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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7절. 열두 제자를 부르사 둘씩 둘씩 보내시며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고

8절. 명하시되 여행을 위하여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며

9절. 신만 신고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하시고

10절. 또 이르시되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11절. 어느 곳에서든지 너희를 영접하지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 하시니

12절.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13절.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둘씩 파송하셨다. 그들에게 더러운 귀신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셨다. 그리고 여행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1) 여행을 위해서 지팡이 외에는 양식이나 배낭이나 전대의 돈이나 아무 것도 가지지 말라

  2) 여행을 위한 신만 신고 심지어 두 벌 옷도 입지 말라

  3) 어디서든지 누구의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곳을 떠나기까지 거기 유하라

  4) 혹 너희를 영접하는 곳이 없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면 거기서 나갈 때에 발 아래 먼지를 떨어버려 그들에게 증거를 삼으라(내가 와서 전하고자 했으나 너희가 환대하지 않았고 거절했다. 그래서 나는 여길 떠난다)

2. 제자들은 예수님이 주신 지침을 따랐으며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했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발라 고쳐주었다. 


[질문하기]

1.본문의 이야기를 통해서   저자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예수님을 통해서 권세를 위임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이 하시던 사역을 하였고 제자들을 통해서도 그 일이 일어났다.

   (1) 이제 회개하고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예수님의 메시지는 제자들에게도 위임되었고,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제자들의 위임받은 권세를 통해서 세상 가운데 확장될 수 있다. 

   (2) 실제로 제자들은 그 권세를 위임받아 갔고, 주님과 동일한 역사가 일어났다.(귀신이 쫓겨가고, 병자들이 나았다) 


  2)많은 귀신이 쫓겨가고 병든자가 낫게 되는 구체적인 묘사보다는, 제자들이 어떤 마인드로 전도인의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원칙을 가르쳐주는 것이라 하겠다. 

   (1) 전도의 일을 위해서 이곳 저곳을 다닐 때 필수적이고 필요한 도구(지팡이, 신발 등)만 있으면 나아가고

   (2) 전도의 일을 하면서 환대해 주는 가정이 있다면 그 가정이 제공해주는 것을 먹고 머물며 전도하라. 만약 아무도 환대하지않고 듣지 않는다면 그 지역에서 발 아래 먼지를 털고 나오라. 


[묵상하기]

예수님께서 이 땅에 가져오시고, 이 땅에서 선포하신 하나님의 나라는 이제 제자들의 입을 통해서도 전파되며, 제자들의 위임받은 권세를 통해서도 이 땅에서 실현된다. 예수라는 독특한 분의 능력만이 아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예수님의 첫 백성이 된 사람들을 통해서 동일한 성취가 일어난다. 예수님이 직접 가지 않았지만 그 곳까지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났고 하나님의 나라는 임하였다. 예수님께 위임받은 열 두 제자는 예수님께 위임받은 이 땅의 교회로 봐도 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이 직접 가시는 대신 교회가 이 땅의 구석 구석 찾아가고 그들에게 ‘회개할 것’을 요청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그것을 명확하게 한 것이다. 

이 사명을 위임받은 자가 어떤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  생계에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삶이다. 최소한의 것만으로 전도여행을 다니며 매일 만나와 메추라기로 공급받았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처럼 살아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어떤 곳에서는 환대를, 어떤 곳에서는 배척을 받겠지만 전도자는 환대받는 곳에 안주해서도 안되고 배척받았다고 낙심해서도 안된다. 물흐르듯 흘러가되, 거친 돌이 있다면 돌아가면 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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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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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6) 그가 멀리서 예수를 보고 달려와 절하며 

(7) 큰 소리로 부르짖어 이르되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하건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히지 마옵소서 하니 

(8) 이는 예수께서 이미 그에게 이르시기를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셨음이라 

(9) 이에 물으시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이르되 /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하고 

(10) 자기를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기를 간구하더니 

(11) 마침 거기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서 먹고 있는지라 

(12) 이에 간구하여 이르되 우리를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하소서 하니 

(13) 허락하신대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가매 

거의 이천 마리 되는 떼가 바다를 향하여 비탈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거늘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께서 귀신들린 자에게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말씀하시자 그 귀신들린자가 예수님께 나아와서 큰 소리로 말했다.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 나와 당신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바라건데 나를 괴롭게 하지 마소서’

2. 예수님은 그 귀신을 향해서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고 그 귀신들린 자는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다’고 말했고 더불어 ‘그 지방에서 내보내지 마시길 간구’했다. 

