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splash-logoWilliam Daigneaul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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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14절. 치던 자들이 도망하여 읍내와 여러 마을에 말하니 사람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보러 와서

15절. 예수께 이르러 그 귀신 들렸던 자 곧 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은 것을 보고 두려워하더라

16절. 이에 귀신 들렸던 자가 당한 것돼지의 일을 본 자들이 그들에게 알리매

17절. 그들이 예수께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하더라

18절. 예수께서 배에 오르실 때에 귀신 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하였으나

19절.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그에게 이르시되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가족에게 알리라 하시니

20절. 그가 가서 예수께서 자기에게 어떻게 큰 일 행하셨는지를 데가볼리에 전파하니 

모든 사람이 놀랍게 여기더라. 


[성경내용 정리]

1. 귀신들이 돼지 떼에 들어가서 돼지 떼들이 바다에 몰사하게 되자 돼지를 치던 자들이 읍내와 여러 마을에 다니면서 자기 눈 앞에서 벌어진 일을 알렸고, 많은 사람들은 그 일을 보려고 왔다. 

2. 그들이 와서 본 것은 그 귀신 들렸던 자(군대 귀신 지폈던 자)가 옷을 입고 정신이 온전하여 앉아있는 모습이었다. 이 사람은 그 마을에서 귀신들려 통제할 수 없는 사람으로 유명한 사람이었기에 그들은 이 귀신들린 자가 얌전하게 앉아있었다는 것에 놀랐을 것이다. 

3. 그 현장에서 귀신들렸던 자가 당한 것과 돼지 떼에게 벌어졌던 일을 본 사람들이 찾아온 무리에게 그 사실을 알리자 그들의 반응은 '그 지방에서 떠나달라는 것'이었다. 

4.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대로 다시 배에 올라 떠나고자 하자, 귀신들렸던 사람이 함께 있기를 간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오히려 네게 어떤 큰 일이 일어났었는지, 너를 불쌍히 여긴 것을 네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하셨다. 그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자신에게 있었던 큰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하였고, 듣는 모든 사람들은 이 일을 놀랍게 여겼다. 


[질문하기]

1. 예수께서 귀신들린 자의 군대 귀신을 내쫓아 준 것을 보고 왜 마을 사람들은 예수를 귀신을 제압하는 권세자로 영접하지 않고 오히려 그 지방에서 떠나시기를 간구했을까?(17절)

  1) 너무나 엄청난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이들은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이 생겼을 수 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서 '신'적 능력이 있음을 깨닫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싶다. 

  2) 돼지에게 벌어진 일을 들었다. 수 천 마리의 돼지 떼가 예수님으로 인해 일순간 몰살되었다. 그 피해의 크기에 그들은 두려웠던 것일 수도 있겠다. 어떤 큰 힘을 가진 분이 내게 유익을 줄지, 아니면 해로운 대상이 될지 모르는 상황이라면 오히려 '없었던 상태'로 유지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떠나 달라'고 요청했을지 모르겠다. 


2. 왜 예수님은 함께 있겠다는 그 사람에게 따라오라고 하지 않고, 이 일을 네 가족들에게 알리라고 하셨을까?(이전에 보면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경고하시기도 하셨는데 그것과는 상반된 조처를 하심)

  1)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다. 귀신들려 고통 받았던 사람은 그 자신과 그의 가족들이었을 것이다. 가족들은 어쩔 수 없이 그 귀신들린 자를 집에 둘수 없었고, 마을에 머물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통제할 수 없는 문제를 일으키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가족이었기 때문에 마음 아팠을 것이다. 주님은 제일 먼저 그 귀신들린자와 귀신들린 자를 가족으로 둔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먼저 이 기쁜 소식(귀신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을 알리도록 하셨다. 

  2) 그러나 귀신으로부터 자유해진 사람이 가족들에게만 그 이야기를 한 것은 아니었다. 인근 사람들에게 그 소식은 전해졌고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모두 이 일을 놀랍게 여기게 되었다. 예수님이 행하신 일이 적극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다. 

- 예수의 제자가 되어 예수를 따르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겠지만,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기적을 경험한 사람이 그 놀라운 일을 가족과 주변의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간증이라고 볼 수 있는) 또한 매우 의미있는 일이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묵상하기]

예수님께서 행한 놀라운 일을 보면서 사람들의 반응은 둘로 나뉘는 것을 본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께서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두려어했다. 예수님이 가지신 그 권능과 힘은 나에게 도움이 될지 나에게 해가 될지 알 수 없었다. 내 자신에게 유익을 주는 힘이라면 그것은 적극적으로 내곁에 두어야 하지만, 내가 예측할 수 없는 힘이 내 주변에 있을때 그것은 오히려 두려움과 불안의 요소가 되고 만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힘은 없는 것이 났다고 볼수 있다. 그들은 또 많은 돼지 떼를 잃어버릴수도 있는 것이다. '이 지방에서 떠나소서' 그러나 그 힘이 나를 귀신에게서 해방시켜준 힘이고, 내 가족을 고통 속에서 자유하게 해준 힘이라는 것이 분명하다면(귀신들린 자와 그 가족들이 경험했듯이) 예수님께 함께 있기를 원하게 된다. 

귀신으로 인해 고통당했던 그 사람과 그 사람의 가족의 입장에서 예수님은 절대적으로 구원자다. 그러나 그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자에게는 예수님은 자신의 도움이 될지 해로움이 될지 알 수 없는 불안한 능력을 가진자에 불과하다. 나에게 예수님은 어떤 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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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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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35절. 그 날 저물 때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저편으로 건너가자 하시니

36절. 그들이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가매 다른 배들도 함께 하더니

37절. 큰 광풍이 일어나며 물결이 배에 부딪쳐 들어와 배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38절. 예수께서는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더니 

제자들이 깨우며 이르되 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 하니

39절.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지더라

40절.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시니 

41절. 그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되 

그가 누구이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하였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무리를 떠나 제자들과 저편으로 건너가고자 하셨다. 제자들은 무리를 떠나 예수를 배에 계신 그대로 모시고 갔다.(막 4:1) 다른 배들도 함께 따라왔다.

2. 그러는 중에 큰 광풍이 불었고 물결이 배에 부딪혀 배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배의 고물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시고 있었다. 이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우리가 죽게 되었다'고 예수님께서 어떤 행동을 취해주시길 바랐다. 

