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4:1-3>(정리하기)


1. (권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2. (권면)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2절)

     -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3.(권면)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1) 동역자: 복음에 함께 힘쓰던 저 여인들을 돕고

  2) 동역자: 또한 글레멘드와 그 외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은 1,2장의 권면, 3장의 권면을 마치면서 마무리 정리를 하고 있다. 그 정리하는 권면은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아 주 안에 서라>이다. 이것은 한 개인을 향해 주는 권면이라기 보다는 공동체(투기와 분쟁이 있는)를 향해 주신 권면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만약 교회가 서로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지 못하고 서로 투기와 분쟁을 지속한다면 교회는 설 수 없게 될 것이란 의미다. 빌립보서의 내용을 근거로 정리하면 교회 내의 분쟁으로 인한 것이라면, 큰 그림을 보면서 서로 돌아보고 자신을 낮춤으로서 하나되기를 힘써야 한다.(2장) 반면 교회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내용(육체의 자랑, 의에 근거한 신앙)에 대해서는 경계하고 쫓아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3장) 이 둘을 잘 구분해야 연합할 때 연합하고, 경계해야 할 때 경계할 수 있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이 구별이 모호한 영역이 있지만, 늘 이 두 영역이 혼용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빌 4:4-7>(정리하기)

1. (권면)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4절)

2. (권면)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5절)

3. (권면)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6절)

 <정리>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7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항상 기뻐하라고 권면하는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기뻐하라'가 아니다. '주 안에서'이다. 주 안에서 기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묵상] 그것은 빌 1장을 생각해야 한다고 본다. 바울은 매임에 있었고, 경쟁자들의 시기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기뻐한다고 말한다.(18절) 이유는 그의 시선이 자기 자신의 형편이나 상대방의 성공에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 나라의 확장', '복음의 전파', '그리스도의 확장'에 그 삶의 중심을 두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기뻐하라'는 명령은 '주 안에서'라는 의미가 명확해 질 때 가능한 것이지 당위로서의 기뻐하라는 또 하나의 무거움 짐이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두번째 권면은 '관용'이다. '관용'은 갈등이 있는 두 집단 이상이 있을 때 서로가 서로를 적으로 돌리지 않고 한 편이 되기 위해서 품는 마음이다. 이는 교회 뿐 아니라 일반 사회에서도 품어야 할 마음이지만 실제로 그렇게 되기는 쉽지 않다. 그만큼 '관용'이라는 것은 '실현'하기 어려운 것임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런지 바울은 '종말론적 태도'를 강조하고 있다. 

  관용이라는 주제와 관련해서 주께서 가까우시다는 것의 의미를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마지막 심판자가 오셔서 최종 판단을 내려 주실테니 서로의 주장을 강요하지 말고, 입장은 다르지만 최종 결정을 기다려보자. 곧 판결난다. 이 일로 서로 원수가 되지는 말자! 라는 측면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면 우리는 좀 더 관용적인 태도를 보일 수 있다. 서로에게. 아내와 내가 부부싸움이 현저하게 줄어든 결정적인 이유는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종말론적 태도 때문이다. 


3. 이런 바울의 입장을 따라가다보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기도라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는 자기의 입장에서 옳다고 여기는 것에 대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한 결정을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신 분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위탁하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입장을 가지고 있지만, 그 입장이 다른 입장과 싸우거나 적을 만들지 않고 그러면서도 그 입장이 진실하기에 그 입장에 서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자들은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길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마음이 평안해 지는 것이다. 

  [묵상] 바울은 교회 안에 파당이나 갈등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그것을 정죄하지 않았다. 다른 복음을 경고하고 있지만 다른 입장 자체를 문제삼지 않았다) 그러나 서로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시기와 질투, 분쟁으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는 방향으로 가는 것에 대해서는 우려했다. 그것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교회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입장이 다른 사람들과 긴장이 있을 때, 

<주 안에서> 우리가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한 집안 사람임을 잊지말라

<관용> 곧 주께서 오셔서 선명하게 판단해 주실테니 좀 참고 서로에게 관용하라.

<기도> 그러면서도 네 입장에서 네 마음이 소원을 하나님께 구해라. 하나님께 맡겨라.(그 분이 정답을 알려주실 것이다.)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하나님의 정답이는 너는 따르든지 감사하든지 하라.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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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7-21>(정리하기)

1. (권면)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 받으라.

2. (권면) 그와 같이 행하는 자들을 눈여겨 보라.

  - 너희가 우리를 본받은 것처럼(17절)


 (설명) 

  1) 바울은 여러번 말했고, 이제 다시 눈물로 말한다. 

  2)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한다.(18절)

   (1) 그들의 마침은 멸망이요. 그들의 신은 배요

   (2) 그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에 일을 생각하는 자다.(19절)


  3)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다. 

  4) 거기로부터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린다.(20절)

  5) 그는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하게 하시리라.(21절)

   -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이 여기서 빌립보 교회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한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측면을 본받으라고 한 것이겠는가? 

