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읽기의 새 길>(원리편, 실제편)

1. 서구식 성경읽기(해석학)의 실패

2. 기독교의 역사는 해석확장의 역사다.

3. 서구식 성경읽기의 한계를 넘어 동양적 성경읽기가 기독교의 대안이 될 수 있다.

4. 동양적 성경읽기의 특징은 성경을 경전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성경 읽기 방식

5. 성경을 비평적으로보지 않는다. 성경의 초월적 내용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경전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믿지 않는 자는 종교를 떠나야 한다는 태도)

6. 경전 읽기의 목적은 내가 변화되는 것이고, 예수를 닮는 것에 있어야 한다. 성경을 해석하는데 결정적인 요소는 독자가 성경을 통해 하나님을 만난 체험이 있고 그것을 통해 영적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이 경험이 없는 자는 성경을 올바로 해석할 능력이 없다.(서구식 성경해석은 종교적 체험과 해석을 분리했는데 이것이 서구 기독교의 실패원인이다.)

7. 저자가 말하는 한국적(동양적) 성경해석의 원리는 1) 언어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2) 역사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여기까지는 서구식 성경해석의 방법과 큰 맥락에서는 비슷한듯 하다) 3) 영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

8. 세번째 영적 배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에 대한 저자의 입장은 한국적 성경읽기의 독특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선 성경의 초월적 내용을 믿는 믿음과 체험적인 경험 그리고 과거의 원리라고만 보지 않고 현재의 원리까지 제시하고 있다고 보는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인이 가지는 독특함은 지금 자신의 상황 속으로 성경 텍스트의 원리를 쉽게 끌어온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이것을 주관적 성경읽기라고 하는데, 저자는 주관적인가 객관적인가로 구분하지 않고 "동의할 수 없는 읽기"인가 "동의할 수 있는 읽기"인가로 구분해야 한다고 본다. (94쪽)

9. 그래서 저자는 문자적 배경, 역사적 배경을 근거로해서 영적 배경까지 가는 성경해석을 제시하고 그런 해석이 서구적 기독교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는 기회가 된다고 본다.

- 읽고 나서 기억나는대로 간략하게 정리해보면 이런 논리인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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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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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13-18>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있다면)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행함을 보이라.(13절)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너는)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14절)


(원리)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오는 것이 아니다.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임(15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16절)


(원리)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1.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17절)

2. 화평하게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18절)


(정리하기)

1. 정말 지혜와 총명이 있다면 그것을 행함으로 보이라. 지혜와 총명이 가득한 자에게서는 성결과 화평, 관용, 양순, 긍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다.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게 한다. 이것이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들이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할 태도다. 이 지혜는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다. 

2. 반면 이 땅의 지혜는 정욕적인 것이고 귀신의 것이다. 이 땅의 지혜에는 시기와 다툼이 있다. 너희 안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다면 그것을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말로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귀신의 것이기 때문이다. 

3. 따라서 너희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를 따라 성경, 화평, 관용, 양순, 긍휼을 행함으로 화평을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는 자가 되어야 한다. 시기와 다툼, 편견과 거짓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땅으로 부터 온 지혜요 마귀적이기 때문이다. 


(질문하기) 

1. 야고보는 '이러한 지혜는'(15절)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라고 말했다. 지혜라고 해서 모두 선한 것이 아니다. 지혜라고 불리고 인식되고 있지만 어떤 지혜는 땅에서 나온 것이고 마귀적인 것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혜를 두 가지로 구분해서 봐야 한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인지? 땅에서 나온 지혜인지 구분해야 한다. 

2. 본문에서 다루는 핵심 내용은, 행함(선행, 13절), 자랑하지 말라(말, 14절), 화평을 심으라.(18절)이다. 

약 3:1-12은 '말'에 대한 주제로 권면하고 있다. 약 1:19-27 말보다 행함을 강조한다. 약 2:14-26은 행함이 있는 믿음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는 앞에 언급한 주제를 다시 정리하고 반복하여 강조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말의 유의함과 행함의 강조가 시기와 다툼의 방향으로 가서는 안되고 오히려 화평의 방향으로 가야 함을 오늘 본문에서는 구체화하고 있다. 