3. 마침 거기에 돼지의 큰 떼가 산 곁에 있는 것을 보고 ‘간구하되’ 자신들을 돼지에게로 보내어 들어가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에 예수님은 그들의 요구를 허락하셨고 더러운 귀신들이 나와서 돼지에게로 들어갔다. 그 이후 이천마리 되는 돼지 떼가 바다를 향해서 내리달아 바다에서 몰사하게 되었다. 


[질문하기]

1. 귀신을 쫓아내시는 다른 이야기와 좀 다른데, 어떤 점이 두드러지는가? 

  1) 이전에 귀신을 쫓아내는 사건의 경우, 예수님께서 귀신의 세력을 제압하시고, 귀신으로 인해 고통 당했던 사람에게 자유를 허럭하셨다는 것이 강조되었다. 이 사건도 큰 맥락에서는 귀신을 제압하신 사건이란 측면에서는 유사하다.

  2) 그러나 예수님은 귀신에게 이름을 물으셨고, 그 귀신은 자신의 이름(군대=우리가 많다)과 규모를 알렸다. 그러면서 예수님을 향해서는 ‘간구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7절. 원하건대 / 10절. 간구하더니 / 12절. 간구하여 이르되) 심지어 예수님은 귀신의 간구에 대해서도 일부 들어주시는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돼지에게 들여보내 달라고 요청한 것에 대해서 허락하셨다.)

2. 이런 독특한 점을 통해서 강조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1)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인격성이 귀신들에게도 드러나고 있다. 단순히 힘으로 제압하는 모습으로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심지어 귀신들의 이름을 묻고 그들의 간구와 원함에 대해서 일부 반영해주는 인격성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강한 힘과 더불어 여유있는 인격성을 보여주신다. 

  2) 예수님의 이런 인격성이 귀신을 옹호하시거나 심판을 거두시는 것으로 매듭지어지지 않았다. 결국은 귀신들은 돼지 떼에 들어가 바다로 빠져 몰사한다. 돼지들의 죽음이 있었지만, 그 귀신들렸던 사람이 귀신으로부터 해방되어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분명하다. 


[묵상하기]

예수님은 힘과 권세로만 하나님이심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처음 사역을 시작하시면서 하나님 되심의 권세를 명확하게 보여주셨지만, 그 이후 하나님의 인격성을 드러내시는 모습을 본다. 심지어 귀신들을 쫓아내야 할 대상으로만 여기지 않으셨다. 그의 이름을 물으셨고, 그들의 원하는 요구에 대해서 일부 허락하시기까지 하셨다. 

이런 모습은 하나님의 여유라고나 할까? 하나님의 인격성으로 불러야 할까? 왜 돼지 떼에 들어갔는가는 그리 중요한 이슈는 아닌거 같다. 월등한 힘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여유있는 관심과 인격적 관용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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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정리]

29절. 회당에서 나와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시니

30절. 시몬의 장모가 열병으로 누워 있는지라

사람들이 그 여자에 대하여 예수께 여짜온대

31절.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열병이 떠나고 여자가 그들에게 수종드니라

32절. 저물어 해 질 때에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예수께 데려오니

33절. 온 동네가 그 문 앞에 모였더라

34절. 예수께서 각종 병이 든 많은 사람을 고치시며 많은 귀신을 내쫓으시되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시니라.


[성경내용 정리]

1. 예수님은 회장에서 나와 시몬과 안드레의 집에 들어가셨다.(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2. 시몬의 집에 있던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려있었다. 사람들이 시몬의 장모가 열병에 걸렸음을 급하게 알렸고, 예수님은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다. 열병은 떠나고 시몬의 장모는 예수님과 제자들을 수종들었다. 

