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 2:8-13> 10:55-11:07(정리) / 11:07-11:37(질문,묵상)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너희가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8절)

  -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9절)


(정리) 너희가 성경의 최고의 법, 이웃 사랑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을 '차별'하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율법은 그와 같은 행위를 정죄한다.

(질문) 야고보는 최고의 법(사랑)과 '차별'을 대조적인 의미로 설명한다. 사랑의 좀 더 구체적인 의미는 무엇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묵상) 사랑의 반대말이 미움과 증오일 수도 있지만, 야고보는 여기서 '차별'이라고 봤다. 사랑은 자신의 몸을 사랑하듯 이웃을 사랑하는 것인데, 차별은 자신의 몸과 대상의 몸을 차등적으로 구분하는 것이다. 단순하 차이가 아니라 '차이'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차별'이다. 

사랑이란 차이를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기본적인 차이에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것이다.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지 않고 동일한 인간적 대우를 해주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번한 자가 된다.(10절)

(예시)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살인하지 말라고도 하셨다. 

  따라서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않았어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11절)


(정리) 여러가지 율법 중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 간음하지 말라라는 율법을 만든 분이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도 함께 만드셨으니 그 중 하나만 어겨도 율법을 범한 자가 된다.

(질문)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로 접근한다. 이런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설명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상식을 무시한 편견에 사로잡혔던 것은 아닌가? 혹 교회가 '은혜'로 모든 것을 허용하거나 율법 폐기 논리를 주장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래서 야고보는 지극히 상식적인 논리를 끄집어 올려 설득하고 있는듯 하다. 

(묵상) 신앙은 상식을 초월하기도 하지만, 신앙의 많은 부분은 상식적으로 설명이 가능하고 상식적인 선에 있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하겠다. '초월'이 '상식 밖'인 영역이지만, '윤리 밖'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2. (권면) 너희는 말도하고 행하기도 하라.(12절)

-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설명)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 (그러나)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13절)


(정리) 권면의 내용은 간단하다. 말도 하면서 행하기도 하라는 것이다. 긍휼을 행하지 않는자는 긍휼없는 심판을 받는 것을 잊지 말고 긍휼을 태도를 가지라. 긍휼은 심판을 이긴다. 

(질문) <자유의 율법대로>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 의미가 무엇인가? 

(묵상) <자유의 율법대로>라는 말의 의미가 그 자체로 분명하지 않지만, 그것을 기준으로 해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고 야고보가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1) 말이 아닌 행한대로 갚는다는 원칙

2) 긍휼을 행하지 않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다.

3)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

행한대로 갚는다는 원리는 적용되면서, 부정적인 측면의 적용(하지 않으면 심판받는다)이 아니라 긍정적인 측면에서의 적용(긍휼이 여기면 긍휼이 여김 받는다)을 통해 긍휼은 심판받지 아니함으로 심판으로 이기고, 죄가 아닌 선행으로서 '자랑'할 것이 있게 되는 것, 이것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닌가 싶다. 

성도는 율법에 매인 존재는 아니지만, 율법을 무시하는 자도 아니다. 오히려 새로운 율법, 자유의 율법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존재이다. 


[최종정리]

1. 너희는 최고의 법인 이웃 사랑을 행하라. 

2. 그 사랑은 바로 차별하지 않는 것이다. 

3. 만약 차별한다면 그것은 율법으로 정죄받게 된다. 

4. 너희는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약 2:12) 

5.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살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한다.(약 2:13)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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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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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7>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절)

        (이유) 너희가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으니(1절)

        (예시) 만일 너희 회당에 사람이 들어오는데

한사람은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한사람은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2절)

너희가 아름다운 옷 입은자를 눈여겨보고, 좋은 자리에 앉게 하고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에 앉으라 하면(3절)

=>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 아니냐(4절)


(정리)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된다. 부유한 사람에 대해서는 신경을 많이 쓰고 대우를 잘 해주면서 가난한 사람에 대해서는 하찮게 여긴다면 이는 큰 잘못이다. 서로 차별하여 다른 존재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다.

(질문) 야고보는 왜 이런 주제를 다루는가? 그것은 공동체 안에 빈부의 차이로 인해 사람을 차별하는 문제가 공공연하게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차별이 어느 정도는 당연하게 여졌던 것 같다. 그로 인해 사람들의 마음이 불편했고, 교회 안에서 이런 차별을 허용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야고보는 이 문제를 다룰필요를 느꼈던 것이다. 

