사람들의 보호를 의지할 것인가? 이 땅의 교육과 학원 시스템을 의지할 것인가? 나의 직장을 의지할 것인가? 은행에 맡겨진 돈을 의지할 것인가? 부동산을 의지할 것인가? 아니면 이 나라 대한민국을 의지할 것인가? 


나라마져 부도가 나고 파산에 이르는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 다행이다. 이 땅에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고, 우리 인생을 끝까지 책임져줄 수 있는 것이 있을까? 단언컨데 없다. 우리가 의지하는 이 땅의 모든 것은 결국 우리를 부끄럽게 만들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의지하지 않고 불신 가운데 표류하며 살아갈 것인가? 과연 그것은 가능할 것이며, 설사 가능하다 하더라도 행복할 것이라 보장할 수 있는가?



바울은 복음을 접하고 깨닫고 나서, 누구에게든지 기회가 있는대로 <복음>을 전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 중 유일하게 확실한 것은 <복음> 말고는 없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도 <복음>을 전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확신가운데 담대하게 <복음>을 전한다.



그렇다면, <복음>의 실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복음이 무엇을 담고 있길래, 율법을 의지해서 살아가던 바울을 전혀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 놓았단 말인가!



다음 이야기에서 그 내용을 조금씩 다루어 보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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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7:27-29] 하나님은 성도를 버리지 않고 영원히 보호하시지만(28절), 그 의미는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는 그분의 성품(28절)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에 이야기 한 것만을 붙잡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위에 복음을 세우며, 구약의 토대 위에 신약을 세우는 것이 마땅한듯 합니다. 



[본문] 


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28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절.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정리]


1. 하나님의 요청과 그 결과


   악에서 떠나라

   선을 행하라

    ->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2. 하나님의 성품과 그 결과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의 성도는 영원히 보호를 받는다.(그의 성도와 정의를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진다. 


[묵상]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게 악을 떠나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정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않으신다. 영원히 보호를 하신다. 그것은 사랑하신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듯 그의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의와 그의 성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상 옳지 않고 오히려 그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정의에 합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성도를 <은혜를 입은 자>라고만 생각하지, <거룩을 추구해야 하는 자>로서의 개념에는 미흡하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존재,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에만 치중하지 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성경은 그 다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쏟아 놓는데 비해 우리는 그 길에 들어서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을 읽고 신약을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해본다. 물론 혼자 읽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율법이 있고 그 토대위에 복음이 복음될 수 있으며, 구약의 토대 위에 신약의 참된 메시지가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에도 한 번 쓴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니라, 정의의 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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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19편] 하나님의 율법(교훈)의 중요한 역할 중에 하나는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는 의의 자리에까지 인도해 주지는 못하지만, 현재의 자리가 잘못된 자리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하나님의 법은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해준다. 복음은 거기서부터 시작한다. 


[정리1]


1. 우주에 펼쳐지는 하나님의 영광(1-6절)


  1절.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절. 날은 날에게 말하고 /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절. 언어도 없고 / 말씀도 없으며 /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절.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

   해는 그의 신방에서 나오는 신랑과 같고

   그의 길을 달리기 기뻐하는 장사 같아서

   하늘 이 끝에서 나와서 하늘 저 끝까지 운행함이여

   그의 열기에서 피할 자가 없도다. (6절)


: 만물의 섭리를 통해 보면 하나님의 일하시는 것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된다. 만물에 하나님의 음성은 없지만, 분명히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아무도 부인할 수 없다.



2.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나오는 지혜(7-11절)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원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지혜로운 말씀으로 말미암아(율법) 내가 경고를 받고 그것을 지킴으로 말미암아 내가 얻는 상이 크다. 하나님은 만물을 다스리시며 운행하신다.(만물에게 질서를 부여하시고) 그리고 그 원리를 기초로 하나님의 율법을 주시어 그것으로 가르치고 훈계하신다. 따라서 그의 법을 지키는 자는 상을 얻는다. 


3. 누가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있는가?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소서.(12-14절)


  12절. 자기 허물을 능히 깨달을 자 누구리요 / 나를 숨은 허물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13절.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 사람은 스스로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없는데,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허물을 깨닫게 하시어 우리로 하여금 숨은 허물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인생이 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 허물이란, 고의로 죄를 짓거나 죄가 나를 주장하게 하여 큰 죄과를 짓게 되는 것을 말한다.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여호와의 율법을 따르는 것이다. 