3. 해가 저물때 모든 병자와 귀신 들린 자를 사람들이 예수께로 데리고 왔다.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4. 예수님은 각 종 병이 든 많은 사람들을 고쳤고, 많은 귀신을 내쫓았다. 

5. 귀신들도 예수님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님은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질문하기]

예수님의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두드러지게 강조하는 것은 귀신을 내쫓았다는 것이고, 병자들을 고쳤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 예수 그리스도는 복음의 시작이다. 예수님의 공생애가 시작될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은 준비했고, 예수님의 사역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졌다. 귀신을 내쫓는다는 것은 이 땅의 권세로 할 수 없는 일이다. 병을 고친다는 것또한 이 땅의 능력으로는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공적 사역을 시작하심과 동시에 '귀신을 내쫓고', '병을 고쳤다' 귀신에게 명한즉 귀신도 순종했다.(34절. 귀신이 그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셨다) 많은 병자들이 찾아왔을 때 그들을 고쳐주셨다. 예수님이 가지신 권세의 영역과 힘이 이 세상의 권세와 힘과는 다르다는 것을 처음부터 대비해서 보여주고 있는듯 하다. 


[묵상하기]

예수님의 사역에 병을 고치시는 사역과 귀신을 쫓아내는 사역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 땅의 권세과 힘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인류의 문제-질병-를 간단하게 해결해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를 드러내고 있고 인생이 감당할 수 없는 초월적인 영역에서의 고통-귀신들림-에 대해서도 말씀으로 통제하시는 분임을 도드라지게 드러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병도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귀신도 말씀을 쫓아내실 수 있는 분이다. 그러나 복음서에서 보여주시는 것처럼 지금도 우리의 일상다반사로 그 일을 행하실 필요가 없다. 예수님은 그 때로부터 지금까지 이 땅의 모든 질병을 없애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고, 귀신들을 다 잡아들이기 위해서 오신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예수님은 어떤 능력으로 어떤 권세로 이 땅에 오셨는지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예수님은 그 때 행하셨으니까 지금도 할 수 있으시다. 그러나 그 때 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꼭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부분에 오해를 가지고 있으면 예수님은 지금도 병고치고 귀신 쫓느라 정신없이 바쁘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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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 묵상은 아침에 집에서 정리1과 정리2를 하고, 출근하고 나서 정리3 작업을 합니다.  

 

[정리1. 내용을 이야기의 순서대로 정리]

 

1. 유다 왕 아마샤에 대하여
  1) 25세에 예루살렘에서 왕이 되어 29년간 다스림. 어머니는 여호앗단, 예루살렘 사람이다.
  2)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으나, 다윗같지는 못했다. 그의 부친 요아스과 같이 행함. 산당은 여전히 제거하지 못하였으므로 백성들이 산당에서 제사를 드렸다. 
  3) 나라가 그의 손에 굳게 서매, 아버지를 죽인 신복들을 죽였으나 그 자녀들은 죽이지 않음.
   (1) 이는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한대로 한 것이다.
   (2) 자녀로 말미암아 부모를 죽이지 말고, 아버지로 말미암아 자녀를 죽이지 말라는 법대로.
  4) 소금 골짜기에서 에돔 사람 만명을 죽이고, 또 전쟁하여 셀라를 취하여 욕드엘이라 함.
  5) 아마샤가 이스라엘의 왕 요아스에게 사자를 보내 만나서 전쟁할 것을 알림
   (1)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아마샤가 에돔을 이기더니 교만해졌다며 그의 제안을 일축하려 했다.
   (2) 아마샤는 고집스럽게 전쟁을 하려하자,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올라가서 유다를 침.
   (3) 이스라엘 왕 요아스는 벧세메스에서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었다. 
   (4)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다.
  6) 아마샤는 요아스 왕이 죽은 이후 15년간을 다스렸는데, 예루살렘에서 무리가 그를 반역하여 라기스로 도망하던 중 거기서 죽게 된다. 시신은 다윗 성으로 옮겨져 장사하게 된다.
  7) 유다 온 백성이 아마샤의 아들 아사랴를 왕으로 세우고, 아사랴는 엘랏을 건축하여 유다에 복귀시켰다.