(묵상) 이 권면은 성도들을 대상으로 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그 은혜를 경험했다고 해서 고장났던 사람이 갑자기 모든 면에서 교정되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세상의 가치관과 편견에 사로잡힌 판단을 하게 된다. 사람에 대한 판단도 다르지 않다. 부한 자에게는 잘 대해주고, 가난한 자는 함부로 대하기 쉽다. 그가 가지고 있는 것의 유무에 따라서 그 사람의 가치를 규정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일반적인 생각이다. 

야고보는 그것은 잘못된 생각임을 지적한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해서는 안된다고 명확하게 지적한다. 사람을 차별하는 것(외모, 빈부의 차이)은 악한 생각이다. 예수를 믿고 인류 가운데 가장 큰 변화 중에 하나는 신분의 차이, 편견의 차이를 극복해 간 것이라고 볼 것이다. 사람의 외형적 조건으로 사람의 가치를 차별하는 것은 성경적이지 못한 것이다. 

왜 사람은 차별받아서는 안되는 것일까?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 신적 기원을 가졌다는 것만으로 존귀한 존재임을 알수 있다.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받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측면에서 역시 존귀한 존재이다. 인간은 기원에 있어서 존귀하고, 구속받은 공동체 안에서 역시 존귀하며 평등하다. 


(설명)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5절)


(정리) 그리고 너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하나님은 오히려 너희들이 하찮게 여긴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게 하시지 않았느냐? 그런데 이것을 아는 너희가 어떻게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느냐?  

(질문)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해서 믿음에 부요하게 한 경우는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인 히브리인들을 택하사 하나님 나라를 상속받게 하셨다. 나그네와 같은 아브라함을 택해서 믿음의 조상을 삼기도 했다. 애굽의 노예로 잡혀간 요셉을 통해 애굽의 기근을 이기기 했고 그 나라에 풍요를 더하게 했다. 하나님은 갈릴리의 어부를 택하사 주님의 제자를 삼았고 그들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게 하셨다. 

이렇게 보면 오히려 하나님은 가난한 자를 높여 쓰시는 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묵상)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존귀하게 여기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세상은 부한 자, 강한 자를 존귀히 여기고 가난한 자, 약한 자를 업신 여긴다. 하나님의 나라를 그릇된 질서로 정리된 세상 나라의 질서를 뒤엎고 새로운 질서, 온전한 질서를 부여하신다. 그러는 과정에서 하나님은 이 땅의 질서 속에 개입하셔서 가난한 자, 약한 자로 부유한 자, 강한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일을 일으키신다. 하나님은 이 땅에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신 분이고, 그 질서는 하나님의 교회에서 맛보아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교회에서조차 세상의 그릇된 질서로 운영되는 것을 보자 야고보 사도는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런데)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다.

부자들은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6절)

그들은 그 아름다운 이름(하나님)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7절)


(정리)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서조차 성도들이 가난한 자를 업신 여겼다. 왜 이리 어리석은가? 너희들을 법정으로 끌고가는 자가 누구냐? 가난한 자냐? 부자가 아니더냐? 하나님의 이름을 대놓고 비방하는 자들이 누구냐? 부자들이 아니냐? 

(질문) 부자들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면을 경험적으로 모르지 않을텐데 왜 사람들은 부자들을 오히려 더 존귀히 여기고, 가난한 자를 업신여기는 것일까? 

(묵상) 그것은 부자들이 현실 세계에서는 강하고 경제적인 유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들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가고 그들에 의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도 하고 발생할 수도 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가난한 자는 우리에게 그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함부로 대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따라서 부자를 가난한 자와 동일하게 대우해서 부자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면, 우리는 피해를 볼 수 있다. 당장 헌금이 줄 수 있고 경제적 물리적 피해를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두렵기 때문에 부자들이 원하는 대우를 해주게 된다. 이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똑같이 대우해주면 되지 하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다. 똑같이 대우할 때 받을 손해를 감수할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이런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자에 휘둘려서는 안되고, 그들의 주머니를 의존해서는 안된다. 교회가 한 두 사람의 경제적인 힘 때문에 휘둘리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된다. 따라서 교회가 너무 많은 빚을 가지는 것은 경계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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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9-27 >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정리하기) 말하는 것, 특히 성내는 것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질문하기) 말하는 것, 성내는 것과 관련된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교회 안에서 말이 앞서고 논쟁하는 중에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고 감으로 교회에 덕이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하고, 감정적인 부분을 잘 콘트롤하길 바랬던 것 같다. 야고보는 감정적인 폭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격한 감정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묵상하기) 야고보의 권면은 꼭 기독교의 독특한 권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많이 하기 보다 듣기를 권하고,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차분한 대화를 지혜롭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든지 과도한 화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행동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2. (권면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불경건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을 따르라' 라고 권면해도 될텐데, 그 앞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는 권면을 넣은 것은 이 두가지 권면이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쫓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묵상하기) 신앙 생활은 크게 두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더러운 것과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인듯 하지만 '말씀'을 온유함으로 따를 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권면을 '말씀'에 온유함으로 따르라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면2-1)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설명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23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음(24절)


