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관들도 성경을 정확하게 필사하기 위해서 다음과 같은 규율을 개발했다고 하네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이와 같은 엄격성 때문에 그래도 성경이 잘 전수될 수 있었으니 이 분들의 공로도 인정해야 할듯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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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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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인역>

1. 가장 오래되고 가장 중요한 구약 번역판은 70인역이라고 불리는 그리스어 판이다.

2. 이는 이집트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에서 주전 3세기에 시작된 작업이었다.

3. 이 작업을 지시한 왕은 프톨레미 필라델푸스인데, 그는 예루살렘에서 72명의 유대인 학자를 알렉산드리아로 데려와서 구약을 그리스어로 번역하게 했다.

  1) 프톨레미 왕은 세상에 알려져있는 모든 책을 자기 도서실에 비치하기를 원했는데 그 중에 히브리 성경도 포함되어 있었다.

  2) 또한 구약은 히브리어로 되어 있는데 유대민족은 아시리아, 바빌로니아, 그리스, 페르시아, 로마 등의 영향을 받고 주전 3세기 초에 이르면 히브리어에 대한 지식이 실종되기 시작했다.

  3) 그래서 유대인들이 성경을 그리스어와 아람어로 번역했다.

  4) 그 번역본 중에서 가장 권위있는 번역이 70인역이다.

  5) 설에 의하면, 모세오경의 번역이 72일만에 완료되었다고 전해진다.

4. 70인역이 중요한 이유는

  1) 널리 사용되고 있기 때문이고

  2) 과거 2천년 동안 구약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경우에 권위있는 그리스어 출처로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3) 사해 사본이 발굴되기 전만 해도 가장 초기의 구약 사본은 히브리어가 아닌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의 사본들이었다.

  4) 70인역은 초기 기독교회의 성경이었고, 신약의 저자들이 구약을 인용할 때는 보통 70인역을 인용하곤 했다.

  5) 심지어 오늘까지 그리스 정교회에서는 2300년이나 된 70인역을 구약의 텍스트로 사용하고 있을 정도다.

 

<타르굼 targum> 구약의 히브리어를 아람어로 번역한 역본

1. 이 번역은 문자적인 번역이 아니라 성경의 해석에 가까운 것이다.

2. 그래서 동일한 단락이라도 타르굼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다.

3. 타르굼은 정책적으로 해석의 성격을 갖고 작업한 것이라고 본다.

4. 그래서 해석이나 의역의 테두리를 훨씬 벗어나는 경우가 많다.

 

<구약 히브리어를 시리아어로 번역한 역본>

1. 옛 시리아어는 이스라엘 동부에 사는 사람들이 쓰던 아람어의 방언이었다.

2. 선교사들은 그 언어를 저 멀리 인도까지 가져갔다.

3. 그리스도의 시대로부터 약 200년이 흐른 뒤에 구약이 시리아어로 번역되었다.

4. 이 번역은 다른 번역과 달리, 그리스어로 된 70인역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히브리어에서 직접 번역한 것이라는 특징을 가졌다.

 

<구약 히브리어를 콥트어로 번역한 역본>

1. 이집트 사람들이 사용하던 콥트어로 옮긴 초기 번역판도 있다.

 

- 성경번역의 역사, 래리 스톤, 포이에마, p36-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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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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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부터는 베드로전서를 지나 베드로후서로 들어왔습니다. 베드로후서는 처음부터 본론으로 들어가는 책입니다. 보통은 앞 부분에 가벼운 인사가 들어가는데 베드로후서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긴장이 되고, 좀 어려울 것 같은 느낌이지만, 겁먹지 말고 찬찬히 들여다 보면 크 어려움이 없는 것 같습니다.

 

[정리1. 본문 내용의 정리]

1. 편지 서론에서 말하는 베드로의 본론적인 이야기(부르심과 택하심)

  1) 하나님은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이미)

  2) 하나님은 우리에게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셨다. 그래서 그 약속을 모르고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다.