  14절. 나의 반석이시요  /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정리2]


1. 하나님은 당신의 지혜로 만물을 다스리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2. 하나님의 율법과 교훈과 계명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으로 그것은 귀한 것이다.(만물의 질서를 기초로 한 인생들의 지혜) 


3. 가장 직접적인 적용은 자신의 허물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의 허물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고의로 죄를 짓기도 하고 죄가 나를 주장하도록 방치하는 어리석음을 지속할 수 있기 때문이다.(율법은 자신의 허물을 깨닫게 해주시고, 그로 인해 우리가 돌이킬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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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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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룻기 2장] 율법은 구속이고 제한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율법은 은혜와 자비의 통로였다. 율법이 구속이요 제한이라고 여겼던 자들은 강한자요 부한 자들이었다. 왜냐하면 율법은 이들의 힘과 권력을 제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난한자 연약한 자들에게는 율법은 은혜의 통로였고, 그들이 살 수 있는 숨통이었다. 오늘날의 복지 정책이 이와 같은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룻이 베들레헴의 유력한 자 보아스의 밭에서 일하게 된 이야기

  1)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으로 유력한 자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보아스였다. 

  2) 룻은 나오미에게 자신이 누군가에게 은혜를 얻으면 그를 따라 이삭을 줍겠다고 하자, 나오미는 이를 허락한다. 

  3) 룻은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게 되었는데, 우연히 들어간 그 밭은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의 밭이었다. 

  4) 보아스는 때마침 그곳을 방문하여 일하는 농부들에게 축복의 말을 인사로 했다. 

  5) 보아스는 자기 밭에서 일하는 낯선 소녀를 보게 되고 그 종 중에 하나에게 그녀가 누구인지를 묻는다. 

  6) 종은 룻이 나오미와 함께 모압에서 왔고, 아침부터 지금까지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2. 보아스가 룻에게 호의를 베푸는 말을 해주다.

  1) 보아스는 룻에게 이삭을 주으러 다른 곳으로 가지 말고 여기를 떠나지 말라고 말해준다.

  2) 보아스는 일하는 일꾼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못하게 하고, 목이 마르면 일꾼들이 떠온 물을 마시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3) 룻은 자신에게 큰 호의를 베풀어 준 것에 대해서 감사함을 표현했고,(나는 이방여인인데 어찌 은혜를 베풀어주시나이까?) 룻이 자신의 시모를 위해 자신의 고국을 떠나 왔다는 사실을 안 보아스는 하나님의 날게  아래에 보호 받으러 온 너에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축복했다.   

  4) 룻은 보아스에게 자신에게 그런 은혜입기를 원한다고 고백했고, 보아스의 말에 큰 위로를 얻었다. 


3. 보아스가 룻에게 베푼 호의

  1) 식사할 때에 

   (1) 이리 와서 떡을 먹고,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어 먹으라. 좋은 자리에 앉아 볶은 곡식을 주매 배불리 먹었다. 

  2) 보아스는 자기 소년들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라고 지시했다.

  3) 그를 위해서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벌셔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고 했다. 


4. 보아스에게 얻은 호의를 룻이 나오미에게 말하다. 

  1) 룻이 그 날 하루 이삭을 주워 모은 양이 보리 한 에바쯤 되었다. 또한 자신의 먹고 남은 양식을 보여드렸다. 

  2) 나오미는 어디에서 이런 은혜를 얻었는지를 묻자, 룻은 보아스 라는 사람의 밭에서 일했다고 했다. 

  3) 나오미는 보아스라는 말에 그는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고 고백하고, 그가 자신들과 가까운 친족으로 기업 무를 자라는 사실을 언급한다. 

  4) 나오미는 룻에게 추수가 마칠 때까지 다른 밭에 가지 말고 그 밭에서만 일하라고 했고, 룻은 결국 보리 추수와 밀 추수를 마치기까지 이삭을 주우며 그의 시어머니와 함께 거주하였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


룻은 나오미의 허락을 받고 이삭을 줍기 위해 밭으로 나간다. 우연히 찾아 들어간 곳이 보아스 라는 유력한 사람의 밭이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보아스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친족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와 같은 사실은 모른채 룻은 아침부터 보아스가 자신의 밭을 둘러보러 오는 시간까지 열심히 일했다. 