  [답변1] 바로 앞에서 말하는 바울의 논조를 본다면, 이미 한 일에 대해서는 잊어 버리고, 앞의 것을 잡으려고 하는 태도(3:13)을 말하는 것일게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의롭게 되었냐를 따지기 보다는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게 된 자신이 지금 바라고 지향하는 것(부르심의 상)을 향해 달려가듯이 빌립보 교회도 괜한 논쟁(분쟁)에 에너지를 집중하기 보다 부름의 상을 향해 달려가는 삶을 살라고 요청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답변2] 좀 더 앞으로 가면 바울이 자신이 매임을 당했을 때, 투기와 분쟁의 목적으로(그릇된 목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던 사람들로 인해 분해 하거나 억울해 하지 말라는 것이다. 오히려 거국적인 관점(하나님 나라의 확장)에서 보고 즐거워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너를 높여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서로 넉넉할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2. 바울이 말하는 원수들의 특징은 무엇이며 우리의 바른 태도와 소망은 무엇인가? 

  [답변] 그들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데, 그 의미는 십자가를 통해 이루신 일(대속,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의)을 훼손하기도 하고 십자가의 의미(낮아짐과 죽기까지 순종하심의 정신)를 무시한다. 그들의 결국이 멸망이다. 그들은 육적인 것이고 땅의 일에 종속되어 있는 자들이다. 

반면 우리는 하늘의 시민으로 거기서 구원하는 자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자들이다. 영광의 주님은 우리의 낮은 몸을(낮아진 몸, 죽은 몸) 자기 몸의 형제와 같이 변하게 하실 것이다.(우리도 하나님의 올리심으로 영광을 얻게 될 것) 이런 표현을 통해서 보면 2장에서 약속한 내용의 반복을 보여준다.(2:9-11)


<1,2장, 3장과의 연계성>

3장은 1,2장과는 주제의 전환이 이루어진다. 1,2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이 있는 대상은 같은 그리스도인이면서 파당이 다른 대상으로서 서로 투기와 분쟁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면 3장에서 바울과 긴장관계를 가지는 대상은 교회를 위협하는 복음을 훼손하는 자들이라 볼 수 있다. 이들은 복음 외에 할례와 같은 행위를 구원의 조건으로 제시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바울은 이들에 대한 경계를 하면서도 그들과 논쟁에 힘쓰기 보다는 앞으로 나아가라고. 부르심의 상급을 바라보면서 나가라고 요청한다. 

2장 마무리하면서 디모데 이야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주제를 마무리한다는 느낌이다. 따라서 3장은 다른 주제로 넘어갔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연결되는 면도 있는데 1,2장에 나오는 대상이나 3장에 나오는 대상 모두 십자가의 정신을 훼손한 자들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의 정신을 잊지 않고 바울처럼 부르심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면 하나님께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이라는 메시지는 연계성이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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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4-6>(정리하기)

1. 바울은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뒤질게 전혀 없는 자격을 갖췄다.(4절)


 (근거)

  1) 바울은 팔일 만에 할례를 받았다.

  2)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3)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4)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5)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질문하면 묵상하기)

1. 바울이 자신을 이렇게 설명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바울은 바로 앞 절에서(3:1-3) 육신을 신뢰하는 자들(손할례당)에 대해서 잘못됨을 지적하고 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바울이 육신적이 조건으로 부족함이 많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바울은 육체적인 조건으로보면 누구 보다도 충분히 의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자신의 부족함 때문에 그들을 비방하는 것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따로 있다. 오히려 자신이 왜 그들처럼 육체를 신뢰하던 입장에서 이제는 육체를 더이상 신뢰하지 않게 되었는지를 설명하기 위함이다.(7절 이후)


<빌 3:7-9>(정리하기)

(전에는 육체를 신뢰했던 사람이었으나)

1. 지금은 바울이 자신이 신뢰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해서 해로 여긴다.(7절)

  (왜? 이유)

  1)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다. 

   -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모든 것(육체의 자랑)을 잃어버리고 그것을 배설물로 여기게 되었다. 이는 내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다.(8절)

   - 따라서 지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육체의 자랑)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다.(9절)


 (앞으로 지향하는 바)

  2)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한다.(10,11절)

   - (왜?)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 (어떻게?) 그의 죽으심으로 본받아

 [정리] 바울은 자신이 이전에는 육체를 신뢰하는 삶을 살았지만, 이제는 하나님의 의를 의지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 앞으로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의 부활'을 위해 살고자 한다는 것을 말한다. 

  바울은 의의 근거도 달라졌고, 삶의 지향도 달라졌음을 말한다. 


  (바울의 결심)

  3)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12절)

   (1)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고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2)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한다. 

    -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 푯대를 향하여 달려간다. 

    -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해 달려간다.


  [정리] 육체의 의를 의지한자는 자신에 대한 육체적인 의를 의지하고(과거) 앞으로도 계속해서 육체적인 의를 지향(미래)하며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사람은(과거, 확정된 미래보장)은 의를 완성하기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부르심의 상>을 위해 산다. 

  [묵상] 육체로 사는 사람들은 의의 만족을 위해서 살아가지만, 하나님의 의를 의지해서 살아가는 자는 만족된 의에서 더 나아가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산다. 바울이 복음을 위해서 매임을 당하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 되어 공동체 내부에서도 오해되는 부분이 있지만 그럼에도 바울은 자신의 부르심에 향해서만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시기하고 다투는 자들과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힘쓰지 않겠다는 것이다. 자신은 부르심의 상을 위해서, 그 푯대만을 보고 달려가겠다는 것이다. 

  (권면) 

  4)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하라.