(정리하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다. 

(질문하기)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는 왜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 것일까? 

(묵상하기) 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비유의 핵심은 '곧 잊는다는 것'(24절)에 있다. 즉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을 때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를 수정해야하며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안다.(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혹은 성장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했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다르다. 깨닫고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지적을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지 않으면서도 나도 나를 안다고 말함으로써 추가적인 권면이 효과가 없게 된다. 마치 항생제를 많이 써서 더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가 장기화될때 염증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설명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정리하기) 제대로된 성도는 율법을 보고 잊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질문하기) 왜 논의가 '말씀'에서 '율법'으로 전환되었는가? 전화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화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율법은 칭의와 관련된 설명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설명했다.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묵상하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오해를 푼다. 하나는 율법은 억압하고 성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고보를 만나 '율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받아왔던 오해(?)를 풀고 제 자리를 분명하게 잡게 된다.

(설명3-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설명3-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리하기) 경건하다고 말하려면 '자기 혀'(말,성내는 것)를 다스려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경건을 논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기) 26절의 '경건'은 말(혀)와 관련이 있다. 27절의 '경건'은 '약자의 돌아봄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심플하다. 그래서 '경건'은 '말'을 조심하고, '약자를 환난중에 돌보고',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하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혀)를 중심 논지로 본다면 26절은 고아와 과부(약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보조적으로)

(묵상하기) 우리가 생각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성품은 온화하고 교회의 여러가지 일로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야고보서는 경건의 첫 요소를 '말'(혀)에 두었다. 말은 '가치관'과 '생각'의 표현인데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담겨져있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약자에 대해서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냐가 그 사람의 경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 의 말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녹아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경건을 파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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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2-18>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교훈)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12절)

   (이유) 이는 시련을 견디어 낸 자가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기 때문이다. 

-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정리] 구절의 내용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정리는 생략한다. 다만 이 주제는 약 1:2-4에 언급된 부분과 맥락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시험을 받아들이고 참는 것의 유익함을 말한다. 

[질문] 본 구절을 이해하는데 특별한 어려움이 없기 때문에 질문이 있지는 않다. 다만 야보고 사도가 '시험'에 대한 문제를 1:2-4에 이어서 다시 언급하는 것으로 볼 때, 이 편지를 받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시험'의 문제가 당면한 신앙적 이슈라는 것은 알 수 있다. 

[묵상] 성도가 시험을 잘 견디어 내면, 생명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 따라서 시험은 어려운 것이지만, 성도의 삶에는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고 오히려 큰 유익이 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시험을 피하려고만 해서도 안되고, 시험을 두려워해서도 안된다. 겪어야 할 시험이라면 오히려 기쁘게 감당하고 그 과정을 통해서 자신을 성장시키는 것이 시험에 대한 성도의 바른 태도다. 


(사람들의 오해)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13절)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라.

(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정리] '시험'이라는 이슈와 관련되어 좀 더 구체적인 사안이 언급된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지금 내가 받고 있는 시험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닌가?'하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이다. 즉 '시험'의 원인을 하나님께로 전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었다. 야고보 사도는 우선 단정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단호하게 말한다.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받지도 않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질문] 그렇다면 성도가 당하는 '시험'과 같은 상황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가? 하나님은 적극적으로 시험하지는 않을지라도 시험을 받도록 허용하시는 것은 아닌가? 욥의 경우가 그렇고, 아브라함의 경우도 이삭을 바치는 문제에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이와 같은 경우를 성도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원리로 자신이 당하는 시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시험'으로 일반화 해서 설명할수도 있을텐데 왜 야고보 사도는 단호하게 '그렇지 않다'고 말하는 것일까?

