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8-13> 10:55-11:07(정리) / 11:07-11:37(질문,묵상)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8절)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9절)


(정리) 너희가 성경의 최고의 법, 이웃 사랑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와 같은 행위를 정죄한다.

(질문) 야고보는 최고의 법(사랑)과 '차별'을 대조적인 의미로 설명한다. 사랑의 좀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묵상)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과 증오일 수도 있지만, 야고보는 여기서 '차별'이라고 봤다. 사랑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차별은 자신의 몸과 대상의 몸을 차등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단순하 차이가 아니라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차별'이다. 

사랑이란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인 차이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인간적 대우를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번한 자가 된다.(10절)

(예시)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살인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따라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않았어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11절)


(정리) 여러가지 율법 중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 간음하지 말라라는 율법을 만든 분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도 함께 만드셨으니 그 중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

(질문)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로 접근한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상식을 무시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닌가? 혹 교회가 '은혜'로 모든 것을 허용하거나 율법 폐기 논리를 주장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야고보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끄집어 올려 설득하고 있는듯 하다. 

(묵상)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신앙의 많은 부분은 상식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상식적인 선에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초월'이 '상식 밖'인 영역이지만, '윤리 밖'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권면) 너희는 말도하고 행하기도 하라.(12절)

-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설명)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 (그러나)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절)


(정리) 권면의 내용은 간단하다. 말도 하면서 행하기도 하라는 것이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자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는 것을 잊지 말고 긍휼을 태도를 가지라.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질문) <자유의 율법대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묵상) <자유의 율법대로>라는 말의 의미가 그 자체로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1) 말이 아닌 행한대로 갚는다는 원칙

2)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

3)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행한대로 갚는다는 원리는 적용되면서, 부정적인 측면의 적용(하지 않으면 심판받는다)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적용(긍휼이 여기면 긍휼이 여김 받는다)을 통해 긍휼은 심판받지 아니함으로 심판으로 이기고, 죄가 아닌 선행으로서 '자랑'할 것이 있게 되는 것, 이것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성도는 율법에 매인 존재는 아니지만, 율법을 무시하는 자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율법, 자유의 율법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최종정리]

1. 너희는 최고의 법인 이웃 사랑을 행하라. 

2. 그 사랑은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3. 만약 차별한다면 그것은 율법으로 정죄받게 된다. 

4. 너희는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5.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살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약 2:13)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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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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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교회 한가족예배(2015.7.26)

본문: 몬 1:16-22

제목: 종이 아니라 사랑받는 형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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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해설]


[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바울의 복음은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다. 그러나 이 표현은 바울의 논지 속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자유를 위한 부르심'이란 말만 떼서 의미를 확대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갈 5:1에서 바울의 언급한 '자유'도 마찬가지다.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전한 복음을 듣고,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개념을 잘 못 이해해서 '방종'으로 나아갔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울이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말할 때, 그 자유는 단순히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 의'를 통한 구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사람들을 율법 혹은 마음에 새긴 율법(양심)에 의존하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가 차매, 그리스도 예수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법,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은 의'로 구원을 이루시는 시대가 만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법이 드러나면서, 이전 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얻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로마서에서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의 전환이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다 보니, 그릇된 마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여전히 이 '복음이 말한 자유'를 자기들의 방탕을 합리화하는 방식으로 오용하기에 이르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순수 복음'의 핵심은 교리적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3,4장)를 말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완전한 복음의 의미는 '새로운 종'으로의 부르심이 포함되어 있다. 이것을 단순히 교리(이론, 3,4장)와 적용(실천, 5,6장)으로 구분하는 것은 충분하지 못한듯 하다. 오히려 바울이 말하고자 하는 복음은 총체적인 것으로, <율법의 종으로부터의 자유와 사랑의 종으로의 부르심>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자유를 육체의 기회(육체의 정욕을 합리화하는 기회)로 삼아서는 안됨을 바로 이어서 지적한다. 



[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4절을 통해서 볼 때, 바울이 말한 복음 안에서의 자유가 '율법 자체'에 대한 단절을 의미하지 않음을 분명히 한다고 본다. 바울은 온 율법이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는 말씀으로 이루어짐을 분명히 하고 있고,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5:1)고 권면함으로서 오히려 참된 복음은 '율법의 완성, 사랑의 실천'으로 이어짐을 분명히 한 것이다. 


따라서 복음으로 인해서 '방종'으로 가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으나, 그것은 복음을 자신의 정욕을 위한 근거로 받아들인 사람이지 '순수한 복음'을 온전히 받아들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또한 복음 안에서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인 것이다. 



