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말 4:1-6 신약으로 이어지는 구약의 끝


찬송가: 장


여는 이야기

심판의 때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다.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은 지푸라기처럼 완전히 타 없어질 것이다. 반면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은 의로움이 해처럼 비추게 될 것이다. 의인들이 악인들을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심판의 때가 이르기전 엘리야를 보내셔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이키는 일을 먼저 하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절별 해설

4:1 <<뜨거운 용광로와 같은 날이 오고 있다>> 철을 녹일만큼 뜨거운 불 심판이 다가오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것이라도 불타 없어지지 않은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교만한 자와 악한 자는 용광로 앞에 지푸라기 같은 존재다. 그 날에 교만한 자와 악한 자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될 것이다. 


4:2 <<그러나 나를 섬기는 너희에게는>> 이 땅에 교만하고 악한 사람들과 다르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전혀 다른 날이 된다. 의로움이 해처럼 비춤으로서 자신들이 의를 지켰던 것들이 드러나게 될 것이고, 치료하는 광선을 통해 상처입은 것이 회복될 것이다. 그래서 눌려있던 삶은 회복되어 외양간에서 풀려난 송아지처럼 자유롭게 뛰놀 것이다.


4:3 <<그 날에 내가 이 일을 이루겠다>> 심판의 날에 교만한 자, 악한 자를 심판하시고 의로운 자기 백성을 완전히 회복하실 것에 대한 하나님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된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의지를 가지고 이 일을 이루시겠다고 말씀하심으로 이 말씀을 듣는 자 중 경외함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에게는 믿음의 인내를, 교만한 태도를 가진 자들에게는 강력한 경고를 하고 있는 것이다.  


4:4 <<모세에게 명령한 율법과 규례를 기억하여라>> 이제 다시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과 규례로 통치되는 나라가 회복될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따라서 모세의 율법을 잊고 자기 마음대로 살던 백성들은 돌이키고, 하나님의 법을 마음에 다시 간직함으로 하나님의 심판의 때를 준비해야 함을 말씀하신다. 


4:6 <<아버지가 자녀를 사랑하게 하고, 자녀가 아버지를 사랑하게 할 것이다>> 심판의 날이 임하기 전에 하나님은 엘리야를 보내 주시겠다고 말씀 하신다. 엘리야의 역할은 아버지의 마음을 자녀에게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아버지에게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이다. 즉, 아버지와 자녀 모두의 마음을 서로 다시 돌아오게 하여 관계를 회복시키시려는 하나님의 중재 노력이 다시 한번 있게 됨을 말라기는 알려주시면서 구약을 마친다. 


기도

하나님, 이 땅의 백성들이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가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을 놓치지 않은 은혜를 누리게 하소서.

 

맺는 이야기

말라기는 구약의 마지막 책이다. 마지막 책의 마지막 4장의 마지막 부분(4-6절)에서 모세와 엘리야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특이하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마지막 십자가를 고난의 길을 가시기 전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화되셨던 그 장소에서 나타난 구약의 인물이 바로 모세와 엘리야이기 때문이다.(마 17:1-3) 예수님께서 자신이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말씀하셨고 사랑으로서 모세의 율법을 온전히 세우셨다. 또한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심으로 통해 하나님의 마음을 그의 자녀들에게, 또한 자녀들의 마음을 다시 하나님에게 돌이키게 한 사역을 감당하셨다. 예수님의 초림은 말라기에서 예언하고 있는 종말의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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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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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저자들은 구약성경을 오용한 것인가?]


1. 창 31:22 "삼일 만에 야곱의 도망한 것이 라반에게 들린지라"라는 말씀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연결지어 해석하는 것은 뭔가 문제가 있어 보인다. 이런 해석에 문제의식을 느끼는 것은 옳은 것이다. 


2. 그런데 신약 저자들의 구약 성경 인용방식에 비슷한 경향들이 성경에 나타나고 있다.(구약 성경의 문맥과 저자의 의도를 존종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 누가? 신약 저자들이...)


  예) 눅 20:27-40 부활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두개인의 질문.

    예수님의 답변: 출 3:6을 인용하여 부활에 대한 성경적인 근거를 제시하시는데, 어떻게 부활이 증거되는지 알수 없음

    지금 우리가 해석할 때는 이해할 수 없는 인용인듯 한데, 예수님 시대의 청중들은 납득이 되었던 것 같다.(서기관 중 어떤 사람은 선생이여 말씀이 옳습니다 라고 반응하고 있다. 눅 20:39-40)


  즉, 예수님의 구약 성경 해석 방법이 그 당시의 관습과 일치하였다는 증거가 된다. 




3. 신약 성경 저자들의 구약인용 방식의 문제점을 다루는 접근 3가지(복음주의 진영에서 많이 받아들여지는 것)

  1)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그렇게 해석했다면, 사실 구약 성경 안에서도 그와 같은 맥락의 내용이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관점이다 신약 성경의 저자가 그렇게 무책임하게 임의적으로 해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2)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성경을 원래의 문맥대로 인용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을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3)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성경을 원래의 의미대로 인용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신약의 저자는 사도이기 때문에 그와 같은 변형된 의미로 인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그와 같이 할 수는 없다. 


  * 저자는 이 세가지 접근 방법이 그렇게 설득력이 있어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4. 저자가 먼저 결론부터 말하자면


  1)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구약 성경의 본래의 문맥과 본 저자의 의도와 일치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며 구약 성경을 해석한 것은 아니다. 