  3)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1)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함.

    (2) 이런 것이 없으면,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9)

  4)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실족하지 않으리라.

     : 이렇게 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2. 베드로는 재차 삼차 이 사실을 다시 기억나게 하려 한다.(우리가 이 장막(육체)에 살고 있는 동안은)

  1) 너희가 이미 알고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해 주는 것이 옳은 줄로 생각한다.(12,13)

  2) 베드로가 떠난 이후에라도 계속 해서 생각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반복해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14,15)_ 곧 장막을 벗을 때가 되었다고 고백함(죽음에 대한 임박함?)

  3) 나는 우리 주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은 내가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봤기 때문이다.

    (1) 베드로는 예수님이 변화산에서 변형되신 것을 본 사람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던 사람이다.

    (2) 또 더 확신한 예언(성경)이 있는데, 그것은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수 없다. 왜냐하면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정리2. 본문 내용을 다시 정리]

베드로후서는 처음 시작부터가 바로 본론에 들어가는 분위기다. 중요하고 핵심적인 전제를 먼저 깔아놓고 시작한다.

1. 우리는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받은 사람이다. 또한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받은 사람이다. 그것은 우리가 신의 성품에 참여하게 되는 자가 되게 하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우애, 사랑과 같은 덕목들을 차곡차곡 순차적으로 쌓아가야 한다.

이와 같은 삶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더욱 굳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일을 행한즉 실족함이 없어 오히려 넉넉하게 천국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2. 베드로는 이와 같은 보배로운 소식을 반복적으로 강조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왜냐하면 그래야 자신이 죽더라도(장막을 벗음) 이 사실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영광과 위엄을 친히 본자다. 그러나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근거는 <확실한 예언, 곧 성경>이다. 성경은 어두운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너희는 그 뜻이 밝혀질 때까지 신중히 해석해야 한다. 사람의 뜻으로 사사로이 풀거나 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성경은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우리가 성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이미 성화를 위한 충분한 것을 가지고 있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이미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이 주어졌다고 말한다. 또한 우리는 보배롭고 큰 약속을 받았다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히 근사한 약속을 받았다는 정도가 아니라, 확실히 보장된 약속을 받았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하나님은 우리가 단순히 생명을 얻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뿐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성품의 형상(참여)에 까지 약속을 받은 자이다. 그리고 이것을 이루기 위한 모든 자원,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이미 우리는 가지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신약시대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가 된다는 것은 놀라운 것을 보장받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성품의 형상을 본 받는 자가 되다는 것이니 말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너무 과대포장해서도 안되겠지만, 과소포장해서도 안될 것이다. 인간을 또한 구속된 인간을 무능한 죄인으로만 규정해서도 안된다. 종종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매우 낮은 영적 자존감만 가지고 살아간다. 교만의 반대는 낮은 자존감이 아니다. 교만의 반대는 겸손이다. 겸손은 낮은 자존감과는 그 궤를 달리한다. 그런데 조종 우리는 겸손과 낮은 자존감을 구분하지 못한 채 가르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그래서 성실한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매우 낮은 자존감을 가지고 살아가는 분들을 종종 본다.

2. 베드로는 자신의 본 경험(변화산의 영광)도 근거했지만,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 성경을 강조했다.

베드로는 사도로서 예수를 친히 본자다. 그리고 예수님의 변화산 영광을 직접 경험한 사람이다. 베드로도 그 사실을 언급하고 그것을 근거로 삼는다. 그런데 베드로는 더 확실한 예언으로서의 성경을 강조한다. 그도 그럴것이 자신의 경험은 자신의 죽음(장막을 벗는 것)과 더불어 약화되어 사라지지만, 더 확실한 예언인 성경은 성도들과 함께 남아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서 그 확실성에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을 강조하면서도, 성경을 풀때는 사사로이 함부로 풀거나 성급하게 풀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마치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기다려야 하듯이 명백한 뜻이 나올 때까지 성급히 성경을 해석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강조한다.(19절)