 갈라디아서에서는 '순수 복음'이 왜곡될 수 있는 두 가지 변종을 보여준다. 하나는 '순수 복음'이 사람의 생각에 불완전하게 보인다는 것이다.(행위에 대한 요소가 하나도 없으므로... 허전하다.) 또 다른 하나는 '순수 복음'을 근거로 자기의 욕구(정욕)를 정당화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바울은 이 두가지 모두를 경고한다. '순수 복음'에 다른 것을 가미(할례)하든지, 아니면 용도에 맞지 않게 오용(방종)하려고 할 때,  이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갈 5:19-21)




[15]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이 구절을 통해서 볼 때, 갈라디아서 안에 심각한 논쟁이나 분쟁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 갈등은 어느 정도의 도를 넘어 서로 '물고 먹는', 즉 죽자고 싸우는 형국이 되었을 정도로 심각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지 말라는 것이다. 서로 죽자 살자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그러면 누가 옳고 그르냐를 떠나 피차 멸망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사기 19-21장에 보면, 베냐민 지파 불량배들의 악행으로 인해 이스라엘의 11개 지파가 베냐민 지파를 전멸 시킬 뻔했다. 서로를 견제하고 권면하고 바로 잡아야 할 대상이지만, 형제란 서로 죽여서는 안되는 관계다. 가인이 아벨을 죽여서 안되는 것처럼, 11개 지파는 한 개의 지파를 전멸시켜서는 안되는 것이다. 교회 안의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서로 죽자고 싸우는 것은 아니다. 살기 위해서 싸우는 것이어야 하고, 죽지 않을 정도로만 싸워야 한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 안에서 발생한 구체적인 다툼에 대해서 아직 언급하지 않았지만, 심각한 갈등이 극단적으로 가지 못하도록 권면하고 있다. 서로에게 사랑의 마음으로 종이 될 것에 대해 권면하면서 말이다. 



[묵상]


해설을 쓰는 가운데 중간 중간 묵상의 내용이 있으므로 생략한다.



참고자료. 

'자유'란 오늘날 누구의 입에나 오르내리는 말이다. 자유에는 다양한 형태가 있고, 다양한 사람이 자유를 주창하고 권한다. 자신의 나라를 위해 '민족 독립'을 얻은 아프리카 민족주의자가 있다. 식민 통치로부터의 자유다. 자유 무역, 관세 철폐를 믿는 경제학자가 있다. 중앙 통제가 자유 기업을 방해하기 때문에 그것을 싫어하는 자본주의자와 프롤레타리아를 자본주의의 착취에서 자유케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공산주의자가 있다. 루스벨트 대통령이 1941년에 처음 선언한 네 가지 자유가 있다. 그것은 '어디서나 말할 자유, 어디서나 예배할 자유, 어디서나 궁핍하지 않을 자유, 어디서나 두려워하지 않을 자유'다.

  - 존 스토트, 갈라디아서 주석, 173쪽.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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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

 지금의 대학생들은 '사랑의 순수성'이 사라졌다기 보다, 이미 그 나이에 '사랑을 계산해야 하는 상황'을 맞은 것이다. 가장 큰 요인은 사랑을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게 된다는 것이고,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안정적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대의 사랑의 가장 큰 미덕은 서로를 '구속하지 않는 것'이다. 지금의 사랑을 즐길 뿐 서로에게 어떤 구속도 요구하지 않는다. 요구해서도 안된다. 그것은 사랑의 룰을 깨는 것이다.
이런 대학생들에게 '순수한 사랑'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한 사회적 기반이 마련되어야 한다.(사랑을 할 수 있도록 이들이 가지고 있는 현실적인 경제적 부담을 줄여주도록 하는 것 등)

 질문0: 관계를 구질구질하게 하는 것은 최악이다. 사실인가?
 질문1: 학생들의 경제적인 부담이 '연애문제'에까지 깊숙히 들어와있다고 느끼고 있는가? 
 질문2: 학생들이 연애를 할 수 있도록 국가가 인프라를 구축해 주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저자의 제안에 대한 생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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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제기

요즘 대학생들은 사랑의 순수성(열정)조차 퇴색되었다. 진정한 사랑이 존재하는지 모르겠다. 헤어지는 것에 있어서 너무 쿨하다.(감정적으로 빨리 정리함)

  : 이들의 가치 중 하나는, 구질구질한 것은 죄악시. 쿨하거나 쿨한 척이라도 해야지.. 들러붙는 것은 가장 혐오스러운 행동.