[묵상] 야고보는 지금 성도가 직면하는 '시험'에 대해서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시험'의 유익함이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시험'을 잘 견딤으로 '성숙'해 지는 것을 기대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직면한 시험을 오용해서 해석하는 사람들도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도로 하여금 성숙해지는 도구로서 주시는 '시험'이 아닌 다른 차원의 시험까지도 '하나님께로부터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 사도는 지금 바로 그와 같은 사람들의 오용에 대해서 단호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바른 이해)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14절)

(원리)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15절)

[정리] 야고보는 지금 사람이 받는 시험에 대해서 '인간의 욕심'에 기인한 측면을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욕심'을 잉태해 죄를 낳았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온 존재이기 때문이다. 

[질문] 13절에 대해서 야고보는 나름대로 답을 제시한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문(아브라함과 요셉과 욥이 직면한 시험)에 대한 답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다. 

[묵상] 야고보는 지금 우리를 향해 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야고보는 그 당시 성도들을 대상으로 답하고 있고, 그 답은 그들의 상황과 맞닿아 있을수 밖에 없다. 야고보가 문제제기 하려고 했던 것은 지금 우리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라, 그 당시의 문제에 대한 답이다. 당시 성도들은 '시험'을 경험하면서 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시험을 주시는 것이지? 하는 신앙적 고민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야고보가 볼때는 진짜 알수 없는 시험을 당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험이 아니라, 자신의 욕심에 의해서 초래한 시험도 적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지금 그들을 향해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욥이나 아브라함, 요셉과 같은 '시험'은 일반적인 원칙이 아니다. 그것은 예외 사항이라고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사람을 시험하는 분이 아니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시험을 당한다'고 봐야 한다. 그 원칙으로 우리가 직면한 '시험'을 검토해야 하고, 그것으로도 풀리지 않는다면 예외 규정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2. (권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16절)

(이유)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17절)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로부터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원리) 그가 우리를 낳으셨느니라.(18절)

(목적) 그 피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려 하시려고

(방식) 자기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정리] 표현에 있어서 현란한 말이 많지만, 핵심은 간단하다. '속지 말라'는 것이다. 무엇에 속지 말아야 하는가? '시험은 하나님께로부터 온다는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온갖 좋은 것을 주시는 분은 하늘 아버지이신데, 그 분이 우리를 낳으셨는데 그 분이 당신의 자식을 시험하시겠느냐? 하는 것이다. 복잡한 표현들이 있지만 그런 표현들은 후차적으로 생각해보고 큰 틀만 보면 이와 같은 말이다. 


[질문] 오히려 여기쯤 오니 질문이 어느 정도 해결된다. 

[묵상] 야고보 사도가 말하고자하는 말은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시험하지 않으신다. 그 큰 틀에서는 변화가 없다. 따라서 우리가 시험을 당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욕심으로 말미암은 시험이다. 따라서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어려움 당하면서, 하나님이 나를 시험하고 있다는 식의 말에 속으면 안된다. 당신의 욕심 때문에 스스로 고통을 받고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지 하나님께 원인을 돌려서는 안된다고 야고보 사도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 구절은 욥의 경우와 아브라함의 경우, 요셉의 경우에 대한 답까지 제공하지 않는다. 그 문제에 대한 답은 다른 성경본문을 통해서 찾아야 할 것으로 보인다. 


[본문 핵심 정리] 

1.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다.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이다. 

2. 그러나 시험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시험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신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자초한 시험까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고 말하는데 그것은 옳은 것이 아니다. 그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3. 성도의 성숙을 위해 가는 과정 속에서 겪는 '시험'과 자신의 욕심으로 인해 자초한 '시험'과는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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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9-11> (정리하기)

1. (권면)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라(9절)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10절)

    (이유)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1)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11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질문) 낮은 형제가 자랑할 '자신의 높음'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묵상) 낮은 형제란 누구인가? 일차적으로는 신분적으로 낮은 자를 말할 것입니다. 종과 노예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종과 노예라 할지라도 예수의 자녀가 되고 교회 안의 성도가 되면 육체적인 신분의 차이를 넘어 주 안에서 형제요 자매가 된다. 당시의 상황이 교회 안에서 주어진 이 관계가 사회에 적용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지만, 교회 안에서 높아진 자신의 위치를 잊어서도 안될 것이다. 야고보는 종과 노예의 신분에 있는 자라 할지라도 교회 안에서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형제된 성도의 신분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낮은 형제란 이차적으로 어려운 환경에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볼 수 있겠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 주류에 들어갈 수 없는 자들을 포함한다고 볼 수 있겠다. 이들조차 교회 안에서는 한 형제요 자매로서 인정받아야 하고, 이들이 그렇게 느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어야 할 것이다.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 나그네에 대한 배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가 있어서 교회 안에서는 이들이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교만이 아니라 구성원의 한 명으로 인정되는) 공동체가 되도록 해야 한다. 