   (온전히 이룬자들: 바울처럼 자기 의가 아닌 하나님을 근거로 의롭게 된 자들)

   (1) 만약 어떤 일에 너희가 달리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2)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정리] 교회 안에서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어떤 것이 참되게 하나님의 뜻인지 알수 없을 때) 우리가 옳다고 깨닫고 믿는대로 그대로 행하라(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을 시기하고 다투기 보다는) 만약 달리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그래서 그들의 생각이 잘못되었다면) 하나님이 그것도 너희에게 나타낼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라. (그러니 죽자살자 싸우지 말라. 서로 다른 입장에서 토론을 할 수 있겠지만)


<질문하기>

1. 왜 바울은 처음에는 육체의 신뢰문제(자기 의냐? 하나님의 의냐?)로 이야기 하다가 나중에 자신은 부활의 문제로 넘어간 것일까?(3장 10절 이후)

  - 빌립보 교회의 갈등 원인이 의롭게 된 이후의 삶에 대한 갈등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여전히 믿음으로 의롭게 된 이후에는 육체를 신뢰하는 자들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칭의 이후는 율법적 방법으로 상을 얻을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 그들의 입장이 바울의 가르침과 달랐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 신앙적 입장 차이가 발생한듯 하다.(악의적이라기 보다는 아직 정확하게 신학이 정립되지 않은 상황이니 그렇게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

  <첨언> 주석을 좀 살펴보니, 빌 2장까지는 교회 내부의 경쟁관계에 있는 부류들과의 논의라면, 3장은 교회를 해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경고라는 내용을 본다. 확실히 2장과 3장에 언급한 대상을 묘사하는 것을 볼 때 바울의 태도가 많이 다르긴 하다.(포용적, 배타적) 그렇다면 3장에 언급된 대상들은 예수를 믿는 것 외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이미 얻은 것이 아니라 앞의 것을 잡으려고 한다.(13절)는 바울의 태도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믿음으로 의롭게 됨 이후 상급을 받기 위한 헌신으로 봐야 할 것인가?)(17년 4월 14일. 추가해서 넣음)

  - 빌립보 교회 안에서의 갈등이 이 지점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싶다.(아직은 개인적인 생각이다.) 바울과 경쟁관계에 있었던 그룹이 이런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고, 바울은 이 부분에서 바울의 신학적 입장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당장 결론을 배타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결국 하나님께서 이 입장에 대한 바른 답을 우리에게 주시지 않겠는냐? 하면 마무리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물론 결론 바울의 입장이 맞는 것으로 나오지만. 당시의 입장에서는 이것이 사실이다 권위를 가지고 결정해주는 사람들은 없을테니.. 논쟁하면서 입장이 후대에 정리되어 왔을 것이다.)

 - 과제: 바울과 다른 입장에 있던 사람들의 특징이 무엇인지 파악해 보면 좋을듯 하다. 이들은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고, 바울이 매여있을 때 경쟁적으로 복음을 전했던 사람들이다. 그러나 바울과는 어떤 면에서 입장이 달랐을 것인데,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칭의 이후의 입장이 달랐던 것은 아닌가 생각된다. 그리고 적어도 바울이 빌립보서는 쓸 당시에 바울은 자신의 개인적인 입장과 확신을 기록하고 있지만 단정적으로 말하지 않고 오히려 후에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알려주실 것이라는 태도로 말한다.(바울이 확신하는 지점은 있지만 모두가 확정할 수 있는 부분에서는 가능성을 열어놓은 태도를 통해 바울은 교회를 분열이 아니라 하나됨으로 만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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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3:1-3>(정리하기)

1. (권면)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1절)

  - 반복해서 하는 말이지만, 중요한 말이다.(너희에게 안전하다.)

2. (권면) 삼가해야 할 것

 1) 개들을 삼가고 

 2)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3)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권면) 해야할 것

 1)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2)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질문하고 묵상하기)

1. 기뻐하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 기뻐할 수 있는 키가 '주 안에서'에 있다고 봐야 하는데 '주 안에서'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묵상] 감정적으로 상식적으로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바울이 '기뻐하라'는 권면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상황은 감정적으로 혹은 상식적으로 기뻐할 수 없는 중에서도 '기뻐하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히 '긍정적인 사고'에 의한 기뻐하라는 아니다. 왜냐하면 '주 안에서'라는 수식어가 있기 때문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을 문맥에 상관없이 해석하는 것도 조심해야 할 것이다. 빌립보서를 쓰고 있는 바울의 상황, 빌립보 교회의 상황이라는 맥락을 염두한 이해가 있어야 할 것이다.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이유를 고백했다.(1:18) 그것은 자신의 매임의 몸이지만, 시기하는 자는 득세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이 바라고 소망하는 복음의 전파는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치관이 자기 자신 중심의 아니라 하나님 나라와 복음을 중심으로 했기 때문에 기뻐할 수 있는 근거가 있는 것이다. 

 사역자들의 성공여부가 복음의 진전여부, 하나님 나라의 확장여부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심지어는 내가 철저하게 낮아지고 초라해지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기도 한다. 그럼 왜 하필 그 낮아져야만 하는 사역자가 나인가? 그렇게 물으면 우리는 기뻐할 수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자신의 형편도 해석해 낼 수 있는 수준이 될 때, '주 안에서' 기뻐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으로서, 이와 같은 가치관이 얼마나 중요한지 바울은 반복해서 말하는 것을 수고스럽지 않게 생각했고, 오히려 빌립보 교회에게는 안전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만큼 중요한 가치관임을 말한다. 이는 그만큼 간과하기 쉬워서 그릇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2. 2-3절에 삼가하라는 것과 행하라는 권면은 앞에서 언급한 주제와 전혀 다른 주제로의 전환인가 아니면 연관성있는 권면인가? 