2. 사랑은 성장 드라마

사랑은 통해서 사람은 감정노동을 하게되고 그것을 통해 사람은 성장한다고 생각한다. 대학생들은 연애를 위해 산다고 해도 받아들여주는 대상이다. 이런 그들에게 계산기를 두드리는 것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3. 사랑에 서사가 가능한 시대가 아니다.

사랑을 기대하지만, 현실적이 되라고 한다. 현실적이란 미래를 예측하고 준비하는 모습을 보여 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예측불가능한 사회에서 가능한 것이란 말인가?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자는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거나 감수하는 것이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랑을 즐기라고 말한다.

예전에 사랑은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는 것으로서 증명된다고 여겼다. 사랑은 그래야만 했다. 그래야 사랑이다.
그러나 이제 사랑을 위한 비용은 서로에게 부담스러운 것이 되었고 그래서 사랑은 불안해졌다.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 너무 많은 희생이 들어감으로 연애에 목매는 자를 어리석게 본다. 비경제적이라는 것이다.

사랑을 유지하는데 많은 비용이 들자 사랑의 표현방식이 바뀌었다. 희생적인 사랑이 아니라, 서로를 배려해 부담을 지우지 않도록 하는 것이 사랑이 되었다.(그래서 매달리는 것은 사랑이 아닌게 된 것이다) 등가교환을 통해 서로의 곤궁함을 배려한다. 이것이 이들의 사랑이다.

  "사랑은 서로를 피곤하게 하지 않는 것"


4. 그래서 사랑에 인프라가 필요하다.

이들의 사랑의 순수성이 없다고 지적하는 대상들을 향해 오히려 사랑에 필요한 인프라를 구축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대학생들은 공부만 하는 대상이 아니다. 공부도 하고 사랑도 하는 대상이다. 이들의 사랑이 섹스로 전락한 것은 이들의 현실이다.
이들은 불안하다. 자신의 미래가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불안한 인생은 서사를 쓸수가 없다.
삶이 임시적이 되었는데, 사랑이 어떻게 임시적이지 않을 수 있는가?


TistoryM에서 작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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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들의 사랑에 대하여]


1. 사람들은 대학생들의 사랑 방식에 경고를 보낸다. 사랑이 너무 계산적이고, 헤어짐이 너무 쿨하다고. 그것이 어떻게 사랑일 수 있는냐고 말이다. (부등가교환을 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규정한다. 전통적인 인식)


2. 그것은 대학생들이 잘못되었다기 보다는, 대학생들이 사랑하는 환경에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라고 본다. 즉 사랑이라는 관계를 맺으면서 실제적으로는 경제적인 부담, 돈에 대한 부담(자신이 비용을 대든, 상대가 비용을 대든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을 상당히 느끼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학생들은 사랑에도 등가교환이 이루어질 때, 편안한 관계를 형성할 수 있다. 

  - 사실 전통적인 개념으로서의 사랑은 중,고등학교 시절에 끝났다. 


3. 사랑을 시작할 수는 있지만,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많은 경제적인 문제가 발생한다는 것이 현실이다. 


4. 따라서 연애를 한다는 것은 매우 피곤한 일이 되었는데 그 중심에는 돈이라는 것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5. 이들에게 있어서 사랑은 서로에게 대한 배려다. 부등가교환이 되지 않도록 하는 배려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부등가교환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경제적 뒷받침이 따라 주어야 한다. 


6. 그러므로 이들이 사랑하도록 하려면, 사랑할 수 있는 인프라가 구축되어 있어야 한다. 대학생들은 공부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부도 하는 존재로 알고 이들이 사랑할 수 있는 인프라를 구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생들에게는 그런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 


7. 삶이 불안하고 임시적인데, 어떻게 사랑이 불안하지 않고 임시적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학생들의 이와 같은 사랑을 우리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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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내용 중 일부 발췌]



147. 그러나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청년들에게 무너짐이란곳 찌질합니다. 사람은 자존심따위는 아무것도 아닌 자의 무너짐이 아니라, 무너질지도 모르는 자존심을 어떻게 해서든 추스려야 하는 일이 되어버렸다. 쿨함은 이 시대 젊은이들의 도덕이자 미학이다. 쿨하지 못하다면 최소한 쿨한척이라도 해야한다. 이들은 오늘을 즐기고 실연과 같은 내일에 불상사에 대해 쿨해지려고한다. 시련은 너의 잘못도 나의 잘못도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운명이다.


