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렘 1장] 한 이틀 고민하다가 예레미야를 시작합니다. 너무 장이 길기도하고, 선지서라 내용을 정리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아(솔직히 선지서는 아직 자신이 없어서) 머뭇거리고 있었는데, 지난 간사 세미나때 예레미야 강의를 들은 것도 있어서 용기내어 시작합니다. 두려움 반, 기대 반. 응원부탁드려요^^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


1. 예레미야에 대한 역사적 정보

  1) 베냐민 땅 아나돗의 제사장들 중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

  2) 유다 왕 요시야 13년에 여호와의 말씀을 받기 시작했다.

  3)  사역은 요시야의 아들 여호야김 시대부터 시드기야 11년까지(예루살렘 멸망) 임하였다.


2. 여호와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하심: 예레미야를 부르심

  1) 여호와: 모태로부터 너를 성별하여 불렀고, 너를 여러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

  2) 예레미야: 여호와여 나는 아이라, 말을 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 

  3) 여호와: 

   (1) 너는 너 자신을 아이라 하지 말고,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며, 무슨 명령이든 말하라.

   (2) 그들 때문에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 너를 구원하겠다. 

   (3) 손을 내밀어 내 입에 대시며, 내가 내 말을 네 입에 두었노라고 말씀하심.

   (4) 여러 나라 위에 세워 네가 그들을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며,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 


3. 여호와께서 환상을 보여주심: 살구나무 환상

  1) 무엇을 보느냐? 살구나무 가지를 보나이다.(살구나무=지킨다 라는 말과 음이 비슷함)

  2) 잘 보았다. 내가 내 말을 지켜 그대로 이루려 함이라. 

   : 여호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지키신다는 것을 살구나무 환상으로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여호와께서 환상을 보여주심: 끓는 가마

  1) 끓는 가마가 북에서부터 기울어져 있었다.

  2) 재앙이 북방에서 일어나 이 땅의 모든 주민들에게 부어지리라. 북방 왕국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사방 모든 성읍과 유다 모든 성읍을 치리라.

  3) 재앙의 이유: 무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에게 분향하고 우상에게 절함으로 심판하는 것

  4) 요청: 그러므로 너는 네 허리를 동이고 일어나 명령한 바를 두려워하지 말고 전하라.

  5) 약속: 내가 너를 유다 왕들과 지도자들과 제사장들과 백성 앞에서 놋성벽이 되게 하리라. 너를 치나 이기지 못하리니.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할 것입이라.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내용을 나의 말로 풀어서 서술]


예레미야는 베냐민 아나돗의 제사장 중 한 명인 힐기야의 아들이다. 그는 제사장의 가문으로서 요시야 왕 13년에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었다. 그는 여호야김 왕때부터 시드기야 왕 11년, 유다가 멸망하는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서 사역한 선지자다. 자기 민족의 멸망을 선언해야 했으며, 그 멸망을 지켜봐야 했다는 측면에서 고통스러운 선지자였음을 알게 된다. 


예레미야 역시 하나님의 전적 부르심 가운데 선지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한다. 그도 모세처럼 자신이 없던 자로서 <아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물러서지 않고, 예레미야을 여러 나라의 선지라로 세웠으며,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며, 무슨 명령이든 말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하나님이 함께 해 주실 것이라는 약속을 주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입술에 주셨는데, 그가 전할 메시지의 내용들이란 뽑고, 파괴하며, 파멸하고 넘어뜨리는 것이다. 또한 건설하며 심게 하는 것이다. 


처음 두가지 환상을 보는데, 첫 환상은 살구나무 가지 환상으로 살구나무라는 히브리 말이 <지킨다>라는 의미를 가지는 히브리 말의 음과 유사함을 이용해 하나님은 말씀하신 것을 지키시는 분임을 확인시키고 있고, 둘째 환상은 북에서 기울어진 가마솥 환상인데, 이는 북방 민족들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멸망시킬 것은 예언해 주는 말씀이다. 그 이유는 유다가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긴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심판을 하시는 것인데, 이 메시지를 왕과 제사장들에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지켜주신다고 하고, 두려워하지 말고 전하라고 명령하신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하나님께서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은 꼭 지킨다.