마침 자신의 밭을 둘러보기 위해서 온 보아스는 낯 선 소녀를 보게 된다. 종에게 그녀가 누구인지를 묻자 나오미와 함께 자신의 고향을 떠나온 룻이라는 여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보아스도 소문을 통해서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터고 자신의 시모를 섬기기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젊은 여인의 모습이 귀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보아스는 룻에게 위로의 말과 축복의 말을 한다. 하나님은 그 날개 아래 피하는 백성에게 복을 주신다는 말로. 더불어 자신의 남종들에게 룻을 건드리지 못하도록, 음식과 물을 마실 수 있도록 해준다. 룻은 보아스의 이와 같은 호의에 감사하며, 큰 위로를 받는다. 자신은 이방 여인인데... 이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감사한 것이었다. 


보아스가 베푼 배려는 매우 파격적이었는데, 곡식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도록 한다든지 일부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서 룻이 주울 수 있도록 했다. 이로 인해 룻은 한 에바나 되는 양의 이삭을 얻었고, 충분히 먹은 음식의 남은 것을 가지고 나오미에게로 갔다. 나오미는 룻이 들고 온 이삭의 양과 음식을 보고, 누구에게 호의를 입었다는 것을 금새 알게 된다. 룻은 그 사람이 보아스라는 것을 알려주고, 나오미는 보아스가 자신들과 어떤 관계가 있는 사람인지를 간파한다. 기업을 물어줄만큼 가까운 사람인 것이다. 보아스는 룻에게 다른 밭으로 가지 말고 계속 그 밭에서 일하도록 지시한다. 룻은 보리추수와 밀추수가 마칠 때까지 그곳에서 이삭을 주으며 지내게 된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하나님은 룻과 보아스를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만나게 하셨다. 

룻과 보아스의 만남은 우연의 일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룻은 우연히 보아스의 밭에 갔고, 보아스는 마침 자기의 밭에 찾아 왔다. 그리고 유독 룻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가 우연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 중에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다. 하나님의 섭리적인 만남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연처럼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 필연을 만들고 역사를 만들어가 가신다. 우리는 일상에서 눈을 떠서 우연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필연이 무엇인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을 더욱 의식하게 되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간파할 수 있게 되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더욱 분명하게 느끼며 살수 있게 된다 


2. 보아스는 룻의 행실을 보고 칭찬하고 축복했으며 많은 혜택을 주었고, 룻은 그것으로 인해 위로를 얻고 감사했다. 


보아스는 룻의 행실에 대한 소식을 알 고 있었다. 자기 민족과 신을 버리고 나오미를 좇아 온 룻의 귀한 충성을 들었다. 보아스는 그것을 좋게 여겼다. 그런데 자신의 밭에서 일하고 있는 룻을 보게 된 것이고, 룻이 성실하다는 평가를 듣게 된다. 보아스는 룻의 행실을 칭찬하고 그에게 하나님의 복이 있기를 축복했다.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와 은혜를 배풀었다 

룻은 보아스를 통해서 큰 위로를 얻었다. 자신의 처지를 이해해주고, 그런 선한 행실에 대한 복을 빌어주며 현실적으로 따듯한 대우를 해주는 보아스로부터 큰 격려를 얻은 것이다. 


나오미의 배려는 룻의 충성으로 나타났다. 룻의 충성은 보아스의 마음에 좋은 이미지를 주었고, 보아스는 그 충성을 축복했다. 그리고 다시 룻은 그것으로 인해 위로를 얻게 된다. 선한 헌신이 하나님의 위로로 나타나는 것 같은 모습이다. 우리의 선한 수고와 헌신은 하나님 안에서 인정과 상급으로 반드시 나타나게 된다. 



3. 나오미는 이와 같은 사건을 통해서 <기업 물어줌을 통해서 얻는 소망>을 바라보게 되었다. 


나오미는 룻의 생각 밖 수확에 놀란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은혜에 보아스라는 친족이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거의 본능적으로 <기업무를 자>의 법에 대한 잊고 있던 율법이 생각나게 되었다. 즉, 이 만남은 하나님의 은혜의 법을 생각나게 하는 것이 된 것이다. 그리고 나오미는 그 자신들에게는 은혜로운 법을 의지하여 나아가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것을 가장 민첩하게 본 사람이 바로 나오미다. 나오미는 많이 세속화 되어 있는 이스라엘을 대변하는 존재이지만, 그럼에도 그들에게는 여전히 하나님의 법이 있고, 그 법은 그들에게 유효했던 것이다. 이제 나오미는 그 길을 열어가는 사람이 된다. 