152. 스스로 기획하는 서사가 가능하기 위해서는 불확실성을 통제해야 말한다. 이런 점에서 준석의 사랑한 투쟁이다. 세상은 삶은 점점 더 예측 불가능하고 기획할 수 없도록 몰아치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에서 그들의 사랑이 미래에도 지속되도록 하려면 투쟁하는 수밖에 없다.


153. 준석은 되묻고는한다. 삶이 통제되지 않는데 왜 이런 수고를 해야하는가. 내가 삶을 통제한다고해서 내 기획대로 되지도 않는데 도대체 왜 그래야 하는가. 삶은 미래 일을 위해 유예 되어서는 안된다. 유예 한다고해서 보장 되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오지 않을지도 모를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하거나 감소하는 것은 매우 어리석은 짓이다....재산은 서사의 목을 매는 일들을 비웃는다. 그래서 사랑을 즐기라고 조언한다.


157. 연예가 피곤한 사업이 되어버린 가장 큰 이유는 바로 돈이다. 방학내내 아르바이트로 번돈을 여자친구와 이벤트 한번 하는데 다 털어 넣는 친구가 한심하다고 생각하는 성훈이나 자기가 데이트비용을 대는 소영이가 잘나가는 회사원의 만나서 자기가 지갑을 사랑하는 것인지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인지 모르겠다 고백하는 은이나 부등가교환과 전통적인 규범 사이에서 벌어지는 연예의 피곤힘에는 돈 문제가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이들이 대학에 와서 깨닫게 되는 중요한 사실 중에 하나가 사랑을 지키고 유지하는 데는 엄청나게 많은 비용이 들며 그것이 보통 대학생의 경제력을 넘어선다는 점이다.


159. 그래서 이들은 사랑해 등가교환을 선호한다. 사랑에도 주판알을 튕길만큼 계산적인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다.반대다.그것이 서로를 배려하는 새로운 방식의 사랑이기 때문이다. 과거의 사랑이 손해를 감수하고 일방적으로 퍼줌으로 서로의 사랑을 확인 하였다면 지금은 등가교환을 통하여 서로의 곤궁함을 해결한다. 등가교환이야 말로 동등성을 보호하고 유지하는 새로운 형식이다. 이것이 문제인가?


160. 이들이 사랑의 가치를 잃어버린 것이 아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과거와는 달리 그 순수하고 숭고한 사랑이라는 것을 중 고등학교때 이미 경험하는 경우가 많다 학생들의 글에서도 눈물없이는 들을 수 없는자신을 과감하게 내던지는 순애보 같은 사랑 이야기는 대부분 그 시절의 사랑이다.    청소년때야말로 이들은 사랑의 열병에 몸살을 앓고 사랑때문에 삶을 내던지는 경험을 한다 그리고 대학에 온다. 그래서 이들이 대학에 올라와 고민하는 것은 사랑의 가치가 아니라 사랑을 지키고 유지하는 방법이다.


162. 대학생들이 공부도 하는 존재가 아니라 공부만 하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랑은 그들의 권리 목록에서 누락되어 있다. 사랑하는  것, 사랑하기 위한 것,  모든 것이 개인의 책임이자 부담이 되었을 때 준석과 여자친구가 준 공동 통장 하나만으로는 이 망망대해를 헤쳐갈 수가 없다.


163. 삶이 일시적이고 일시적인 것이 되었는데 어떻게 사랑이 임시적인 시안을 수 있는가그리고이 임시적인 사랑 그것이 왜 또 사랑이 아니란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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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장 묵상]


1.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인 이스라엘과 변론하신다. 산들을 향해서 고소하신다.


  1)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무슨 일로 너를 괴롭게 하였는지 스스로 증언하라고 하신다. 

  2) 오히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위해서 하신 일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1) 이스라엘을 종노릇 하던 애굽 땅에서 인도해 내어 속량하였고,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을 네 앞에 보냈다. 

   (2) 모압 왕 발람이 발락을 통해서 하려고했던 일(이스라엘의 저주)에 대해 언급하신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발락으로 하여금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축복하게 했던 것을 언급하는 것이라 본다. 


  3) 너희들의 마땅한 태도는 나에게 대해서 번제물과 수양을 가지고 나오든지, 아니면 그 은혜에 감격하여 네 맏아들이나 네 몸의 열매를 드릴까 하는 태도여야 하지 않겠는가!

  4) 그런 하나님께서 네게 원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고, 인자를 사랑하여 겸손히 행하는 것이 아닌가!(온갖 제물로 제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것은 필요없고... 은혜를 받은 자로서 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여 겸손하여야 함이 아니겠는가!)