한 가지 기억할 것은 교회가 사회 선교로서 사회적 약자를 배려하는 것과는 구별해서 봐야할 것이다. 여기서는 교회의 구성원 중 '낮은 형제'에 대한 권면으로 그 대상을 교회 공동체 안으로 제한해서 봐야 할 것이다. 


2. (질문) 부한 자로 하여금 겸손하라고 권면하는 것이 보통이라 할 수 있다. 그것과 자신의 낮아짐을 자랑하라는 권면은 어떻게 다른 것인가? 


   (묵상) 부자를 향해서 겸손하라고 말하는 것은 사회적으로 바르고 성숙한 '태도'에 대한 권면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그것과는 좀 다른 권면을 한다고 봐야 한다. 야고보는 부자가 부자로 지내는 시절을 '풀의 꽃'이라고 봤고, '꽃'은 계절의 변화를 따라 필 때가 있고 질 때가 있다는 측면에서 설명했다. 지금 부자라고 해서 영원히 부자인 것이 아니다. 지금 젋다고 해서 영원히 젊을 수 없듯이 '인생의 영광'이라는 것이 '영원'할수는 없는 것이다. 부의 영광도 지나가는 것이다. 

  부한 자는 현재의 부과 과거의 축적으로서의 영광만을 생각하면 어리석어진다. 미래를 봐야 하고 인생의 역사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부한 자가 낮아지고 있다면 그것은 '헛된 영광'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는 계기가 된다. 특히 교회 안에서 부한 자, 높은 자의 경우 낮은 형제와 함께 형제 자매로 지내야 하기에 그는 교회 안에서 자신이 낮아진다. 그러나 부한 자는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 더 교만해지지 않고 자신이 피조물이며 인생에 불과하다는 자기 한계를 인정하게 된다. 


[정리] 교회란 어떤 곳인가? 모든 계층과 계급의 사람들이 주 안에서 한 형제와 자매의 관계가 되게 하는 곳이다. 낮은 자는 높은 자존감을 가지게 만들어 주고, 높은 자들은 자신의 낮음을 자랑하게 하는 곳이 바로 교회다. 오늘날의 교회가 가진 문제는 무엇인가? 낮은 자를 더 낮아지게 만들고, 높은 자를 더 높게 만들어 더 깊은 격차와 비교의식을 만드는 것이 아닌가 싶다. 

낮은 자로 자신의 높음을 자랑할 수 있는 곳, 부한 자로 자신의 낮아짐을 기뻐할 수 있는 곳 그곳이 교회가 될 때 교회는 이 땅의 소망이 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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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5-8> (정리하기)

1. [권면]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5절)

  (이유)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신다.


2. [권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6절)

   (이유)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같으니

   (결과) 이런 사람은(의심하는 자는)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7절)

   (원리)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8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구절간에 논리적 상호 연관성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병렬식 주제 나열인가? 

  1) 2-4절은 시험과 인내와 성숙에 대한 주제를 다루었고 서로 인과관계가 있었다. 

  2) 5절의 주제는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라'는 것으로 앞의 주제과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3) 6-8절의 주제는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라'는 것으로 의심하는 것에 문제에 대한 설명이 이어짐으로 인과관계가 있고 앞의 주제와는 '기도'라는 측면에서 이어진다 할 수 있다. 즉 지혜가 부족하면 지혜를 구하라(5절. 기도의 내용), 의심하지 말고 믿음으로 구하라(6-8절. 기도의 태도)로 정리할 수 있겠다. 