3. 예수님께서는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에게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 졌다. 그리고 제자들을 향하여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4. 제자들은 이런 상황을 보면서 다시 한번 예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도대체 이분은 어떤 분이시기에 '바람과 바다도 순종'하는가? 예수님의 신적 능력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질문하기]

1. 이 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예수님에 대해서 어떤 경외함을 가지게 되는가? 

  1) 큰 바람과 바다를 잔잔하게 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

  2) 바람과 바다도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순종하는것

 -> 예수님은 자연현상(사람이 임의로 할 수 없는)에 대해서까지 당신의 의지대로 하실 수 있는 분이다. 동시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면 자연 세계 조차도 그 말씀 앞에서 순종하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다. 이로 인해 제자들은 그 분을 경외하게 된다. 

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라고 하실 때 여기서의 '믿음'은 구체적으로 어떤 믿음일까? 

  1) 상황 상 해석하자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내가(예수) 너희와 함께 있는데 왜 풍랑과 바다 앞에서 목숨에 대한 두려움을 가지느냐? 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 이 해석을 확대하자면,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내가 너와 함께 하시겠다고 제자들에게 약속하신것처럼 이 땅의 교회와 함께 하실텐데 세상의 풍랑과 바다(고난, 환난 등)에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믿음을 가지라는 말씀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묵상하기]

어부들인 제자들조차 감당할 수 없는 큰 풍랑이 일어났고, 배에는 물이 넘치고 흔들렸을텐데 예수님은 어떻게 이런 환경 속에서 베개를 베고 주무실 수 있었을까? 예수님께서 너무 피곤하셨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이런 상황 속에서 제자들의 반응과 대처하는 과정을 보기 위해서 자는 척 누워계셨을지도 모르겠다. 큰 풍랑으로 불안과 공포의 상황이겠지만 내가 제자들과 함께 있으니, 그래도 날 믿고 의지하지 않을까 기대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아직 제자들의 믿음은 그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제자들은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더 알게 되었을 것이고, 믿음은 더 커지는 계기를 마련했을 것이다. 

종종 하나님은 우리의 곁에 계시면서도 마치 없으신 것처럼, 우리의 상황에 무관심하신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옆에 계신 것은 분명한데, 주무시고만 계시니.. 더 답답하다) 그러나 주님의 의도는 우리에게 '믿음'이 있는가를 기대하시고 참고 기다리고 계시는지 모른다.(자는척 하시지만, 실눈 뜨고 지켜 보시는 것처럼) 우리는 제자들처럼 보통 두려움으로 주님을 흔들어 깨우고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모르느야고 다급하게 소리친다. 그러나 한 번은 마치 아무일 없는것처럼 태평하게 기다려 볼 필요도 있지 않을까? 오히려 하나님께서 다급하게 일어나서 우리에게 닥치 위험을 먼저 막으시도록. 그러면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 이 놈의 '믿음'은 위험한데? 주님을 움직이게 할 것인가? 주님이 움직이시도록 믿음을 발휘할 것인가? 우리의 믿음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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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한장, 묵상 한모금] 사무엘상 13장. 사울,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치명적 한계 드러냄.


1.사울은 40세에 왕이 되었다. 왕된 2년 때의 일이다.

2. 사울은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3천명을 뽑아, 2천명은 자신이 데리고 믹마스와 벧엘 산에 있게 하고, 1천명은 아들 요나단과 함께 베냐민 기브아에 있게 하고 나머지는 장막으로 돌려보냈다.

3. 요나단이 게바에 있는 블레셋 사람의 수비대를 침으로 블레셋 사람들이 히브리 사람들과 전쟁을 준비하게 됨

4. 이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길갈에 모여 사울을 따랐다.

5. 그런데 전쟁을 하기 위해 온 블레셋의 그 수가 엄청났다. 병거가 3만이고, 마병이 6천이었다. 이를 본 이스라엘 사람들은 두려움 속에 굴과 수풀과 바위 틈에 숨었다. 어떤 사람은 요단을 건너 갓과 길르앗 땅으로 도주하기도 했다.


 * 사울은 왕으로서 상비군을 두어 운영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상비군을 통해 눈에 가시 같은 블레셋 수비대를 공격도 할 수 있었고, 그로인한 성공도 거두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블레셋과의 전면전으로 이어졌고, 블레셋의 병력을 전면적으로 이길 수 있는 능력이 이스라엘에게는 아직 없었다. 그래서 블레셋의 엄청난 병력을 보자 이스라엘의 군인들은 두려움 속에 숨거나 도망쳐 버리고 만다.

 * 이스라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강해졌다. 그러나 세상은 더 강한 자가 있기 마련이다. 그것에 비하면 이스라엘의 인간적인 강함이란 현실 속에서 매우 부끄러운 것에 불과한 것이다. 그 간에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병력의 우위라기 보다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공급하신이었다.



6. 사울은 기갈에 머물면서 사무엘을 기다렸다. 그가 제사를 드린 후에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무엘이 늦어지고 백성들은 사울에게서 흩어지자 조급해진 사울은 본인이 직접 제사장의 역할까지 해서 제사를 드려버린다.


 * 왕은 사무엘이 제 때에 오지 않자, 본인이 직접 제사를 드린다. 제사만 드리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겠지만, 그 마음 속에는 왕인 자신이 제사까지 드리지 못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왕이 되자 자신이 모두 할 수 있고, 해도 된다는 교만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7. 제사가 마칠 때 즈음 사무엘이 등장하고, 사무엘은 이 일로 인해 사울을 책망한다.

 1) 여호와께서 왕에게 내리신 명령을 지키지 아니하였다.

 2) 왕의 나라가 길지 못할 것이다.

 3) 왕이 하나님께서 왕에게 명령하신 것을 지키지 아니하셨으니, 여호와께서 그 마음에 맞는 사람을 구하여 그 백성의 지도자로 삼을 것이다.

8. 사무엘은 일어나 길갈로에서 떠나 베냐민 기브아로 갔다.


*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사울의 왕 위는 길지 못하게 된다. 왕이 하나님의 통치를 받지 않고 임의대로 행동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서의 왕은 절대군주가 아니다. 하나님의 통치를 받는 왕이어야 한다. 그런데 사울은 자신이 마치 절대군주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이다. 이 사건은 사울의 한계와 세상 왕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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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사울과 함께 전쟁하기 위해 남아 있는 자는 600명에 불과했다.

10.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은 백성들과 베냐민 게바에 있고, 블레셋 사람들은 믹마스에 진을 쳤다.

11. 블레셋은 세 대로 나누어 이스라엘을 공격해 오기 시작했다.