  *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간의 변론처럼 진행되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억울함을 드러내는 장면이다. 하나님이 얼마나 오래 참으셨는가! 반면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향해서 자신을 괴롭게 하는 분이라고 불경하게 말하는가!를 보여준다. 이들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서 하나님께 제물을 드려도 충분하지 못한데, 하나님께서 이들을 향해 지시하신 성도의 기본적인 삶(정의를 행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태도)조차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나님의 억울하심을 산들과 작은 산들에게 호소하고 있는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준다.



2. 하나님은 이 백성을 향해서 매를 준비하셨다. 


  1) 너희 중에 아직도 불의한 재물이 있지 않느냐?

  2) 축소시킨 가증한 에바가 있지 않느냐?

  3) 부자들은 강포가 가득하였고

  4) 그 주민들은 거짓을 말하니 그 혀가 입에서 거짓되도다.


  * 불의와 강포 그리고 거짓으로 가득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고발한다. 당연히 이와 같은 것에 대한 피해자는 가난하고 힘없는 약자들에게 돌아간다. 권력을 없는 자들을 피해를 보게 된다. 하나님은 이들의 악함에 분노를 느낀다.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과 인내로 이스라엘 돌보고 지키셨는데, 이스라엘은 완전히 몹쓸 자식이 되어 버린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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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그래서 나도 너를 쳐서 병들게 하였고, 네 죄로 말미암아 너를 황폐하게 하였다. 

  6) 네가 먹어도 배부르지 못하고 항상 속이 빌 것이며

  7) 네가 감추어도 보존되지 못하겠고 보존된 것은 내가 칼에 붙일 것이며

  8) 네가 씨를 뿌려도 추수하지 못할 것이며

  9) 감람 열매를 밟아도 기름을 네 몸에 바르지 못할 것이며

  10) 포도를 밟아도 술을 마시지 못하리라.


  * 그래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향해서 매를 들었다. 항상 부족하게 하고, 열매를 얻지 못하도록 하였다. 수고하는 모든 것이 헛되게 돌아가도록 하셨다. 이 모든 것이 그들이 하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한 것이요, 하나님도 이들을 참고 인내하는 것으로만이 아니라, 매를 들고 혼내는 것으로 행하도록 한 것이다. 


  11) 너희가 오므리의 율례와 아합 집의 모든 예법을 지키고 그들의 전통을 따르니, 내가 너를 황폐하게 하며 조소거리가 되게하리라. 너희가 내 백성의 수욕음 담당하리라.


  * 유다 왕 요담과 아하스와 히스기야의 때에 있는 미가의 말씀이지만, 이들이 지금 직면한 죄의 문제는 그 근원이 북이스라엘의 오므리 왕조에 기인한 것이며, 특히 아합 왕에 의한 것임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북이스라엘의 죄는 그 자체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남유다에까지 깊숙히 파고들어 마침내 남유다에까지 큰 피해를 만들어 낸 것이다. 



[묵상 한 모금]


1. 하나님은 억울하고 답답하다. 마치 자기 자식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모처럼 말이다. 낳아주고 길러주었으며 그간 수많은 잘못에 대해서 인내와 사랑으로 견디어 오셨지만, 거기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기는 커녕 '왜 자신의 인생에 관여하시며, 왜 자신을 피곤하게 하냐'며 부모에게 함부로 말하는 꼴과 유사하지 않나 싶다. 

하나님이 부모의 입장이시기에 이런 패륜아같은 자식에 대해서 동네방네 다니며 말할 수는 없어, 참아오셨으나.. 결국 답답한 하나님의 마음이 토로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 지점에서 부모의 모습에서 재판관과 검사의 입장으로 하나님의 이미지가 바뀐다. 사랑에서 공의로 말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지만, 하나님의 사랑을 무시하는 것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는 엄격하시다. 이 지점에서 하나님은 부모의 모습에서 재판관의 모습으로 변하신다. 오늘 본문이 바로 그 지점이다. 


2. 하나님이 매를 드실 때, 그 징계의 방식은 하나님을 배제한 모든 노력을 한 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스스로 웅덩이를 파고 채울 것을 기대했으나, 그것이 터진 웅덩이라는 것을 그제서야 발견하게 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이미 늦다. 