2. 큰 틀에서는 '기도'라는 것으로 주제를 잡을 수 있으나, 좀 더 구체적으로는 시험이 많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성도들은 지혜가 필요한데 그 지혜를 '구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성경 안에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모든 가능성에 대한 답을 제시하지는 않으셨다. 큰 원리에 대한 내용과 특수한 상황 속에서의 케이스를 언급하신 것인데 우리는 이것을 기초로하여 이 땅에서 새로운 상황에 대한 지침 즉 지혜를 얻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땅에서 시험을 극복하며 지혜롭게 살기 위해서 우리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할 필요가 있고, 하나님은 그렇게 구하는 간절한 기도에 대해서 '지혜'로서 답을 주신다고 말씀하신다.(그런 측면에서 본다면 지혜를 구하라는 권면은 2-4절에서 언급한 '시험'이란 주제와 연관된다고 볼 수 있다.)


3.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하라고 권면한다. 이 세상의 구체적인 지침까지 모두 성경에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다만 우리가 알고 있던 것과 다른 현상으로 나타날 때 우리는 왜 그런지, 여기서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하나님께 물으며 지혜를 구한다. 그 구체적인 '지혜'를 하나님이 주실 것이라는 그런 믿음을 가지고 구하라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시험'을 만나면 어떻게 해야할지 당황하여 숨거나 도망치지 말고 '지혜'를 달라고 기도하되, '믿음으로'구하라는 요청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이와 같은 신념이 흔들린다면 우리는 시험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갈 용기도 얻지 못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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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1:1> (정리하기)

1. (편지정보)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1절)

  - 야고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흩어진 열두 지파(유대인)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써야할 필요를 느꼈다. 앞으로 야고보가 다룰 내용을 아직 알 수 없으나, 야고보 안에는 뭔가 이유가 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가에 대한 궁금함을 가지고 야고보서를 읽어가야 한다. 


<약 1:2-4> (정리하기)

1. (권면) 내 형제들아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2절)

  -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1) (근거)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3절)

        - (권면)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 (근거)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4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야고보는 형식적으로 안부의 인사와 같은 내용을 다루지 않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야고보서의 성급함일 수도 있고, 사안의 시급함일 수도 있다. 어쩌면 편지를 받는 대상과 야고보와의 관계가 그와 같은 절차를 생략해도 되는 관계일 수도 있다. 야고보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2. 야고보의 첫번째 주제는 '시험 당함'에 대한 것이고 그 상황에 대해서 측은한 위로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험 당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파악해 그 유익함을 말한다. 

  1) 시험(various trial)을 당하거든, 당황해하거나 놀라거나 위축되지 말고 오히려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2) 믿음의 시험(the testing of your faith)이 인내를 만들기 때문이다. 오히려 인내를 충분히 발휘하도록 하라.

  3) 온전한 인내를 기름으로 온전해지고(perfect) 구비하여(complete) 조금도 부족하지 않은 자(not lacking anything)가 될 수 있다.

  [묵상] 다양한 시험을 만나게 되면 사람들은 당황하고 힘들어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다. 특히 예수를 통해서 만사가 잘되기를 바랐던 사람들은 더욱 당황한다. 초대교회에 성도들에게 닥쳐온 다양한 시험이 있었고 이로 인해 성도들 중 상당수는 이 시험을 받아들이지 못하거나 시험을 힘겹게 참아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고 생각할 때 성도들이 시험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에 대한 문제를 신속히 해결해 주어야 할만큼 문제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야고보는 시험을 믿음의 시험으로 보았고, 그 믿음의 시험은 성도들에게 인내를 만들어내는데 그 인내는 성도로 하여금 온전해지고, 완전해지며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는 완전 식품과 같은 것이었다. 신앙의 핵심은 인내인데 그 인내를 성장시키는 것이 바로 '시험'이다. 다양한 시험을 통해서 성도는 인내가 자라게 되고, 인내는 성도로서 모든 일을 완전하게 할 수 있는 기반이 되기 때문이다.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개인 트래이너를 통해서 훈련하는 이유는 스스로는 잘 관리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어려움과 불편함을 스스로 선택해서 근육을 키우기 어렵기 때문에 누군가의 관리를 받게 된다. 트래이너의 역할은 운동이 필요한 사람에게 어떻게 해서든지 운동을 시키는 역할이다. 기본적으로 하기 싫은 것을 시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돈을 들여가며 스스로 트래이너를 고용해서 그의 말을 듣는 것은 몸의 유익을 위해서다. 불필요한 살이 빠지고, 부족하던 근육이 생겨 몸을 더 균형잡히게 하고 더 건강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처음에는 힘들과 짜증내지만, 후에는 그 트래이너에게 고마워하고 즐겁게 순종하게 된다. (마치 현빈이가 학원에서 조용히 시키는 역할을 하는 선생들에게 짜증을 내고 화를 내지만, 훗날 그 선생으로 인해 학습태도가 좋아지고 성적이 올라간다면 고마워하듯이)