12 이 당시 이스라엘은 철재 무기가 없었다. 이스라엘 중에는 사울과 요나단만 철로 된 칼이나 창이 있었을 뿐이다. 이스라엘에는 철공도 없어서 괭이나 삽이나 쇠스랑이나 도끼나 쇠채찍이 무딜 때는 블레셋에 내려갔다 와야 할 정도였다.


 * 현재 블레셋과 대치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형편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고 있다. 사람 수에서도 그렇고, 군사들의 사기라는 측면에서도 그렇다. 또한 무기 또한 상대가 되지 않는다. 철기 시대와 청동기 시대의 전쟁과 같은 형편이다.


[정리] 사울은 자신을 백성들의 왕이라고만 생각했지, 하나님의 통치를 받고 있는 왕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사울은 왕이 된 이후, 아래에 있는 백성만 봤지 위에 계신 하나님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것이 모든 권력자들이 무너지는 이유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지만, 그 자리에서 이것을 인식하여 자신을 겸비하는 사람 또한 드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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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편]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있는 자에게 복이 있도다. 여호와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며,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으실 분이시기 때문이다. 두려움이 지금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면, 성경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만나보세요. 그리고 가까운 교회를 찾아가세요.


[정리1. 본문의 내용을 정리하기]


1. 기자의 고민: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습니다. 

   대적자의 말: 너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


2. 기자의 고백과 확신

  1)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이시니이다. 

  2)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르짖으니 

  3) 그의 성산에서 응답하시는도다.

  4)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5)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


3. 기자의 격정

  1)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2)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3)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정리2. 저자의 의도를 파악해 보기]


시편 기자는 자신을 대적하는 자가 많음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특히 그들의 집요한 말은, 너는 하나님께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말로서 하나님이 너를 버리셨으며, 너는 회복될 수 없다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시편 기자가 직면한 문제는 영적인 문제로까지 확대하여 생각하여야 함을 알 수 있다 .


그런 상황에서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자신의 방패와 영광이요 머리를 들게 하시는 분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고, 그와 같은 확신에 하나님은 그의 거룩한 성산에서 응답해 주신다.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자신을 버리지 않았고, 확고하게 붙잡고 계심을 알게 된다. 그러자 지금보다 더 많은 대적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하더라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것은 그에게 물리적인 힘이 생겼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더 큰 확신과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편 기자는 구원을 소망하지만,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시간적 모순을 통해서 구원의 확실성을 더욱 강조한다. (구원하소서.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따라서 시편 기자가 소망하는 기도는 불확실한 소망이 아니라, 너무나 확실하지만 다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확신이다.  



[정리3. 본문에서 주고 있는 메시지와 묵상들]


1. 우리의 근본적인 대적은 구원에 있어서 우리를 불안하게 한다.


우리는 죄를 짓는 것에서 뿐만 아니라 어떤 어려움과 고독에 직면하게 될 때 그곳에서 나올 수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그것은 궁극적으로는 근원의 결핍에서 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결핍이요 생명의 결핍이다. 곧 구원에 대한 결핍인 것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대적은 우리가 구원받지 못할 것을 말한다.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결핍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돈을 주지만, 그 돈으로는 충분한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한다. 사람을 주지만 그 사람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은 끊임없이 <더> 추구하게 된다. 더 없다면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결국은 돈이든, 사람이든 그것의 종이 되도록 하고 만다. 

사람은 구원에 배고픈 상태다. 세상과 마귀는 다른 이름이지만, 구원이 없다고 말함으로 우리로 불안하게 만든다. 그리고 우리를 조정할 목적으로 그 미끼를 던진다. 우리는 늘 구원에 있어서 불안하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실존이다. 


2. 의지할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 자와 없는 자의 삶은 천지차이다.


그와 같은 인생에게 믿고 구원을 의탁할 대상이 있다는 것과 없다는 것은 너무 큰 삶의 차이를 가져온다. 시편 기자는 그 의지할 대상은 여호와 하나님임을 알고 그를 의지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며, 나의 머리를 들수 있도록 하시는(부끄럽지 않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사람들의 인생은 어떤가?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든가? 아니면 스스로 그 두려움과 싸우든가 아니면 그 두려움을 제거해 주는 담보로 자신의 영혼을 마귀에게 파는 것인데, 그것은 더 큰 두려움으로 가는 미끼에 불과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지할 바위시다. 믿고 의지할 만하시다.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인생이란, 결국 두려움의 종으로 사는 인생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땅에서 온갖 충만을 가진다고 한들 그것이 다 두려움을 이겨내기 위한 것들이라면, 거기에 무슨 풍요가 있을 수 있겠는가? 두려움의 껍데기만 존재할 뿐인 것이다. 행복은 없는 것이다. 


3. 여호와 하나님의 구원은 미래적이지만, 현재적이다. 그래서 오늘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는 너무 확신이 클 때, 가장 확실한 어떤 대상을 걸고 맹세를 하곤 한다. 너무 큰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자는 너무 큰 확신이 있을 때, 그 확신이 내적인 것이 아니라 실제로 실제적인 것일 때 마치 이미 이루어진것처럼 과거형으로 말해 버린다.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이루어 질 것이라는 확신이 클 경우에 말이다. 


구원은 받은 것이나, 이루어 질 것이라는 로마서 5장의 말씀도 그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믿음 안에서 시제의 문법을 벗어나는 삶을 산다. 없는데 있는 것처럼 살때가 있고, 있는데도 없는 것처럼 살때도 있는 것이다. 지금 구원이 없는 것 같은데, 구원이 있는 자처럼 여유를 가지고 산다. 지금 이 땅의 모든 풍요를 다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모두 없어지는 것임을 알아 없는자처럼 검소하게 그리고 겸손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겸손한 척 하는 것이 아니다. 겸손해 지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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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여호수아. 2장] 라합의 거대한 두려움 앞에서 작은 두려움(자기의 목숨)을 극복합니다. 그것이 라합이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계기가 되지요. 두려움을 어떻게 다루는가가 우리의 운명도 역사도 바꾸게 됩니다. 부정한 권력은 두려움을 이용해 통치하려고 합니다. 그 작은 두려움을 극복할 때, 우리는 큰 구원을 얻게 됩니다. 

작은 두려움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를 작게 만드는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그 두려움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인간됨을 포기한 채 살아갈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인간이 되기 위해 우리는 작은 두려움을 극복해야 합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여호수아가 보낸 두 명의 정탐꾼이 위험에 처하다.