성경을 읽고 은혜와 감동을 받는 것은 좋은데, 좀 더 그 뜻이 명확하게 떠오를때까지 좀 기다려주고, 묵상하고 생각해보는 느긋함이 필요하다. 성급하게 은혜만을 얻고 가려고하는 방식의 성경묵상은 인스턴트 묵상처럼 여겨진다. 반복되는 인스턴트 음식의 섭취가 금새 질리게 하고 건강을 손상시키듯, 쉽게 알짜를 끄집어 먹으로는 경건생활이 빈약한 신앙인을 만들어 내는 것은 아닌지 우려스럽다.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까지 고대하며 기다릴 수 있는 묵상이 실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우고 강건하게 한다. 경건에도 시간이 필요하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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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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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헤미야 8장에 와서 지도자에서 백성으로 중심 축이 움직이는 것을 느낍니다. 지도자 느헤미야를 통해서 진행되던 예루살렘의 회복은 마지막 백성들의 움직임으로 마무리가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 되는 본문입니다.

 

[정리 1. 내용 정리]

1.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제히 수문 앞 광장에 모여 모세의 율법을 가져오기를 청했다.

  1) 일곱째 달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에스라를 불러 모세의 율법 가져오기를 청했다.

  2) 일곱째 달 초하루에 에스라는 율법책을 가지고 알아들을 만한 모든 사람 앞에 서다.

  3) 에스라는 나무로 만든 강단에 섰고, 백성 앞에서 말씀을 펴니 모든 백성이 일어났다.

  4) 에스라가 하나님 여호와를 찬양하고 모든 백성은 아멘으로 화답하고 굽혀 경배했다.

  5) 에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낭독하고, 레위인들은 그 말씀을 알아 들을 수 있도록 백성들에게 해석해 주었다.

  6) 그 말씀을 깨달은 백성들은 모두 한결같이 울었다.

  7) 느헤미야는 오늘은 하나님의 성일이니 울지 말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라고 요청한다.

  8) 레위 사람들도 백성을 정숙하게 하고는 오늘은 성일이니 조용하고 근심하지 말라고 함.

2. 이튿날 또 다시 백성의 지도자들은 율법의 말씀을 밝히 알고자 하여 학사 에스라에게 모임.

  1) 에스라는 말씀 속에서 초막절 절기에 대한 가르침을 주고, 그 말씀대로 행할 것을 요청.

  2) 백성들은 초막절 규례에 따라 무성한 가지를 가져다가 초막을 짓고 이레를 지냄

   : 지붕 위, 뜰 안, 하나님의 전 뜰, 수문 광장, 에브라임 문 광장에 초막을 지음.(16절)

  3) 이와 같은 열심히 초막절을 지킨 것은 여호수아 때부터 그 때까지 없었던 일이다.(17절)

  4) 에스라는 첫날부터 끝 날까지 날마다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무리가 이레동안 절기를 지키고 여덟째 날에 규례를 따라 성회를 열었다.(18절)

 

[정리2. 내용을 내 방식으로 재 정리]

느헤미야가 성벽을 재건하고, 성을 잘 지킬 수 있도록 후속 작업을 모두 했다. 지도자를 세우고, 명부를 다시 한 번 확인하여 훗날의 혼돈을 막도록 조치를 취해 놨다. 여기까지는 지도자의 몫이고 느헤미야는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다 했다.

그러나 아직 예루살렘의 완전한 회복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늘 느헤미야 8장은 그 완성을 향해 움직인다. 백성들이 스스로 수문 앞 광장에 모여서 에스라를 청하고 모세의 율법을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다. 에스라는 그들의 요청에 사람들을 모으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친다. 레위인들은 그것이 잘 깨달아지도록 열심히 중간에서 힘쓴다. 백성들은 말씀을 깨닫고 (자신과 이스라엘의 문제가 무엇이었는지도 깨달은 것 같다.) 온 백성이 운다. 그러나 느헤미야는 성일임을 강조하고 먹고 마시고 축제의 날이 되도록 요청한다. 슬픔을 기쁨으로 바꾼 것이다.