 

2. 북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2)에 대하여
  1)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되어 41년 간 다스림
  2) 이스라엘에게 범죄하게 한 느밧의 아들 여로보암의 죄에서 떠나지 아니함
  3) 요나를 통해 말씀된 것처럼 이스라엘의 영토를 회복함(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4)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 또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 아니하셨으므로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심이었다.
  5) 여로보암의 행한 일은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에 기록되어 있다.(다메섹을 회복한 일, 이전에 유다에 속하였던 하맛을 이스라엘에 돌린 일)

 

[정리2. 내용을 재구성하여 자신의 말로]

 

본장은 유다와 아마샤와 이스라엘 왕 요아스 사이의 전쟁에 대해서 그리고 요아스의 아들 여로보암(2)의 활약에 대해서 기술하고 있다.


유다 왕 아마샤는 평균 이상은 되는 왕이었지만, 다윗과 같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평가한다. 그가 나라를 그의 손에 장악했을 때, 그의 아버지를 죽인 자들을 처단한다. 그러나 과도한 처벌을 하지는 않았다. 모세의 법대로 법이 정한 테두리 안에서 처벌하고, 그의 자녀들까지 죽이지는 않았다. 또한 그는 에돔을 정벌하고 셀라를 취하여 얻기도 했다. 아마샤는 국내에 있어서도 국외에 있어서도 자신감을 갖는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감이 교만으로 넘어갔던 것 같다. 무리하게 유다 왕 요아스와 전쟁을 하려고 했고, 결국 요아스에 의해서 아마샤는 사로잡히는 수모를 당하고, 예루살렘 성벽은 일부 허물어졌으며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과 모든 기명이 탈취를 당하게 된다. 나중에 아마샤는 자신의 부친과 같이 반역자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된다. 유다는 아마샤를 대신해서 아사랴(웃시야)를 왕으로 세운다.


북이스라엘은 요아스가 죽고 그의 아들 여로보암이 왕이 된다. 여로보암은 요나의 예언처럼 이스라엘 전역을 확대한 위대한 왕이었다. 그의 영토는 하맛 어귀에서 아라바 바다까지였다. 아람으로부터 다메섹을 빼앗았고, 유다로부터는 하맛을 빼앗았다. 이와 같은 역사를 놓고, 열왕기 기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 구원자가 없으므로 또한 이스라엘의 이름을 천하에서 없이 하겠다고 하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여로보암의 손으로 구원하게 하셨다고 다소 시크하게 평가한다.

 

[정리3.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왕도 법을 지켜야 한다.

 

아마샤는 아마 평점 4(5점 만점) 정도는 맞는 왕이었던 것 같다. 신하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신 아버지를 뒤를 이어 갑작스럽게 왕이 되었지만, 안정적으로 자신의 기반을 잘 닦아 갔다. 하나님께로부터 다위과 같지는 못하지만 괜찮은 왕이라는 정도의 평가를 받았다. 그는 권력을 장악하고 나서 아버지를 죽인 신하들을 숙청한다. 눌러왔던 복수와 심판을 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마샤의 심판은 달랐다. 복수를 위한 복수가 아니라 죄를 묻기 위한 형벌이었다.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것은 아마샤가 법이 제한하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 행했다는 것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그는 죄를 지은 그 당사자만을 심판했지,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형벌을 가하지 않았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이 정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아마샤는 법 안에서 절제있게 권력을 사용한 것이다. 아마샤의 놀라움은 이 절제된 권력 사용에 있었다. 열왕기 기자도 아마샤의 그 부분을 기록함으로 그것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는 것이라 본다.

 

권위를 위한 권력을 필요하고, 기본적으로는 하나님으로부터 이 땅의 권력이 온다. 그러나 그 권력은 언제나 통제가 되고 절제가 되는 권력일 때 정당성을 가지고, 유익한 성과를 얻을 수 있다. 만약, 권력이 법이라는 절차와 테두리를 벗어나 한 개인과 집단 마음대로 휘두르게 된다면 그것만큼 역사적으로 큰 비극은 없는 것이 될 것이다.