  1) 여호수아가 두 정탐꾼을 보내며 싯딤과 여리고를 엿보라.

  2) 정탐꾼들은 싯딤과 여리고를 정탐하고 나서 기생 라합의 집에 들어가 유숙하려 했다.

  3) 여리고 왕이 정탐꾼이 들어왔다는 정보를 듣고, 라합의 집에 군인들을 보내 잡도록 했다. 

  4) 이를 눈치 챈 라합은 정탐꾼을 옥상에 벌여놓은 삼대에 숨기고는, 여리고 군인들에게는 성밖으로 방금 나갔으니 따라가 보라고 거짓말을 했다.  


2. 라합이 두 정탐꾼을 구해 주면서 요청한 것/ 정탐꾼이 약속한 것

  1) 이 땅을 여호와께서 당신들에게 주신 것을 내가 안다. 너희들이 애굽에서 나올 때 홍해를 마르게 하고 나오며, 요단 저쪽에서 아모리 사람의 두 왕 시혼과 옥을 전멸한 일을 우리가 익히 듣고 마음이 녹고 정신을 잃었다. 여호와 하나님은 하늘과 땅에 하나님이시다. 

  2) 청하노니,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우리에게 속한 모든 사람을 살려달라고 요청함.

  3) 정탐꾼들은 우리의 목숨을 살려준 것으로 우리도 너와 너희 집을 살리주리라.

  4) 라합의 집에서 성 밖으로 줄을 달아 이들을 도망하게 해주고, 이들로 산에 들어가 사흘 동안 숨어있어 추격자들이 찾지 못하면 그 때 내려와 유대 진영으로 돌아가라고 조언함.

  5) 정탐꾼들은 라합의 말대로 산에 숨어 있다가 사흘 후에 진영으로 돌아감

  6) 정탐꾼들은 자신을 달아 내린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그 집에 부모와 형제 그리고 네 아버지의 가족들을 다 집에 모으라. 그 안에 있으면 살려니와 그렇지 않으면 죽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죽으면 그것은 우리가 책임지겠다고 약속함.

  7) 두 정탐꾼이 여호수아에게 고하자, 여호와께서 그 땅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확신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았기 때문이다.  



[정리2.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글을 다시 풀어서 새로 작성하기]


여호수아는 여리고를 침공하기전 정탐꾼을 보냈다. 이들은 싯딤과 여리고 정찰임무 중 기생 라합의 집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여리고 안에 정탐꾼이 들어왔다는 정보는 여리고의 왕에게 전달되고, 왕은 그 정보에 따라 기생 라합의 집을 급습한다. 그러나 눈치빠른 라합은 군인들이 들어오기 전에 낌새를 채고 정탐군을 옥상에 벌여놓은 삼대로 숨겨놓는다. 그리고 군인들을 속여 성을 빠져나가 헛걸음 하도록 유도한다. 라합의 재치를 보게 되는 장면이다. 


라합이 이렇게 정탐꾼을 숨겨둔 이유는 인도적인 차원에서만은 아니었다. 실리적인 계산이 있었다.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위협적이었다고 생각하였고, 그들이 결국 여리고를 점령할 때 생명을 보존하기 위한 방법으로 위험한 일을 감행하고 있는 것이었다. 두 정탐꾼은 여인의 요청대로, 그녀와 그녀의 가족, 또 그 아버지의 가족들 모두 이 집에 있으면 살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 집은 다른 집과 구별되게 창문으로 빨간 줄을 달아 내려놓아 다른 집과 구별하도록 했다. 


라합이 이와 같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께 이들을 애굽에서 가나안 저편까지 인도하셨을 때 들었던 소문때문이었다. 라합만이 이들을 두려워한 것이 아니라, 라합으로 대표되는 여리고 백성 모두가 그런 두려움이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호수아는 이와 같은 상황을 보면서 승리를 예감했다.


[정리3. 정리하면서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과 묵상들]


1. 여리고 백성인 기생 라합에게 기회가 왔다. 


라합은 정탐꾼 두 사람을 구원해 줌으로 훗날 여리고가 침략 받을 때 구원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라합이 어떻게 이와 같은 기회를 얻을 수 있었을까? 정탐꾼은 기생 라합이 구원해 줄 것을 알고 들어간 것이 아니었다. 우연히 들어간 집이 라합의 집이었고, 라합은 그들에게 호의를 베풀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기회가 있었다고 모두 라합처럼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정탐꾼을 신고해서 포상을 받았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라합은 기생이었지만, 여러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었는지 대략 파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여호와 하나님을 신으로 모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막을 수 없다는 판단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라합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의 운명을 그 하나님과 그 백성에게 의지하기로 한 것이다. 라합은 정탐꾼이 자신의 집으로 찾아 왔을 때, 그 구원의 때가 왔다고 판단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목숨을 걸기는 했지만, 그들을 의지하기로 정했던 것이다. 


구원을 스스로 이루어 낼 수는 없을지 모르지만, 구원의 바람을 통해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찾아 올 수는 있다. 그 때를 잘 분별하여 잡으면(물론 잡든 다는 것도 '잡히면 다행이고 아니면 말고' 식이 아니다. 목숨을 건 결단이 있어야 했다.) 구원의 은혜를 얻게 되는 것이다. 라합은 여리고의 운명을 판단했다. 그리고 여호와께로 옮겨왔다. 우리도 우리 시대를 판단해야 한다. 우리 사는 이 곳을 판단해야 한다. 여기서 희망을 꿈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아야 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난, 여전히 우리 나라에서도 희망을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2. 하나님은 두려움이라는 장수를 먼저 보내 상대를 제압한다. 


라합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했다. 왜냐하면 이 백성을 이끌어 낸 여호와 하나님은 애굽 왕의 군대를 뚫고, 홍해를 마른 땅으로 건너고 그 잔혹하다는 아모리 왕 시혼과 옥을 오히려 섬멸하다시피 하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행적은 연일 신문 1면을 장식하면서 여리고 사람들은 하루 하루 다가오는 이스라엘의 백성들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들의 여호와 하나님을 걱정했다. 


라합은 그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지를 보여주는 대상이며, 라합의 고백 속에서 여리고 전체에 팽배한 두려움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를 여호수아는 파악했다. 그래서 그는 이 전쟁이 이기는 전쟁이라는 판단을 할 수 있었다. 