율법이란 강하고 부한자들에게는 제한이 된다. 그러나 약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은혜와 복지가 된다. 율법을 제한으로만 여기는 사람은 자신이 강한 때를 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약할 때에는 율법이 은혜의 통로가 된 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그리고 그 약한 자가 강한 자로 어떤 혜택을 얻기 위해서는 반드시 법의 강제가 없이는 불가능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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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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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여호수아 23장] 성도란 안주란 없습니다. 천국에서조차 그렇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선물로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조차 멸절시키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 앞에 성도가 어찌 안주할 수 있겠습니까? 안주를 조장할 수 있는 교리에 대해서 우리는 늘 경계하고 정확하게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수아가 나이 들어 온 이스라엘에게 주고 있는 권면

  1) 여호와께서 모든 원수들로부터 이스라엘을 쉬게 한 후에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었다. 

  2) 여호수아는 장로들과 수령들과 재판장들과 관리들을 불러다가 모아놓고 권면함


2. 여호수아의 권면(경고) 내용

  1) 너희가 다 봐서 알겠지만,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것이다. 

  2) 너희들이 모두 기업을 얻게 된 것은 여호와께서 너희 목전에서 그들을 떠나게 하신다는 약속대로 이루신 것이다. 

  3) 그러므로 너희들은 이렇게 행하라

   (1)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떠나서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

   (2) 너희 중에 남아 있는 민족들 중에 들어가지 말라. 그들의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고,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 또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 

   (3) 오늘까지 그랬던 것처럼 여호와를 가까이 하라. 이는 강대한 나라들을 너희 앞에서 쫓아내셨고 오늘까지 너희에게 맞선 자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너희 한 사람이 천명을 쫓을 것인데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기 때문이다. 

   (4) 너희 중에 남아 있는 민족들을 가까이 하여 더불어 혼인하며 서로 왕래하면

    - 여호와께서 이민족으로 너희 목전에서 쫓아내지 아니할 것이다. 

   -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고, 덫이 되며 옆구리의 채찍이 되고 눈에 가시가 될 것이다. 

   - 그리고 마침내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신 이 아름다운 땅에서 멸하리라. 


3. 여호수아의 권면의 마무리

  1) 나는 모든 사람이 죽는 것처럼 지금 죽음을 향해 가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 가운데 그대로 응하게 될 것이다. 

  2) 지금까지 너희에게 하신 선한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 진 것같이 모든 불길한 말씀도 너희에게 임하게 될 것이다.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하기까지 할 것이다. 

  3) 만약 너희들이 너희들에게 명령한 언약을 범하고 다른 신을 섬겨 절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너희에게 미치게 될 것이다.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너희가 속히 멸망하리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쓰기]


가나안 정복이 모두 마치고 분배도 마쳤다. 요단 동편에 기업을 이미 차지했던 두 지파 반도 돌아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평온한 시절이 왔다. 이제 여호수아도 모세처럼 나이들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날이 가까웠다. 여호수아는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놓고 마지막 권면을 한다. 


먼저는 하나님이 너희를 위해서 싸우신 것과 그 약속대로 대적으로 쫓아 주신 것을 강조한다. 그러나 이런 승리는 저절로 지속되지는 않는다. 계속되는 이스라엘의 노력이 필요한데,  첫 번째는 모세의 율법 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떠나서는 안 되고 좌로나 우로 치우쳐도 안 된다. 편견 없이 그 말씀대로 온전히 행해야 한다. 둘째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이다. 남아 있는 민족들 가운데로 들어가 그들의 신을 부르고, 그 신들을 향해서 맹세하고 그것을 섬겨 절하는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 민족들과 가까이 하여 혼인하고 서로 왕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너희 가운데서 쫓아내지 아니하고, 그들이 너희의 올무가 되고 덫이 되며 채찍과 가시가 되게 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마침내 여호와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신 아름다운 땅에서 멸망당하게 되는 비참을 경험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 사실이었던 것처럼, 너희를 향한 불길한 말씀도 임하게 될 것임을 경고하신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여호수아는 자신의 생애 마지막을 후손들을 위한 권면으로 마치고 있다.