 

만약 역사가 진보한다면, 오늘 대한민국은 이와 같은 측면에서의 진보가 필요하다. 법을 무시하고 권력을 사유화하는 권세가들로부터 그 권력을 빼앗아, 법의 통제를 받으면서도 권력을 사용하는 권세자를 세워야 할 것이다.

 

2. 교만은 결국 사고를 치게 되어 있다.

 

아마샤는 국내 정치를 안정적으로 운영했을 뿐 아니라, 국외적으로도 그 힘을 확장해 갔다. 에돔과의 전쟁에서 큰 승리를 경험했고, 국방도 강화하여 에돔과 같은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기도 했다. 셀라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마샤의 마음에 북이스라엘과의 전쟁에서도 이길 것이라는 자신감이 들었나보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다 아마샤의 이런 제안을 우습게 여겼지만, 아마샤는 결국 이스라엘과의 전쟁을 원했고 그 결과는 비참한 패배였다. 왕은 사로잡혔고, 많은 재산을 빼앗겼으며 성도 허물어지고 포로도 잡혀갔다. 아마 이 전쟁을 계기로 아마샤의 지지도는 급격히 하락했을 것이라 본다. 결국 아마샤는 반역자들의 손에 의해 라기스로 도망하는 도중에서 죽게 된다.

 

아마샤의 시작은 좋았다. 다윗까지는 아니어도 다윗과 견주어 비교할만한 왕이었다. 내부적으로도, 외부적으로도 인정받는 왕이었다. 그러나 그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이 도를 넘었다. 교만을 다스리지 못했고 과시하려고 했고, 자신을 더 크게 보이고 싶어했다. 무리한 전쟁을 한 것이다. 그것이 한 순간 아마샤의 인생을 망처버린 것이다.

 

최근 싸이가 강남스타일로 인해 월드스타로 주목받고 있다. 참, 대단한 일이고 자랑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김장훈 씨와의 불화설이 나돌고, 둘 사이가 않좋아졌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정확한 불화의 원인을 모르지만, 마음 한 편 불안한 것은 교만으로 인해 추락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다. 너무 높은 곳을 갑자기 올랐기 때문에 가지게 되는 걱정이다. 아직까지는 그의 모습이 자신감으로 보일 뿐, 교만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섰을 때 우리는 넘어질까 조심할 수 있어야 한다.

 

교만 교만 교만 = 패망 패망 패망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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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서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진행된다. 1,2장은 에스더서 전체의 배경을 설정해주고, 오히려 유대인인 에서더가 왕후가 됨으로 뭔가 유대인들에게 평탄한 길이 열릴 것 같은 평온한 분위기 였지만, 에스더 3장부터는 달라진다. 어두운 구름이 몰려오고 생각지 못한 폭풍이 불어오면서 유대인의 얼굴은 사색이 된다.

 

[정리1. 본문의 내용 중심으로 정리]

1. 아각 사람 하만의 등장(1-6절)

  1) 아하수에로 왕이 아각사람 함므다다의 아들 하만의 지위를 모든 대신 위에 높임.

  2) 대궐에 있는 모든 신하들이 하만에게 절하라고 명했지만, 모르드개는 절하지 않음.

  3) 대궐 문에 있던 왕의 신하들이 모르드개에게 뭐라하자, 모르드개는 유대인임을 들어 거절.

  4) 그들은 이 일이 어찌되나 보기 위해서 하만에게 그 사실을 전하였다.

  5) 하만은 이 일로 모르드개를 죽이는 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고, 모르드개가 유대인이라는 것을 알자 유대인 전체를 죽이려는 결심을 하게 된다.

2. 아하스에로 왕을 설득하여 유대인 멸절 계획을 진행하는 하만(7-15)

  1) 하만은 유대인을 멸하기로 한 날을 제비뽑아(부르, 부림절의 어원)정한 날, 열두째 달로 정함

  2) 왕에게 나아가 왕의 나라에 그 법률이 만민의 것과 다른 나라가 있는데, 이 나라의 백성을 용납하는 것이 합당지 않다고 제안하고 이들을 처벌하는데 자신이 은 일만 달란트를 지원하겠다고 적극적으로 요청함.