살구나무 환상이라는 것은 히브리 말로 <지킨다>라는 단어의 음이 비슷한 것을 이용해 지금 보여지는 유다의 심판에 대한 내용이 반드시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것을 강조한 환상이다. 하나님은 심판을 하신다고 했다가도 마음을 돌이키시거나 유보하신 적이 종종 있다.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의 한 모습으로 보았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심판하신다는 말씀>을 하신다. 그런데 이 심판은 반드시 <지킨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킬 수 없는 상황에까지 왔다는 것을 말한다. 요시야 시절에 요시야의 개혁은 훌륭했음에도 불구하고 므낫세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을 돌이키지 않으셨다는 말씀이 있다. 같은 시대적 정황 속에서 나온 말씀이다. 


하나님이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다고 봐야 한다. 첫번째는 회개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서 주시는 말씀이다. 듣고 돌아오면 기회를 얻고 회복된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으면, 겸비하지 않으면 하나님은 말씀하신대로 심판하신다. 또 하나의 측면이 있다.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심판이다. 그 때는 기도해도 회개해도 소용없는 심판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예레미야 1장에서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예언은 후자에 해당되는 말씀이다. 그러나 가만히 성경을 읽다보면 처음부터 후자의 경우로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 같지 않다. 첫번째의 케이스로 시작하신다. 그러다가 반복적으로 뉘우치지 않고 악을 행할 때, 마지막 수단으로 후자의 심판을 말씀하시는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하나님은 자비로우시지만 또한 마침내 공의로 심판하신다고 볼 수 있다. 


 

2. 하나님의 선지자에게 보장하시는 구원이란, 적들이 너를 치나 이기지는 못하게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유다의 왕과 지도자, 제사장들과 백성들에게 심판의 말씀을 전하도록 한다. 그것은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왕과 지도자, 제사장과 백성들을 까는 말로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말이다. 당연히 두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예레미야에게 구원을 보장해 줄 테니 두려워 하지 말고 그 일을 감당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구원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대적자를 제압하고 멋진 기적으로 예레미야를 구출해주는 방식의 구원이 아니다. 적들에 의해서 치임을 당하고 고난을 당하고 조롱을 당해도, 지지 않게 해주겠다는 것만을 약속하신다. 어려움을 제거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이길 힘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결코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정도만을 보장해 주고 있는 것이다. 


구원이란, 무엇인가? 장애와 어려움이 기적적으로 사라지고 갑작스러운 승리를 가지는 것만이 구원은 아니다. 구원이란 고난을 이기는 힘, 조롱을 견디는 힘, 고통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힘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게 할 수 있도록 도우시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의 편에 선다는 것이고 구원하시겠다는 말의 의미다. 우리에게는 낯선 구원의 개념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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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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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1. 내용의 정리]

1. 예후가 아합의 아들들을 모두 죽이도록 하다.
  1) 예후가 사마리아에 있는 장로들과 아합의 여러 아들을 교육하는 자들에게 편지를 보내다.
  2) 너희 주의 아들 중 왕으로 세우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전쟁을 준비하라고 알림.
  3) 그들은 예후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예후에게 충성을 맹세한다.
  4) 예후는 왕자들의 목을 내일 이맘때까지 이스르엘로 가지고 오라고 하고, 장로와 왕자를 교육하는 자들은 왕자 70명의 머리를 광주리에 담아서 이스르엘로 보냄.
  5) 예후는 왕자들의 머리를 이스르엘 성 어귀에 두 무더기로 쌓아 놓아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신 대로 아합 집을 심판하시는 것으로 삼았다.
  6) 예후는 아합의 집에 속한 사람들을 다 죽이고, 그의 귀족들과 신뢰받는 자, 제사장들을 죽이되 그에게 속한 자를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죽였다.

2. 아하시야 왕의 형제들을 예후가 살해하다.
  1) 예후가 이스르엘에서 사마리아로 가다가 도중에 목자가 양털깎는 집에 이르렀다.
  2) 예후가 유다 왕 아하시야의 형제들을 만난다. 이들은 (이스라엘) 왕자들에게 문안하고 태후의 아들들에게 문안하러 내려가는 사람들이었다.
  3) 예후는 이들 모두를 잡아 죽이니, 42명이었다.

3. 예후에게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이 함께 하다.
  1)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은 예후를 만나기 위해서 찾아 옴
  2) 예후와 여호나답은 서로의 진심을 확인하고는 서로 함께 하기로 하고 예후를 따름.
  3) 예후는 여호나답과 함께 사마리아에게 가서 아합에게 속한 자를 죽여 진멸함으로서 여호와를 위한 자신의 열심을 여호나답에게 보여주었다.