나이가 많아 모든 사람들이 가는 곳으로 갈 때, 여호수아는 마지막 자신이 해야할 또는 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을 온 이스라엘의 지도자들을 위한 권면으로 보았다. 여호수아는 모든 지도자들을 불러모았고, 우리가 얻은 성취와 승리가 어디에서 부터 온 것인지를 명확히 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해주신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저절로 유지되는 승리와 평화는 아니다. 지속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을 충실히 지켜야 함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좌우로 치우친다든지, 다른 민족들과 섞여 혼인관계를 맺는 다면 하나님이 주시는 평화란 깨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이 누리고 있는 평화의 근거는 하나님의 승리하게 하심이기 때문이다. 여호수아는 이 중요한 핵심을 잊지 않도록 권면(경계)하고 있는 것이다. 


여호수아는 자신의 인생을 마감하면서, 자신의 치적을 은근히 자랑하면서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아니면 좋은 이야기로 덕담을 주면서 좋은 분으로 인상지워지게 하면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수아는 그런 이미지와 평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듯 하다. 사건의 현재의 평화에 근간을 파악하고, 그 평화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고 확대되기 위해서 지도자들이 잊지 말아야 할 것 그리고 특히 경계해야 할 것에 대해서 정확하게 지적한다. 그리고 경계해야 할 것을 간과할 때 어떤 결과가 오게 될지에 대해서도 가감없이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선물은 좋은 선물, 이쁜 선물을 준비하려고 하지 말자. 당장은 거칠지만 두고두고 유익할 선물을 준비하자. 그것이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핵심적인 덕목중에 하나다. 


2. 축복의 말씀도 신실하지만, 불길한 말씀도 신실하다는 것이다.(15절)


하나님 앞에는 언제나 축복과 저주가 함께 있다. 성도인 우리의 삶 앞에도 마찬가지다. 축복이 신실한 것처럼, 저주 또한 신실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게 알고 순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저주가 임할 것이다. 


저주의 신실함에 대해서도 잊지 말아야 한다. 


3.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아름다운 땅에서조차 멸절할 수 있다.(15절) 


이스라엘은 어렵고 힘들께 가나안, 아름다운 땅을 소유로 얻었다. 이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큰 희생을 치르고 배움의 과정을 거쳤다. 그래서 약속으로 받은 아름다운 땅을 소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잊어서는 안된다. 이것은 기계적으로 영원히 누리게 되는 땅이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받은 아름다운 땅에서 멸절되는 비참을 경험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도 하신다. 따라서 성도에게 있어서 안주란 없다. 기계적인 보장도 없다. 


성도는 늘 긴장하며 살도록 부르심을 받은 존재다. 아름다운 땅에서 조차 멸절될 수 있다면 우리가 어찌 안주할 수 있겠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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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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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묵상은 아침에 집에서 정리1과 정리2를 하고, 출근하고 나서 정리3 작업을 합니다.  

 

[정리1. 내용을 이야기의 순서대로 정리]

 

1. 유다 왕 아마샤에 대하여
  1) 25세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29년간 다스림. 어머니는 여호앗단, 예루살렘 사람이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다윗같지는 못했다. 그의 부친 요아스과 같이 행함. 산당은 여전히 제거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3)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음.
   (1)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한대로 한 것이다.
   (2) 자녀로 말미암아 부모를 죽이지 말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라는 법대로.
  4)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명을 죽이고, 또 전쟁하여 셀라를 취하여 욕드엘이라 함.
  5)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만나서 전쟁할 것을 알림
   (1)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아마샤가 에돔을 이기더니 교만해졌다며 그의 제안을 일축하려 했다.
   (2) 아마샤는 고집스럽게 전쟁을 하려하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가서 유다를 침.
   (3)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벧세메스에서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었다. 
   (4)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6) 아마샤는 요아스 왕이 죽은 이후 15년간을 다스렸는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여 라기스로 도망하던 중 거기서 죽게 된다. 시신은 다윗 성으로 옮겨져 장사하게 된다.
  7) 유다 온 백성이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우고, 아사랴는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2.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에 대하여
  1)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41년 간 다스림
  2)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함
  3) 요나를 통해 말씀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함(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4)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다.
  5) 여로보암의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다메섹을 회복한 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

 

[정리2. 내용을 재구성하여 자신의 말로]

 

