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2:5-8>(정리하기)


1.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직접적인 권면)

   =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인데.(5절)

  1)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동등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새번역)(6절)

  2)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었다.(7절)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다.(8절)

  3)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십자가에 죽으셨다.(8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정리해서 말하면, 바울이 품으라고 요청한 예수의 마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마음인가?(태도인가?)

  1)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하나, 동등함을 당연한 것(권리)로 취하려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권리(아버지의 권리, 시민의 권리, 대통령의 권리, 목사의 권리, 성도의 권리 등)조차 취하려고 하지 않았다.(주장하지 않았다.) 

    [묵상] 요즘처럼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는 시대가 있었을까? 민주사회가 되면서 소비자지상주의가 되면서 '권리'를 주장하지 않는 것만큼 어리석은 시민, 어리석은 소비자도 없는 시대가 되었다. '권리주장'의 옳고 그름을 시시비비해 주어야 하는 재판관의 시대가 되어 버렸다. 어떤 사람은 취할 권리를 주장하고, 어떤 사람들은 주지 않아도 될 권리를 주장하며 긴장하는 관계가 되어 버렸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디까지 주장하고, 어디까지 양보해야 할지 분간하기가 쉽지 않은 시대다. 권리 주장에 자신이 누려야 할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까지는 가지 말아야 한다.(그것은 양심이 증언할 것이다.)


  2)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 되어야 한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모양으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정말 사람이 되셨다. 이와 같은 낮아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묵상] 낮아짐은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다. 낮아지기 위해서는 '하나'가 되기 위함이고, 낮아짐을 통해서 인간의 수준을 끌어 '올리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그 목적을 가지고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간이 되셨지만 인간의 수준(죄있는 인간의 수준)이 되지 않으셨다. 인간들은 예수님에게 낮은 방식으로 상대하셨지만, 예수님은 높은 수준으로 상대하셨다. 이는 그들과 같아지시기 위함이지만 그들을 높이시려는 그 분의 목적을 보여주는 것이다. 


  3) 자기를 낮추는데 그 낮추는 지점이 '죽음'까지 가셨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대속'의 사건이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를 하나로 만들고, 교회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사건이다. 죽으심이 없이교회의 하나됨이 존재할 수 없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묵상] 우리가 성숙한 성인이라면, 성숙한 성도라면 누구나 자신이 어느 정도 낮아지는 자리까지는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느 정도의 양보는 있고, 어느 정도의 자기 희생이 있다. 교회는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이 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양보와 희생만으로 교회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죽는 자리'까지 내려가야 비로소 거기서 하나됨의 꽃핀다. 문제는 누구를 죽이느냐다. '상대를 죽여서 하나를 만들 것인가?' 아니다. '내가 죽어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바다. 예수님은 누구를 죽이지 않았다. 예수님은 자신이 죽으셨고, 자신이 직접 십자가의 길로 들어가셨다. 


2. 바울의 이와같은 '옳고, 자기희생적 권면'에 저항하고 싶은 논리는 없는가? 

  이쯤되면 우리는 묻는다. 그 말씀이 숭고하긴 하지만 결국 자신만 오해받고 희생당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닌가? 오히려 더 악하고 더 부족한 사람이 남아서 그들의 세상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결국 선한 자가, 겸손한 자가 희생하고 사라지면 그 교회는 덜 선한 자와 덜 겸손한 자들에 의해서 더 악화되는 것은 아닌가?


  바울이 빌 1장에서 매인 상태에서 받았던 생각들은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하나님 왜 하필 접니까? 복음 전하는데 탁월하고 복음의 메시지가 분명한 제가 왜 잡힌 것입니까? 저보다 능력이 부족하고 메시지가 불분명한 자들은 저렇게 활개치고 있는데... 저를 시기함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장하려고 애쓰는 자들이 저렇게 승승장구하고 있는데 왜 이 시기에 접니까? 뭔가 실수하신것 아닙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답답함이 있었을텐데, 그는 답을 찾은 것이다.(빌 1장에서) 그러니까 오히려 빌립교 교회를 향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기쁘게 받아들이라고 권면하고 있다.(예수님도 그러셨으니까.)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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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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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2:1-4>(정리하기)

1.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위로나, 성경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다면

 <해야 할 것>

  1) 마음을 같이 하고(2절)

  2) 같은 사랑을 가지고(유지하면서)

  3) 뜻을 합하여

  4) 한 마음을 품어


 <하지 말아야 할 것>(3절)

  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경쟁심이나) / selfishness

  6) 허영으로 하지 말고


2.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요청하는 권면(3-4절)

  1) 겸손한 마음으로 하고(3절)

  2) 자기보다 서로 남을 낫게 여기라.