(묵상하기) 

1. 그리스도인은 말보다 행함으로,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사람임을 말한다.(그리스도인 뿐 아니라 다른 일반적인 종교도 마찬가지고, 도덕적인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2. 그러나 우리는 '지혜'라는 것에 속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도 지혜를 말하면서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 낸다.(물론 자신과 자신이 속한 그룹을 유익을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야고보는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시기와 다툼'을 만들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이 땅에서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가 성공하고 승리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사단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하늘로부터 온 지혜는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맺는다. '성결, 화평, 관용, 양순,긍휼'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는 것이다. 

3.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서로 견해가 다르고, 가치관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 어떻게 화평을 추구할 것인가? 싸우지 못하도록 말을 통제할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속마음을 여과없이 다 쏟아내도록 해야 할 것인가? 그것도 아닐 것이다. 

대의를 생각해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죠이 공동체를 생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가 가지고 있는 현 수준을 고려해야한다. 그런 이해없이 완전한 미래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과거의 전통에만 매여서도 안된다. 현재 우리 수준에서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도록 서로 완급을 조정하고 보조를 맞춰야 한다. 그래야 화평을 이룰 수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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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3:6-12>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원리1) 혀는 곧 불이요 불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삶의 수레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라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6절)

(정리) 혀를 제어하거나 관리하지 못했을 때의 위험함을 말한다. 온 몸과 삶을 불태울수 있다.

(질문) 야고보는 왜 이리 혀(말)의 문제를 심각하게 집요하게 지적하는가? 교회 안에 말을 함부로 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문제가 심각했던가? 아니면 기독교가 말만 있고 행함이 없는 신앙으로 전락하는 것은 아닐까에 대한 우려가 컸던 것인가? 

(묵상) 지금까자 말과 혀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두 영역이다. 처음은 행함이 없고 말만 있는 신앙생활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이고 또 하나는 말을 함부로 쉽게 함으로서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인 영향이다. 두 문제 모두 말이 앞선다는 것이고 말이 삶으로 뒤받침 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측면에서 기독교 인들이 말을 잘 한다는 이미지는 좋은 것이 아닐 수 있다. 말을 더디해야 한다. 말을 줄여야하고 행동에 뒤 따라야 하며 빨라도 행동과 함께 이루어져야 한다. 


   (원리2)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와 벌레와 바다의 생물은 

다 사람이 길들일 수 있고 길들여 왔거니와(7절)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8절)


(정리) 사람이 다른 동물과 생물을 다 길들일 수 있으면서도 정작 혀는 길들이지 못한다.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둘러 스스로를 해롭게 한다는 말로 혀의 위험성을 지적한다. 

(질문) 야고보는 혀가 통제가 불가능할 뿐 아니라, 오히려 혀가 사람을 휘두른다고 봄을 혀를 심각하게 경계하고 있다. 왜 그럴까? 앞의 질문과 동일한 질문을 하게 된다. 

(묵상) 본인의 지체로 본인의 의지로 온전히 통제하지 못하는 기관이 있다. 내부의 장기들이 그렇다. 내 몸에 있지만 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자율적 기관이다. 그러나 손과 발은 내 의지대로 움직인다. 혀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람은 말의 실수가 많으며 그로 인해 혀가 자신을 해롭게 하는 경우가 되고 만다. 그런측면에서 본다면 말(혀)는 통제하는듯 하지만 통제되지 않는 위험한 지체가 된다. 

혀와 말의 문제는 말과 행위의 문제로 연결될 수 있다. 앞에서 행함과 믿음의 문제를 다루고 행함과 믿음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을 지적했는데, 말의 문제가 그렇다. 행함이 없이 말만 있을 때 믿음을 보일 수 없는 신앙이 되고 만다. 또한 말이 우리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품격)과 괴리된 내용으로 나오게 될 때 그것도 문제가 되고 만다. 정리하면 두가지 문제, 말만 하고 행하지 않는 것과 마땅히 그리스도인이라면 담고 있어야 할 말을 하지 않고 생각 밖의 말을 하는 것(내용이 채워지지 못해서, 세속적인 가치관, 경박함 등)을 모두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  


   (원리3)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9절)

한 입에서 찬송저주가 나오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10절)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쓴 물을 내겠느냐?(11절)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짠 물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12절)


(정리) 한 입 안에서 서로 다른 것(공존할 수 없는)이 나온다는 것이 말이 되냐? 안된다.