  - 이는 2,3절에 말하고 있는 권면의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그 이후 앞의 내용과 연관되는 주제인지 아니면 별개의 또 다른 주제인지를 확정하면 될듯 하다. 

  [정리, 묵상] 개들이나 행악하는 것, 몸을 상해하는 것(손할례당)은 다른 3가지 행위라기 보다는 경계해야 할 대상에 대한 개괄적인 이미지에서 행위로 구체화 되어과는 표현으로 보면 좋을듯 하다. 바울이 지적하고 하는 것은 육체적인 할례를 핵심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들을 일컫는 것으로 보인다. 할례를 통해 자신의 의를 주장하고, 행위로 의를 자랑함으로 교회를 어지럽히는 대상을 말하는 듯 하다. 이들은 그릇된 가르침으로 복음을 훼손하고, 교회를 나뉘게 하는 사람으로서 이들을 삼가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주 안에서 진짜 할례파는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를 자랑하며'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 우리와 같은 사람들이 진짜 할례파라는 것을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재차 확인시켜 주고 있다. 


교회 안에서 '자기의 의'를 위해서 봉사하거나 사역하는 것은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손할례당과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서 일하면서 '그리스도를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드러나게 되는 것'은 삼가해야 한다. 

바울은 옥중에서 이 싸움을 했다. 주의 일을 하는데 '자신이 드러나지 않게 되는 것' 때문에 속상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주님의 일을 하는데 왜 내가 드러나야 하지? 왜 꼭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일하셔야 하지? 나는 잠시 필요할 때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도구(?)인데 왜 도구인 내가 하나님께 나를 써야만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지? 더 좋은 도구가 있다면 기꺼이 그 도구를 사용하시는 것이 맞을텐데.. 이 비밀을 바울은 옥중에서, 경쟁자와의 경쟁 속에서 깨닫게 된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옥중에서도 기뻐할 수 있었다.(1:18)


그러나 바울은 빌립보 교회도 그와 같은 입장을 견지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적어도 교회는 이것을 분별할 수 있어야했다. 사람을 자랑으로 삼고, 육체를 신뢰하는 방향으로 가서는 안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했다. 언제나 하나님을 봐야지 하나님께서 지금 쓰고 있는 '도구'에 집착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도구는 시대마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법이다.)

  - 한 마디로, 너희가 바울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지금 뜨고 있는 그 사역자에게도 집착하는 우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를 자랑해야 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랑이 아닌 성령으로 봉사해야 하기 때문이다.(교회는 이런 분별력이 중요하다. 반복해서 말하노니 중요하다) 

이렇게 정리해 본다면 3장 2-3절의 권면은 앞의 주제와 큰 맥락에서 같은 흐름 속에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 흐름 속에서 2,3절의 권면을 이해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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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25-30>(정리하기)

(바울이 디모데를 당장 보내기는 어려운 상황임을 설명한 후에)

1. 바울이 에바브로디도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것에 대해서 설명한다.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설명]

  (1) 에바브로디도는 바울의 형제다.(형제와 같은 관계)

  (2)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자다.

  (3)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서 바울의 쓸 것을 돕왔던 자다. (25절)


  [에바브로디도가 빌립보 교회로 가기를 요청함]

  (1)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2)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에 빌립보 교회가 알았다는 것에 근심함(26절)

   - 그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께서 에바드로디도와 바울을 긍휼히 여겨 회복시켜 주심으로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해 주셨다.(27절)


  [바울도 우선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것이 낫다 생각함]

  (1) 바울은 디모데보다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2) 빌립보 교회도 그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3) 바울이 가졌던 근심(에바브로디도가 병들므로 서로 걱정함)도 해결됨(28절)


2. (권면) 이런 이유들로 에바브로디도를 먼저 보내니 기쁨으로 그를 영접하라. 그리고 존귀히 여기라(29절)

  1) 그는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도 돌보지 않고 나 바울을 섬겼다. 

  2) 너희 빌립보 교회의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그는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 교회를 대신해서 바울을 돕고자 보냄받은 사람이기에)(30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디모데는 빌립보 교회에서도 인정받았던 사람이었지만, 에바브로디도는 아직 충분히 인정받은 일군은 아니었던 것인가?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디모데를 보내주기를 원한다는 것을 안다. 왜냐하면 그는 이미 바울에게 인정된 자일뿐 아니라 빌립보 교회에서도 인정받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서로에게 인정된 디모데를 보내서 서로의 형편을 알고 전하는 것이 매우 유리할 것이다. 에바브로디도는 차선이었던듯 하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회의 보냄을 받아 바울에게 온 사자이지만 아직 사역자로서 충분히 검증되지 못한 일꾼이었던 것 같다. 게다가 첫 임무를 부여받고 왔던 에바브로디도가 바울을 제대로 섬기지도 못하고 병이 났다는 소식을 들으니 빌립보 교회는 오히려 에바브로디도가 폐가 되는 것은 아닌지 근심했던 것 같고, 에바브로디도는 자신의 병때문에 많이 위축되고 교회가 알고 있다는 것에도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다. 