하나님은 종종 상대적으로 하여금 두려움이라는 괴물을 보내 싸우지도 않은 채 이기게 끔 하실 때가 있다. 두려움이란 전의를 상실하게 만들어 버리는 힘이 있다. 여리고는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3. 오늘의 이야기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우리에게 두려움을 조장하여 자신의 부당한 권세를 유지하려는 자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세상의 권세를 가진자들은 막연한 두려움의 위력을 잘 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이 통제하기를 원하는 대상들에게 <두려움을 조장한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 경제적 불안정에 대한 두려움, 변화에 대한 두려움.... 두려움으로 우리를 위축시켜 새로운 선택을 주저하게 하고 결국은 자신의 종이 되도록 한다. 그래서 한 쪽에서는 새로움을 추구하는 자들이 <쫄지말자>고 서로 격려하곤 한다. 거대 언론과 싸우기 위해 개인의 네크워크인 SNS로 결집하고, 거대자본에 항거하여 시민들의 자발적인 후원금을 모은다. 보수 권력자들의 힘을 규합하려고 할 때, 시민들은 개미떼처럼 다수의 힘으로 항거하려고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함이다. 그래서 진리를 선택하고, 상식적으로 바른 판단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승리를 위해서는 두려움을 극복해야 한다.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라합처럼 목숨을 걸 수 있어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정신, 그러니 쫄지말자는 정신을 먼저 가져야 한다. 그리로 바로 보고 바로 읽어야 한다. 누가 될 것인가 하는 대세가 아니라 누가 되어야 하는가? 누가 되면 안되는가에 대한 판단을 해야 한다. 그로부터 파생되는 것은 그 다음에 생각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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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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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렘 10장] 자식이 용돈을 헛된 곳에 사용하기에 이를 고치기 위해 부모가 용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그 자녀는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서 어린 아이들의 돈을 빼앗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스스로 용돈을 마련합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계속해서 헛된 곳에 돈을 낭비합니다. 부모는 어떻게 이 자식을 다루어야 할까요? 이것이 오늘 본문에서 보는 하나님의 심정입니다. 




[정리1.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


1. 이방 사람들의 길과 풍습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 크신 하나님만 섬기라. 

  1) 여러 나라의 길을 배우지 말라. 그들은 하늘의 징조를 두려워하나 너희는 두려워 말라.

  2) 여러 나라의 풍습은 헛되다. 삼림에서 벤 나무로 만든 우상이고, 은금으로 장식하였으나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너희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주지 못한다.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라. 

  3) 우상에는 최고의 기술이 접목되는데, 금으로 꾸미고, 기술공과 은장색의 손으로 만들었고 청색 자색 옷을 입혔나니, 정교한 솜씨로 만든다.(9절)

  4) 그러나 너희는 크신 여호와만을 섬기라. 그는 참 하나님이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진노하시면 이방이 당할 자가 없고,  (세상)신들은 땅 위에서 하늘 아래에서 망한다. 


2. 만물을 조성하신 분은 여호와 하나님인데 사람들은 무식하고 어리석다.

  1) 여호와 하나님의 권능과 명철로 하늘과 땅을 지으셨고, 하늘의 물과 땅 끝에서의 구름, 비를 위한 번개를 치게 하시며, 그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

  2) 그런데 사람들은 어리석고 무식하여 조각한 신상을 따르니 수치를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할 때에 멸망할 것이다. 

  3) 그러나 야곱의 분깃은 이와 같지 않다. 여호와 하나님은 만물의 조성자요 이스라엘은 그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3. 백성들의 탄식(그나마 그 백성 중 하나님의 진노를 알고, 중보하는 백성들의 탄식인가?)

  1) 여호와는 이 땅에 사는 자들을 이번에는 내던질 것이라. 그들을 괴롭게 하여 깨닫게 하려 함이다. 

  2) 백성들은 말한다. 내 상처가 크고 중하다. 이는 참으로 고난이라.. 내가 참아야 하리라.

   (1) 내 장막이 무너지고, 모든 줄이 끊어졌으며 내 자녀가 떠나가고 장막을 세울자가 없다.

   (2) 목자들은 어리석어 여호와를 찾지 않으니, 형통하지 못하며 그 모든 양떼는 흩어졌다. 

   (3) 북방에서 큰 소리가 들리니, 유다 성읍들은 승냥이의 거처가 되었다.

  3) 여호와여, 나를 징계하옵시되 너그러이 하시고, 진노로 하지 마소서. 주께서 내가 없어지게 하실까 두려워하나이다. 

  4) 오히려 주를 알지 못하는 이방 사람들과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지 않는 족속들에게 주의 분노를 부으소서. 그들은 야곱을 씹어 삼켜 멸하고 그의 거처를 황폐하게 하였나이다. 



[정리2. 일목요연한 내용을 토대로 다시 풀어서 서술하기]


여호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 너희들은 이방 사람들의 길로 가지 말며, 이방 사람들의 풍습을 따르지 말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의 길과 풍습을 따르는 것은 너희들에게 있는 두려움 때문인 것 같은데, 그것은 헛된 짓이다. 그 우상이라는 것은 너희들이 살림에서 베어만든 나무가 아니냐? 은금으로 장식한 것이며 정교한 솜씨로 만든 것에 불과하지 않느냐? 그것들은 너희에게 복을 주거나, 화를 주지 못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말라. 


오히려 모든 만물을 그의 권능과 명철로 만드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겨라. 그는 하늘과 땅을 만드셨고, 하늘의 물도 그가 만드시는 것이다. 땅 끝의 구름을 통해서, 비를 위해 번개를 치게 하시고 이를 위해 하나님의 곳간에서 바람을 내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섭리를 여호와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줄을 알지 못하고, 어리석고 무식하게 조각한 신상을 만들어 섬기니 그들은 수치를 당하게 되어 큰 징벌을 당하게 될 것이다. 너희 야곱의 분깃은 이와 같지 않으니 너희는 여호와의 기업이기 때문이다. (헛된 것을 섬기지 않는다고 두려워 하지 말라.)


백성 중에 이스라엘의 형편을 탄식하는 사람이 있다. 유다는 심각한 병에 걸렸고, 그로 인해 큰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을 아는 백성이다. 자신들에게 아무 소망도 없이 북방 민족에게 멸망당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견한다. 그러면서도 이 백성은 여호와 하나님께 없어지도록까지는 진노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한다. 징계하시되 너그러이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오히려 분노를 이방 사람들에게 해 달라고 요청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에게서 잠시 눈을 다른대로 돌리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다. 