(질문) 말이 안되는 이야기, 불가능한 이야기인데 지금 교회 안에서 그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것이 문제다.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그 심각성을 깨닫고 행실을 바르게 하라. 이런 의미로 야고보는 계속 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있을 수 없는 일이 교회 안에서 일어나는 것일까?(이론적으로 불가능한)

(묵상) 교회는 이론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 발생하는 곳이기도 하다. 상식적으로 말이 안되는데 그런 일이 초대교회에서부터 계속 지속되어왔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이다. 현대 교회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왜 교회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되는 일들이 벌어지는가? 

야고보 사도는 그것에 대한 문제제기를 혹독하게 한다. 집요하게 한다. 왜 이런 모순같은 일이 교회 안에서 벌어지는지 명쾌한 답을 찾기는 어렵지만, 중요한 것은 교회 지도자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지는 것을 감추거나 숨기려고 해서는 안된다. 오히려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있음에 한탄하고 지적하고 책망해야 한다. 그리고 바른 길을 제시해야 한다. 외부에서 밝혀내기 전에 교회가 수치를 스스로 인정하고 밝혀서 고치도록 해야 한다. 야고보는 그렇게 했다. 문제가 없는 척하지 말고 문제를 지적하고 해결하도록 힘써야 한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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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1-5>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권면) 너희는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1절)

-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이유)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원리)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2절)

(예시1) 우리가 말들의 입에 재갈 물리는 것은 

우리에게 순종하게 하려고 그 온 몸을 제어하는 것이라.(3절)

(예시2) 배를 보라. 사공은 지극히 작은 키로써 큰 배를 광풍 속에서도 그 뜻대로 운행한다.(4절)

(소결론)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얼마나 작은 불이 얼마나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5절)


(정리) 선생되는 것을 신중히 하라. 선생에게는 더 큰 책임이 따른다. 왜냐하면 선생은 말을 많이 하게 되는데 말의 실수가 없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말(혀)은 작은 것 같지만 그것을 다스릴 수 있는 자는 몸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자다. 따라서 혀는 크기는 작아도 매우 큰 역할을 하는 것이다. 

(질문)

1. 본문의 논지를 통해 볼 때, 교사(가르치려는 자)가 되려는 자가 많았고 그들이 하는 말들로 인해서 긍정적인 면보다는 부정적인 문제가 적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2. 말의 영향력이 크고, 혀가 가진 힘이 크다는 것은 교회 안에서의 만의 문제는 아니고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통용될 수 있다. 모든 영역에서의 교훈이 될 수 있겠다. 어찌보면 야고보서는 구약의 잠언 같은 느낌을 준다. 

3. 야고보는 말에 실수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한다. 따라서 교사는 실수하면 안된다는 교훈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함부로 교사가 되어서는 안된다. 교사로 사람을 세울 때는 신중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묵상) 말은 얼마나 무서운가? 말 하나로 상대 전체를 파악하기도 하고 또는 오해 하기도 해서 그 사람이 그동안 쌓아온 것이 허물어지기도 한다. 오직 나 자신만이 제어할 수 있고 타인에 의해서 작동할 수 없는 것이 혀지만, 혀를 통해 만들어지는 말은 나를 세우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 게다가 말은 내 안에 있는 것이 나오고, 내 수준만큼만 나오는 것이기에 그 결과물을 단순히 말실수라고만은 말할 수 없다. 따라서 책임있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말에 신중해야 한다. 충분히 내용과 형식에 있어서 잘 준비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선생이 가지는 영향력을 고려할 때 신중하는 것이 현명하다. 

교회는 말이 많은 곳이다. 말이 많은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으나 그 말이 공식적인 소통의 장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물밑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그래서 정확한 말의 출처를 알 수 없고, 그 말이 가지는 무게를 알 수 없다. 심지어 무슨 말이 오고가는지 알 수 없기에 답을 해야 하는지도, 무슨 답을 해야하는지.. 누구를 향해서 해야하는지도 알 수 없게 된다. 

오늘 본문의 핵심은 말을 만들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말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말에 큰 영향력을 가지는 교사는 더욱 큰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말의 힘이 크니 소통의 장을 제한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말을 하는 사람들은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어떤 말을 하셨는가? 진리를 말하셨고, 본질을 말하셨다. 그릇된 것에 대해서는 두려움없이 말씀하셨지만 약한 자들에게는 따듯하게 말씀하셨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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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2:14-26>

(정리하기) (질문하기) (묵상하기)

1. (설명)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는가?(14절)

(예시)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15절)

너희 중에 (말만 하면) 무슨 유익이 있겠느냐?(16절)

  - 그에게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말만하고

  -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원리)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17절)


(정리) 신자라고 하면서 말만 하고 실질적인 행동이 없으면 그것을 어떻게 참된 믿음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말이 안된다. 그런 믿음은 없다. 