  디모데 대신 에바브로디로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면서 바울은 빌립보 교회가 에바드로디도를 오해하지 않도록, 또 에바브로디도가 너무 낙심하지 않도록 설명해 주고 있다. 그는 오히려 힘에 지나도록 자신을 돕자가 병이 났지만, 하나님의 은혜도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에바브로디도는 원래의 목적을 충분히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그 마음과 정성만큼은 충분히 인정받을 만큼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바울은 설명하고 있다. 

 [묵상] 디모데 같은 일꾼도 있다. 모든 검증이 끝난 일꾼. 그러나 에바브로디도 같은 일꾼도 있다. 좋은 일꾼이 되기 위해서 검증해가야 하는 일꾼 말이다. 모두가 디모데 같을 수는 없다.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검증의 시간이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어떻게보면 실패로 여겨질 수 있는 에바브로디도의 과제에 대해서 바울은 낮게 평가하고 있지 않다. 결과는 취약했지만 바울은 에바브로디도의 태도를 봤고, 지금은 그 태도 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하다고 보았다. 

디모데를 만들고 싶다면, 에바브로디도와 같은 사람들에게서 가능성을 보고 그 수준에 맞는 적절한 격려와 평가를 해주어야 한다. 


2.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에바브로디도를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하게 여기라고 권면하고 있다. 

  에바브로디도는 첫 사역에서 성공적이지 못했다. 바울을 충분히 돕지 못했을 뿐더러 오히려 바울의 근심(그가 병들었으므로)이 되기도 했다. 교회는 자신을 대신해서 보낸 사역자의 실패(?)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묵상] 단순히 그 일의 결과만 봐서는 안될 것이다. 그의 태도도 함께 봐야 하고 그의 노력과 희생도 함께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런 종합적인 검토가 함께 되어야 한다. 성공한 사람에 대한 평가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다양한 측면을 교회는 평가해 보아야 한다.(장기적인 성장을 위해서) 반대로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사역자에 대한 평가는 더욱 다각적으로 검토해 보아야 한다. 그래야 다음 스텝으로 성장하도록 돕든지 아니면 다른 사역의 장으로 가이드 해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디모데도 중요하지만 에바브로디도가 디모데가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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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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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치유>


저자: 데이비드 시맨즈

출판사: 죠이북스

  * 상함 감정과 억압된 기억의 치유(죠이선교회): 개정판


상담과 내적치유라는 내용은 정통신학(하나님과 성경중심) 입장에서 보면 가벼운 주제로 여겨지는 같다. 단순히 주제가 쉽고 편하다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인 주제가 아니라 인간 중심적인 주제이기 때문에 그렇게 느껴지는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측면에서 상담과 내적치유를 조명해 봐야 필요가 있다. 상담과 내적치유는 단순히 목회적인 기법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 대한 이해를 확장해 주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의 신학에서 인간에 대한 이해는 다른 주제에 비해서 소홀하지 않았나 싶다. 그런 측면에서 본다면상담내적치유 어떻게 성도를 도울수 있을까 정도가 아니라 인간이란 과연 존재인가에 대한 이해를 도울 있는 주제가 된다. 


  책은 내적 치유 중에서 특히기억 치유를 주제로 다룬다. 성경을 통해서 , 하나님은 문제가 없고,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한좋은 소식 하자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좋은 소식 좋은 소식으로 듣 못하, 때론나쁜 소식으로 듣곤 한. 무엇이 문제인가? 저자는 하나님을 인식하고, 복음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수신기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특히 책에서는 상처입은기억’(무의식적 기억조차) 수신기를 고장나게 했고, 수신기를 달고 사는 인간은 하나님과 복음에 대해서 왜곡할 밖에 없음을 말한다. 


수신기가 고장나게 되었는가? 고장의 원인이 무엇이고 고장의 심각성은 어느 정도인지를 저자는 말한다. 그리고 마지막 3 결론부에서는 어떻게 목회자는 고장난 수신기를 고칠수 있도록 도울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을 준다. 


  1. 자신의 수신기에 뭔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타인의 선한 의도와 중립적인 말에도 불구하고 자주 혹은 종종 왜곡된 반응을 보여 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사람들
  2. 과거의 상처의 기억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상처 저변에 (자신이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몰랐던 사람들. 그래서 근본적인 문제 해결이 이루어지지 못했던 사람들.
  3. 상처입은 누군가를 도와야 입장에 있는 사람들. 목회자, 소그룹 인도자, 목장과 구역리더들
  4. 상담과 내적치유와 같은 주제에 관심이 있고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를 원하는 사람들.


일부 전통적인 신앙의 입장과 약간 다른 저자의 경험을 담은 내용이 담겨있기 때문에, 신학적 입장이 다른 분들은 점을 고려해서 보면 된다. 


* 책에 대한 추가 정보는 죠이출판사의 소개를 참고하라.

http://joypress.tistory.com/162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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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9-24>(정리하기)

(바울이 자신의 의도와 생각을 전달하고자 한다)

1.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란다. 