지금 무엇인가를 충분히 채울 수 있는 것 같을 때, 그때 눈치채고 변화되지 못하면 늦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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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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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3편]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그 동력이 불안 때문이라면, 그 기도는 건강한 기도는 아닐것입니다. 영적 전투와 전쟁에 대한 강조가 적에 대한 두려움에만 기인한다면(불안을 조장한다면) 그 또한 건강한 영적 긴장감은 아닐 것입니다. 오늘 시편 말씀은 만물을 다스리시고, 민족과 나라 위에 계신 하나님의 통치와 다스리심을 노래합니다. 기도도 그렇고 영적 싸움도 그렇고 결국은 여호와 하나님으로 인한, 평안을 얻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싸움을 강조하는 곳이 아니라, 사랑을 강조하는 곳이고 그로 인해 나와 주변이 평안을 얻는 종교입니다. 시편 33편으로 추천합니다. 샬롬~


[정리1]


1.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라면, 그 분을 즐거워하고 찬양해야 한다.


1절. 너희 의인들아, 여호와를 즐거워하라.

찬송은 정직한 자들이 마땅히 할 바로다.


2. 온 우주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광대하심


6절.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을 그의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그가 바닷물을 모아 무더기 같이 쌓으시며

깊은 물을 곳간에 두시도다.(7절)

온 땅은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세상의 모든 거민들은 그를 경외할지어다.(8절)

그가 말씀하시매 이루어졌으며

명령하시매 견고히 섰도다.(9절)


3. 하나님은 모든 나라 위에 계시며, 모든 구원은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 있다.


10절. 여호와께서 나라들의 계획을 폐하시며

민족들의 사상을 무효하게 하시도다.


여호와의 계획은 영원히 서고 그의 생각은 대대에 이르리로다.(11절)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선택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12절)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보사

모든 인생을 살피심이여(13절)

곧 그가 거하시는 곳에서 세상의 모든 거민들을 굽어살피시는도다.(14절)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16절)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17절)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19절)


4. 시편 기자가 여호와를 바라고 소망함.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20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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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독교 도덕 중 <순결>보다 더 인기 없는 것은 <용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1) 용서가 훌륭한 일이라는 것에는 모두가 동의한다. 

  2) 그러나 정작 용서할 일이 생기면 우리는 용서하라는 말에 화를 내게 된다. 


2. 기독교의 핵심적인 가르침은 용서다.

  1) 우리가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준것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명백한 사실이다.)

  2) 용서의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정도 먼저 생각하면 좋다.

   (1) 용서하고 싶은 마음이 정말 있다면, 먼저 쉬운 대상과 일로부터 시작하라. 

 

   (2)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를 명확하게 알 필요가 있다. 

     먼저, 우리 자신을 어떻게 사랑하는지 생각해 보자. 우리는 우리 자신이 호감이 있기 때문에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기 때문에 호감을 느끼는 것이다. 마찬가지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 호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사랑하라는 요구는 실제로 악하기 짝이 없는 인간들을 마치 그렇지 않는 것처럼 여기라는 말로 오해해서는 안된다. 

    좀 더 생각해 보면, 우리는 누군가의 잘못은 미워하면서도 그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인가까지 생각이 든다. 그러나 늘 그렇게 대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우리 자신이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에 대해서는 싫어하면서도 우리 자신을 사랑한다. 제 자신의 행위는 미워하면서도 저 자신은 사랑해 온 것이다. 


    기독교는 잔인한 행동이나 배신 행위에 대한 미움을 티끌만큼이라도 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마땅이 그와 같은 악한 것을 미워해야 한다. 그러나 기독교가 말하는 것은 나를 대하는 똑같은 방식으로 상대방의 잘못을 미워하라는 것이다. 그 행위를 미워하면서, 왜 그렇게 되었을까 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이다. 


3.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은 그의 잘못을 벌하지 말라는 것을 의미하는가?

  1) 나를 사랑한다고 해서 나의 죄를 벌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할 수 없듯이, 잘못에 대해서는 벌을 행해야 한다. 

  2) 살인을 저질렀을 때 기독교적으로 옳은 행동은 경찰에 자수해서 사형을 받는 것이다. 

  3) 기독교 판사가 사형을 구형하거나 그리스도인 병사가 적을 죽이는 것은 전적으로 옳은 일이라 본다.(루이스 입장)

    (1) 살인하지 말라는 <죽이다>와 구별되는 의미다. 군인으로서 전쟁에 나가서 적과 싸워야 하는 상황에서 적을 죽이는 것은 <살인하는 것>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성관계가 모두 간음이 아니듯, 구분되어야 한다. 

    (2) 평화주의자를 존경하지만 그들의 견해를 찬성하지는 않는다. 반(세미)평화주의자도 마찬가지다.


