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질문>

목사님~

마음속의 의문이 있습니다.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고 계신 분이 계십니다.

불의에 대해 단호하고, 이웃에 대한 긍휼의 마음이 있으며, 자신의 부나 이익을 챙기는 것에 가지는 관심보다 내 것을 내 놓아 더 많은 공동체 구성원이 혜택을 받기를 실천하시는 분입니다.

제가 보기엔  철학과 유학을 깊게 공부하고, 사회과학에 젊은 날 심취해 있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분은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사회정의 추구나 자기희생을 통해 타인에게 이로움을 준 사람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분깃이 없나요?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 모든 것을 행해야 알곡이 될 수 있는 건가요? 

하나님께서 이런 분들에게도 상급을 주실까요?


<답변>

이런 분들이 적지 않게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참 훌륭한 분들이시죠. 이런 분들을 보면 저희들이 부끄러워지기도 하고요. 이런 분들의 구원까지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분들의 희생적이고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헌신하시는 삶 때문에 우리도 혜택을 입고 사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측면에서 그 혜택을 입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고 그에 따른 존경을 받아야 할 분이라는 것은 틀림이 없을듯 합니다. 


다만 성경을 통해서 볼 때, 특히 구원에 대한 입장에서보자면 하나님의 입장은 분명한듯 합니다. 구원은 사람의 의로운 행위와 삶에 근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의와 은혜에 근거한다고 하고 있으니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나라인데,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자리는 없을듯 합니다. 그러나 언제든지 인간 자신의 한계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나온다면 하나님은 기뻐 환영할 것입니다. 


자기 희생적인 삶을 살아오신 분이라면 하늘에서의 상은 없을지라도 이 땅에서의 상을 받으리시라 생각합니다. 주변으로부터의 존경일 수도 있고,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희생으로 혜택을 얻는 것을 보는 것으로 인한 만족일수도 있고요. 사람의 나라에서 수고한 것은 사람들에게 상을 얻는 것으로(정도의 차이는 있고, 시간의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갚아주시기 않을까 생각합니다. 


비슷한 고민을 해보기는 했습니다만 많은 책들을 살피면서 드리는 답변이 아니라 많이 미흡합니다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셨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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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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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절.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시니 한쪽 손 마른 사람이 거기 있는지라

2절. 사람들이 예수를 고발하려 하여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치시는가 주시하고 있거늘

3절. 예수께서 손 마른 사람에게 이르시되 한 가운데에 일어서라 하시고

4절. 그들에게 이르시되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것이 옳으냐 하시니 그들이 잠잠하거늘

5절.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6절. 바리새인들이 나가서 곧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까 의논하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가셨다. 거기에 한쪽 손 마른 사람이 있었고(고침받기를 원해서 그 자리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사람들이 예수님이 그 손 마른 사람을 고치는가 주시하고 있었다. 

2. 예수님은 오히려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신듯 하다. 그 손 마른 사람을 한 가운데 일어서라고 하고 모인 사람들을 향해서 질문하시고 그들 스스로 무엇이 옳은 행동인지를 답하도록 하셨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무엇이 옳은 일인가? 안식일에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중 무엇이 옳은 것이냐?” 무리는 잠잠했지만 그것은 모르거나 알 수 없다는 반응이 아니다. 안식일에 선을 행하고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는 것에 대한 인정이었다. 

3. 문제의 핵심은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에 있는 것이었다. 안식일 규정도 문제가 없고,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것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안식일의 본질은 잊고 껍데기를 율법주의적으로 붙잡고 강요하고 있는 이들의 ‘완악함’이 문제인 것이다. 주님은 그들에게 탄식하시고 노하셨다. 

4. 예수님은 한쪽 손 마른 자에게 ‘네 손을 내밀라’하시고 그가 내밀매 손이 회복되게 하셨다. 

5. 이런 현장을 직접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어찌할 수 없다는 사실에 헤롯당과 함께 예수를 죽이는 것에 대한 논의를 한다. 이런 그들의 행동이 그들의 ‘완악함’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질문하기]

1. 예수님은 이 사건을 계기로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되었다. 왜 굳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심으로 스스로를 생명의 위협에 빠지도록 자처하셨는가? 

  - 예수님은 치유하시는 능력이 있으시고 손 마른 사람은 긴급한 환자는 아니기 때문에 다음날 오라고 해서 고치셔도 문제가 없다. 아니 오히려 그렇게 하는 것이 괜한 갈등을 일으키지도 않고, 실속도 있는 행동처럼 여겨진다. 그러나 주님은 오히려 안식일에 그 병자를 공개적으로 고치심을 통해 ‘안식일이 무엇을 위한 날’인지, ‘하나님이 왜 안식일 규정을 주셨는지’ 명확하게 알리기 원하셨다. 그렇게 하려면 안식일, 회당에서 공개적으로 손 마른 자를 고치시는 것 만큼 좋은 효과도 없는 것이다. (게다가 바리새인들은 그 손 마른 자를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지켜보고 있었으니 더욱 효과적)

2. 과연 안식일은 무엇을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날인가? 