4. 예후가 바알의 제사장들과 바알의 신전을 제거하다.
  1) 예후는 사마리아에 와서 바알을 위한 큰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고는 모든 바알 선지자와 모든 섬기는 자와 모든 제사장들을 한 사람도 빠지지 않게 불러모았다.
  2) 예후는 예복을 준비해 바알 선지자는 모두 예복을 입혀 쉽게 구분되게 하였다.
  3) 예후는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에게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제외하고는 밖으로 내보냈다.
  4) 예후는 제사가 진행되는 때에 따로 80명을 밖에 두어 바알 섬기는 자를 모두 죽이도록 명령하였다.
  5) 바알을 위한 제사가 마친 후 바알 섬기는 자들을 모두 죽이고, 바알 신당으로 가서 목상들을 가져다가 불사르고, 신당을 헐어서 변소를 만들었다. 그것이 오늘까지 이르렀다.

5. 예후에 대한 평가
  1) 예후가 이스라엘에서 바알을 멸하였으나, 벧엘과 단에 있는 금송아지 섬기는 죄에 대해서는 떠나지 않음.(여로보암의 죄)
  2) 여호와는 예후가 아합의 집을 심판한 것에 대해서 칭찬하며 왕 위를 4대를 지내도록 약속해 주셨다. 그러나 예후는 전심으로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 않았다.
  3)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영토를 잘나내셨다. 아람 왕 하사엘이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요단 동편 길르앗 온 땅 곧 갓 사람과 르우벤 사람과 므낫세 사람의 땅을 빼앗김.(영토의 축소)
  4) 예후는 28년을 다스리고 죽었다. 그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정리2. 내용을 내 말로 재 구성하여 정리]

본 장은 예후가 요람왕과 아하시야 왕을 죽이고, 더불어 이세벨 여왕까지 심판하고 나서 아합 집의 아들들을 포함한 그의 신하와 바알의 제사장들을 모두 심판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예후는 먼저 사마리아에 있는 지도자들에게 자신을 대항하여 왕의 아들 중 왕을 세워 전쟁을 준비하라고 대담하게 편지를 보낸다. 그러나 사마리아에 있는 신하들은 요람 왕과 아하시야 왕을 동시에 죽인 아합을 대항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오히려 예후의 지시에 따라 아합의 70명의 아들의 목을 예후에게 바친다. 예후는 간단하게 왕의 아들들을 제거하고, 사마리아에 있는 신하들의 포섭한다.


예후가 사마리아로 내려가는 도중에서 아하시야(남 유다)의 형제들 중에서 여전히 북이스라엘의 왕자들을 문안하러 오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모두 죽인다. 그렇게 이스라엘 왕가와 연관사람들을 심판한다. 한편 예후와 마음을 같이 할 수 있는 사람, 레갑의 아들 여호나답과는 힘을 모은다. 이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사마리아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바알을 섬기는 자들을 모두 제거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함으로서 예후는 아합의 일가들을 모두 제거함과 동시에 바알을 섬기던 사람들 그리고 바알의 신전의 우상을 제거했으며, 바알의 신전은 변소를 만들어 버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해서 했던 예언처럼, 아합의 집안을 완전히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예후를 통해서 실행하셨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하나님은 예후에게 4대에 걸쳐 왕 위가 이어지는 복을 주셨다. 그러나 예후는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는 못했고, 전심으로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는 않았다.


여로보암 때에 아람으로 인해 요단 동편과 같은 영토를 잃고 이스라엘의 영토는 많이 축소되었다. 예후는 28년 간의 통치를 마치고 그의 아들 여호아하스가 왕이 되었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예후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였으나, 선과 의의 도구는 되지 못했다.

예후는 분명하게 아합의 집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아합의 아들, 요람과 70명의 아들들을 심판했다. 아합의 아내 이세벨을 심판했고 아합과 연관되는 주변 인물들, 아하시야 왕과 아하시야의 형제들도 심판했다. 더불어 바알의 제사장을 모두 제거했으며, 바알의 우상과 성전도 훼손했다. 그는 철저하게 아합의 집안을 심판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행한 예후에게 그 보답으로 왕위를 4대에 이어갈 것을 약속해 주셨다.(30절) 예후는 아합의 집을 심판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그러나 예후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고 행하는 의의 도구는 아니었다. 그는 여전히 여로보암의 죄를 떠나지 못했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을 지켜 행하지는 못했다.(31절)

악을 심판하는 도구라고 해서 선한 도구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는 이 두 과정이 서로 구분되어 있다. 우리는 악을 심판하는 자는 의로운 자라고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악을 심판하면서도 여전히 악한 자가 있다. 악인이면서도 악을 제지하는 자인 것이다. 이스라엘과 유다를 멸망시킨, 앗수르와 바벨론이 그렇다. 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의 죄를 심판한 자들이지만, 이스라엘과 유다보다 더 큰 죄인들이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징계하시고 교정하시기 위해 앗수르와 바벨론이란 악한 도구를 사용하신 것이다.