4. 그렇다면, 원수의 행동을 정죄하고 벌을 주며 심지어 죽일 수도 있다면, 그리스도인의 도덕과 보통 관점의 차이는 무엇인가? 

  1)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2) 중요한 것은 우리의 중심, 즉 영혼의 내부를 천국의 피조물로 만들어야지 지옥으로 만들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1) 따라서 전쟁이나 사형처럼 불가피한 경우 사람을 죽일 수는 있어도, 미워하거나 미워하기를 즐겨해서는 안된다. 

   (2) 불가피한 경우 벌을 줄 수는 있어도 그것을 즐겨서는 안된다. 우리 안에 적의나 복수심이 자리잡지 못하게 해야 한다. 

   (3) 누구나 결심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마음이 고개를 쳐 들때마다 평생토록 그것을 쳐 내야 한다. 

  3) 우리는 잘못한 사람을 죽이거나 벌하는 순간에도 그 사람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기 위해 애써야 한다. 그것이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말하는 의미다. 

  4) 원수를 사랑하라는 것은 그에게 호감을 가지라는 것이나 그가 근사한 사람이 아닌데도 근사한 사람이라고 말하라는 것이 아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5. 우리가 우리 자신을 (행위와 상관없이) 대하듯 우리의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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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단테는 이 7가지 대죄를 사랑과 관계되어 3가지로 구분합니다. 

왜곡된 사랑, 불충분한 사랑, 과도한 사랑.

사랑이란 이름만 붙인다고 다 아름다운 건 아닙니다. 

어쩌면 모든 죄는 사랑의 돌연변이 입니다. 





4세기 사막 수도사로 부터 규정된 죄의 규정은 조금 변화되고 정리되어 로마 가톨릭 안에서 7대죄(죽음에 이르게 하는)로 자리를 잡았다. 


교만, 시기, 분노, 나태, 탐욕, 탐식, 정욕


이 일곱가지 죄는 모든 죄의 머리가 되는 죄로 다루어졌다.




단테는 대죄를 그릇된 세 유형의 사랑으로 분류했다.


첫째,  교만, 시기, 분노와 같은 죄를 <왜곡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둘째, 나태와 같은 죄를 <불충분한 사랑>이라고 구분했다.

셋째, 탐욕과 탐식과 정욕은 <과도한 사랑>이라고 했다. 



20세기 소설가이자 단테 연구가인 도로시 세이어즈(Dorothy Sayers)는 

크게 두가지로 7대죄를 구분했는데


첫째, 정욕, 분노, 탐식을 <뜨거운 마음의 죄>

둘째, 탐욕, 시기, 나태, 교만을 <차가운 마음의 죄>


구분했다. 


추가적인 설명으로 뜨거운 마음의 죄는 최소한 공동체 생활을 무너뜨리지는 않지만, 

차가운 마음의 죄는 인간관계와 공동체를 균열시키는 더욱 파괴적인 죄로 여겼다. 


 - 죽음에 이르는 7가지 죄 / 신원하 / IVP / p.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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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9장] 하나님의 눈물, 예레미야의 눈물은 당장 슬픈 현실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빤히 보이는 멸망을 돌이킬 수 없는 안타까움에 기인합니다. 아무리 부르고 소리쳐도 대답하지 않는 멀어져만 가는 자식의 운명에 대한 통애의 눈물입니다. 이스라엘이나 하나님을 떠난 우리의 인생이나 결국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인 것이지요.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함]


1. 눈물의 탄식

  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로 주야로 운다.

  2) 내 백성은 혀를 놀려 거짓을 말한다.(활을 당김같이) 땅에서 강성하나 진실하지 못하다. 

  3) 이웃을 속이고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지치도록 악을 행한다. 

  4) 악에서 악으로 진행하며 또 나를 알지 못하느니라.


2. 내가 내 딸 백성을 어떻게 처치할꼬 그들을 녹이고 연단하리라.

  1) 그들의 혀는 죽이는 화살이라.(이웃에게 평화를 말하나, 마음으로는 해를 꾸민다.)

  2) 내가 이들을 벌하지 않겠느냐? 이런 나라를 보복하지 않겠느냐?

  3) 그것들이 불에 타서 지나는 자가 없고, 가축들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새도 도망가고 없는 황폐함을 만들겠다.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승냥이 굴이 되며 유다의 성읍이 황폐화 된다.


3. 누가 지혜가 있어서 깨달을만 한가? 누가 이 멸망을 막겠느냐? 

  1) 이들이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서 세운 율법을 버리고 목소리를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 그들은 자기들의 완악함을 따라 그 조상들이 자기에게 가르친 바알을 따라갔다. 