다음날 백성의 지도자들은 다시 에스라를 찾아 온다. 율법의 말씀을 더 알고 싶어서이다. 에스라는 내친김에 초막절을 가르치고, 지금이 초막절을 지켜야 할 때임을 말한다. 백성들은 그 말씀대로 마음을 다해 초막절 절기를 지킨다. 그 열심과 진지함이 얼마나 컸는지, 여호수아 이래로 이처럼 초막절을 지킨 일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예루살렘 성벽 공사의 최종적인 마무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회복이다.

성벽이 재건되고, 그것을 유지 발전할 수 있는 시스템이 구축되고 나서 마지막으로 완성으로 가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말씀이라는 것을 오늘 본문은 보여준다. 모든 것이 중요하다. 성벽도 계보도 제사도 .... 모두 중요한 요소들이다. 그러나 마지막 방점은 말씀으로 찍어야 한다. 모든 회복을 마무리하는 과정 속에서 반드시 최종 점검을 해야 할 내용이 있다면 그 교회 공동체 안에 말씀으로 채워짐이 있는가다.

내용없는 껍데기에 속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껍데기에 도취되어 알맹이를 간과할 때가 얼마나 많은가? 교회 성장을 교회의 건물과 사람 수와 재정으로 평가하는 것에는 익숙하지만, 그 교회와 그 성도의 영혼을 채워줄 말씀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성벽이 있고, 성도도 있고, 재정도 있고 좋은 프로그램과 영상 장비도 갖추었는데, 말씀은 비어있는 교회. 껍데기에 성도도 목사도 모두 속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이 시대의 교회는 어떤 교회인가? 역사도 있고, 치유도 있고, 기적도 있고, 선교와 지역사회 봉사도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 있는가? 목사는 성도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가? 그래서 오늘날의 교회는 먹을 것 없는 잔치집처럼, 요란하기만 하고 성도는 모두 굶주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다. 나는 말씀의 종이 되어야 한다. 말씀을 먹이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말씀을 먹고 내가 말씀을 익혀야 한다.

잊으면 안된다. 잊으면 안된다.  절대로 잊으면 안된다.

 

2. 말씀을 채우는 일은 느헤미야로부터 시작된 일이 아니라, 백성들의 요청에 의해서 시작된 일이다.

말씀을 잘 가르치고 먹이는 책임은 목회자에게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말씀을 달라고, 우리는 말씀에 갈증이 있다고 요청하고 구해야 하는 사람은 백성들인것처럼 우리 성도여야 한다.

참된 성도는 교회의 시설과 크기와 프로그램에 만족해서는 안된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배고픔이 있어야 한다. 목사가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렸을 때에라도 우리에게 말씀을 달라고 요청해야 하는 것이 성도다. 말씀에 대한 갈망과 요청이 성도인 우리들에게서 부터 나올 때, 이것은 제대로 된 회복이다.

성도들은 말씀을 달라고 삐약거리고, 목사는 그 간절한 요청에 부응하고자 하나님의 말씀을 수시로 그들의 입에 넣어주는 교회. 그래서 성도도 말씀을 강건해지고 목사도 끊임없이 말씀과 기도에만 전무할 수 있는 교회.

전도든, 선교든, 지역 봉사든, 제자훈련이든.... 모든 것은 그 후에 생각해 볼 일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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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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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4장을 읽고 정리하면서 디모데후서 전체를 정리해도 좋을듯 하다. 전체적인 강조점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디모데후서는 목회자인 디모데를 위해서 쓴 책이다. 그러나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목회서신은 아니다. 목회 사역으로 낙심한 디모데라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 쓴 목회서신이다. 따라서 그런 상황에 있는 목회자들 혹은 말씀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분들에게 더 직접적인 내용인 것이다.  