본장은 유다와 아마샤와 이스라엘 왕 요아스 사이의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2)의 활약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유다 왕 아마샤는 평균 이상은 되는 왕이었지만, 다윗과 같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가 나라를 그의 손에 장악했을 때, 그의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단한다. 그러나 과도한 처벌을 하지는 않았다. 모세의 법대로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처벌하고, 그의 자녀들까지 죽이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에돔을 정벌하고 셀라를 취하여 얻기도 했다. 아마샤는 국내에 있어서도 국외에 있어서도 자신감을 갖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이 교만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무리하게 유다 왕 요아스와 전쟁을 하려고 했고, 결국 요아스에 의해서 아마샤는 사로잡히는 수모를 당하고, 예루살렘 성벽은 일부 허물어졌으며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과 모든 기명이 탈취를 당하게 된다. 나중에 아마샤는 자신의 부친과 같이 반역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유다는 아마샤를 대신해서 아사랴(웃시야)를 왕으로 세운다.


북이스라엘은 요아스가 죽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된다. 여로보암은 요나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전역을 확대한 위대한 왕이었다. 그의 영토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였다. 아람으로부터 다메섹을 빼앗았고, 유다로부터는 하맛을 빼앗았다. 이와 같은 역사를 놓고,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구원자가 없으므로 또한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게 하셨다고 다소 시크하게 평가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

 

아마샤는 아마 평점 4(5점 만점) 정도는 맞는 왕이었던 것 같다.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아버지를 뒤를 이어 갑작스럽게 왕이 되었지만, 안정적으로 자신의 기반을 잘 닦아 갔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위과 같지는 못하지만 괜찮은 왕이라는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을 숙청한다. 눌러왔던 복수와 심판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샤의 심판은 달랐다. 복수를 위한 복수가 아니라 죄를 묻기 위한 형벌이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샤가 법이 제한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죄를 지은 그 당사자만을 심판했지,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 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샤는 법 안에서 절제있게 권력을 사용한 것이다. 아마샤의 놀라움은 이 절제된 권력 사용에 있었다. 열왕기 기자도 아마샤의 그 부분을 기록함으로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권위를 위한 권력을 필요하고,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의 권력이 온다. 그러나 그 권력은 언제나 통제가 되고 절제가 되는 권력일 때 정당성을 가지고, 유익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만약, 권력이 법이라는 절차와 테두리를 벗어나 한 개인과 집단 마음대로 휘두르게 된다면 그것만큼 역사적으로 큰 비극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역사가 진보한다면, 오늘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측면에서의 진보가 필요하다. 법을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권세가들로부터 그 권력을 빼앗아, 법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권력을 사용하는 권세자를 세워야 할 것이다.

 

2. 교만은 결국 사고를 치게 되어 있다.

 

아마샤는 국내 정치를 안정적으로 운영했을 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그 힘을 확장해 갔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경험했고, 국방도 강화하여 에돔과 같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셀라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샤의 마음에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도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었나보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아마샤의 이런 제안을 우습게 여겼지만, 아마샤는 결국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원했고 그 결과는 비참한 패배였다. 왕은 사로잡혔고, 많은 재산을 빼앗겼으며 성도 허물어지고 포로도 잡혀갔다. 아마 이 전쟁을 계기로 아마샤의 지지도는 급격히 하락했을 것이라 본다. 결국 아마샤는 반역자들의 손에 의해 라기스로 도망하는 도중에서 죽게 된다.

 

아마샤의 시작은 좋았다. 다윗까지는 아니어도 다윗과 견주어 비교할만한 왕이었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인정받는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도를 넘었다. 교만을 다스리지 못했고 과시하려고 했고, 자신을 더 크게 보이고 싶어했다. 무리한 전쟁을 한 것이다. 그것이 한 순간 아마샤의 인생을 망처버린 것이다.

 

최근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인해 월드스타로 주목받고 있다. 참, 대단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김장훈 씨와의 불화설이 나돌고, 둘 사이가 않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정확한 불화의 원인을 모르지만, 마음 한 편 불안한 것은 교만으로 인해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너무 높은 곳을 갑자기 올랐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걱정이다. 아직까지는 그의 모습이 자신감으로 보일 뿐, 교만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섰을 때 우리는 넘어질까 조심할 수 있어야 한다.

 

교만 교만 교만 = 패망 패망 패망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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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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