   - (목적) 그래서 너희의 사정(형편)을 앎으로 안위(격려)를 받으려 한다.(19절)

(디모데가 바울에게 어떤 사람인지 설명함)

  1) 이는 나와 뜻을 같이하여 너희의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자가 디모데 밖에 없다.(20절)

   - 다른 사람들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않는다.(21절)

  2) 디모데의 연단(인품)을 너희가 알고 있을 것이다. 

   - 자식이 아버지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다.(22절)


2. 그러므로 바울이 자신의 일이 어떻게 될지를 보아서 곧 디모데를 보내려 한다.(23절)

3. 그리고 바울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24절)


(질문하며 묵상하며)

1. 바울은 지금 당장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빌립보 교회의 요청이 있었는지 아니면 빌립보 교회에 디모데를 보내야 할 상황인데 당장 보낼 수 없는 상황인것인지... 암튼 디모데를 당장 보낼 수 없는 상황을 설명한다. 

  [묵상] 요청을 거절해야 할 때가 있다. 어쩔 때는 당연히 해 주어야 할 것을 시기적으로 미루어야 할 때가 있다. 그 때 우리는 막연하게 상대가 이해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고, 내 마음을 읽어줄 것이라고 기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가 종종 있다. 요즘은 많다.(권위가 의심받고 냉소적인 시대라) 그래서 마음과 의도까지도 적극적으로 설명해주고 드러내 보이는 것이 좋다. 바울도 자기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생각과 의도를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당장 오케이 해 줄 수 없을 때, 마음은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을 때 우리는 마음을 표현해주어야 한다. 어쩔 수 없으니 네가 오해하든 말든 난 상관없다. 난 떳떳하다 변명하는 것은 어리고 어리석다. 설명해도 오해하는 것이야 어쩔 수 없지만, 굳이 오해의 여지를 남겨둘 필요는 없다. 


2. 디모데는 모두에게 필요한 사람이다. 빌립보 교회에도 당장 필요했지만, 바울에게도 필요했던 사람이다. 바울 주변에 있던 사람이 다 디모데 같았던 것은 아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 자기의 일'을 구했다.(21절)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했다. 자기 자신보다 주를 위해 헌신된 자였다.

  [묵상] 디모데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바울도 그렇고 빌립보 교회도 그를 신뢰했다. 그래서 서로 디모데가 곁에 있기를 바랐다. 디모데는 진실한 사람이었고(19,20절) 디모데는 자신의 일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일을 구하는 사람이었다.(21절) 그는 어렸지만 잘 다듬어진 사람이었다. 아들이 아버지를 대하듯 바울과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을 기쁘게 감당했다.(22절) 어디 이런 사람없는가!!


3. 빌립보 교회를 향한 바울의 마음도 알수 있다. 아들같은 디모데를 교회를 위해서 할수만 있으면 빨리 보내야 한다는 의식도 있었고 자신도 빌립보 교회에 꼭 가겠다는 의지를 밝히기 때문이다.(가게 될 것을 확신한다는 것은 꼭 가고 말겠다는 의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묵상] '확신'은 믿음이면도 동시에 '의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바울이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라고 말하는 내용 속에는 '꼭 가고 말겠다. 가고 싶다'는 의지가 함께 담겨있는 것이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는 것은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시길 간절히 바라는 의지' 함께 담겨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의지가 없이 '확신'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앙에서 '확신'은 확실한 사실이라는 객관적인 증거로만 볼 수 없고 그 안에 진실한 '의지'가 담겨있는 것인지를 함께 살펴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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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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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2년 전 죠이에서 나온 <하나님의 도시>란 책을 적극 추천한 글을 쓴 적이 있습니다. 그날 집에가서 책 내용을 간략하게 정리하는 글을 썼는데 그 내용을 나누는 것이 좋을지(책에 대한 흥미유발) 나쁠지(대략 내용을 알고나면 구매의욕이 오히려 떨어질 수 있음) 판단하기 어려워 '비공개'로 해 놓았다. 


대신 동기 부여가 될 만한 부분을 짧게 소개해 보고자 한다. 대부분의 책이 그렇지만 이 책의 저자(스카이 제서니, 한국명(?)천재선)도 현시대의 기독교가 가진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저자의 문제의식이 우리의 문제의식과 공감되는가가 중요하다. 왜냐하면 현실과 동떨어진 문제의식을 다루거나, 너무 두리뭉실한 문제의식으로는 책을 읽고자 하는 동력이 생기지 않는다. 


저자의 논리 전개는 이렇다. 

1. 현재의 태도를 결정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인식(종말론)에 있다. 

2. 현재 기독교가 가진 문제를 저자는 미래에 대한 그릇된 인식(비성경적 인식) 때문이라고 봤다. 

3. 현재의 청년들은 낙관론적인 미래를 믿지 않는다. 낙관론적 미래는 할아버지 시대에나 먹혔다. 지금의 세대는 낙관론적 미래를 조롱하는 세대다.  

4. 그리고 이 세대는 '지금 이 순간 미래의 증거'를 요구한다. 언젠가 모든 일이 잘될거야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그 말은 이미 많이 들었다.)

5. 이 세대는 냉소주의에 사로잡혀 냉소주의를 완화해 줄 수 있는 희망을 거부한다.(우리는 이런 악순환에 빠져있다.)