(질문) 여기서 말하는 행함이 없는 믿음과 행위가 아닌 것으로의 믿음과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묵상) 야고보가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말만 앞서고, 행함이 없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상식적인 측면에서 모든 종교나 도덕이 마찬가지다. 행함이 없는 종교나 도덕은 죽은 것이다. 야고보는 그런 측면에서 <행함없는 믿음/신앙>에 문제제기를 하는 것이다. 

바울이 구원의 방법으로서 말한 오직 믿음은 우리 인간에게 구원의 조건이 없다는 측면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정리하면 야고보의 문제제기가 일반 종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는 문제라고 볼 수 있지만, 바울이 말하는 <행위가 아닌 믿음>의 문제는 일반 종교와는 차별되는 구원의 방법을 말하는 것이다. 

야고보가 말하는 믿음은 신앙이라는 말로 대체할 수 있을듯 하다. 참된 신앙이란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되고 희생이 수반되는 것이어야 한다. 평안을 잃고, 춥고 배고픈 사람들을 만나거든 그들을 평안하게 해주고 따듯하게 해주고 먹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참된 신앙인이라 말할 수 있게 된다. 우리는 이런 요소는 잊고 간과한채 구원의 방법으로서만 <행위 아닌 믿음>을 주장하니 초점도 못 맞춘 것일 뿐더러 오히려 말만 하는 종교인으로 비판을 받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2. (설명)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18절)

(첨언)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그러나)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19절)

  (원리)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20절)


(정리) 신앙은 행위로 증명되어야 하는 것이다. 말과 지식은 귀신들도 하는 것이다. 말만 하는, 행위가 없는 신앙은 헛된 것이다. 

(질문) 야고보는 믿음을 보이는 문제를 지적한다. 믿음은 보여야 하는 것인가? 

(묵상) 바울이 말하는 믿음은 행위없는 구원의 방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인간편에서 근거도 없는 것이고 보이는 것도 아니다. 따라서 보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고보가 '믿음은 보여야 한다'는 취지로 말할 때 그 믿음은 바울의 것과 다른 것이다. 야고보는 믿음이라는 단어를 쓰고 있지만, '신앙'이라는 의미를 생각하면 더 적절하다고 보인다. 신앙이 있다는 것은 신앙이 없다는 것과는 다른 구별이 존재한다.(자기 희생, 이웃 사랑의 가시적인 형태)

 

(예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 아니냐?

-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21절)

(원리)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다.(22절)

(말씀)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의 의미이다.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23절)

(결론)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다.(24절)

  (예시)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원리)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정리) 아브라함도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 믿음이란 그 행함으로 온전해 지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행함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 없는 몸처럼 죽은 것과 다름없다. 

(질문)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자신의 믿음을 온전하게 보였다는 주장을 함으로 아브라함의 의롭게 됨이 아브라함의 행위를 통한 믿음으로 말미암음이라고 주장 했다. 이것은 바울의 주장과 비교할 때 어떤가? 

(묵상) 야고보는 여전히 믿음에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이어가고 있고 그 주장의 예로서 자신의 아들을 하나님께 바침으로서 자신의 믿음을 보인 아브라함을 들고 있다. 신앙이란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행위로서 자신의 희생을 감수할 수 없는 신앙을 참 신앙이라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기생 라합도 목숨을 걸고 정탐꾼을 살려준 것이다. 믿음은 자신을 희생하는 행위를 따르게 된다. 이런 맥락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믿음과 초점에 있어서 차이가 있다.(롬 4장. 행위가 아닌 은혜로서의 믿음, 약속을 바라는 믿음)


[최종정리]

1. 행함이 없는 믿음(신앙)은 헛것이다.(17절, 20절, 26절)

2. 아브라함도 아들의 목숨을 드리려 했고, 라합도 자신의 생명을 걸었다.

3. 신앙인이 말만 하고 자기 희생이 없는 것은 죽은 신앙과 다름없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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