  예) 학교 시험도 마찬가지다. 누구나 시험을 싫어하지만 일반적으로 시험을 통해 학생은 실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 

  시험은 누구나 피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시험을 피해서는 인내를 배울수 없고, 인내가 없이는 성숙함으로 나아갈 수 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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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죠이정기모임 위클리(2017.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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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10-23>(정리하기)

1. (설명)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한다.

  1)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2)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10절)

  [정리] 바울은 지금 기뻐한다. 빌립보고 교회가 다시 바울을 생각해 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전에도 생각은 있었는데 그것을 표현할 기회가 없었으나 이제 그것을 표현할 수 있게 되었고 그로 인해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게 기뻐하는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2. (설명)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다. 

  1) 바울은 어떠한 형편에 든지 자족하는 법을 배웠다.(11절)

  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에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12절)

  3)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

  [정리] 바울은 자신을 변명하고 있다. 자신의 처지가 지금 경제적으로 궁핍하고 빌립보 교회가 물질적인 도움을 줌으로 경제적 궁핍을 극복할 수 있게 되어서 기쁜게 아니다. 바울은 경제적 여건과 상관없이 지내는 법을 알고 있다. 바울은 다른 이유로 빌립보 교회가 고맙고 좋은 것이다. 


3. (설명)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여하였으니 잘하였도다.(14절)

  1)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시초에 바울이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유일한 교회였다. (15절)

  2)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뿐 아니라 두 번이나 나의 쓸 것을 보내었다.(16절)

  [정리] 바울이 빌립보 교회로 인해 기쁘고 감사한 것은 바울의 고난과 사역에 함께 참여해준 것이었다. 바울이 복음의 시초, 마게도냐를 떠날 때 바울을 생각하고 후원한 교회가 빌립보 교회 뿐이었다. 데살로니가에서 사역할 때도 두 번이나 바울을 도왔다. 빌립보 교회가 어느때에 잠시 바울을 돕는 일을 하지 못했으나 이제 다시 하게 된듯 하다.(4:10) 그것이 바울을 기쁘게 했던 것이다. 


4. (설명)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풍성한 열매를 구함이라.(17절)

  [정리] 바울이 정말 간절히 바라는 것은 빌립보 교회가 보내주는 '선물'이 아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의 풍성한 열매'를 구한다. 바울은 옥에 있으면서 자신의 필요가 아닌 자신을 생각해주고 후원해주는 교회의 풍성함을 위해서 기도한다. 

  1)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성한지라.

   (1) 에바브로드도 편에 너희가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다.

   (2)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18절)

  2)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19절)


5. (찬양)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하도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20절)


6. (문안인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1)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21절)

  2)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히 가이사의 집 사람들 중 몇이니라.(22절)

7. (축복)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23절)


(질문하고 묵상하기)

1. 바울에게 있어서 빌립보 교회로 인해 정말 기뻤던 이유를 무엇이라고 말할수 있나? 

  [정리] 빌립보 교회가 에바브로디도 편으로 바울의 필요를 공급했던 것으로 보인다.(18절) 바울은 그것으로 인해 빌립보 교회로 인해 기뻐한다고 말했지만 단순히 물질적인 섬김 때문은 아니다. 빌립보 교회가 여전히 자신을 기억하고 다시 바울의 사역에 함께 동역했다는 것 때문이다. 빌립보 교회는 복음의 시초부터 바울과 함께 했던 교회고(15절) 어려운 시절 바울을 도왔던 교회였다.(16절) 여러가지 이유로 잠시 그와 같은 교류가 끊어졌다가 이제 다시 연결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10절)

  [묵상] 바울은 어떤 형편에든지 자족하면서 사역을 감당할 만한 믿음이 있었다. 그는 모든 형편에 처하면서 그 상황에서 적절하게 사역하는 것을 체득했다. 그러나 그는 혼자 외롭게 그 일을 하는 것을 즐기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 길을 홀로갔고, 빈궁한 중에 도 꿋꿋이 그 길을 갔지만 동역할 누군가가 있을 때 그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고마워했고 기뻐했다. 하나님께서 동역자를 붙여주셨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안에 위로도 얻고, 그 풍요를 누릴 줄도 알았다. 