저자의 이와같은 인식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교회가 이 세대가 두르고 있는 냉소주의라는 갑옷을 꿰뚫고 들어가기 위해서는 먼 미래에만 국한되지 않는 희망을 제시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오늘날에도 적용되는 살아있는 희망을 발견해야 한다. 그리고 개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희망을 제시하여 개인적인 상처뿐 아니라, 그런 상처를 주는 가정, 공동체, 단체들같이 이 세상의 망가진 체계도 어루만져야만 한다."(1장, 27쪽)


저자는 현재를 형성하는 미래의 힘은 두 가지 방식을 가지는데 하나는 '희망의 형태'를 띤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목적을 부여'하는 것이라 한다. 절망의 시대에 희망은 지금하고 있는 것이 '영원'과 이어져있음을 알때 절망 속에서 지금의 일에 의미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는 지금 하고 있는 일(성도들의 일상)이 교회에 속한 일의 적극적 도구가 되거나 전환되어야 의미있다고 가르침(이원론적, 현실 도피적)을 줌으로 성도가 처한 현장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도록 했다는 것이 저자의 지적이다. 더 나아가 이원론적인 종말의식이 하나님과의 관계조차 왜곡 시켰다고 말한다. 그래서 저자가 위드<WITH>라는 책을 썼다고 한다. 


저자는 우리가 하나님과 관계 맺는 법뿐 아니라 세상과 관계 맺는 법도 다시 상상해야 할 필요를 느끼면서 이 책을 쓴 것이다. 그리고 세상과 관계 맺는 법을 바로 하기 위해서는 <미래>(종말)에 대한 인식을 성경적으로 해야 할 이유를 밝히고 있다. 


이후로 저자는 성경이 말하는 미래(종말)을 말하고(2장 결말) 그 이후 그간 기독교에서 잘못 가르친 개념(3장 진화, 4장 대피)을 설명한다. 그리고 5장 부활에서 정말 성경이 말하는 종말의 개념이 무엇인지(세상에 대한 건강한 인식)를 밝히고 결국 성도는 이원론적 가치가 아닌 자신의 소명(6장)에 따라 살아야 함을 말한다. 그러나 저자는 여기서 다시 한번 소명을 구체화해서 설명한다. 왜냐하면 소명에 대한 편향된 관점, 간과한 관점이 또 한번 왜곡을 가져왔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저자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질서(7장), 아름다움(8장), 풍요로움(9장)을 확장하는 일이란 오늘과 미래도시를 연결하는 일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마지막 10장은 저자의 주장을 함축한 개인적인 경험과 적용이며 핵심이다. 


이와 같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책의 방향성과 흐름과 지향적을 고려해 본다면 몇 번을 봐도 좋을 책이다. 현대적이며 희망적이다. 


교보문고: https://www.kyobobook.co.kr/product/detailViewKor.laf?mallGb=KOR&ejkGb=KOR&barcode=9788942103591&orderClick=JAj

알라딘: http://www.aladin.co.kr/shop/wproduct.aspx?ItemId=55242397

예스24: http://www.yes24.com/24/goods/17293036?scode=032&OzSrank=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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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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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2-18>(정리하기)

1. (권면) 그러므로 빌립보 교인들아 너희 구원을 이루라.(12절)

  - 너희가 나 있을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정리]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향해서 현재적 구원을 이루어가라고 권면한다. 구원의 현재성을 고려할 때 이는 구원을 바라는 성도들의 입장에서는 늘 긴장이 될 수 밖에 없는데, 이는 종말론적인 태도를 견지해야 함을 말한다. 바울이 없을 때에라도(마치 주인이 잠시 떠났을 때 종의 태도가 그의 구원을 결정하듯) 성도는 늘 주인 앞에 있는 것처럼 긴장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복종하면서도, 두렵고 떨림의 상태. 모든 것을 행해도 최종 결정권 주인이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1) (원리설명)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 하나님은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신다.

  [정리] 한 마다로 바울은 하나님께서 교회 성도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성도를 통해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잊지 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종종 우리는 믿지 못한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하시지? 이렇게 되면 하나님의 일이 그르치는 것이 아닌가? 그러나 바울은 너무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고 있다는 것을 믿으라고 요청한다. 

  2) (권면) (그러니)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정리] 바울이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구체적으로 권면하고 싶은 내용이다. 교회 안에서 '원망'과 '시비'가 없도록 하라는 것이다. 원망은 투덜거리는 것이고 부당함에 대해서 원망하는 것을 말한다.(행 6:1, 벧전 4:9) 빌립보 교회는 투덜거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일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그래서 원망이 나왔고, 지지받았을 테니까) 또 시기(논쟁거리)가 많았던 것 같다. 그래서 늘 의견이 나뉘었고, 견해차이로 인하 분파나 파당이 있었고 그로 인해 교회 안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던 것 같다. 

   (1)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2)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3) 생명의 말씀을 밝혀

   (4) 나의 달음질이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5) (결과적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내가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정리] 그러나 빌립보 교회 안에서 발생한 원망과 시비가 잘 해결되지 않고 지속되자 문제가 발생한다. 교회의 순수성과 성도의 순전성이 상실되기 시작한 것이다. 세상은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이지만 교회는 그 세상 가운데 빛으로 나타나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우려한다.(교회도 어그러지고 거스르는 세대와 같이 원망과 시비로 가득하다면)

그렇다면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고 빌립보 교회를 세운 바울의 수고와 헌신은 모두 헛되게 끝나는 것이 아닌가 바울은 우려한다. 빌립보 교회가 이 문제를 잘 해결해야 바울의 수고도 헛되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자랑할 것이 좀 있지 않겠는가 말하는 것이다.  