  3) 왕이 반지를 빼어 하만에게 주어 모든 결정권을 넘김.

  4) 첫째달 13일에 왕의 서기관이 소집되어 왕의 명령을 따라 각 지방의 관리와 관원들에게 왕의 이름으로 조서를 쓰고 각 지방의 문자와 언어로 역졸을 통해서 전국을 보냄.

  5) 열둘째 달, 아달월 13일 하루에 모든 지역에서 유다인 중 남녀노소를 가리지 말고 진멸하고 재산을 탈취함.

  6) 역졸들이 왕의 명령을 따라 급히 나가 전했고, 수산궁에도 반포가 되어 성이 어지러웠는데, 왕과 하만은 함께 앉아 술을 마셨다.

 

[정리2. 본문을 정리한 것을 다시 나의 구성으로 재정리]

에스더 3장에 와서 악인의 등장한다. 하만이다. 하만은 아말렉 사람으로 유대인과는 전부터 적대적인 관계를 형성했던 민족이다. 그와 같은 유대인의 대적자가 왕 다음의 높은 자리를 차지했던 것이다.

게다가 모르드개는 유대인으로서 하만에게 절하기를 거절했다.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모르드개는 하만에게 무릅을 꿇고 절을 해야 하는 것이 유대인으로서 걸림이 되었던 것 같다.(신적 경배의 태도를 요구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이것이 화근이 된 것이다.

하만과 모르드개 개인의 문제를 넘어서 유대민족 전체에게까지 화를 미치게 될 형편이 된 것이다. 모르드개도 여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일이라 매우 당황했을 것이다.

유대인의 대적자가 된 하만은 왕으로 하여금 유대인 말살 계획을 교묘하게 허락받고는 신속하게 그 일을 진행한다. 그 해 첫째달에 왕의 명령을 보내고, 그 해 마지막 달 13일에 유대인을 멸하기로 정한 조서를 전국으로 급히 보내게 된다.

독자의 관심은 이제 남은 11개월 안에 어떤 극적 전환이 없이는 유대인들이 공식적으로 대적자들에게 학살당하게 될 위협에 빠지게 된 것이다.(독자들의 긴장이 고조된다)

 

[정리3. 묵상과 적용]

1. 실제적인 권세는 사실 대적자가 가지고 있다.

에스더가 왕후가 되었지만, 사실 어떤 권력을 가지고 있지는 못하다. 오히려 권세는 하만이 가지고 있었다. 왕은 하만을 모든 대신들 위에 두었다. 그 만큼 하만은 왕의 신임을 얻었고, 그 만한 경제적 군사적 힘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한다. 왕이 하만에게 모두 절하도록 명령할 정도로 왕은 하만을 신임했고, 하만의 권세는 왕 바로 아래에 있을 만큼 강력했다. 그에 비하면 에스더의 권력이라는 것은 미비하다 못해 무력한 것에 불과하다. 자기 자신의 생존정도만 보존할 수 있는 정도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하만의 권세와 같은 권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요셉이 바로의 총리가 되었듯, 세상에서 2인자의 자리를 차지함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세상에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세상의 판도는 그렇지 않다. 오히려 하만이 가장 높은 권세를 얻게 되고, 모든 유대인들을 죽일 수 있는 권한까지도 손에 얻게 된다는 것이다.

기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올라간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자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죽이려고 해도 우리는 죽지 않는다는 것에 기적이 있다. 힘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데, 세상은 우리에게 어찌하지를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에스더서가 보여주고 있는 메시지의 하나다.

 

2. 나의 신앙의 고백이 공동체의 위협을 가져오게 된다면.

모르드개는 자기 신앙과 양심을 따라서 하만에게 절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로인해 자기 자신만 위협에 처한게 아니다. 자기 민족 전체가 위협을 당하게 된 것이다. 모세가 바로를 만나러 가서 자기 백성을 보내달라고 했을 때, 모세만 위협에 처한게 아니다. 자기 민족이 더 큰 고통 속에 들어가게 된 것이다.