악을 심판한다고 정의가 살아나는 것은 아니다. 악을 심판하는 사람들, 경찰이나 검사나 판사와 같은 사람들 혹은 공권력을 가지고 사회의 악을 제지하는 역할을 맡았다고 해서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일 수 있다. 어쩌면 악을 심판하는 자신의 역할을 정당할 수 있겠지만, 자기 자신은 그 보다 더 악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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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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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광복절입니다. 여름 사역이 한창 진행하는 상황이고, 아이들은 방학인 상황이라 공휴일이라는 생각도 크게 없는 날이네요. 오늘은 아무도 없는 교회 교역자실로 느즈막히 출근해서 베드로후서의 마지막 장을 정리해 봅니다. 베드로서의 서신은 바울의 서신과는 다른 맛이 있네요.^^ 우리는 너무 바울의 서신에만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야고보서도 베드로서도... 우리의 신앙에서 바울이 주지 못하는 부분들을 제공할 수 있는 성경입니다.

조용한 공간, 조용한 시간 또 하나님과 성경 말씀을 알아가는 기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오늘도 참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정리합니다. 이 때 중요한 것은 논리적 흐름과 연관성입니다.]

1. 베드로가 두 번째 편지를 써서라도 이들에게 알리고 생각나게 하기를 원했던 것

  1) 거룩한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과 구주께서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함이다.

    (1) 먼저, 말세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기의 정욕을 따라 행하며 조롱한다:

     : 주의 재림하신 다는 약속이 어디 성취가 되냐? 봐라. 늘 창조 때와 같은 상황 아니냐?

    (2) 아니다. 이들은 하늘과 땅 그리고 물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다는 것을 간과하려고 하는 것이다.

     : 그 당시(노아) 세상은 물로 말미암아 멸망을 당한 것 같이, 동일한 말씀으로 하늘과 땅은 불 사르기 위하여 지금 보존되어 있는 것이다.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심판 보류중)

  2) 하나님은 천년이 하루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분이시다.

    (1) 하나님의 심판이 더딜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에게는 빠르게 임할 것이다.(도둑처럼)

    (2) 다만 하나님은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에 보류하신다.

    (3) 그러나 하나님의 날은 도둑같이 오게 될 것이다. 이 땅의 모든 것이 풀어지고 드러나게 될 것이다.

 

    [그러니 너희들은 어떻게 살아야 하겠느냐?]

    a.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

 

2. 따라서 너희들은 이것을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니... 이렇게 살아라.

  1)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2)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급하게 심판하지 않고 더디하심을)

     : 베드로만 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도 그와 같은 내용을 너희들에게 썼다. 그의 편지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것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빠진 자들이 있다.

  3) 이제 알았은 즉, 무법한 자들의 미혹에 이끌려 너희가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라.

  4)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

 

[정리2. 본문의 내용을 중심으로 해서 큰 흐름으로 내 논리로 정리하는 것입니다. 내 논리로 정리한다는 것은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이지 내용을 주관적으로 조절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를 보내면서 그들에게 다시 생각나게 하고 싶었던 것이 있었다. 그것은 구약 선지자들의 예언과 신약의 사도들의 명한 것 속에서 일관되게 말씀하시는 것을 잊지 않게 하려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종말에 대해서 거짓된 가르침을 주고 있는 자들은 앞으로는 심판이 없다고 말하면서 성도들을 현혹했기 때문이다. 앞으로 심판이 없다고 생각하니 삶은 느슨해지고, 도덕은 약해지며 점점 방탕한 자리로 나아가 경건하지 못한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논리가 성도들에게 솔깃했던 것이다.

베드로는 말한다.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더 많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서 지금 심판을 보류하고 있는 것이지, 앞으로의 세상은 전에 물로 심판에 이른 것처럼 불로 심판을 받기 위해서 보존되고 있는 것임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더디어서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심판은 도둑처럼 임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의 삶에 있어서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을 잃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미혹하는 자들의 미혹에 넘어지지 않도록 흔들리지 말아야 하며, 매일 매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알아가는 자리에서 자라가야 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세상에 심판이 없는 것과 하나님의 심판이 더딘 것과는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세상에 심판이 없는 것처럼 느꼈다. 악인의 승승장구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이 더욱 인정받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롭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은 더욱 가난해졌다.