  2)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성경의 저자들은 텍스트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구약 성경을 단순히 자신의 상황에 맞게 '적용'하는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3) 신약 저자들이 보여준 해석학적 태도는 오늘날의 교회가 수용하고 따라야 하는 것이다. 신약 저자들이 보여준 해석학적 태도라는 것은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의 초림에 비추어서 구약성경의 의미를 설명하는 것이다. (눅 20장에 드러난 성경해석 방법은 신약 성경의 저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그 당시의 다른 해석가들도 그렇게 해석하였다.)


  * 신약성경의 저자들이 살았던 해석학적 세계를 배경으로 하지 않고, 신약성경에만 접근했기 때문에 복음주의자들은 위의 3가지 견해밖에 나올 수 없었던 것이다. 

  * 신약 성경의 저자들이 구약을 자유롭게 인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시대의 구약 성경 해석에 대한 배경적 지식을 선재해야 할 필요가 있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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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시편 37:27-29] 하나님은 성도를 버리지 않고 영원히 보호하시지만(28절), 그 의미는 하나님은 <정의>를 사랑하신다는 그분의 성품(28절) 안에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앞에 이야기 한 것만을 붙잡는 것을 <복음>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모래 위에 집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율법 위에 복음을 세우며, 구약의 토대 위에 신약을 세우는 것이 마땅한듯 합니다. 



[본문] 


27절.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니


28절.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심이로다.

그들은 영원히 보호를 받으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지리로다. 


29절. 의인이 땅을 차지함이여 거기서 영원히 살리로다. 


[정리]


1. 하나님의 요청과 그 결과


   악에서 떠나라

   선을 행하라

    -> 그리하면 영원히 살리라.


2. 하나님의 성품과 그 결과


   여호와께서 정의를 사랑하시고

   여호와께서는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아니하신다. 


  그의 성도는 영원히 보호를 받는다.(그의 성도와 정의를 분리할 수는 없다.)

  그러나 악인의 자손은 끊어진다. 


[묵상]


하나님의 그의 백성들에게 악을 떠나고 선을 행하라고 말씀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은 <정의>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의 성도를 버리지 않으신다. 영원히 보호를 하신다. 그것은 사랑하신다는 것으로 하나님께서 <정의>를 사랑하듯 그의 성도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정의와 그의 성도를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은 본문의 문맥상 옳지 않고 오히려 그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정의에 합함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그는 하나님의 보호하심 속에서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성도를 <은혜를 입은 자>라고만 생각하지, <거룩을 추구해야 하는 자>로서의 개념에는 미흡하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존재, 그래서 끊임없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에만 치중하지 왜 그렇게 하셨는가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성경은 그 다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쏟아 놓는데 비해 우리는 그 길에 들어서는 것에만 치중되어 있는 것이다. 


구약을 읽고 신약을 읽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최근에 해본다. 물론 혼자 읽는 것이 쉽지는 않겠지만, 율법이 있고 그 토대위에 복음이 복음될 수 있으며, 구약의 토대 위에 신약의 참된 메시지가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전에도 한 번 쓴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우리 편이 아니라, 정의의 편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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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에 이르러서야 학자들은 어느 텍스트가 '최상'인지에 관해 판단을 내리기 시작했다. 즉, 편집인이 생각하기에 어느 텍스트가 원문에 가장 가까운지를 판단하기 시작한 것이다.

1831년 독일 학자인 칼 라흐만은 일부 사본은 수용하고 일분 사본은 부정하는 가운데 최초로 신약성경의 '비평 텍스트'를 출판했다. 몇 년 뒤에는 코덱스 시나이티쿠스를 발견한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도 똑같은 작업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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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신약성경 텍스트가 최상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계속되고 있지만, 이런 상황에서 1901년에 프레데릭 케이언이 한 말을 유념하는 것이 좋을듯 하다. "서로 경쟁을 벌이는 텍스트 유형 간의 차이점은 교리의 문제가 아니다. 교리의 문제는 어느 텍스트가 정확한지 여부에 달려있지 않다. 기독교의 진리는 스테파누스의 텍스트에 표현된 만큼이나 웨스트코트와 호트의 텍스트에도 표현되어 있다."

그로부터 100년이 흐른 뒤에 알리스터 맥그라스도 동일한 주장을 했다. "우리는 현재 과거에 킹 제임스 성경 번역가들이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한 그리스어 신약성경 텍스트를 갖고 있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킹 제임스 버전이 대체로 믿을만하다는 점을 의문시하는 것은 아니다. ... 이런 차이점은 기독교 신앙의 가르침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고, 복음서 기사나 초기 기독교의 중요한 역사적인 측면에도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성경 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저, 포이에마, p141.

참고로, 현존하는 신약성경의 사본은 5,500개가 넘는다.

신약 말고 구약 성경에 대해서는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 정확성을 인정하고 있는데,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본문은 마조레트(각 단어와 글자가 정확하다는 것을 확인하던 유대인 학자)들이 보존했고, 교황 다마수스는 기존의 옛 라틴어 텍스트들이 서로 많이 다르다는 이유로 제롬에게 정확한 라틴어 성경 번역판을 만들도록 요청했다. 이런 노력 덕분에 히브리어 구약과 라틴어 성경은 정확성을 보존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책, p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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