하나님은 여러 나라의 길로 행하고, 이방 나라의 풍습(종교적인 것을 포함한)을 따라 행하는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라는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2,5절) 비와 관련하여 그것을 주장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니은 곳간에서 바람을 꺼내 불게 하시고 이로 인해 구름과 번개가 치고 결국 비가 내리게 된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님의 섭리에서 진행된다. 그 때와 방식은 하나님의 주권이며 하나님은 그것을 통해 여러가지 말씀을 하신다. 내가 만물을 주관한다는 말씀도 하시고, 내가 너희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하신다는 것도 말씀하신다. 


그러나 유다는 소극적으로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두려웠다. 만에 하나 하나님이 우리를 잊으시거나, 때를 놓치면 농사를 망치게 되는데 필요한 때에 비를 허락하지 않으면 어찌하나 걱정했던 것 같고, 그로 인해 이방 사람들이 비를 내리게 하는 방식을 하나 더 도용한 것이고, 그것은 우리 편에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는 액션이기에 덜 불안했던 것 같다. 


유다의 잘못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책임지시고 공급하실 것이라는 것에 대한 믿음이 약화되고, 자기 나름대로 그 대안을 찾는 것까지는 좋으나 우상 숭배라는 하나님께서 하지 말라고 금하신 일을 동원하였던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두려우면 불안하면 하지 말아야 할 행동까지도 서슴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다.이런 메시지를 받아들일 때, 이런 대안적 행동이 과학적 발전을 통해 물을 확보하는 것(수로)과는 다르다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이 전혀 먹히지 않는 백성의 행동


하나니은 자연을 통해서도 말씀하시고 계시하신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을 잘 듣지 않고 엉뚱한 일을 할 때에는, 정신을 차리게 하기 위해 비를 막고 기근을 주심으로 이들로 정신을 차리게 하기도 하신다.따라서 구약시대에 기근이나 자연적 재앙 속에는 하나님의 메시지도 함께 들어있는 법이다. 


그런데 이방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행위(종교적)로 신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신의 기분을 풀어주게도 하며 흥분시키기도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신을 조작함으로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얻어 낼 수 있는 기발한 능력을 생각하고 개발했다. 우상을 만들고 우상에게 빌고 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이것이다. 하나님은 태도를 고치게 하려고, 비를 막으셨는데 이 백성은 삶의 태도는 고치지 않고, 다른 방법을 동원해서 비를 얻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방인들은 그렇게 했고, 그것이 어느 정도 효과가 있는 것처럼 보여졌기 때문이다. 신의 영역이었던 비를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내리는 그들의 모습이 선진 문명처럼 대단해 보였을 것이다. 


자식이 헛된 일에 돈을 낭비하는 것이 싫어서 용돈을 주지 않았더니, 이 자식 놈이 밖에 나가서 어린 아이들의 돈을 빼앗거나, 아니면 알바를 해서라도 자기의 필요를 채우고는 여전히 헛된 것에 그의 돈을 낭비한다. 삶의 태도는 고쳐지지 않고 오히려 잔소리 섞인 부모의 용돈을 무시한다. 부모의 권고와 책망이 전혀 먹히지 않는 상황이 된 것이다. 이와 같은 유다의 형편 때문에 하나님은 극단적인 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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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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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것 같은 열왕기상도 꾸준히 하다보니 금세 마치게 됩니다. 오늘은 열왕기하 1장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아합이 죽고 이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 입니다.

[정리1. 내용 정리]

1. 아합 왕이 죽고 나서 국력이 약화되었다.(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했다.)


2. 아하시야가 왕이 병들어 죽게 되었을 때
  1) 다락 난간에서 떨어져 병이 들었다.(병이 쉽게 낫지 않고 오래갔다.)
  2) 아하시야는 신하를 보내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이 병이 낫겠는가를 물어보게 하였다.
  3) 여호와의 사자가 엘리야에게 이 사실을 알게 해서 왕의 사자를 만나게 했다.
  4) 엘리야는 왕의 신하를 만나서 이스라엘에 땅에 하나님이 없어서, 에그론의 신에게 물으러 가느냐고 다그친다. 그러면서 아하시야는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을 것을 말한다.
  5) 왕의 신하는 이 사실을 왕에게 보고하고 아하시야는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것을 알게 됨


3.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부르기 위해 오십부장을 세 번 보냄
  1) 왕은 엘리야를 불러오도록 하기 위해서 오십부장과 그의 군사 50명을 엘리야에게 보냄
    : 엘리야가 불을 내려 그들을 모두 죽게 함
  2) 왕은 두 번째 오십부장을 다시 보내 엘리야를 불러오게 함
   : 두 번째 오십부장도 엘리야가 불을 내려 모두 죽게 함.
  3) 왕이 세 번째 오십부장을 다시 보내 엘리야를 부르게 함.
   (1) 세 번째 오십부장은 무릅을 꿇어 엎드려 엘리야에게 간구했다.
   (2) 나의 생명과 당신의 종인 이 오십 명의 생명을 당신은 귀히 보소서.
   (3) 그 때 엘리야는 하나님의 사자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 두려워말고 내려가라.
 4) 엘리야는 아하시야 왕에게로 내려가서 왕이 반드시 죽으리라는 것을 말하였고 왕은 죽었다.
   (1) 아하시야가 아들이 없었기에 여호람(아합의 아들)이 왕이 되었다.

 [반복되는 문구]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없어서 너희가 에그론의 신 바알세붑에게 물으러 가느냐?
그러므로 네가 올라간 침상에서 내려오지 못하고 반드시 죽으리라. (3, 6, 16절)

[정리2. 내용의 재정리]

아합은 아람과의 전투에서 죽었다. 이제 그의 아들 아하시야가 왕이 되었다. 그러나 아하시야는 아합만큼 강력하지 못했던 것 같다. 아합의 죽음은 국력의 약화를 가져왔고, 속국이었던 모압이 이스라엘을 배반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게다가 아하시야는 다락 난간에서 떨어지는 불의의 사고를 만나고, 쉽게 회복되지 못하였다. 자신의 운명을 걱정하던 아하시야는 에그론에 있는 신, 바알세붑에게 물어야겠다고 생각해 사신을 보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처사였다.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있는데, 자기 백성이 다른 신을 찾아가 자신의 운명을 묻는다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상황인 것이다.