  3)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4절)

  4)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


[질문하고 묵상하기]

1. 바울이 2장 첫절부터 한 마음과 한 뜻을 강조하고, 다툼에 대한 경계를 권면하는 것은 어떤 맥락에서 일까? 

  1) 바울은 자신이 매임 가운데 있을 때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인 자들 중에 바울에 대한 투기와 분쟁에 근거해 복음 전파하는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1:15, 17)

  2) 바울은 이와 같은 부정적인 상황(그릇된 동기에 근거해서 열심을 내는) 속에서도 하나님은 오히려 하나님의 일을 성취해 가신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바울은 기뻐하고 기뻐하기는 하지만(1:18) 그들의 그와 같은 행동에 대한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수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3) 그리스도 안의 성도의 교제가 있는 사람들이라면(2:1, 사랑의 무슨 위로, 성령의 무슨 교제,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어떤 일이든 다툼(경쟁이나 시기와 같은)이나 허영 때문에가 아니라, 마음을 같이하고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지적한다. 


2. 빌리보서 2:1-4에 다루는 주제는 비그리스도인들과의 문제가 아니라 성도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한 권면이다.(사랑으로 한 마음이 아닌, 시기와 허영에 기인된 열심)

  1) 시기와 허영이 아닌 사랑으로 한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1)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2)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라,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야 한다. 

  -> 마음으로는 겸손하고, 태도로는 자기 일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도 돌아보아야 한다. 


바울은 자신이 당한 두 가지 일(매임, 순수하지 못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사람 등장)로 인해 복음 전파의 사역에 차질이 생길 것이라고 우려했으나, 오히려 두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사역은 확대되었다.(1:12-18) 그것을 깨닫고 바울은 찬양하고 기뻐한다. 

그러나 결과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성도로서 잘못한 부분을 지적하지 않을 수는 없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는(권면이든 위로든 교제든..) 다툼이나 허영으로 주의 일을 해서는 안되고, 겸손함과 서로 돌아봄으로 한 마음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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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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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에 <하나님의 도시>란 책을 다시 읽었다. 2년 전쯤 책이 발간되고나서 바로 읽었을 때 기독교 종말론에 근거한 현재적 종말론적 삶에 대한 설명이 깊이 와 닿았던 기억이 있어서 다시 잡았다. 그 때 이 책을 읽으면서도 다시 한 번 읽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마무리했던 기억이 난다. 보통 그렇듯이 첫 인상이 좋았다고 실제로 두 번 읽게 되는 책은 많지 않다. 그런데 나는 다시 이 책을 읽었고 지금 그 내용을 정리해서 주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은 마음에 글을 쓴다. 책을 다 읽고 주변에 그 책을 읽은 사람들에게 물어보니 저자의 이전 책(하나님을 팝니다, 위드)이 강렬해서 기대하고 봤는데 좀 실망했다는 피드백이 있어서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이 책이 이 전 책과 성향이 좀 다르며 책의 전체적인 논지를 파악하지 않으면 좀 산만하게 읽혀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읽으면서 파악한 논지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한다. 그래야 혹 이 책을 읽게 되는 분들이 덜 혼란스럽게 이 책이 주고 있는 유익을 최대한 누릴 수 있다고 판단해서.


이 책은 10개의 장으로 이루어졌다. 

먼저 큰 틀에서 저자의 논지 흐름을 따져본다면, 첫장(비전)은 저자의 문제의식에 대한 것이다. 미래는 현재의 삶을 결정하는데 미래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시대는 냉소적인 세대가 되었다. 낙관적 미래를 기대하지 못하는 세대다. 교회가 말하는 낙관적 종말(점진적 성장을 통한 완성) 역시 성도들의 헌신을 이끌어내지 못하는 시대가 되었다. 오히려 낙관적 미래를 말하는 것을 조롱하는 냉소적인 시대가 되었다. 그래서 현 시대는 미래에서 희망을 발견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한다. (역사적인 사건. 1939년 뉴욕 박람회, 디즈니월드의 투모로우랜드 방문, 개인적으로 동생의 죽음의 사건 등을 그 감정을 전달한다.) 그럼에도 교회는 여전히 이와같은 상황인식을 못하고 헛다리를 짚는 방식으로 <당위>를 전하고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희망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문제의식을 지적한다. 저자는 교회가 건강한 종말론을 가르치지 못한 것에서 문제의 원인을 찾고 미래 완성될 <하나님의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책을 쓰게 된 동기에 대한 부분이 잘 나와있고, 문제의식이 잘 나와있다. 첫 장을 정성스럽게 읽는다면 그 힘으로 끝장까지 충분히 갈 수 있을만큼 흥미롭다. 