   오랜 관찰을 통해서 볼 때, 사람들은 판단한다. 심판은 없다. 심판이 있다면 이럴수가 없다. 그렇다면 의를 행하고 경건하게 살려고 하는 노력이라는 것은 부질없는 것이었다. 이런 가치관이 세상의 가치관이면서, 동시에 교회 안에서 몇 몇 성경구절을 그릇된 입장에서 사사로이 해석하여 마치 성경에도 주님의 심판이 없다거나 혹은 이미 주의 재림이 지나갔다는 식의 해석을 가함으로 믿는 자들을 미혹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아마 바울이 쓴 서신을 근거로 그런 논리를 펴지 않았는가 싶다.) 그것이 교회에 큰 문제가 되었고, 그것을 바로 잡기 위해 베드로는 편지를 쓰지 않았나 싶다.

  베드로는 말한다. 더딘 것이라고 심판이 없는 것이 아니라 더딘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더딘 것이 우리의 생각보다 더디면 그리고 장시간 그 사인조차 보이지 않으면 <없다>고 판단을 내리기 쉽다. 없는 것으로 해야 삶이 편해지고 자유롭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혹 심판이 있는가하여 긴장하였다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금세 방종으로 빠지는 것처럼 말이다.

  어쩌면 심판의 더딤은 참과 거짓을 가르는 하나님의 방편인지 모르겠다. 더딤을 없는 것으로 단정하고 마음껏 살고자 하는 자와 더디지만 심판이 있음을 믿고 단정히 행하는 자를 가르기 위한 하나님의 기준인 것이다.

 

2. 심판이 남아있다고 믿는 다면 우리는 거룩한 행실로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한다.

  무법한 삶으로 미혹되어서는 안된다.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삶이 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은혜와 자비로 시작되는 것이므로 법(행한대로 갚는다는 논리)과는 무관하다. 그러나 구원의 자리로 들어온 다음에 바로 의식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다.

  마지막 날에 모든 것이 풀어지고 밝혀지는 순간에 어떻게 살았는가에 대한 삶에 대한 평가를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며 살아가는 것이 경건이다. 그런데 그것을 의식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불경건이라고 한다.

  생명의 시작은 은혜와 자비(무법)에 의해서다. 그러나 일단 시작된 생명은 행한대로 판단하신다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법)임을 알고 경건한 태도를 잊어서는 안된다. 이런 문제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약한 것이 아닌가 싶다.

 

3. 바울 신학에만 익숙해진 우리가 야고보나 베드로 사도의 신학에도 관심을 가지고 살펴야 균형있는 성도의 모습을 제시하고, 교회의 문제를 인식할 수 있겠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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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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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도 수양회 중 쓴 글이라 좀 늦었습니다.

 

[정리1. 본문 정리]

1. 결국 아달월 십삼일(12월 13일)에 일어난 심판의 날

  1) 드디어 유다인들이 대적들에 의해 제거되기를 원했던 날 오히려 대적을 심판하게 된 날.

  2) 당시 본토의 지방관들은 모르드개를 두려워하여 유다인들에게 협조적으로 도왔다.

  3) 유다인들은 각 지방에서 대적들을 쳐서 도륙하고 죽였는데, 미워하는 자를 마음대로 행함.

  4) 수산 궁 안에서만 500명을 죽이고, 하만의 아들 10명을 또한 죽였다.

2. 왕은 왕후 에스더에게 혹시 또 다른 소청이 있는지를 물어 본다.

  1) 좋게 여긴다면 수산에 있는 유다인들이 내일 하루 더 조서대로 행할 수 있게 하시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를 나무에 매달게 하소서 요청함.

  2) 왕이 허락함으로 수산에 있는 자들은 14일에도 유다인들이 300명을 도륙함. 그러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음.

  3) 전국적으로는 75000명을 도륙한 것이었으나,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3. 부림절을 아달월 14,15일에 지키게 된 배경

  1) 대부분의 지방은 13일에 유다인들의 대적을 죽이고, 14일에 잔치를 베풀고 즐겼다.

  2) 그런데 수산에서는 13,14일에 유다인의 대적을 죽이고, 15일에 쉬며 잔치를 베풀었다.