바울은 디모데후서에서 몇 가지 핵심 메시지만 집중해서 다룬다.

1.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일에 집중해야 함을 강조한다.

  : 다른 헛된 이야기와 변론에 주력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정치든, 경제든, 이념이든, 철학이든, 교육이든, 사회선교든, 문학과 예술이든... 그런 분야들이 강단의 전면에 나서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특수 목회(교회)라는 것도 잘 생각해 볼필요가 있다. 요즘처럼 교회가 많은 곳에서 어떤 특성(차별화)을 가지지 못하는 교회는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색깔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 특성을 강조하는 교회들이 많아진다. 그와 같은 것은 '선교회'(파라처치)라고 봐야 더 맞을지 모르겠다. 그런 특성을 가졌다고 해서 설교를 안하는 것도, 성경공부를 안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결국 그 차별화된 특성이 교회의 본질을 희석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될 것이다. 역으로 '성경 중심'인 교회라는 차별화를 가지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지금의 교회가 얼마나 성경과 멀리 떨어지게 했는가를 보여주는 반증이기도 하다. 

   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하나님이 우리 인간과 세상을 향해 주시는 말씀을 깨닫고 그 뜻가운데 순종하도록 하기 위한 곳이다.  기능을 강조하다가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라 본다.

2. 목회자는 하나님이 맡기신 일(사명)에 흔들리지 말고 충성할 것을 강조한다.

  : 자신의 부족을 발견했다손 치더라도 나약한 모습으로 자기 연민에 빠져있거나 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행위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뜻가운데 부르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충성이고, 성실함이다.

    부족함을 고수한 채 일만 열심히 하라는 것이 아니다. 부족함을 발견할 때, 그 부족함 때문에 그만두어야 한다는 근거로 삼지 말고, 그 부족함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고 노력하고 수고하라는 의미다. 그래서 자신의 성장을 온 교회로 보이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런 변화에 교회는 소망이 있고, 기대가 있는 것이다.

   부족해 보이는 목회자를 향해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 믿고) 기다려주고, 인내할 때 목회자는 또한 자신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부단히 연마하며 노력하여 하나님의 부르심이 부끄러움이 되지 않도록 자신의 성장을 교회 앞에 드러내도록 노력해야 교회는 성숙해 지는 것이다.

3. 목회자는 복음(목회)을 위해서 고난을 감당해야 한다.

  : 많은 인간적인 갈등과 실망 더 나아가 배신이 존재하지만 그 모든 어려움을 참고 사랑으로 목회의 사명을 감당하려고 했던 사람들에게는 하늘의 상급이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주는 상급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상급이라는 것을 잊지는 말자.

   그러나 사람이 모두 어려움만 주는 것은 아니다. 바울에게 디모데와 같은 사람도 있었고, 누가처럼 어려움중에 함게 해준 사람도 있다.(9,11절) 또 바울이 볼 때 믿고 사역의 현장으로 보낼만한 두기고와 같은 사람도 있었다.(12절) 많은 사람들은 바울은 다 버리는 것같았고(16절) 알렉산더와 같은 사람은 아무리 주님의 사랑으로 품으려고 해도 품을 수 없었던 사람도 있었다.(14,15절)

   그러나 이 모든 어려운 일에서 바울은 건져주시고, 끝까지 힘이 되어주셨던 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다.(17,18절) 목회자의 마지막 보루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위로와 힘인 것이다.

떠날 사람은 떠나고, 보내야 할 사람은 보내야 한다. 그러나 여전히 불러야 할 사람은 부르고 곁에 두어야 할 사람은 두어야 한다.

목회 현장에서 어려움 중에도 모든 악에서 건져주시고 힘을 주시는 분은 역시 하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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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모데후서 3장은 말세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고통의 때라고 표현한다.(1절) 갑자기 껑충뛰어 종말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현실에 대한 이야기라고 본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서 지금 우리는 어떤 역사적 이해와 현실 감각을 가져야 할지를 알려준다.