둘째장(결말)은 간략하게 말해서 성경에서 말하는 종말은 과거의 회귀가 아니라 진보라는 것을 분명히 한것이다. 창세기는 <동산>에서 시작하지만, 요한계시록은 <도시>로 묘사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동산에서 도시로 나아가기 위해서 <광야>를 거쳐야 하는 시기가 있지만 그 광야에는 여전히 질서가 있었고, 아름다움이 함께 했으며 풍요로움이 동반되었음을 저자는 출애굽한 백성이 광야에서 보낸 시간을 설명하면서 간략하게 언급한다. 

저자는 사도요한이 미래도시를 환상가운데 보고 다시 현실로 내려왔다는 것을 지적한다. 따라서 당시의 그리스도인들은 광야의 현실을 살면서 어떻게 사도 요한이 보여준 <미래도시>가 도래할 것인가 기대하게 되었을까 질문하면 다음 장으로 인도한다. 


셋째장과 넷째장은 지난 교회의 역사 속에서 <미래 도시>가 어떻게 성취될 것으로 인식하고 가르쳐왔는가를 제시한다. 저자는 두 개의 가르침을 제시하는데 하나는 진화(셋째장)고 다른 하나는 대피(넷째장)다. 진화는 낙관적인 성장을 통한 미래도시 완성의 종말론인데 이와 같은 개념은 교회의 역사속에서 희망을 만들지 못하고 오히려 냉소주의를 형성하게 되었음을 지적한다. 기독교 세계관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성경적 질서로 이 세상에 하나님의 도시를 건설하자는 비전은 빛바랜지 오래되었다. 더 이상 이런 구호는 사람들을 헌신의 자리로 인도하지 못한다. 또 한 부류는 <대피>신학으로 나아간다. 세상은 멸망할 것이니 <영혼구원>에만 주력하자는 방식이다. 이런 종말의식은 삶의 다양한 영역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성실히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일은 부차적인 것이며 결국 헛된 것이라는 메시지를 주게 되었다. 이는 기독교를 섬처럼 세상속에서 고립된 존재가 되거 하거나 아니면 기독교의 이름으로 세상의 모든 영역을 점령하자는 운동으로 확대되면서 자신의 것을 확장하려는 이기적인 기독교로 인식되게 되었다. 

위에서 언급한 크게 두 가지 방식이 전혀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이는 <미래도시>에 대한 건강하지 못한 인식에 근거를 두었기 때문임을 저자는 지적한다. 

다섯번째 장(부활)에서 저자는 기독교 종말론의 핵심적인 내용을 가르친다.  예수님의 부활이 첫 열매가 되었다는 것을 말하면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몸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죽음에서 부활이라는 불연속성(하나님의 전적 개입)과 여전히 연속적인 '몸'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를 통해서 미래도시의 불연속성과 연속성을 설명한다. 한 가지 비유를 드는데, 넬슨 만델라가 케이프타운에서 바다로 7킬로미터 떨어진 섬에서 수감되어 있으면서도 자신의 정원을 가꾸어 갔던 이야기를 비유로 들어 만약 육지와 그 섬 사이의 바다가 사라진다면 넬슨 만델라의 정원이 육지와 연결될 것임을 제시한다. 

예수가 이 땅에 오셔서 미래도시를 경험하게 해주었다. 질서가 잡히고, 아름다움이 일어나며 풍요가 넘쳤다. 이제 그 역할이 우리에게 주어진 것임을 저자는 말한다. 내게 주어진 동산에 질서를 만들고 아름다움을 창조하며 풍요를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여섯번째 장(소명)에서 저자는 앞에서 언급한 미래도시의 그림 앞에서 우리가 오늘, 붙잡아야 할 것은 다시 <소명>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소명에는 크게 3가지가 있다. 첫째는 <최고소명> 둘째는 <공통소명> 셋째는 <특별소명>이다. 최고소명은 그리스도 그 분을 사랑하고 교제하는 것을 말한다. 저자의 두번째 책 <위드>는 이 최고소명이 변질될 때 어떤 문제가 발생하는가를 다룬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중심된 신앙이 아닌 하나님을 일로서, 도구로서 관계하려고 하는 신앙에 대한 문제의식을 다룬 책이다. 둘째소명은 <일반소명>이다. 일반 소명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느시대 누구든지 순응해야 하는 말씀들로 서로 사랑하고, 윤리적으로 살고, 용서하고 복음을 전하고 하는 등등의 소명이다. 셋째 소명은 <특별소명>으로 개개인을 향한 하나님의 독특한 부르심에 대한 것인데 성경은 이 부분에 대해서 개별적인 지침을 주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교회는 일반소명에 대해서만 강조하고 <특별소명>에 대한 부분에 대한 언급이 없거나 적어진다. 대개이 성도들은 목회자의 설교 속에서 자신이 있는 자리에서의 특별소명의 가치에 대한 말씀보다 일반소명(특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사역과 모임, 헌신 등)에 대한 강조만 듣고 그로 인해 교회에서 위축되거나 죄의식을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게 된다고 지적한다.(저자도 설교하지 않고 오랫동안 청중이 되어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교회의 가르침이 어떤 방향인지 깨닫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의 설명대로 본다면 세가지 소명중 우리는 첫번째 소명을 관계보다는 사역과 일로 만들어버리고, 일반소명만 강조함으로 특별소명을 근거로 살아가야하는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 안에서 작아지고 설 자리가 없게 만드는 우를 범해왔다고 볼 수 있다. (진화하라고 도전하거나 도피하라고 겁주면서)