2. (바울의 소회)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정리] 만일 빌립보 교회를 위해 바울이 자신을 전제로 드릴지라도 자신은 후회되거나 아깝지 않다고 말한다. 오히려 기뻐한다고 말한다. 그것은 빌립보 교회의 가치가 바울에게는 그만큼 크다는 것을 말하며, 자신의 생명이 드려져도 전혀 후회없음을 말한다.(교회를 위한 자신의 죽음조차)

  (권면)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정리] 그러니 너희들도 너희 교회(빌립보 교회)에 대한 가치를 알아서 교회를 기뻐하고 기뻐하라는 것이다. 교회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원망과 시비가 생기겠지만 그러나 교회의 가치를 잊지말고 교회 자체를 혐오하거나 교회를 훼손하는 방향으로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피흘려 세우신 것이고(우주적 교회), 바울이 목숨 걸고 세운 교회(지역교회)이기 때문이다.  


(질문하며 묵상하기)


1. 구절구절을 전체 맥락에서 이해하기 위해서 각 구절별로 [정리]를 해 놓았기 때문에 따로 질문하며 묵상하는 내용이 길 필요는 없을듯 하다. 

2. 그러나 좀 더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은 '원망'과 '시비'가 나올 수 밖에 없는 교회의 한계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지상 교회의 불완전성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교회를 이끄는 사람들(리더십과 일반성도)의 불완전성에 있다. 따라서 지상 교회는 언제나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원망과 시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3. 따라서 '원망'과 '시비' 거리가 있다고 해서 교회가 아닌 것은 아니다. 오히려 '원망'과 '시비'를 원천적으로 할 수 없는 교회가 지상에서는 위험한 교회가 되고 만다.(이단이나 폐쇄적인 공동체) 건강한 교회는 '원망'과 '시비'의 한계를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면서 교회를 세워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4. 교회가 원망과 시비를 극복하는 길은 '구원의 현재성'에 대한 강한 인식이다. 종말론적 긴장감이다. '원망'과 '시비'를 지속하거나 확대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원망'과 '시비'를 정리하고 해결하는 방향으로 가야함을 말한다.(개인의 견해와 취향을 고집해서는 안된다. 옳다고 여겨지는 것에 대해서도 시점을 고려하는 지혜가 있어야한다) 

5. 아직까지는 본문의 내용이 더 구체적으로 언급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이정도에서만 묵상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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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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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9-11>(정리하기)

지금 본문을 살피기 전에 이전부터 전개되어 온 논리적 내용을 검토해야 한다. 바울은 빌립보교회를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고 있고 그 마음은 자기비움을 통한 낮아짐 곧 죽음에까지 낮아지는 태도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바로 그와 같은 낮아짐의 절정이 담긴 것임을 예로서 빌립보 성도들에게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2:1-8)

1. 이러므로 하나님이 예수를 지극히 높였다.(9절)

  1)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9절)

  2)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10절)

  3)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11절)


(질문하며 묵상하기)

1.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으심까지 낮아지신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이 말씀은 어떤 논리적 전개로 이어지는 것인가? 

  1)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끝이요 결말이 아니라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서 하나님과 성도 사이의 하나됨을 이루고, 교회의 하나됨(유대인과 이방인간의 담이 허물어짐)을 이루었듯이 교회 안의 성도들간의 갈등(시기와 투쟁)도 성도들 상호간의 낮아짐과 겸손을 통해서 하나됨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임을 말하는 것이다. 

  2) 그러나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죽기까지 희생한 사람들의 결말은 무엇인가? 아무도 그를 인정하거나 높임이 없이 잊혀지고 무시됨으로 역사속에서 사라지는 것은 아닌가? 그것만큼 허무한 것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다는 논리를 말한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죽으심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를 오히려 지극히 높이셨던 것처럼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 자신을 낮추고 희생한 성도의 가치를 높이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3) 바울도 복음 전하는 중에 '매임'을 당하고, 바울을 시기하는 자들이 득세하는 것을 보면서 '당황'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위임받은 사역을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확대되어갔다. 그리고 자신의 초라한 처지를 넘어 십자가와 부활의 역사 속에서 담긴 '영광'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세상에서는 허무한 자와 같지만 주님 앞에서는 그렇지 않음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부활의 능력은 어디까지인가? 죄를 구속하여 영혼의 구원에 이르는 것에만 머물지 않는다. 주를 의지해서 살아가고 사역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종말론적인 소망의 근거가 되고 메시지가 된다. 

[묵상] 지금은 십자가의 시대다. 기독교적 상황이 우울하고 사역하는 사람들에게도 내적 소망이 없는 냉소적인 시대다. 이 시대를 견디고 극복하는 것은 적극적인 열심도 아니고, 낭만적인 희망도 아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듯이 성도와 사역자들은 죽음과 절망임을 보면서도 십자가로 나아가면서 주님과 함께 수치를 당해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죽음의 자리에 이르렀을 때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향해 나아갔던 자들을 높이사 하나님의 승리와 영광을 보이실 것이란 믿음을 견지하면서 말이다. 지금은 복음과 함께 수치를 당하고, 지금은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낮아지고 녹아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내가 죽고 그리스도와 교회가 살게 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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