말세의 특징을 한 마다로 표현하면, 불경건이라고 볼 수 있다.(2-5절) 좀 더 구체적으로 바울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한다'(5절)는 것이다. 종말에 가서는 불경건함이 더욱 거세질 것이고, 그것은 주류가 되고 상식이 될 것이다. 오히려 경건하게 사는 자들은 낯선 사람이 될 것이고, 비주류가 될 것이다. 외계인 취급을 받게 될 것이다.(직장 생활을 하는 청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그들과 능력과 실력의 문제로 고민하는 친구는 보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의 문화와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말한다. 직접적인 갈등도 있지만, 그들(의 불경건)과 어울릴수 없는 것으로 인한 고립감인 경우가 많다. 이것은 하나의 고통이며 박해이다.)

또 하나의 말세적 특징이 있다면 그것은 '미혹'이다. 거짓 가치관, 거짓 진리로의 미혹이다. 이들은 열심히 배우고 가르치나 마침내 진리에는 이를 수 없는 자들이다.(7절)

이 두가지 현상들이 말세의 현상이라면, 적어도 말세는 모세 때부터 존재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 시대에도 사람들을 미혹하던 얀네와 얌브레가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말세라는 것은 먼 미래의 종말의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지금 말세의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으며, 최종적인 종말에는 그와 같은 현상의 농도가 더우 진해질 것이며, 강해질 것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어쩌면 아담의 타락이후 아담이 죽음을 경험하고, 죽음의 현상들을 인류가 직면하면서 말세는 존재해왔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게도 된다.

암튼, 바울이 디모데에게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이와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5절)이다.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중요한 지침 중에 하나는 이와 같은 불경건의 가치관과 현상 속에서 날마다 돌아서는 것이다. 세상은 그들에 의해 흘러가고 그와 같은 가치관이 주류가 되어 다른 말을 하거나 가치관을 피력할 때, 왕따가 되는 시대를 살아가면서도... 나는 그와 같은 가치관에 동조할 수 없다고, 그와 같은 불경건에 동참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매일 매일의 결단과 순종이 일상의 제자도인 것이다.

세상은 모든 것을 잠식할 것같이 덤벼들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역사적 의식을 우리는 가져야 한다. 모세 시대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영향력 그 이상은 나아갈 수 없었다. 결국 그들의 어리석음은 드러났고 그들의 공격도 힘을 잃었다.(8,9절)

하나님은 불경건과 거짓 진리의 미혹에 대해서는 한계를 정해 놓으셨다. 어느 정도는 활동하여 영향력을 키울수는 있지만, 항상 그 한계가 정해져 있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도 정해져있다.(항상 배우나 진리의 지식에는 이를 수 없다. 그들의 어리석음이 드러난다.)

말세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 있어서 또하나의 중요한 지침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그 배운 말씀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그 가운데 거하는 삶이다.왜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감동(따라서 진리다.)으로 된 것으로 읽고 순종하는 자들로 하여금 유익하여 온전함에 이르게 하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14-17절) 바울은 디모데를 향해서 이 일에 착념할 것을 계속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정리하면, 불경건과 미혹의 시대에 살아남는 길은

1. 불경건함과 미혹의 가치관으로부터 매일 매일 돌아서는 것이다.

   : 집에 돌아오면 손을 깨끗이 씻는 것만으로도 많은 병을 예방할 수 있듯이... 더러운 것이 뭍어 들어오지 않도록 (정신)위생을 철저히 해야 한다.

2.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건강한(온전한) 성도가 되는 것이다.

   : 건강한 사람이 되기 위해 영양을 골고루 섭취하고, 몸에 좋은 음식으로 식생활을 하며, 적절한 운동으로 자신을 훈련하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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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unmill

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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