  - 안식일은 구별된 날로 (자신의 생명을 위해서는) 일하지 않아도 생존할 수 있는 날이다.(하나님이 그의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시는 것처럼)

  - 그러나 안식일은 아무것도 해서는 안되는 날이 아니다. 다른 사람의 생명을 위해서나 선을 위해서는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하는 날이다. 예수님이 손 마른 자를 안식일에 고쳐주시고 회복시켜 주셨던 것처럼.

3. 예수님께서 탄식하시며 분노하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 완악함이다. 가르쳐주어도 듣지 않고, 깨닫게 해주어도  받아들이지 않는 완악함이다.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이 옳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으면서도 귀를 닫고 오히려 예수를 죽이고자 하는 마음에 대해서 주님은 탄식하시고 분노하신다. 

[묵상하기]

1. 안식일은 자신의 생명, 자신의 확장, 자신의 번영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행하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의 삶을 책임지신다는 것을 믿음으로 보여주는 날이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의 생명을 살리고, 사회적 선을 행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의 뜻을 이 땅에 적극적으로 확장하는 일꾼으로서의 충성을 보여주는 날이어야 하는 것이다.    

2. 사람들이 죄 때문에 망하는게 아니다. 죄를 짓고도 돌이키지 않기 때문에 망하는 것이다. 죄를 숨기고 부정하고 죄를 드러낸 사람을 죽이고자 하는 완악함이 결국 자신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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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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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해설]


[5]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 


은혜와 사랑, 자비와 구제를 힘써야 하는 것이 교회이지만 교회는 구제단체는 아니다. 교회가 구제하고 도와야 하는 대상은 열심히 살고자 하지만 개인의 병과 환경 그리고 제도적인 문제로 인해 개선하기 어려운 대상을 돕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국가가 해야할 혹은 할 수 있는 복지의 영역에 교회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싶다. 오히려 개인적으로 제도적으로 도움이 미치지 못하는 영역을 찾아 도와야 하는 것이 교회의 구제 사역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구제하기 이전에 교회는 자기의 일을 자기가 하도록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즉, 교회가 게으름이나 나태함을 보조해 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성도들은 개인의 짐을 스스로가 져야 한다. 그것이 원칙이 되어야 한다. 더불어 책임져야 할 대상의 가족은 먼저 책임지도록 해야 한다. 그 다음에 서로의 짐을 져주어야 한다.(갈 6:2)


[6]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이 말씀은 가르침을 주는 대상을 존중하고 잘 대접하도록 힘쓰라는 것으로 이해된다. 이는 단순히 '가르치는 자의 입장'에서 대접을 잘 해주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받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가르치는 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고, 그 중요함에 합당한 마음가짐을 가지라고 보는 것이다. 


이 권면은 더 나아가서 '가르치는 자'를 선정할 때, 매우 신중해야 함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얼마전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했는데, 참석했던 한 성도는 집회를 인도했던 부흥사에 대해서 큰 실망을 했다. '우리를 어떻게 보고 저런 분을 모셨는가?'에 대해서 분개해하셨다. 그만큼 우리가 우리의 교사를 선택할 때도, 또 가르침을 받는 자를 대할 때에도 매우 신중하고 또 그에 대한 대우를 함으로서 계속해서 그와 같은 좋은 가르침을 기대하로 바란다는 태도를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어느 교회는 '가르치는 자'를 고용(?)하듯 데리고 와서는 함부로 하려고 하는 교회도 있다고 한다. '가르치는 자'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니라, '종'을 데리고 온 것에 불과하다. 그 교회의 수준이 어찌 될지는 뻔한 것이다. 


[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9]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10]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


사람들의 행위는 그 행한대로 대우를 받게 되어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기 때문에 사람은 심은대로 거두게 되어있다.(갈 6:7) 육체의 소욕을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게 된다. 반면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자는 영생을 거두게 된다. 이 말은 갈라디아서 5장에서 언급한 육체와 성령의 대조를 다시 한 번 언급해 준다. 


갈 6:1-6까지의 여러가지 권면들이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우리 육체의 소욕을 따른다면 우리는 이 땅에서 썩어질 것 밖에는 거둘것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선을 행하면서'도 쉽게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성령의 소욕을 따라, 선을 행하며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때가 이르게 되어 그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기에 그렇다. 때가 되어 예수가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듯이, 우리 인생에도 때가 되면 결실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묵상]


1. 특별법을 가르치기 전에 일반법을 가르쳐야 한다. 


복음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복음이라는 특별법이 선포되기 전에 우리는 윤리라는 일반법이 선포되어야 함을 잊어서는 안된다. 율법이 온 이후에 복음이 온 것처럼 우리는 어쩌면 마땅히 해야할 윤리를 배우고 그 다음에 관용과 자비인 복음을 배워야 하는지 모른다. 


서로의 짐을 져주기 전에 우리는 자기의 짐을 자기가 지는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 자기의 짐을 다른 사람이 져주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기 때문이다. 복음이 중요한 줄은 알지만, 때로는 복음이 사람을 망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하게 된다. 


값싼 복음에 물든 한국 기독교가 바로 그 지경에 있는 것은 아닌가 염려한다. 특별법 이전에 일반법을 먼저 가르쳐야 한다. 