내가 만약 모세라면, 내가 만약 모르드개라면 이 생각지 못한 상황에 어떻게 대처했을 것인가?

종종 우리의 양심의 고백과 결정이 개인의 문제를 넘어 사회문제로 공동체 문제롷 확대되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의도한 것이 아니겠지만 당사자는 상당히 난처할 것이라 본다. 그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그 문제를 일으킨 대상을 봐야 할 것인가? 그 사람만의 책임으로 돌릴 것인가? 생각해 봐야 한다.

바른 신앙을 가지고 있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판단되는 일이라면, 그 사람으로 촉발된 사건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만의 잘못으로 몰아가서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나라도 신앙 양심상 그렇게 했을 것이기에 그렇다.

우리는 이슈가 된 사건 속에서, 그로 인해 나도 피해를 입었다고 해서 그 사람을 무조건 비난할 것이 아니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야 하는 지를 한 마음으로 찾아 봐야 할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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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으로 40년은 성경 내용을 축적하는데 관심을 집중하려고 합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것을 정리하고,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축적하여 내용도 충실하고, 전달하는 것도 효과적이고, 성도들에게 필요한 방식으로 준비한다. 티블로그는 창고면서, 공장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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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에스라 9장입니다. 천신막고 끝에 도착한 예루살렘에 와서 들은 첫번째 보고는 참으로 참담한 것입니다. 에스라의 비통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백성일지라도 죄라는 것은 그 뿌리가 매우 깊어서 쉽게 뽑히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됩니다.

[1차. 본문의 내용을 사실 그대로 재배열 하도록 힘씁니다.]

1. 에스라의 귀환 후에 본 예루살렘의 형편(1-2)

1) 방백들이 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이 이방사람들과 통혼함 고백.

: 그들의 딸을 맞이하여 아내와 며느리로 삼아 거룩한 자손을 그 지방 사람들과 섞이게 함.

2) 그 중에 방백들과 고관들이 이 죄에 더욱 으뜸이 되었다함.

2. 이 소식을 들은 에스라의 반응(3-5절)

1) 속옷과 겉옷을 찢고 머리털과 수염을 뜯으며 기가 막혀 자리에서 떠나지 못함.

2)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두려워 떠는 사람들이 에스라 주변으로 몰려들게 됨.

3) 에스라는 저녁 제사드릴 때까지 기가 막혀 앉아 있다가, 제사 때에 근심 중에 일어나 무릎을 꿇고 기도함

3. 에스라의 회개 기도의 내용(6-15절)

1) 하나님 내가 하나님 뵐 면목이 없습니다. 부끄럽습니다.

2) 우리가 조상 때부터 이런 죄악을 행해서 하나님께서 여러 왕들의 손에 우리를 넘겼습니다.

3) 그런데 하나님께 우리에게 잠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돌아오게 하시고 소생케 하셨는데(이제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울타리가 있게 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행하신 후에도 우리가 주의 계명을 또 저버렸사오니 이제 무슨 말씀을 하오리이까?(10절)

4) 또 다시 이방인과 통혼함으로 말미암아, 더럽게 하였으니 우리 중에 주 앞에 한 사람도 감히 서지 못하겠나이다.

 

[2차. 정리한 내용을 이제 자신의 것으로 다시 정리합니다.] 본문에서 강조하는 메시지의 크기와 집중도에 따라 재배열한다고 보면 좋겠습니다.

1. 아닥사스다 왕의 호의로 2차 귀환한 에스라. 어려움을 극복하며 예루살렘으로 왔지만, 예루살렘에서 들은 그곳의 형편은 참담한 것이다. 성전만 회복되어 있지, 이들의 삶이라는 것은 전에 조상들의 모습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우상 숭배와 통혼으로 인해 하나님의 땅과 백성을 더럽혔던 선조들의 죄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 숭배의 모습은 사라졌지만, 여전히 이들은 이방 여인을 아내와 며느리로 맞아들인 것이다. 더욱 심각한 것은 그 일을 방백들과 고관들이,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이 앞서서 행하고 있는 것이다.