  나는 지난 20년동안을 후원을 받아서 살아왔다. 빈궁한 시절도 있었고 풍요로운 시절도 있었다. 시간이 갈 수록 마음에 더욱 무게감있게 다가오는 것은 '후원자'분들의 헌신과 한결같은 신실함이다. 도대체 내가 무엇이관대 십수년을 한 결같이 적지 않은 금액을 꾸준히 후원해주고 있는가! 이 분들이 없었다면 나는 어떻게 지금까지 사역을 해 올 수 있었을까!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감사와 기쁨의 제목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이 분들의 물질적인 후원이 없이도 주의 길을 갈 수 있는 믿음을 길러야 한다. 후원자들로 인해 기뻐하고 감사하지만 매여있어서는 안된다. 이 두 감정과 관계 사이에서 중심을 잃지 말아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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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4:8-9>(정리하기)

1. (권면) 끝으로 형제들아, 이것들을 생각하라.(8절)

  1) 무엇에든지 참되며(허위의 반대말)

  2)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3) 무엇에든지 사랑받을 만하며(즐겁고 유쾌하고 사랑스럽다)

  4) 무엇에든지 칭찬 받을 만하며(정중한, 고상한, 우아한)

  5) 무슨 덕이 있든지(도덕적으로 뛰어남)

  6) 무슨 기림(worth of praise)이 있든지(도덕적으로 인정받아 칭찬을 받는것)


2. (권면)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9절)

  ->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질문하며 묵상하기)

1. 바울이 최종적으로 빌립보 교회에게 주는 권면은 무엇인가? 

  [정리] 무엇에든지 '참'되고, '경건'하고 '사랑받을 만'하며 '칭찬받을 만'하고 '덕'과 '기림'을 가진 성도가 되어야 함을 말한다. 

  [묵상] 바울은 이 6가지의 항목이 어떤 상황과 처지 속에서도 성도들에게 흘러 나와야 하는 것으로 권면하고 있다. 성도가 추구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외부적으로는 전도와 선교에 힘쓰는 것이겠지만, 내부적으로는 참, 경건, 사랑받을만하고 칭찬받을 만한 존재가 되도록 힘써야 한다. 도덕적으로 뛰어나야 하며 인정받을 수 있도록 되기를 힘써야 한다. 완전함에 도달이 아니라 지향점을 요구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바울의 표현대로라면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간다'는 것이다.(3:12)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해서 교회 안에서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한 다툼을 자제하고 한 마음이 되도록 요청하고 있다. 이것은 교회의 하나됨, 교회를 세움(4:1)을 위한 권면이라면 특정상황 뿐 아니라 보편적인 상황에서도 교회가 늘 추구해야 할 6가지의 덕목을 권면함으로서 빌립보서의 본론적인 메시지를 마무리 한다. 


2. 배우고 듣는 것의 목적은 '행하는 것'이다.(9절)


  [묵상] 바울은 빌립보서를 통해 빌립보 교회에게 가르침을 주고 있다. 교회 안의 문제가 무엇인지 그 근본 원인이 무엇인지 밝혀준다. 또 교회가 이 시대 속에서 경계해야 할 대상이 누구인지 그들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주어야 하는지 명확하게 알린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권면을 듣고 행하는가? 하는 것이다. 


  정말 교회의 하나됨을 위해서 자신을 낮출 것인가? 교회의 권위 앞에 죽기까지 복종할 것인가?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순종할 마음은 없지 않은가? 맞는 말이지만 나 자신에게 적용하기보다는 경쟁자인 상대방에게 바울의 권면을 근거로 요구하려고 하는 자세는 아닌가?(낮아짐을 요구하고, 죽기까지 순종을 요구하는 것은 영적 폭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내가 바울의 권면을 따라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것이지만, 상대에게 이 말씀을 근거로 그렇게 요구하는 것은 바울의 의도는 아니다. '내가 행하는 것' 빌립보서를 공부한 목적이고, 바울이 빌립보서를 쓰면서 기대했던 것이다. 

  은혜 받았다는 것은 무엇인가? 마음에 감동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 감동으로 인해 내가 낮아지고, 내가 죽기까지 복종할 것을 결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내가 변화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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