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28'에 해당되는 글 1건

<약 1:19-27 >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 말하기는 더디 하며 

 / 성내기도 더디하라(19절)

(이유)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20절)


(정리하기) 말하는 것, 특히 성내는 것을 더디하라. 성내는 것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 

(질문하기) 말하는 것, 성내는 것과 관련된 권면을 하는 것으로 볼 때, 당시 교회 안에서 말이 앞서고 논쟁하는 중에 감정적인 표현들이 오고 감으로 교회에 덕이 안되었던 것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말하는 것을 좀 더 신중하게 하고, 감정적인 부분을 잘 콘트롤하길 바랬던 것 같다. 야고보는 감정적인 폭발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격한 감정으로는 선을 이룰 수 없다)

(묵상하기) 야고보의 권면은 꼭 기독교의 독특한 권면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일반적인 측면에서도 말을 많이 하기 보다 듣기를 권하고, 감정적인 흥분보다는 차분한 대화를 지혜롭게 보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고보는 그 원리가 교회 안에서도 유효하고, 하나님의 의의 관점에서도 유효하다고 본 것이다.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고 하면서 화를 많이 낸다든지 과도한 화를 표출한다면 그것은 성숙한 행동은 아니다. 교회 안에서 선을 행하면서도 '감정'을 다스려야 한다. 


2. (권면2)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21절)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정리하기)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는 말씀이다. 불경건한 것을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꺼이 따르는 자가 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질문하기) '하나님의 말씀을 온유함을 따르라' 라고 권면해도 될텐데, 그 앞에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라는 권면을 넣은 것은 이 두가지 권면이 서로 대조되는 개념을 가진다고 볼 수 있다. 즉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쫓는 것은 '말씀'을 온전히 따르지 못함에서 발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는 말이다. 

(묵상하기) 신앙 생활은 크게 두가지 노력을 해야 한다고 볼 수 있다. 하나는 더러운 것과 악을 멀리하는 것이다. 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선을 행하는 것으로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말한다. 이 두 가지는 별개인듯 하지만 '말씀'을 온유함으로 따를 때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도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이 권면을 '말씀'에 온유함으로 따르라는 것으로 단순화할 수도 있을 것이다.

(권면2-1)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22절)

(설명1)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23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음(24절)


(정리하기)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듣기만 하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다. 

(질문하기) 말씀을 행하지 않고 듣기만 하는 자는 왜 거울로 자신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다고 비유한 것일까? 

(묵상하기) 이 거울로 자신의 얼굴을 보는 비유의 핵심은 '곧 잊는다는 것'(24절)에 있다. 즉 말씀을 듣는 자는 들을 때에 자신에게 어떤 문제가 있고, 어디를 수정해야하며 어떻게 단장해야 하는지 안다.(깨닫는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 혹은 성장해야 할 방향을 깨닫고도 그대로 행하지 않는 자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을 뿐 아무 변화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변화가 없는 것으로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말씀을 듣기 전에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에 비춘적이 없기 때문에 깨닫지도 못했고, 무엇이 잘못인지 몰랐다. 그러나 말씀을 듣고 나서는 다르다. 깨닫고 지적을 받았다. 그런데 그것이 전부다. 지적을 받았고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음에도 고치지 않으면서도 나도 나를 안다고 말함으로써 추가적인 권면이 효과가 없게 된다. 마치 항생제를 많이 써서 더이상 항생제를 먹어도 효과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문제가 장기화될때 염증을 치료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될 수 있다. 


(설명2)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25절)

(정리하기) 제대로된 성도는 율법을 보고 잊는 자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다. 그리고 그 일을 행하는 자는 복을 받을 것이다. 

(질문하기) 왜 논의가 '말씀'에서 '율법'으로 전환되었는가? 전화되었다기 보다는 좀 더 구체화 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율법은 칭의와 관련된 설명에서 '부정적'으로 인식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야고보는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고 설명했다. 율법을 긍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묵상하기) 이 구절에서 야고보는 '율법'의 오해를 푼다. 하나는 율법은 억압하고 성도를 불편하게 하는 것이 아닌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이라는 것을 말하고, 그 율법을 실천하는 자는 하나님께 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야고보를 만나 '율법'은 성도들로 하여금 받아왔던 오해(?)를 풀고 제 자리를 분명하게 잡게 된다.

(설명3-1)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물리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26절)

(설명3-2)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중에 돌보고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그것이니라.(27절)

(정리하기) 경건하다고 말하려면 '자기 혀'(말,성내는 것)를 다스려야 한다. 말을 함부로 하면서 경건을 논할 수 없다. 참된 경건은 고아와 과부를 환난 중에 돌보고,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질문하기) 26절의 '경건'은 말(혀)와 관련이 있다. 27절의 '경건'은 '약자의 돌아봄과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이 둘은 서로 연관을 가지는 것으로 봐야 할 것인가 아니면 별개의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인가? 우선 별개의 것으로 보는 것이 심플하다. 그래서 '경건'은 '말'을 조심하고, '약자를 환난중에 돌보고', '자신을 세속에서 구별하는 것'으로 정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말'(혀)를 중심 논지로 본다면 26절은 고아와 과부(약자)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고, 세상의 방식대로 말하지 않음으로 자신을 세속에 물들지 않게 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겠다.(보조적으로)

(묵상하기) 우리가 생각할 때,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기도를 많이하고 성품은 온화하고 교회의 여러가지 일로 봉사하는 사람을 생각하기 쉽지만, 야고보서는 경건의 첫 요소를 '말'(혀)에 두었다. 말은 '가치관'과 '생각'의 표현인데 그 사람 안에 무엇이 담겨져있느냐에 따라서 말이 달라진다. 좀 더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다면, 약자에 대해서 어떤 말과 행위를 하는냐가 그 사람의 경건의 정도를 나타낸다. 그 의 말 속에 세상의 가치관이 얼마나 녹아있는지를 통해 우리는 그 사람의 경건을 파악할 수도 있다. 따라서 말은 '말'의 문제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가치관과 세속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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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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