2. 이런 현실 앞에서 에스라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옷을 찢고, 자기의 머리털과 수염을 뜯는 것 말고, 자리에 맥없이 앉아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에스라는 자리에서 간신히 일어나 여호와를 향하여 손을 들고 기도한다.

3. 기도의 내용이란 무엇인가? 기도하기에도 부끄럽습니다. 감히 부끄러워서, 죄송해서 할 말이 없습니다. 이전의 선조들의 죄로 진노하셨다가, 자비를 베푸셔서 그 중에 남은 자만 다시 돌아올 수 있는 은혜를 주신 것인데 그 은혜를 받은 우리가 또 다시 그와 같은 일을 백주대낮에 하고 있으니.. 하나님 할 말이 없습니다. 이것이 에스라의 기도 내용이다.

4. 아, 어쩌란 말이냐? 도대체 이 민족은 어쩌란 말이냐? 한두 번도 아니고, 다시 한 번 살려달라고 기도조차 할 수 없다.(왜? 살려주면 뭐하냐 또 그렇게 안 된다는 법이 없으니...)

 

[3차. 묵상 및 적용]

1.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함에 있어서도, 일반 백성들이 지는 죄와 방백과 고관들이(제사장과 레위인까지) 주도적으로 죄를 짓는 것은 상당히 차원이 다르다.(2절)

  백성들이 죄를 짓는 경우라도, 그것을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고관과 종교 지도자들이 바르다면, 백성들의 죄는 시정되거나 충분히 견제 될 수 있다. 따라서 쉽게 확산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관과 종교 지도자들이 그 죄에 있어서 으뜸이 된다는 것은 그 죄를 막을 제어장치가 전혀 없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런 사회는 자생적인 회복이 불가능하다. 이런 사회는 결국 민초들의 폭동으로 전복되는 결과 말고는 다른 변혁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것이 역사적 사실이 아닌가?

  그런데, 지금 에스라는 귀환한 공동체에서 이런 모습을 본 것이다. 권세는 하늘로부터 온 것이다. 그리고 그 권세를 맡기신 하나님의 뜻은 선을 장려하고 악을 제어하라는 것이다. 그런 기본적인 틀 아래에서 우리는 권세에 순복해야 한다. 그러나 권세가 악을 조장하고, 불의를 일삼으며 오히려 정의를 왜곡하는 자의 편에 서서 의를 버리고, 거짓을 조장한다면... 도대체 그 권세을 따라야 할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가? 그 권세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그와 같은 권세도 하나님이 이 세상을 위해서 주셨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롬 12장에서 말하는 정당한 국가 권세에 대한 말씀이 과연 여기에 그대로 적용될 수 있는 것인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지도층의 타락, 특히 불의를 조장하고 거짓으로 약한 자의 작은 것까지 빼앗아 자신의 배를 불리거나, 그것을 돕는 권세는 브레이크 없는 덤프 트럭과 같다. 

 

2. 귀환한 백성들도 역시, 우리 안에 있는 뿌리깊은 죄

 귀환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다룬 에스라나 느헤미야나 처음 장면과 달린 마지막 장면은 우울하다.  구별되고 선별된 백성이었지만, 결국은 선조와 똑같은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렇게까지 하나님께서 도우시고 회복시키셨는데도 그리고 그 중에서 엄선된 사람들, 엄선된 백성들인데도 결국은 또 원래의 모습(죄의 지배를 받는 모습)으로 돌아와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스라가 다시 노력하고, 느헤미야가 다시 노력하지만 그 이후가 어떻게 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이제 혈연적으로 남겨진 백성만으로는 진정한 회복을 기대할 수 없다. 이들도 답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스라엘을 회보시킬 것인가? 하나님의 언약은 어떻게 성취될 수 있는 것인가? 돌아온 유다 백성도 아니라면, 에스라도 느헤미야도 아니라면 누가 모세의 뒤를 이은 선지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회복시킬 것인가? 

이런 궁금증과 두려움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시는 것은 아닌가 본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의 언약백성들이 가지는 질문들에 대한 답으로 세로은 세계를 열고 등장하시는 것이다. 

 

-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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