여호와는 사자를 보내 엘리야에게 이 일을 알리고 엘리야는 왕의 사신을 만나, 아하시야의 잘못을 책망하고 결코 낫지 못하고 죽게 될 것을 대언한다. 이 소식은 왕에게 전해졌고 왕은 그 선지자가 엘리야라는 사실을 알고, 뒤늦게 엘리야를 불러야 겠다고 생각했다.(내 생각에는 아하시야가 정신을 차리고 엘리야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려고 했던 것은 아닌가 싶다.) 그러너 여기서 또 문제가 생겼다. 엘리야를 부르기 위해 보낸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사가 모두 불에 태워져 죽게 되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일이 두 차례나 벌어졌고, 이것은 매우 끔찍한 일이었다.(엘리야는 두려움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았나 싶다. 나중에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신 것을 보면... 그는 이세벨에 대한 트라우마가 여전히 있었을 것이다.) 세 번째 오십부장은 자신과 오십명의 생명을 귀히 여겨달라고 하는 요청을 했고, 그 요청은 엘리야의 마음을 움직였다.


엘리야는 아하시야에게 내려갔고 아하시야의 죽음을 예언하고 결국은 아하시야는 아들도 없이 죽게 된다. 그래서 그의 형제 여호람이 왕이 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아하시야의 죄는 이스라엘에 여호와 하나님이 계신데, 다른 신을 찾아간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질투는 괜한 질투가 아니다. 자기 백성, 자기와 언약을 맺은 백성 사이의 질투인 것이다. 자기의 아내가 다른 남자를 찾아갔다면 질투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질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혼한 관계가 아니거나, 건강하지 못한 결혼생활을 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하시야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건강하지 못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건강한 관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하시야가 다른 신을 찾으러 가자, 하나님은 질투하시어 엘리야를 보내 책망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쿨하지 않다. 그의 자녀들의 관계에 있어서 혹 그의 영적 아내의 관계에 있어서 쿨하지 않으시다. 관계없는 남이라면 모를까 어찌 자기이 자식에게 있어서, 아내에게 있어서 쿨하실 수 있는가? 그럴수 없는 분이다. 자식이 잘되기를 바라기에 작은 잘못에도 발끈하시는 것이며, 헛된 눈길에 하나님은 민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아량이 넓은 분이시지만, 쿨하시지는 않으시다. 그의 자녀, 그의 아내에게 있어서 만큼은.... 하나님은 책임있는 가장이시요 남편이기 때문이다.

 

2. 두려움(이세벨 트라우마)은 엄청난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성경에서 이해하기 어려운 몇 장면 중에 한 장면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하나님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가 무고한 오십부장과 오십 명의 군인들을 두번이나 하늘에서 불을 내려 죽게 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이들이 무고했다는 것과 엘리야가 잔인하게 이들을 죽게 했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두번이나 반복해서 행했다는 것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게다가 그 일을 행한 자가 당대 최고의 선지자였던 엘리야라니...

그러나 엘리야도 사람이다. 엘리야는 큰 권능(불 내리는 권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도 역시 사람이었고, 그에게는 큰 상처가 있었다. 그것은 이세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왕상 19장) 바알의 선지자들을 죽게 한 후 이세벨이 죽이려 하자 엘리야는 두려워 숨었고 오히려 죽기를 바랬다. 조금전 엘리야는 아하시야의 죽음을 예언했고, 그로 인해 아하시야가 엘리야를 불렀지만, 그 배후에는 이세벨이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엘리야는 또다시 이세벨 트라우마가 생각났고, 두려웠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두려움이 자신의 힘을 남용하는데까지 가지 않았나 싶다. 두번의 대형 사고 이후...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말씀하신다. 두려워하지 말고 내려가라고... 하나님의 그 말씀이 있은 후 엘리야는 세번째 찾아온 오십부장과 함께 아하시야에게 내려간다. 

강력한 힘을 불완전한 존재가 갖게 되는 것만큼 위험한 것은 없다. 악인이 강력한 힘을 가질 때, 세계의 평화가 위협받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엘리야는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는 큰 상처로 말미암은 두려움이 함께 공존했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 힘이 잘못 쓰여진 사건이 오늘 본문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은 두려움으로 흥분한 엘리야를 찾아가 '두려워하지 말라'고 타이른 것이 아닌가 싶다. 다행히 엘리야는 불완전 했지만, 통제가 되었다. 하나님의 통제를 따르고 하나님의 다스리심을 받았다. 불완전할 지라도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너무 큰 잘못으로까지는 가지 않을 수 있다.

힘을 가진 자여, 네 안에 있는 두려움을 다스려라. 주 안에서.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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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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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느헤미야 6장을 살펴봅니다. 어제 요즘 인기있는 드라마 '추적자'를 다시보기로 1-3편까지 봤습니다. 정치,경제,문화,검찰,정의,가정,약자...다양한 주제를 담고 있는 흥미진진한 드라마였습니다.

느헤미야 6장을 보면서 살해계획, 위협을 통한 두려움 조장, 거짓 소문, 거짓 예언 등과 같은 권모술수를 보게 됩니다. 다행히 느헤미야는 마음이 강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우리의 대적자들은 우리를 넘어뜨리기 위해 모든 방법을 동원한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들의 가장 두려운 무기는 두려움... 그래서 요즘 나꼼수의 쫄지마가 대표적인 이시대의 표어인지도 모르겠습니다.(그래서 제목도 선정적으로 달아봤습니다.^^)

[정리1. 본문의 내용을 문단나눠가며 정리해 보세요. 국어실력이 중요합니다.]

1. 산발랏과 도비야와 아라비아 사람 게셈과 그 나머지 원수들이 느헤미야를 회유하려 함

  1) 성벽의 허물어진 틈은 거의 공사를 마쳐가는 상황이고 아직 성전 문짝은 달지 못한 상황

  2) 사람을 보내어 느헤미야와 오노 평지 한 촌에서 만나자고 제안함(정치적 협상처럼)

  3) 그러나 실상은 느헤미야를 살해하기 위한 모략이었다.

  4) 4번이나 그런 제안을 했으나 느헤미야는 자신의 해야할 일이 중하므로 가지 않음.(3절)

2. 산발랏이 느헤미야를 거짓 소문을 통해 두렵게 하여 자신의 요구대로 하게 하려고 함.

  1) 봉하지 않은 편지를 보내, 이방인 중에 이런 소문이 있다고 하면서 위협함

    (1) 느헤미야와 유다가 반역을 위해 성을 건축한다. 느헤미야가 왕이 되려고 한다.

    (2) 선지자를 세워서 유다에 왕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게 하려고 한다.