2. 바울의 권면의 핵심은 '육체의 소욕'을 따르지 않고 '성령의 소욕'을 따르도록 하는 것이다. 


자기의 일을 자신이 하는 것(책임감)도,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는 것(돌아봄, 섬김)도 서로 종노릇 하는 것도 모두 '육체의 소욕'을 따라서는 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사람들은 '사랑'이 동기가 되어 공동체 있는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자신의 일'을 잘 감당하고, 더 나아가 '적극적인 섬김'을 행하기도 한다. 그래서 '성령의 소욕'을 따르는 성도들이 많을 때 교회 공동체는 성숙함으로 자라갈 수 있는 것이다. 



특별법을 가르치기 전에 보편적인 법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보편적인 법을 모른채, 특별법만 강조하게 되면 이상하게 되는 것처럼 '은혜라는 측면에서의 특별법'만 가르친 것이 오늘 많은 한국 교회 성도를 방자하게 만든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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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요한삼서입니다. 본문이 짧고 내용도 간단한 편이어서 시간이 많이 걸리지는 않습니다. 내용에 있어서 요한일서와 크게 다르지도 않고요. 오히려 좀 구체화된 사례라고 보면 좋을 듯 합니다.

 

[정리1. 내용정리]

1. 요한이 장로인 <가이오>를 축복하며, 그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는 소식에 기뻐한다.(1-4절)

2. 장로 <가이오>가 행하고 있는 선행에 대한 격려
  1) 장로 가이오가 나그네 된 자들에게 한 선행에 대해서 그들이 교회 앞에서 증언함
  2) 더불어 하나님께 합당하게 그들을 전송하면 좋을 것이라고 격려함
  3) 그들은 주의 이름을 위하여 이방인에게 아무 대가도 받지 않고 일하는 사람들이다.
  4) 그러므로 그들을 영접하는 것이 마땅하니, 그것을 통해 진리를 위해 함께 일하는 자가 되려 함이다.

3. 그릇 행하는 자 <디오드레베>에 대한 책망
  1) 그는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였다.
  2) 그것도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않고 맞아 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았다.

4. 권면
  1)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2)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할 것이다.
   예) 데메드리오는 뭇 사람에게도, 진리에게서도 증거를 받는 자다.

5. 인사: 할 말은 많으나 글로 하기보다는 만나서 하기를 원한다. 평안을 전한다.

 

[정리2. 내용의 재구성]


요한삼서는 그 편지의 대상이 <장로 가이오>로 구체화되어 있다. 편지의 내용은 가이오의 선행에 대한 격려와 디오드레베에 대한 잘못에 대한 지적이 주를 이룬다.
가이오는 주의 이름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을 교회에서 잘 받아주고, 섬겨주었다. 그것은 칭찬받을 일이었고, 잘 전송해 주길 바라는 마음도 전했다.
반면 디오드레베는 주를 위해 애쓰는 자(요한의 일행)들을 비방하고, 맞아들이지도 않았다. 그것도 부족해서 맞아 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기까지 했다.
요한은 이와 같이 악행에 대해서는 본받지 말고, 선행에 대해서 본 받을 것을 다시 한 번 권면하면서 글을 마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선행에 대한 이야기 중에 <주를 위해 일하는 자>에 대한 권면이 나왔다.

  요한삼서에서 이들에 대해서 <나그네>(5절)란 표현을 썼고, 구체적으로 7절에는 '이는 그들이 주의 이름을 위하여 나가서 이방인에게 아무것도 받지 안았다'고 표현함으로 이는 순회 사역자를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가이오> 장로를 중심으로 해서 그가 섬기던 교회에서는 그와 같은 순회 사역자를 잘 받아 주었고, 섬겨주었던 것이다. 그와 같은 가이오의 행실에 대해서 요한은 칭찬과 격려를 하고 있는 것이다.

   주를 위해서 섬기는 사람들(단순화 시켜서 오늘날 전임사역자)을 성도가 어떤 마음과 태도로 받아들여야 할 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사역자들 중에는 기준에 못미치고, 주의 이름보다는 자신의 사욕을 따라서 일하는 삯꾼과 같은 사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때문에 성도들이 모든 사역자들을 그런 사람으로 취급하여 본다면 이 또한 불행한 일이다. 만에 하나 선한 사역자를 오해하여 영접하지 않거나, 그를 위하는 사람을 비방하는 일을 한다면 이는 <디오드레베>가 한 행동처럼 되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속더라도 안전하게 가는 것이 좋다. 사역자들에 대해서 선하고 아름다운 마음으로 선대해주어야 한다. 그리고 할 수 있는 만큼 섬겨주어야 할 것이다. 요즘처럼 사역자가 많고 자격에 미달된 사람들이 많아 보이는 시대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특히, 내 자신이 사역자 중 한 사람이고... 그래서 주변에서 기준에 미달된 사역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듣는 입장에서 말이다. (사실 사역자를 제일 믿지 못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사역자들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시대가 악하더라도 우리가 해야 할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자. 좀 속더라도, 어리석게 보이더라도... 영적으로 안전한 길을 가자.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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