저자는 일곱장(질서), 여덟장(아름다움), 아홉장(풍요로움)을 다루면서 미래도시가 보이지 않는 광야와 같은 이 땅에서 어떻게 미래도시의 동산지기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제시한다. 첫째는 <질서를 부여하는 일>의 가치를 강조한다. 바른 규정을 따라 질서를 만들면 그곳에서 화평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형상이 나타난다고 말한다. 올바른 질서를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가치를 강조한다. (경찰은 사회를, 부모는 가정을) 사회 정의를 위하는 것이 우선인가? 전도가 우선인가? 이 두가지 질문에 저자는 둘 다 서로 다른 영역에서 목적이 되는 것이라고 제시한다. 사회정의를 통해 선교를 해야 의미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 자체로 목적이고 질서를 부여하는 일이다. 관계의 질서(식탁과 성찬을 통한)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평화와 화해의 관계를 부여하는 일의 중요성을 따로 언급한다. 

둘째는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이다. 아름다움을 만든다는 것은 <실용성>과 대조되는 개념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 아름다운 성막을 만들도록 하셨다. 예배는 실용성을 넘는 것이고 미래도시는 실용성이 아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곳이다. 아름다움의 추구는 절망적 현실에 두려움을 넘어 희망을 제시한다. 저자는 이 장에서 실용적이지 않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예술가들의 소명에 대해서 언급하는듯 하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예술가들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 그 자체로 인정받지 못하고, 기독교적인 예술이나 선교적인 도구로서의 예술만이 인정될만한 것으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셋째는 <풍요로움>이다. 미래도시는 빈곤을 풍요로 바꾸는 도시다. 광야의 빈곤을 만나와 메추라기로 풍요롭게 하시고, 광야의 허기짐을 오병이어로 배불리신 주님의 나라는 주변을 풍요롭게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저자는 세상의 풍요를 제공하는 사람들(기업가와 금융 등의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가치를 발견하고자 하는듯 하다. 그들은 세상의 풍요를 만들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하는데, 이들이 두려움을 가지기 시작하면 소수의 사람들을 배불리는데 급급하게 됨을 지적한다. 교회는 이들의 가치를 인정해주어야 함을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진정한 풍요는 생명의 풍요임을 말하면서, 생명의 풍요는 십자가의 예수가 보여주었듯이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제시하면서 아홉번째 장을 마무리 한다. 


마지막 열번째 장(희망)은 이 책의 결론이다. 나는 이 장을 빨리 마무리해서 한 권을 읽었다는 성취를 얻고자 했다. 그래서 마지막 장의 집중력은 약화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나는 마지막 장을 읽으면서 눈물을 글썽이기까지 했다. 저자가 개인적인 경험을 이야기 하는데 그 내용이 나의 상황과 중첩되었기 때문이다. 미숙아로 태어난 아들이 죽음의 위태로움 속에 있었을 때 그가 고민했던 내용, 그가 그 현장(현재) 속에서 이미 미래도시를 건설하고 그 질서 속에 있게 되었던 그의 고백이 나의 고민이었고 고백이었기에 나는 깊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책은 <종말론>에 대한 책이지만 교리적인 정리가 아니라 실제로 종말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어떤 <미래도시>를 완성하기 위해서 지금 나의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책이다. 


적실한 문제인식을 통해 오늘날 이 시대와 한국 교회가 가진 한계가 무엇이며 그것을 해결하는데 있어서 <종말론>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일상적인 개념으로 잘 설명해 준 책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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