[대응] 느헤미야가 사람을 보내 산발랏의 모함이 모두 거짓임을 말하고, 하나님께 자신의 손을 힘있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느헤미야는 산발랏이 자신을 두렵게 만들어서 공사를 중지하도록 만들려는 계획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3. 거짓 선지자가 동원되어 느헤미야를 위축되게 하려고 함.

  1) 드문불출한 스마야를 방문했던 느헤미야는 대적들이 너를 죽이러 올테니 성전에 가서 외소에 들어가 문을 닫고 숨어 있으라고 말한다.

[대응] 느헤미야는 자신과 같은 사람이 어찌 성전 외소 안에 숨겠는가라고 하고는 숨지 않았다. 느헤미야는 이미 스마야의 말이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 아닌 것을 깨달았다.(12절) 느헤미야는 도비야와 산발랏 그리고 여선지 노아댜와 그 남은 선지자들의 악행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했다.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여

느헤미야를 범죄하게 하고

악한 말을 지어 느헤미야를 비방하려고 한 것이다.

4. 성벽의 역사가 끝나자 대적들이 오히려 두려워했다.

  1) 52일만에 성벽 역사가 끝나자 대적들이 듣고 다 두려워하여 크게 낙담했다.

  2) 이 일 가운데 하나님이 하셨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이다.

5. 또 다른 반전의 기운(악의 영향력이 쉽게 떨어지지 않음)

  1) 유다의 귀족들이 여러번 도비야와 교류가 있었으며, 그와 동맹한 자도 많았다.

  2) 느헤미야 앞에서 도비야의 선행을 말하는 유다인들이 많았다.

  3) 느헤미야가 한 말을 도비야에게 편지로 알려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정리2. 본문을 정리한 것을 자기 나름의 것으로 재 정리하세요. 그래야 내것이 됩니다. 그 다음에는 다양한 결과물들이 나올 수 있지요]

느헤미야 6장에서는 개인대 개인의 싸움과 같은 분위기다. 사람들이 이름이 언급된다. 산발랏과 도비야와 게셈 그리고 느헤미야.

산발랏은 당시 사마리아의 총독이었을 것으로 본다. 도비야는 암몬사람(느 2:10)이라고 언급되지만, 그의 이름의 뜻이 ‘여호와는 선하시다’라는 의미라는 것을 염두하고, 그가 유대 사람들과 많은 친분관계를 맺고 있는 것을 보면 그는 반은 유대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떤 사람은 그를 암몬의 총독으로 보기도 하고, 느헤미야 도착 전의 예루살렘 총독이라고 보기도 한다.(느 5:15) 그러나 사마리아 총독이었던 산발랏과의 친밀한 관계를 본다면 그는 산발랏의 부관이었다고 보는 것 같다. (이 내용은 새 성경사전에서 도비야와 산발랏에 대한 내용을 사전에 한 번 읽어본 것을 기초로 한 내용이다)

암튼, 이들은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과정 속에서 마지막 방법으로 느헤미야를 직접적으로 제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그들의 술수에 쉽게 넘어가지 않았다. 산발랏은 거짓 소문을 퍼트리면서 느헤미야가 자신을 만나지 않을 수 없도록 분위기를 만들어 갔으나 느헤미야는 사실이 아님을 전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이 되지 않도록 기도한다.

대적자들의 계략은 매우 집요했다. 한 사람의 예언을 통해서 느헤미야가 성전 외소에 숨을 것을 예언하게 한다. 그것을 근거로 느헤미야를 비방하기 위한 계략이었던 것이다.(아마 도비야를 통한 계략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이들의 계략을 미리 눈치채고는 그의 말을 듣지 않는다. 오직 두려운 마음을 하나님께 호소하고 대적자들의 악행을 기억해 달라는 신원만을 올릴 뿐이다.

대적자들의 집요한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성벽은 52일만에 재건되었다. 오히려 이제는 대적자들의 두려워하고 낙심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것을 그들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느헤미야의 성벽 재건 스토리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도비야라는 새로운 인물이 부각되며 유대인들이 느헤미야의 대적자인 도비야와 얼마나 깊숙이 관계가 맺어진 존재인지를 성경은 보여줌으로 예루살렘에 뭔가가 더 필요한 조치가 있어야 함을 알려준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대적자가 느헤미야를 무력화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

  1) 대적과 손을 잡고 좀 더 쉽고 안전한 길을 가도록 제안하는 것이다. 성벽이 거의 다 완공되고 이제 문짝만 달면 된다. 지도자의 입장에서 끝이 보이는 상황이고 이 때만큼 이 사역을 빨리 완성하고 싶고, 온전히 이루기를 원하는 심정이 있을 때는 없을 것이다. 바로 그 때, 대적자들이 호의적으로 나오고 같이 협조를 하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이들의 협조가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방해를 받고 싶지 않은 상황일 것이다. 오랜 시간을 시달리며 공사를 진행했고, 이제 조금만 있으면 완성인데 만일 대적자들이 악한 마음을 먹고 총력을 다하면 공사의 일이 그르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일의 완성을 위해서라도 타협하고 싶은 마음이 들기 마련이다. 대적자들은 그것을 노린 것이다. 그래서 한 마을에서 만자가고 제안한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살해라는 엄청난 속임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었다.

  2) 느헤미야를 두렵게 하려는 방법이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 거짓 소문을 만들과 확대해서 왕의 오해를 살 수 있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또한 성전 외소에 숨으라고 말한다. 살해의 위협이 있으니.. 또한 하나님의 계시를 빙자하여 말하니... 그러나 느헤미야는 두려움이 동인이 되어 행동하지 않았다.

  쉬운 길을 제시하든지(약간의 야합만 하면) 아니면 두려움을 조장하여 스스로 낙담하게 만들거나 충동적으로 그릇된 행동을 하게 만들어 리더십에 큰 타격을 주게 만드는 방식을 대적자들은 즐겨 사용한다.

 

2. 느헤미야는 모든 술수를 알았기에 피해갈 수 있었는가? 아니다.

느헤미야는 모든 상황마다 두려웠다. 그래서 그는 늘 기도한다. 9절에는 자기 손에 힘이 떨어지지 않고 힘있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이 될 때마다 느헤미야는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 그들의 소행을 보응해 달라고 기도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느헤미야가 극복하려고 했던 것은 <두려움>이었다. 두려움은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만들고, 가야할 길을 가지 못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은 사단이 주는 것이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하나님을 좇아가는 것(의인의 자리에 서는 것)이 성도들의 마땅한 바다.

오늘도 두려움을 이기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악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을 믿으시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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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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