  3) 그래서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며, 독한 물을 마시게 하고 그 조상들이 알지 못하던 나라로 흩어 진멸되기까지 그 뒤로 칼을 보내리라. 


4. 부녀들을 불러 통곡하게 하고 우리 눈꺼풀에서 물이 쏟아지게 하라. 

  1) 시온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기를 우리가 아주 망하였구나...

  2) 너희 딸들에게 애곡하게 하고 각기 이웃에게 슬픈 노래를 가르치라. 

  3) 창을 넘어 사망이 들어와서는 죽은 시체들이 거두지 못한 곡식단 같게 될 것이다. 

  4) 그러니 지혜로운 자는 지혜를 자랑하지 말고, 용맹한 자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고,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지혜나 용맹이나 부도 이 재앙을 피할 수 없다)

  5) 자랑할 것은 

   (1) 명철하여 하나님을 아는 것

   (2)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줄 깨 닫는 것이라. 이 일을 기뻐함.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재구성하여 다시 정리함. 내 말로]


이 백성의 앞날을 보면 눈물과 탄식이 쏟아진다. 부녀들이 모여 통곡하는 소리로 가득차게 될 것이기에 하나님도 울고 예레미야도 운다.


이들은 거짓이 가득하다. 그들의 혀는 화살같이 이웃을 죽인다. 이웃에게 평화를 말하지만 마음으로는 해를 꾸밀 뿐이다. 이들은 지치도록 악을 행하여 악에서 악으로 행한다. 따라서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어찌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벌하지 않고 진노하시지 않겠는가? 이들이 이렇게 된 것에는 그들과 세운 율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조상 때부터 하던 바알 숭배를 여전히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백성에게 쑥을 먹이기로 하시고, 독한 물을 마시우게 하기로 작정하셨다. 이들은 불에 타서 사람들이 지나가지 않는 길과 같이 되고 가축의 울음소리도 새가 날아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황폐하게 되게 하겠다고 하신다. 사망은 이들의 집에 창을 타고 들어와서 많은 시체를 만들어 낼 것인데, 마치 거두지 못한 곡식단처럼 처리하지 못한 시체가 가득하게 할 것이다. 그 때는 지혜로운 자도, 용맹한 자도, 부유한 자도 그 재앙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오직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만한 것은 내가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께서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이 땅에 행하시는 분인 줄을 아는 것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눈물, 눈물, 눈물


예레미야를 눈물의 선지자라고 했던가! 오늘 본문은 눈물과 애통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자기 백성의 운명을 바라보는 예레미야의 마음도 그렇고, 하나님의 마음도 그렇다. 눈물이 앞을 가린다. 왜냐하면 이들의 멸망이 너무 참혹하고 비참하기 때문이다. 반면 이들은 여전히 철부지 아이들처럼 자기들의 운명을 모른채 죄와 악을 행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을 일깨우기 위한 예레미야의 노력이 얼마였는가! 아니 하나님의 노력은 얼마였는가! 그러나 이 미련한 백성은 듣지를 않고 완악한 마음으로 더 깊은 파멸로 향하여 가고만 있다. 


여기서의 눈물은 멸망한 사실에 대한 눈물이면서(장례식 장에서의 눈물처럼) 동시에 멸망 당할 자기 백성들의 어리석음을 보는대서 오는 안타까움의 눈물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라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역사다. 우리의 인생은 어떤가? 그런 측면에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인생이 아닌가? 어리석은 인생이 아니던가? 


자녀에게 이렇게 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게 행하는 부모, 지금 시간을 이렇게 사용하면 안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시간과 에너지를 허망한 것에 낭비하고 있는 젊은이들, 소중한 것을 먼저 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급한 일에, 별볼일없는 일에 인생을 다 허비해 버리는 우리의 인생 드라마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것이 아니가? 그 마지막의 불행함을 알기에, 알면서도 멸망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기에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드라마는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2. 하나님은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서 행하는 자인 줄 알라. 


우리는 하나님을 한 편으로만 보고 있다. 은혜와 자비와 긍휼..한 마디로 사랑인데 우리는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충분하게 보게 된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면서도 전체는 아닌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또 하나의 모습, 정의와 공의...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에서 실행하신 것이 바로 정의와 공의였다는 것을 우리는 잊고 있다. 사랑이 정의와 공의를 삼켜 버려 변질된 복음을 만들어 낸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복음을 바로 알아야 한다. 사랑! 정의! 공의!를 모두 담아낼 수 있는 복음을 알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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