  3) 모르드개는 이 모든 과정을 기록하게 하고, 왕의 각 지방에 글을 보내어 한 규례를 세워 해마다 아달월 14일과 15일을 지키게 하였다.

  4) 유다인들이 대적에게 벗어나 평안함을 얻어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고 애통이 변하여 길한 날이 되었기에 이 두 날을 지켜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고 가난한 자를 구제.

  5) 하만이 유다인들을 죽이는 날을 정하려고 제비를 뽑은 것, <부르>의 이름을 따서 부림이라고 하고 해마다 그 날을 정해서 지키고 폐하지 아니하기로 작정함.

  6) 에스더와 모르드개가 이와 관련하여 글을 쓰고 부림에 대한 둘째 편지를 굳게 지키게 하고 아하수에로의 나라 127 지방에 있는 유다 모든 사람에게 보내 부림일을 지키게 함.

  7) 에스더의 명령이 부림에 대한 일을 견고하게 하였고 그 일이 책에 기록되었다.

[정리2. 재정리]

결국 시간은 지나 아달월 13일이 되었다. 대적자들에 의해 죽임을 당할 뻔한 날이었는데, 하나님께서 오히려 역전케 하시어 대적자들을 심판할 수 있는 날이 된 것이다.

유대인들은 그 조서에 따라 신속하게 대적자들을 도륙하였다. 수산에서만 500명을 죽였고, 전국적으로 75,000명이 죽임을 당했다. 수산에서는 하만의 열 아들이 죽임을 당했다. 유다인들이 대적자들을 많이 죽이기는 했지만, 그의 재산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것은 정당한 복수의 개념이지 약탈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인지도 모르겠다. 암튼 유다인들은 대적을 심판하기는 했지만, 약탈하지는 않았다.

이 심판의 날이 있은 후 12월 14일은 축제의 날이 되었다. 유다인들은 잔치를 베풀고 즐기며 서로 예물을 주는 날로 정한 것이다. 그러나 15일까지 축제를 벌이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었다. 수산 궁에서는 12월 13일 하루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는지 대적자들을 위한 심판일을 14일 하루 더 연장할 수 있도록 에스더가 요청했고 왕이 이를 허락하여 추가로 300명의 사람이 죽었고, 하만의 열 아들의 시체는 나무에 달리게 했다. 그렇게 해서 수산은 13,14일의 심판을 마치고 15일에 쉬게 되는데, 전체적으로는 14,15일을 부림일로 정해 이틀간 축제로 지키게 된 것이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 역사를 잘 간수하고 전국적으로 매해 이 날을 지키게 하였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아달월 13일은 심판의 날이다.

하만의 계략도 잔인했지만, 유다인들도 똑같이 잔인하다고 여겨지는 본문이다. 심지어 에스도는 수산에서 하루만의 복수도 부족해서 하루 더 연장해 달라는 부탁을 했고, 하만의 열 아들을 죽인 것만으로도 부족해서 그 아들을 나무에 달도록 요청했다.

이와 같은 유다인들의 잔임함을 어떻게 봐야 할까 잠시 고민하게 되지만, 중간 중간 대적자들을 도륙하기는 했지만 그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을 보면, 이 일은 탐욕에 의한 살육이 아니라 정당한 심판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것 같다. 따라서 <복수>라는 입장에서 유다인들의 입장을 볼 것이 아니라, <심판>이라는 입장으로 봐야 할 것 같다. 최후의 심판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이 이와 같이 대적자들에게 일어나게 될 것이기에.

우리는 <복수>와 <심판>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다. <복수>는 금지되어야 하겠지만, <심판>은 정당하게 일어나야 한다. <복수>로 다스려지는 사회는 끔찍하지만, <심판>이 없는 사회 또한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법이 존재하고, 그 법을 집행할 대행자가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복수>는 금지하지만, <심판>은 인정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되겠다.

2. 역사의 기록과 보존은 역사의 의미를 오늘에도 적용하고 상기하기 위한 것이다.

에스더와 모르드개는 이 날의 역사에 대해서 기록했고, 그 기록을 보존하고 후대의 사람들도 부림일을 통해서 정기적으로 이 날을 상기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적어도 자기 민족의 유익과 안위를 위해서 자신을 희생할 수 있고, 생명을 던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모르드개가 죽어도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던 것처럼 민족적 자존심을 잃지 않으면서도 유다인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죽음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유다인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킨다.

나를 포함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족한 것이 민족의식이다. ...(내용 추가)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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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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